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리니아가 기차에 몸을 실은 그날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잿빛 하늘도 그녀가 느끼고 있는 흥분 감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고향, 그녀는 뒤에 남겨 둔 그곳을 생각해 보았다. 부모님, 두 여동생, 안락한
도시 생활,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알게 된 사람들과 익숙한 거리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 그녀의 고향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즉 기차 바퀴가 향하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기차가 한 시간 정도 달렸을 때, 그녀는 테어도어와 존이 역에 마중나와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녀가 알라모역의 낡아빠진 플랫폼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테어로어 혼자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눈에 서로의 모습을 알아보았지만,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차에
오르는 계단의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다. 그의 양손은 입기 편한 낡은
웃옷의 호주머니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는 끝에 술이 달린 원뿔
모양의 파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갈망의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테어도어와 리니아는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기차의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가 파도처럼 굽이쳐 밀려왔다.
기차가 폭발하듯 숨을 내뿜었다.
떠나는 승객들과 배웅나온 사람들이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리니아와 테어도어는 그런 주변 상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로운 활력이 용솟음치는 자신들의
심장 고동 소리에만 귀 기울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돌진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승객의 무리를 빙 돌아서 다가왔고, 그녀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두 사람은 시선을 상대방에게 고정시킨 채 점점 거리를 좁혔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마치 지금 홀려보내는 일각의 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거의 코가 맞부딪칠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선
뒤 멈춰 섰다.
"잘 다녀왔소?"
그가 먼저 말했다.
"잘 있었어요?"
그가 미소를 짓자 그녀의 심장은 무중력 상태로 붕 떠올랐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그의 심장도 마찬가지로 떠올랐다.
"여행길은 즐거웠소?"
테어도어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지루했어요."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들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래지 않아 누군가가 테어도어의 등뒤에 쿵하고 부딪혀 왔다.
"저런, 죄송합니다!"
그 일은 서로에게 몰두해 있던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했다.
"존은 어디 있어요?"
리니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감기 때문에 집에서 쉬고 있소."
"그럼, 크리스찬은요?"
"덫을 점검하러 갔소.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내가 방해밖에
안 되니까 나가 달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그들은 단둘이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시선을 조심스레
억제하거나 하나하나 생각해 보고 말을 한다거나 육체 접촉을 자제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집'이란 단어를 강조해 말했다.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줘요."
그는 한 손에 그녀의 여행용 가방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역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녀와 떨어져 있는 동안 거의
병이 날 것처럼 격렬한 마음 의 고통을 느꼈었다. 그녀가 떠나고 없는 집 안은
공포스러웠고, 크리스마스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나머지 식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마구실에서 보냈다.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곳이야 말로그녀에 관한 그의 상상력이 가장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파르고에서의 안락한
생활에 몸을 묻고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도 했었다.
그는 로렌스가 걱정스러웠고, 그 자신이 그녀가 도시에서 사귄 다른 남자들과
어떤 식으로 비교되고 있는지, 알라모와 자신의 농장이 살기 편한 도시와 어떤
식으로 비교되고 있는지도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되돌아왔고, 그는 다시 그녀와 육체적인 접촉 ―비록 그녀의
두꺼운 코트 소매와 그의 가죽 장갑으로 방해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을 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걸음을 옮기며 그의 심장에 전류라도 흘려보낼 듯한 미소를 지었다
"모자를 새로 샀군요."
그녀는 손을 올려 자랑스럽게 모자를 매만졌다.
"엄마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어요."
그는 마차 뒤에 그녀의 여행용 가방을 실은 뒤 옆으로 돌아 나와 그녀를
쳐다보았다.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녀의
미소 뛴 얼굴을 늘 곁에 두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돌아온 것이 너무도 기뻤다. 자신의 이 가슴 벅찬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책 정말 마음에 들어요, 테어도어 고마워요,"
그는 지금 바로 그곳에서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당신 선물에 고마워하고 있었소. 펜과 잉크, 글자판은 공부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오."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썼죠?"
"크리스찬이 가르쳐 주소."
"그런 것 같다고 짐작했었어요.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글자 공부를 했나요?"
그녀는 사랑하는 이가 이렇게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매일 밤 했소. 아다시피, 크리스찬 그애가 그리 형편 나쁜 선생은 아니잖소."
"형편없는."
그녀가 틀린 단어를 고쳐 주었다.
그는 잽싸게 찡그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되돌아오자 마자 벌써부터
그를 괴롭히며 틀린 문장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테어도어는 그녀의 그런 모습 역시 사랑했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감싸쥐고 마차 위로 들어 올려 주었다. 잠시 후 그들은 집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의 틀린 단어를 고쳐주려 하지 않았어 봐요. 당신은 아마 낯모르는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르잖아요?"
그의 잔잔한 미소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 위로 전해져 왔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미소를 짓다가 대답했다.
"아니오,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거요."
그녀의 가슴이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별일 없으시오?"
그가 물었다.
