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12화 (13/24)

12

일행은 묵묵히 탐험을 계속했다. 벤은 평소보다 더 유심히 질리언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비단 마르팀의 죽음만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도 분명히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한, 더 깊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이 빌어먹을 바위를 내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걱정에 잠겼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잠을 자야했지만 텐트 칠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들은 이제 강에서 벗어나자마자 성가시게 덤벼들던 모기떼뿐 아니라 다른 위험에도 완전히 노출되었다.

벤은 휴식을 명령하고는 페페를 시켜 정찰하도록 했다.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 위로 아련하게 보이는 주위의 산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벤은 바로 머리 위로 동그란 하늘만 보이는 구덩이에 빠진 느낌이었다. 상황은 그다지 절망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그가 만족할 만큼 그렇게 빨리 바위를 내려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질리언 역시 말없이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벤은 불안정한 가장자리를 너무 가까이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게 뭐요?」

그는 조용히 그녀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잎사귀 하나를 뜯어 무심히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산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낙상해서 돌아가셨어요. 산 속에서라고 들었어요. 이 산 속 어딘가에 남겨진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왔는지 모르죠. 바로 이 바위 절벽이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위험한 일인지 누가 알았겠어요?」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통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녀를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충동은 그에게 낯선 감정이었다. 그는 한번도 누군가를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확실히 모르잖소. 그런 생각은 버려요.」

「수도꼭지처럼 잠가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했는지 알잖아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마음에 아직도 애틋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일념 하에, 다른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위험하고 혹독한 탐험의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질리언은 한번 사랑한 사람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깊은 상심에 잠겼다.

「이봐요, 루이스.」

릭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르팀의 개인 물품까지 짊어지고 가야 하나요?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군말 말고 가져가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 않소.」

「그럼 텐트라도 버리고 가면 안될까요? 여분의 텐트가 왜 필요하겠어요?」

「우리 텐트 중에 하나가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야지.」

「하지만 처음부터 여분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것만 지고 왔잖아요.」

「텐트가 무겁다고?」

벤은 인내심을 잃고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

「뭐가 불만이오?」

「마르팀이 없어졌는데 이렇게 많은 식량을 다 싣고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안 그래요?」

벤과 질리언 두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벤은 릭의 어리석음에 머리를 흔들며 단호히 말했다.

「식량을 버리고 갈 수는 없소. 절대로!」

릭은 시무룩해졌다.

「그냥 한번 물어본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대답해준 것뿐이오.」

릭은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질리언은 릭을 지켜보았다. 그가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다시 후두두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오빠의 발 아래로 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빠가 아래로 떨어지려 하자 그녀는 손을 마구 휘저어 간신히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이어 옷이 쭉 찢어지면서 그는 다시 미끄러졌고, 그녀는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는 양손으로 질리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절규하는 소리와 울부짖음, 그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릭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무게 때문에 그녀도 진흙에 미끄러져 벼랑 끝으로 딸려갔다. 그녀 자신도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지만 스스로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오빠가 벼랑 아래로 점점 더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상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르고, 소리는 아주 멀리 흩어졌다.

그때 그녀의 발목에 바이스(작은 공작물을 아가리에 물려 나사로 꽉 죄어서 고정시키는 기계)가 걸리더니 더 이상 벼랑 끝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 어깨가 아파 왔다.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릭의 손이 그녀의 팔에서 서서히 미끄러져 내리자 그녀는 그의 손을 더 단단히 움켜잡았다. 필사적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 뒤쪽에서는 계속 욕설이 들려왔다.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섬뜩하고 끔찍한 욕설이었으며, 어떤 말은 포르투갈 어라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어깨와 팔에 통증이 더해갔지만,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움켜잡았다.

그때 흙이 더 많이 떨어져 내리면서 그들은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릭의 무게는 그녀의 어깨에 심한 통증을 주었고, 그녀는 고통으로 절규했다.

「제발 날 버리지 마, 질… 날 버리지 마.」

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절대 놓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는 더 미끄러져 내려 급기야는 서로의 손목만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 그가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그녀의 손목이 삐걱거리며 부서질 것 같았다.

「질리언을 잡아당겨!」

벤이 거칠게 말했다.

