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테어도어와 리니아는 7월 첫째 주 토요일에 마을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교회의 하얀 종탑이 마치 백합을 거꾸로 올려놓은 듯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그 모습이 장엄해 보이기조차 했다. 종소리가 차갑고 깨끗한 공기를
타고 수마일 밖까지 울려 퍼졌다. 교회 앞쪽의 자갈길에는 죽 늘어선 마차들의
행렬로 번잡스러웠다. 눈 가리개를 한 말들은 처음 들어보는 자동차 소리가
신기한 듯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연신 귀를 쫑긋거렸다. 아직 거둬들이지
않은 옥수수 밭으로 들꿩들이 가락이 안 맞는 목쉰 소리를 내며 모여드는 동안,
참제비고깔빛 하늘 위에는 까마귀 떼들이 꺽꺽 소리를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새로 내린 눈발은 여기저기 산족제비 굴처럼 곱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대평원의
장식 없는 교회유리창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그들의 행복한 출발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테어도어와 리니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댈 교장의 자동차와 셀머 브란덴베르그 부부가 타고 온 자동차도 눈에 띄었다.
리니아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모두 참석했고, 클라라 ―그녀는 이틀 전에 여자아기를
낳아 침대에 누워 있었다―를 제외한 테어도어의 집안 사람들도 모두 모였다.
크리스찬이 테어도어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고, 리니아는 동생 캐리의 시중을
받았다.
신부는 그녀의 어머니가 도회지에서 가져 온 횐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가 튤립 꽃봉오리 같은 모양으로 넓게 퍼져 있어 아주 귀여워 보였다.
드레스와 조화를 이룬 챙 넓은 모자는 하얀 망사로 싸여 있었는데, 거미가
그녀의 머리 위에 예술적으로 집을 지어 놓은 듯 보였다. 그리고 섬세한 공단으로
만든 하이힐 덕분에 그녀의 시선은 테어도어의 입술에 머무를 수 있었다.
테어도어에게 리니아가 이처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었다. 신랑은 검정
모직 소모사의 새 양복을 입고 검정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깔끔한 차림
덕인지 훨씬 젊어 보였다.
리니아에게도 테어도어가 이처럼 미남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친애하는 여러분……."
세버트 목사 앞에 선 신랑 신부는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서약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경건할 정도로 진지했다. 금반지를 건넬 때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은 그의 손길이 떨렸다. 이윽고 그들이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이 공표되자
리니아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테어도어는 떨리는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신부에게 키스를 하라는 목사의 말에 테어도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혀로 핥았다.
테어도어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고, 그녀는 손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은 채
해바라기처럼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깃털이 스치듯 감칠맛 나는 키스였다
그녀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식이 끝나자 모두들 학교로 향했다. 학교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도 테어도어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녀가 바싹 다가앉아 그의 팔에 볼을 비벼 대도 그는
참나무 줄기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학교에는 이미 피로연 연회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테어도어는 장인 장모의 시선을 의식한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댄스가 시작된 후에도, 그는 리니아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기계적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장인 장모가 축하의 말을 건네자 여전히 긴장한채 "제가 따님을
잘 보살피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을 뿐이다.
리니아는 아버지 얼굴에 보이는 근심 어린 표정과 어머니의 풀죽은 모습에서
그들이 안심하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평소의 테어도어답지 않은 초조한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끔씩 그녀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 자리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그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놀랍게도 얼굴을 붉히는 쪽은 테어도어였다. 그녀는
맥주를 마시며 너무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춤을 추는 동안에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을 들키고싶지 않은지 상당히 조심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황혼녘이 될 때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떠나는 그들의 모습 뒤로 새로 내린 눈이 황혼에 오렌지빛으로 반짝였다.
테어도어와 리니아는 한참 동안 그 광경을 응시했다.
학교 건물 안에서는 이제 사람들의 흥겨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테어도어는
손을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고 자신의 아내를 바라다보았다.
"그럼……."
그는 목을 가다듬은 뒤 학교 건물을 주시했다.
"안으로 들어갈까?"
