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14화 (15/24)

14

릭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분명해?」

실망한 어조가 역력했다.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녀가 야무지게 대답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알아봤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우뚝 솟은 거석의 벽들은 벌집 모양의 사발지형을 이루었고, 입구는 오래 전에 정글로 뒤덮여졌지만, 그녀는 덩굴이 자란 모양과 조화를 이룬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 네가 얘기하던 보물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가 캐물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보물이 있다면,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우리가 이곳을 찾은 유일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말이지.」

케이츠가 얼굴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보물이 있다면 이라니? 도대체 우리가 왜 함께 왔다고 생각하는 거요? 만일 우리를 속인 거라면….」

벤이 갑자기 그녀 편을 들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뭐가 있었는지 또 지금은 뭐가 남아 있는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잖소.」

그의 어조는 평온했지만 케이츠의 말을 멈추게 하는 협박이 깔려 있었다.

「백년 동안이면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소.」

「이제 우린 뭘 하지?」

릭이 물었다.

「캠프를 세워야지.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오. 분명한 건 이곳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요.」

질리언은 탐험을 시작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벤의 말이 옳았다. 우선 주위의 우거진 식물들을 깨끗이 베어내어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들이 무심코 고대 유물을 파괴할지도 몰라 그녀는 조바심을 쳤지만, 덤불과 덩굴 그리고 나뭇가지들을 제외하면 반짝이는 수풀 밑에 나뒹구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곳에 큰 거목들이 없는 게 아주 의심스러웠다. 풍부한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다소 굵은 식물들도 거대하게 자란 정도는 아니었다. 이 기이한 현상이 무엇 때문인지 간에 이점은 안자르의 신비였고, 그녀는 이 비밀을 캐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텐트를 설치하자, 그녀는 아무리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지만 이건 너무 멀다고 느꼈다. 사방이 벽으로 보호된 이곳의 지형 덕택에 충분히 아전한데도 말이다. 게다가 벤은 그녀의 텐트를 자기 텐트 바로 옆에 세웠다.

벽 쪽으로 가까이 가면 바람이 통할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은은한 미풍이 계속적으로 불어오고 있었고, 공기는 놀라우리 만치 편안하고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밤에는 추울 것 같았다.

「모두 당신의 움직임만 주시하고 있으니, 제발요.」

그녀가 애원했다.

「그릇이나 냄비 같은 게 이 근처에 뒹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사실 유물은 몇 백년 동안 쌓인 먼지로 뒤덮여 있을 법도 했지만, 그녀는 땅에 그냥 나뒹구는 유물들을 흔히 봐왔었다.

캠프를 세운 후에도 여전히 훤한 대낮이었다. 벤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살짝 감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산책 좀 할까?」

그녀는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왜요?」

「할 얘기가 있어.」

「뭐죠?」

그녀가 캐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당신은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의심이 많아. 그냥 따라와요. 알겠소?」

「알았어요.」

마지못한 대답이 나왔다.

「뭔지 모르지만 내가 무턱대고 찬성할 거라는 생각은 말아요.」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언제 그래 본 적이라도 있소?」

빽빽한 덤불 숲을 걸어가는 건 쉽진 않았지만, 벤이 긴칼로 길을 터주었다. 몇 분이 지나자 질리언이 물었다.

「무슨 일이죠? 혹시 그냥 산책이나 하려는 건가요?」

그는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다.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괘 멀리 와 있었지만, 혹시 누군가가 숲에서 엿들을 수도 있었다.

「상황이 점점 난처해지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케이츠와 두트라를 조심하라고 조용히 일러두긴 했지만,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 흩어져 가능한 멀리 도망가라고 말했소.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닌 게 분명해. 당신이 붉은 보석 따윌 찾아 내지 않는 한 말이오. 하지만 금딱지라도 발견하면 그 즉시 우릴 죽이려 할 거야.」

「알겠어요.」

그녀는 실제로 스톤 시티를 발견한 지금 그 뒷일을 예상할 수 있었고, 벤에게도 말했듯이 이곳이 이미 약탈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안자르가 망한 이후 외떨어진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건 그들이 처음인 것 같았다.

「지금부터는 장난이 아니오. 항상 권총을 지니고 있어야 해.」

「그럴게요. 당신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통로로 빠져나가는 거야. 최대한 힘껏 달려, 절대 멈추지 말고. 밖으로 나가면 내가 당신을 따라잡을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잡히진 마. 이곳은 입구가 하나뿐이라 아주 불안하단 말이야. 젠장, 다른 입구를 찾기나 바래야지.」

「아마 없을 거예요. 이 통로 덕택에 안자르가 꼭꼭 숨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이 통로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셈이지. 안 그렇소? 결국 안자르는 망했잖소?」

그가 따져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요.」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눈물을 비치기 시작했다.

