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9화 (10/24)

9

등에 맨 배낭이 어찌나 무거웠던지 정오에 잠시 멈춰 쉴 때까지 그녀는 겨우겨우 걸음을 뗄 수 있을 정도였다.

행군이 아주 힘들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배낭의 가죽끈이 어깨를 팽팽하게 당겼고, 허벅지는 화끈거렸다. 정글 속을 걷는 일은 달랑 짐을 하나 짊어진 것만으로도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심지어 무겁고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데에도 고통이 뒤따랐다. 그녀는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걸 대비해서 주변을 잘 살피며 얼굴을 때릴 만한 덩굴더미를 피해 나아갔고, 두꺼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길을 방해하는 것들을 치워버렸다.

벤과 두 투카노인, 페페와 유로지오는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벤은 땀에 흠뻑 젖어 있기라도 했지만, 인디언들은 땀도 흘리지 않았다. 질리언은 적어도 짐꾼들만큼 잘 견뎌내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고, 두트라보다 더 나을 정도였다. 예상했던 대로 릭과 케이츠는 여행에 대비해 신체적 단련을 철저히 하지 않은 탓으로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첫날이라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완전히 지쳐서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 깊고 거친 소리로 헐떡거렸다. 벤이 잠깐의 휴식을 외쳤을 때, 일행은 가방을 내려놓을 여유도 없이 서 있던 자리에 바로 털썩 주저앉았다.

질리언은 어깨에서 가방을 벗어 밑에다 던지듯 내려놓았다.

「물 좀 마셔.」

그녀는 릭의 안색이 창백함을 한눈에 알아채며 말했다.

「소금정제야, 먹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 좀 마시라니까.

고집스럽게 그녀는 말했다.

릭은 한쪽 눈을 뜨더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그는 성가신 듯 말했다.

「위세 부리기는.」

「질리언의 말을 들어요.」

벤의 어조는 단호했다.

「질리언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싶으면 그녀가 말한 대로 해요. 당신이 일행과 보조를 맞춰 함께 떠날 준비가 안 되면 여기 그냥 내버려두고 갈 거요.」

케이츠는 언쟁에 끼여들지도 않았고, 잠시 후 물을 들이켰다. 질리언은 그가 소금정제도 먹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벤을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전혀 기쁘지 않았고, 그가 탐험 비용 전액을 후원하는 데도 혹시나 뒤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싫었던 모양이다.

부루퉁하던 릭은 케이츠가 하는 대로 따라 했고, 곧 기분이 나아졌다. 그 정도면 충분했고, 어쨌든 페페가 음식을 준비했을 때에는 상당한 양을 먹어치울 만큼 회복되었다.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두를 때, 릭은 질리언의 가방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내가 네 가방을 들 테니까, 넌 내 가방을 들어.」

심술궂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러면 널 건방진 잔소리꾼으로 생각 안 할 거야. 난 네가 한 시간이나 견뎌낼지 궁금해. 짐의 무게를 공평하게 나눠 들었다면 넌 지금까지 버텨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녀는 오빠의 적개심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보일까봐 얼른 몸을 돌렸다. 그녀는 오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눈물 따위를 보이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란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오빠의 관심 따위를 기대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하지만 그는 유일한 형제였으므로, 그녀의 인생에서 오빠를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오늘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직 오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빠의 공격에 쉽게 상처받은 자신이 놀라웠다.

그녀는 릭이 자신의 가방을 가져간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 안에는 총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로 오빠와 싸우고 싶지 않았고,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질리언 가방에 손대지 마시오.」

다시 한 번 벤이 끼여들며 말했다. 릭 셔우드의 말과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그녀는 당신만큼 무거운 짐을 메고 간다고. 아니 무게 가 더 나갈지도 모르지. 다시 생각해보니 당신이 가방을 둘 다 들고 가면 되겠군. 그래야 무게를 비교할 수 있잖소. 그러다가 질리언의 가방을 이내 얌전히 내려놓을 테고, 그때부터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을 거 아니오?」

릭은 벤을 쳐다보며 그녀의 가방 곁에 서 있었다.