하지만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한 쌍의 목각 인디언처럼 춤을 추는 것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그녀는 둘만이 함께 있고 싶었다. 그리고 좀더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얼마 동안이나요?"
"음……, 춤추고 싶지 않소?"
"별로예요. 테어도어, 당신은요?"
한숨을 쉬듯 대답한 뒤 그녀가 다시 물었다.
"난…… 음……."
그는 말을 더듬거린 뒤 어색한 듯 학교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머니 속에서 시계를 꺼내 보며 다시 말했다.
"이제 겨우 5시가 조금 지났군."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계를 집어넣었다.
석양의 노을빛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시계의 움직임을 좇아 그의
호주머니에 고정되었다.
"지금 우리가 떠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그녀의 대담한 발언이 다시 그를 긴장시켰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를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않겠소?"
가여운 테어도어……. 그는 첫날밤에 대한 생각으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클라라와 트리그의 집에 가 봐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오는 길에 이미 들렀잖소."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한 손을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테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렇소? 당신이 피곤하다면 바로 가야지."
"피곤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냥 집에 가고 싶어요. 당신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어리광 섞인 요구에 테어도어는 식은땀이 났다. 그녀는 너무도 침착했다.
그는 다가올 밤을 생각할 때마다 100개쯤 되는 주먹들이 자신의 배를 힘껏
쳐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음……. 나도…… 그, 그렇소."
그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목 주위를 꽉 조이고 있는 와이셔츠 칼라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그의 가슴에 손가락을 대고 중심을 잡은 뒤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럼, 우리 가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팔 위로 손바닥을 부드럽게
내려뜨리며 짧고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학교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좋소. "
"그래요, 우리 ."
그는 그녀를 감싸안고 교실 계단으로 올라갔다.
크리스찬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맥주도 제법 마셨고 여러
여자들과 번갈아 가며 춤도 추었다. 캐리 브란덴베르그는 그에게 호감을 표해
왔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 파티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바로 패트리샤
로멘이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춤을 추면서도 크리스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곡이 끝나자 크리스찬은 놀리듯 그녀를 불렀다.
"다음 파트너는 너, 패트리샤야. 원한다면 함께 출까?"
"넌 자신이 특별한 사람인 줄 알고 있나보구나, 웨스트가드? 이곳에서 내가
춤추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 한 사람인 줄 아니?"
"사실 아니야?"
"흥!"
그녀는 코방귀를 뀌며 홱 돌아섰다. 그런데 그가 허락도 없이 그녀를 팔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왈츠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자연스레
가까이 다가섰다.
춤을 출수록 그들 사이의 공간이 점점 좁아졌다. 그녀의 가슴이 느껴지자
크리스찬은 기쁨에 몸을 떨었다. 너무도 느낌이 좋았다.
"냄새가 좋구나, 패트리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의 향수를 빌려 썼어."
그녀가 볼을 그의 턱 쪽으로 가져다 대자, 두 사람의 숨결이 한 데 어우러지는
듯했다.
"음, 정말 좋은데,"
"네게서 나는 냄새는……. 음, 네 아빠의 향수 냄새 같다, 맞지?"
그들은 따뜻한 시선을 교환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몸 안에서 무언가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욱 가깝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음악이 끝나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가슴이 난생처음으로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안은 너무 덥다. 잠시 휴게실에 나가서 땀을 식히지 않을래?"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앞장을 섰다. 싸늘한 휴게실에는
그들 둘만이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휴, 저 안이 따뜻했던 거야."
"춥겠다. 네 코트를 가져다 줄까?"
그녀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아니, 이게 좋아."
"이봐, 너 춤 잘 추던데, 너도 알아?"
"너만큼은 아냐."
"아냐, 넌 정말 잘 춰 "
"아니, 난 잘 못춰. 하지만 너보다 공부는 잘하지."
"그런가?"
그들은 잠시 웃음을 터뜨린 후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뭔가 다른 할말을
찾기 위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우리 둘만 휴게실에 있었을 때 생각나지? 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목도리를 주었잖아. 그런데 난 네게 선물을 하지 못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뭘 바라고 한 건 아니었어."
