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9화 (19/20)

<19>

그날은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등교할 때도 그랬지만 수업이 끝난 후에도

아이들을 데리러 아버지들이 학교까지 마차를 몰고 왔다. 리니아는 교실 문에

테어도어에게 쓴 쪽지를 꽃아 둔 뒤 트리그와 벤트를 따라 그들의 집으로 갔다.

클라라를 보자 그녀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잠시

후 리니아는 클라라의 팔에 안겨 흐느꼈다.

"왜 그래요, 리니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오, 클라라……."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잠해 있었다.

클라라가 트리그에게 말없는 신호를 보내자 그는 선생님의 울음에 놀라 멍하게

서 있는 벤트를 데리고 사라졌다.

"쉬……. 뭔가 상당히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요. 또 알렌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리니아는 울면서 손수건을 찾기 위해 클라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테…… 테어도어 때문이에요."

"아, 테어도어……. 이번엔 오빠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오, 크…… 클라라, 이번엔 아…… 아주 안 좋아요."

클라라는 리니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바싹 다가섰다.

"뭐가 그리 안 좋아요? 말을 해야 도와줄 것 아니겠어요?"

"나…… 나는 그를 사랑해요."

연장자인 클라라는 조심스레 미소를 피어올렸다.

"그게 그렇게도 안 좋은 일이에요?"

"그도 나…… 나를 사랑해요. 그런데 그는 나와 결…… 결혼하…… 하지

않겠대요."

리니아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자 클라라는 그녀를 살짝 안아 주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리니아의 어깨를 다독거려 준 뒤 식탁 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이 오빠한테 결혼하자고 얘기했어요?"

리니아는 비참한 듯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클라라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딱한 테디, 자기가 먼저 프로포즈할 줄도 모른단 말인가?

"당신이 먼저 얘기했단 말이죠? 흠, 용기가 필요했겠군요.

그래, 테디 오빠가 뭐라고 대답했어요?"

"내가 너무 어…… 어리대요. 그리고 그가 말…… 말했어요. 더…… 더……

아기를 원하지 않는대요. 오, 클라라, 나…… 나는 이럴 때 어…… 어떻게

해…… 해야 하죠?"

리니아는 고개를 식탁에 떨군 채 서러움을 쏟아 냈다.

아기라고? 클라라는 생각했다. 이미 리니아와 숙명적으로 맺어질 인연이라는

게 분명한데도, 딱한 테어도어는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컷 울어요. 울음이 조금 찾아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구요."

얼마 동안 그들은 침묵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다음, 리니아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테어도어의 행동에 대한 섭섭함, 그리고 그 외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클라라는 주의깊게 들은 뒤 그녀를 동정하면서 달래

주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리니아가 실컷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클라라에게

물었다.

"클라라,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요. 내가 너무 뻔뻔스럽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당신밖에 없어요."

"뭔데요? 내겐 무엇이든지 물을 수 있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이 집에 와서 잠시 지내도 될까 해서요. 그곳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내 하숙비는 교육위원회에서 지불할 거예요. 난 식사도 많이 안 하니까…….

그리고 봄에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나도 집안 일을 도울 수 있을 거예요. 봄까지만

도와주면 돼요. 그러니까…… 가을 학기에는 다시 오지 않을 생각이에요."

클라라가 결정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지내도 돼요."

그녀는 리니아의 턱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당신이 집안 일을 도와준다니 나로선 오히려 기쁜 일이죠. 이미

나는 몸집이 너무 커져서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조차 힘들거든요. 이제……."

클라라는 자기 자신을 격려하며 말했다.

"저녁 식사는 여기서 해요. 트리그에게 당신 짐을 가지러 같이 갔다 오도록

얘기해 줄게요. 어때요, 괜찮겠어요?"

리니아가 트리그와 함께 니사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리니아가 출산 전까지 클라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 집에 머물기로

했다고 설명하는 동안 니사,테디, 크리스찬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어쩔 줄 몰라했다.

"오늘 밤 당장?"

니사가 물었다.

"네, 물건을 챙기는 대로요."

"너무 갑작스럽네요."

