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15화 (16/24)

15

벤은 덩굴 줄기 사이를 지나 서늘한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자신이 침입자 같은 기분이 들었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텅 빈 눈들은 마치 여기에 속하지 않은 인물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확실히 그는 이곳에서 이방인에 속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어떤 여자를 따라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조차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질리언이 엄청난 걸 발견했단 말인가?

여왕의 심장이 없다고 해도 여기 존재하는 석상만으로도 고고학계는 물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거고, 역사학자들도 안자르의 의미를 밝히려고 군침을 흘리며 덤벼들 것이다.

이곳에는 단단한 바위가 발 밑에 있을 뿐, 위장을 하기 위한 덫이나 바닥의 균열도 없었다. 돌로 조각된 웅장한 밀실로 내려가자, 이곳을 영원히 수호하는 여전사들이 양쪽에 일렬로 쭉 서 있었다.

밀실의 저 편 구석에 돌로 조각된 관이 하나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로 덮여 있었지만 조용한 밀실은 이 자체로도 굉장한 것이었다. 관 위쪽 벽장에는 얕은 양각으로 새겨진 어떤 남자의 조상이 있었고, 또한 물건들을 안치하는 장소에는 또 다른 수호의 상징이 있었다. 그것은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먼지에 싸여 빛을 발하고 있었고, 손전등으로 비추자 영롱하게 내뿜는 붉은 빛에 그는 숨을 멈추었다.

여왕의 심장!

그의 주먹보다 컸으며, 인간의 심장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바로 앞에서 행운이 쾌재를 부르며 손짓하고 있었다. 브라질에 살면서 다이아몬드에 대해 주워 들은 바로, 이것은 확실한 다이아몬드 같았다. 석류석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심오한 빛과 깊이가 있었던 것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그대로라 할지라도 굉장한 크기였다. 대부분의 다이아몬드는 작으면서도 엄청난 가격을 호가했다. 강하면서도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는 이런 다이아몬드는 매우 드물었다. 그가 듣기로 붉은 빛의 다이아몬드는 아주 희귀하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깊고 풍부한 빛을 맘껏 발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컬리넌의 다이아몬드(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최대의 다이아몬드로, 원석의 무게가 3,106캐럿이다)보다 컸다. 아니 훨씬 클지도 몰랐다. 이 보석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명만큼 가치가 있을까? 케이츠가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죽음의 향연이 뒤따를 것이다. 그는 케이츠와 두트라를 죽여야 하거나, 혹은 자신과 질리언은 물론 나머지 일행들의 목숨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석의 존재를 혼자만 알고 있으면….

무덤 뒤로 비집고 들어가 주위를 비춰보자, 이 밀실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사실을 확신했다. 아니, 뱀 한 마리가 구석에 똬리를 틀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쥐를 마저 잡아먹고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작대기로 뱀을 건드리자 놈은 스르르 달아났다. 그는 위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관 위쪽 벽장에 안치된 여왕의 심장을 꺼냈다.

보석은 놀라우리 만치 무거웠다 짐작으로 500그램은 족히 넘으리라. 그는 먼지를 후 불어 보석을 바지에 닦았다. 그러자 깊고 심오한 불꽃과도 같은 광채가 그를 매료시켰고, 영롱한 심해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보석은 이때까지 그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고, 대부분의 다이아몬드가 차가운 반면 이건 따뜻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질리언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여왕의 보석은 필요 없었다. 저기 있는 석상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부를 얻으려고 안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왕의 심장을 가지고 마나우스로 귀환한다면 이걸 브라질 정부에 넘겨줄 것이다. 이 보석은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돈줄이었다. 배를 사서 임대 회사를 세우거나, 전세기를 사서 사업을 시작할 만도 했다. 아마존에는 비행기로만 갈 수 있는 지역이 많았으므로 그는 몇 년 전에 비행사 자격증을 땄고, 그 분야의 가능성을 내다봤던 것이었다.

그리고 질리언이 평생동안 바라던 걸 실컷 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많은 걸 원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는 게 가장 행복한 여자에게 뭘 사 줘야 하지? 쓰레기 더미를 산만큼 쌓아줘?