그녀의 눈동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는 수줍어 눈길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내게서 눈길을 돌리지 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손을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속을 읽어 내려는 듯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늘 말씀하시길……."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그의 눈이 그녀의 입술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입술의 곡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네 엄마가 뭐라고 하셨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
그녀가 속삭이듯 되물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다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온음을 떨게 했던 것이다.
크리스찬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짧고 설익은 키스였지만,
그녀는 숨을 멈추고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키스한 뒤, 망설이듯 주춤거리다 그녀의 허리를
잡아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손을 그의 어깨에 얹은 채 거리낌없이
끌려왔다.
키스가 끝난 순간, 두 사람은 미소를 주고받으며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그들의 눈빛이 다시 서로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춤을 추듯 서로를
포옹한 채 다시 입술을 포갰다.
문이 열렸다. 그는 깜짝 놀라며 패트리샤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아버지와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이었다.
신혼 부부는, 어둠 속에서 포옹을 채 풀지도 못한 채 놀라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크리스찬……."
리니아가 불렀다.
"결혼, 축하드려요."
크리스찬과 패트리샤가 동시에 말했다.
리니아는 크리스찬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테어도어의 모습을 보며, 일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리니아는, 크리스찬의 잔뜩 긴장한 손길에서
벗어나려는 패트리샤가무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 애써 자연스런
태도로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네 아버지와 난 지금 집으로 갈 건데, 파티가 끝날 때까지
있을 거니?"
패트리샤가 크리스찬을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눈동자에 담긴 메시지를
어두운 휴게실 건너편에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크리스찬은 패트리샤의 눈동자를 쳐다본 뒤, 분위기를 깨뜨린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글쎄, 잠시 더 있다가 패트리샤를 집에까지 바래다 줄까하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마차를 써도 될까요, 아빠?"
"그…… 그래, 그렇게 해라, 그럼…… 조심하고 내일 아침에 보자."
크리스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나와야겠구나."
리니아가 말했다.
크리스찬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교실에서 나왔을 때 휴게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운동장에는 눈에
익은 녹색 마차가 사라지고 없었다. 테어도어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차를 찾았다.
"그 아이들이 어디로 갔을 것 같소?"
"패트리샤 집으로 갔겠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크리스찬은 이제 아이가
아니에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잖아요.
당신이 그 나이였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우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당신도 가야잖아요. 집엔 아무도 없어요. 우리 둘뿐일 거예요."
니사는 클라라의 집에서 최소한 1주일 이상 머물 예정이었다. 산모와 아기를
돌보는 일도 그렇고, 그들 신혼 부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그는 낯선 사람이라도 태운 듯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리니아를
문 앞에 내려놓고 말과 마차를 두러 마구간으로 갔다.
부엌 안에는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호롱불을 켠 뒤 딱딱한 식탁
의자에 앉아 말을 매어 두기 위해 마구간에 간 테어도어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들과 소지품들은 아직 위층 그녀의 방에 있었다.
그 짐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겨 있는데, 테어도어가 바깥의 찬
공기를 몰고 안으로 들어오며 등불을 흔들었다.
그는 마치 남의 집에라도 들어온 듯 안을 휘둘러보고 나서, 의자에 앉아
있는 리니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망사 달린 모자도 아직 벗지 않고
코트의 단추도 끄르지 않은채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추운가 보군, 난로를 피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그는 난로를 탕탕 치며 일거리를 찾아낸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불이 지펴졌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리니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난로 옆에 서 있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테어도어는 더러워진 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자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약간의 실망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한 번 결혼했던 남자니까 오히려 이런
상황을 잘 이끌어 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녀가 접근해 갈 때마다 오히려
긴장을 하며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시선을 잡으려 할 때마다 이리저리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따뜻한 불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는 모자의 망사를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에는
조화가 달린 핀이 꽂혀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자 그의 시선이 목덜미
쪽의 잔머리털로 쏠렸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의 작은 어깨로, 엉덩이로, 다시 코트 자락으로 내려갔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순진한 아내를 위해 양손을 겨드랑이에 쑤셔 박고 인내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죠?"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파티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외투를 벗을 거요?"
