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13화 (14/24)

13

텐트의 지퍼가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순간 어깨에 통증을 느끼고는 즉시 주저앉았다.

「할 수 없군.」

불쑥 벤의 머리가 들어왔고, 이어 그의 몸도 나타났다. 그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를 들고 들어와서는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다시 지퍼를 올리고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예의 주시하면서 통증이나 피로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잤기 때문에 자신이 좀 어리벙벙해 보일 거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피로만큼은 싹 가신 걸 느꼈다. 벤도 인정하는지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좀 어때?」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그녀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하루 정도 쉬어야겠어.」

그의 말은 다소 망설이는 투였다.

「당신 결정이라면 따라야겠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난 충분히 걸을 수 있어요. 물론, 당장 짐을 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는 커피를 쳐다보았다.

「그거 당신이 마실 거예요? 아니면 내 건가요?」

「둘 다.」

그는 강한 팔로 그녀의 등을 떠받치며 어린아이 다루듯 쉽게 일으켜 앉혔다. 그녀가 이불을 팔 밑에 밀어넣으며 가슴을 가리자 그는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지난 밤 일은 걱정할 필요 없소.」

컵을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천만에요. 걱정하지 않아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를 조심스레 홀짝이며 그녀가 말했다.

그는 반라(半裸)가 되어 있는 그녀의 등을 강한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어루만지더니 딱딱한 부분을 찾았다. 바로 그녀가 통증을 느끼는 곳이었다. 그녀는 이내 황홀한 듯 눈을 감았고, 낮고 만족스런 소리가 목 깊숙한 곳에서 새어나왔다.

「으음, 바로 거기예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낫군.」

그가 진단을 했다.

「당신 몸이 제대로 건강한 탓일 거야.」

그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빼앗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자, 이제 어깨는 어떤지 볼까?」

어깨는 어젯밤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부풀고 멍들어 있었지만, 고통을 참으면 조금씩 팔을 움직일 수는 있었다.

「이렇게 고정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염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 항생제 좀 더 줄래요? 어깨 탈구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어깨를 원래대로 돌려놓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요. 옷 좀 입게 도와줄래요? 슬슬 밖으로 나가야 하잖아요.」

「오늘 더 이동할 건지 아닌지는 내 뜻에 따르겠다고 당신이 분명히 말했잖소.」

「환청이었겠죠.」

「그래. 장단도 제대로 못 맞추는군.」

그는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을 획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승리에 찬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주 부드러운 손길이 가슴에 닿자, 그녀의 가슴에선 서늘한 아침 공기가 느껴졌지만 그의 애무로 곧 온몸이 달궈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항상 이런 것만 생각하나 보죠?」

참기 힘든 뜨거운 반응을 억누르며 그녀가 토라진 투로 물었다. 모든 걸 잊고 이 뜨거운 손길에 온몸을 맡기고 싶었다.

「물론.」

그는 질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메마른 소리로 대답하며 시선을 그녀의 가슴에 모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가슴 쪽으로 고개를 수였다.

「어떤 맛일지 궁금한데.」

「벤!」

그녀의 항의는 점점 약해지다가 이내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그의 뜨거운 입이 고통스러우리 만치 민감해진 가슴으로 다가오자 그녀의 몸이 떨리면서 모든 긴장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의 강한 팔에 맥없이 기대어 눈을 감자 짜릿한 고통이 가슴 끝에서 서서히 아래로 아래로 퍼져 나갔다. 그의 심장소리와 남자의 사향 냄새가 그녀를 감싸자, 그녀는 얼굴을 그의 목에 파묻고 그의 강인함에 자신을 내맡겼다. 남자의 혀가 유두를 거칠게 누르며 입술로 힘차게 핥아대자, 그녀는 손에 있던 커피 잔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손톱을 세워 그의 등을 움켜잡으며 점점 몽롱한 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젠장!」

고개를 들자 그의 눈은 번뜩였고, 입술은 육감적으로 젖어 있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다시 그녀의 다른쪽 가슴으로 구부려 굶주린 입으로 그녀를 감싸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듯한 처방을 계속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고 눈은 격렬한 불꽃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오른쪽 다리를 쭉 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요.」

「알았어.」

그는 아직은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은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이럴 생각은 아니었소. 이건 둘 다에게 좋지 않아.」