리니아는 테어도어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니사 역시 자신의 행동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짐들을 챙겨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테어도어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서성대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찬은 크리스찬대로

누군가 떠나는 선생님을 붙잡아주길 바라며 안절부절 못했고, 니사는 생각에

잠긴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짐을 꾸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별로 늘어난 짐이 없었던 것이다. 밍크 장갑, 고양이 조각, 털실로 짠 숄,

가죽 장정의 테니슨 시집만이 새로 늘어난 짐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작은

가방 속에 꾸려 넣으며 추억에 젖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상황에 걸 맞는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는지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었다. 눈물이 떨어지려는지 코가 매워 왔고

목도 꽉 잠겨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최고의 연기력을 과시했다.

그녀는 재빨리 니사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입이 하나 줄게 됐군요."

그리고 크리스찬의 우스꽝스런 코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장난스레 말했다.

"이제 내가 집에 없더라도 밤에 혼자서 식탁에 앉아 숙제를 꼬박꼬박 할

수 있겠지?"

테어도어에게는 확신에 찬 악수를 건넸다.

"당신은 금방 글을 깨우치게 될 거예요. 난 그러리라는 걸 알아요. 그리고

크리스찬이 도와줄 거예요."

"……."

"자, 트리그,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그녀는 할말을 잃고 서 있는 웨스트가드 집안의 세 사람을 지나쳐 사탕 가게에

들어가는 어린아이처럼 활기차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니사가 긴 침묵을 깨뜨렸다.

"테디, 너는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돌아섰다.

"아무것도 몰라요."

"크리스찬, 너는?"

"저도 아무것도 몰라요."

"흠, 저 아가씨는 많이 울었어. 아주 많이 울었다구. 내가 내일 클라라네

집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봐야겠다."

"놔두세요, 어머니."

테어도어가 거칠게 대꾸했다.

"놔두라니?"

니사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거기에 가서 살고 싶다면 살도록 내버려 두시라구요. 리니아 말처럼 먹을

입 하나 줄어들었잖아요."

그러나 리니아가 없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크리스마스

때 집에 가느라 없었을 때보다 더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가고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식사 시간은 침울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음식 접시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왜 갑자기 음식 맛이 없어졌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또 서로 상대방이 리니아가 앉았던 빈 의자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감기가 나은 존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리니아가 그들의 생활속으로

들어온 후 서서히 침묵 속에서 헤어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가고

없었다. 그는 더욱 자신의 세계 속으로 침잠되어 갈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식탁에 앉았다가 식사가 끝나면 그 상태로 식탁에서 일어나 나가곤

했다.

매일 학교에서 리니아를 만나는 크리스찬 역시 그녀의 안부를 전하는 법이

없었다. 테어도어는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보고 싶었다. 그녀는 행복해

하고 있을까? 무슨 옷을 입고 있을까? 매일 아침마다 하루를 살아낼 일이 고역스럽게

느껴졌다. 밤이 되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책을 가지고 그의 곁으로

오는 사람이 없었다. 글자판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요즘은 트리그가 리니아를 학교까지 바래다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트리그의 마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나

마차에 그녀가 타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테어도어는 밖에서 서성거리며

그녀를 싣고 가는 마차의 희미한 그림자에 정신을 팔곤 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뒤척거리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크리스찬은

열일곱 살, 엄마는 일흔 살이다. 그들이 곁에 영원히 있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존뿐이다. 두 늙은이가

대평원의 외딴 농원에서 외로움을 구워 낼 것이다. 짐승과 곡식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누며 지나가는 마차를 보고 손을 흔들거나 누군가 자신들과 얘기를

나눠 줄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학수고대할 것이다.

그는 리니아의 근황이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세상에, 그녀는 얼마나 강한 여자인가! 그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떠나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클라라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녀는 클라라도

좋아했다. 두 여자는 한 깍지 속에 들어 있는 완두콩처럼 잘 어울렸다. 아기가

태어나면, 리니아는 아기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 어쩔 줄 모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아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리니아 또래의 젊은 여자들은 아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또래의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는 새삼 아기를 갖는

게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만약 리니아와 결혼해서 아기가 태어난다면,

그 아기는 누굴 닮을까?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금발 머리에 리니아처럼

터질 듯 충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일요일, 교회에서 리니아를 본 그는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새털 모자를 쓴 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종달새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오, 안녕하세요, 테디.