그가 동시에 물었다.
"응, 그러죠.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새로 산 회색 장갑을 벗고 있는 동안, 그는 그녀의 어깨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장갑을 벗어 호주머니 속에 넣고 코트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코트를 받아든 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일순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녀는 항상 2층에 있는 침실 옷장에 옷을 걸어 두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깨 너머로 흘끗 시선을 던지자 순간적으로 그들의 두 눈이 마주쳤다.
"이제 내 방에 옷을 걸어 두도록 하겠소."
거실로 걸어가는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그는 그녀의 코트를 옷걸이에 건 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방을 청소하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들였던 일, 침대를
바꾸고 방안을 새롭게 단장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마 어머니가 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깨끗이는 치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부엌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리니아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기라도
하려는 듯 주전자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그는 입구에 서서 그녀가 꽉 조이는 치마를 입고 종종 걸음으로 부엌 안에서
부산스레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저런 바보 아가씨 같으니라구. 작년에는 새 날개 모자더니 이번엔 족쇄처럼
보이는 통 좁은 치마야.
그는 앞으로 아름다운 아내를 위해 생각지도 않았던 비용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었다.
"배고파요?"
그녀가 주위를 환기시키듯 물었다.
"아니, 괜찮소."
그가 조끼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학교에서 실컷 먹었소."
그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깨닫고는 즉시 미안한 말투로 되물었다.
"당신은 먹었소?"
"네, 아주 조금요."
그녀는 뭔가 다른 얘깃거리를 찾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우물거렸다.
"저……."
이제 그의 차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와의
관계를 이끌었지만, 이제는 그가 주도적인 입장에 서야 했다.
"내 물건들이 아직 2충에 있는데……. 내 말뜻은요……."
"아, 내가 가져 오겠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우리 방에 옮겨 놓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시오."
그는 잽싸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잠간만요, 테어도어."
어느새 2층으로 따라 올라온 리니아가 그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제가 할게요."
리니아는 옷장으로 화장대로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며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됐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가져 가도록 하죠."
"그런데 그건 뭐요?"
그가 리니아의 손에 들린 작은 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손바닥에 들고 있던 돌을 내려다보았다.
"아, 이거요? 이건 예전에 당신 눈동자 색깔과 너무 비슷 하길래 주워 갖고
있던 돌멩이에요."
그녀는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앞서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옳기고 있었다.
그의 방문 앞에 선 그녀는 문 틈으로 얌전히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은 예전과 다른 가구 배치로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메린다의 사진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장농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물건들을 여기에 넣도록 하시오. 낡은 물건들을 버리고 정리해서 새로
공간을 만들어 놓았소."
"고마워요, 테어도어."
그녀는 가지고 온 옷들을 그의 옷가지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녀와 가깝게 서 있으려니, 그의 피가 뜨거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여자가
장농 속을 정리하는 모습을 그는 정말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었다. 그녀는 대충
옷 정리를 끝낸 뒤 브러시와 머리핀 통을 화장대 위 그의 소지품들 옆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한 움큼의 리벳이 그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의 손이 재빠르게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어제 마차를 고쳤소."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설명을 마치고 그것들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옆으로 밀쳐내고 닫힌 서랍문을 다시 열었다.
겨울 내의 밑에서 금속 조각들을 찾아낸 그녀는 다시 그것들을 집어내 원래
있던 곳에 올려놓았다.
"이 방은 아직도 당신 방이에요. 나와 함께 방을 쓴다고 해서 전에 쓰던
물건들을 치우거나 할 필요 없어요. 이 리벳도 편한 곳에 놓고 쓰세요. 난
괜찮으니까."
그녀는 그야말로 결혼 생활을 해본 사람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도 그랬지만, 이해심 많은 아내로서의 모습은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는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궁금해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자신이 저녁 식사 시간도 잊은 채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침대 속으로
안고 들어간다면……. 그녀가 자신을 변태스런 인간이라고 욕하지는 않을까?
