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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요. 우리에게 얘기해주면 우리도 알게 되겠죠. 힘든 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착한 꼬마 아가씨는 호텔로 돌아가면 되겠군.」
「제 짐 정도는 충분히 질 수 있어요. 그리고 내가 가는지 가지 않는지는 당신이 결정할 게 아니에요. 전 갈 거예요. 당신이 결정할 일은 이 일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돈벌이를 넘기는 거예요.」
질리언이 침착하게 말했다. 벤이 느끼기에 그녀의 말은 진짜 같았다. 그가 손을 떼도 질리언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벤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받치며 몸을 앞으로 기댔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이번 여행이 아주 근사한 탐험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오. 정글 속을 2, 3개월이나 헤매는 데 여자를 데려간다는 건 말도 안 되오.」
질리언은 오히려 재미있어 했다.
「연약한 여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잘 아시는군. 내 생각엔 세상에 아주 감칠 맛 나는 숲을 가진 여성은 많지 않죠. 그리고 남자도 자기 물건을 지켜야 하거든요. 」
그는 일부러 노골적인 말투를 썼다. 그녀가 발끈 화를 내며 ‘당신 같은 사람과 동행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그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얼굴은 동상처럼 차분하고 무표정했으며, 눈빛은 태연하기까지 했다.
「내가 못 가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염려하는 대로 탐험을 끝이에요. 당신이 돈을 벌고 싶지 않다면 전 아무래도 괜찮아요. 다른 가이드를 찾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여자 하나만 믿고 일에 뛰어들 사람은 없었다. 벤은 그녀의 오빠가 질리언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이봐요. 깊은 밀림 속에서 2개월이나 썩고 싶진 않을 텐데.」
「오히려 그건 제가 원하는 거예요. 루이스 씨, 전 고고학 탐사에 초보자가 아니에요. 전 벌레, 뱀, 더러운 것들, 형편없는 음식과 타박상에도 익숙해요. 5킬로가 넘는 짐을 지고 하루종일 걸을 수도 있어요. 필요하다면 사냥으로 제 식량쯤은 구할 수도 있고 상처를 꿰매고 벌채용 칼을 사용할 수도 있어요.」
벤은 가슴에 손을 갖다대었다.
「저런, 완벽한 여성이군요.」
질리언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벤이 던진 말을 되받아치진 못했다. 그는 의자 뒤쪽으로 기대어 가늘게 실눈을 뜨며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좀 전에 그녀를 대충 살펴보았을 때는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을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점점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녀의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에 벤은 저 꼿꼿한 등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끌어당겨 키스 같은 걸로 그녀를 흥분시켜 보고 싶었다.
다시 보아도 눈에서 보여지는 지성 말고는 특출 난 데라곤 없었다. 신은 지적인 여성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 지적인 여성들은 자신의 본능 대신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질리언은 꽤 예뻤지만 성적인 매력은 없었다. 윤기가 흐르는 짙은 갈색 머리를 한, 다소 마르고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으며 평범한 외모였다. 어깨와 등이 드러난 옷을 입긴 했지만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건 아니었으며, 관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더욱 심한 건 그녀는 벤을 남자로 보지 않았다. 벤은 아무리 둔감한 여자라 해도 자신의 매력을 알아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질리어 셔우드의 몸에는 호르몬이 없는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머리만 꽉 차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배낭을 매고 하루종일 걸을 수 있다면 그녀의 균형잡힌 몸매는 전부 탄력적이고 멋진 근육이 것이다. 그의 엉덩이를 휘감고 있는 날씬한 다리를 떠올리자, 놀랍게도 허벅지 부근이 단단히 죄어들었다. 지금 침대에는 테레사가 혼자 남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격렬한 섹스보다는 오후 일에 지쳐 있었고, 벤은 만족스런 기분으로 다시 술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남성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젠장, 이 녀석은 눈치가 전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벤이 귀찮은 듯 느리게 말했다.
「당신은 몇 개월 동안 남자들 사이에 섞여 지내고 싶소?」
「루이스 씨, 성별을 개입시키지 말아요.」
「생각 안 할 수 없죠. 전세계 어디서든 남자들이 여자를 차지하려고 싸우는데.」
「정말 어리석네요.」
「맞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봐요. 당신은 유일한 여자고, 섹스를 하지 못하면 남자는 미쳐버리지.」
그녀는 벤에게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루이스 씨, 전 속옷바람으로 뛰어 다니진 않을 거예요.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성폭행범을 고용하지 않기를 바라겠어요.」
그녀와 루이스가 언쟁하는 동안 릭과 케이츠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릭은 불안한 듯했고, 케이츠는 아주 지루해 보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고 앞쪽으로 당겨 앉았다.