「빨리 집어들어!」

벤이 쏘아붙였다.

릭은 천천히 가방을 들어올렸다. 깜짝 놀란 표정이 릭의 얼굴에 스쳤고, 그는 질리언을 힐끗 쏘아보았다. 다시 비웃음을 지으며 입이 뒤틀렸다. 그리고 가방을 땅에 털썩 내려놓았다.

「가만히 들고 있어!」

벤은 날카롭게 말을 내뱉었다.

「조용히 내려놔.」

그는 양발로 떡 버티고 서서 머리를 약간 내렸다. 양손은 허리춤에 느슨하게 걸쳤지만, 마치 법을 집행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눈에선 분노가 일었지만, 릭은 벤의 명령대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가방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나도 루이스 말에 동의해.」

케이츠는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릭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입 좀 닥치고 있어. 네가 여동생을 싫어해도 상관은 없지만, 계속 귀찮게 굴면 우리랑 함께 탐험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려 들 거야. 그녀와 루이스만 여행을 계속하게 놔둘 수는 없잖아. 그녀의 좋은 면을 보려고 최선을 다해 보라고. 농담 아냐.」

릭은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일단 충고를 받아들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질리언은 배낭을 집어들고 조용히 가죽끈 사이로 팔을 집어넣은 다음, 가슴 위에 있는 버클을 잠그며 단단히 조였다. 벤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소?」

그녀는 벤이 어떤 의미로 물어보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릭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에 대해 묻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지금의 행군을 잘 견디고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대답이야 어느 쪽이든 다 똑같으니까.

「괜찮아요.」

벤은 주위를 돌며, 모두가 짐을 정리하고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일행이 배에서 떠난 뒤부터 그는 변했다. 벤은 들짐승만큼 신중하고 민첩했으며, 두 눈을 가늘게 듣고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샅이 주변을 살폈다. 그의 어조는 날카롭고 명령조였으며, 이제 그녀는 그가 아마존 최고의 가이드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외형도 변했다. 바지는 종아리 중간까지 올라오는 부츠 속에 쑤셔 넣어졌고, 셔츠는 깔끔하게 바지에 넣어 입었다. 그리고 총을 넣은 총집은 엉덩이에 두른 가죽 허리띠에 내걸고 있었는데, 옛날 서부의 총잡이 같았다. 또한 양면에 날이 선 벌채용 칼을 칼집에 넣어 허리에 걸었고, 왼쪽 어깨의 멜빵엔 엽총을 걸었다. 이 모든 장비는 좀 전에 릭을 포기시키는 데도 한 몴 거들었다.

「전원 준비됐소.」

벤이 외쳤다.

「좋아. 갑시다.」

그가 앞장섰다. 필요할 땐 벌채용 칼을 사용해서 길을 터 주었다. 페페와 유로지오는 들것을 들고 뒤를 따랐으며, 그 뒤에 질리언이 있었고, 그녀 바로 뒤에 조르지와 플로리아노가 또 들것을 갖고 걸었다. 비센테와 마르팀, 조아킴과 두트라가 한 팀을 이루었고, 릭과 케이츠는 맨 꼴찌로 속도를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질리언은 힘이 많이 충전되었지만, 두 시간이 지나자 발을 옮길 때마다 힘이 들고 부담스러웠다. 가방의 가죽끈이 그녀의 어깨 근육을 파고들었고, 그 불편함 때문에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줄을 옆으로 옮겨보려고 했지만, 가방 무게 때문에 어려웠다. 질리언은 가죽끈 아래로 엄지손가락을 끼워 넣어 눌려진 곳의 압력을 덜었다. 몇 시간 동안 통증을 참아낼 방법을 몰랐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일은 어깨 보호 패드 같은 거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녀의 다리는 쿡쿡 쑤시는 통증에도 잘 견디고 있었다. 집에서 매일 10킬로미터씩이나 달렸고, 규칙적으로 바벨을 들어올리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등에 무거운 배낭을 지는 데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운동을 하지 않고 배에서 며칠을 보냈지만, 그녀는 3일 정도까지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그때까진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그녀의 뒤에 있던 조르지가 조용히 말했다.