전에는 그녀가 거부하기도 했지만, 일단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어깨가 낫는 즉시 자신의 여자가 될 거라고 벤은 생각했고, 그녀는 그의 이런 생각을 눈치챌 만큼 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벤의 계산으론 아마 내일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쏟은 커피와 텐트의 나일론 바닥에 묻은 진흙을 넋빠지게 바라보며, 왜 용기를 내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생각했다. 그녀는 벤을 원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관계는 원치 않았다. 또 벤이 그 외의 것을 제안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는 여자와 미래를 설계할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단지 격정적인 섹스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 바지를 챙겨 입고 떠나버리는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그의 확고한 애정공세에도 불구하고, 이 신경전은 정말이지 필요한 단계였다. 그녀는 팔을 아래로 움직일 수 없었다.

「속옷 입는 것 좀 도와줘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오늘은 속옷을 안 입어도 되잖아. 아무도 모를 거고, 밤에도 안 입는 게 더 편할 텐데.」

「속옷 입고 잠자리에 든다고 불편하진 않아요. 속옷을 입고 붕대로 어깨를 감싼 다음, 그 위에 셔츠를 입으면 되요. 아직 팔을 고정시켜놔야 한다면 어제처럼 셔츠 위에다 매어놓으면 되죠. 그러면 오늘밤 옷 벗을 때는 어깨를 잡아줄 필요도 없을 테고, 내일은 혼자서도 입을 수 있을 거예요.」

벤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자 꼼짝도 않고 갑자기 위험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남자가 폭발 직전의 분노를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는 걸 눈치챈 그녀는, 벤이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란 직감이 없었다면 공포로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

「당신은 날 오랫동안 떼어놓진 못할 거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냉랭했다.

「우리 사이의 일은 간단히 떨쳐버릴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지.」

그녀는 딱딱하고 긴장한 그의 표정에 새겨진 확신을 읽었다.

「영원히 떼어놓으려 할 필요는 없죠.」

그녀는 약간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

「일단 마나우스로 돌아갈 때까지겠죠. 그때가 되면 전 당신 인생에서 사라질 거고, 그러면 더 이상 문제될 건 없겠죠.」

그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서는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나우스에 도착한다는 건 내게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의미해, 질리언. 당신은 내 여자야. 당신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진 모르지만 결국 당신도 인정하게 될 거요.」

「그건 당신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죠. 일단 마나우스로 돌아가면 다른 여자들이 눈에 들어올 테고, 쉽게 왔다가 쉽게 지나가는 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젠장, 당신에 관한 건 쉬운 게 하나도 없어.」

그가 투덜거렸다. 그는 할말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그녀의 가방에서 깨끗한 셔츠를 찾아냈다. 그는 이전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가 옷 입는 걸 도왔으며,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서 맨 다음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능숙하게 옷을 입혔다. 그리곤 놀랍게도 그녀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빗겨주었고, 그녀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말꼬리 모양으로 질끈 묶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는 걸로 끝을 맺었다.

「자, 이제 아침 먹을 준비가 됐겠지?」

그는 부드러운 보살핌으로 그녀의 평정을 뒤흔들어놓았지만, 그녀는 이런 부드러움을 원치 않았다. 그녀가 이미 익숙해져버린 부끄럼 없고, 야비하고, 무모한 평소의 벤 루이스이기를 바랐다. 하긴 용감하고, 칼날같이 공정하기도 하지… 속으로 그의 성격을 더 떠올려보았다. 게다가 확실히 유능하지만 위험하고 무례하지.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과연 그의 유혹을 뿌리치기를 바라는 지와 함께 이러한 저항이 과연 진심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녀는 너무나 어리석게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바로 이 남자와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날 벤이 자주 휴식을 명령한 탓에 그녀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기대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손목과 어깨는 아직 아렸지만, 멍이 든 곳에만 부딪히지 않는다면 통증도 없었다. 게다가 어깨 부분을 단단히 감싸서 늘어난 인대를 움직이지 않도록 처방했다. 또한 짐을 지고 있지 않아서 길은 더 험해졌어도 부상 입기 전보다 걷기가 훨씬 수월한 편이었다.

그날 밤 벤이 몸 쪽으로 고정시켜 놓은 왼팔의 붕대를 풀자, 어깨를 고정시켰던 붕대가 관절을 지탱하고 있었던 덕택으로 아무 불편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아스피린 두 알을 먹은 후에 푹 잘 수 있었다.