그들은 덜컥거리는 마차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소리를
알아듣는 데 다소 지장은 있었지만, 대화가 끊어지지는 않았다. 아직 태양의
온기는 이방인처럼 머나먼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눈발이 한결 누그러지면서
기온도 많이 올라가 예전처럼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끊임없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미끄러지듯
달리는 기분은 유쾌한 희열, 그 자체였다. 하늘에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횐
암탉 같은 구름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또 구름들이 지평선과 접하는 곳에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채 횐색과 회백색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고있었다.
그들이 학교에서 동쪽으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을 지날 때였다. 테어도어가
어깨를 펴며 멈춰 서서 북쪽을 한참 동안 응시하더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쿠브와 투스는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앞발로 쌓인 눈을 긁어 대며 울부짖었다.
리니아는 그들 한 쌍의 말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 테어도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잘못되었어요?"
"보시오."
그가 멀리 지평선을 향해 손짓했다.
"뭘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걸요."
"저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저 검은 점들이 보이지 않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아, 보이기 시작해요. 그런데 저게 뭐죠?"
그의 말대로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땅끝에서 검은 점들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그에게로 돌렸다.
"말 무리요."
그리고 나서 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따라와 보시오."
그는 말고삐를 브레이크 핸들에 묶어 놓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큰 걸음으로
터벅터벅 뚫고 나가 두 줄로 된 가시 철조망 앞에 섰다. 멀리 들판을 가로질러
자유롭게 질주해 오고 있는 말 떼가 보였다. 하지만 흐릿하게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말들의 머리 부분만 보일 뿐, 그 나머지는 시야에 잘 잡히지 않았다.
말들의 숫자는 대략 40을 헤아릴 정도였는데, 그 중 갈색갈기를 바람에 휘날리며
우쭐대고 있는 한 녀석이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그 녀석은 두 사람의 존재를 감지하자 고개를 들어올려 히히잉거렸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러더니 곧 콧바람을 내뿜으며 돌진하듯 방향을 바꾸어 말 떼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힘과 아름다움이 조화된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인가!
그들의 말발굽은 횐색의 소용돌이를 만들며 광야를 향해 돌진했고, 자유롭게
휘감기는 꼬리와 갈기는 한겨울인 지금 더욱 무성하고 길어 보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전율 속에 온몸을 떨었다.
리니아는 도취된 듯 말들이 더 잘 보이는 쪽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녀는 굉음 속에 질주하는 말 무리를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테어도어가
옆에 와서 자신의 엉덩이에 손을 대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말발굽의
여진이 차차 사그라들면서 눈구름이 더욱 뿌옇게 피어올랐다.
테어도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존재는 물론 자기 자신의
존재도 잊은 듯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다.
머리에 체크무의 목도리를 빙빙 둘러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더 어린애
같아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그랬듯이 그녀가 말떼들의 장엄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추위에 발갛게 얼어 버린 코, 칭칭 동여맨
목도리, 그리고 벙어리 장갑……이 모든 것이 그녀를 더욱 어려 보이게 해
그와의 나이 차를 선명히 부각시켰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는 새삼스레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곧 긴장을 완화시켜 보려고 낄낄거리는 웃음을 만들어 냈다.
리니아가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앞으로 고꾸라져 굴러 떨어지기라도 하면, 나는 눈 더미 속에서
당신을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르오. 그러니 어서 이리로 내려오시오."
그녀는 그가 손을 붙잡아 주자 조심스레 뛰어내렸다. 그녀의 벙어리 장갑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을 잊은 채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정말 대단해요, 테디!"
그녀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듯 말들이 사라진 뒤의 들판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주위는 말 떼들이 언제 나타났었냐는 듯 정적에 빠져 있었다. 눈이 쌓인 길에
흔적으로 남겨 둔 발자국도 내리는 눈에 묻혀 가고 있었다.
"가끔씩 보게 될 거라고 했잖소."
"그래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이처럼……."
그녀는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장엄한 광경을! 학생들이 이 모습을 보고 그림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녀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잠시 후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변해 있었다.
리니아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눈을 퍼낸 뒤 그의
머리 위에 던졌다. 그가 웃으며 몸을 뒤로 빼내는 동안, 그녀의 젖혀진 얼굴
위로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테어도어, 이 겁쟁이!"
그녀가 놀려 댔다.
"솔직히 고백하는데, 나는 당신처럼 겁쟁이는 처음 봐요!"
"나는 겁쟁이가 아니오. 하지만 콧물을 훌쩍이며 침대에 누워 있고 싶지는
않소."
"피이! 그까짓 눈 좀 맞는다고 몸이 상하기야 하겠어요!"
그녀는 다시 눈을 한 움큼 퍼서 그의 입에 쳐넣었다. 그는 그녀가 성숙한
여자에서 어린애로 바뀌는 데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처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모습이 바로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테어도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본격적으로 눈뭉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눈을 뭉쳐 단단해지도록 토닥거린 그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렇게 눈을 갖고 장난치다 감기에 걸려도 나는 모르는 일이오."
그가 뒤로 물러서며 경고했다.
"이건 깨끗한 눈덩이일 뿐이에요."
그녀는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자요, 조금 더 먹어 볼래요?"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리니아, 이제 곧 후회할 텐데……."
"에이, 그럴 리가? 한 입 드시죠. 어허, 어서 먹어요. 한 입만……."