「이건 무의미한 얘기요.」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가야 해요. 루이스, 일을 할 거요, 안 할 거요?」
벤은 생각했다. 사실 돈도 말다툼도 필요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벤은 다음 몇 주간은 계획한 대로 테레사와 뒹굴며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본능은 뭔가 계속하라고 자신을 자극했다. 그녀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다른 두 친구는 거래를 이용하고 있는 듯했다. 벤은 그게 뭔지 알고 싶었다. 그는 돈 냄새를 맡았다. 그것도 엄청난 돈 말이다. 양심이 좀 켕겼지만 그런 건 돈을 버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사기꾼 일당을 속이는 일에는 더욱더 그랬다.
「알았소.」
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을 맡겠소. 이번 일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는 독한 위스키 한 잔을 그대로 털어넣고는 곧 일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먼 오지로 떠나는 긴 여정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신중하게 계획해야 했다. 일행은 몇 명이며, 어디까지 갈 예정인가? 그곳에 도착하면 얼마나 머물 예정인가? 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여분의 물품을 챙겼다. 예기치 않은 일은 늘 일어나기 마련이어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벤은 지도를 꺼내 테이블에 펼쳤다.
「좋아요, 우리가 어디로 갈 건지 알려줘요.」
질리언은 집게손가락으로 어떤 지역을 가리키고는 큰 원을 그렸다.
「이 지역 전체예요.」
그는 질리언을 미쳤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가 지적한 지역은 수천 킬로에 걸쳐 있었다.
「젠장,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당신이 찾고 있는 건 발견하지도 못한 채 수개월씩 헤매야 될 거요. 재미 삼아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오. 지도에도 없는 영토라구. 어쩌면 지옥이 그곳에 있는지도 모르지. 그 지역에 들어간 백인 중에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사람은 없었소.」
질리언은 침착했다.
「루이스 씨, 여행하면서 정확한 경로를 계산하면 돼요.」
「그래요? 하지만 여행 도중에 물품을 챙길 순 없소.」
벤은 거의 비꼬듯 천천히 말했다.
「어디로 떠나는지 사전에 알아야겠소.」
질리언은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한 지점을 톡톡 쳤다.
「이 지점까지 버틸 수 있게 물품을 준비하면 될 거예요.」
그는 이빨을 드러내 보였지만 웃지는 않았다.
「저 지랄 같은 물품을 가져가야 하오. 운반할 물건이 많을수록 여행을 길어지고, 게다가 여행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소, 아가씨?」
「분명히 확실한 길을 찾을 거예요.」
「확실한 경로를 찾을 수 있다 해도 지금 당장 나를 만족시켜주는 건 아니오.」
벤은 자신에게 일격을 가한 그녀의 목을 조르든지, 아니면 그녀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든지 해야 했다. 아무튼 벤은 정말 난감했다. 전에는 여자와 논쟁할 때라도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남자는 도전장을 건 여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질리언 셔우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도전 그 자체였다.
「당신은 최고니까 해낼 거예요.」
그녀는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가능한 모든 정보를 드리겠어요.」
그가 추측하건대, 그녀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일임이 느껴졌다. 벤은 그들의 목적지가 그녀 오빠에게조차 말 못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이유가 궁금했다. 벤 역시 릭 셔우드와는 어떤 정보도 함께 나누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특히 릭이 스티븐 케이츠 같은 친구를 둘 정도면 알 만했다. 셔우드는 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가 가고 싶어하는 곳에서 그녀는 뭘 할 작정일까? 24시간 경비라도 서려는 걸까?
벤은 이야기를 중단했다. 그녀는 지금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질리언 역시 벤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 현명한 여자였다. 벤이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면 사실 대개는 솔직한 편이었지만, 그녀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그녀가 조금이라도 가이드를 실망시키면, 은밀히 그녀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릴 것이다. 그녀가 빠져도 큰 손해는 없을 것 같았다. 함께 가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려서 하는 수 없이 그녀와 몇 개월을 함께 일하게 됐지만, 일단 벤의 유혹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누가 알겠는가. 당장이라도 감언이설로 그녀를 꼬드긴다면 찾고 있는 것을 벤에게 얘기해줄지도 모른다. 밀림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 그렇게 귀중하다면 젠장, 그에게도 역시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엄청난 투자를 할 필요도 없었다. 벤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취하게 될 행동에 대해 약간의 한계선은 그었지만,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잡을 것이다.