「가죽끈 때문에 고통스럽죠, 세뇨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 너머로 쳐다보았다.

「예, 정말 그러네요. 내일은 패드를 깔아야겠어요.」

「저희 들것에 가방을 올려놓으세요. 그래도 저흰 괜찮거든요.」

「말만 들어도 고마워요.」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감격했다.

「하지만 제 몫을 감당하지 못하면 따라나설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당신은 여자잖아요, 세뇨라. 남자들만큼 무겁게 지고 갈 필요는 없어요.」

「아뇨. 이 여행에서 저도 똑같이 해낼 거예요. 전 정말 튼튼해요. 곧 무게를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될 거예요.」

「그래도 혹시 너무 무거운 것이 있으면 저희가 들어드릴게요.」

그들의 얘기소리를 들은 벤이 어깨 너머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벤은 전문자의 눈으로 질리언의 인내심을 높이 평가하면서, 재빨리 살펴보았다. 질리언은 벤이 자신들의 대화의 요점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들었다고 확신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러나 분명히 만족스럽게 그는 여행길로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정확한 행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신중하게 상황을 고려한 벤은 그날의 행군을 햇빛이 두 시간 남짓 남아 있는데도 모두 정지시켰다. 질리언은 가슴을 조이던 가죽끈을 풀고, 근육 보호에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어깨에 맨 가방을 느슨하게 했다. 그리고 곧장 가방을 땅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텐트를 치기 위해 장소를 정리해야 했고, 벌채용 칼을 집어들고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덤불을 치우려고 장갑 한 켤레를 꺼내서 꼈다.

「뱀을 조심하시오.」

벤이 소리쳤다.

「경고해줘서 고마워요. 조심할 거예요.」

「큰삼각머리독사는 낙엽이 깔린 땅바닥에 누워 있는 걸 좋아하지. 그리고 먹이가 걸려 넘어지길 기다릴 거요.」

빌어먹을 벤.

그녀는 멈춰 서서 땅바닥을 아주 세심하게 조사한 뒤, 덤불을 잘라 없애기 시작했다. 그녀는 뱀에 관해서도 좀 알았고, 일을 시작하기 전 자동적으로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의 말이 자꾸 불안하게 만들어 또다시 주변을 확인하게 했다. 치명적인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억지로 받아들였다. 그냥 큰삼각머리독사에게 물리는 것은 고통스런 죽음을 의미했고, 게다가 열대 아메리카의 독사는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그들은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모닥불 주변에 둥글게 텐트를 세워서 캠프를 완성했다. 릭과 케이츠는 간이 의자를 펴서 앉았는데, 그들의 표정과 자세는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확실히 녹초가 돼 있어서, 벤은 그들에게 일을 도우라고 재촉할 수도 없었다.

페페가 식사를 준비하자, 일행들이 주변에 모였다. 모두들 첫날의 강행군으로 지쳐 있던 터라 대화는 별로 없었다. 그들이 식사를 끝내자마자 질리언은 다시 자신의 텐트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벤에게 지도에 나와 있는 다음 지표의 위치를 보여주었고, 그는 목적지까지 도착하려면 최소한 3일은 걸리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계산을 하거나 재확인할 것도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해야만 하는 일은 휴식이 전부였고,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휴식이었다.

