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5화 (6/24)

5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질리언은 분노로 다시 자제력을 잃었다.

「텐트를 같이 쓰다뇨?」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당신과?」

「쉬….」

벤은 문 쪽을 보며 신호를 보냈다.

「복도에 있는 사람이 듣겠소.」

그는 질리언의 반응이 흐뭇해지는 걸 애써 감추었다. 그녀가 지금 그의 마음을 알아챈다면 다시 새침한 표정을 지을 테니 말이다. 전날 밤 질리언은 냉담한 표정으로 벤을 바보 취급했었다. 가방으로 벤을 심하게 때리기 바로 전에 질리언의 얼굴에서 보이던 화산처럼 폭발하는 분노는 그의 온몸을 흥분으로 긴장되게 만들었다. 다시 그녀의 자제력을 흔들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저 아래 라운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내 말을 듣는다 해도 상관없어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니까 진정해요, 아가씨.」

질리언은 광분했지만 그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문제라고요. 어쨌든 전 싫어요. 누구하고든 텐트를 같이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특히 당신과는 말이죠.」

「두트라를 당신한테서 떼어 두는 안전한 방법은 그것뿐이오.」

루이스 씨, 당신의 친절한 배려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난 그 작은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어제 저녁 아주 신나서 말씀하신 대로 물품을 직접 챙기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시나 보죠?」

젠장, 그녀는 순순히 찬성하지 않았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했으며 그는 이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벤은 빙긋이 웃으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소.」

「전 총을 쥐고 잘 거예요.」

그에게 단호하게 일러주었다.

「미리 알게 돼서 다행이오. 두트라 얘긴 농담이 아니오. 케이츠도 두트라가 당신을 해치기를 원치 않을 테니 여행 중에는 안전할 수도 있죠. 만약 우리가 그곳을 찾는다면 그때부터 당신은 나와 있는 편이 안전하다는 말이오. 알겠소?」

「알겠어요.」

벤은 그녀의 차분한 반응에 당황한 듯했다.

「뭐, 반박할 말 없소? 당신은 지켜만 보게 될 테고, 곧 나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소.」

질리언은 아주 사랑스런 미소를 비웃듯이 흘려보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원래 임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아요.」

벤은 깊은 감사의 웃음을 띠며 일어났다. 순간 질리언은 가까이 서 있는 그의 몸에 약간 압도되었는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고 했다. 그녀의 바로 뒤편에 침대가 있었다. 벤은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점점 더 가까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고, 이제 질리언은 그의 근육질에서 내뿜는 긴장된 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가슴이 벤의 복부 바로 위의 단단한 상체에 닿자 그녀의 젖꼭지는 뜨겁게 흥분되어 빳빳해졌다. 이렇게 작은 움직임에도 너무 흥분되어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몸이 살짝 맞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지만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관능적인 표정도 보고 싶지 않았고 본의 아니게 흥분된 반응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온통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남자의 뜨거운 열기는 그녀의 모든 기력을 빼앗아갈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질리언은 그가 꽤 크다는 걸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180센티미터가 훨씬 넘을 것 같았다. 근육질로 다져진 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침대에서 여자를 압도할 정도로….

안 돼.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을 얼른 지워버렸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 자체가 끔찍했다. 침대에서 함께 있는 벤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질리언.」

그가 스르르 녹아들 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고 날 봐요.」

「됐어요.」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삼켰다. 또 한번 깊은 웃음소리가 그의 가슴에서 울려 나왔다.

「고집쟁이!」

그러고 나서 그가 움직였다. 왼손으로 그녀의 뒤 머리카락을 스르르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끌어당겼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반짝이는 깊은 두 눈엔 장난기라곤 없었다. 바로 그때 벤이 고개를 숙였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질리언은 파르르 떨면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선 채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기쁨의 샘물은 그녀를 무의식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이렇게 서 있는 게 전부거니 생각했지만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고 음미해 들어오는 그의 혀끝을 맞아들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재능을 아주 과소평가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의 입은 청결했고 위스키와 함께 희미한 담배 향도 느껴졌다. 그의 입술은 단단한 감촉이었지만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이 관능적인 유혹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견딜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그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키스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벤은 열정적으로 그녀를 유혹했고 질리언은 그저 어렴풋이 그의 자제력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남자의 동물적인 열기와 단단한 힘이 그녀를 현혹시켰고 그에게 기대어 의지하도록 초대하고 있었다.

