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7화 (17/20)

<17>

셀머는 미소 띤 늠름한 모습으로 딸이 역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앞가리마를 타 가지런히 빗어 넘겨져 있었고, 턱에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리니아는 아버지의 단단한 팔에 안겨 코트에 얼굴을 묻었다. 낯설지 않은

스킨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그녀는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오, 아빠."

"살이 쪘구나."

그녀는 어른이 되기 위한 길고 힘든 훈련을 받으러 떠난 터였다. 그래서인지

셀머는 자식을 다시 마주 대하자 기대 이상의 안도감이 들었다.

"이건 뭐냐? 눈물이냐?"

"아빠를 뵈니까 너무 반가워서요."

그녀는 아버지의 뺨에 키스를 한 뒤 팔짱을 꼭 끼고 역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낯설은 자동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물체를 응시했다.

"놀라지 마라. 생각보다 사업이 잘 되고 있어서 한 대 구입했다."

셀머의 얼굴에는 어느덧 여유 있는 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 거라는 말씀이에요?"

그들은 파르고 시내로 내려갔다.

자동차를 보고 지나가던 말들이 깜짝 놀라 울부짖곤 했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지평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도 낯익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새 자동차는 리니아에게 놀라움과 동시에

심한 낯설음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이곳을 떠난 것이 넉 달 전이 아니라 4년 전인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최선을 다해 숨기려 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점점 더 서글퍼졌다. 그녀는

모든 것이 떠나기 전과 똑같이 남아 있기를 바랐었다.

"가는 길에 가게부터 들러 보겠니?"

셀머가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게는 그녀가 잔돈을 바꾸어 주는 심부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된

후부터 줄곧 일해 오던 곳으로, 항상 커피 향과 그밖의 여러 가지 물건들의

냄새가 뒤섞여 나곤 했었다. 가게는 변한 게 없겠지,

"가요."

그녀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하지만 역시 가게에도 변화가 있었다. 앞 유리창에는 전쟁참전을 부추기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지지직거리며 노래를 흘려보내는 라디오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계산대 뒤에는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여기, 이쪽은 아드리안 미첼. 아드리안은 지금껏 내 오른팔 역할을 해 주었단다.

아드리안, 내 딸 리니아일세."

리니아는 화가 치 밀어 올라 낯선 남자와 악수하는 그 순간까지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새로 소년 한 명을 고용했다고 편지에 썼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라는 사람은 6피트의 장신에 말쑥한 얼굴로 나비 넥타이까지

매고 있는 것이다.

"브란덴베르그 양이시군요."

"안녕하세요, 미첼 씨."

그녀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아드리안은 올해 대학 2학년생이란다.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고 있지."

셀머는 자식이라도 되는 양 아드리안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아드리안은 리니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올해 학교를 졸업하셨다고요? 그래,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어때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아드리안이 천성적으로 온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본 남자들 중 가장 완벽한 치열과

불공평할 정도로 잘생긴 외모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니아는 오직 그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만이 몹시 화가 날 뿐이었다.

가게에 들른 건 잠깐 동안뿐이었다. 리니아는 다시 아버지의 포드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새로 소년을 고용하셨다고 해서 나이 어린 꼬마인 줄 알았어요."

리니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셀머는 대답 없이 그냥 껄껄 웃기만 했다.

"근데, 저 사람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그냥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지. 아드리안이 학비를 벌어야한다며 일을 하게

해달라고 했단다. 그리고 6개월 내에 가게매출을 5퍼센트까지 신장시켜 놓지

못하면 자기 월급의 절반을 내놓겠다고 했단다. 석 달 안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만 두겠다고도 했지!"

아드리안이 그 약속을 지켰다는 것은 따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여유 있는 웃음과 이 차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리니아의 분노 위에 질투심이 보태졌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그대로 있어

주길 바랐던 모든 것을 변화시킨 장본인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프리카세 닭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위층에 가 보니 캐리와 땅딸이가 쓰는 침실은 여전히 깨끗하고 말끔했다.

그런데 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반가움과 호기심이 섞인 동생들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리니아는 텅 빈 방에 허전함을 느꼈다. 집

어딘가에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리니아가 부엌으로 돌아와서 동생들의 안부를

묻자, 어머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얼버무렸다.

"오 저런, 나가 버렸구나. 하지만 저녁 식사 때까지는 들어올 거다."

"나갔다구요?"