다음날 만나 선불은 물론 물품 구입과 일꾼 고용에 필요한 돈을 받기로 약속했다. 이제 모든 게 결정됐고, 벤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너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릭이 씩씩거리며 따졌다. 질리언은 한숨을 쉬었다. 벤 루이스와 협상하느라 몹시 피곤했다.
「내가 그 사람보다는 좀더 정중했어.」
「넌 중요한 거물 고고학자나 된 듯 거만하게 굴었어.」
거물 인사? 그녀는 큰소리로 웃을 뻔했다. 그녀의 직업적 명성은 거의 밑바닥이었다. 재단 측이 그녀를 존중하고 의견을 신뢰했다면, 지금의 가이드와 난폭하게 협상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릭은 그녀가 아버지 뒤를 잇는다는 사실을 늘 시기했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되면 쉽게 격분했다.
「난 거만하게 굴지 않았어. 협박해봐야 별 수 없다는 걸 그에게 알려준 것뿐이야. 어쨌든 그 사람을 제대로 선택한 것 같진 않아. 오늘 오후 오빠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술을 마시고 있었고, 오늘밤에도 술을 마셨어. 아무래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아. 술주정뱅이한테 도박을 걸 순 없잖아.」
「그래서 네가 지금 그 일을 맡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릭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간신히 화가 치미는 걸 꾹 눌렀다. 질리언은 아버지가 오빠와 자신을 편애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죄의식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릭에게 그저 안타까운 감정밖에 느낄 수 없었다. 동시에 오빠로 인해 끓어오르는 감정과 무수히 싸워야 했지만 말이다. 오빠의 인생에서 뭔가 잘못된 일은 항상 다른 사람 탓이었고, 대개 질리언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녀가 말을 낚아챘다.
「안자르 시를 찾아서 아버지의 오명을 깨끗이 벗기는 거야. 최소한 그 가이드가 술에 취하지만 않으면 더 잘 해낼 거야.」
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넌 내가 아버지의 이름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분은 나의 아버지이기도 해.」
질리언은 릭이 아무리 화나게 해도, 오빠가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잊어버려요. 알겠죠?」
케이츠가 끼여들었다.
「우리 모두 지쳤어요. 루이스가 거칠게 말하긴 했지만, 그의 평판은 최고예요. 내일 그를 만나서 얌전하게 굴라고 말할 테니,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때요?」
케이츠가 중재자처럼 진정시키는 투로 말했지만, 그의 차가운 눈은 릭에게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 질리언은 모른 체 했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보았다. 케이츠는 악의 없는 태도를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녀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녀는 진짜 싸움으로 이어지기 전에 중얼거리듯 저녁인사를 한 뒤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케이츠는 릭에게 머리를 획 돌리며 홀 아래쪽 방으로 내려갔다.
「질리언을 화나게 하지 마. 질리언이 따로 협상을 하겠다고 하면 우린 고생한 보람도 없이 찬밥 신세야.」
케이츠가 경고했다.
「루이스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거야. 질리언은 벤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
비난을 받아 부루퉁해진 릭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가이드가 루이스밖에 없는 건 아니지. 그녀가 보석이 정말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확신만 주면 사람들은 돈을 빌려서라도 제 발로 보물을 쫓아갈지도 몰라. 제발 성질 좀 죽여. 최소한 우리가 길을 떠나고 나서 질리언이 그런 일을 벌릴 수 없을 때까지 만이라도 말야.」
「알았어, 알았다구. 하지만 질리언의 태도는 정말 역겹단 말야.」
케이츠는 애써 웃으려 했다.