「그녀를 놓치면 모두 죽을 줄 알아!」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전력을 다해 뒤로 잡아당겼다. 신발이 질질 끌리면서 진흙이 패였다. 하지만 그의 위협은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벼랑으로 떨어져버린다면 그도 같은 꼴이 될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조르지는 무릎을 꿇어 몸을 뻗어서는 질리언의 허리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릭의 발에 밧줄고리를 걸어봐.」

벤은 이를 악문 채 지시했다.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서고 땀이 눈 속으로 타고 흘렀다.

「밧줄을 걸었으면 거꾸로 매달아 끌어올려!」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플로리아노가 밧줄을 잡았다. 케이츠는 처음부터 뒤에 물러서 있었다. 물론 질리언이 없다면 탐험의 의미가 사라지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그들 곁에 엎드려 그녀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공포에 질린 릭이 어찌나 발길질을 해대는지 플로리아노는 도저히 밧줄을 걸 수가 없었다. 밧줄을 걸려면 벼랑 끝으로 가까이 아는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최대한 가까이 움직였다. 그런데도 릭의 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턱대고 밧줄 고리를 내던져 끌어올려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이리 와서 질리언의 발목을 잡아!」

벤의 목소리는 긴장감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조아킴이 서둘러 지시에 따랐다. 이어 벤이 허우적대고 일어나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밧줄을 요구했다. 위험에서 겨우 벗어난 플로리아노는 우물쭈물 뒤로 물러나면서 벤의 손에 밧줄을 건네주었다.

벤은 다시 엎드려 몸을 쭉 폈다.

「내 다리를 붙잡아!」

비센테와 플로리아노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말에 따라 단단한 손으로 벤의 부츠를 꽉 잡았다.

벤은 과감히 최대한 바깥쪽으로 몸을 내밀었고, 지반이 약한 땅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질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진흙 범벅에 고통의 빛이 역력한 것을 제외하면 얼굴은 완전히 무채색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릭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거칠게 발길질을 해댔다.

「빌어먹을, 좀 가만히 있어!」

릭은 그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공포와 발아래 펼쳐진 빈 공간 외에는 모든 것에 무감각했다.

벤은 두꺼운 밧줄을 내던져 될 수 있는 한 세게 릭의 머리를 내리쳤다.

「입 닥쳐! 입다물고 내 말 들어!」

격노한 그의 목소리에 릭의 외침도 뚝 그쳤다. 갑자기 찾아든 침묵 또한 고함소리 못지않게 초조한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

벤의 목소리는 경직되었다.

「당신 발에 밧줄 고리를 걸 거요. 그런 다음 위로 끌어올릴 거야. 알겠소?」

릭의 시선은 공포에 질려 있었으나 어쨌든 벤에게 집중해 있었다.

「알겠소.」

그의 목소리는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질리언이 벤을 보려고 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애원하는 듯했고, 고통으로 눈이 멀 지경이었다. 벤은 릭의 무게 때문에 그녀의 연약한 손목 관절이 쉽게 부러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차마 욕은 하지 못하고 이빨만 부득부득 갈았다. 그녀는 고함소리를 질러야 정상이었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

벤은 재빠른 동작으로 밧줄을 감았다. 순간순간이 질리언과 릭 두 사람에게 영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또한 이처럼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서 있는 아래쪽으로 진흙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밧줄을 빙빙 돌려 릭의 발이 흔들리는 쪽으로 휙 던졌다. 두 발 다 걸리는 것은 기적이었으며, 벤도 그렇게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한쪽 발이라도 걸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앨라배마 농장에서 성장한 덕택에 수십 마리의 송아지 목에 밧줄을 걸어본 적이 있었다. 릭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밧줄 고리는 흔들거리는 릭의 오른발 아래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벤은 전문가답게 밧줄을 위로 당겨 그의 발에 걸고는 재빨리 매듭을 조였다. 기가 막힌 솜씨였다. 발목 바로 아래로 떨어져 걸기가 수월했던 것이다.

「끌어올려.」

벤은 큰소리로 말하고는 다리 위에 두었던 양손을 뒤쪽으로 세게 밀어 밧줄을 끌어당겼다.

벤은 일단 단단한 바닥에 다시 올라왔다. 그는 비틀거리고 일어서며 플로리아노 손에 밧줄을 건네주었다.