리니아가 실망스럽게 되받았다.

그녀는 동생들이 반갑게 뛰어나와 큰언니가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무엇을

배우고 돌아왔는지 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쏟아놓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부러움

섞인 눈망울을 반짝이며.

"그애들은 걸 스카우트 모임에 나갔단다. 거기서 전쟁터로 보낼 위문 가방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더구나."

위문 가방? 그 조그만 애들이?

"그래, 가게에는 들렀다 오는 거니?"

그녀의 어머니, 주디스가 물었다.

"네, 잠깐 들렀어요."

"그럼, 아드리안을 만나 봤겠구나."

"네."

리니아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 어떻든?"

리니아는 어머니에게 의심스런 눈길을 던졌다. 주디스는 반죽을 만드느라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게에는 겨우 5분 정도 있었어요, 엄마, 어쨌든, 그 사람은 내 타입이

아녜요."

저녁 시간이 되자 캐리와 땅딸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들은 큰언니를

보자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곧 숨돌릴 틈도 없이 자신들의 일과를

늘어놓으며 수선을 피워댔다. 리니아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예 묻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리니아는 걸 스카우트가 가스 마스크에 필터로 쓰이는

목탄을 주워 모으느라 한 달 이상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문 가방을 채울 비누나 바늘과실 등을 구하느라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캐리는 그 가방 중 하나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며

그 가방을 받게 될 군인이 소식을 보내오길 꿈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당황스럽기조차 했다. 그녀가 집을 떠날 때만 해도, 동생들은 나무를

기어오르다가 무릎이 벗겨지거나 시도 때도 없이 까불어 대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었다.

캐리는 볼품없는 외모의 철없는 계집애였다. 그러나 지금 그애는 가냘픈

외모에 보기 좋게 물들인 머릿결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은 곧 남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 분명했다.

땅딸이 역시 변해 있었다. 그애에게 그 별명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날씬해져 있었고, 머리 스타일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땅딸이가

담갈색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걸 스카우트 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 리니아는

동생이 곧 어여쁜 아가씨로 성장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관심 영역 역시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여가 시간을

양말을 기우면서 집에 있지 않았다. 교회에서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한 여성위원회

일을 맡고 있었고, 매주 이틀은 사설 도서관에 나가 일했다.

그날 저녁 리니아는 잠자리에 누워 자신이 고향에 돌아와 느낀 실망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집을 비운 4개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커다란 물통에서 물을 한 컵 떠낸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들은

그녀의 들고 남에 상관없이 각자의 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혼란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가족에게 바란 건 단지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바빴다. 아주 복잡했다.

그녀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여름 가족의 곁을 떠날 때처럼 쉽게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 집만큼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녀와 동생들이 같이 사용했던

침실은 변함없이 꽃무늬 벽지에 기다란 두 개의 창문이 나 있었고, 밝고 기운찬

분위기도 변함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발 밑에 얼음장 같은 바닥이 밟히지도 않았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눈길을 걷거나 세숫대야를 놓고 몸을 씻지 않아도 되었다. 학교까지

1마일씩 걸어다니고, 석탄을

삽으로 푸거나 불을 지피고 물을 긷는 일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리웠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자 셀머는 늘 그래왔듯이 리니아에게 가게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왔다.

"손님들이 늘 네 안부를 물어 오곤 한단다. 물론 이 애비를 도와줄 수 있겠지?

오늘은 밤늦도록 일이 많을 테니 폐점 때까지 도와다오."

"하지만, 새로 온 아드리안이 있잖아요."

리니아는 아버지에게 의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아드리안도 물론 일을 해야지. 하지만 그 사람만으로는 일손이 달리니까.

도와줄 수 있겠지, 뚱보야?"

그녀는, 아버지가 가게에서 부르던 애칭으로 자기를 부르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모든 상황이 변했다 해도, 그녀는 아버지와 그 가게를 너무도

사랑했다.

그들이 가게에 도착해 보니, 아드리안이 이미 산뜻한 차림으로 가게 문 앞을

쓸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브란덴베르그 씨!"

그는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브란덴베르그 양."

"잘 잤나, 아드리안. 내가 오늘 딸애에게 가게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네."

"도움이 많이 되겠는걸요. 방학은 잘 보내고 계시겠죠?"

아드리안 미첼은 그녀와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인 양 아주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건넸다. 미소 띤 그의 얼굴은 굉장히 멋있었다.