「돈을 생각해.」
케이츠는 돈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이 이곳에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는 밀림과는 거기가 멀었고 전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 보석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잇는 건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릭이 그에게 찾아와서 그의 아버지가 잃어버린 도시를 찾고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떠들어대며, 행운의 보석들이 맨 먼저 도착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릭이 상세한 설명을 끝내고 나자 케이츠는 그의 말이 진지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케이츠는 필사적으로 탐사에 참여할 기회를 갖긴 했지만 많은 돈이 필요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잡음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지난번엔 코카인을 대량 선적한 일로 경찰에 붙잡힌 적도 있었다. 경찰은 그의 혐의를 찾아낼 수 없어서 적지 않게 고민했지만 구속할 순 없었다. 그는 코카인을 실은 선박에 돈을 미리 지불한 고객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거리에서 코카인을 팔 수 있다면 수차례에 걸쳐 돈을 다시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코카인 값을 지불한 고객들은 돈을 받으려고 그를 기다리는 데 진력이 난 상태였다. 오히려 경찰은 이 사람들을 거물급으로 보고 있었다.
여러 면에서 릭의 어리석은 계획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케이츠는 이 무모한 계획을 지원할 돈이 충분히 있었다. 일이 잘 풀리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최소한 브라질에 있는 동안만큼은 긴장을 풀고 머리도 식힐 겸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제기랄, 릭의 말이 옳다면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건수인 셈이다. 보석, 그것도 아주 크고 붉은 다이아몬드라면 돈을 다발로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코카인으로 인해 생긴 빚은 껌 값에 불과했다. 케이츠는 그 보석에 대한 꿈을 꿨고 손안에 쥐고 있는 상상을 했다. 셔우드의 입 단속만 잘 하면, 주머니가 넉넉해질 수 있는 승차권을 손안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동생은 어리석지 않았다. 케이츠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녀는 가문의 수재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혼자만 모든 정보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지침은 어떤 암호로 쓰여 있어서 그녀만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케이츠는 그녀 때문에 고민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자신을 그곳에 데려가 주는 것뿐이었다. 일단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그녀나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케이츠는 그들을 따돌릴 엄청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늘 골칫거리였다. 이건 케이츠가 일생에 큰 행운을 얻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다음날 스티븐 케이츠는 술집에 혼자 나타났다. 벤은 겉보기에 착하고 친근감 있어 보이는 케이츠에 대한 의심을 본능적으로 숨겼다. 많은 사람들은 남부 특유의 느린 말투와 초라한 행색 그리고 술고래인 벤의 행동을 비웃었으나, 이런 행동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말투가 느린 것은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벤을 지켜본 사람들만이 그가 명석한 두뇌로 냉철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는 케이츠가 이런 점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질리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신 때문에 어젯밤 일이 거의 엉망이 될 뻔했소.」
벤의 테이블에 앉으면서 케이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는 싸구려 창녀가 아니오. 그 지역을 찾으려면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걸 명심해요.」
테레사는 다시 평상적인 낮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벤은 케이츠가 테레사를 쳐다보는 눈빛이 싫었다. 그녀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우며 섹스를 무척 좋아하는 육감적인 여성이긴 했지만 창녀는 아니었다. 벤은 입을 다물었다. 케이츠와 친한 척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들이 함께 오지에 들어가면, 이 녀석에게 누가 대장인지 알려줄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확실한 건 케이츠가 대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날 미치게 만든 여자 고고학자를 위하여, 건배.」
벤은 느린 말투로 말했다.
「제발 입 조심하고 바지 끈이나 잘 간수해요. 적어도 시계 바늘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잖소.」
「물론이죠, 대장.」
벤은 마음속으로 이죽거리며 말했고, 대장이라는 호칭을 쓸 때 케이츠가 비웃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의 오빠는 어디에 있죠?」
「오늘 아침엔 릭까지 올 필요 없었소. 이런 부분은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케이츠가 어떤 일을 꾸미려는 것이 분명했다. 벤은 남방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벌써 필요한 물품과 액수를 계산한 내역서를 준비해놓았다. 케이츠가 내용을 읽어볼 수 있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건 필요한 물품과 인원을 작성한 것이오. 배를 이용해서 최대한 강 상류로 올라갈 거요. 그러니까 두 척의 배가 필요하고 제가 오늘 안에 모든 것을 준비할 겁니다.」
「좋군요.」
케이츠는 벤에게 갈색 봉투를 건네주었다.
「10주에 2만이오. 탐험이 기한을 넘긴다면 돌아오는 대로 나머지를 지급하겠소.」
「공평한 것 같군요.」
벤은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세어볼 참이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한 사람 고용할 예정이오. 그건 그렇고, 물품비용은 어떻게 처리하죠?」
「내가 모든 물품을 준비해서 영수증을 갖다주겠소. 당신은 돈만 지불하면 돼요. 그렇게 하면 번거로움을 덜게 되잖아요.」
벤은 케이츠가 직접 고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지만 관심 없는 척했다.