테이프를 붙인 지퍼를 확인한 후, 그녀는 옷을 벗고 축축한 일회용 수건을 사용해서 몸을 가능한 깨끗이 닦았고, 특히 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세균에라도 감염된다면 평생 동안 고생할 것이다. 그녀는 아침마다 발과 부츠를 닦고 항균 가루를 뿌렸지만, 자칫 조그만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큰 문제가 되기 전에 즉시 치료해야 했다. 깨끗한 양말은 식료품만큼 필수적인 것이었고, 잘 길들여진 오래된 부츠에 감사했다.

기분이 훨씬 좋아진 그녀는 깨끗한 속옷을 꺼내 입었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낭에 몸을 쭉 뻗었다.

「질리언.」

벤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기분전환 할 때가 아니었다.

「뭐예요?」

「마사지를 해야겠던데.」

그가 텐트 지퍼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지퍼가 꽉 물렸군.」

「아뇨. 그게 아니라 안에서 지퍼를 올리게끔 해놓았어요.」

「그럼 지퍼를 올려요.」

「전 괜찮아요. 마사지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지퍼 올려요.」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한 명령조였다. 그녀는 벤이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소위 마사지라고 부르는 걸 받을 바에는 차라리 내일 아픈 게 더 나아요.」

퉁명스럽게 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을 이 안으로 들어오게 할만큼 멍청이는 아니에요.」

벤은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은 생각말고. 약속하지.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을 거요.」

「제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죠?」

「왜냐하면 내가 약속했으니까.」

그럴싸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주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지금 너무 아파서 움직이는 곳마다 쓰라렸고, 마사지를 받고 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가 근육을 풀지 않는다면 내일 여행은 고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통증을 참아야 하지? 어떨 땐 상식적인 생각이 불편했다. 그녀가 마사지 받기를 거부하면 정숙한 여성이 되겠지만, 오랫동안 고통을 참아야 했다. 확실히 고통은 큰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일단 당신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머리를 날려버릴 거예요.」

그녀는 주춤거리며 일어나, 테이프를 벗기고 지퍼를 내렸다.

「돈주머니라도 감추고 있는 거요?」

벤이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등불 한 개와 근육 완화제 한 병을 가져왔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테이프를 유심히 살펴본 뒤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아주 효과적이에요.」

그녀가 테이프를 가리켰다.

「그렇군. 엎드려 누워요.」

그녀는 몸이 뻐근했지만 순순히 말을 들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통증을 예상했거든요.」

「적어도 일부 근육이라도 풀어주지 않으면 고통스러우리라는 건 당연하지.」

수년 동안 얼굴을 붉혀본 적이 없던 질리언인데도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목욕 가운이라도 걸치고 있었다면 더 나았겠지만, 그 순간은 그녀가 팬티와 셔츠의 속옷을 입고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벤이 이 점을 언급한다 해도 어쩔 수 없었고, 선정적인 암시를 막을 수도 없었다. 질리언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침낭에 파묻었다. 그녀는, 좀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허튼 짓 말라고 그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약병을 열자 톡 쏘는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적당한 양을 손바닥에 부어 그녀의 다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목에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오자 단단한 근육이 쑤시고 아팠다. 종아리 근육을 주무를 땐 기쁨에 찬 신음소리가 났고, 허벅지 위쪽으로 올라오자 고통을 감추려고 숨을 멈췄다.

「긴장을 풀어요.」

그가 아주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편안히 있어요. 통증을 씻은 듯이 싹 없애줄 테니.」

그의 손놀림은 느리지만 지속적이었고, 손가락에 온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심하지 않고, 엉뚱한 곳을 마사지하는 손을 감시했지만 의외였다. 잠시 후 마사지를 받은 기쁨은 굉장해서 약 냄새가 나는 것쯤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부드럽게 오랫동안 주무르던 그의 손길로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자신의 목구멍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고, 음탕하게 들리는 신음소리를 삼키려고 애썼다.

