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4화 (5/24)

4

그날 밤 호텔 라운지에 술을 마시고 있는 릭과 케이츠를 남겯고 질리언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긴장한 탓인지 온 신경이 곤두섰다. 질리언은 케이츠와 가이드를 맡게 된 남자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츠는 이 여행의 경비를 지원했기 때문에 동행해야 했다. 여행을 취소하고 싶은 유혹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졌다. 반면 이 먼 곳까지 온 마당에 계속 진행하고 싶은 생각도 역시 간절했다. 차라리 당장 일을 시작한다면 취소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에 모든 걸 잊고 돌로 이루어진 도시를 찾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남게 되자 약간 위안이 되었다. 방에 들어서자 표정이 스르르 풀리며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말을 내뱉고 표정을 지을 때마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 다른 이의 조언도 없이 혼자 머릿속에서만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질리언은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불을 켠 후 문을 잠갔다.

「그럴 필요 없소.」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밤새도록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말이오.」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자동적으로 뒷걸음질치며 침입자를 가방으로 후려쳤다. 그 침입자는… 벤 루이스였다! 그날 처음으로 그를 만났을 뿐인데, 그의 목소리를 알아차리다니 이상했다. 순간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은 웃을 때 주름이 잡혔다.

「우와, 진정해요, 아가씨. 거기 맞았다간 심한 상처를 입겠어요.」

깊고 굵은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놀리는 듯했다. 질리언은 그의 졸린 듯한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고 이글거리는 분노가 온몸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맑고 따뜻한 눈이었지만 아무 생각도 주저함도 없이 질리언은 메이저리그 타석에 선 타자처럼 가방을 휘둘렀다. 그는 한쪽 머리를 세게 얻어맞고 벽 쪽으로 비틀거렸고,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날 겁주려는 거예요?」

그녀는 다시 때리려는 자세로 재빨리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퍽!

「방에 몰래 침입하다니!」

퍽!

벤은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막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갈비뼈를 내리쳤다. 그는 균형을 잡으면서 날카로운 비명을 울렸다. 그러나 가슴을 내려친 세 번째 일격은 방어할 수 없었고 그는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는 뱀처럼 재빨리 손을 뻗어 가방 끈을 잡아 그녀의 손에 꽉 쥐어진 가방을 가로채는 동시에 그녀를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 갇혔다. 그의 오른손을 가방을 잡았고 왼손은 강철 밴드처럼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얌전히 굴어요. 가방 공격에는 고수로군. 틀림없어. 내가 여기 온 건 당신이 걱정돼서요. 그런데 정작 보호가 필요한 사람은 나로군.」

질리언은 그의 즐거운 표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대고 있던 팔을 내리며 격렬하게 밀쳤지만 근육질의 단단한 몸은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놔줘요.」

그녀가 투덜거리자 그는 싱긋이 웃기만 했다.

「자, 자.」

그는 꾸짖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당시늘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요?」

질리언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의 성질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그녀는 좀처럼 이성을 잃지 않았다. 물론 성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좀 진정된 그녀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날 놓아주지 않으면, 콱 물어버릴 거예요.」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느슨해졌고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웃고 있었다.

「조심해야겠는걸. 우리 둘 다 벌거벗고 있다면 당신이 좀 물어도 상관없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난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질리언은 뒷걸음질치며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는지 한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놀랍게도 방으로 들어올 때처럼 모든 게 단정한 것 같았다.

「단정한데요, 뭐. 단추도 다 잠겨 있소. 당신은 정말 나를 바보로 만드는군.」

그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질리언은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나가주세요.」

벤은 그녀를 지나 문 쪽으로 가더니 쾅 하고 세게 닫아버렸다.

「아직은 아니오. 아가씨, 할 얘기가 있거든.」

「왜 이러는 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질리언의 까탈진 목소리에 그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따뜻하고 불쾌하지 않은 향긋한 위스키 냄새가 났다.