이튿날 그녀는 아무런 통증 없이 왼팔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벤의 뒤를 따라 씩씩하게 걸어 나아갔다. 그들이 산 정상 부근에 이를수록 숨막히는 열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아직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려움 없이 잘 견뎌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 행보 길에 오른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 앞에 양쪽으로 높게 뻗은 거대한 열대 계곡이 나타났다. 주위에는 높은 산들이 첩첩이 뻗어 있었고, 게다가 암호로 된 지침서에는 이 지점에서 정북으로 가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정북 쪽은 날개가 있어야만 가능한 얘기였다. 모두 멈춰 서서 그녀에게 기대에 찬 시선을 모았다. 그녀는 머리 위로 높이 치솟은 산들을 쓱 올려다보았다. 곳곳에 바위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그 갈라진 틈 사이마다 숲과 나무들이 주류를 이루어 절벽들이 마치 거대한 녹색의 벽처럼 보였다. 그녀의 팔보다 더 굵은 리아나(열대 산 칡의 종류)들이 땅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야생 난들은 그 어떤 곳보다 더 없이 풍성한 장관을 이루었다.

벤이 다가와 그녀의 짐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지침서를 다시 확인해봐야겠소.」

노트를 꺼내 암호를 다시 해독해봤지만 지시문은 변함이 없었다.

「이곳이 틀림없어요.」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원숭이처럼 이 덩굴들을 기어올라가야 한단 말이오?」

「여기엔 정북 방향이라고만 적혀 있어요.」

그녀가 무기력하게 털어놨다.

「정북이라고? 제기랄!」

그는 모자를 벗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어디선가 질을 잘못 들었을 거야.」

「말도 안 돼요. 어제 오후에 확인한 지점도 분명했어요. 여기가 맞아요. 정확하다구요.」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다른 대안을 내놓아야겠군. 내 생각에 우리는 지금 막다른 길에 서 있소. 뭐, 그리 예상 못한 일은 아니지만. 내 맘을 빨리 돌이킬 만한 게 없으면 방향을 바꿔서 돌아가야겠어.

내 맘을 빨리 돌이킬 만한 게 없으면 방향을 바꿔서 돌아가야겠어.」

「돌아간다니, 무슨 말이지?」

케이츠가 엿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어조는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벤은 그에게 냉소를 던지며 말했다.

「이런 탐험대라는 게 대부분 아무 소득도 없다는 걸 몰랐단 말이오? 이런 건 석유 채굴하고 같아서, 당신이 돈을 대면 기회를 갖는 것일 뿐이오.」

「하지만… 그래도 이건 확실한 거라고 믿었는데….」

케이츠의 표정은 돌연 측은하게 변해버렸다. 벤은 코방귀를 뀌었다. 그 무례한 코방귀 소리가 그의 의견을 적절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케이츠가 고집을 부렸다.

「찾아야만 해.」

질리언은 수직으로 뻗은 바위벽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돌아다니다가, 곳곳에 나뒹구는 거대한 표석들과 빽빽한 덤불로 깊이 차단되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밀려드는 실망을 떨쳐버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셔우드 교수는 항상 상황을 직시하고 현실적으로 앞뒤가 맞는 논리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가르쳤고, 이런 훈련은 항상 큰 도움이 되어 왔었다. 그녀는 이런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통로는 차단되었고, 그렇다고 기어올라갈 수도 없었다. 지침서를 따르자면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녀는 위를 바라보면서 바위에 갈라진 틈과 나무들을 관찰하면서 단서가 될 만한 특이한 점을 찾았다.

정북이라고….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북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녀는 앞에 놓인 거대한 표석들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정북이라는 건 곧장 앞으로 나아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지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조르지가 바로 옆에 남아 있었으므로 그에게 공손히 부탁했다.

「제게 튼튼한 작대기 하나만 만들어 주실래요?」

「그럽죠.」

그는 튼튼한 줄기를 칼로 베어내고 잔가지를 칼질로 강하게 몇 번 쳐내더니 역시 공손한 자세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그 작대기로 덤불 속을 살펴보고는 뱀이나 다른 생물체가 숨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벤이 다가왔다.