맙소사, 그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질리언은 양손을 꽉 쥐었고 저항하라는 이성의 경고에 힘겹게 따르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깊게 꾹 눌렸다. 그녀는 그에게 입을 열어주지 않고 거부했다. 질리언은 자신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유혹을 뿌리치느라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에게는 고통으로 끝난 셈이었다. 마침내 그는 고개를 들었고, 열정적으로 계속되던 키스는 그녀의 굳은 결심으로 끝이 났다.

「황홀할 지경이군.」

그는 중얼거리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쓸면서 새파란 두 눈을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난 당신을 갖고 말 거요.」

그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가 나가면 문을 꼭 잠가요.」

하지만 그가 문으로 걸어나간 후에도 질리언은 자신을 겨우 억제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질리언은 경고하듯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벤은 웃으며 손을 들어 미약한 작별을 고하더니 한 마디도 없이 나가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인내심에 감사했다.

잠시 후, 문 쪽으로 다가가서 걸쇠와 문고리를 걸었다. 그런 다음 벤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멍하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 순간 원했던 것은 느낌이 전부였고, 그가 자극했던 아주 사악한 희열의 감각 속으로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벤이 처음에 보여줬던 모습대로 방탕하고 지나치게 위스키를 좋아하는 평판 나쁜 가이드로만 본다면 간단할 것이다. 처음의 그 모습이었다면 쉽게 저항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밤 그녀에게 보여준 그의 모습은 가식 없는 진짜 모습인데다가 뭔가 색다른 느낌도 있었다. 성적인 무모함마저 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질리언은 벤처럼 성적 관능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는 케이츠가 위험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지적이었고 게다가 남성적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불행하게도 벤은 그녀의 경계심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알았고, 이 사실에 사악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질리언은 동료로서 2개월 이상을 그와 함께 보내는 멍청이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 피임약을 휴대하긴 했다.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자기방어였다. 외국에서, 게다가 야만적인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겠지만 벤 루이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건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는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키스뿐 아니라 더 농도 깊은 애정공세를 펼친다면 그녀는 황홀감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계속 고집을 내세운다면 다른 방법으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두트라의 출현은 전보다 탐험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와서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이 그녀의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이 일은 아버지의 오명을 씻고 자신의 경력을 회복시킬 기회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실 선물을 위한 일이었다.

그녀는 안자르의 도시를 찾아낼 것이다. 다른 사람들, 즉 케이츠와 릭은 여왕의 심장에 이끌려 그곳에 가지만, 그런 보석 따윈 차라리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안자르라는 도시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충분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기에 벤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왕의 심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케이츠와 두트라는 위험인물로 변할 것이다. 행운만 따라준다면 질리언은 반드시 그 도시를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왕의 심장이 실제로 존재할까봐 두려웠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쓴 논문에는 브라질 광산에서 채굴한 유색 다이아몬드들처럼 굉장히 크고 붉은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추정되어 있었다. 원석 그대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며 그곳에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희귀한 다이아몬드일 것이다.

붉은 다이아몬드는 질은 좀 떨어졌지만 원래 불완전한 결정체 자체가 붉은 색을 띄게 만드는 것이었고, 아무튼 그 희귀한 색깔 때문에 최고의 가치를 누리고 있었다. 교수는 여왕의 심장보다 그 도시의 존재를 입증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안자르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건 재산의 의미가 아니었고, 고고학적 유물 가치가 있는 곳을 개인이 발견한다 해도 그저 정부의 소유가 될 뿐이었다. 하지만 여왕의 심장을 발견한다면 브라질 정부는 입이 찢어질 듯 기뻐할 것이다.

질리언은 여왕의 심장에 대해서 벤에게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 그럴듯한 얘기라고 믿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위험에 빠지는 것을 거절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몇 개월간 정글 탐험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못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왕의 심장이 없다면 위험도 없었다.

하지만 교수는 17세기 지도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 담긴 다른 지도를 발견했고, 그 지도를 참고로 해서 실제 지침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직업적인 경쟁심과 약간의 편집병이 있었던 그는, 지침서를 복사해서 자신이 고안해낸 암호로 지침서를 적어두었던 것이다.