그는 가게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보내며 상냥스런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훌륭한 매너를 갖추고 있었다. 두 모녀가

가게 문 쪽으로 발길을 향하자 미리 가서 문을 열어 준 뒤 다시 비질을 시작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그들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리니아는 그가 가게 안을

활기 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바닥에 왁스를 묻혀 그녀의 아버지조차 감탄할 정도로 모든 곳을 샅샅이

닦아 냈다. 그 일이 끝나자 가게 안에는 향긋한 왁스 냄새가 진동했다. 그리고

나서야 창문 쪽으로 걸어가 녹색 커튼을 당긴 후 개점 표지판을 걸었다.

첫 번째 손님은,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라드 기름을 사러 온 사내아이였다.

아드리안은 그 아이가 떠나기 전, 그애의 가방에 무언가를 넣어 주며 말했다.

"이거 엄마께 갖다 드려라. 알았지, 로니?"

"꼬마에게 준 게 뭐예요?"

리니아는 아버지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달걀 분리기다.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에 손님에게 드리는 우리의 작은 성의

표시지. 아드리안의 아이디어란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에 비쳐진 아드리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드리안이

아버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에게 질투를 느꼈던 게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왜 아버지가 아드리안을 그렇게도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고객들도

그를 좋아했다. 그는 가게를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가족들의 안부까지도 일일이 물어 보곤 했다.

아드리안에게는 분명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었다. 리니아는 처음에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경계하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그가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4시에 가게 문을 닫은 뒤, 셀머는 아드리안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햄을 주었다.

아드리안 역시 뒷방에 숨겨 둔 길고 커다란 상자를 살며시 꺼내 놓았다. 그는

셀머와 정겨운 악수를 나눈 뒤, 멋진 웃음을 지으며 리니아에 게로 돌아섰다.

"브란덴베르그 양, 당신이 집에 있는 동안 또 만나게 되길 바랍니다. 솔직히,

사장님만 좋다고 하신다면 언제고 한 번 댁으로 찾아 뵙고 싶습니다."

그는 동의를 얻으려는 듯 셀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니아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녀의 아버지가 먼저 대답하고 나섰다.

"언제든지, 아드리안, 내 아내를 소개받을 수 있는 기회도 허락하겠네. 아내에게

훌륭한 저녁 식사를 부탁해 놓아야겠는걸."

"고맙습니다, 사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니아 쪽으로 돌아서며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다음 주중에 하루를 골라 찾아 뵙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이후가 좋을

것 같으니까요."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는 매우 단도직입적이고 늘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신의

희망을 말한 뒤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리니아는 창문에 쳐진 차양을 흔들어 대며 멍하게 서 있었다.

"그래,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어떤 것 같니?"

그녀의 아버지가 물었다.

그녀는 엉덩이에 손을 얹고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아버지는 내게 거짓말을 하셨어요. 미첼 씨는 아무리 봐도 소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아요."

셀머는 외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씩 웃었다.

"나도 안다."

그가 코트의 단추를 채우며 다시 말했다.

"난 그 사람에 대한 너의 생각을 물었다."

리니아는 아버지에게 짓궂고도 명랑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했다.

"그는 아직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선거 운동을 하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안 그래요, 아버지?"

셀머는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렇지만 아드리안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거야. 난 그가

그 정도의 인물은 되리라 확신한다."

"내가 제대로 봤군요."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리니아는 가게 문을 나선 후 장갑 낀 손으로 아버지의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는 잘생기고 정력적인 사람이에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를 질투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알게 되었죠."

그는 딸아이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 준 뒤 차를 세워 둔 곳으로 앞서 걸어갔다.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뚱보 씨. 아드리안은 네가 처음 말한 대로

소년이 아닐 뿐이야."

집에 도착하자마자 리니아는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더 들어야 했다. '아드리안이

어떤 것 같냐?' 라는 질문을 말이다.

전 가족이 모두 스스로를 중매쟁이로 착각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은 아드리안이 브랜디를 선물한 것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 브랜디는

그녀의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가격이 너무 비싸 함부로 사 쟁이지

못하는 술이었다.

"오, 셀머……."

주디스가 중얼거렸다.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인가 보네요? 아직 대학에 다니느라 힘들 텐데 말예요."

