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 시간속의 향기-1화 (2/24)

1

질리언 셔우드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해 입을 굳게 다물고 아파트로 들어섰다. 지은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이 아파트는 그녀에게 기쁨과 성취감을 안겨주는 대상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소유였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랐다. 시원하고 편안한 실내장식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방을 현관 테이블에 팽개치고는 들끓는 분노를 삭히려는 듯 거실을 지나 발코니로 걸어갔다.

질리언은 로스앤젤레스의 늦은 봄 열기 속에서 양손으로 허리 높이의 콘크리트 벽 언저리를 꼭 잡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평상시엔 도시의 멋진 광경을 바라보며 낮에는 도시의 은은함을, 밤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을 즐겼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도 화가 치민 나머지 도시의 아름다운 장관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젠장, 속 좁은 인간들 같으니라구!

그녀는 동아프리카 오살라 탐사에 합류할 기회를 얻기 위해 회비를 지불했다. 그건 수십 년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탐사로 고고학적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질리언은 자신도 합류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군침을 흘렸다. 최근 홍해의 아프리카 해안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고대도시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싶었다. 발굴작업에 필요한 자금은 그녀가 몸담고 있는 프로스트 고고학 재단에서 투자했다. 질리언은 오살라 지역을 탐사할 선발팀에 들어가려고 자신의 이름을 제출했을 때 너무도 흥분된 나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발팀에 뽑히지 못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경력도 우수했고 보고서도 훌륭했을 뿐더러 여러 개의 논문도 저명한 출판물에 실리기까지 했었는데 말이다. 질리언은 고고학 박사 학위를 가졌고, 규모는 작지만 아프리카의 발굴탐사에 이미 수차례나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 탓인지 오살라 발굴작업에서 그녀는 상당히 가치 있는 존재였다. 선발팀에는 최고의 탐사요원만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당연히 질리언도 그 중의 산 사람에 속했다. 그녀는 경험도 있고 신중한데다가, 부지런했으며 민첩성과 상식적인 사고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기질은 고고학자로서 탐사 뒤에 남겨진 유물조각들로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함께 끼어 맞추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선택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선택되지 않았다. 재단을 경영하는 멍청이들에게 있어서 그녀를 포함시키지 않은 아주 합당한 이유로 셔우드라는 그녀의 이름을 꼽았기 때문이었다.

얼빠진 대학의 고고학장은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괴짜 사이러스 셔우드의 딸은 고고학팀의 명성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질리언은 광범위한 이론을 제기한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자신의 작업성가 신뢰성을 잃고 만 것이다.

질리언은 벽에다 머리를 쿵 처박으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발산시켰다. 아버지는 항상 세 사람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심사숙고 한 뒤에 결정하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는 고고학이라는 분야를 떠나고 싶지 않을뿐더러 너무나도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직업에 있어서 결정권자들은 단지 그녀의 이름 때문에 그녀를 제외시켜버렸다. 고고학 발굴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반해 후원자들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실질적인 발굴에 합류하려는 경쟁은 치열한 상태여서 그녀를 주요한 발굴에 보내줄 수 있는 팀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탐사팀에 들어가게 되면 발견된 유물에 대한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금을 잃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녀가 가명을 쓴다 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고고학계는 너무 좁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모든 게 정치적인 논리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사실 자금은 항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사에게 돌아갔고, 그녀를 포함시켜 눈총을 받고 싶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리언은 규모가 작은 탐사엔 수차례 참여했었지만, 중요한 발굴들이 있을 때에는 항상 철저히 소외당했다.