「문에서 떨어지시오. 케이츠나 당신 오빠가 올라올 지 모르잖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게 하고 싶지는 않소. 바로 옆이 그들 방 아니오?」

질리언은 투덜거리는 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빈틈없는 푸른 눈을 처음으로 알아보았다. 숨쉴 때마다 퍼지는 위스키 냄새에도 불구하고 술이 취한 건 아니었다.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두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그건 그가 지각 있는 사람임을 말해주었다. 질리언은 벤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완전히 믿게 된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릭은 두 층이나 아래에 있어요. 스티브는 복도 건너편이고요.」

「잘됐군. 어쨌든 안전한 편이 좋잖소. 텔레비전을 켜고 문에서 떨어져요.」

벤은 자신이 말한 바를 즉시 행동에 옮겼다. 텔레비전을 켜자 빠른 포르투갈 어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고는 의자에 편안하게 앉으며, 부츠 신을 발을 침대에 올려놓고 교차시켰다.

질리언은 발을 밀었다.

「내 침대에서 발 치워요.」

벤이 다시 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주 얌전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질리언은 가만히 침대에 앉았다.

「좋아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질리언과 침대를 번갈아 보는 푸른 눈에 떠오른 야릇한 관심을 읽을 수 있었다. 벤은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가 알아채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질리언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족했다.

벤은 입을 약간 실룩거리며 깍지낀 손을 머리 뒤에 받쳤다. 질리언은 그의 입술이 아주 매혹적이라고 느꼈다. 크고 전체적으로 선도 분명한 입술곡선은 어찌 보면 음탕한 깡패 같아 보이기도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턱은 면도가 절실한 상태였다. 옷은 다림질이라는 걸 한 적도 없는 듯 보였다. 가벼운 카키색 바지는 여기저기 찢어진 부츠 속에 푹 쑤셔 넣었고, 땀으로 얼룩진 흰 셔츠는 바지 바깥에 헐렁하게 내놓고 있었다. 드문드문 얼룩진 카키색 모자는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냉정한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눈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빈틈없는 사람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간파하는 남자였다.

물론 벤을 믿고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있다면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실토하도록 속이지도 않을 것이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지만 그는 불편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은 더욱 깊은 즐거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수다쟁이는 아닌 것 같군, 아가씨?」

벤이 마침내 느린 말투로 얘기를 꺼냈다.

「그래야 하나요?」

「단순한 생각 같지만 척 보면 알 수 있지.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먼저 하세요.」

그녀가 정중하게 말했다. 또다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빠르게 스쳐갔고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즐거운 눈빛만은 여전했다.

「스티븐 케이츠는 사기꾼이오.」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래 전에 미국에 있을 때 그를 몇 번 봤소. 그는 날 모르지만 난 사람들을 언제나 감시하거든. 그 사람은 진짜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오. 묘지 사진이나 찍으러 고고학 탐사를 떠나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오. 케이츠와 당신 오빠가 일거리를 제안했을 때 그들이 뭔가 속셈이 있다는 걸 알아챘소. 그 장소가 정말 존재하고 우리가 그곳을 찾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오.」

「그곳은 존재해요.」

「이제 털어놓으시는군. 당신이 이해해야 할 부분은 그곳에 있는 것과 그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하오. 일단 머나먼 오지에 들어가면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도 꿈같은 얘기요. 위치를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것도 하늘을 겹겹이 가리고 있는 밀림에선 무용지물이거든.」

「우린 그곳을 찾을 수 있어요.」

「물론, 찾을 거요. 고고학적으로 가치 있는 곳이 얼마나 굉장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소. 그리고 케이츠와 당신 오빠를 감시하는 데 별 어려움도 없을 거요. 그런데, 당신 오빠는 어떻소? 당신이 무엇을 발견하든 그가 빼앗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소?」