니사는 어디 계시죠?" 라는 말을 건네더니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날 저녁 식사 후 그는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머리를 벗었다. 클라라와

트리그는 항상 일요일이면 어머니를 찾아왔던 것이다. 첫 데이트를 고대하는

10대 소년 마냥 마음이 들였다.

그러나 그날 따라 그들은 오지 않았다.

늦게까지 기다려도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웃도리 속에 글자판을

감추듯 넣고, 마구실로 갔다. 공부라도 하면 울적한 기분이 조금 가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톱질 모탕 위에 올려져 있는 말 안장을

응시하며 30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리니아, 리니아, 리니아라고 글자판에

써넣은 뒤 또다시 30분을 보냈다. 우물쭈물 거리며 연장통을 정리해 보려고도

했지만, 이미 잘 정돈되어 있어 더 이상 정리할 게 없었다. 뒤로 물러서며

마구실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깡통을세 개 떨어뜨렸고, 그 바람에

말발굽에 박는 못들이 바닥에 쏟아져 정신없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글자판을 집어든 채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머니와 크리스찬 둘 다 부엌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테어도어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집 안의 분위기는 항상 적막하고

쓸쓸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멜빵 바지와 내의 상의를 벗은 뒤 다시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대야에 물을 채우고 세수를 했다. 또 그날 들어 두번째

면도를 한 다음, 로션을 얼굴에 바르고 머릿기름도 발랐다. 정성을 다해 머리를

빗어 넘긴 뒤 다시 방으로 사라졌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는 일요일에 교회

갈 때나 입는 빳빳한 새 와이셔츠와 양복 차림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코트를 바싹 끌어당겨 매무새를

정리한 뒤 글자판과 단어장을 챙겨 들고 말했다.

"수업이 계속 진행될 수 있을지 리니아에게 묻기 위해 클라라의 집에 갔다

와야겠어요."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크리스찬이 닫힌 문을 말없이 쳐다보자, 니사는

안경 너머로 손자를 관찰하면서 멈췄던 뜨개질을 계속했다.

"내가 수업을 해드릴 수도 있는데……."

크리스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겠지."

뜨개질 바늘이 털실 사이를 오락가락 했다. 크리스찬의 눈길이 할머니에게로

향했다.

"그럼, 왜 아빠는 클라라 고모네 집에 가는 거죠?"

그녀는 눈을 감고도 뜨개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지만, 일부러 뜨개질

구멍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네 아빠가 구애하러 간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만족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클라라의 집에는, 온 가족이 부엌에 모여 팝콘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리니아는

월요일에 가르칠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나 본데 ."

트리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을 통해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테디 처남 같은데?"

리니아의 손길이 멈춰지며 심장 박동 수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났다. 그녀는

문이 열리기 직전에야 간신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문 앞에는 테어도어가

서 있었다. 마치 장례식에라도 다녀 온 듯한 표정으로 그는 리니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죽 훑어보았다.

"안녕? 오늘 우리 집에 올 줄 알고 있었는데……. 별일 없나 보러 왔다."

"별일 없어요. 들어오세요."

"밖이 춥죠?"

클라라가 무거운 몸을 잠시 일으키며 물었다.

리니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테디 삼촌! 테디 삼촌 팝콘 있어요!"

어린 크리스티안이 손을 벌리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웃으며 크리스티안을

번쩍 안은 다음, 턱밑을 간지럽혀 주었다. 마침내 아이의 금발 머리 위로 리니아의

시선이 다가왔다.

그 순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곧 하던

일로 관심을 돌려 버렸다.

"앉으세요."

트리그는 자신과 벤트 사이에 의자 하나를 갖다 놓았다.

"뭘 가지고 왔어요?"

벤트가 물었다.