질리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흥분과 기쁨에 못 이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버지는 모든 내용을 더 신비롭게 만들려고 암호로 바꾸어 썼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암호를 처음으로 개발했을 때 질리언에게 해독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암호 해독의 열쇠는 어떤 실마리를 푸는 것이 중요했고, 일단 실마리만 풀리면 모든 단어가 변하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연속코드라고 불렀다. 기억하고 있는 열쇠로 그녀는 노트와 연필을 이용해 암호를 해독했다. 약간 애매했지만 실마리는 아주 간단했다. 그녀는 자신의 지능으로 곧 그 실마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쨌든 암호는 아버지의 뜻대로 지침의 내용을 잘 숨겨왔고 이젠 그녀의 목적에도 부합되었다.

그가 발견한 마지막 지도엔 정확한 위도와 경도 그리고 거리와 면적이 상세히 적혀 있었으며, 1916년 아주 깊은 우림 지역을 탐험한 한 탐험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궁전이 바위 절벽 깊이 조각되어 있는 걸로 봐서 잉카 제국 시대와 맞먹을 정도의 유적과 도시인 것 같았다. 그 탐험가는 정글을 무사히 살아 나왔지만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죽기 바로 전까지 고열로 고생하면서도 자신의 눈으로 본 ‘무덤 위의 심장’에 대해 계속 중얼거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곧 임박하리란 걸 예측했고 유감스럽게도 그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 탐험가가 숨겨진 도시 안자르를 우연히 발견했고 실제로 크고 붉은 다이아몬드를 봤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그 보석을 가져 나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논문을 읽은 후 그녀 또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질리언은 발굴지역을 자신이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상태로선 확신할 수 없었다. 벤의 말대로 상황이 바뀌었다. 현재 상황으로는 케이츠 쪽이 유리했다. 유적지를 약탈하려는 그의 생각에 분노를 느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질리언은 미국을 떠나기 전, 골동품이나 국보급 약탈에 관한 법률이 엄격하다는 걸 넌지시 릭에게 말해주었다. 그 대신 절도 방지의 수단으로 새로 발견된 유물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지불했다. 릭은 질리언에게 다이아몬드를 훔칠 의도는 전혀 없으니 적당히 해두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합법적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문제를 일으키려는 걸까?

직업상 그녀는 어려 입장을 잘 이해했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계약서가 있다면 왜 보상금에 만족하겠는가? 다행히 릭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과는 접촉하지 않을 것이다. 케이츠라면 모르지만. 릭에 관한 그녀의 생각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 흘렀다. 그는 너무 무르고 차가웠다.

아버지와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질리언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혹시라도 되돌릴 수 없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그녀는 케이츠가 살인과 약탈을 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다. 질리언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생각보다 케이츠가 유적지를 약탈한다는 생각에 더욱 격분했다.

그녀는 기분 좋게 펜과 노트를 꺼내 편지를 썼다. 20분 뒤 질리언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편지봉투 2통을 봉했다. 한 편지에는 호텔 지배인의 이름을, 다른 편지엔 미국에 있는 동료의 주소를 휘갈겨 썼다. 그녀는 호텔 지배인에게 그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열어볼 것과 자신이 개인적인 물건을 가지러 돌아오지 않으면, 즉각 다른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메모와 편지 2통을 몰래 전할 생각이었다.

편지 안에는 현재 상황들을 대략 적어놓았다. 브라질 정부는 그녀의 상황 설명을 그냥 지나칠지 모르지만, 혹시나 여왕의 심장처럼 가치 있는 보물이라면 적어도 조사는 해보지 않을까 하고 희망했다. 그리고 안자르와 그녀의 아버지에 관해 알려진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편지가 동료 고고학자들에게 안자르를 조사할 만한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랐다. 희망에 불과할 뿐이지만 시도라도 해보는 게 나으리라.

일단 그들이 그 지역에 도착하면 편지 내용에 관해 릭과 케이츠에게 말할 것이다. 그녀는 그 편지가 안자르에 관한 확실한 단서로 사용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케이츠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러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호텔 지배인이 오지에서 일행이 모두 죽었다고 추정하고 그녀의 편지를 열어본다 해도 이미 늦을 것이다. 그 시간이면 케이츠는 이 나라를 떠나고 없을 테니까.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조심해야 했다. 총도 항상 가까이 둘 것이다.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적어도 벤만큼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지켜주리라. 성적으로는 그를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는 벤을 믿고 싶었다. 결국 그도 위험에 처하긴 마찬가지니 말이다.