질리언은 릭에 대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 그럴 수도.」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기꺼이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목이 콱 막혔다. 그 생각으로 며칠 동안 그녀는 괴로웠던 것이다.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기를 바래요.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당신 오빠는 당신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래서 당신 걱정은 하고 있지 않죠. 케이츠라면 문제가 달라요. 난 오늘 그의 뒤를 밟았소. 그는 자신이 고용한 라몬 두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살인자와 만났소. 그 살인자를 일행으로 고용했단 말이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케이츠는 애초에 당신, 나, 그리고 당신 오빠를 살려둘 계획이 없었던 거요.」

질리언은 내심 여행 계획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금 취소해도 늦진 않았다. 케이츠가 많은 돈을 쓴 뒤라 그녀가 손을 뗀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없다면 탐험도 끝이었다.

하지만 안자르와 스톤 시티 또 여왕의 심장을 찾을 기회가 사라질 뿐 아니라 아버지의 학설을 입증하고 그녀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 유적지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질리언은 지도와 암호로 쓰여진 정확한 지침서를 갖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케이츠가 그 지도를 찾는다 해도 읽을 수는 없었다.

벤 루이스가 찬찬히 지켜보고 있었다. 질리언은 무릎에 놓인 양손을 꼭 쥐고 조용히 말했다.

「또 다른 게 있나요?」

벤은 눈을 굴렸다.

「내가 고용한 사람들은 정직하고 믿을 만하오. 하지만 두트라가 포함된 탐험은 하지 않을 거요. 그래서 다른 일행을 구해야 하고 그들은 정말 믿을 만하지도 않거니와 능숙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을 거요. 그리고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들은 케이츠가 꾸미는 일 따위는 걱정하지 않을 거요. 이건 상황이 달라요. 당신 오빠에게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 일행은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 해결애야 해요. 우리 휴전협정을 맺읍시다. 당신은 내게 협조해야 하오.」

「왜 내가 당신을 믿어야 하죠?」

그의 입이 씰룩거렸다.

「당신이 믿을 만한 건 나뿐이오. 이제 난 다 드러내 보였소. 이제, 당신 차례요. 그곳에서 찾으려는 게 도대체 뭐요?」

「잃어버린 도시.」

벤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목 깊은 곳에서 풍부한 웃음을 쏟아내며 의심스럽게 질리언을 노려보았다.

「꽃가루처럼 온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전설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들은 얘기만으로도 그 지역엔 잃어버린 도시가 수천 개 있다는 거 알잖소. 유골 한번 차보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군. 절대 그렇지 않소.」

「이 이야기는 사실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제 아버지가 그 도시를 찾았어요.」

「증거라도 가져온 거요?」

「그렇게 하려다가 돌아가셨어요.」

「결국, 증거가 없다는 말이군.」

「그래요. 제가 증거를 찾으러 가려는 거예요.」

그녀는 아주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옳았다는 증거를 제가 찾을 거예요.」

「아니면 그러다 죽든지.」

「루이스 씨, 당신은 가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저는 갈 거예요.」

「나도 갈 거요. 간단 말이요. 이번 일은 다른 일보다 더 흥미로울 것 같군. 그 유명한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말해주는 게 어떻소? 그곳이 어디요? 혹시 내가 들어본 적이 있는지도 모르잖소.」

「그렇겠군요.」

그녀는 마지못해 말했다.

「안자르나 스톤 시티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벤은 손가락 끝으로 오므린 입술을 톡톡 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그의 입술에 머물렀다. 질리언은 자신의 시선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관심을 입술 쪽으로 끌기 위해 고의로 저러는 걸까? 그녀는 그를 도저히 무시할 순 없었지만, 그의 눈에 사악한 장난기가 어려 있는지 생각하느라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떤 건지 말해주겠소?」

벤의 질문에 질리언은 재빨리 안자르의 전설과 여왕, 그녀의 심장, 그리고 그것이 연인의 무덤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벤은 지루해 보였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 역시 고고학자셨어요. 아버지는 그런 오래된 전설을 조사하는 데 모든 열정을 바치셨죠. 다른 모든 전설을 포기하셨지만 안자르만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게 만든 그 이상한 동화 같은 얘기는 어떤 거요?」

언뜻 그녀의 눈에 분노가 서렸지만 애써 삭였다. 아버지의 동료들이 아버지를 믿지 않았다고 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한테까지 저런 소릴 들어야 하나?