그녀는 왜 리벳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까? 오후 5시 45분에 아내를 침대
속으로 이끌려던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이것저것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희롱하며 그녀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안했다.
"겉옷과 모자도 벗어요. 더 편안할 테니. 나는 잠시 동안 나가 있겠소."
그녀는 이 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꿈들을 꾸어 왔던가. 하지만 꿈속에 부끄러워하는
남편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클라라가 일러준 것들을 기억해 내며, 그 모든 것을 테어도어가 채워
주기만을 바랐다. 그녀는 부드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건 남편이 해주는 일인 줄 알았어요."
테어도어는 침대 옆에 걸린 괘종 시계의 바늘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시계
바늘은 어느새 6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다시 아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이오?"
그녀는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장대
끄트머리에 손을 짚고 서 있는 그녀의 눈빛이 램프의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났다.
그가 한 발 내딛자 그녀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두 번째 발자국에 그녀는
침을 삼켰다. 세 번째 발자국에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젖혔다.
그들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넋을 잃은 사람들
마냥 정신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볍게, 애초에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볍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의 뭉뚝한 손가락이 진주 단추를 풀어헤치고 모자핀을 빼냈다. 입을 꼭
다물고 그녀의 귀 뒤에 꽂힌 머리핀도 빼냈다. 그가 모자를 벗겨 내 앞에 내려놓는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얽혔다. 그러나 주위는 어둠침침했고,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상대방의 얼굴도 자세히 보지 못할 정도였다. 한 움큼의
머리칼이 그녀의 귀 뒤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가 너무도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숨결이 머리칼을 흔들리게 한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어설픈 동작으로 그녀의 귀 뒤에 꽃아 주었다.
그러나 그 머리칼은 고집스레 다시 빠져나와 그녀의 가냘프고 긴 목덜미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의 동작이 계속되길 바라며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었고, 그 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머리핀을
하나 하나 빼냈다. 드디어 그녀의 어깨 위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그는 비단결 같은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머리칼을
만져 본 것이 언제였던가? 그는 그녀의 머리 위로 몸을 구부리고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청결한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천 번도
넘게 침을 삼켜 댔다. 그녀는 향수 병을 들어 올리더니 뚜껑을 열고 기울인
뒤 손가락 끝을 부채처럼 펴 냄새를 맡았다. 한 번, 두 번……. 라일락 냄새가
방안을 메우고 밖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그녀는 소맷단을 접어올려 실핏줄까지
파랗게 비쳐 보이는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다시 다른쪽 손목에도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는 향수병을 조용히 닫았다. 그녀가 향수를 뿌리는 동안, 그는 마치
그녀의 눈빛에 흘린 사람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18세의 어린 여자가 어디서 저런 걸 다 배웠단 말인가? 기나긴 하루 동안,
그는 내내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
오늘 밤이 첫경험일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온통 가득 차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완벽에 가깝게 그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그녀의 양팔을 잡아 마치 뮤직박스 속의 발레리나 인형을 다루듯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나서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입술로, 목으로, 가슴으로……. 그리고 곧 그의
손이 그 길을 따라 애무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손놀림이 점차 대담해져
갔다. 그의 손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가슴이 딱딱할 정도로 팽팽해졌고, 심장은 터질 듯
쿵쾅댔다. 그는 시선을 옮겨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찾았고, 그녀의 입술은
기다렸다는 듯 두 부분으로 갈라졌다.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인가. 그들은 이제 부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 포개어졌다. 부드럽고 신중한 키스였다. 그러나 곧 서로의
혀가 얽히기 시작하면서 거칠고 열정적인 키스로 변해 갔다. 그녀는 그의 몸과
하나로 녹아들고 싶었다.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 두 사람은 모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서로를 향해 눈빛을 고정시킨 채 심장이 멎을 듯 흥분해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녀의 웃옷을 벗겨 반으로 접은 뒤 옷장에
넣었다.
그녀는 그의 넥타이와 와이셔츠 칼라 단추에 손길을 뻗쳤다.