「배로 가려면 얼마나 걸리죠?」

질리언이 물었다. 그녀는 부두에서 배 뒤로 소용돌이치는 검은 물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나우스는 실제로 리오 니그로 강변에 위치해 있었고, 리오 니그로의 검은 물줄기는 1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하류에서 아마존의 황토색 물줄기와 만났다. 아직까지 두 조류의 흐름은 너무 세차서 서로 섞이지 않고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검은색과 황토색의 강물이 각자의 흐름을 잃기 전에 80킬로미터 정도 길이로 완만하게 흐르는 모습은 거대한 뱀의 움직임 같았다.

「2주 정도. 하루 더 걸릴 수도 있고 덜 걸릴 수도 있소.」

벤은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마지막 물품을 싣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질리언은 배에서 보낼 2주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신음을 토했지만 큰소리로 불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배는 물품을 싣고 강 상류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거기서부터 도보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돌아올 때는 시간이 절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가 말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라 조류를 타고 내려올 거니까. 그리고 또 가져갔던 모든 물품을 써버리면 짐이 더 가벼워지거든요.」

일꾼은 두트라를 포함해서 전부 여덟 명이었다. 벤은 브라질인 다섯 명과 투카노 부족 출신의 인디언 두 명을 고용했다. 두 인디언은 각 배에 한 명씩 나눠 탔으며 물품의 무게를 알맞게 배치해 배의 균형을 잡았다. 벤은 두 척의 배 사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지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모든 물품은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리고 물품의 유효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물품의 반이 없어질 때까지 잃어버린 도시를 찾지 못한다면 어쨌든 되돌아와야 했다.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다른 사람보다는 질리언과 마찰이 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팔다리를 줄에 묶어서라도 데리고 나올 계획이었다.

오늘 아침 질리언이 부두에 도착해서 떠날 준비를 할 때, 벤은 이틀 전날 밤 그녀의 호텔 방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어깨 길이의 검은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는데 화창한 태양 아래 그녀의 머리칼은 밍크만큼이나 탐스럽고 눈부셨다.

「모자를 써요.」

벤이 보자마자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모자를 쓰지 않았다. 섣불리 모자와 선글라스를 써서 두트라가 알아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벤은 꽤 좋아하는 카키색 모자를 가져왔지만, 지금은 햇볕이 따가워도 평상시 쓰던 야구모자를 써야 했다.

질리언은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랐다. 벤은 튼튼한 바지와 반팔 셔츠 차림의 그녀 모습이 아주 맘에 들었다. 그녀는 밀짚으로 엮은 모자의 챙 앞부분을 접어 쓰고 있었으며 활발하고 거침없는 동작 하나하나는 그녀의 숙달된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녀가 입은 바지 위로 둥근 엉덩이 곡선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벤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는 복잡한 갑판 위에서 2주 동안 그의 곁에서 잠을 잘 것이고, 그 동안은 매일 유혹의 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 뭐가 있겠는가. 제기랄, 바로 그들 옆에 네 명이나 되는 방해꾼이 성가시게 누워 있을 텐데.

「우리의 친구, 두트라를 어떻게 생각하오?」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질리언은 두트라를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상상했던 그대로 생긴 그 인물을 단번에 알아보았으며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가 지금 당장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게 다행이네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벤보다 10센티미터 가량 작은 두트라는 보통 자기 체구의 몸무게보다 15킬로그램 이상은 더 나가 보였다. 두트라는 겨드랑이 밑에서 허리까지 굵은 땀방울들이 얼룩진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통은 건장한 어깨에 비해 너무 작아보였다. 두개골 위로는 마구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이 뒤덮였는데, 인간의 머리칼이라기보다 차라리 짐승의 털 같았다. 눈두덩은 네안데르탈인처럼 툭 튀어나왔고, 드문드문 난 눈썹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면도하지 않은 턱과 누런 앞니는 전혀 인간 같지 않았다. 질리언은 그를 보자 혐오감으로 비위가 뒤틀렸고,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두트라는 다른 사람들처럼 고용된 일꾼 중의 한 명이었지만 일하지 않았다. 그는 팔을 꼬고 기둥에 기대선 채, 질리언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벤은 배의 균형을 정확하게 유지해야 하는 작업 때문에 방관할 수밖에 없었고, 두트라는 그런 상황을 부채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해서 질리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면, 벤에게 실망한 그녀는 텐트를 함께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결정을 다시 고려할지도 몰랐다.