테어도어는 자리에 앉은 뒤 크리스티안을 무릎 위에 앉혔다.

"내 글자판과 단어장."

그는 가져 온 것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글 읽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거든."

"그래요? 와, 하지만 너무 나이가 많지……."

"벤트!"

그애의 부모가 동시에 꾸짖었다.

벤트는 부모를 차례로 쳐다보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삼촌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요."

리니아는 식탁 아래로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는 거야."

테어도어가 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녀는 그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내줄 수 있다면, 수업을 계속 받고 싶은데……."

수업이라고? 저렇게 옷을 차려 입고 와서 수업을 하자고 하는 건가? 갑작스런

그의 출현으로 인해 그녀의 머릿속은 새가 재잘거리듯 뜨거운 피가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는 데 정신을 집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그래요. 안 될 것도 없죠."

그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인 뒤 팝콘을 집어들었다. 마침 크리스티안이

뭐라고 종알대자 그는 겸연쩍은 분위기를 피하려는 듯 관심을 그쪽으로 돌렸다.

리니아는 클라라의 호기심 섞인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종이 위에

"가지 마세요!"라고 쓴 뒤 조용히 클라라쪽으로 밀어 놓았다. 클라라와 트리그가

갑자기 사라진 다면 얼마나 서먹한 분위기가 형성되겠는가.

이렇게 추운 날엔 부엌이 가장 따뜻한 장소이기 때문에 모든 가족들이 그곳에

모여 있곤 했다. 겨울에는 응접실이 거의사용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클라라는 리니아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 주었다.

모두들 테어도어와 리니아가 옆으로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조금씩 물러났지만,

부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털실 공을 가지고 고양이와 함께 바닥에서

놀았고, 클라라는 식탁에 앉아 아기가 덮게 될 이불을 꿰맸다. 트리그는 농장에

관한 잡지책을 들고 읽었다.

리니아와 테어도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정작 별 중요성을 띠지 못하는 읽기

공부에 집중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팔꿈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서로 닿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또 가끔씩 긴장을 풀기 위해 자세를

바로 하기도 했다.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테어도어가

글자판을 리니아 쪽으로 밀어 보냈을 때는 공부를 시작한 지 거의 두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글자판에는 세 단어가 적혀 있었다.

"제발 집에 돌아오시오."

리니아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사랑, 고통, 단념……. 리니아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클라라와 트리그는 각자의 일에 몰두해 있었다.

테어도어의 꽉 쥔 주먹이 분필처럼 하얗게 보였다. 그의 마음을 읽은 리니아는

"네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영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그들의 고통에 순간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리니아는 강제로 빼앗듯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분필을 빼내었다. 그리고

재빨리 적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그가 글자판을 관심 있게 주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 테디, 난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난 모든 것을 갖지 못할 바엔 차라리

아무것도 갖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도 느꼈다. 그는 지금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그에게 한 대답과는 정반대로, 그녀는 그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드디어 테어도어가 식탁 위를 정리한 뒤 의자를 뒤로 밀며 말했다.

"늦었소. 그만 가 보는 게 좋겠소."

그는 일어나면서 코트를 집어들었다.

"내일 또 와도 되겠소?"

그의 질문은 리니아를 놀라게 했다.

"그럼요."

트리그가 대답했다.

"리니아의 생각은?"

그녀는 차라리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이 원한다면요."

테어도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음날, 그는 정장 차림 대신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무척이나

남자다워 보였다. 리니아는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청색과 횐색이 조화를 이룬

세일러복형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두 편의 짧은 글을 읽어 보라고 주자, 그는 식탁에 살짝 팔꿈치를 기댄 자세로

엎드려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무심결에 고개를 쳐들다가 자신의 젖가슴을

관찰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궈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다음 순간, 그의 눈길은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 리니아는 그에게 '파랗다'라는 단어를 사용해 문장을 만들어

보라고 권했다. 잠시 후 그가 내민 글자판에는,"리니아의 파란 눈동자는 아름답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순식간에 리니아의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에 테어도어의 검은 눈동자가 다가섰다.