「아빠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특이한 부족이 여기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 거예요.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죠.」

「아마 질병 때문이겠지. 그들이 유럽인들과 접촉했다면 말이오.」

그는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 눈썹을 모으며 꿈틀거렸다.

「아니면, 정말 여자끼리만 살았다면 지겨워 죽었을 거야.」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가끔씩 당신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내 몸과 접촉하고 싶을 땐 아무 때나 신호만 해, 자기. 언제라도 기꺼이 몸을 던질 테니.」

그녀를 아주 불안하게 만드는 그의 미소는, 사냥감을 막 포착한 포수처럼 자신만만해했다.

「당신 모습이 지금 어떤지 알아요?」

그에게 눈을 흘기며 그녀가 물었다.

「몰라. 어떻게 보여? 정력이 넘치는 종마? 당신 인생을 밝혀줄 등불? 아님 꿈속의 왕자님?」

「천박해요.」

그녀가 또렷하게 말하고 걸어가자, 등뒤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지시대로, 다음날 스톤 시티 탐험이 아주 신중하게 시작되었다. 무성한 덤불 숲을 제거한 후, 그들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고, 차츰 작업이 진행될수록 안자르의 본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아킴이 깨어진 돌조각이 널린 곳을 발견하였고, 세심하게 다시 살펴보니 분수대의 일부 같았다. 질리언은 모든 각도에서 사진도 찍고, 꼼꼼이 기록했다.

그릇 파편들도 보이기 시작하자, 질리언은 연신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댔다. 그녀는 지금 무한한 행복의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역사를 새로 쓰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지구상에서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 사람들의 삶을 발견했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직 칠이 벗겨지지 않은 도기 조각을 관찰하면서, 그것이 수백 년 전에 만들어졌고, 매일같이 사용되면서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손에 흘러간 세월을 쥐고 있는 것 같았고, 신기하게도 편안하기까지 했다. 인간은 죽어도 삶의 흔적은 계속 남는 것이었다.

나흘 후, 얄궂게도 마을까지 가는 첫 경사로를 찾은 건 두트라였다. 그는 부서진 도자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에 벤과 부딪힌 후로는 묵묵히 거대한 덤불 숲 제거하는 일에 야만적인 힘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공격적인 욕구를 육체적 노동으로 분출하면서 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나 덩굴에다 대신 화풀이를 해댔다.

수백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경사로는 이제 부서지기 시작한데다 자갈로 덮여 엉망이었지만, 길을 잘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곧바로 자갈을 치우기 시작했고, 질리언은 작업을 천천히 하도록 연신 주의를 주며 잔소리를 해댔다. 경사로는 사발지형을 빙 두르고 있는 넓은 대로까지 뻗어 있었고, 이 대로에서부터 마을이 시작되었다. 더 위쪽에 다른 마을이 있는 걸로 보아, 경사로들은 각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톤 시티는 수천 명이 거주할 수 있게 방사형으로 지어져 있었다.

대로는 경사로와 마찬가지로 자갈에 묻혀 있었다. 그 자갈 밑에는 수천 점의 유물이 있을 것 같았지만, 일단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바로 이 집에서 안자르 사람들이 살았고 한때 최대의 번영을 누렸었다. 가치에 대한 그녀의 개념은 다른 이들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안자르를 몸소 체험하는 건 억만금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집안은 역시 동물들 차지였다. 새들이 둥지를 틀고, 각양각색의 생물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 은둔처를 사용하고 있었다. 첫 번째 집을 조사하는 동안 모든 게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더 없이 훌륭했을 거라고 그녀는 아쉬워했지만, 사실 이렇게 어수선한 게 당연한 이치였다.

첫 번째 집은 사방 2.5미터 정도로 작았고, 조심스레 자갈을 걷어내봐도 이 집의 용도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건 없었다. 첫 조사에선 최소한의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곳에는 요리의 흔적이나 심지어 요리도구로 쓰인 그릇 비슷한 것도 없었다 화로나 난로, 혹은 그을음이나 숯 같은 것도 없었다. 그녀가 발견한 거라곤 작은 뱀 한 마리가 전부였고, 작대기가 놈의 보금자리를 휘젓자 이내 꽁무니를 빼며 도망쳤다.

