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3일째가 되자 지형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평평한 분지가 어느새 울퉁불퉁한 살길로 이어졌다. 질리언은 벤의 바로 뒤쪽으로 올라섰다. 근심에 찬 그녀의 눈은 무언가를 찾는 듯 헤매었다.
「뭘 찾고 있소?」
벤이 투덜대는 투로 말했다.
그는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위험이었다. 어디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저 멀리 있을 수도 있지만 바로 코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금방이라도 덤불 속에서 돌격해 나올지도 모른다. 벌떼의 습격처럼 간단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부족의 영역을 침범해 성질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위험은 화살의 모양으로 다가올 것이다. 모든 일을 세심하게 살피고 대처하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한번은 후앙가나의 톡 쏘는 강한 향을 멀리서 알아차리고 그 동물을 피해 멀리 우회한 일도 있었다. 그놈은 아주 위험한 멧돼지였다.
벤은 원래 코스로 돌아가게 된다고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우회한다는 것은 질리언의 신경을 거슬리기에 충분했다.
「평평한 산마루를 찾고 있어요.」
그녀는 대답했다.
「얼마나 가까이 갈 계획이오?」
「모르겠어요. 어쨌든 상관없어요. 사실 그곳에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위치를 높이려고 가는 것뿐이에요. 오르막이 시작되면 하루만 걸어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랬군.」
그는 아주 냉소적으로 말했다.
「지침이 그렇게 분명하게 서 있는지는 몰랐소.」
그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벤의 널찍한 등을 쳐다보며 땀으로 넓게 얼룩진 등을 돌멩이로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마 이 남자의 단단한 몸에 부딪치면 돌멩이가 튀어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날 그는 길을 가로막는 나무줄기를 자르기 위해 벌채용 칼을 휘두를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셔츠 소매 때문에 화가 나서, 아예 소매를 찢어버렸다. 맨살로 드러난 팔이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울퉁불퉁 불거졌다. 남성다운 근육을 지켜보는 그녀의 복부 근육도 단단해졌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루 정도 걸어도 평평한 산마루를 보지 못하면 다시 돌아가 그곳을 찾을 때까지 왔다갔다 행군을 해야 할 것 같군.」
그녀는 그의 머리를 겨누면서, 유쾌한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머리는 그의 신체 중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큰돌을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그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멋진 생각이에요! 이제 무조건 그곳부터 찾아야 하는 부담이 사라졌군요.」
벤은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일 때면, 특별히 말하기 거북한 일이나 심술궂은 행동을 구상 중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어깨너머로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역시 그녀의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그녀는 수족, 다시 말해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질리언 같은 여자는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강인하고 자신감이 흘러 넘쳤으며 분별력 있는 여자였다. 그가 특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구석은 없었지만. 그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성적 자제력이 부족해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고, 거기다 젖가슴이 큰 여성에게 항상 눈독을 들였었다. 질리언은 그가 방심하지 않도록 긴장시키는 미묘하고 다소 비꼬는 듯한 유머 감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마지막 두 부분의 성적 매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협박하거나 난처하게 만들 수도 없고, 더욱이 유혹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도대체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2주가 넘도록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서 3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시켰으며, 생리 현상을 해결하러 가거나 지난 3일간처럼 밤에 텐트의 지퍼를 채우고 잘 때에만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심지어 그가 볼일을 보는 중에도 가까이 자리를 잡아, 잠시도 두트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른 여성과 그렇게 가까운 접촉을 유지하도록 강요받았다면 그는 지금쯤 따분해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질리언 역시 그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지켜볼 수 없는 밤에도 벤은 잠을 자다가 그녀가 바로 곁에 없으면 화들짝 놀라 깨어나곤 했다. 두트라가 그녀의 텐트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케이츠는 두트라의 머릿속에 행동을 조심하도록 분명히 주지시켰지만, 벤은 한시도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질리언은 텐트 자락에 붙은 지퍼가 움직이지 않도록 테이프로 봉했고, 만일에 대비해 총도 준비했다. 그러나 두트라가 자기 방식대로 텐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질리언이 두트라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제때 깨어날 수 있을까? 그녀는 할 수 있는 능력을 몸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실 그녀가 항상 벤보다 한 발 앞서 걸었기 때문에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다 해도 걱정과 초조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갖지 못하면 아예 폭발해 버리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말이나 지껄이는 멍청이가 될 같았다.