「질리언, 기다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잠깐 보려구요.」

그녀는 말하면서 커다란 양치식물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젠장, 기다려. 정 확인해보고 싶다면 우리가 하겠소.」

밝은 햇빛이 차단되었다. 수십 초가 지나자 그녀는 어둠 속에서 다시 초점을 맞추었다. 굵은 잎사귀들이 머리 위에서 천연 지붕을 이루고 있었고, 그녀의 손 옆에는 나비 한 마리가 잎사귀에 앉아 떨리는 날개를 접고 있었다.

이곳의 표석들은 거대한 데다가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적어도 2층 높이쯤 되는 차가운 바위 표면에 손을 대어 보았다. 이곳의 표석들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 정상에서 굴러온 거라면 더 거대한 부분이 땅 밑에 묻혀 있을 것이다.

「질리언, 기다리라고 했잖소.」

벤이 덩굴들을 베어내면서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나머지 일행들 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300미터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다. 아주 빽빽하게 들어선 식물들 때문에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작대기로 땅을 툭툭 찌르기도, 세차게 두드리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덤벼들거나 날뛰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뭐가 있소?」

벤이 지척에서 지켜보면서도 물었다.

「이 표석 뒤에 길이 있는지 조사해봐야죠.」

「왜지?」

「지침서에는 위로 올라가라는 말이 없거든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래, 그래. 알았다고. 하지만 내가 앞장서겠소.」

벤이 그녀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거대한 바위가 꽉 들어차 있어서 길은 간신히 통과할 만큼 비좁았다. 벤은 지나갈 만한 공간조차 넉넉하지 않아 사방을 빽빽이 가로막고 있는 덤불과 작은 나무들을 칼로 제거하면서 나아갔다.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표석들이 점차로 더 가깝게 나타났다.

벤이 잔뜩 긴장한 채로 멈춰 섰다.

「뭐죠?」

「감이 오는데….」

그녀도 조용히 집중했다. 무슨 감이 온단 말이지? 미약하나마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이라… 이 거석들 뒤에서?

「어디서 불어오는 거죠?」

그녀가 속삭이며 물었다.

「바로 우리 앞쪽에서.」

그는 긴장된 어조로 대답했다.

「확실히 이쪽으로 불어오고 있군.」

그는 다시 칼을 휘둘러 시야를 가리고 있는 녹색의 장벽들을 베어냈다. 두터운 덩굴 가지와 줄기가 떨어져 나가자 좁고 컴컴한 입구가 나타났다. 그 입구로부터 시원한 공기가 부드럽게 불어오고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면서 그녀와 부딪혔다.

「이런, 내가 틀렸군.」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보여요?」

「지금 이 안에서는 한치 앞도 안 보여. 이런 걸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들 하던데.」

그녀를 따라나서기 전에 배낭을 두고 와서 그는 손전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질리언은 나머지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돌아왔다. 일행들은 그녀와 벤을 걱정하고는 있었지만, 큰 바위 뒤에 뭐가 있는지 조사할 만큼 호기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자기 배낭에서 손전등을 낚아채자 케이츠가 물었다.

「뭐라도 발견한 거예요?」

「바위 뒤에 통로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닐 수도 있고요. 아무튼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어요.」

「나도 같이 가겠소.」

케이츠가 말했다.

그들은 벤이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갔다. 케이츠는 불안한 시선으로 머리 위를 계속 봤으나 돌아가지는 않았다. 벤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그 동안 벤은 출입구 주변에 말끔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산 안으로 어둡고 길게 뻗은 공간이 보이자 케이츠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이 입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확실히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벤이 전등으로 입구 주변을 비추자 입구는 안쪽으로 갈수록 갑자기 넓어졌고, 벤은 이 바위 안에 있는 출입구가 얼마나 좋은 방어막인지 깨달았다. 즉 침입자들은 일렬로만 들어올 수 있으며, 힘겹게 빠져나갈 만한 공간이 간신히 있었던 것이다. 아래쪽으로 쭉 뻗어 있는 통로는 산 속으로 뚫린 터널 같았고, 높이는 대략 2미터에 너비가 1.5미터쯤 될 것 같았다. 분명하진 않지만 터널 안으로 들어갈수록 너비가 변하고 있는 것 같았고, 한 3미터쯤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급격한 경사가 나타났다.

「젠장!」

케이츠가 불평을 터뜨렸다.

「저 안에는 아마 박쥐도 있을 거야.」

벤이 천장 쪽으로 전등을 비추자 거미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공동굴 같군. 박쥐가 없는 걸 보면 자연동굴을 깊게 뚫어놓은 건 아닌 것 같소.」

그는 소리 높여 페페를 불렀다.