질리언은 아무리 자신의 위치가 유리해진다 해도 절대 이름은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고 뛰어난 고고학자였다. 내일 모레면 스물 아홉 살이 되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가 그리웠다. 고고학 분야에 있어 수많은 업적을 남긴 아버지였지만, 사실상 그의 광범위한 이론이 모두 무시된 현실에 그녀는 몹시 격분했다. 그가 입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마존 정글을 탐사하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바로 자신의 이론을 입증시킬 명백한 증거를 찾아 헤매던 탐사였다. 그는 허풍쟁이와 바보로 낙인 찍혔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많은 동정과 연민이 아버지를 그저 거짓말쟁이로만 치부한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이러스 셔우드의 평판은 질리언이 대학을 다닐 때에도, 경력을 쌓는 동안에도 늘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때문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휴가도 반납해가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순간 순간을 고고학에만 매달렸다. 아버지가 집착했던 세계가 그저 환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를 비웃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허나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괴짜 셔우드’의 딸은 발굴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양손으로 벽을 내리쳤다. ‘우리 아버지는 괴짜가 아냐.’ 아버지는 약간 모호하고 사람들과 다소 어울리지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정에선 굉장히 훌륭한 아버지였고 뛰어난 고고학자였다.

아버지를 생각하자, 질리언은 문득 자신이 읽어보지 못한 논문 상자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죽은 후 집을 팔면서 이복 오빠인 릭이 아버지의 논문들을 자신의 우중충한 아파트로 가져가,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질리언이 알고 있는 한, 릭은 아버지의 논문 따위엔 관심조차 없었고 만져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질리언이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거처로 이사갈 때 논문 상자를 옮겨가겠다고 했으나 릭은 단번에 거절했었다. 그녀는 릭이 아버지의 유물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논문들 대부분이 그 상자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릭의 삐뚤어진 마음을 비난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논문들을 간직하고 싶었지만 사실상 가지려는 노력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었다. 이제까지 아버지가 그 분야에서 괴짜나 웃음거리로 여겨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감당하며 그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논문을 보고 ‘혹시 믿게 되면 어떡하지’하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힐까봐 읽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게 더 나을 듯도 싶었다.

하지만 지금 질리언은 아버지를 좀더 가깝게 느끼고 싶은 충동과 호기심이 솟구쳤다. 일부 이론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5백 년 전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이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듯 아버지 역시 괴짜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지도와 도표, 서적들을 뒤지며 단서를 찾는 데 수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단연 최고였기 때문에 몇 안 되는 증거 자료지만 지난 과거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상자를 갖고 있으면 좋을 텐데. 그는 딸을 후원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해주지 않았고, 지금 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 낡은 기록들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진 자료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의 죽음 다음으로 가장 화나고 슬픈 일이며, 자신의 경력에 있어 가장 암담한 순간이었다. 질리언은 선천적으로 독립심이 강했다. 독립심이 강한 사람도 때론 위안이 필요한데… 바로 지금이 그때였다. 그녀는 아버지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었고,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다시 더듬어보고 싶었다.

결심이 서자, 질리언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얼굴을 찌푸린 채 주소록에 나와 있는 릭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가 여러 차례 돈을 빌려갔을 뿐 근본적으로 두 사람 사이엔 어떠한 왕래도 없었다. 1년에 한 번 꼴로 만나는 것도 두 사람에겐 많은 횟수였다.

전화벨이 한참 울렸지만 릭과 통화하려면 아무래도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성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스트레스를 풀기엔 운동이 제격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체육관에 들러 조깅도 하면서 체력을 유지했다.

두 시간 뒤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기를 들고 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첫 신호음이 떨어지자 놀랍게도 수화기 드는 소리와 동시에 무뚝뚝하면서도 약간 흐릿한 말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여보세요?」

「오빠, 질리언이야. 오늘 저녁에 집에 있을 거야?」

「왜?」

경계하면서도 다소 수상쩍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빠의 옛 논문들이 담긴 상자를 살펴보고 싶어서.」

「뭐 때문에?」

「그냥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래.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지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또 얼마나 간절히 아버지와 연결되고 싶은지는 말하지 않았다.

「여기 앉아 추억을 더듬는 걸 지켜보고 있을 시간 따윈 없는데.」

릭은 그녀가 상자들을 들고 집으로 가져갈 가능성은 완전히 회피하는 말투였다. 그는 질리언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만해.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어. 잘 있어.」

「잠깐.」

그가 서둘러 말했다. 그녀는 오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상이 뭔지 그림처럼 선명했다.