릭 셔우드는 두 번째 배의 뱃머리에 두 발을 걸치고 한가롭게 앉아 있었고, 스티븐 케이츠는 배에 실을 모든 상자의 위치를 직접 지시하며 부두에서 천천히 왔다갔다 걸어다녔다. 선글라스가 자신의 눈을 잘 가려주고 있었으므로 벤은 그 둘을 역겨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강 상류에 도착할 때면 그 둘은 큰 충격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짐을 다 실을 때까지 찜통 같이 후텁지근한 열기가 일행들의 온몸을 적셨다. 질리언은 칼날처럼 세워놓은 케이츠의 바지 주름이 지워지는 걸 지켜보는 것이 내심 즐거웠다. 열대지방에 다림질한 옷을 가져가는 일은 헛수고라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배가 강 상류의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릭과 케이츠가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정말 의심스러웠다. 둘 다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에 익숙해 있지 않았고, 아마 밀림을 지날 때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짐도 날라야 할 것이다. 질리언의 몸은 가뿐한 건강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며칠이나 갈지 자신할 수 없었다.

「바로 그거야.」

벤은 두 명의 투카노 원주민에게 그들 언어로 뭔가 말했다. 그들은 조용하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한 명은 수로를 안내하기 위해 첫 번째 배에 탔으며 다른 한 명은 두 번째 배에 올라탔다. 그 두 사람은 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벤은 케이츠 쪽을 돌아보면서 질리언의 팔을 잡았다.

「케이츠, 당신하고 셔우드는 두 번째 배에 타요. 질리언과 나는 앞쪽에 탈 거요.」

「내가 앞쪽에 타려고 했는데.」

케이츠가 말했다.

「당신은 강을 항해하는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난 알잖소.」

「아니, 내 말은 질리언과 릭을 두 번째 배에 태우라는 건데.」

「그건 안 될 말이죠. 질리언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유일하게 하는 사람이오. 그러니 항해사와 함께 타야죠.」

케이츠에게는 정말 맘에 안 드는 결정이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두 번째 배에 타는 것은 자신에 대한 대우를 격하시키는 것 같아 불쾌했지만 벤은 그런 일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벤은 질리언이 두트라와 같은 배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이미 첫 번째 배에 승선하려고 갑 판에 발을 내딛었고, 이제 더 이상 논쟁의 여지는 없었다.

「이제 출발할 거요.」

벤은 성급하게 말했다. 케이츠는 터벅터벅 걸어 두 번째 배에 올랐다. 벤이 타륜을 잡고 시동을 켰다. 배는 대단해 보이진 않았지만 엔진만큼은 최고였다. 그들은 강물의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모두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탄성소리와 함께 닻이 올려졌다. 두 명의 투카노는 정박시켰던 줄을 풀어 배에 가볍게 던진 뒤 부두에서 배가 서서히 빠져 나가는 사이에 민첩하게 올라탔다.

「말해봐요.」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큰 범선과 배들의 미로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자 벤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날 아침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계속 생각해봤는데 아마존보다 리오 니그로로 들어간다면 그곳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벤은 배를 조정하면서 그녀를 쳐다볼 기회를 만들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그는 욕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그가 투덜거렸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쯤 '그런데 루이스 씨, 이쪽 강으로 올라가야 해요.'라고 말할 작정인 거요?」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실은, 지금이에요.」

「내가 리오 니그로에 관해 아는 게 없다면 어쩌려고?」

「당신은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닌 사람 아닌가요?」

그녀는 쉽게 대답했다.

「당신에 관해 여기저기 수소문했죠. 큰 강 위쪽뿐만 아니라 리오 니그로 위까지 안내하신 경험이 여러 번 있더군요.」

「그럼 전에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다른 사람을 일부러 혼란시키려고요. 케이츠나 릭이 누군가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그럼, 난 그 누군가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단 말이군.」

「맞아요.」

그는 아주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야. 그렇다면 그녀는 모든 걸 나보다 한 발짝 앞서 있단 얘긴가. 결국 일은 그렇게 되는 셈이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좋아. 당신 말에 동감이오.」

그가 말했다.

「얘기하지 않은 편이 우리에게 유리한 입장을 제공해주는 건 물론이고 편한 점도 있을 거요. 모기들도 없죠.」

「정말? 왜 없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에 뭔가 있는지 검은색 강물에는 벌레가 거의 없소.」

그녀는 열대지역에 서식하던 먹구름 같은 모기떼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다. 만약 리오 니그로에 벌레가 거의 없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그곳을 여행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갑판에서 자는 것이 훨씬 편안할 게 분명했다.

