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시간 속의 향기(Heart of Fire)
린다 하워드 / 최경희 옮김
현대문화센타
여왕의 심장(The Queen's heart)
녹색의 바다 밑에 존재하는, 또 다른 문명의 도시 안자르!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이 도시의 여왕은 한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남자는 적들의 침입을 받은 안자르와 여왕을 지키려다 죽게 되고,
슬픔에 잠긴 여왕은 그의 주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은
현세뿐 아니라 내세까지, 영원히 그에게만 속하리라고 맹세한다.
시간이 흘러 여왕이 죽은 후, 그녀의 심장은
붉은 다이아몬드로 변해 그의 무덤 앞에 놓인다.
프롤로그
「아빠, 이 사람 누구야?」
질리언의 앙증맞은 손가락이 아버지가 들고 있는 책 속의 사진을 가리켰다. 늘 그랬듯이 질리언은 아빠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이제 겨우 5살인 질리언은 걸음마를 시작하고부터 옛날 사람과 미지의 세계에 관한 아빠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 으음, 아마존 사람이야.」
「이 여자 이름이 뭐야?」
질리언은 사진에 나타난 외형 때문에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빠의 그림책 속에 있는 사람들이 남자든 여자든 거의 머리칼이 길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긴 머리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가슴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곧 성을 구별하는 데는 가슴이 머리칼보다는 훨씬 믿을 만한 단서라는 걸 깨달았다.
「이름은 모르겠는걸. 이 여자가 실제로 살았는지조차 모른단다.」
「그렇다면 가짜 사람이에요.」
「그럴 수도 있지.」
사이러스 셔우드는 딸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들어올리며 작고 둥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에게 있어 이 아이는 기쁨 그 자체였다. 어린 질리언은 고고학에 관한 아빠의 책에 매료되어 있었다. 세 살 때 자신의 무게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끌어안고 씨름하며 오후 내내 마룻바닥에 누워 사진을 유심히 관찰하며 책장을 넘기던 딸아이의 모습은, 아빠의 멋진 추억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때 질리언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다른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의 딸은 어린애의 천진난만함과 함께 깜짝 놀랄 만한 논리력도 갖추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멍청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이런 딸아이를 편애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의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사랑스런 딸이 미래에 만날 남자는 아주 힘이 들 거라는 성급한 생각마저 들었다.
질리언은 그림을 자세히 보려고 책 가까이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이 여자가 가짜 사람이라면 돼 이곳에 있어요?」
「아마존 사람은 상상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작가들은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잖아요.」
「그래, 가끔 신화는 사실에 바탕을 두기도 하지.」
그는 딸에게 이야기할 때면 가급적 쉬운 단어로 알아듣기 풀어서 설명해주느라 늘 진땀을 흘렸고 질리언은 이해 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해할 때까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질리언은 아빠의 무릎에 앉은 채 작은 코를 찡긋거리며 깜짝 놀랄 만한 것들을 말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는 딸의 핵심을 찌르는 말장난을 듣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여전사와 아마존의 여왕 펜데실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고, 머나먼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그곳이 바로 그들의 최고 놀이터였다.
릭 셔우드는 평소의 골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흥분하며 집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야구화에 박아놓은 징이 마룻바닥에 부딪히며 괴상한 금속 소리를 냈다. 집안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으라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는 무시해버렸다.
정말 멋진 경기였어! 이 때까지 중에서 최고의 경기였다. 릭은 아버지가 자신의 경기를 보러 와주길 바랐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학생과의 약속으로 올 수 없었다.
방망이를 다섯 번 들어 네 번이나 공을 날렸고, 그 중 하나는 홈런이었다. 그날 그의 평균 타율이 8할인 건 믿기조차 힘든 사실이었다. 수학에선 좀 부진했지만 평균 타율만큼은 아주 쉽게 올릴 수 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물 한잔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목이 말랐다. 마시는 중에 턱 양쪽으로 실개천 같은 물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 잔 더 부어 컵을 입에 갖다대던 찰나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버지 소리 같았다.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릭은 서재 쪽으로 급히 발소리를 울리며 걸어갔다. 그곳에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갑자기 문을 확 열며 뛰어들어갔다.