그녀가 막무가내로 눈뭉치를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제 본격적인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리 와요, 테디. 정말 깨끗한 노르트 다코타의 눈이라니까요."
그녀는 그가 말하는 도중에 간혹 내뱉곤 하는 노르웨이어 발음을 흉내내며
말했다.
"눈덩이를 치워, 이 조그만 바보야!"
그녀는 이번에 거의 그를 잡을 뻔했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은 아주 빨랐고,
힘도 셌다.
"난 조그만 바보가 아니에요. 나도 이제 어엿한 열아흡 살이라구요!"
그는 계속해 웃음을 터뜨렸고, 그 동안에도 그들의 손은 격렬한 눈싸움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2주 동안 여행을 다녀오더니 한 살을 더 먹어 버렸나?"
그녀는 이를 뿌드득 갈며 투덜거렸다.
"이제 당신을 잡고 말 거예요, 테어도어!"
그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다리를 걸어 그를 눈 속에 넘어뜨렸다.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팔꿈치와 가슴까지 눈 속에 파묻으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입을 손으로 막고 몸을 마구 흔들며 웃어 댔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소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꼬챙이에라도
꿸 듯 흉악한 눈빛을 번득이며 느릿느릿하게 몸에서 눈을 털어 냈다. 리니아는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테어도어, 제발 그러지 말아요……. 테어도어……."
그는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 심술궂은 눈초리를 흘기며 앞으로 전진했다.
"왜 그러시오, 브란덴베르그 양 당신 말대로 깨끗한 노르트 다코타의 눈일
뿐인데?"
그가 놀려 댔다.
"테어도어, 만약 당신이 싸움을 걸어 오면…… 나는…… 나는……."
그는 전혀 마음의 동요 없이 계속 전진했다.
"당신이 뭘 어쩌겠다고?"
"당신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거예요!"
"우리 어머니한테 고자질하겠다고! 하하하!"
그는 계속 접근했다.
"그래요, 꼭 일러바치고 말 거예요!"
"좋소, 좋을 대로 하시오. 나도 어머니의 반응이 궁금한걸,"
갑자기 그가 돌진해 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그녀의 등짝을
두들겨 패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와 맞붙어 싸웠다. 그는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녀는 더욱 억세게 항거했다.
그가 한 걸음 더 밀치고 들어오자 그녀는 바닥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그의
웃옷을 움켜 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한발 늦었다. 부풀어오른 눈베개 속으로
그를 힘껏 잡아당기면서 넘어져 버렸던 것이다.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그녀의
치마가 한데 얽혀 땅으로 굴렀다. 동시에 테어도어는 그녀를 인간 이불 삼아
큰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그들이 계속 웃어 대는 동안, 그의 한 쪽 다리가
그녀의 무릎에 교차되며 휘감겼다.
눈싸움은 시작처럼 갑자기 끝이 나 버렸다. 세상은 침묵으로 뒤덮였다. 그녀의
다리 위에 걸쳐져 있는 그의 다리가 점차 무겁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충동이
눈 속에 묻힌 그들의 육체 속으로부터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리니아……."
그의 입술 사이로 긴장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이 그의 옷깃과 어깨, 등뒤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파란색 모자는 벗겨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머리 위로 펼쳐진 납빛 하늘에
의해 액자에 끼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열려진 입술을 통해 간간히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입술이 갑자기 그녀의 입을 덮었고, 그의 몸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의 몸은 눈 속에 더욱 깊이 파묻혔다. 그들이 격정적으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는 동안, 그들의 혀는 접촉해 짝을 지었고 뜨거운 기운으로 얼어붙은
입술을 녹여 주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의 심장은 평소와 달리 미칠 듯 쿵쿵거리며
하나로 녹아들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초조함을
느꼈다.
"보고 싶었어요. 오, 테디……."
그가 장갑 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으며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것은 마치 말 떼들이 한 번 더 들판을 질주하며 지축을 흔들어 놓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도 당신을 그리워했소."
"이제 그곳은 더 이상 고향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곳의 당신 곁에 있었으니까요."
"나도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아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마구실에서 혼자
보냈소."
눈덩이 하나가 그의 옷깃에서 그녀의 뺨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그가 그것을
혀로 할아 먹자 그녀의 두 눈이 사르르 감기고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혀가
다시 그녀의 입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갔고, 그들의 육체는 열정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도, 옷을 축축하게 적셔 오는 눈도 그들의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마지못해 하며 그녀의 몸 위에서 굴러내려와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나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소."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바보같이……."
그의 몸이 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자 그녀는 갑자기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바보 같다구? 여지껏 나는 한 번도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그녀는 그의 눈가에 입술을 댄 채 그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내가 떠날 때 당신이 역에서 했던 말은……."
"오, 리니아……."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감고는 그녀의 몸을 꽉 껴안았다.
"당…… 당신은 진심이 아니었나요?"
두려워하는 그녀의 표정이 그의 가슴에 또 하나의 사랑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아니오, 그건 내 진심이었소. 하지만 그건 옳지 못한 일이오."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사랑에 옳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어요?"