실망하기는 아직 일렀다. 집들은 수백 개나 남아 있었고, 모두 텅텅 비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찾아내는 것이 고고학자의 일이라면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그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만족이나 희열 따위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 집을 사진으로 남기고 일지에 기록했다.

벤이 고개를 내밀며 초조하게 말했다.

「혼자서 여기저기 찔러보지 말아요.」

「왜요? 뱀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젠장, 뱀이 있는 걸 봤으니까 그렇지. 당신만 아직 보지 못했군.」

그녀는 계속해서 작대기로 잡동사니를 휘젓고 있었다.

「물론, 나도 봤어요. 당신이 들어오기 직전에 한 소심한 남자는 도망가던데요.」

벤의 턱이 굳어졌고, 잠시 눈빛이 번쩍였다. 그리고는 긴장을 풀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 방면에 전문가라는 건 잊지 않고 있소. 그래서 뱀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가?」

「아뇨. 조심하는 거지, 무서워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이런 위험지역에는 뱀만 있는 게 아니잖소?」

「물론이죠.」

「내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주진 않을 거요? 줄곧 이 집들만 헤집고 다니며 혼자 좋아라고 기뻐하는군.」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게 내 일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게 내 일이지. 지금부터, 내가 당신 곁에 없을 땐, 다른 사람이 곁에 있을 거요.」

「네, 곁에 있어요.」

그녀는 무심히 대답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작대기로 온 주위를 헤집고 다니는 데 푹 빠져, 쪼그리고 앉아서 모든 걸 세세히 관찰하는 일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얄궂게도 그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상한 포근함을 느꼈다. 질리언답군. 그녀는 이런 잡동사니는 사랑했지만, 자신과 관계된 다른 일에는 무성의한 경향이 있었다. 그가 할 일이라곤 최대한 얌전하게 곁에 있는 것과 여태껏 알던 여자 중 질리언이 가장 유능한 여자라는 걸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능숙했고, 게다가 확실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진짜 스톤 시티를 발견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나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아주 실망하겠지만, 모두의 안전을 도모한 셈이니 말이다. 사실 그는 일촉즉발의 화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모든 게 차분해 보이지만, 그 망할 보석이나 금딱지라도 발견된다면 상황은 끔찍하게 변할 것이다. 준비만 철저하면 피해는 없을 것이므로, 그는 만반의 준비와 계획을 이미 마련해두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평소처럼 나아가면 될 것이다.

벤은 케이츠와 두트라를 계속 감시하기 위해 조르지더러 그녀 곁에 남아 도움을 주라고 명령했다. 안전도 물론이지만 그녀의 어깨는 아직도 약간 부은 상태라서,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길 원하지 않았다.

질리언은 조르지와 동행하게 되어 기뻤다. 조르지는 쾌활하고 지칠줄 모르는 일꾼이었다. 조르지는 그녀가 발견한 부서진 그릇이나 이상스럽게 긁힌 자국을 보고 호들갑을 떨진 않았지만 이 일을 아주 흡족해하며 도왔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집들에는 첫 번째 집보다 흥미로운 것들이 더 많았다. 질리언은 찾아낸 유물마다 그 위치와 형태, 상태 따위를 아주 세밀하게 기록했다. 여기 유물의 일부는 바깥으로 가져갈 수도 있을 테지만, 안자르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증거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찾아낸 유약과 색을 칠한 도기조각들을 본다면, 여기 사람들은 화로를 사용했었다고 추측되지만,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가 안자르라는 증거와 유물들을 찾아 연관시키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케이츠는 자신이 '쓰레기'라고 부른 것들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된 것 없이 며칠이 지나가자 점점 초조해졌다.

질리언 역시 초조까지는 아니지만 다른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자 조금씩 조급해졌다. 도굴꾼들이 오래 전에 휩쓸고 지나갔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로만 안자르의 수수께끼를 푸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파편더미를 조심스레 헤집고 있다가 자신이 터무니없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굴 통로와 스톤 시티를 발견한 흥분으로, 지침서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침서는 동굴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나머지 지시문들이 있었고, 아마도 그 지시가 그녀를 '여왕의 심장'에게로 안내할 것이다.

그녀는 작업을 멈추고 조르지를 향해 미소를 띄웠다.

「오늘은 이만 하는 게 좋겠어요. 어깨가 결리고 좀 피곤하군요.」

그녀가 말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좀 쉬셔야 해요.」

조르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언뜻 호기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죠.」

그녀는 캠프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일행은 캠프에서 신기하지도 않고 지겹기만 한, 작은 집들과 함께 연결된 길들을 치우느라 지쳐 있었다. 마을까지 길을 트는 데 반나절이 남아 있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벤은 캠프 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무기에 기름칠을 하며 닦고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존재를 느끼고,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으나, 말없이 텐트로 들어갔다.