「비센테랑 같이 그를 붙잡고 있어. 단단히 잡으란 말야. 젠장! 릭의 체중을 못 이기면 돌 다 딸려 내려가니까 알아서들 해.」

플로리아노의 검은 눈은 침착했다.

「알았습니다.」

유로지오는 뒤쪽에 서 있다가 앞으로 다가와 밧줄을 단단히 잡았다. 그 인디언은 마른 듯한 작은 체구였지만 꽤 강단이 있었다. 그래서 벤은 릭을 안심하고 맡긴 것이다. 이제 문제는 질리언을 안전하게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여 최대한 벼랑 끝으로 가까이 기어갔다.

「릭, 내 말 잘 들어요. 당신 발에 밧줄을 감았소. 세 사람이 버티고 있으니 이제 떨어지지 않을 거요. 당신을 반드시 구해내겠소. 알아듣겠소?」

「알았어요.」

릭은 숨을 헐떡였다.

「질리언을 놔줘요. 그래도 조금 밖에 떨어지지 않을 거요.」

릭은 절대로 질리언의 손을 놓지 않을 것 같았다. 릭은 겁먹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고, 질리언은 침착하게 그를 안심시켰다. 내 발에 밧줄을 감은 게 아니면 어쩌지? 그렇다고 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는 겁에 질려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질리언의 얼굴로 가득 채워졌다. 반대로 하얗게 겁에 질린 절망적이고 필사적인 그의 모습은 그녀의 눈 속에 거울처럼 반사되었다.

「안 돼, 못하겠어.」

그는 울부짖었다.

「해야 돼. 당신이 손을 놓아야지 끌어올릴 수 있단 말이오.」

「정말 못하겠어!」

벤의 분노는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질리언은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했지만, 릭이 꽉 잡고 있는 손을 놓아주지 않는 이상 그녀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빨리 놓으란 말이야, 이 새끼야.」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네 머리통을 날려버릴 거야.」

「오빠.」

질리언의 목소리였다.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으니까 손을 놔. 밧줄이 걸려 있는 걸 봤어? 구해줄 거야, 괜찮아.」

릭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참이나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손을 놓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가 갑작스럽게 손을 놓는 바람에 질리언을 붙잡고 있던 남자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다행한 일은 조르지가 그녀의 허리띠를 놓치지 않고 계속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움직여 그녀를 끌어당겼다. 밧줄을 붙잡고 있던 세 사람의 발꿈치에 땅이 파였고, 릭이 흔들리기라도 하면 확 잡아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릭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거칠었다.

「릭을 끌어올려!」

벤이 소리를 쳤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온통 질리언에게 가 있었다. 질리언을 암벽 돌출부 위로 끌어올린 다음 안쪽으로 안전하게 들어올릴 생각뿐이었다.

그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여 그녀의 등을 돌렸다. 그녀는 얼굴뿐만 아니라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고함을 치진 않았지만 숨을 들이 쉴 때마다 거친 소리가 났고, 아무 말 없이 끙끙대며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가장 아픈 곳이 어딘지 말해주지 않겠소?」

벤은 그녀의 오른손에서부터 위쪽으로 관절을 주물렀다. 그의 목소리는 그윽하고 부드러웠다.

「왼쪽… 어깨.」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어깨가… 빠진 것 같아요.」

그럴 법도 했다. 릭의 무거운 체중을 보아서는 어깨가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벤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가 만질 때마다 질리언은 울부짖었다. 그것도 그가 그녀에게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겨우 신음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때 밧줄을 잡고 있던 남자들은 몇 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암벽 돌출부 위로 릭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관절을 맞춰야겠어요.」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굉장히 아플 거요. 관절을 바로 잡아야 하니까 참아봐요.」

그녀는 고통스러워 동공이 작게 줄어들었다.