그는 자신이 다시 젊어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서른네살이라는 결코 젊지 않은 나이였고,
그래서 아직 철부지와도 같은 리니아를 다독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리니아, 내 말을 좀 들어 봐요. 내가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오? 그래서……."
"알고 있어요. 나도 그 일에 관해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얻은 결론은 하나예요. 우리는 결혼해야……."
"안 돼!"
그가 벌떡 일어나 몸을 홱 돌렸다.
"절대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요."
그녀도 따라 일어나 그와 어깨를 맞대고 고집을 피웠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죠?"
그는 눈 속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어 허벅지에 대고 탁탁 털었다.
"리니아, 제발 머리를 굴려 생각 좀 해보시오."
그녀는 두 팔로 그를 잡고 흔들어 댔다.
"머리를 굴리라구요?"
그녀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로 하여금 그녀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했다.
"왜 내가 가슴이 아닌 머리를 써야 하죠?"
"사람들이 뭐라 할지 생각해 봤소?"
"그래요. 엄마가 오늘 아침에 내게 한 말이 있어요. 당신은 너무 나이를
먹어서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분 말이 맞소."
그는 모자를 머리에 눌러 쓰면서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테어도어……."
그녀가 그의 팔을 확 붙잡았다.
"도대체 나이라는 게 뭔데……. 나이가 어떻게 감정보다 우선할 수 있죠?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에요. 단지…… 단지 숫자일 뿐이라구요. 우리에게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고 가정해 봐요. 당신이 나보다 열여섯
살 연상이라는 말도 할 수 없었을 것 아녜요."
세상에! 그는 그런 리니아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는 이런 상황에서 리니아를 만나게 한 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장갑 낀 두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물었다.
"아기를 생각해 봤소, 리니아?"
"아기요?"
"그렇소, 아기를……. 당신은 아기를 낳길 바라지 않소?"
"물론, 아기를 원해요."
"나에게는 이미 다 큰 아들이 있소. 벌써 열일곱 살이지. 당신과 동년배요."
"그렇지만 테디, 당신은 이제 겨우 서른……."
"크리스찬에 대해 생각해 봤소?"
"……."
"그애는 당신을 좋아하고 있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소?"
"네, 알고 있어요."
그는 그녀가 부정의 대답을 해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갑자기 할말을 잃었다.
"좋소. 그런데도 당신은 그 일이 몰고 올 혼란스런 결과를 고려해 보지 않았단
말이오?"
"왜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지금 크리스찬의
담임 선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크리스찬에게도 그 사실을
명확히 해두고 있구요. 그리고 누구나 사춘기에 한번씩은 겪는 일이잖아요.
크리스찬도 조만간 극복해 낼 수 있을 거예요."
"리니아, 그애가 내게 속마음을 털어놨더랬소. 함께 탄광에 간 날, 당신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더군. 그애는 나를 믿고 의지해서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던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만일 내가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한다면, 그애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지를 말이오."
하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그의 마음속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해
냈다.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어요. 안 그런가요, 테디?"
"바로 맞혔소. 나는 지금 두렵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가
있겠소?"
그녀는 밍크 장갑을 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시선으로 그의
눈동자를 꼼짝 못하도록 가두어 버렸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는 메린다가
아니기 때문이죠. 나는 당신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이곳이
좋아요. 당신만큼이나 이곳도 좋아한다구요."
하지만 만일 그들이 아이를 낳는다면, 그애들이 자라서 고향을 떠날 때쯤이면
그는 늙어 꼬부라져 있을 것이다. 그것도그가 아주 장수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그녀는 그것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못했다. 그는 몸을 홱 돌려 마차를 세워
둔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빨리 오시오. 갑시다."
"테디, 제발……."
"그만!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소. 자, 갑시다."
그들은 저 앞에 학교 건물이 보일 때까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잠깐 학교에 세워 주실래요?"
"할 일이라도 있소?"
"아니에요. 다만 학교가 그리웠을 뿐이에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학교가 그리웠다고?"
그녀는 정말 대평원 위에 조그맣게 솟은 이 황량한 학교가 그리웠단 말인가?
"이곳의 모든 것들이 그리웠어요."
그는 말없이 마차를 몰아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쳤다.
"어, 누군가 눈을 치우고 길을 만들어 놓았군요."
그는 말을 세운 뒤 마차에서 내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며칠 전에 눈이 조금 왔었소. 그런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서……."
"당신이 눈을 치웠군요?"
그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는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어느새 바싹 다가서 있었다.
그들은 둘 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첫날을 회상했다. 그날, 그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를 돌볼 시간 따위는 없다며 화를 냈었다. 그때에 비하면, 그녀를
대하는 테어도어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요. 테디, 고마워요."
"교실 안에도 들어가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문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무나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휴게실 문 앞에 섰다.
그녀는 교실을 사랑스런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단으로 다가가면서
난로와 책상, 그리고 벽에 걸린 아이들의 작품들을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마치 그것들이 감정을 가진 것인 양. 그녀는 추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족스런
미소를 피어올렸다. 그는 또다시 그녀의 나이를 생각했다. 그녀가 서른네 살이
되면 그는 인생의 절정기를 훨씬 지나 횐머리가 날 것이다.