「돌아누워요.」

그의 말대로 따랐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 앞쪽에 약을 바르며 통증을 가시게끔 마사지를 계속 해주었다.

「몸매가 멋지다는 거 알고 있소?」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멋지고 튼튼한 다리더군. 당신 오빠와 그의 패거리들이 잘 견뎌내지 못하리라고 예상했지. 당신이 텐트로 들어가자 그들도 바로 텐트 속으로 기어들어갔소. 내가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부츠도 제대로 벗지 않았을 거요.」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래요」

그녀는 반쯤 졸면서 웅얼거렸다.

「이해할 만하군. 다시 돌아누워요. 등을 마사지할 수 있게 셔츠를 벗고.」

그리 심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졸렸다. 눈을 뜨고 그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뒤로 돌아눕지 않으면 약을 바를 수 없나요?」

「이봐, 아가씨. 오늘밤은 당신에게 뛰어들지 않을 거요. 난 지금의 당신보단 조금 더 정열적인 여성을 좋아해. 어깨와 등의 근육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으면 통증은 내일 더 악화될 거요. 당신도 알 거 아니오…. 더 이상 말대꾸 말고.」

그녀는 그를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그의 행동은 나무랄 데가 없었고, 마사지로 인해 구름에 뜬 기분이었다. 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낸 뒤, 그녀는 다시 엎드렸고 웃옷을 위로 올려 벗었다.

그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혼자서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등에 상당한 양의 약을 뿌린 뒤, 그녀의 엉덩이에 걸터앉아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진작에 이러리란 걸 알았어야 했다.

벤은 몸을 앞으로 굽히며 온힘을 다해서 마사지를 시작했다. 특히 손가락이 그녀의 아픈 어깨 부분을 파고들 땐 통증이 너무 심해서 크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모든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녀는 몸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느꼈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쿡쿡 쑤시는 곳을 따라 세게 문질렀다. 그리고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찾을 때까지 그는 꾹꾹 누르면서, 근육의 긴장된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만져주었다. 그는 노련한 마사지사였다. 꼼꼼하게 훑으면서 필요한 곳엔 주저 없이 강한 힘을 사용하여 눌러댔다.

그녀의 엉덩이에 뭔가 부풀고 딱딱해진 것이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연민과 욕망에 휩싸여 그의 욕구에 도움을 주려 했을 것이다. 그가 몸을 앞으로 굽힐 때마다 그의 단단해진 남성이 그녀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가 이의를 제기할 만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너무 편안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좋고 싫고 하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졸음이 밀려왔고, 그저 거기에 가만히 누워, 효과적인 힘을 발휘하는 이 두 손이 한 시간 정도 더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순수한 뜻에서 말이다.

벤은 그녀를 내려다봤고, 입술은 후회막급한 미소로 뒤틀렸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단단하고 둥근 엉덩이에 거의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30분간 그녀의 엉덩이에 자신의 남성을 갖다대고 문질렀었다. 그는 참기 힘들 정도였고,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구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잠을 자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평화롭게 말이다.