양심의 가책 따윈 없었다. 그는 보석은 윗도리 안에 넣고, 보석이 놓여 있던 바닥을 후 불어 사려 깊게 먼지를 다시 고르게 해서, 최근까지 여기에 뭔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이건 무덤을 도굴하거나 유물을 훼손하는 것하곤 차원이 달랐다. 설령 이 과정에서 어떤 멍청이와 마주치더라도 이래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면 반대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의 생명은 벤이 보석을 얼마나 잘 숨기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젠장,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왕의 심장만큼 위험한 물건은 없었다. 금, 은을 비롯한 다른 보석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괜찮군. 더 자세히 조사해보는 게 낫겠지만, 이곳을 눈에 띄게 어질러 놓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점검까지 세심히 살펴본 후, 관 뒤에 남은 자신의 발자국을 말끔히 없앴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질리언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불안을 다른 사람이 눈치채게 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벤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보일 게 틀림없었다. 질리언에게 석상들에 대해 말해줄 때, 그녀가 흥분할 걸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짙은 광채를 내뿜으며, 뭔가에 푹 빠진 황홀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는 이 모습에 매료된 채, 자신이 그녀와 사랑을 나눌 때도 이 표정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명성을 회복하고 그릇 파편이나 유골을 찾기 위해 쏟던 그녀의 정열이 그를 향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이곳의 영원한 수호자인 석상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갔고, 입구를 나타내는 아치형의 희미한 불빛을 향해 발소리를 울리며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에 보석을 윗도리에 숨긴 채 캠프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큰 물건이었다. 대신 그는 보석을 세심하게 손수건으로 싸서 아까 손전등을 숨긴 곳에다 묻어 놓았다. 나중에 다시 파내어 더 나은 곳에 숨기면 되지, 뭐.

그가 돌아왔을 때, 질리언은 텐트 밖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즉시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요?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건 당신이 만든 규칙이 아니던가?」

케이츠가 대뜸 물었다. 벤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대신 질리언에게 말했다.

「사원을 찾았어.」

그녀는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며 펄쩍 뛰었다.

「어떻던가요? 대단하던가요? 말해봐요, 벤!」

질리언이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놓았다.

「질리언, 당신 눈으로 직접 봐야 믿을 수 있을 거야.」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모두 주위에 모여들었고, 케이츠는 벤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뭘 찾아냈지?」

「사원과 석상, 뭐 그런 것들이었소.」

그가 다시 말했다.

「석상….」

케이츠는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딴 건 없었나?」

「내 짐작으론 관 같은 것도 있던데. 보물 같은 건 없었소. 혹 묻고 싶은 게 그거라면 말이오.」

벤의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는 질리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녀에게 보석이 없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크리스마스를 맞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껴안고 빙 돌렸다.

「보고 싶소? 서두른다면, 갔다가 어둡기 전에 돌아올 수 있어.」

그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내려서려고 꼼지락거리며 즐겁게 재잘거렸다.

「사진기를 가져가야죠. 기록장도 텐트 안에 있으니까. 금방 가져올게요. 그럼, 준비는 다 된 거죠?」

「그래, 그래, 알았어.」

그가 달래듯 말했다.

「진정해. 사원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잖소. 계속 말해줘도 듣지 않는군.」

황급히 서두르는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모두, 심지어 두트라까지 그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긴칼로 길을 말끔히 치우면서, 다음 번에 올 때를 대비했다.

「어떤 종류의 석상이지?」

릭이 물었다.

「작은 건가?」

벤은 그가 뭘 기대하는지 궁금했다.

「순금으로 만든 오스카상 같은 걸 기대했나? 아니, 아주 커. 게다가 돌로 조각되어 있지.」

「아하!」

릭은 확실히 실망한 것 같았다.

「많이 둘러본 건 아니라서, 밀실 벽 쪽에 더 작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보이지도 않던걸.」

벤이 말했다. 맙소사, 제발 더 작은 물건이 없어야 할 텐데. 그건 벤이 무릅써야 하는 또 다른 위험을 의미하며, 사원에 대한 질리언의 예측이 빗나가는 건 그의 계획에도 없었던 것이다.

기둥들을 식별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자, 질리언은 숨을 들이마시며 입술을 깨물었다. 벤은 그녀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팔을 그녀의 허리에 두르고,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비센테가 긴칼로 입구를 덮은 덩굴들을 베어내자 초록색 뱀 같은 줄기들이 발 밑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둥근 불빛이 밀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벤은 손전등을 켜고 질리언을 안으로 인도했다. 나머지 일행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뒤따랐다.

그는 2미터 높이의 석상들을 따라 불빛을 쭉 비추었다. 질리언은 그의 팔에 매달렸고, 그녀의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너무 조용했고,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석상들을 응시했다.