그녀를 마나우스까지 무사히 데려가면 그녀와 둘이서 호텔 방에 틀어박혀, 다른 일이 생길 때까지는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새 일을 구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한 달 내내 사랑을 나누다니…. 한동안 그는 그림 같은 환상에 빠져들었다. 순간적으로 다른 일자리를 구하면 그녀를 혼자 남겨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녀는 이미 떠나고 없을 것이다. 그러면 안 되지. 자립심 강한 셔우드 양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훌쩍 날아가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어딘가에서 오래된 유골을 파내느라 토끼처럼 뛰어다닐지 모른다.
그는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질리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 뒤쪽으로 전체 대열이 흐트러지며 멈추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가 데려다 주는 자리에서 기다리시오.」
그는 말을 홱 내뱉고는 뒤쪽으로 돌아 억센 식물 줄기를 거침없이 베어버렸다.
「루이스, 이성을 잃었군요.」
그녀는 다시 벤의 뒤를 쫓으며 중얼거렸다.
「더위 때문에 그럴 거예요.」
「더위 때문이 아니오.」
그의 투덜대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당신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야.」
그녀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머리가 아예 콱 막혀버렸군요.」
「맞아, 막혀버렸어, 머리가 아니라서 그렇지.」
그의 목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벤이 그런 형식적인 말에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아서 대신에 질문을 던졌다.
「독신 생활을 그렇게 힘겨워 하면서 다른 탐험 때는 어떻게 견뎠어요?」
벤은 다시 어깨 너머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강렬한 푸른 눈이 엷은 초록색으로 흐릿하게 빛났다.
「늘 그런 건 아니오.」
「뭐가 아니란 말인가요?」
「설명하기 어렵군.」
「이번 여행은 뭐가 다르단 말이에요?」
「당신이 있잖소.」
「당신은 그런 생각만 하는군요?」
「비슷하지.」
그가 다시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이 남자가 포기했겠지? 좋았어. 자기가 자초한 일이지 뭐.
벤은 다시 걸음을 멈추더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옆에 멈춰 서야 했고, 그녀 뒤를 따르던 사람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돌연한 정지에 모두들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벤이 천천히 총을 장전시켰다.
그는 투가노 어로 페페에게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고, 초조해진 작은 인디언도 귓속말로 답했다.
「후퇴!」
벤은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중하게 행동하시오. 어떤 소리도 내지 말고.」
말보다 행동이 어렵다지만 페페와 유로지오의 차분하고 긴박한 명령 하에 그들은 일제히 물러났다. 잔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디디고 팔다리가 부딪히지 않도록 손을 짚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벤은 다시 멈춰 섰다. 질리언은 벤의 앞쪽을 보려고 했지만, 그의 넓은 등이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꼼짝 말고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때 질리언은 그놈을 보았다. 그 주위를 둘러싼 숲이 전경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색의 약탈을 일삼는 사나운 눈은 일행의 선두에 선 벤에게 고정되었다. 그놈이 걸친 화려한 황금색 코트는 흑장미 모양의 무늬와 얼룩진 잎 모양이 뒤섞여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두툼한 꼬리 끝을 자기 생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에 바싹 붙이고 있었다.