벤은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몇 주 동안 함께 보내면서 그는 질리언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고, 자신을 받아들이려는 눈곱만큼의 애정의 기미라도 찾아내려는 노력은 거의 연구논문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그녀의 미약한 변화도 대번에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해졌고,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해 곤두서 있었다. 그녀는 지금 뭔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게 뭘까?

텐트에서 질리언은 다리를 꼬고 앉아, 바닥엔 암호로 된 지침서와 무릎엔 공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몇 주 전에 지침서를 전부 외웠지만, 지금은 영어로 다시 옮겨 적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적은 걸 한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내 텐트 바깥의 소리에 놀라, 재빨리 종이를 침낭에 쑤셔넣었다.

벤이 덮개를 열고 들어와서 그녀 뒤에 섰다.

「잘 오셨어요.」

그녀는 빈정대며 말했다.

「반겨주니 고맙군.」

그는 그녀에게 윙크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그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거란 표정이 확실했다. 장난기 가득한 윙크는 굳은 결심을 숨기는 위장술일 뿐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지시문이 아직 남았다는 걸 기억해냈죠. 지침서는 동굴 찾는 데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낮아서 밖에서는 거의 엿들을 수 없는 게 확실했다.

벤은 그녀가 쓴 걸 확인한 후 말했다.

「이걸로 뭘 할 거지?」

「모르겠어요.」

한숨을 쉬는 그녀의 눈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태껏 내가 발견한 건 굉장한 뉴스거리가 아니에요. 두트 왕이나 오살라 여왕의 유품 수준이 아닌 건 분명하잖아요. 여기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는 찾았지만, 그건 별거 아니죠. 이들이 알려지지 않은 부족이라는 걸 나타내는 증거는 하나도 없어요. 동굴로 여기까지 들어오는 기적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에요. 그래요, 고고학자들이나  관심을 좀 보일 거고 사실 누군가가 여길 발굴하도록 후원할 수도 있지만, 일면 기사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난 고고학계가 온통 들썩여서, 아버지의 업적을 인정하도록 할 만한 그런 걸 찾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극적인 걸 아직 찾지 못했죠.」

그는 종이를 집어 올렸다.

「여기에 없다면?」

「글쎄요.」

「그리고 이걸 찾는 건 큰 말썽의 소지가 될 수 있어.」

「그래요.」

그녀는 우울하게 말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올렸고, 잠시 바라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럼, 당신이 사람들 주위를 딴 데로 돌리는 동안 내가 보석을 찾아보지. 여왕의 심장이 거기에 있다면 내가 알려주겠소. 그러면, 일이 해결되잖소. 없을 지도 모르는 보석 때문에 당신이 고민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오.」

「오! 보석은 있다구요.」

「그럼, 수백 년 전에 누군가가 그걸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군. 사람들이 그런 값진 보석을 그냥 놔 둘 리가 없지. 아무리 미신이 붙어 있다 해도 말이오. 여왕의 심장이 그걸 가져가는 사람을 협박하는 저주도 없다니!」

「하지만 우리에겐 진짜로 저주가 될 수 있어요.」

「결론은 나중에 내리자고. 그게 없더라도, 당신이 좋아할 만한 다른 걸 찾을지도 모르잖소. 누가 알겠소?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잡동사니들이 모두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소.」

「확실히 그런가 봐요.」

「그럼, 내일 찾아보자고.」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 달 전만 해도 하찮은 밥 한끼도 맡기지 못할 만큼 그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생명도 맡길 정도로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여왕의 심장이라도 목숨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가 보석을 찾는 일을 맡겠다고 했을 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조심해야 해요. 뒤를 밟는 사람이 없는 걸 꼭 확인하고요.」

그녀가 속삭였다.

「약속하지. 뭔가를 찾아내면, 당신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겠소.」

다음날 아침 벤의 행동에 특이한 점이라곤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첫 층의 마을까지 가서, 한동안 청소하는 걸 돕다가 질리언과 조르지가 조사를 계속하도록 내버려두고 캠프로 돌아왔다. 요즘 들어 케이츠는 질리언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붙어 있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벤은 허드렛일들을 처리하면서 캠프 주위를 바쁘게 오가다가, 낮잠을 자려는 듯 그늘에 자리잡고 앉았다. 마침 두트라는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러 갔다.