케이츠가 술집을 떠나자 벤은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발걸음을 떼었다. 10년 된 포드 트럭을 여느 때처럼 뒷문 바깥에 주차시켜 놓았다. 차가 있는 곳까지 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케이츠가 택시에 탈 때쯤 그는 건물을 돌아 교통량이 많은 쪽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망설였다. 마나우스에서 운전하기는 쉬웠다. 대개 북미의 도로를 그대로 복사해서 만든 남미의 도로는 혼란스럽긴 했지만 북미보다는 훨씬 덜 했다. 벤이 차창 문을 내리자 뜨거운 바람이 트럭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몇 미터 앞에서 달리는 택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스투스의 술집도 시내의 좋은 구역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택시는 진짜 험한 지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벤은 좌석 아래로 손을 넣어 총을 옆에 꺼내 두었다. 17발 연속 탄창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제 글록-17이었다. 일을 순조롭게 해결하기에 좋은 물건이었다. 곁에 놓인 총을 슬쩍 쳐다보았다. 무기란 개인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한 상황에선 적절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케이츠는 그가 뒤따라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만일을 위해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다. 바보 같은 자식!
택시가 도로변에 멈춰 서자 벤은 그 차를 곧장 지나쳐서 모퉁이를 돌았다. 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청바지 뒤 허리춤에 총을 쑤셔 넣고 헐렁한 셔츠로 가렸다.
잠시 시선을 뗀 사이 케이츠가 어느쪽으로 갔는지 놓쳐버린 그는 갈 만한 곳을 생각하면서 트럭 옆에 잠시 서 있었다. 그 사내가 나타나지 않자 벤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 낡아빠진 건물 쪽으로 바삭 달라붙어 걷다가 재빨리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케이츠는 길을 건너서 게툴리오라는 술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형편없고 싸구려 술집이라 이에 비해 크리스투스 술집은 특급 호텔로 생각될 정도였다. 벤은 몇 년 전 그 술집에 몇 번 들른 것이 있었다. 그 집 분위기는 아무래도 좋아지지가 않았다. 어떤 남자가 게툴리오 술집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제기랄, 그는 케이츠를 뒤따라 술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선 선글라스를 벗어야 했던 것이다. 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1분도 채 안 되어 그는 얼굴에 찌든 카키색 사파리 모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십대에게 산 것이었다. 그 녀석은 그 모자를 절대로 훔치지 않고 산 물건이라고 주장했지만, 벤은 믿지 않았다. 많이 가려주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눈가림은 되었다.
벤은 천천히 길을 건너 한쪽으로 비켜섰다. 술집의 낡고 두꺼운 문이 열리더니 건장하게 생긴 부두 일꾼들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왔고, 상당히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벤이 선글라스를 재빨리 벗으면서 안으로 살짝 들어가자 문이 쾅 닫혔다. 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벤은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왼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게툴리오에는 유리창이 없었다. 천장에는 낮은 전압의 전구가 몇 개 걸려 있었고 바의 위쪽에도 전등이 몇 개 걸려 있었다. 바 쪽에는 벤이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인색해 보이는 바텐더가 서 있었는데, 그는 2미터 정도의 키에 몸무게는 아마 150킬로그램쯤 될 것 같은 우람한 체구의 남자로, 왼쪽 귀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벤이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자마자 뚱한 얼굴을 한 소년이 다가왔다.