「호깃 아마존의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 아세요?」

질리언이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정글 때문이겠지.」

「아뇨. 정글은 강 이름을 따서 붙여진 거예요.」

「어떻게 붙여졌소?」

「1542년 스페인 일행이 강을 탐험하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엔 이름이 없었죠. 그 일행 중에는 가스팔 드 카르바잘이라는 도미니카 수도회의 수도사 한 분도 있었죠. 그 수도사는 본 것을 일기로 적었어요. 사실 대부분은 스페인 사람들이 금과 보석을 갖고 유럽으로 돌아오는 전형적인 이야기였죠.」

「다 그렇지.」

벤이 말했다.

「그들이 그곳을 발견했을 때 잉카인들에게 한 짓을 봐요.」

「그 수도사는 갑자기 나타난 백색의 도시들과 돌로 포장된 멋진 도로에 관한 것도 말해주고 있어요. 그곳은 훨씬 더 서쪽에 있지만 잉카 제국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죠. 수도사가 그저 자신이 들은 얘기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 수도사는 뭔가 다른 점을 언급했어요. 그건 자신이 들은 나머지 이야기와는 다른 거였죠. 카르바잘 수도사는 그들이 열 명의 남자 인디언과 싸운 아주 아름다운 여전사 부족을 만났다고 했어요.」

「잠깐만!」

벤은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생각 좀 합시다. 그러니까 그들이 아마존 사람들을 발견했고, 그래서 강 이름이 그렇게 되었다는 건가?」

「맞아요.」

「말도 안 돼.」

「대개 그런 식이에요. 카르바잘의 일기는 정말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 하지만 역사가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죠. 근원지는 다르지만 아버지의 호기심을 자극한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어떤 거요?」

「아버지는 안자르와 관련된 근원이 각기 다른 우화 다섯 가지를 찾아냈어요. 서로 연결시킬 수는 없었지만 내용의 단편들은 수수께끼 조각처럼 딱 들어맞았어요. 하나는 ‘악마의 날개를 단 유혈부족’에 관한 거예요. 하지만 거기서는 그들을 ‘큰 강에서 온 악마들’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흰 피부의 스페인 사람들이 타고 온 배를 해안에 대고 올라오는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죠. 백인들은 날개를 단 것처럼 바람 속을 항해해왔거든요.」

「좋아요. 그건 그렇고. 너무 길게 늘어놓지 말아요.」

그는 지루해 보였다.

「푸른 바다 아래의 스톤 시티는 밀림 속의 도시가 분명했어요. 천계 아래 숨겨져 있었죠. 너무 잘 숨겨져서 스페인 사람들이 그곳을 찾을 수 없었던 거예요.」

「정말 흥미 있는 수수께끼 놀이군.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잖소? 그 수도사가 말한 아마존이 진짜 안자르 부족이라고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스톤 시티의 지도’ 참고자료를 우연히 발견했어요. 그 참고자료를 따라 내려가다 다른 실마리를 찾았던 거죠. 그런 식으로 지도를 찾는 데 장장 3년이란 세월이 걸렸어요. 아버지가 찾은 지도는 확실한 거예요. 날짜가 17세기로 되어 있거든요. 지도엔 나라 이름과 대륙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길잡이가 되는 육지의 지표와 거리 표시 등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어요.」

그는 믿기 어려운 듯 코방귀를 꼈다.