땡, 땡, 땡……. 요란한 소리가 텅 빈 집 안을 울렸다.
"6시요."
그에게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손가락을 그의 목덜미에 얹은 채 맑고 명랑한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의 눈길을 잡았다.
"저리로 곧장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가요?"
그는 그녀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여태껏 이렇게 이른 시간에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이 없었지만, 이미
그의 몸은 그녀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가르쳐주고, 또 되돌려 받고 싶었다. 당장 에라도 그녀와 한 몸으로 녹아들고
싶었다.
"아니오, 그렇지 않을 거요."
그는 사랑스런 아내가 자신의 옷을 쉽게 벗길 수 있도록 몸을 움직여 도와주었다.
재킷의 단추가 풀리고, 그녀가 무언가를 간절히 열망하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그의 재킷이 벗겨져 벽걸이에 걸렸다. 다음, 그녀는 그의 조끼 단추를
풀고 나서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테디, 이제 시간에는 신경 쓰지 말기로 해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한 다음, 손에 들고 있던 시계를 장농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뒤 돌아서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의
벌려진 입술 위에 포갰다. 그들의 혀가 뜨겁게 얽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한치의 틈도 없이 그에게 밀착시켰고, 그는 양팔로 그런 아내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탐험하듯 거칠게 휘젓고 다니는 동안,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열렬히 반응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새틴 조끼를 입은 그의
잔등을 어루만지며 그의 몸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려는 듯 조바심 쳤다. 그가
가슴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문질러 대자 그들의 간절한 열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가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옮긴 뒤 거친 숨소리를 퍼부었다.
"오, 리니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할 정도의 간격을 두고 물러섰다.
"테디?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신은 오늘 하루종일 나를 몹시
피하는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그랬소."
그는 애처롭게 웃었다. 호롱불이 켜진 방안으로 상처 입은 고통스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은 너무 어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소. 지워 버리려 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 어리지 않아요. 난 성인이라구요. 그리고 이미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어요.
당신은 시간에 너무 묶여 있어요. 시계에, 세월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제발…… 제발……."
그녀는 그의 턱에, 뺨에, 그리고 입술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난 이제 당신의 아내예요. 더 이상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세요."
이상야룻한 느낌의 짧은 키스가 끝난 다음, 그는 그녀의 드레스 뒤쪽을 더듬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칼을 손으로 들어올린 뒤, 그가 등을 더듬어 단추를 끄르는
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소매가 없는 하얀 드레스가 벗겨지고, 페티코트가
드러났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페티코트에 달린 허리밴드를 끌러
그녀의 양팔과 상체에 걸쳐졌던 옷을 벗겨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속옷 차림의 눈부신 아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소매 없는 상의와 양쪽 허벅지를 탄탄히 감싼 신축성 있는 소재의 거들만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다.
깊게 패여진 목선 위로 아름다운 쇄골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이런 속옷 차림의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또 그녀의 양쪽
다리에는 얇은 껍질처럼 생긴 스타킹이 신겨져있었는데, 그 끝은 다리 위쪽
어딘가로 숨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늘지만 우아하게 생긴 장딴지가
그의 눈에 한순간에 와 박혔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 쪽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잠시 피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갑자기 그의
조끼가 양팔에서 벗겨져 방바닥 위로 떨어졌고, 잘 다려진 양복 바지와 풀먹인
빳빳한 셔츠가 드러났다.
그는 후쿠를 풀어 바지 허리를 헐겁게 만든 뒤 셔츠 자락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러내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는 그녀의 가슴이
다시 울렁거릴 정도로 뛰놀았다.
그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깨 근육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바지가 벗겨졌고 팔소매의 단추가 풀어졌다.
다음으로 셔츠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리니아의 입에서 감격스런 절규가 흘러나왔다.
"오…… 테어도어……."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당…… 당신을 좀 봐…… 봐요."
그녀는 엉겁결에 그의 따뜻한 가슴에 난 검은 털을 매만졌고, 자기도 모르는
새 그의 깊은 곳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듯 그녀의 손길이 시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섬광이
비쳤다. 그가 그녀의 손을 그곳으로 잡아끌자 그의 신체 일부분은 마음껏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인 양 조바심을 쳐대며
움직였다.