벤은 타륜을 돌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마나우스는 리오 니그로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사실 그날 아침까지는 검은 강 위까지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12킬로미터 정도 강 하류 쪽으로 향하다보면 아마존에 도착할 거라고 추측했지만, 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 유사한 지역들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리오 니그로를 택하면 벤은 상당한 이익을 갖게 된다. 그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두트라는 항상 아마존 위로 올라가서 강의 상류에서 사라졌다고 했지만, 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바에 의하면 그 살인자는 리오 니그로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벤은 그 두 강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두트라를 감쪽같이 속여서 약간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면, 그는 그 쪽을 택할 것이다.

그는 대체로 기분이 좋았다. 벤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야구모자를 꺼내 썼다. 계속 항해 중이었다. 그들은 정글에서 훔칠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케이츠와 두트라에 대해 걱정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는 2개월 동안이나 질리언의 동료로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배에서 내릴 때쯤이면 그는 그녀에게 너무 열정적이어서 텐트 하나는 필요 없을 테고, 하나를 아예 버리고 오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버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너무 즐거운 나머지 손을 뻗어 그녀의 엉덩이를 귀엽다는 듯 살짝 두들기며 한 움큼 꽉 잡았다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녀의 신발 뒤축으로 그의 앞정강이를 심하게 걷어차였다. 질리언은 그에게 이가 환히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으며 뱃머리로 발길을 옮겼다.

질리언은 첫날 대부분의 시간을 시야가 확 트인 뱃머리에서 보냈다. 사실 배가 운항 중이란 흥분은, 아주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여러 밤을 지새야 하는 걱정까지도 물 속에 잠겨 버리게 했다. 그녀는 유심히 거대한 물살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질리언은 이 큰 강에 깊은 친밀감을 느꼈고, 이 강은 아마존 강의 지류 중 가장 커서 마나우스에서 12킬로미터 하류 쪽에 있는 리오 니그로와 만나 진짜 아마존이 되었다. 지구상의 깨끗한 물 중 5분의 1 정도는 마아존과 그 지류였고, 미시시피 강보다 10배나 더 많은 물을 흘려보냈다. 나일강을 가장 긴 강으로 알고 있지만, 아마존의 어느 지류를 측정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랐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강은 남미의 거대한 강과 비교해본다면 형편없었다. 아마존 강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웠다. 흐름이 너무 세차서 강물이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갈 때는 짠 바닷물을 약 160킬로미터 정도나 밀어냈다. 질리언은 지금 그 일부를 보고 있으며, 발판 아래 나무 선반을 따라 기운차게 움직이는 물의 힘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흥분되었다.

강 기슭에는 초라한 판잣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그 중 몇 채는 양철과 나무조각을 함께 못으로 박아놓은 수준이었다. 그들이 마나우스에서 더 먼 곳으로 나아가자 판잣집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기저기 비참한 거주지 몇 채가 있을 뿐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결국 질리언은 배의 지붕 아래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하지만 그늘조차 후텁지근한 열기를 식혀줄 순 없었다.

세 명의 브라질인들은 자기들끼리 얘기 중이었다. 한편 투카토 인디언은 벤에게서 어느 정도 떨어져 갑판에 앉아 있었다. 인디언들은 지나치게 조용한 것 같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질리언의 흥분은 조금씩 사라졌고, 열기와 배의 움직임 때문에 졸음이 쏟아졌지만 낮잠을 자고 싶지느 않았다.

그녀는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했다. 잠시 후 졸음에 취해 부채질하던 손이 점점 느려지다가 서서히 멈췄다. 그녀의 졸린 눈이 벤에게 고정되었다. 벤은 그녀를 등지고 서 있었고, 조타실에서 배의 흔들거림을 지탱하려고 두 발을 벌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그의 셔츠깃 위에서 넘실거렸다. 이번 탐험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으면 돌아올 때쯤엔 어깨까지 내려올 것이다. 넓은 어깨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셔츠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카키색 바지는 튼튼한 근육질의 다리를 드러냈고, 탱탱한 엉덩이의 윤곽도 여실히 그려주고 있었다. 질리언은 그가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벤은 완벽했다. 물론 미학적으로 말이다. 완벽한 미를 갖춘 조형물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마치 투시력이 있는 사람처럼 그는 천천히 그녀를 돌아다봤고, 다 안다는 듯이 음흉한 윙크를 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