「페페.」

30초도 되지 않아서 작은 인디언이 나타나 입구 쪽을 흘깃 보더니 찢어진 검은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그는 벤에게 자신의 언어로 빠르게 뭔가를 말했다.

「페페는 이 일을 안 좋아하는가 봐.」

벤이 통역해주었다.

「나도 이게 좋아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질리언도 털어놓았다.

그녀는 칠흑 같은 통로로 들어갈 생각을 하자 공포로 살결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케이츠도 시커먼 입구를 보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벤은 질리언에게 윙크를 보내며 말했다.

「이제 박쥐 걱정은 없겠지만, 저 안에 또 뭐가 있을지 모르겠군.」

「출구가 있기만을 바래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앞장서지.」

「전등을 가진 건 당신이잖아요.」

벤은 권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었다.

「이게 필요할 것 같군.」

「당신이 두 가지 다 가졌으니 앞장서요.」

그녀는 성급하게 말했다.

「전 뒤를 바짝 쫓아갈게요. 혹시, 내가 앞장서야 한다는 게 진심이라면, 나 먼저 갈까요?」

「여기에 남아 있어.」

그가 지시했다.

「아뇨, 내가 입구를 찾았으니 이건 내 일이에요.」

「유감스럽지만 칼을 가진 것도 나였고, 덤불을 제거한 것도 이 몸이 했고, 시원한 공기를 먼저 느낀 것도 나였소.」

「단지 당신이 앞장서 길을 열었다고 해서요? 당신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었어요.」

언쟁을 벌이면서 벤은 안쪽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고, 질리언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녀의 심장은 흥분으로 쿵쾅대고 있었다. 케이츠는 다소 머뭇거리긴 했지만 분명히 뒤따르고 있었다.

「밖에 남으라고 했잖소.」

벤이 그녀에게 투덜거렸다.

「그랬었나요?」

그들은 급박한 경사 부분에 이르러 모서리를 돌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등뒤의 입구 쪽에서 비추어지던 햇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온통 시커먼 암흑을 비추는 건 손전등의 미약한 불빛뿐이었다. 터널은 변함없는 높이와 너비로 험난하게 뻗어 있었다. 그녀는 돌 벽을 손으로 더듬으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문양을 느껴보았다.

「그래, 나도 알겠어. 남자가 만든 게 틀림없군.」

'여자가 만든 것일 수도 있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환호성이라도 지르며 약간의 긴장감이나마 떨쳐버리고 싶었다.

숨겨놓은 구덩이나 위장 덫 따위와 전혀 마주치지 않고 50미터쯤 더 들어갈 수 있었지만, 벤이 갑자기 정지시켰다.

「이제 그만. 이만 나가지. 밧줄이나 안전장치도 없이 더 이상 간다는 건 무리야. 이 안의 길은 몇 킬로미터나 얽혀 있어.」

그의 목소리가 동굴의 앞뒤에서 메아리치며 양끝에서 들려오자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츠는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등뒤에서 비춰지는 전등 빛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달아났을 것 같았다. 그들은 다시 햇빛 아래로 나왔고, 나머지 일행은 흥분과 걱정이 담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입구 밖에 서 있었다.

「뭘 찾았어?」

릭이 물어왔다. 그는 흥분한 축에 속하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어.」

케이츠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릭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어.」

질리언이 다시 말해주었다.

「깊이 들어가지 않았거든.」

「그래. 모두 짐을 챙기고 잠깐 쉬면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우자고.」

벤이 말했다. 사실 그들이 할 일이라곤 간단했다. 동굴 안에 있는 동안 벤은 이미 다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들이 스톤 시티를 발견할 경우, 질리언을 케이츠나 두트라의 손아귀에 넘겨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즉 그녀가 가는 곳이면 벤도 가야 했다. 얽히고 설킨 동굴 안으로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들어갈 순 없었지만, 배낭을 메고 한 줄로 서서 통로를 지나는 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통로는 가파르게 아래로 꺾였다가 다시 갈라져 있어서 그들의 몸은 거의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동굴이 너무 길지 않기를 빌었다.