「음료는?」
「맥주.」
그 녀석이 자신을 기억할 만한 요소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대답을 한마디로 일축했고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의자에 최대한 보기 흉한 자세로 앉아, 졸거나 마약복용을 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녀석이 맥주를 가져왔고, 벤이 탁자에 돈을 올려놓자마자 재빨리 낚아채곤 사라져버렸다. 이제 그는 혼자서 맥주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잔은 일주일 정도 씻지 않은 것 같았다. 벤은 알코올 성분이 세균을 어느 정도 죽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 모금 홀짝였다. 그는 자세를 바꿔, 의자에 걸터앉아 팔꿈치는 테이블에 올리고 머리는 앞으로 푹 숙였다. 모자가 얼굴을 완전히 덮어주었다. 이제 천천히 눈을 들어 실내의 어둠 속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열 다섯 내지 스무 명 가량 있었고, 절반 정도가 바에 서 있었다. 아무도 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욕이었고, 나라와 언어는 다를지라도 욕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바텐더 뒤 선반에 놓인 라디오에선 브라질 록음악이 크게 울려 퍼졌다.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가수는 아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츠는 문을 등지고 끝에 있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어리석은 행동이군. 바로 그때 벤은 케이츠의 탁자에 있는 다른 사람을 알아보았고, 케이츠가 선택의 여지없이 그 자리에 앉아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라몬 두트라는 자연스럽게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는데, 거기엔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두트라는 흉악한 살인자였다. 그는 살인 청부업자로 알려져 있었고, 최대한 잔인하게 살인하는 걸 기쁨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케이츠가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두트라라면, 벤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이번 일은 훨씬 힘들 것이다. 케이츠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정글 속에서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무엇을 독차지하려는 걸까? 황금, 혼자 독차지하려고 말이지. 하지만 황금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케이츠 혼자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밀림지대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그였으니까.
그러나 두트라는 알고 있다. 그는 다른 살인자나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기 위해 정기적으로 강 상류로 사라지곤 했다. 두트라를 고용하다니 너무 어리석었다. 케이츠는 두트라를 이용해서 한몫 챙겨 밀림을 빠져 나온 후 두트라를 죽이려는 계획이겠지만, 분명 두트라도 그와 같은 시나리오를 구상중일 것이다. 결국 시체가 되는 건 케이츠일 확률이 높겠지만.
이번 탐험은 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 될 것 같았다. 새침하고 진지한 질리언은 지각이 있어 보였다. 젠장, 어떻게 그녀가 저 능구렁이 같은 케이츠와 연관되었을까? 물론 그녀의 오빠가 저지른 일일 테지. 오빠라는 사람은 케이츠가 여동생을 아주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려는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는 걸까? 절대로 모를 테지. 케이츠가 언제나 이중 거래를 하고 있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릭은 완벽한 동업자로 생각하겠지만, 어수룩한 생각일 뿐이었다.
벤은 뜻밖의 일을 알게 되자 단념할까 생각해보았다. 그는 케이츠와 릭을 빼버리고 질리언과 둘이서 일을 할까 했지만, 얼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원하는 만큼 큰돈을 벌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엄청난 돈을 퍼붓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녀가 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고의적으로 노골적인 언행을 쓰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렇지만 그의 혐오스런 모습도 그녀는 잘 견뎌냈다. 이번 여행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올 때까지 함께 고생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벤은 이제 궁금해하던 바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단숨에 맥주를 비웠다. 그리고 일어서서 선글라스를 옷 뒤에 슬쩍 집어넣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고,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밖으로 걸어나왔다.
두트라의 개입은, 그저 벤이 질리언의 안전에 좀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벤이 고용하려고 계획중인 인부들은 두트라가 일행이라면 함께 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제 그는 믿음이 덜 가는 일꾼들을 고용해야 했으며 그만큼 위험도 높아질 것이다. 짐꾼들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확률은 반반이었다. 케이츠가 진짜로 금을 찾는다면 오지에서 가져 나올 수 있는 나머지 일손이 필요할 것이며,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짐꾼들을 만족시켜주면 그만이었다. 일단 두트라가 금을 지고 나올 경우엔 짐꾼들의 몫은 없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가치 있는 발굴 장소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도굴당해 왔다.
벤은 좁은 도로를 건너 트럭을 세워 둔 모퉁이를 돌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어린 십대들이 떼지어 있어서 복잡했다. 그는 아이들을 쫓아내고 트럭에 올라탔다. 창문을 내렸는데도 금속 지붕 아래로 내려 쬐는 열기는 후끈거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열대지방에 있었지만 그땐 더운 것조차 몰랐었다. 잠시 앉아 있는 동안에도 등에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와 두 명의 셔우드가 가장 위험했다. 릭 셔우드는 여동생보다는 덜 위험할 것이다. 일행들이 금이 있을 거라 추측한 곳에 도착하면 케이츠는 행동을 개시할 테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더 이상 위험스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제기랄, 그는 이런 도박을 좋아했다. 틀에 막힌 안전한 생활이라고는 테레사의 침대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 외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제 질리언 셔우드와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은 일종의 도전으로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