「좀… 어떤 것… 같아요? 계속해요… 하세요.」

제기랄. 그는 그녀가 얼마나 아플지 알기 때문에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옳았다. 기다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병원에 데려갈 수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행운의 여신이 그들 편이라면 탐험이 한 달 만에 끝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녀의 어깨는 원위치로 돌려놓아야 했다. 그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도 어깨가 빠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그는 그 정도에서 생각을 접어둔 채 질리언의 팔을 들어올려 쭉 뻗게 한 뒤 다른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가 능숙하게 관절을 맞추자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연약한 몸을 둥글게 구부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거친 외마디는 메아리처럼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벤은 그녀가 기절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며 옆으로 굴렀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구역질을 해댔다. 그녀는 원래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아예 분필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질리언은 어떻게 됐어요?」

릭이 그들 쪽으로 기어올라왔다. 그는 아직도 안색이 창백하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당신 체중을 지탱하느라 어깨가 빠졌소.」

벤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셔우드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쨌든 빌어먹을 멍청이 같은 저 녀석 때문에 질리언이 부상을 입지 않았는가? 하마터면 그녀는 죽을 뻔했다.

릭은 갑자기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털썩 주저앉아 앞으로 엎어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누워 사시나무 이파리처럼 파르르 떨었다.

「신이시여!」

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머리를 들었다.

「질리언은 괜찮을까요?」

벤은 얼음 몇 조각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아 상처의 통증과 부기를 완화시킬 수 있을 텐데. 차라리 달을 보고 소원이라도 빌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이틀은 열이 높을 거요. 젠장, 탈골 부분이 몹시 쑤실 텐데.」

그는 물병을 가져와 손수건을 적셔 그녀의 얼굴과 목을 닦아주었다.

「충격을 좀 받은 모양이오. 다리로 질리언의 발을 받쳐줘요.」

그가 지시하자 릭은 당장 뛰어가 벤의 지시에 따랐다.

질리언은 회복이 빨랐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여전히 쑤시고 아렸다.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에 잠겨본 적은 없었다. 조금 뒤 메스꺼움이 사라지고 조용히 누워 휴식을 취했다.

「기분이 좀 나아졌소?」

잠시 후 벤이 물었다.

「나무 꼭대기.」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린아이 같군. 앉고 싶으면 앉아요. 어깨를 감싸줄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쑤시는 건 금방 나아질 거요.」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상세하게 말했다. 질리언은 호기심이 생겼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그 문제에 대해 논박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기대게 하고는 편안하게 앉도록 자세를 고쳐주었다.

모두들 두 사람 주위에 몰려 있었다. 각자 몰려온 이유는 달랐지만 저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트라는 예외였고, 그녀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릭이 떨어질 때 두트라는 꼼짝도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의 짐승 같은 얼굴엔 비열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구급상자에는 발목을 삐었을 때나 무릎 부상을 대비해 폭이 다양한 압박 붕대가 들어 있었다. 벤은 폭이 가장 넓은 붕대를 골라 그녀의 어깨에 단단히 감아주었다. 다른 붕대로는 왼쪽 팔을 옆구리에 고정시켰다. 그녀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면 그를 쳐다봤을 텐데, 붕대를 감아도 어깨의 통증을 별로 덜어주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상처 부위가 더 심하게 쑤실 뿐이었다. 그때 벤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많이 아플 거요. 하지만 조금만 참아요. 훨씬 나아질 테니까. 약속하겠소.」

정말이지 고맙게도, 심하게 쑤시던 통증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벤이 아스피린 몇 알을 건네주자 그녀는 덥석 집어삼켰다. 페페가 돌아왔다. 질리언은 여전히 벤의 무릎에 기댄 채, 서서히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유로지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디언들의 언어로 벤에게 말하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려왔다. 그녀의 머리를 사이에 두고 벤은 페페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절반 가량 알아들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또 다른 시간 여행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이 빌어먹을 절벽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어쨌든 어두워지기 전에는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두워진 후에라도 내려가야겠소. 절벽 위에서 밤을 지새진 않을 거요.」

벤은 대답했다. 그러고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질리언, 걸을 수 있겠소?」

그녀는 주저했다.

「당신이 일으켜주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벤은 조심스럽게 그녀가 일어서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릭이 그녀의 다른 쪽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이 한 쪽으로 기울었으나, 깊게 두 번 심호흡을 한 후에 똑바로 일어섰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다.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히 미소를 지었다.

「모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벤은 가방을 집어들면서 질리언의 가방도 어깨에 둘러맸다.

「질리언의 짐은 나눠드는 게 좋겠어요.」

릭이 말했다.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소. 어두워지기 전에 절벽을 내려가야 해요. 한 시간 정도는 이대로 버틸 수 있소.」

「그럼, 내가 질리언을 부축할게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릭이 다시 제안했다.