너무도 단단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그녀의 것과는 놀라울 정도로 달랐다.
그녀가 시선을 들어 그의 목젖의 움직임을 살피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쇄골을
따라 천천히 내려와 그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그의 손길은 이제 봉긋이 숨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 쥐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으로 온몸이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가
반죽하듯 그녀의 젖가슴을 찰착찰싹 주물러 댔다. 그녀의 가슴은 그의 손바닥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졌고, 그가 원하는 대로 모양이 바뀌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어루만지며 축축하고 둥근 소로를 따라 들어가더니 그녀의
혀를 찾아내 빨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몸이 꿈틀거리며 바르르 떨려올 때까지
오직 혀의 움직임만으로 자친의 감정을 그녀의 몸 속에 전했다.
그녀의 혀도 그의 입 속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그리고 양쪽가슴을 그의 손에
맡긴 채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온몸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았다. 그는 그녀의
등을 샅샅이 어루만진 뒤, 손을 뻗어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다시 리드미컬한
손놀림으로 달콤하고 느릿한 애무가 시작되었다.
그는 그녀의 온몸에 강물을 흘려놓았고, 이제 그 물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너무도 갑자기 찾아온 흥분으로 그녀의 무릎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입술이 부드러운 액체로 번들거릴 때쯤 되자, 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그의 무릎 위에 체중을 실은 채 축 늘어졌다. 그의 무릎이 바닥으로 그녀를
미끄러뜨렸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등뼈 위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의 입과 혀가 다시
만났다.
그의 머릿속은 놀라움으로 경련이라도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그는 그녀의 배 위로 자신의 불타는 듯 뜨거운
손을 뻗쳤다. 그녀의 신선한 육체의 곡선을 더듬으며 탐험을 시도했다. 그의
손은 순항을 거듭하며 그녀의 엉덩이로, 다시 두 다리 사이로 전진해 갔다.
갑자기 그의 것이 딱딱해져 몸을 노크해 오자 그녀는 움찔했지만, 이내 자신의
허리를 움켜 쥔 판단한 팔뚝에 온몸의 긴장마저 풀어져 버렸다. 황홀경이 마음의
문을 두드렸고,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그녀의 앞에 펼쳐졌다. 그녀의 감긴
눈꺼풀 속에서 온갖 형형색색의 꿈들이 어우러졌다.
그의 몸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는 더욱 생기가 넘쳤다.
"오, 테디…… 테디……."
그녀는 열정에 휩싸인 채 중얼거렸다.
갑자기 테어도어가 호롱불빛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러자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항했다.
"안 돼요!"
그는 멈칫하며 돌아섰다.
"제발…… 난 절대…… 내 말뜻은……."
그녀가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숙이며 그를 저지했다.
"난 당신을 보고 싶소."
예기치 않은 그녀의 반대에 그의 가슴은 더욱 세차게 고동쳤다. 그런 식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는 여자에 대해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테어도어
웨스트가드는 새로운 학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가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구두끈을 풀었다.
그녀도 하이힐을 벗어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 그가 입고 있던 나머지 옷들을
전부 벗어 버리자 그녀 역시 몸에 남아 있던 옷들을 전부 벗겨 냈다. 그녀는
눈앞에 벌거벗은 채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리니아……."
그 방안에는 오직 시계 추가 움직이는 소리와 그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침대위로 이끌었다. 그리고 다시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그들의 입술이 다시 합쳐졌고,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를 배회했다 잠시
후그 손이 움직여 간 길을 그의 입술이 핥기 시작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가슴에 물결을 만들며 입술로는 젖꼭지를 희롱했다.