그녀의 얼굴이 빨간 장미처림 붉게 물들자 테어도어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당황한 그녀는 글자판을 집어들고 철자법이 틀렸나 확인하는 척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 글자판을 빼앗아 써 놓은 글을 전부 지웠다. 그리고는

다시 분필을 들어 "당신은 예쁘다"고 썼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다.

그 후로 그는 엿새 동안 계속 클라라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길 계속 거절했다.

그날도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클라라와 트리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 테어도어는 리니아의 모습을 은밀히 관찰했다. 그녀는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뒤로 올리고 있었는데, 관자놀이 부근에 잔머리들이 빠져나와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 머리카락을 잡아 손가락으로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시험지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낄낄거렸다.

"이것 좀 보세요."

그녀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시험지를 들어 올렸다.

"오늘 받아 쓰기 시험을 봤거든요. 요sheet를 받아 쓰라고 했었는데……."

똥shit이라고 발음나는 대로 썼던 것이다.

모두가 큰소리로 웃어 댔다. 테어도어는 리니아가 소리죽여 낄낄거리며 다시

시험지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채점을 끝낸 후 시험지를

모아 정리해 놓다가 자신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시선을 발견했다.

"다 읽었어요?"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 아니오. 아직 안 읽었소."

"테어도어!"

그녀는 야단을 쳤다.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잖아요."

"어떤 날은 그럴 수도 있소만……. "

"그럼, 그건 집에 가서 마저 읽도록 하세요. 이제 새 단어를 몇 개 더 배울

시간이에요."

그녀는 글자판을 꺼낸 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서 다시 아몬드 냄새가

풍겨 왔다 그 냄새가 그의 집중력을 깨뜨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나는 아몬드

향기를 맡으며 그녀와 춤추던 날을 회상했다. 그녀와 키스를 하던 순간도 떠올려

보았고, 그때 그녀가 그의 마음속에 어떤 반응을 일으켜 놓았는지도 생각했다.

그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모든 것이다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의 뜨거운

피는 수업 시간 내내 그의 심장을 두드려 댔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 거칠게 그녀의 손에서 글자판을 빼앗아 갔다.

조금 겁도 나고 두려움도 느껴졌지만, 물어봐야만 했다. 반드시 물어 봐야만

했다. 그녀가 없는 삶은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내일 댄스 파티에 갈 때, 당신을 데리러 와도 되겠소?"

이번에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얼굴이 빨개 지지도 않았다.

놀라움으로 눈이 동그랗게 떠지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의 눈빛이 서로 만나게

되자 그녀는 슬픔에 젖은 시선을 던지며 말없이 고개를 저어댈 뿐이었다.

그는 화가 발끈 치밀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자고 저러는 것인가? 그러나

그녀가 왜 그러는 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은 학기를 내내 클라라의 집에서 지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해도 그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 고인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그는 그 모든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이 끝이 보이지 않는 연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연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목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가슴에 쌓인 벽이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비뼈 아래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고,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묻어났다. 손이 떨려 왔다. 그는 분필을 들고

거침없이 적어 내려갔다.

"나와 결혼해 주겠소?"

그가 글자판을 돌려놓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방안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글자판에 적힌 문장을 읽고 난 리니아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그녀는 입술을

벌린 채 재빨리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힘들여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흔들리는 손으로 분필을 집었다.

이번만큼은 그녀도 그의 틀린 철자법을 고쳐주지 않았다.

"네"라고, 그녀는 간단하게 적었다. 다음 순간, 글자판이 그녀의 손에서

그의 손 쪽으로 당겨졌고 다시 식탁 위에 뒤집힌 채 내려졌다. 테어도어는

그녀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자제하며 재빠르고 성급한 동작으로 일어나 코트를

집어들었다.

"오늘 밤에는 유난히 별이 밝던데, 잠시 나갔다 오지 않겠소?"

그들이 코트를 입고 문 밖으로 나오는 데는 1분도 채 안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들에게는 마치 1년쯤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들의 잠긴 눈 안에 별이 떠올랐다. 세상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그 동안 억제해 왔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 놓은 채 탐욕스러울 정도로 거칠게

키스했다. 겨우 입술을떼어낸 뒤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절실한 마음을 채 한

문장에도 담아내지 못한 채 다시 온몸이 떨릴 때까지 진한 포옹을 나누었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나는 비참했……."