「아무래도 어… 이쪽으로 오는 게 좋겠어. 있잖아, 돈이 좀 필요한데. 빌려줄 수 있니?」

「글쎄, 잘 모르겠는데.」

릭이 돈 빌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바라면서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을 바꿀지도 몰랐다.

「얼마나 필요한데?」

「많이는 아니구. 한 100달러 정도.」

「100달러씩이나!」

「그럼, 50달러라도.」

「잘 모르겠어.」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얼마나 있는지 봐야겠는데.」

「지금 올 거니?」

그가 기대에 차서 물었다.

「오빠가 집에 있는다면.」

「집에 있을 거야.」

전화 끊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난폭하게 들려왔다. 질리언은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매번 릭과 연락하는 것은 돈 문제였고 늘 그런 식이었다. 그녀는 가끔씩 오빠가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려 하는 게 아닌지 궁금했다.

우선 50달러가 있는지 지갑을 확인했다. 돈은 충분했다. 현금지급기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외출해야 했고, 그건 어두운 저녁 무렵에는 정말 피하고 싶은 위험한 일이었다. 차에 기름도 충분했고 저녁에 돈 쓸 일도 없었다. 아버지의 논문을 훑어보기 위해 50달러 정도 쓸 가치는 충분했다. 지금 그녀는 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질리언은 자신의 힘으로 지탱하고 싶었지만 힘이 들었다. 심지어 가장 회복이 왕성한 식물조차 시들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밤 그녀는 의기소침해 있었다.

오늘밤 먼지 나는 더러운 상자를 분류하는 일로 힘이 들겠지만 그녀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릭의 아파트는 단지까지 가는데 정확히 45분이 걸렸다. 창백한 분홍 빛깔의 벽토로 칠해진 건물은 산뜻하지 못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아파트는 새 건물이었지만 이제는 얼룩지고 지저분한 연분홍으로 바래져 있을 뿐이었다. 2층 자기 건물 세 동 중 릭은 왼쪽 건물의 맨 아래층에 살았다. 주차장에는 여러 형태로 찌그러진 차들이 꽉 차 있었고, 이런 차를 타는 사람들은 아마 그냥 굴러가는 대로 타고 다니는 것이리라. 아파트의 분홍색 페인트만 제외하면, 이곳의 거주자들은 모두 궁상이었다.

질리언은 문을 두드렸다. 텔레비전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다시 세게 두드렸다.

「알았어.」

시큰둥한 대답이 들려왔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릭을 보자 명랑하고 잘생긴 모습에 놀라웠고, 그의 얼굴이 담배와 술, 그리고 평소의 나태한 생활방식을 용하게 견뎌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결국 세월의 흐름으로 외모는 좀 시들해졌지만 어쨌든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어서 와, 돈 가져왔어?」

「50달러밖에 없어. 하지만 더 필요하면 어떻게든 해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다르게 말하고 싶었다.

「안녕. 난 잘 지내고 있어. 오빠는 어떻게 지내?」

릭이 숨을 쉴 때 지독한 술 냄새가 퍼져 나왔다. 그는 술에 취하지 않아도 매너가 형편없었지만, 술을 마시면 아예 안하무인이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술에 찌든 생활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물론 필요하지.」

릭이 뒤질세라 맞받아 쳤다.

「100달러가 필요하니까 너한테 부탁한 거 아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갑을 꺼내 열었다. 그는 여동생이 갖고 있는 돈을 전부 꺼내주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57달러였다. 질리언은 이 돈을 다시는 만져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돈을 건네주며 상자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저기 뒤쪽 침실에 있어.」

릭이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그 침실은 완전히 잡동사니로 가득한 방이었고, 상자는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서 주변을 깨끗이 치운 뒤, 상자를 풀어놓을 공간을 마련했다.