벤은 허리끈에 달린 고리를 밧줄에 연결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모두를 함께 묶었지만, 페페와 유로지오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의 허리띠에는 고리가 없었으므로, 질리언이 안전핀을 가져다가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 또한 질리언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작은 배낭 정도는 질 수 있다며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맡으려 했고, 각자가 손전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은 오른손에 전등을 꼭 쥐고 권총을 손닿는 가까운 곳에 지닌 채 일행을 동굴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들이 뭘 찾아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통로는 막다른 길일 수도, 혹은 산사태로 길이 차단되었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질리언은 전등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어깨에 멘 배낭에서 아무도 몰래 살며시 자신의 총을 꺼냈다. 그리고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는 지척에 두었다.

벤이 앞장서고, 질리언이 그 뒤에, 이어 페페가 뒤따랐다.  페페는 전진할수록 아주 예민해지는 것 같았지만, 질리언은 단순히 동구로 들어가는 긴장감이라고 짐작했다. 또한 매우 둔감했던 유로지오는 두려움보다 약간의 흥미만을 보였다.

말소리가 매우 날카로운 메아리가 되어 귀에 울려 퍼지자 모두는 재빨리 속삭이는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짐작으로, 적어도 4분의 1킬로미터는 왔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동굴은 갑자기 위로 경사를 이루었고, 돌로 조각된 것처럼 보이는 넓고 야트막한 계단들이 나타났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은 아니었지만 일행들은 엄청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으므로 난관이나 다름없었다.

공기가 점점 더 서늘해지자 질리언은 부르르 떨었다. 벤의 손전등은 같은 장면들만 반복해서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더 가야 되죠?」

「길이 엄청 꼬여 있군. 내 짐작으로 더 가야 해. 미풍을 느낄 수 있는 곳까지는 걱정할 만한 게 없어. 어디선가 서늘한 공기가 불어오고 있군.」

끝없이 계속되는 어둠은 일행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질리언은 동굴 탐험가들이 땅 속으로 파묻힐 것 같은 공포와 내리누르는 육중한 어둠을 견딜 뿐만 아니라, 과연 이런 요소를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녀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일행들이 다시 평탄한 길로 들어서자 벤은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짧은 휴식을 선언했고, 10분 후에 다시 출발을 명령했다.

질리언은 동굴에 들어섰을 때 시간을 봐두었었다. 손목을 돌려 손전등을 비추어보니, 그들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55분이 흘렀다. 10분의 휴식시간을 제외한다면 45분 동안 걸은 셈이었다. 빠른 걸음으로라면 3킬로미터 정도 움직였을 테지만, 더 느린 걸음이라면 그녀의 추측으로 적어도 2킬로미터쯤은 왔을 것이다. 이곳은 아주 훌륭한 동굴로, 누군가가 산의 중심부에 동굴을 만드느라 온갖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비록 자연이 이미 만든 것에다가 인간이 혹은 여자가 더 확장시킨 것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다시 돌아온 것 같군.」

벤이 말했다. 일행은 또다시 넓고 얕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각각의 계단은 아마 3센티미터 정도 혹은 좀 전에 지나온 계단보다 약간 더 높은 정도에 불과했지만, 수백 개나 되는 높이와 그곳을 오르는 고초는 정말 끔찍스러웠다.

그들이 굽어진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빛이 나타났다.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불빛이었지만 분명히 빛이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지나온 입구처럼 굵은 리아나와 덤불로 뒤덮인 앞으로 쭉 뻗어 있는 출구가 보였다. 출구는 동굴 안 만큼 넓었지만, 한 사람이 칼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의 공간밖에 되지 않았다. 벤은 배낭을 내리고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을 정도의 날카로운 긴 무기를 휘두르며 동굴을 빠져나갈 길을 힘차게 열고 있었다. 햇빛이 점차로 밝게 들어왔다.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와서, 얼굴을 스치던 큰 잎사귀들을 뜯어내고 붙어 있던 덩굴들을 걷어내었다. 어두운 동굴을 빠져 나온 후라,  그들은 눈을 가려야 했지만 곧 밝은 태양 빛에 익숙해졌다.

그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동굴의 반대편과 아주 비슷했다.

「이젠 어떡하지?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릭이 넌더리를 내며 물었다.

질리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발 모양으로 움푹 패인 것 같은 땅과 바위벽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녀의 숙련된 눈길은 모든 걸 세세하게 뜯어보았고, 부풀어오르는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벤의 눈길에서 그도 같은 느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함섬을 지르고 싶어하는 반면 그는 갑자기 매우 심각해 보였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가까스로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바로 여기야. 우리가 찾던 스톤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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