리니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 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하고

싶었다. 그러니 아드리안을 자신에게 끼워 맞추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녀가 테어도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면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비록 그의 외모는 우락부락하지만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울 정도로 여린 면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이해해 줄까? 그의 가장 큰 소원이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성격이 너무나 급하고 괴팍해 가족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가 겨울 동안 초원에서 지내도록 말들을

풀어 놓으며 우울해 했다고 말한다면?

게다가 늘 작업복 차림에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리니아 또래의 아들까지

둔 서른네 살의 문맹 농사꾼이라면…….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똑똑하고 아심 만만하며 인상이 좋은

스물한 살짜리 진취적인 대학생보다 테어도어를 유리한 고지에 서게 하기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리니아는 자신이 없었다. 너무도 두려웠다. 그래서 테어도어 웨스트가드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각자 선물을 풀었다.

리니아는 존의 것을 제일 먼저 골랐다. 발톱을 감춘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고양이 조각이었다, 그의 집 계단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고양이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프란시스에게서는 솜을 넣어 만든 딸기색 벨벳 베개를

선물 받았다. 니사의 선물은 은색 털실로 만든 예쁜 숄이었다. 크리스찬의

것은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한 쌍의 벙어리 장갑이었다. 밍크로

만든 것이었는데, 무척 따뜻해 보였고 느낌도 좋았다. 캐리와 땅딸이는 그

장갑을 볼에 대고 문지르고 쓰다듬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한 짝을 집어 목에 살짝 문질러 보더니 기뻐 소리쳤다.

"어머 정말 좋은 선물이구나."

주디스가 벙어리 장갑을 건네며 말했다.

"크리스찬이 몇 살이랬지?"

리니아는 그 질문의 숨은 뜻을 눈치채고 불편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열일곱 살이에요."

셀머와 주디스 브란덴베르그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열일곱 살짜리 소년이 선물했다면, 정말로 정성이 듬뿍 담긴 거라고 해야겠구나."

주디스가 덧붙였다.

리니아는 어머니가 잘못된 인상을 갖지 않기를 바라면서 정면으로 시선을

맞받았다.

"크리스찬이 개울 바닥에 덫을 놓았어요. 그렇게 해서 밍크를 잡는 거죠."

"매우 재치 있구나."

주디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선물이 하나 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건 누가 준 거니?"

"테어도어."

그녀는 그 선물을 마지막에 풀기 위해 일부러 남겨 두었었다. 갈색 종이에

잘 포장된 묵직한 꾸러미였다.

"오, 그러니? 크리스찬의 아버지 말이구나."

리니아는 포장을 뜯으며 산타클로스로 분장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갈색 눈동자와 하얀 턱수염 위에 장밋빛으로 빛나던 뺨, 그리고 그 뺨에 입을

맞추던 기억…….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놔두세요. 내가 뜯을 거예요."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대평원 위의 낡은 집이 너무도

그리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의 선물은 갈색 고급 커버에 금박으로 글씨가 박힌 테니슨 시집이었다.

그는 책의 면지 윗부분에 정성껏 그의 마음을 수놓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1917

리니아 브란덴베르그에게 테어도어 웨스트가드가.

언젠가 나도 당신처럼 이 책을 모두 읽게 될 것이오!

리니아는 가족들에게 그 예쁜 책을 보여 주었다.

"난 테어도어에게 읽고 쓰는 걸 가르치고 있어요. 그는 내 이름 쓰는 걸

배운 적이 없는데, 아마 크리스찬이 가르쳐 준 모양이에요."

주디스는 그 책을 손에 들고 표지에 적힌 금박 글씨를 읽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니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굉장하구나, 얘야."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주디스는 리니아가 식사 도중 자주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접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리니아는 집에 돌아온 이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자주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늦게, 주디스는 남편에게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리니아가 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변했다구?"

셀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애가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의기소침한 것 같기도 하고……. 예전의

그애는 기운차고 활달했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주디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애는 더욱 성숙해졌소, 주디스. 엄마와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거요."

그는 아내의 턱을 들어 올린 뒤 콧등에 살짝 키스했다.

"그애는 더 이상 우리들만의 딸이 아니란 점을 알아야 하오."

"아뇨,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주디스는 돌아서서 잠자리에 들기 위해 가운을 벗었다.

"그애가……. 가게에서 별얘기 안 해요?"

"무엇에 관한 얘기 말이오?"

"무엇에 대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 대해서 얘길 꺼낸 적이 없나요?"

"그게 무슨 말이오?"

셀머가 인상을 찡그리자 눈썹이 양옆으로 치켜 올라갔다.