「뭘 찾고 있는 거야?」

릭은 뭔가 의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질리언은 전부터 릭이 자신을 믿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논문을 읽어보고 싶어서. 의자 가져와서 나랑 훑어보지 않을래?」

「아니, 됐어.」

릭은 그녀에게 여전히 의심스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차라리 찬 음료수나 마시며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 낫겠어.」

「그럼 그렇게 하던가.」

그녀가 첫 번째 상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상자는 다섯 개가 있었고, 한때 교수가 가장 사랑했던 것들이 하나같이 물로 얼룩진 자국에다가 먼지도 수북히 쌓여 있었다. 질리언은 바닥에 앉아 상자를 봉했던 갈색 테이프를 뜯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그녀가 주제별로 정리했던 연구자료였다. 그 중 책 몇 권은 관심 있게 눈여겨봤던 거였고, 다른 몇 권은 보기 드문 자료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것이었다.

다양한 발굴작업에 관한 메모와 가까스로 구한 흥미로운 기사 내용들과 지도뿐 아니라 시대별로 다양하게 만들어놓은 도표들도 들어 있었으며, 아버지의 생각을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히 기록해놓은 노트도 몇 권 포함되어 있었다. 알아보기 힘든 아버지의 필체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져, 질리언은 가슴이 벅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일에 너무 열성적이어서 잃어버린 문명세계를 재건하는 데서 끝없는 즐거움을 찾았다. 자신의 상상을 억누르지 않고 생각이 흐르는 데로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런 상상이 정말 현실로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상상력은 교활한 거짓말보다 훨씬 더 멋진 것이었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전설로만 알려진 내용들을 추적하도록 이끌었다. 아버지는 기록에 있는 중요한 사건을 하나씩 일치시켜 놓았다. 질리언은 어린 시절 아버지 발치나 무릎에 앉아 보냈던 수많은 밤을 떠올리며, 딸의 즐거움을 위해 놀랄 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던 시절을 생각했다. 그녀는 여느 아이들처럼 동화 따위를 듣고 성장하지 않았다. 동화는 고대문명과 보물, 신비스러움 등을 사라지게 했다. 그들이 정말 존재했을까? 아니면 단순히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였을까? 아버지는 그 내용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가능성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하면 작은 실마리를 가지고도 이야기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녀는 노트를 훑어보며 각각의 전설마다 연관시켜 들려준 아버지의 이야기를 생각하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전설이 사실적 근거가 없는 신화로 못박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서 진실이 밝혀진 건 없었지만, 적어도 몇몇 전설은 가능성이 있었다. 질리언은 다시 아버지의 논문을 보자 몹시 흥분되었다. 어떻게 아버지를 정신나간 괴짜라고 해임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에도 아버지가 신중하게 검토한 이 증거물은 타당성이 있었고, 그가 목표로 삼았던 신비롭다거나 전설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야기하는 건 안자르에 관한 아버지의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규모가 너무 광범위해서 실패하고 말았지만, 아버지는 안자르를 찾는 데 일생을 던졌다.

안자르! 질리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오랫동안 정설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전설에 매료되어 있었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안자르 전설을 찾으려고 아마존으로 떠나기 전날 아침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기뻐하다 못해 너무 흥분해 있었다. 질리언은 당시, 야위고 고집 센 열 세 살, 아니 거의 열 네 살이 다 된 소녀였다. 아버지가 그녀의 생일날 탐사를 떠나려 했기 때문에 골이 나서 입을 삐죽거렸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껴안으며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얘야, 화내지 마라. 몇 개월 뒤에 돌아올게. 길어야 6개월이야.」

「안 가면 안 돼요?」

「여왕이 정말 살았었는지, 안자르가 존재했었는지 입증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열 세 살인 그녀는 이미 놀라울 정도로 인생에 대해 현실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그녀가 떼를 쓰자 아버지가 웃었다.

「전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면 어떻게 되겠니. 내 손안에 여왕의 심장을 쥐고 세상에 그 아름다움을 알려준다고 생각해보렴.」

질리언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조심하셔야 돼요.」

질리언은 아버지에게 손가락을 흔들며 꾸짖듯이 말했다.