떡 하니 버티고 앉아 기다리는 재규어의 강인한 근육은 긴장되어 있었다. 질리언은 근육이 너무 경직되어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놈이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거는 것처럼 느껴져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언제 습격해올지도 모르는 판에 눈을 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꼼짝 않고 서 있는 이 순간에 습도는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정글의 강한 냄새는 코끝을 찔렀고, 거기에 다른 냄새까지 더해졌다. 큰 고양이가 내뿜는 자극적인 향이었다. 땀방울은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눈을 찔렀다. 그들 모두 오랫동안 꼼짝 않고 서 있었고, 처음에는 경계하던 주위의 새들도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작고 화려한 벌새들도 그들 가까이 날아들었고, 15센티미터는 족히 될 만한 무지갯빛 푸른 날개의 나비가 엽총 원통에 나풀거리며 올라앉기도 했다. 정글 숲 비행을 시작하기 전에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려고 살짝 내려앉은 듯 보였다. 그들 머리 위, 원숭이들도 평소에 하던 대로 서로 짖어 대고 있었으며, 도마뱀도 여느 때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덫에 걸린 개미와 흰개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곳에 있는 그들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는 큰 고양이의 황금색 시선에 박혀 있었다.
재규어가 습격한다면 벤은 그놈을 죽여야 할 것이다. 그녀 뒤에 있는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그 녀석은 즉시 공격해 올 태세였다. 그녀는 릭이 인내심을 갖고 자제해 주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놀란 원숭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원숭이들이 앞다투어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나뭇가지가 원숭이들의 동요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또 그들이 매달린 열대 덩굴식물들도 춤을 추며 떨고 있었지만, 벤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깊고 거친 기침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목덜미 털이 닥쳐올 위험을 느끼고는 삐죽삐죽 솟아올랐다. 두려워진 그녀가 뒤돌아보았을 때에는 재규어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 시간은 족히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그 정도는 충분히 지났을 것이다. 그녀 뒤에 있던 릭이나 케이츠는 성격이 급했지만 유로지오의 경고에 재빨리 입을 다물고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드디어 벤은 페페에게 곁으로 다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페페는 들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질리언을 지나 천천히 걸어 나갔다. 페페와 벤은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더니 10분쯤 지나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무와 덤불을 살폈다.
「재규어로군.」
벤은 한마디로 결론 지었다.
「저런 망할.」
릭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이 그 빌어먹을 고양이를 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한 시간이나 죽치고 서 있었잖아요. 쏘아 버렸으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잖아요?」
「그녀석이 공격하면 쏘려고 했어. 공격하지도 않는데 죽일 것까지는 없잖아.」
큰 육식동물을 죽이는 일이 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셔우드에게 법 따위는 문제도 안 될 거라는 생각에 계속 말을 이었다.
「죽이지도 않을 건데 총을 쏘고 싶진 않았어. 재규어를 숭배하는 부족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위치를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잖소.」
이 두 가지 이유는 릭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는지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별다른 동요가 없었고, 일행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몇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모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큰 고양이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질리언은 평평한 산마루를 찾지 못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오르막길이 시작된 이후로 아직 하루가 꼬박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일까지는 산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겹겹이 가려진 틈 사이로 하늘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방향이든 바로 앞도 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정해진 코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다면 산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고심했다. 또한 지형이 점점 더 험악해져서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발을 내딛어야 했다. 첫날부터 이런 길을 걸었다면 아직 반도 못 왔을 것이다. 그들 모두 전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제 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다리의 통증도 더욱 심해졌다.
그도 그녀의 힘겨운 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가 속도를 늦추었던 것이다. 그가 바위처럼 단단한 신체를 어떻게 단련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1그램의 지방이라도 한 시간이면 다 타버리고 없을 것이다. 벌채용 칼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별로 힘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고 민첩성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순수한 근육으로 뭉쳐진 벤과 두 명의 투가노는 행군을 시작한 이래로 체중이 줄지 않았지만, 나머지 일행은 체중이 많이 줄어들었다. 질리언도 바지의 허리와 엉덩이 부분이 헐렁해진 걸로 봐서 3킬로그램 정도는 족히 줄어든 것 같았다. 운동으로 근육층이 늘어나서 몸이 달라졌기 때문에 체중은 그렇게 많이 줄지 않았겠지만 치수는 많이 줄었다. 바지를 어떻게 잡아매어야 할 지 고민이었다. 그녀의 망사 벨트도 이제 마지막 고리에 끼워져 있었다. 허리에 나무 덩굴을 묶어 지탱해야 할 판이었다.