"정말이오……."

"나도……."

"난 노력하지 않았……."

"나는 당신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 못……."

"오, 하느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단번에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서로의 살갗을 부비며 격렬하게 키스했다. 그리고 쉴새없이

손을 움직여 사랑을 표현했다.

잠시 뒤, 말없는 동의 속에 어렵게 서로의 몸을 메어냈다. 그리고 다시 키스했다.

아직도 흥분과 놀라움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애무의 동작을 중단했다.

그녀가 그의 턱에 이마를 기댔다.

"나중에 내게 결혼이라는 단어의 철자 쓰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세요."

"내가 틀리게 썼단 말이오?"

그녀가 그의 턱에 기댄 이마를 조금 들며 말했다.

"그래요."

그는 창피한 듯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틀린 것 같지 않은데……."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그의 허리를 찌르며 말했다.

"메리marry가 '결혼하다'라는 뜻이구요, 당신이 쓴 메리merry는 '유쾌한'이라는

뜻이에요."

"아, 조금 다르군."

테어도어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며 그녀를 다시 끌어 당겼다.

그들은 다시 키스했다. 이제는 흥분을 가라앉힌 상태에서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서로를 탐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팔로 감아 아래로 끌어당긴

뒤 입술과 혀로 그의 얼굴을 애무했다.

그의 손이 서서히 그녀의 가슴께로 움직여 갔다. 그러다가 자신의 행동이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뒤로 물러섰다.

"별을 보러 나온다고 했으니 봐야 하지 않겠소?"

"좋은 제안은 아니군요."

그녀는 그의 목덜미 쪽으로 입술을 밀어붙이며 중얼거렸다.

그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할 줄 모르는 아가씨로군,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펼쳐 보이는데,

전혀 관심조차 두려 하지 않다니."

"자연이 바로 여기에 또 다른 선물을 안겨 주었잖아요. 난 이쪽 선물에 관심이

훨씬 많아요."

그는 리니아를 돌려세운 뒤 그녀의 등을 가슴으로 끌어 안았다.

"보시오."

그녀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북쪽 하늘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한 색깔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도 횐 눈 속에 완전히 묻혀

영원의 시간 속으로 잠든 듯 고요했다.

"오, 테디……."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굉장히 행복하게 살 거예요."

"난 이미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밝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별보다도 아름다운 한

여인에게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돌려세워 파랗게 빛나는 눈을 응시했다.

"우리는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손주들에게 들려주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될 거예요."

그날을 상상하며 그는 그녀의 볼 위에 키스했다.

그녀는 그를 팔로 감싸안았다.

"우리 집에서 내보낸 말들이 어디쯤에 있을 것 같아요?"

"어딘가에 있겠지."

"말들이 정열적이고 기운차다고 생각해요?"

"으응."

"우리처럼?"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빛났다.

"우리처럼!"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 속에는 정말로 소중한 순간들도 많았어요. 오, 보세요!"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내렸다.

"오, 너무 아름다워요!"

"노르웨이의 하늘은 이곳보다 더욱 아름답다고 들었소."

테어도어가 그녀에게 말했다.

"노르웨이, 음……. 언젠가 그곳에 가 보고 싶어요."

"한밤중의 태양의 나라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요. 그분들이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는 절대 적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고 하셨소.

협곡도 없고, 나무들도 없고, 물줄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으니까. 산들도

물론 눈에 띄지 않았고. 그러나 별들만은 같았지. 그분들은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이겨냈던 거요."

어느 틈엔가 테어도어의 손이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떨려 왔지만, 그의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지난주 내내 니사가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오늘 밤 나와 함께 돌아갑시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손이 어느 위치에 올려져 있는지를 깨달았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얼른 그녀의 가슴 위에 있던 손을 치웠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리니아, 제발……. 난 당신이 돌아와 주길 바라오. 우리는 곧 결혼하게

될 거요. 1주일, 아니 2주일이 걸릴지도 모르겠소. 그 동안 당신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기꺼이 그의 청에 응하고 싶었다. 클라라와 지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곳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학교도 더 멀었고,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아침마다 트리그에 게 학교까지 바래다 달라고 하는 것도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테어도어가 보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발꿈치를 들어 조바심 치듯 열렬히 그를 포옹했다.