두트라의 훌떡 벗은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코를 골았다. 벤은 일어나 평소처럼 권총을 어깨에 메고 캠프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사실 고작 뱀 정도가 가장 위험한 지역이어서 총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었다. 누구도 그를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리고 전날 밤 미리 캠프 바깥에 숨겨둔 손전등을 꺼내들었지만 그것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캠프 주변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질리언의 암호에 의하면 여왕의 심장이 있는 곳은 동굴 입구에서 반대편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사발형의 땅을 연구하면서, 동굴을 빠져 나왔을 때부터 주위를 끌었던 저편 모서리 지역이 약간 더 높다는 걸 간파했다. 그곳은 적어도 1.5킬로미터 폭에 그 반 정도 되는 길이의 사발형으로 패여 있었고, 바닥은 나무와 덤불로 꽉 차 있었다. 이 나무들은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왜 더 큰 나무들이 없는 거지? 여기는 햇빛도 상당히 잘 드는 곳이라 고목들이 있을 법도 했다. 아무리 매일같이 장대비가 오더라도, 폭우가 아마존 평원처럼 토양을 부식시키는 것도 아니었고, 움푹 패인 이 지형에는 흙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빗물은 어디로 빠져나가지? 하수로가 없다면, 이 오목한 지역에는 그가 밟고 있는 기름진 흙 대신에 호수 물이 있어야 했다. 이곳 식물들의 크기에 관한 수수께끼는 기름진 토양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만일 이 나무들이 아주 오래된 게 아니라면….

그는 걸음을 멈추고, 윤기가 흐르는 활엽수를 쳐다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놀라운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불과 몇 십 년 전 만해도 이 사발형 땅에 식물이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럼 안자르는 수백 년이 아니라 불과 몇십 년 전에 사라진 것일까? 아냐! 그건 불가능해. 혹시 그들이 요 근래까지 이곳에 살았다면, 지금 질리언이 찾아낸 것보다 더 많은 증거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 그들은 이곳을 떠나면서 대부분의 짐들을 가지고 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터무니없는 생각이야. 지금은 질리언의 암호에서 지시한 장소를 찾는 일에나 신경 써야지.

사발지형을 가로지르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칼을 사용한 흔적을 남겨 케이츠가 뒤따르는 걸 원하지 않았고, 칼로 길을 트면서 나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지만, 곧 땅이 어느 정도 평탄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종종 멈춰 서서 뒤따르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이런저런 일에 시간을 꽤 소비했지만, 어쨌든 한시간도 안되어 사발형 지역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위 표면에 갈라진 틈이 보였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절벽 면에 새겨진 많은 경사로들이 그나마 일정한 규칙으로 엉켜 있다면, 그 중 하나를 택해야 하므로 자동적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행운이 따랐는지, 몇 분도 채 안 되어서 정답의 길을 찾았다.

벤은 길을 따라 정상에 이르자 뭔가 다른 점을 알아챘다. 그들이 찾아낸 다른 경사로와 달리 이 길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반대 방향에서 또 다른 경사로가 위로 뻗쳐져서 이곳의 첫 번째 층에서 V자 형태로 꺾인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질리언의 지시대로 앞으로 곧장 나아가자, 조각들로 이루어진 안자르의 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를 쳐다보자, 또 다른 한기가 그의 척추를 훑고 지나갔다. 절벽을 깎아 만든 거대한 돌기둥들이 그의 머리 위로 높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이 기둥들은 대부분 덩굴에 가려져 있었지만, 대강 형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긴 작대기로 두텁고 생기있는 초록 식물의 장막을 헤집으며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작대기에 단단한 바위의 느낌이 전해지자, 그리로 옮겨가 다시 조사해봤다. 번번이 허탕을 치다가 네 번째 시도에서 결국 찾고자 하는 걸 발견했다.

결국은 손전등을 사용하게 되는군.

손으로 덩굴을 갈라 한쪽으로 밀어내고는 전등을 켰고, 그러자 거대한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뭔가를 보고 낮게 욕을 해댔다.

제기랄, 석상들이잖아. 돌로 조각된 아주 큰 조상(彫像)들이군.

석상은 아마 2미터쯤 되는 길이로 실물보다 컸으며, 지탱하고 있는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받침대까지 합치자면 3미터에 이르렀다. 조각 솜씨는 훌륭했고, 잉카나 마야에서 봤던 것들을 능가할 정도였지만 스타일은 비슷했다. 이곳의 인물상이 덜 과장되어 있어서 정상적인 비례에 가까웠다. 다시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숨을 간신히 몰아 쉬었지만, 압도적인 공포와 놀라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석상들은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각자는 창, 활과 화살대, 곤봉 등의 다양한 무기들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