그때 머리 위로 천둥소리가 쾅쾅 울리기 시작했고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들이 겹겹이 가려져 마치 우산을 씌워놓은 듯 비가 곧장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었지만, 대신에 잎사귀에 맺힌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나무줄기나 넝쿨나무 아래로 빗물이 흐르면서 실개천을 이루었다. 비가 그치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지 모르는데 숲속에서 마땅히 비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되자 그들은 행군을 멈추고 방수포 아래에 몸을 피했다. 비가 그친 뒤 한 시간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습도가 최고 수준까지 올라 강렬한 적도 부근의 태양 빛을 받고 있는 정글은 말 그대로 거대한 찜통 같았다.
다행히 그날 폭풍은 금세 지나갔고 그들은 3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습기로 무거워진 공기에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높은 습도가 사람들의 불쾌지수를 높여 놓아서인지 그날 오간 대화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더 험악해진 땅을 기어올라야 한다는 부담감에 더해져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걸음을 옮겼고, 갑자기 드문드문 난 식물 사이로 비추는 눈부신 햇볕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계곡의 한 쪽에 서 있었고, 바닥 아래로는 얕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오른 산들은 수백 만 년 전 창조된 이후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 바로 앞에 있는 산을 다른 산들에 비해 작으면서도 정상부가 넓고 평평하여 언뜻 보아도 최상의 조건을 갖춘 땅이었다. 다소 초라해 보이지만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는 듯 평화롭게 졸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벤.」
그녀가 불렀다.
「바로 여기예요.」
멈춰 서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울퉁불퉁하게 휘말려 올라간 가장 높은 고지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아래로 천천히 내려와 바로 앞의 평평하게 펼쳐진 산에 고정되었다.
「그런 것 같군.」
그가 말했다.
「당신이 다음 여행지 좌표를 찾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가서 캠프를 치고 야영을 준비하겠소. 내 귀가 멀지 않았다면 앞쪽에 작은 폭포가 있을 텐데. 페페가 보기에 그곳이 적당할 것 같으면 우린 오늘 하룻밤을 해결할 수 있을 거요.」
「당신이 다음 여행지 좌표를 찾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가서 캠프를 치고 야영을 준비하겠소. 내 귀가 멀지 않았다면 앞쪽에 작은 폭포가 있을 텐데. 페페가 보기에 그곳이 적당할 것 같으면 우린 오늘 하룻밤을 해결할 수 있을 거요.」
정말 폭포가 있었다. 그리 크지도 않고 물줄기도 세차지 않았다. 3미터 가량의 물줄기가 수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떨어져 바위 덩어리를 마멸시켜 홈을 이루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개울물은 다시 리오 니그로에서 합류에 아마존 강으로 흘러내렸다. 페페와 유로지오는 물이 안전하다고 알렸다. 두트라는 목욕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뚱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갔다. 질리언은 캠프에 남아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웬일인지 벤 역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나와 목욕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망보는 사람도 없이 벌거벗고 목욕하고 싶다는 거요?」
그는 조용히 말을 되받아쳤다.
「당신이 목욕하는 동안 망을 봐주겠소. 내가 목욕하는 동안 당신이 그래주면 되잖소. 다른 사람과 함께 갔어야 했지만, 당신을 여기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소. 물론 두트라가 훔쳐봐도 상관없다면….」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셨군요.」
그녀는 그의 계획이 내키지 않았지만 망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녀는 사생활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벤 앞에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생각해보면 안전한 것도 아니다. 차라리 더러운 채로 참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선 채 최대한 빨리 목욕을 끝내면 될 일이었다. 그녀를 지켜주겠다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유혹하는 데 눈이 멀어 책임을 저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유혹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목욕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질리언은 다른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수건 속에 비누와 샴푸 그리고 깨끗한 속옷을 넣어 감았다.
벤도 똑같이 준비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가방을 여기 놔둘 거요? 케이츠가 가방을 뒤져볼 게 뻔하잖소.」
그녀는 골몰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가방에서 총을 꺼내 목욕용품 속에 슬며시 밀어넣었다.