페페와 유로지오는 빳빳이 굳은 채 돌로 만든 여전사들을 보고 옛날 이야기를 기억에서 다시 떠올리며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거대한 밀실과 침묵에 쌓인 수호석상들의 엄숙함에 압도되어 모두들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존경이란 것도 모르고 고대문화에 대해 아예 관심 없는 릭조차 어떤 장엄함을 느꼈다. 위험한 기색은 없었지만, 그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성전을 침범한 기분이었다.

조르지는 어느 석상의 발 부분으로 다가가 자세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면서 석상을 만져보고는 돌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죠?」

마침내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 찬 목소리로 그녀가 작게 물었다. 조르지는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지만, 넓은 홀 안에서 울리는 소리는 아주 크게 들렸다.

질리언은 여전히 떨리는 몸을 가눌 수 없어 벤에게 기대어 있었다.

「아마존의 여전사들이 틀림없어요.」

그녀 역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듯 확실치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벤은 그녀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모든 각도를 살펴보고, 이 석상들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를 모든 관점으로 고려해봐야 했다. 여전사들이 어떻게 이곳 남미 정글까지 오게 되었을까? 아마존의 여전사들은 전설일 뿐이었다. 여전사 부족은 1년에 한 번 근처의 남자 부족과 만나 자손을 이어갔고, 트로이의 전쟁에서 트로이편에 서서 싸웠던 걸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마치 아틀란티스에 대한 증거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듯 말이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여기 증거들이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곳에는 그들의 존재를 추측하기 위한, 더 이상의 논리적인 가정은 필요 없었다. 고대 그리스 전설이 어떻게 이 정글 깊숙한 곳까지 관련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당시의 대부분 부족들은 백인을 본 적도 없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깥 문명에 노출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 석상들은 어떻게 그리스 전설에 근거를 둘 수 있을까? 혹시 비슷한 전설일 뿐이라면? 여전사 부족들이 양쪽 대륙에 동시에 존재했었단 말인가?

아무튼 그리스 이야기가 안자르에 근거를 둘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질리언은 안달이 났다. 안자르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마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래 전, 즉 수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방랑자들이 우연히 여전사들과 만났고, 이 전설의 씨앗들을 자신의 고국으로 가져갔을 지도 모른다.

「오, 맙소사!」

그녀가 속삭였다.

「그래, 여길 처음 봤을 때 나도 비슷한 걸 생각했었어.」

벤이 말했다.

「관은 저 쪽 끝에 있어.」

그가 손전등으로 길을 안내했지만, 밀실이 너무 길어 관까지 빛이 닿지 않았다.

일행들은 우르르 떼를 지어 돌로 만든 거대한 복도를 내려갔고, 조용히 늘어서 있는 석상들은 물론 밀실의 규모만으로도 위축되어 있었다. 아직도 그들은 아주 작은 소리로 서로에게 말을 건넸다. 큰소리는 신성한 곳에 누가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무덤에 도착하자, 각자의 전등 불빛들이 무덤과 그 위에 있는 조상 위로 모아졌다. 질리언은 돌에 새겨진 남자의 모습을 보고 숨이 막혔다. 강하고 잘생겼으며 신중하고 게다가 죽음이라는 영원한 잠에 빠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바로 이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추호의 망설임이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린 남자였다. 그리고 여왕은 평생 이 남자만을 생각하며 슬퍼했고, 이 이야기가 전설이 된 것이다.

그 전설에는 여왕의 무덤이 어디 있는 지에 대한 단서는 없었지만, 여왕은 관 위에 사랑하는 이를 영원초록 지켜주려는 전사의 심장이자, 여왕의 심장을 놓아두었다고 했었다.

남자의 관 위 벽장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인 채 텅 비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벤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강한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여왕의 심장이 없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거대한 붉은 다이아몬드는 그들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소지가 있었다. 케이츠는 석상은 물론 자신들이 고고학계에 일으킬 큰 파문에 대해서도 관심없을 것이다. 이것들은 그냥 돌로 만들어졌고, 더구나 그 상징적 가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유물적 가치도 없으며, 안자르란 대단치 않은 곳에서 나온 쓸데없는 물건들일 뿐이었다. 석상 하나만 해도 그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 아마 5백 킬로그램 이상은 족히 나가기 때문에,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옮겨간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나중에 이곳의 존재가 보도되고 역사적 배경이 널리 알려진다면, 아마 모나리자 그림처럼 부르는 게 값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세상의 이목과 보존상태에 따라 가치도 달라질 수 있었다.