"네, 집으로 가겠어요. 그런데 앞으로 2주일을 어떻게 참고 기다릴지…….

내 생애에서 가장 지루한 2주일이 될 거예요."

그는 그녀를 널찍한 가슴으로 끌어당긴 뒤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설사 그녀와 오래도록 함께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날, 테어도어는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는 크리스찬을 불러

냈다.

"얘야, 너와 얘기할 게 있다. 잠깐 나와 밖으로 나갈 수 있겠니?"

크리스찬은 잠시 동안 아버지를 유심히 살피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지요."

밖엔 찬바람이 불고 있었고, 달은 어느새 깍인 손톱만큼 살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쌓인 눈을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 마차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갔다.

말들은 억센 코털에 서리를 맞은 채 서서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쿠브와 투스가 서 있는 곳으로 갔고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때 건물 안에서 들려오던 음악이 멈춰졌고, 오직

말들의 숨소리만이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오늘 밤은 별이 안 떴구나."

드디어 테어도어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네요."

"어젯밤엔 왜 많이 떴었는데."

"네?"

"응, 리니아와 나는…… 우리는 말이다……."

테어도어는 말꼬리를 늘리다가 다시 이었다.

"아들아, 너도 기억하고 있지? 우리가 잘로 석탄을 캐러 가던 날 나눈 얘기들

말이다."

"기억해요."

크리스찬은 이미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테어도어가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예는 극히 드물었고, 그럴 때마다 상당히 진지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너는 선생님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 내게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말한 그 문제에 대해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이해시켰던

적이 있었지."

"선생님과 결혼할 건가요, 맞죠?"

테어도어의 손이 아들의 어깨 위에 무겁게 올려졌다.

"그래, 그럴 생각이다.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리니아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구나."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은 별로 없었다. 그는 이미 할머니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 시작할 때부터

사태를 예감했고, 점차 마음의 준비를 해오고 있던 터였다.

"언제요?"

"가능하다면 1주일 내로 하고 싶지만, 안 된다면 2주일 내로는 꼭 할 생각이다."

"어유, 너무 빠르네요."

"아들아, 네가 그녀에게 갖고 있던 감정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단다.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단다. 잘 되진 않았지만.

열여섯 살이나 차이나는 아들 또래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단다. 사랑이란 언제 오는지

모르게 그냥 찾아오는 거니까. 그런데 네가 리니아를 먼저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이렇게도 죄책감이 느껴지는구나."

크리스찬은 자신이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유, 선생님은 나를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요."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너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녀는……."

"내가 좋아한다는 걸 선생님도 알고 있었단 말예요?"

크리스찬은 당황스러웠다.

"아버지가 선생님에게 말했어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 왜냐하면 여자들은 그런 일에 민감하거든. 리니아는

이미 네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던 거란다. 우리 가정

내의 평화를 생각한 거지."

테어도어가 투스의 콧구멍에 손을 대자 장갑 위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선생님이 아버지의 부인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그것을 자신이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했다.

"물론이에요. 선생님에 대한 제 감정은 그냥 풋사랑이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크리스찬은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선생님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나요?꼭 불러야 한다면……."

테어도어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아마도 리니아는 네 엄마보다는 친구로 지내기를

더 원할 거야. 그냥 리니아라고 부르는게 어떻겠니?"

크리스찬은 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괜찮겠어요?"

테어도어는 바로 그 질문을 하려고 아들을 데리고 나왔었다. 그런데 아들한테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는 크리스찬과 같은 아들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했다. 그는 크리스찬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오, 아빠……."

크리스찬도 테어도어의 등을 힘주어 안았다.

그들 뒤로 쿠브가 코를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댄스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건물 안에서도 다시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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