「지도는 어떡할 거요?」
「케이츠는 읽지도 못해요.」
그녀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요? 안 보고 싶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녀는 노트를 꺼내 두꺼운 종이 한 장을 펼쳤다. 기본적인 그림 몇 개가 그려져 있었지만, 위치를 나타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지도는 그가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쓰레기 같았다.
「이거 읽을 수 있는 거요?」
그가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아뇨. 해독할 수 있죠.」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린 지금 어디 있는 거요?」
그녀는 그 종이에서 중간 부분에서 적혀 내려오는 문장을 가리켰다.
「바로 여기예요.」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암호를 따로 적어놓지는 않았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바보인줄 아세요?」
「이렇게 난해한 것을 해독하는 데 암호도 적어놓지 않는단 말이오?」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브라질에 오기 전에 암호를 전부 해독해서 머릿속에 입력시켰어요. 이건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죠. 어쨌든 암호는 각 단어별로 표시되어 있어요. 당신이 단어의 열쇠를 모르는 이상 어떤 암호도 풀 수 없죠. 물론 전 기억하고 있지만요.」
「이건 정말 케이츠를 한방 먹일 만하군.」
벤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케이츠는 우리가 캠프를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펄쩍 뛰겠지. 적어도 30분 정도는 걸릴 텐데.」
「더 오래 걸려요.」
질리언이 고쳐 말했다.
「이번 기회에 빨래도 좀 할 거예요.」
「좋은 생각이군요. 이왕 하는 김에 내 것도 좀 빨아줘요.」
「당신 건 당신이 알아서 해요.」
벤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여자요. 당신의 남자를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소?」
「당신을 내 남자로 인정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러니까 문제 될 일도 없죠. 게을러서 자기 옷도 제대로 세탁하지 못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할 지 모르겠군요.」
그의 표정은 비통하기까지 했다.
「당신이 결혼 못한 이유를 알겠군.」
「당신이 결혼 못한 이유도 알 것 같네요.」
「난 결혼할 마음이 없었을 뿐이오.」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는 잠시 그녀를 지켜보았다. 서로 교환한 말이 만족스러웠는지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톡 쳤다.
「약혼한 적 있소? 심각한 관계였소?」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청혼을 받은 적은 있어요. 그때가 대학 다닐 때였는데 그땐 관심이 없었죠.」
「그후론 없었소?」
「데이트는 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한 남자와 지속적으로 만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서 주로 어떤 걸 즐겼소?」
「일이요.」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그의 표정을 읽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하는 게 데이트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결혼은 관심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데이트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구요. 어떤 사람을 친구로 좋아한다면 그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두 사람 관계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고, 어디 제대로 가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는 벌떡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들과 발코니에서 뒹굴었던 거군?」
그는 몹시 격분한 듯 다그쳤다.
그녀는 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현기증이 일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발코니의 해먹을 기억해내곤 웃기 시작했다.
「전 낯선 사람과 발코니에서 그런 짓을 한 적 없어요.」
아니 어느 누구와도.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달콤하고 상냥한 어조로 변했고, 벤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를 뒤흔들어놓고 싶었다.
「좋소. 적어도 경험이 있긴 한 거군.」
「그런데 왜 그렇게 냉소적이에요? 밤새도록 해본 적은 없는 모양이죠?」
「많았소. 예전에 젊고 무모할 때였지. 지금은 조심하는 편이오.」
그녀는 그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런 걸요.」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크게 활보하며 멀어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가까이 걸어와서 멈춰 섰다. 그는 부츠로 그녀의 발을 툭툭 찼다.
「그럼 나와 해보지 않겠소?」
그는 턱을 치켜세우며 제안했다. 정말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참아내느라 볼 안쪽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짐짓 당황한 척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짓을 하는 정확한 의도가 뭐예요?」
그는 시선을 내리고는 의혹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 집어 쳐.」
참다못한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의 눈이 야릇하게 변했다.
「절정을 느껴보지 못했군? 분명히!」
너무 늦어버렸다. 질리언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치를 떨며 벌떡 일어섰다.