그날 밤새도록 그녀의 곁에서 잠을 잔다면 꿈만 같을 것이다. 그녀가 셔츠를 위로 잡아당겨 벗을 때 그녀의 가슴을 힐끗 보았었고, 그 장면은 고통을 더해주었다. 언제나 풍만한 가슴이 그의 취향이었으나, 그녀의 가슴은 작은 편이었고 위로 봉긋이 솟아 있었다. 그에게 몸을 돌릴 때 관능적으로 흔들리는 그런 가슴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녀의 작은 가슴에 매혹되었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유도가 보고 싶었고, 손가락 끝으로 감싸고 돌리고 살짝 핥고 싶기도 했다. 그의 입 안에서 느껴지는 여성의 유두는 너무 황홀했다. 그녀는 거의 벌거벗은 채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정말 그가 해야 할 일이라면 부드럽게 그녀를 앞으로 눕혀 자신의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직접 확인해보는 것이지만, 그녀에게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벤은 꽉 다문 이 사이로 중얼거리는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 내려왔다. 그리고 약병 뚜껑을 닫고 타오르는 욕구를 간신히 억제했다. 그가 그녀에게 그런 약속을 하다니, 뭔가 잘못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혼란해지는 심각한 증세였다. 심지어 더 말도 안 되는 것은 그녀의 앞가슴이라도 살짝 훔쳐보려고 그녀를 앞으로 돌리지도 않고 자비심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벗은 몸에 나풀거리며 널려 있는 윤기나는 갈색머리 타래와 볼 쪽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짙은 눈썹과 달콤한 입술을 가만히 보았다. 아픈 근육을 마사지할 때 그녀가 내던 소리를 격렬한 사랑을 나눌 때 내는 소리 같았고, 벤은 그녀의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마침내 나지막하고 쉰 듯한 신음소리가 바로 그의 귓가에서 울리리란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척 보기에도 단단하고 매끄러운 근육과 탄력 있는 그녀의 몸이 그의 아래에서 요동치고,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간 그의 움직임대로 그녀의 엉덩이는 물결을 일렁이듯 출렁이며, 그녀의 안에서 움직이는 그가 더욱 흥분을 일으키도록 꽉 다문 조개처럼 단단히 조여올 것이다. 하나님, 맙소사! 그녀가 다가왔을 때는….

벤은 몸을 떨며 혼자만의 공상을 떨쳐버렸다. 자신만 고통스러울 뿐이었고, 빌어먹을 그가 고통의 이유를 안다 해도, 전에는 어떤 여자에게도 이와 같은 강박관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강박관념이라는 그 말 자체, 아니 그 속에 내포된 의미도 싫었다. 이 세상에는 수백만의 여자가 있고, 한 여자 때문에 강박관념을 갖는다는 건 어리석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에게 깊이 감사했다. 한 사람에게 사로잡혀 있는 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매력을 잃는 것을 의미했고,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젠장,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랄까?

아무래도 문제였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제정신이었다면 결코 이와 같은 어리석은 약속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비좁은 공간에 앉아 그녀가 자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웠고, 거의 미치게 만드는 그녀의 벌거벗은 육체를 음미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질리언.

그녀는 도대체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거세한 짐승으로 생각하는 걸까? 질리언은 어쩜 저렇게 곤히 잘 수 있을까? 그녀가 팬티만 입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그리고 흥분된 그가 그녀의 작고 단단한 엉덩이에 올라타지도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등에 올라타서 속옷을 벗기려고 최대한 노력하리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경계하면서 분명 그녀는 깨어 있어야 했다. 그녀는 그의 남성적인 매력이 유혹당할 정도의 걱정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그녀의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보여줘야 한다. 그녀가 깨기도 전에 그는 거의 절정에 달했고, 그녀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몸을 비틀며 제발 안으로 들어와 달라고 애원하면서 고통스런 기쁨을 맛보며 끝냈을 것이다. 벤은 질리언의 텐트에서 밤을 다 지샐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약속만 없었다면 말이다.

한숨을 지으며 그는 그녀가 입었던 얇고 작은 셔츠를 집어 등을 덮어주었다. 이제 그녀의 팔 아래로 부푼 가슴도 볼 수 없었다. 이건 그냥 행동에 옮기는 것보다 자신에게 더 힘들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녀를 깨우기 전에 실크같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곡선이라도 느껴보려고 잠깐 머뭇거렸다.

「일어나요, 아가씨.」

그의 목소리를 이상하게 쉬어 있었고, 자신에게도 낯설게 들렸다. 그래서 그는 헛기침을 했다.

「으음…?」

그녀가 중얼거렸다.