그녀는 열정에 빠진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가 몸을 들어
올리더니 서서히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엄청난 충격으로 그녀는 고통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그가 달콤한
입술로 그녀의 귓가를 애무하며 사랑의 말을 쏟아 놓았다. 고통이 잦아들고,
그 공간을 환희가 대신했다. 그녀의 볼 위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자 엄청난 상실감이 몰려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침대 위의 여행을 끝냈다는 의미로 길고 긴 키스를 보냈다. 그녀는 최고 정상의
자리에 올라 그의 입술에 햇살을 내려 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도 그의 머리카락들이 잡혀 있었다. 그가 다시 격한 키스를 해왔고,
그녀도 그에 응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긴장된 열정을 품은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리니아, 당신을 사랑하오. 난 항상 이곳에 홀로 누워, 지금우리가 함께
나눈 일들을 상상하곤 했소. 당신이 위층에 있는 동안 난 너무도 많은 밤들을
그런 생각들로 보냈소. 그러나 지금 당신은 내 상상과 바람보다 훨씬 더 멋졌소."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해요……."
어떤 건 그의 입에서, 어떤 건 그녀의 입에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의
속삭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그는 리니아의 몸 위에 길게 엎드려 유심히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살짝 벌려진 그녀의 입술에, 가슴에, 배에 간결한 키스를 차례로 보내며 그녀의
몸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매만지며 향기로운 꽃망울을 향해 탐험해 갔다. 그녀의
몸이 나긋나긋하게 풀어지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남성으로 이끌었다.
여자로서 알고 있어야 할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이 감기고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거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 더욱 거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녀는 테어도어처럼 강한
남자를 이렇듯 맥없이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더욱 깊숙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커다란 쾌감으로
은몸을 떨었다.
자연은 그 어떤 것도 근거 없이 만들어 놓지 않았다. 칼과 칼집, 열쇠와
자물쇠……. 모든 것이 아름다운 비밀과 함께 절묘히 짝지워져 있는 것이다.
테어도어는 리니아가 소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던 여자 이상의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새로운 젊음을 찾게 해주었고, 달력보다는 마음에 의한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의 엉덩이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동안 그녀는 등을 활 모양으로
휘며 몸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녀는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언어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끝)
<◈ 역자 후기>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야기가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다양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역시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제각기 처한
독특한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로 얽혀 살아가다
보면 사랑도 싹트고 미움도 생기고 잊을 수 없는 추억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많은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한 편의 글을 엮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되고, 상상력과 함께 한 권의 글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씩 평범하지 않은, 조금은 남다른 사랑의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다. 노화가와 젊은 여제자랄지 하는 경우 말이다. 그런 때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과 함께 몇몇 부수적인 추리를 곁들이며 잡담거리를 삼는다.
돈 때문일까? 명예 때문일까? 그러다가는 영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내 시큰둥해져 버리곤 한다.
이 책의 경우 작가는 아마도 '사랑'의 감정에 있어 나이 차이라는 것, 즉
시간이라는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에 탄 사람들에게 있어 단지 얼마나 앞쪽에
뒤쪽에 탔느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더불어 사랑이라는 감정은 나이나 학력 차이, 환경 차이에 기준을 두고 선별적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점과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랑의 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든 크든 편견과 고정된 생각의 틀 속에 갇혀 살며 자신의 감정에 진지해져
야 할 경우, 솔직한 감정이 무엇인지 귀기울여 보아야 할 경우를 외면하고
무시하며 지나쳐 버리는 때가 왕왕 있다. 그러나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며, 그것은 다른 여타 조건을 재고 나서 형성되는 것 이전의
순수함이 담겨 있어야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을 옮기는 동안, 젊고 솔직하며 도전적인 한 아가씨와 중년의 고개에
선 경험 많고 사려 깊은 한 시골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 속에 한 번쯤 짚고
넘어갈 만한 재미 이상의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옮긴이>
김영주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서 백과사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옮긴 책에 <내가 선택한 남자>등이 있다.
<◈ 저자 소개>
Lavyle Spencer
책 판매량이 2000만 부를 돌파한 경이로운 로맨스 작가이다.
그는 1979년 처녀작을 발표한 뒤로 멈출 줄 모르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쳐
세계적인 로맨스 작가로 발돋움하였다.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데다, 지금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인생과 사랑에 대한 독특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로 늘 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감싸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