케이츠는 손전등으로 바닥 여기저기를 비춰보더니, 벤이 아까 남겼던 발자국을 찾아냈다. 그러고 나서 관으로 걸어가 그 뒤쪽을 살폈다.

「뱀 조심해.」

벤이 대뜸 말했다.

케이츠는 관 뒤를 비집고 들어가, 손전등으로 벽장 위를 세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먼지를 훑어보았다.

「여왕의 심장이 분명히 있긴 있었군요.」

질리언은 바로 설 수 있을 정도로 다리에 힘이 생기자, 벤에게서 떨어지면서 말했다. 벤은 마지못해 그녀를 풀어주면서 한 손을 계속 그녀의 등에 살짝 얹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전에 사라졌는지,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네요.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없는 걸로 보아 안자르 사람들이 떠날 때 가지고 간 것 같아요.」

「젠장, 이 빌어먹을 무덤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이건 왜 가져가지 않은 거야?」

케이츠가 따졌다. 그는 지금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난폭한 성질을 용케 잘 참고 있었다.

질리언이 관을 살펴보았다. 길이는 2.5미터 이상 될 것 같았다.

「무게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동굴을 통과해서 이걸 옮겨가는 건 불가능했겠죠. 제가 본 바로는, 안자르는 멸망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곳을 떠난 것 같아요. 각자 짐과 보물들을 가지고 말이죠. 그들이 남겨놓은 거라곤 그릇 몇 개와 이 사원이 전부 같아요.」

「이 돌무덤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케이츠가 안타까운 듯 소리쳤고, 한재산 모으려던 꿈이 무산되고 잡동사니들만 남았다는 걸 깨닫자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 빌어먹은 석상들은 뭐지?」

「이 탐사가 일종의 도박이라는 건 다신도 알았잖소. 원래 밀림에서 확실히 믿을 건 하나도 없소.」

벤이 냉정하게 말했다.

케이츠는 폭발 직전처럼 턱의 근육이 떨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쏟아 부은 돈에 대해 새앆하자 미칠 것만 같았다. 빚진 돈과 돈을 빌려준 사람들….

그는 관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안에는 뭔가 있을 거야.」

그가 말했다. 질리언은 관을 도굴하려는 의도를 깨닫자 분명히 말했다.

「어림없어요.」

그녀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찾을 만한 가치 있는 거라곤 남아 있지 않아요. 금도, 은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약간이나마 억누르고 있던 성질을 다시 터뜨렸다.

「빌어먹을, 틀림없이 뭔가 있을 거야!」

「주위를 둘러봐요. 은도금이라도 보이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보물이 있었다 해도, 안자르 사람들이 가져갔을 걸됴. 없어져버렸다니까요. 아마 안자르 사람들은 잉카 문명으로 흡수되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잉카 문명이 아주 풍족하게 발달했을지도. 어떻든 간에 지금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멍하니 기가 다 죽은 것 같았다.

「틀림없이 있을 거야.」

여전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케이츠는 돌아서서 전등 빛을 크게 흔들거리며 입구 쪽으로 서둘러 가버렸다. 두트라가 그 뒤를 따랐지만, 나머지는 자신들이 발견한 것에 압도된 채 사원에 남아 있었다.

「사진은 찍지 않을 건가?」

벤이 웃으며 재촉했다. 놀랍게도 그걸 잊어버릴 수 있다니1 그녀는 사진기를 더듬으며 찾았지만 손이 너무 떨려 사진기를 계속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못하겠어요.」

결국 자신에게 화를 내며 말했고, 힘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 떨려서요. 내가 기록하는 동안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그가 사진기를 건네받자 그녀는 작동법을 설명했다. 누구나 작동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능력 밖이었다. 벤의 일이라곤 대상을 정하고, 단추를 누르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 전자동 섬광과 초점이 그 외 부분을 알아서 처리했다.

질리언이 팔 아래에 대강 끼운 손전등의 불빛으로 급하게 기록을 갈겨쓰는 동안, 벤은 관을 향해 셔터를 몇 번 누르고, 석상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석상들은 놀랍게도 전부가 약간씩 다른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이 점으로 미루어, 이 석상들은 아주 활발한 여자들의 모습이며, 아마 여자들은 실제로 전사의 무덤을 지켰던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각자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만든 석상은 전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행복하오?」

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그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행복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당신이 좋아할 거라 예상했지.」

「이런 게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이곳은 엘진 대리석(Elgin Marbles ;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조상)보다 더 유명해질 거예요.」

그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웃었다.

「어떤 사람이 공깃돌 수집에 관심이 있다고?」

그녀는 키득댔다.