"의심스런 데가 있어요. 크리스찬 쪽인지, 아니면 그의 아버지 쪽인지……."

"그의 아버지라니!"

셔츠의 단추를 풀던 셀머의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글쎄, 리니아가 그 사람이 준 선물이라며 책을 펼쳤을 때, 그애 표정을

봤어요?"

그녀의 눈은 불안한 빛을 담고 있었다.

"주디스, 틀림없이 당신이 잘못 본 걸 거요."

"나도 그러길 바라요. 그 남자는 마흔 살이 가까워 올 나이일 테니까요!"

갑자기 셀머가 눈에 띄게 흥분했다.

"그애가 그 남자에 대해 뭐라고 했소?"

"아뇨. 그애는 내게 아무 이야기도 꺼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 남자는

리니아 또래의 아들도 있다구요. 그리고, 리니아가 그 남자의 집에 살고 있다고

했죠?"

셀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아내를 감싸안았다.

"아마, 우리 추측이 틀릴 거요. 리니아는 똑똑하고 상식을 갖춘 아이요.

그 아인 지금껏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잖소.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소. 아드리안 미첼이 이번주쯤 우리 집을 방문해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구하더군."

"그래요?"

주디스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정말이죠?"

"우리 딸아이의 저녁 식사 손님을 위해 수프에 당근을 좀더 넣는 건 어떨까?"

"오, 셀머, 정말이죠?"

그녀는 남편의 손을 꼭 잡으며 크리스마스 양초처럼 눈을 빛냈다

"아드리안과 리니아가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그애들은 아마

완벽히 어울리는 짝이 될 거예요."

"하지만, 너무 눈에 띄게 밀어붙이지 않도록 조심해요.

셀던이 점잖게 아내를 꾸짖었다.

"당신도 우리 딸이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외곬로 빠져드는지

알고 있잖소. 그래도 리니아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 번 정도 아드리안을

더 오게 하는 것은 괜찮겠지 그리고 나서 올 여름에 그애가 집에 돌아오면……

누가 알겠어?"

주디스는 한 손을 허리에 대고, 다른 한 손은 아랫입술에 댄 채 방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보자, 뭔가 근사한 것을 준비해야지. 속을 채운 폭찹이 어떨까? 그리고

맛있는 쿠키도 구워야지. 그리고 가장 좋은 그릇도 내놓고, 그리고……."

주디스는 셀머가 잠이 들 때까지도 식사 준비에 대한 생각들로 뒤척였다.

아드리안은 약속대로 수요일에 방문했다. 그는 시려 깊게도 저녁 식사 후

커피 시간에 마실 수 있도록 페퍼민트를 한 병 가져왔다.

그는 밤 10시가 넘도록 응접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정중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주디스는 리니아에게 아드리안을 문까지 바래다 주도록 시켰다.

그는 목요일 7시쯤 다시 와서 30분 정도 머무르다가 리니아에게 산책을 나가자고

제안했다.

"오, 나는……."

리나아가 머뭇거렸다.

"좋은 생각이네."

주디스가 끼어들었다.

"세상에, 리니아. 네가 집에 돌아와서 한 일이라고는 우리 같은 노인네들을

상대해 준 것밖에는 없잖니."

"리니아?"

아드리안이 다시 조용히 물었다. 리니아는 야박하게 거절해서 굳이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시내 공원을 거닐면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아드리안은 생각보다도 훨씬 유쾌한 젊은이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쌓여 있던 눈들이 얼어붙어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그녀가 눈길에 미끄러지자 아드리안은 얼른 그녀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그리고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아드리안은 느닷없이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그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제발, 아드리안……. 이러지 말아요."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지……."

아드리안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잡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매력적인 남자예요, 아드리안. 나도 다,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하지만?"

"알라모에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

그들은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고개 숙인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아드리안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심각한 사이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럼, 특별한 약속이라도……?"

그녀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어렵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쩠든 좋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동안 죽 혼자서 지낼

필요는 없잖아요? 연말에 친구들끼리 간단한 파티가 있어요. 함께 가 주실

거죠?"

아드리안은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리니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신에게 이미 말했……."

"그래요, 알라모에는 누군가 특별한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나도 그 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요.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당신이 나와 동행해 주길 바라고

있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구요. 그리고

당신은 그날 다른 약속도 없잖아요, 그렇죠?"