그녀는 교단을 정리한 뒤 분필을 들어 칠판 위에 커다랗게 썼다.
'환영, 새해 복 많이 받아요. 1918!'
그녀는 분필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턴 뒤 테어도어가 글자를 볼 수 있도록
뒤돌아줬다.
"이걸 읽을 수 있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글자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렵게 어렵게 그 문장을 다 읽고 나자 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그런 그가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다.
"조만간 우리 반의 8학년 아이들처럼 잘 읽게 될 거예요."
그러자 그가 미소로써 답했다.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자, 갑시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거요."
니사의 부엌에 들어가며, 그녀는 마치 새 댄스화를 벗고 익숙한 실내화로
갈아신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탁 위에 놓인 기름천 ,문 뒤의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들, 물통과 바가지,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맛있는 냄새……. 모든
것이 다 똑같았다.
창문에 잔뜩 김을 서려 놓으며, 니사는 미트볼과 그레이비 소스를 만들고
있었다. 리니아를 발견하자 늙은 여자는 두 팔을 들어 환영 인사를 보냈다.
"이제 오는군요."
리니아는 애정 어린 포옹으로 답했다.
"음…… 냄새가 좋군요. 무슨 요리예요?"
"심장 스튜."
그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웃었다. 리니아가 장난기를 섞어 그녀를 밀치는
척하며 말했다.
"테어도어에게 다시 역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 거예요."
"쉽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없는 동안 테디는 내내 안절부절 못했다우"
"어머 그랬어요? 정말이죠?"
그녀는 테어도어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난 상상도 못했어요. 테디는 집에 오는 길에 나를 눈더미속으로 밀어 넣던걸요."
"눈더미 속에 !"
방 건너편에서 테어도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크리스찬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막 밖에서 돌아오다가 리니아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볼은
아직 빨갛게 얼어 있었고, 머리는 뒤엉클어져 있었다.
리니아는 크리스찬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크리스찬의 아버지와
결혼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 테어도어의 가족들은, 그녀가 테어도어와 손을
잡고 싶을 때마다 크리스찬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녀는 크리스찬의 볼에 밍크 장갑을 가져다 댔다.
"크리스찬, 이건 지금까지 내가 본 장갑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거야. 네가
만들었니?"
크리스찬은 머뭇거렸다.
"잘 맞아요?"
"완벽해! 볼래?"
크리스찬도 그녀에게 선물에 대한 감사를 표했고, 그녀는 니사에게 숄이
무척 따뜻하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해서 어색한 순간이 모두 지나갔다.
니사가 말했다.
"아가씨, 고마워요. 그런데 나처럼 늙은이가 이 라일락 향수로 무얼 하지?
냄새를 맡아 줄 남자도 없는데."
그들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난주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며 식탁에 가 앉았다.
드디어 리니아가 준 파란색 순모 목도리를 두르고 존이 나타났다.
"존, 아프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리니아는 존과 가벼운 포옹을 나눈 뒤 야단치듯 말했다.
"아직 안 나았어요. 이 빨간 코와 물기 찬 눈 좀 봐요. 이 추위에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오다니……."
크리스찬처럼 존도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모두 크게 웃었다.
아, 익숙한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귀향이었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자 여느 때처럼 테어도어가 기도를 올렸다. 리니아는
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살짝 숙여진 머리,
모자 챙 때문에 납작하게 눌린 머리칼, 내려 감긴 눈꺼풀, 모아 쥔 손 뒤의
입술…….
"주님, 오늘 저희에게 주신 이 음식에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우리의 어린
선생님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아멘."
테어도어는 고개를 들다 리니아의 시선과 부딪쳤다. 그들은 모두 이곳이
그녀가 진정으로 속해 있어야 할 자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식탁을 둘러보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들을 사랑했다. 테어도어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를. 니사의 거친
애정 표현, 크리스찬의 순식간에 붉어지는 뺨. 존의 따뜻한 마음…….
테어도어는 그녀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걸 눈치채자 잽싸게
미트볼이 든 그릇을 집어들었다. 그는 기도가 끝난 후 그녀를 관찰하면서,
그녀가 없는 식사 시간들이 얼마나 공허했던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없는 동안,
가족들은 이전의 식사 습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침묵 속에 오로지 배를 채우는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식사로. 그러나 그녀가 집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명랑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굳어 있던 혀도 풀린 것 같았다.
테어도어는 봄이 되면 그녀가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입 안에 들어 있던
미트볼이 톱밥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저녁 식사 후 리니아가 말했다.
"그 동안 당신이 무얼 더 배웠는지 알고 싶군요. 보여 주시겠어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맥이 빠져 있었다.
"당신이 피곤하지 않다면……."
그러나 니사가 존에게 "테디가 널 집에까지 태워다줄 거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전에 없이 초조해했다. 존은 마치 달팽이처럼 꿈지럭거렸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찾느라 한참동안 부산을 떨기도 했다.