「괜찮아요. 」

질리언은 한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줄로 서서 걷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한 시간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벤이 가방도 들어주니까 별 문제 없을 거예요.」

벤이 그녀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질리언의 그의 침묵이 반가웠다. 이상한 방식이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그녀의 체력과 능력을 평가하고 있었다.

페페가 앞장을 섰고, 질리언이 그 뒤를 따랐다. 질리언이 두 번째로 가야 한다고 벤이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오른쪽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가까이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가까이 있으면서 그녀가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바로 부축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녀는 결심한 듯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다행히 통증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걱정했던 만큼 나쁘지도 않았다. 걸을 때마다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가장 힘든 것은 다리에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심한 유행성 감기를 앓다가 회복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기분은 통증으로 받은 충격 때문에 생긴 반응이기도 하지만 정점에 있던 아드레날린이 갑자기 붕괴되는 느낌이기도 했다. 보이는 것이 죄다 환상 같았다. 마르팀이 죽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배가 고팠다. 배가 살살 고파왔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예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이 절벽 아래로 다 내려왔을 때는 이미 황혼이 깊었고, 겹겹이 쌓인 정글 숲 안으로 다시 들어오자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들은 주위 덤불을 더 깨끗이 베어내고는 서둘러 캠프를 쳤다. 텐트를 전부 쳐도 충분할 만한 넓은 공간이 마련되었고, 취사 담당은 불을 지폈다. 벤은 그녀의 텐트를 직접 세웠고 앉아 있기 편한 곳도 마련했다. 한편 페페는 식사를 준비했다.

질리언은 고정시킨 왼쪽 팔 때문에 팔꿈치를 위로 올릴 수 없는데도 식사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녀는 쌀밥과 생선 통조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녀는 원래 저녁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벤이 설탕을 잔뜩 넣은 커피를 건네주자 군말 없이 받아 마셨다. 식사가 끝날 때쯤 그녀는 훨씬 나아졌다.

릭이 다가와 그녀 곁에 앉았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리 사이로 보이는 땅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저기 있지… 날 구해줘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어.」

그는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인생을 통틀어 릭이 다정하게 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런 태도에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녀는 짧게 대꾸했다.

「됐어.」

그는 불편했는지 자리를 옮겼다.

「몸은 좀 괜찮니?」

잠시 후 그가 다시 물었다.

「아직 어깨가 쑤시지만 훨씬 나아졌어」

「다행이구나.」

그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하게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고마워.」

그러고는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자시를 뜨자마자 벤이 랜턴과 낯익은 병을 들고 그녀 곁에 나타났다.

「자, 이리 와요. 도포제 바를 시간이오.」

그녀는 기꺼이 응했다. 그는 쿡쿡 쑤시는 근육에 강한 마사지를 곁들이며 자극성 있는 약을 발라주었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그녀가 엉거주춤 텐트로 기어들어가자 벤이 따라 들어왔다. 그의 큰 체구가 텐트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더러운 옷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깨끗이 씻어야겠어요.」

「근처에 폭포가 있는지 모르겠군.」

벤은 그녀 곁에 무릎을 꿇은 다음 그녀의 부츠 끈을 풀기 시작했다.

「제 가방에 젖은 물수건이 있어요.」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싱긋이 웃었다. 하얀 이빨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러니까 그걸 이용했던 거군. 난 당신이 어떻게 청결을 유지하는지 궁금했었소. 당신에 비하면 우리들은 게으름뱅이에 지저분한 냄새까지 풍겼겠군.」

「그게 말이죠….」

그녀는 더듬더듬 말했다.

「알고 있소. 당신 기분이 훨씬 나아진 것 같군.」

그는 만족스러워 하며 그녀의 부츠와 양말을 벗겼다.

「어깨에 감긴 붕대를 풀기 전에 바지를 벗어야겠소. 그게 덜 불쾌할 거요.」

그녀는 직접 하겠다고 할까 생각했지만, 한숨을 지으며 현실을 직시했다. 적어도 오늘밤에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그녀의 바지를 느슨하게 하고는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벗겨냈다. 그녀는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 뒤 어깨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셔츠 위에 붕대를 감았던 것이다.