「저리로 꺼져버려요.」
단호하게 경고하고는 홱 돌아서버렸다. 벤은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황홀경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도전의식을 느꼈다. 남성으로서의 성적 매력을 자신하고 있는 그가, 그녀를 가지려는 욕망을 느끼고 그녀에게 성적 쾌감을 가르쳐주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약을 좀 올리려고 했을 뿐인데 그의 이기심에 직접적인 도전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확신에 찬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성큼성큼 걸어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거냐 하면,」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가씨, 내가 얼마나 잘 해줄지 모르겠소? 기껏 덤벼들어서는 5분만에 나자빠지는 남자로 보는 건 아니겠지? 천천히 즐기는 게 내 스타일이오. 한 시간 이상은 끌 수 있지.」
한 시간이라니. 세상에.
그녀는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왔다. 그가 섹시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정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제가 당신한테 그런 부탁한 적 있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그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들어올렸다.
「전 정말 혼자 있고 싶어요. 벤 루이스,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그는 재규어처럼 확신에 차서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알았어요.」
그녀는 포기한 듯 보였다.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그는 걸음을 멈췄다.
「어떤 거짓말을 했다는 거요?」
「당신을 좀 놀려주고 싶었어요.」
「놀리다니.」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제기랄! 정말 그랬단 말이오?」
「아뇨, 꼭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랬군. 날 우습게 봤어.」
그녀는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그게 말이죠… 당신 태도가 신경에 거슬려서.」
「내 태도가 어쨌다는 거요?」
「그렇게 다그치지 말아요. 당신 태도, 당신도 알잖아요. 여자들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잖아요. 게다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든, 언제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는 팔짱을 꼈다.
「그럴 듯한 말이군.」
그녀도 팔짱을 꼈다.
「저는 아니에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심술이 나서 거짓말을 했던 거요?」
「당신이 하는 짓에 비하면 나쁠 것도 없죠? 당신은 그저 날 유혹해서 같이 잔 여자 머릿수나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잘못 봤소.」
「그래요?」
「그렇소.」
「그럼, 말해 보세요.」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벤이 너무 바짝 다가왔기 때문에 악마 같은 푸른 눈 속의 밝은 줄무늬까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했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게 얼마나 자주 충동질을 해댔는지 모를 거요. 그만큼 당신은 내 혼을 송두리째 빼놓았단 말이오.」
그는 질리언이 말하던 식으로 단어를 강조해가며 말했다. 그녀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떨구어지는 시선을 붙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떡하지? 그녀는 비꼬는 말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 해도 안달이 나서 달려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기뻐 춤이라도 춰야 하나요?」
「잠깐만,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기혼녀와 함부로 놀아나지는 않소.」
「저도 놀림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말 잘 했소.」
그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피어났다.
「당신은 그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거군. 그러면 좀더 대접받는 느낌이 들기는 하겠지.」
일행들이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소리 때문에 그녀는 벤은 때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목욕용품을 획 낚아채고는 등을 돌렸고 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캠프에 모여들었을 때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벤은 엽총을 어깨에 매고는 무심결에 말해버렸다.
「몰래 훔쳐보는 놈은 머리를 날려버릴 테다.」
일행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질리언에게도 쉬운 일이었다. 골짜기는 수백 미터 정도 아래까지 비스듬히 뻗어 있었고, 울창한 정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좁은 길은 작은 폭포 옆에서 끊겼다. 벤은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우리는 맞은편 쪽으로 건너갈 거요.」
그가 말했다.
「그래야 길을 더 잘 살필 수 있소. 폭포 뒤에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을 거요.」
정말로 공간이 있었다. 그들은 반대편 바위로 건너려고 길을 골라잡았다. 벤은 어깨에서 총을 내려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먼저 하겠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다소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눈 후로는 그 앞에서 옷을 벗는 데에도 신경이 많이 쓰였다. 어쨌든 그가 먼저 목욕을 한다니 그녀가 목욕할 때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벤이 먼저 목욕하겠다고 제안한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가 그녀의 아픈 등을 마사지해주었을 때처럼 실제로는 이해심 많고 신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