「정글에는 지표가 없어요. 그런 건 남아 있지도 않소. 식물들이 모든 것을 꿀꺽 삼켜버리죠. 먼지는 먼지 속으로. 그곳에 있는 진짜 의미 있는 것들을 모두 빼앗아버리죠. 당신은 그렇게된 걸 구경만 하게 될 거요.」

질리언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 지도에는 ‘여왕의 심장’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어요. 정확한 이치도 있고요.」

「그래, 당신 생각은 여왕의 심장이라는 게 정글 속에 파묻혀 있는 제일 큰 보석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리고 그 지도만 있으면 바로 찾아갈 수 있다는 건가?」

「그래요.」

그녀는 자신있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 과정을 점으로 표시해서 암호로 바꿔놓으셨조.」

「정말로 찾아 나서겠다는 말이군. 난 그곳이 존재하리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소. 설령 존재한다고 합시다. 그 다음은 어떡할 거요?」

「전부 사진으로 찍고 서류로 만들어 증거물을 가져올 거예요. 아버지는 정신나간 괴짜로 불렸어요. 아버지의 명성도 이 학설로 인해 땅에 떨어졌죠. 저 역시 그랬지만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할 거예요. 전사의 무덤을 지키는 보석이 진짜로 있는지에 전 신경 안 써요. 하지만 전 그 도시를 찾아 안자르가 존재했는지 증명하고 싶어요. 루이스 씨, 전 제 일을 너무 사랑해요. 하지만 아버지의 명성을 분명히 회복시킬 수 없다면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단지 괴짜 셔우드와 똑같이 정신나간 딸이 될 뿐이에요.」

「벤이라고 불러요.」

턱을 문지르며 자연스럽게 그가 말했다. 그는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만약 잃어버린 도시가 그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도시가 정말 아마존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면 어쩔 거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아마존 사람들이 아닌 그냥 수세기 전에 멸종해버린 고립된 보통 원주민 부족의 도시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요.」

「상관없어요. 어쨌든 잃어버린 도시는 잃어버린 도시거든요. 우리가 할 일은 그곳이 존재한다는 증거물을 가져오는 것뿐이에요.」

질리언은 목소리를 애써 밝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느린 억양은 알아듣기가 쉬웠다.

「당신은 자신이 일곱 빛깔 무지개를 쫓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걸 잘 알고 있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제 아버지는 아 상세하게 연구 조사했어요. 보석 사냥꾼은 아니에요. 진실을 추구하는 분이었어요. 아버지는 자신이 조사한 전설이 진짜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았어요. 그는 이 방식이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안자르의 증명하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케이츠는 황금이나 보석을 찾는 데 도박을 걸고 있던데. 어떻게 그가 가담하게 됐지?」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릭 때문이에요. 아빠의 옛 논문을 전부 갖고 있었거든요. 그 논문을 살펴보려고 오빠 집에 갔다가 우연히 안자르에 관한 내용을 발견했어요. 전 너무 흥분해서 감출 수가 없었거든요.」

「내가 거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벤의 느린 말투도 그녀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지 못했다.

「제가 뭘 찾았는지 릭이 물었는데, 바보같이 저도 모르게 전부 말해버린 거죠. 오빠는 논문을 뺏어 들었지만 암호로 쓰여 있어 읽을 수 없었어요. 그는 비웃더니 묻더군요. 제가 암호를 읽을 수 있는지. 전 오빠에게 읽을 수 있다고 말해줬죠. 아버진 제게 암호를 가르쳐주셨거든요.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질리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자제했다.