「대리석 석상요. 공깃돌이 아니고.」

「그렇지, 그래야 말이 통하는군.」

그가 뻔뻔스럽게 씩 웃었다.

「세뇨르, 세뇨르, 여길 보세요.」

조르지가 급히 불러 가보니, 그는 손을 바위 틈새에 넣고는 힘껏 당기고 있었다.

「세뇨르, 입구 같아요.」

모두 조르지의 발견을 살펴보려고 모여들었을 때, 세차게 뛰는 심장소리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틀림없이 꼭대기가 둥근 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지점을 잡고 힘껏 당겨봤지만, 돌문은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이번엔 밀어봐요.」

그녀가 제안했다.

벤은 양손을 오른편 가장자리에 대고, 그녀의 말대로 밀어보았다.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왼쪽을 밀어보았다. 돌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과장된 표정을 한번 짓더니,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었다. 천천히 좁은 돌문이 삐걱거리며 열렸고, 돌과 돌이 맞부딪치면서 저편에서 서늘한 공기가 불어오고 있었다.

「다른 통로로군.」

벤이 손전등으로 컴컴한 입구를 비추면서 말했다.

「그럼, 출입구는 하나가 아니란 얘기로군.」

「들어갈까요?」

그녀가 물어보았다.

「지금은 안 돼. 시간이 없소. 사진을 다 찍고, 어둡기 전에 캠프로 돌아가야 해.」

해질 무렵이 되자 일행은 사원을 떠났다. 릭이 끝까지 남아서 이곳에 관심을 보이자 질리언은 놀라웠다. 릭은 그녀의 바로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찾던 게 이거란 말이야?」

그는 잠시 침묵한 후에 말문을 열었다.

「그래, 안자르에 대한 증거.」

「그럼, 우리 아버지는 괴짜가 아니었군.」

「물론이야. 머릿속이 복잡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현실적이었어.」

「앞으로 어쩔 셈이야?」

「이 사진들을 현상해서 브라질 정부에 알려야지. 이게 아버지의 오명을 씻어줄 거야. 고고학자들이 이곳으로 곧 몰려들 테지, 우리 아버지의 끈질긴 노력 덕분으로 말이야.」

릭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 난 네가 이곳을 발견해서 아주 기뻐. 비록 보물 같은 게 없더라도 말이야.」

「보물은 있어. 단지 오빠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말이야.」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응, 맞아.」

릭은 자신이 말하고자 한 걸 모두 말했는지, 이제 뒤로 처졌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릭을 구한 이후로 동생을 향한 릭의 분노는 사라졌지만, 마치 이방인들이 억지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릭은 아직도 그녀를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릭이 이제는 그녀에게 호되게 굴거나 미워하는 것 같지 않아 기뻤지만, 결코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들은 판이하게 달랐고, 하물며 어린 시절에 함께 나눈 공통된 기억조차 없었다.

셔우드 교수가 질리언의 엄마랑 재혼할 때 릭은 격렬히 반대했었고, 그래서 가족과 실제적인 대화도 없이 새엄마와 기본적인 대화만 나눌 뿐이었다. 나중에는 질리언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질리언이 철들 무렵이 되었을 때 릭은 이미 독립해서 나가버린 뒤였다.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릭은 케이츠에게 그들이 찾은 새 통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으나, 케이츠는 아예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릭에게 닥치라고 윽박지르며 텐트에서 쫓아버렸다. 릭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카드 판을 벌이고 있는 무리에게 가버렸다.

질리언은 이곳 석상들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일일이 조사하느라 깊은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파장을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곳은 완전히 얼토당토 않는 비현실적인 이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어쨌든 석상은 실제로 존재했고, 그녀가 직접 보고, 게다가 사진도 찍었다. 아마 이 주변을 더 세세하게 탐사한다면 안자르에 대한 더 많은 것이 밝혀질 테고, 이곳의 역사도 알게 될 것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여길 떠난 것이며, 또 어디로 갔을까? 이 부족은 정말 여자로만 구성되었는지, 또한 어떤 연유로 여자끼리만 살았기에 여자 석상들만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남자부족과 관계를 가져 아기를 낳았다면, 그 남자들은 누구였으며 어디에 살던 남자들일까? 안자르가 사라진 건 그 남자들 탓이었을까? 두 부족이 단순히 합친 거라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녀가 텐트로 물러난 건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각이었지만, 생각은 끝없이 맴돌고 있었다. 남자들은 아직도 바깥에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샐 것 같았지만, 곧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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