「아빠, 오늘 네 번이나 공을 날렸어요. 한번은 홈런이었고요. 제가 7타점을 얻어 더블플레이를 만들었어요. 아버지가 오셨어야 했는데.」
마지막 말은 불평이 아니라 흥분을 감추지 못한 말이었다. 셔우드 교수는 책에서 물끄러미 고개를 들며 아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갔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구나. 정말 장하다!」
릭은 아버지 무릎에 걸터앉은 어린 여동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생과의 약속이 오래 걸리지 않으셨나 봐요.」
「학생이 약속을 내일로 연기했어.」
순간 릭의 흥분은 사라졌고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그러면 오늘 경기에 왜 안 오셨어요?」
질리언은 관심 있게 듣고 있다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아빠, 전 야구경기 좋아해요.」
아버지는 딸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보냈다.
「정말이니, 질리언? 다음 경기는 우리 함께 보러 가자꾸나.」
질리언은 아빠의 대답에 만족했다. 이야기는 오래 중단되었고, 아이는 아버지의 관심을 다시 돌리기 위해 책을 가리켰다.
「굉장히 놀랄 만한 것들요, 아빠.」
아이의 재촉에 순순히 응하며 교수는 아주 평화로운 목소리로 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술술 흘러나왔다. 질리언이 동화보다 신화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릭의 행복은 끝나버렸다. 꼬맹이가 아빠와의 사이를 딱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좋아, 그래. 질리언은 영리해.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하지만 질리언은 더블플레이를 할 수 없잖아. 욕구불만이 내부에서 솟아올랐다. 그는 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는 여동생을 확 끌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 전에 얼른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버지는 그 작은 녀석이 너무 사랑스럽다고만 생각하겠지.
사랑스런 녀석, 귀여운 녀석이라고…. 릭은 불쾌했다. 그는 질리언의 엄마를 싫어한 것처럼 질리언이 태어난 순간부터 싫어하고 원망했다. 질리언의 엄마는 몇 년 전에 죽어버렸다. 하느님께 감사했지만, 아직 여동생이 멀쩡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싫었다.
사람들은 질리언의 똑똑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치켜세우며 야단법석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릭의 학교성적이 뒤에서 맴돈다고 바보로 취급했다. 이제 릭은 17살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18살로 결코 어리석은 나이가 아니었다. 사실 성적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왜들 그런 거지? 아무리 그가 열심히 해도 사람들은 그 꼬맹이에게만 모든 관심을 주었다.
그는 2층 방으로 올라가 야구화를 벗어 벽에다 집어던졌다. 릭은 최고의 경기를 질리언이 망쳤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학생과의 약속이 연기되었다면 어쨌든 경기장에 왔을 텐데, 야구장 오는 것 대신 꼬맹이한테 쓸데없는 이야기나 들려주러 집에 오다니. 릭은 자신이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사실 그 꼬맹이를 때리고 싶었고, 자신을 상처 입혔듯이 여동생이 상처 입기를 바랐다. 질리언은 그에게서 아버지를 훔쳐간 것이다. 질리언과 그녀의 어리석은 엄마… 특히 꼬맹이 질리언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갑작스런 충동에 사로잡혀 벌떡 일어났다. 여기저기 양말이 널려 있는 방에서 걸어나와 아래층의 여동생 방으로 내려갔다.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동생도 자신의 보물을 모으고 간직했다. 방에는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책, 인형 그리고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다른 기념품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릭은 자잘한 것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다만 질리언의 인형 중에서 가장 특별한 인형, 이젠 더러워지고 그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질리언이 직접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을 붙인 소꿉놀이 친구를 찾았다. 꼬맹이는 항상 뺨에 인형을 끌어안고 잠을 잤다.
릭은 그 인형을 잽싸게 집어들고 다음에 뭘 할 건지 생각하면서 몰래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릭은 인형을 조각조각 내서 질리언 침대에 놔두고 싶었지만 동물적인 간사함이 그런 행위는 틀림없이 비난받을 거라고 슬쩍 일러주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용의자는 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단순히 인형을 숨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의 질투심은 더 많은 것을 부추겼다. 여동생이 정말로 애지중지하는 걸 부셔버리고 싶었다. 그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미소를 지으며 릭은 옷장 위에 있는 주머니용 칼을 가져와 쥐었다. 그리곤 침대에 앉아 조용하고 거친 손놀림으로 인형의 팔다리를 잘라버렸다. 질리언은 인형을 잃어버렸다고 울었고,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릭은 여동생을 볼 때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사건을 생각하며 남몰래 기뻐했다. 이제 릭은 알지만 여동생이 모르는 일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