「전 제 동료 몇 명에게 이 계획에 대해 넌지시 떠보았지만 모두가 비웃을 뿐이었어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뻔하죠. 그들은 저와 아빠를 똑같이 보았을 거예요. 이런 탐험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요. 저 혼자선 엄두도 못 내죠. 그렇다고 후원자를 찾지도 못했어요. 물론 제가 근무하고 있는 프로스트 고고학 재단도 후원해주지 않았고요. 그들은 형식적으로 저를 격려하면서 한번 가보라고 말할 뿐이었어요. 모두에게 거절당해서 너무 실망하고 기분이 몹시 상했죠. 그래서 릭에게 전화를 걸어 탐험을 못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오빠 역시 정말 아버질 사랑했거든요. 아마 그래서 알 권리가 있었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다음에 알게 된 케이츠가 탐험에 관심을 보였고, 그래서 함께 여기로 올 계획을 세웠던 거죠.」

「그 두 사람이 지도와 지침서를 달라고 말하지 않았소?」

「물론 그랬죠.」

그녀는 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지금까지의 그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 그 숨겨진 도시를 찾을 거예요.」

「아무래도 케이츠, 아니면 그가 고용한 사람이겠군. 케이츠는 직접 일 처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그가 지도를 가져갔소?」

「아뇨. 어디에 숨겨뒀는지 아무도 찾지 못해요.」

「당신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군.」

「당연하죠. 4백년이나 된 지도를 가져왔겠어요? 지침서를 복사해왔어요. 이미 말했지만 암호로 적혀 있는 거예요.」

벤은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제인 본드라고 말했소. 그 두 사람은 암호를 읽을 수 없고, 또 당신은 거기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말하지 않은 거요. 그래서 그들이 내키지 않지만 당신을 데려왔군.」

「정확해요. 그 사람들은 그 지역을 보존하기 보단 약탈하려고 하겠죠. 그러면 아버지의 오명은 씻을 길이 없어지잖아요.」

갑자기 그는 자세를 바로잡고 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당신은 더대체 어떻게 그들의 계획을 막을 작정이오?」

그녀는 어깨를 폈다.

「모르겠어요. 총 한 자루를 사기는 했는데.」

벤은 다소 거칠게 말했다.

「그걸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말이오. 맙소사, 총을 한 자루 샀다고? 어떤 종류, 진주 손잡이가 달린 짧은 소총인가?」

「38구경 자동 소총.」

「사용할 줄은 아는 거요?」

「그럼요. 전 고고학자예요. 제 직업은 문명세계에서 하는 일이 아니죠. 한 두 번 사냥을 해본 적도 있었고, 처음 보는 두 발 달린, 아니 네 발 달린 생물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었어요.」

벤은 그녀의 가방을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뇨. 거기에 없어요.」

그녀는 그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이 그런다고 믿을 줄 알아요? 제 방을 뒤져 총을 찾아봤을 텐데요. 제가 총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잖아요. 어떤 종류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벤은 그녀에게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벤은 기회를 노려 방을 샅샅이 뒤졌던 것이다.

「아주 멋진 속옷이더군.」

「당신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벼락이나 맞아라, 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런 영상이 떠오르자 아랫배가 꽉 조여왔다. 질리언은 그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덤덤한 채 있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는 음흉하면서도 뻔뻔스러웠다. 아주 단단한 그녀의 신경세포들이 자신의 의지를 거역하며 활개를 치고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포착했다. 반응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그녀를 지켜보는 일에서 더 큰 만족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관능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었다.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에게 암호를 해독해주는 게 어떻소. 내가 잃어버린 도시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정말 그곳이 있다면 말이오. 당신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되잖소?」

질리언은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도저히 정중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배 위에 두 팔을 포갠 건방진 동작으로 우스운 제의를 한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아니오’라는 대답을 택하겠어요.」

「어쩜 그렇게 무표정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소.」

질리언은 숨을 죽인 채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당신을 믿는다고 생각하세요?」

「알게 되겠지.」

유쾌하게 그가 대꾸했다.

「결국 당신이 함께 가길 고집하니까 우린 텐트를 함께 써야 할거요. 물론 당신은 많은 면에서 아주 빨리 날 믿게 될 거요. 확실한 건 난 당신을 절대 위험하게 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거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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