테어도어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존을 기다렸다. 니사가
존의 겨드랑이에 야채 수프를 한 병 끼워 넣어 주며 다음날 아침에도 그냥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명을 내리느라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테어도어가 존을 데려다 주고 돌아와 가슴을 설레며 부엌으로 들어섰을 때,
그 안에는 니사와 크리스찬, 그리고 리니아가 앉아 있었다. 책들과 작은 글자판도
준비되어 있었고, 크리스찬은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려는 듯 그들이 공부한
마지막 장을 펼쳐 놓고 있었다.
리니아가 없는 동안, 테어도어는 열심히 읽는 공부에 매달렸었다. 크리스찬을
귀찮게 해 새로운 단어도 익히고 받아 쓰기 시험도 봤다. 그는 새로 배우는
단어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었다. 무릎, 대, 소시지, 울타리, 크리스찬, 가슴,
컵, 그때, 센스, 존, 엄마, 난로, 리니아, 루테피스크…….
"루테피스크! 네가 루테피스크를 가르쳐 줬니?"
"아빠가 가르쳐 달라고 시켰어요."
리니아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테어도어가 읽기를 시작한 후 얼마나
이모저모로 많은 공부를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를 깨달았다.
"와, 테어도어, 당신은 벌써 5학년 학생들 정도의 수준이 되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데요!"
크리스찬이 말했다.
"아버진 내게 덫을 확인하러 가는 정도의 시간밖에는 주지 않았어요."
테어도어의 얼굴이 홍당무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리니아 앞에서 정말로
당당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었다.
"나무 작대기로 눈 위에 단어를 쓰고 계신 걸 발견한 적도 있어요."
"눈 위에?"
그녀가 테어도어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해 슬쩍 다른 곳으로 향했다.
"새 종이가 없었소."
그녀는 이처럼 수줍어하는 그의 모습을 그날 밤 처음으로 보았다.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를 훨씬 젊어 보이게 했다.
그 다음날 밤, 리니아는 그를 떠보기로 작정했다. 식탁에는 크리스찬과 니사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글자판 위에 "우리아버지가 자동차를 샀다는 말을 내가
당신에게 했던가요?"라고 쓴 뒤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순조롭게 읽어 가다가 자동차라는 단어에서 막혔다.
그녀가 단어를 한 음절 한 음절 설명해 주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대답 대신 글자판을 가져가 지운 뒤, "아니오. 당신은 타 보았소?"라고
썼다.
그녀는 다시 지우고 대답을 썼다.
"네,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는 글자판을 들여다보며 1분 정도 생각하더니, "이 단어는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재미있다."
"……."
그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며, 글자판은 쳐다볼 생각도 않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자동차! 그녀는 자동차와 같은 것에 익숙한 도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봄이 오면,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편리한 도시 생활에 젖어들
것이다. 그리고 새삼 이곳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원시적이었던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음 학기에 다시 이곳에 올 턱이 있겠는가?
그는 마음속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지만, 선뜻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에 물었을 때처럼 그녀가 대답하길 거부한다면 자존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글자판을 지운 뒤, "노란츠를 만났소?"라고 썼다. 그리고 오랫동안
써 놓은 질문을 주시하면서 그녀에게 보여 줄까 망설였다. 니사와 크리스찬이
식탁 건너편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니사는 양말을 꿰매고 있었고, 아들은 책을
읽고 있었다. 리니아는 그가 무얼 썼나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만이 읽을 수 있도록 글자판을돌렸다.
그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를 만났소?"
마침내 그녀는 괴고 있던 턱을 빼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식탁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쪽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앉아 자기 할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녀는 글자판 위에 놓여
있는 그와 손을 치우고 질문밑에 "로렌스?"라고 고쳐 썼다.
테어도어는 고쳐 씌어진 그 이름을 보며 목 주변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로렌스라고 고쳐 쓴 뒤, 그녀에게 다시 글자판을 보여 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몇 초 동안 글자판 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크리스찬은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니사는 가위로 실을 자르고 있었다. 리니아의 손이 글자판 위로 가기 직전에,
테어도어는 그녀의 눈에스친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아뇨."
그녀가 적었다.
그는 그 단어를 읽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로렌스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서로의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리니아를 이런 식으로 가까이 두는 것은 좋지 알아. 아예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떠나 보내야 해.
테어도어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건 좋지 않아. 만약 그가 너와 결혼하지
않겠다면 내년에는 다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거야.
다음날, 리니아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부엌 식탁 위에 편지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발신인은 아드리안 미첼이었다.
그녀가 봉투를 집어들려는데, 갑자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테어도어가
응접실로 통하는 문 입구에 서서 그녀를 책망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니사는
두 사람의 존재를 무시한 채 난롯가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양파가 기름에
튀는 소리만이 침묵을 깨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곧 돌아서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리니아는 테어도어의 못된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녀와
결혼하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해 오면 심통을 부리는 것이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편지를 잽싸게 챙겨 들고 계단 위를 쿵쿵거리며 뛰어올라갔다.
그날 밤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리에 앉은 리니아와 테어도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테어도어는 두 사람만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니사와 크리스찬이 그렇게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니사는 늘 앉는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했고, 크리스찬은 육포를 씹으며 눈올
때 신는 신발을 손질했다.
테어도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글자판 위에 "아드리안이 누구요?"라고 썼다.