「아마존은 가볍게 산책하듯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알았다. 조심할게. 약속하마.」

그날 아침 아버지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그로부터 3개월 뒤 아버지의 죽음을 접했고, 시체를 되찾아 돌아오는 데 2개월씩이나 걸렸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큰고모 루비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학교 생활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갑자기 집이 팔렸고, 큰고모의 작은 방갈로에 영원히 정착하는 줄만 알았다.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다름이 없는 오빠 릭은 사춘기 소녀인 여동생에게 부담을 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게다가 릭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재혼한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집을 나와 독립해 있었다. 릭과 질리언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사실 릭은 그녀를 보면 화를 참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계속 곤두박질을 쳤다.

‘안자르의 전설’을 찾아 나선 아버지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고, 그 사건은 질리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단지 아버지를 잃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뿌리째 뽑아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마지막 탐험은 그녀의 경력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전설에 관한 아버지의 개인적인 생각을 알고 싶었지만, 안자르에 헌신적으로 열정을 쏟았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질리언은 들고 있던 노트를 던져보리고 다른 노트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두 권의 노트를 훑어보고 나서야 안자르에 관한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 앞부분에 짙은 검은색 제목이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남아메리카 안자르 문명!

아버지가 조사한 그 전설에 대한 모든 것이 노트 한 권에 담겨 있었다. 흥분의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상자에서 노트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아버지의 명성을 벼랑 끝에 서게 할 정도로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그것. 평생을 받쳐 그 뒤를 쫓아다녔던 아버지. 하지만 왜 결국 둘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인지를 이 노트를 통해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우화와 전설을 수집했다. 그 모든 것이 여왕 또는 여왕의 보석을 찾는 데 참고 자료였다는 것을 질리언은 잘 알 수 있었다. 사이러스 셔우드는 우화의 유래를 명확하게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조사만큼은 철저하게 했다. 우화는 잉카 또는 마야 시대 것도 아닌, 조금 발달한 문명세계에서 나온 듯했다. 우화는 ‘푸른 바다 아래의 돌로 이루어진 도시, 안자르의 땅!’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조금씩 변형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우화 속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푸른 바다 아래 돌로 이루어진 도시의 여왕이 다른 부족의 전사와 사랑에 빠진다. 악마의 날개를 단 그 전사는 유혈부족으로부터 돌로 이루어진 도시와 여왕을 지키려다 죽음을 맞이한다. 여왕은 그의 시체 앞에서 이생과 다음 생에서 자신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심장은 붉은 보석으로 변했고, 그녀의 몸에서 나온 보석은 진정 사랑했던 전사의 무덤 앞에 놓여졌다. 그녀가 맹세한대로 영원히 그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안자르를 보호하기 위해 주문을 던진 그 붉은 보석에는 마법의 힘이 서려, 푸른 바다 아래 감춰진 돌로 이루어진 도시를 영원히 지켰다.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한 종류였다. 이 이야기와 셔우드 교수의 깊은 관심은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그랬다. 노트를 계속 바라보며 발꿈치를 들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버지가 노트를 따로 만든 것은 이 전설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다면 심장이 왜 이렇게도 뛰는 걸까. 질리언은 갑자기 긴장감으로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글은 1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히 와 닿았고 질리언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암호를 발견했다. 뚫어지게 바라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한순간 깨닫게 되었다. 지갑을 꽉 움켜잡고 주위에 연필을 찾아 급히 암호를 베끼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단지 단어 몇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접은 뒤 지갑에 얼른 쑤셔 넣었다. 개인적으로 암호를 해독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흥분한 것도 당연했다. 땀이 흐르고 맥박이 뛰었으며,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소리가 쿵쿵 가슴을 울렸다. 가슴 깊이 쌓였던 긴장감을 풀기 위해 머리를 들고 원초적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해낸 거야!

그녀는 자신이 평생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뼛속 깊이 확신했다. 아버지가 안자르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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