「난 이제 나갈 거요. 일어나서 다시 테이프를 붙여요.」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아직 잠을 떨쳐버리지 못한 푸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빛은 온화하고 따뜻했지만, 갑자기 날카롭고 가는 표정으로 변해버렸다. 곧장 그녀는 셔츠를 집으려 했고, 셔츠가 등에 둘러진 걸 알았을 때는 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작고 빈약해서 몸을 가릴 정도의 옷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에도 편안함을 주었다.

「걱정 말아요. 아무 일도 없었소. 아가씨, 내가 당신에게 덤벼들려고 했다면 당신은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거요.」

그의 나지막한 소리에 그녀는 만지작거리던 셔츠로 가슴을 가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양볼은 그의 노골적인 말에 붉어졌지만, 만족스런 표정으로 무신경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마사지 고마워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도움이 됐다니 오히려 내가 기쁘군.」

「어쨌든 감사해요.」

「내 서비스는 내일 저녁에도 가능하오. 미리 선약해주신다면 말이오.」

그녀는 그에게 좋았고 감사하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잠시 신중히 생각해 보았다. 통증이 그때까지 다 나아지길 바랐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사지는 어떤 치료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내일 저녁까지 기다려 볼게요.」

그는 윙크했다.

「요구만 하면 내 서비스가 큰 힘이 되리란 걸 기억하시오.」

「저도 알아요.」

그는 몸을 굽혀 그녀에게 키스했다.

「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

그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중얼거렸고, 그녀는 싱긋이 웃었다. 무례하게도 그는 입술을 이용하여 입술과 이빨의 느슨하게 벌어진 틈을 타서 혀를 힘차게 깊이 밀어넣었다.

맙소사! 전에 한 것만큼 멋진 키스였다. 그녀는 약간 몸을 떨었고, 그가 주는 느낌과 향내를 탐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답례의 키스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본능적으로 팽팽해졌고, 그의 어떤 의도에도 함께 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가슴으로 내려온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의 키스만큼 능숙하다면 그녀는 정말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탐닉하면서 사랑을 나눈다면, 아마 그녀는 기쁨에 겨워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절대로 키스를 허락해서는 안 되었고, 최악의 적은 바로 유혹이었다. 세상에, 그녀는 이미 유혹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석상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여자였고, 벤 루이스는 너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 역시 그에게 키스를 되돌려주고 있었고, 그녀의 입술은 뜨거운 갈망으로 달콤하고 따뜻했으며 그의 혀와 함께 뒤얽혔다. 그녀는 그가 부르르 떠는 것을 느꼈으며, 자신과 똑같은 욕망의 고통으로 그가 몸부림치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서 몸을 뗐고, 그의 눈은 반짝이고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의 입술은 축축하며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아직도 그의 열정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격렬하게 그가 내뱉으며, 등불과 약병을 낚아챘다. 그는 잽싸게 지퍼를 내리고는 기어나가기 시작했고, 그런 다음 뒤돌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시는 절대 그런 어리석은 약속은 하지 않을 거요.」

그가 외쳤다.

「빌어먹을, 테이프를 이 망할 놈의 지퍼에 갖다 붙여요.」

「그럴게요.」

그녀가 희미하게 대답하자 그는 텐트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텐트 입구의 한쪽에 아직 붙어 있는 테이프를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찾았고, 지퍼 위에 다시 매끈하게 붙였다. 그러고 나서 침낭 위에 몸을 쭉 뻗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심장이 너무 거세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조여왔고, 유도가 단단해졌으며 미묘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셔츠가 흐트러진 것을 깨닫고는 바로 잡아당기며, 이렇게 살짝 덮어놓으면 가슴의 통증도 누그러지길 바랐다.

아무리 통증이 심하더라도 벤에게 다시 마사지할 기회를 허락할 수는 없었다. 그런다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그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육체적으로만 그를 인식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접근해오는 그를 저지할 수가 없었고, 그는 참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방어책을 무너뜨릴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으며, 둘 다 유혹에 강하지 못했다.

지금 두 사람은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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