그가 리니아 쪽으로 글자판을 돌렸을 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녀가 적었다.
그날 밤은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나, 테어도어는
점점 퉁명스럽고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는 한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글쓰기
연습을 했고, 그녀가 잘 자라는 밤 인사를 했을 때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은 온도계의 눈금이 영하 18도에 머물렀고, 풍차가 아이오와주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찬 남서풍이 강하게 불어왔다.
위층의 실내 온도가 바깥 온도와 거의 비슷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창문이 얼어붙어 아예 밖이 내다보이지도 않았다.
존은 아침을 먹으러 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테어도어가 의자를 식탁
아래로 집어넣고 코트를 챙긴 뒤, 그녀를 외면한 채 말했다.
"당신 물건들을 챙기시오. 학교까지 데려다 주겠소."
"날 데려다 준다고요?"
리니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그렇게 말했소. 그러니 얼른 준비나 하시오."
"하지만 당신이 말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소. 하지만 오늘 같은 날
걸어가다가는 큰길로 나가기도 전에 얼어 버리고 말 거요."
그는 코트를 입고 단추를 채운 뒤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서며 다시 반복해 말했다.
"서두르시오."
그녀는 잽싸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정확히 5분 뒤 밖으로 나와 보니, 투스와
쿠브 뒤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연통을 매단 작은 헛간을 연상시켰다.
테어도어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그 이상하게 생긴 물건에 난 작은 뒷문
옆에 서서 조바심 치며 그녀를 불러 댔다.
"이게 뭐예요?"
리니아가 비뚤어지게 매달린 지붕을 쳐다보며 물었다.
"들어가시오!"
그는 리니아의 팔을 잡아당겨 안으로 밀어 넣은 후 문을 닫았다. 실내는
따뜻했지만, 어두웠다. 작은 난로도 있었는데, 난로의 틈새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상자같이 생긴 마차 안을 데워 주기에는 적당한 크기의 난로였다.
앞쪽에 난 문을 열자 햇빛이 들어왔다. 테어도어가 앞쪽으로 올라타는지 바닥이
흔들거렸다.
"의자가 없으니 꽉 붙잡으시오."
그가 충고했다.
그는 그녀가 미처 그의 말에 따르기도 전에 고삐를 당겼고, 덕분에 그녀는
거의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녀는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겨우 몸의
균형을 잡으며 물었다.
"크리스찬은 뭐 해요?"
"일하고 있소. 나중에 데려다 줄 거요."
"하지만 아침 허드렛일은 늘 당신이 해 왔잖아요."
"난 식사 전에 이걸 만들어야 했소."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리니아는 즉각 화를 냈다.
"당신은 이걸 만들 필요가 없었어요, 테어도어. 난 걸어갈 수 있단 말예요."
그가 뒤를 돌아다보며 대꾸했다.
"하!"
"난 당신에게 날 온실 속의 화초처럼…… 대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요."
"영하 18도의 바람이 살갗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는 거요?"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면 돼요."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군요."
그녀가 빈정거렸다.
"하지만 다음에 마차를 만들 땐 내가 탈 것인지 미리 물어보세요."
"당신을 위해 만든 게 아니오."
역시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놀리는 듯한 그의 말투에 점점 더 화가 났다.
"테어도어, 요즘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마치 발바닥에
가사 박힌 곰처럼 행동하고 있다구요!"
그는 안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죠?"
테마도어는 고집스레 앞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소리를 질렀다.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소!"
마차는 이미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으로 서둘러 날카로운 바람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뒤따라와 눈길을 힘겹게 걷고 있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목도리가 날아갈
듯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테어도어도 다른 한 손으로는 모자를 잡고있었다.
계단 앞에 이르기도 전에 그들이 걸어온 발자국은 이미 지워지고 없었고, 눈이
너무 쌓여 한 계단을 오르면서 다음 계단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계단을 헛짚어 넘어질 뻔했다. 즉각 테어도어가 그녀를
붙잡아 바로 세워 주었다. 문은 횐 눈으로 완전히 막혀 열리지 않았다. 테어도어가
마차로 돌아가 삽을 가지고 왔다.
"내가 할 수 있어요!"
리니아는 그에게 소리치며 삽의 손잡이 쪽으로 손을 뻗쳤다. 그들의 고집스런
시선이 만나 불꽃을 튀었다. 바람은 그의 모자 챙을 들썩이게 했고, 그녀의
목도리를 잡아당겨 깃발처럼 뒤흔들어 댔다. 그녀의 코끝이 젖어들고, 그의
귀끝이 빨갛게 얼어붙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말없이 삽을 빼앗아 든 다음 비키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는 거칠게 돌아서서 맹렬한 기세로 눈에 삽질을 해댔다.
"테어도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잖아요!"
열두 번째 삽질에 문이 열렸다. 그는 문을 흔들어 연 뒤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안으로 밀어넣었다.
"눈은 내가 치울 거요!"
그는 그렇게 소리를 지른 뒤 그녀의 얼굴 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문을 세게 걷어찼다. 그리고 화를 내며 돌아서서
석탄 담는 통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석탄 통을 들고 나오자 그가
다시 달려들어 빼앗아 갔다.