그녀는 꼼짝 않고 있었다.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무감각해진 고통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 두려웠다. 벤은 그녀의 셔츠 단추를 풀고 서서히 벗기면서 어깨를 건드리지 않도록 팔 아래로 소매를 내렸다. 벤은 잠시 속옷을 쳐다보고는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 속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지만 그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속옷도 잘라야겠소. 머리 위로 벗기면 팔을 들어올려야 하잖소.」

그녀는 속옷을 잘라 그의 기분을 만족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속옷을 벗어야 했다. 그들은 총잡이들처럼 서로를 쳐다보다가 결국은 질리언이 말을 붙였다.

「속옷은 신축성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오른팔만 붙잡아주세요. 머리를 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 왼팔 아래로 내리면 되잖아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손으로 오른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다음 머리 위로 옷을 벗기고 다시 한 번 통증이 생기지 않도록 왼팔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의 시선은 완전히 노출된 앞가슴에서 머물렀고, 그녀의 가슴은 단단해졌다. 맥박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랑의 행위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지만, 그의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숨을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왼손을 꺼내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꼭 껴안았다. 그 사이에 오른손은 앞가슴을 번갈아 움켜잡았고, 그의 거친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작고 단단한 젖꼭지를 위로 혹은 둥글게 돌리며 자극했다. 그는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작고 도톰한 작은 언덕에 매료되었으며 그 정도면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도 충분했다. 그녀의 젖꼭지는 연하고 섬세한 장밋빛 갈색을 띠고 있었다. 태양빛 갈색으로 그을린 거친 그의 손에 비하면 그녀의 피부는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녀는 숨소리가 빠르고 얕은 리듬을 탈 뿐, 그 외에는 아주 차분히 자제력을 유지했다. 벤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고,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벼랑 끝에서 그녀의 등을 꽉 끌어당겨 구사일생으로 구해줬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자부심은 대단한 것 같았지만, 그는 아직까지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결국 알몸인 이 여자를 품에 안아버리면 어쩌나? 바지 지퍼를 찢을 정도로 발기된 성기가 위협한다면? 질리언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녀를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섹스를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참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놓아주는 데 의지력을 총동원해야 했다. 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동공이 팽창되어 초록색 눈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는 억지로 마음을 돌리고는 필요한 물건을 찾았다.

「젖은 물수건이 어디 있다고 했소?」

그의 목소리는 다소 긴장되고 거칠었다. 게다가 헛기침까지 했다. 그녀 역시 침을 삼켰다.

「앞쪽 지퍼 주머니에.」

그는 물수건을 찾았고 질리언은 자기가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내밀어 수건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는 반라 상태인 것은 무시한 채 최대한 점잔을 빼며 구석구석 몸을 닦아 내었다. 그 앞에서 목욕하는 것보다 더 친밀감을 더해주는 일이었다. 그 사람 앞에서 목욕한 일은 그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일종의 시위 같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벤도 약간 달랐다. 자상하게 돌봐주는 그의 보살핌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을 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노리는 것이 그의 성미에 딱 맞는 일이었다.

그녀가 일을 끝내자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들어 손목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멍든 부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왼쪽 손목에도 똑같이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타박상도 여러 가지 형태로 그녀의 팔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그는 조용히 말하며 엎드려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등과 팔 근육도 어깨 통증만큼 쑤시고 아플 거요.」

「도포제가 도움이 되겠죠.」

그녀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가 강한 향의 로션으로 마사지를 해주어서 다음날 움직일 때는 통증이 훨씬 덜할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 일으켜 앉히고 양팔을 문질러 주었다. 팔 역시 엄청날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왼쪽 어깨는 부어 있는 데다 멍까지 들어 그가 붕대를 다시 감아주었고, 그녀는 그의 도움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밤에는 속옷은 입으면 안 되겠소. 지금 이대로 잠을 자요. 당신 곁에 내가 있어 주면 어떻겠소?」

그가 퉁명스럽게 곁에 있겠다고 말하지 않고 의견을 물어준 것이 그녀는 놀라웠고, 결국은 그와 억지로 말씨름까지 하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한 순간 그 제의를 신중하게 생각하며 고심했다.

「고맙지만, 혼자 있는 게 좋아요. 오늘밤에는 깊이 잘 수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이 놀랄 거라 생각했소. 당신은 너무 지쳐 있소. 테이프로 지퍼를 봉하면 될 거요. 하지만 혼자 어떻게 누워요? 일어나고 누우려면 부축을 받아야 할 텐데.」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눕는 것은 쉬워요. 그냥 넘어지면 되니까. 하지만 오늘밤에는 테이프를 붙이지 않고 그냥 둘 거예요. 아침에 당신이 들어와야 하잖아요. 일어나는 건 혼자 못할 것 같거든요.」

그는 그녀의 머리를 뒤로 쓸어 올려주다가 잠시 그대로 있었다.

「당신은 왜 그랬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가 물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과 릭 사이에는 따뜻한 혈육의 정 같은 건 느낄 수 없던데.」

「오빠잖아요.」

그녀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도 당신을 위해서 똑같이 할까?」

「모르겠어요. 아마 아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난 오빠가 아니잖아요.」

만약 오빠를 구할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냥 죽게 두었다면 그녀는 죄책감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 사이가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 맺어진 관계라면 경우가 달랐겠지만.

벤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마치 이해라도 한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밤은 혼자 지내요. 내가 자지 않고 지켜주겠소. 두트라는 당신 근처에 얼씬도 못할 거요.」

그가 약속하는 말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부상이 머리까지 바보로 만들지 않아 다행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두트라가 내 텐트에 들어오는 게 아니에요.」

그가 싱긋이 웃자 눈가에 잔주름이 졌다.

「날 바보로 만들지 말아요. 일이 순탄하게 잘 진행되고 있는 거 알고 있소. 당신은 이미 아침에 들어오도록 초대까지 했잖소.」

「옷 입는 걸 도와달라는 거죠.」

「그렇게 고집하신다면.」

그는 다시 몸을 숙여 그녀에게 키스한 채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

「나를 위해서라면 옷을 입지 말아요. 당신은 이렇게 달콤한 일을 왜 숨기려 하는지 모르겠소. 벌써 오래 전에 끝냈어야 했는데.」

그는 그녀의 젖꼭지 주위에 손가락 흔적을 남겨놓고 젖꼭지의 주름이 오므라들게 하는 걸을 즐겼다.

「당신은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할 거예요.」

그녀는 쏘아붙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팔이 다 나으면 말이죠.」

「신의 섭리를 이상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모양이군.」

그는 힘을 주어가며 말했고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해졌다.

「내가 필요하면 불러요, 내 사랑.」

「그러죠.」

그는 한번 더 입맞춤 한 뒤 그녀가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는 얇은 담요 한 장을 덮어주었다. 산 속의 밤은 추워서 담요를 반드시 덮어야 했다.

그가 랜턴을 가지고 나가자 그녀는 어둠 속에 남았다. 심신이 피로에 지친 그녀는 섹스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만 빼고 두 사람 사이에 오늘같이 친밀한 교감이 생긴 것에 대해 신중히 생각했다. 그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이제 더 힘들어 질 것이다. 그가 자신의 앞가슴을 움켜잡았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그 눈빛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의 온몸에 욕망이 꿈틀대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를 만질 때 느껴지던 그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은 온 살을 뜨겁게 달아오르도록 하는 불같은 느낌이었다.

빌어먹을 벤. 그는 그녀의 성감대 다루는 법을 알았다.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진 그의 손길은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그날 일어난 사건들이 영화장면처럼 번쩍이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강타한 억수같은 비에 뒤범벅이 된 장면이 두려움에 휩싸인 마르팀 얼굴에 가려 사라졌다. 그런 장면이 떠오르자 잠이 싹 달아났다.

그녀는 잠시 선잠이 들었다. 생각이 어디서 끊겼는지 몰라도 다시 정신을 차렸다. 릭이 떨어지려는 것을 보고 무턱대고 그녀 자신을 내던졌던 일,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움켜잡았던 순간들. 이 끔찍한 일들이 진득거리는 벌꿀 흐르듯 천천히 그리고 생생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자칫하면 두 사람 다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그때 강철 바이스가 그녀의 발목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벤. 그는 그녀 바로 곁에 있었다. 이런 상황을 빨리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벤…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녀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다. 그리고 왜 ‘아가씨’라는 말이 ‘내 사랑’이 되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