그는 삽을 눈 속에 찔러 놓은 뒤 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는 무릎까지
차는 눈길을 걸어 건물 뒤편으로 갔다.
창문이 뒤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진동과 함께 그가 가져 온 석탄통이 바닥에
내려졌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망치소리를 내며 걸어나가는 그의 부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그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을 지폈다.
그리고 불이 지펴지자 목이 졸릴 정도로 목도리를 확 졸라맸다.
그녀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 막 주전자를 집어들려고 할 때였다. 그가 다시
거친 발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주전자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바닥을 쾅쾅 울리며 교실
안으로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아 버렸다.
잠시 후 그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문을 등지고
서서 팔짱을 단단히 낀 채 그가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를 들었다. 그 다음,
뚜껑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주전자를 휴게실에 내려놓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는 교실 안으로 들어온 걸까, 아니면 밖으로 나가 버린 걸까?
잠시 동안 그녀는 난로 연통을 쏘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한 쪽 어깨 너머로 슬그머니 넘겨다보았다.
입구에 그가 모자 챙 아래로 그녀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난로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남자에 대해 내게 얘기할 거요, 안 할거요?"
그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누구에 대해서 말예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되물었다.
"누구냐고?"
그가 조롱하듯 비웃었다.
이어 바닥을 밟는 장화 소리가 난 뒤 그가 한 발 거리도 안되게 그녀에게로
다가와 멈춰 섰다.
"아드리안이 누구요?"
"미첼, 그 사람 이름은 아드리안 미첼이에요."
"그 사람 이름이 뭔지는 상관없소. 내게 말할 거요, 안 할거요?"
"말했잖아요. 우리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구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럴 테지."
그가 다시 빈정거렸다.
그녀는 벌컥 화가 치밀어 올라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래요!"
그의 눈은 모자 챙의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그늘의 깊이야말로
그의 분노의 깊이와 비례한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당신 심심풀이 중 하나인가?"
그가 비난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녀가 주먹을 꽉 움켜 쥐며 되받았다.
"그렇군?"
테어도어 역시 장갑 긴 손을 꽉 움켜 쥐며 쏘아 댔다.
"당신이 알 바 아니잖아요. 어떻게 감히 내 사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죠? 당신은 단지 내 하숙집 주인일 뿐이잖아요!"
"뭘 했소?그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다녔소?"
테어도어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빈정거렸다.
"그래요. 자동차를 탔어요. 아주 재미있었죠. 그리고 그와 함께 파티에도
갔고, 스케이트도 탔어요. 춤도 추고, 샴페인도 마셨어요. 게다가 우리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어요. 또 그가 뭘 했는지 알아요, 테어도어?"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조롱하며 그에게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내게 키스했어요. 그게 그렇게도 당신이 알고 싶어했던 거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래요, 그와 키스했어요."
테어도어의 얼굴이 빨간 고추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턱을 꼿꼿이 치켜세운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운을 시험해 보려 하지 마시오, 아가씨."
그가 낮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협박했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조롱하듯 코방귀를 뀌었다.
"오, 웃기지 마세요, 테어도어. 당신처럼 고집 센 사람은 기차가 와서 밀어도
끄려하지 않을걸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은 겁쟁이니까요."
그가 위협적인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녀는 파란 눈동자에 도전을 담으며
자리를 지켰다.
"안 그래요?"
서로의 약점을 찾으려다 실패한 그들은 얼굴을 돌려 버렸다. 마침내 테어도어가
물었다.
"몇 살이오?"
"스물, 아마 스물하나. 자, 이제 도망가요, 테어도어. 언제나처럼 도망가라구요."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목의 힘줄이 팽팽히 당겨져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망할 계집애!"
그는 그녀의 두 팔꿈치를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칠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팔과 입술이 그에게 붙잡혀
있어 쉽지 않았다.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분노의 감정이 서서히 꼬리를
감추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의 혀가 힘차게 그녀의 이빨 사이로 밀고
들어와 그녀의 혀를 만났다. 이제 그녀는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다가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도 그녀의 변화를 느꼈는지 잡고 있던
팔꿈치를 풀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휘감고, 발끝으로 서서 매달렸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들을 방해했다.
테어도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밀어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성냥불이 당겨진 석탄
같았다. 그녀의 두 눈은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테디, 테디…… 왜 그래요?"
그녀가 빠르고 짧은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난 당신 아버지 뻘은 될 정도로 나이가 많소. 당신은 아직 어려서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그걸 핑계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만하시오."
그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다시 떠진 그의 눈동자에는 고통의 빛이 역력했다.
"당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소. 나중에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요. 당신은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오."
"거의 열아홉 살이에요."
"그래, 다음달에는 열아흡 살이 되겠지, 그리고 두 달 뒤에 난 서른다섯
살이 되고. 뭐가 다르냐구? 우리 사이엔 16년이란 세월의 차이가 있소."
"상관없어요."
그녀가 고집스레 주장했다.
"당신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
그는 즉시 그녀의 약점을 찾아냈다.
"당신 부모님은 당신을 위해 아드리안이라는 젊은 남자를 선택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