그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렇죠?"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세상에, 저렇게 예의 바르고

멋진 남자가 있다니……."

"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또래 친구들끼리 모이는 편안한 자리예요. 함께 스케이트를 탄 다음에

누군가의 집에 가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정도죠. 늦어도 1시까지는

집에 데려다 줄게요.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 본지도 왜나 오래되지

않았던가! 만약 그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그녀는 송년의 밤을 침대에 누워

외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

아드리안의 제의를 거절한 것을 후회하면서. 그녀는 그의 성실한 눈매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정에 키스를 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죠?"

"약속할게요."

"얼음판 위에서 넘어져도 웃지 않을 거구요?"

"약속해요."

"그렇다면 좋아요."

그녀는 그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하룻밤 차를 빌렸다.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모임에 나가면서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다. 농장에서 쓸쓸한

연말을 맞고 있을 테어도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갈수록 그녀는

테어도어의 존재를 잊고 즐거운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생각보다 즐거운 파티였다. 모두들 부담 없이 편안하게 대해 주었고, 그녀도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단지 즐거운 놀이에 빨려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드리안은

약속대로 밤늦게까지 여전히 점잖은 신사로 남아 주었다.

아드리안이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되도록이면 빨리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현관까지 함께 걸어와 그녀의 양손을 잡고 어깨를

현관 벽에 기댄 뒤 당황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워요. 그거 알아요?"

그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드리안, 나 정말 들어가 봐야 돼요."

"그리고 당신은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대로예요. 아니, 그 이상이죠.

나는 당신 사진을 본 적이 있었죠. 사장님은 당신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시죠.

하지만 그날, 가게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생각했어요. 저 아가씨야말로

내 여자다, 라고 말예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확 잡았다.

"리니아, 이리 와 봐요."

그녀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드리안, 당신 약속했었잖아요."

"나는 자정 종이 울릴 때 키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1시 15분전이에요."

그가 천천히 벽에서 어깨를 떼는 동안, 그녀는 자연이 얼마나 이 남자에게

호의를 베풀었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불공평할 정도로 멋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보다 더 좋은 냄새가 나거나

정중하거나, 매력적이거나, 마음을 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완전히 그에게 매혹되어 있었다.

테어도어에 대한 얘기는 결국 입도 벙긋 못하고 말았다 만약…… 만약에

그녀가 아드리안과 키스하고, 그 키스가 테어도어와 했던 것처럼 파괴적인

것이라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녀의 모든 근심은 사라질 텐데…….

그의 입술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부드럽고 비단결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그녀의 혀는 주저하면서 응답했다. 그가

팔로 강하게 감싸안을때 그녀는 그의 앞에서 자신을 약해지도록 놓아 두었다.

그의 손이 등을 쓰다듬을 때 그녀도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마음이

불꽃으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머릿기름과 그의

어머니가 칼라에 뿌린 세탁풀 냄새를 분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손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슴 옆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빨면서 숨을 몰아 쉬었다.

"리니아, 내 사랑."

그가 속삭였다.

"여름이 빨리 왔으면 좋겠소."

그러나 여름이 되더라도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조금도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이미 일어났어야 했다.

침대에 누운 그녀의 가슴에 죄책감이 일었다. 그녀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람과도 키스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네 명의 남자와 키스해 본

경험이 있었다. 자신이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여자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테어도어는 몸가짐이 나쁜 여자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고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들 각각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명확히 달랐다.

그녀는 매우 능숙하게 접근해 왔던 러스티 보너를 생각하고는 몸서리쳤다.

러스티는 아마도 리오그란데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사생아로 길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쑥맥이었다.

그리고 빌, 그녀는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처럼 화가 나곤 했다. 자신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려 애쓰던 그의 무릎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완벽한 아드리안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키스하려고 할 때

자신의 피에 격렬한 불이 붙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 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이성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테어도어를

사랑했다. 그의 키스만이 그녀를 흥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많은 나이와 낮은 교육 수준, 그리고 전에 결혼한 적이 있고 리니아 또래의

아들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존경받을 만하고, 선량하다는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어올랐고, 피는 뜨겁게 달구어졌다.

리니아가 짐을 꾸리는데, 어머니가 침실 문가로 와서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 섰다 동생들이 스케이트를 타러 갔기 때문에 집 안은 조용했다.

"리니아, 나는 네가 솔직히 털어놓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하지만

내가 묻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같구나."

리니아는 새로 빤 속옷을 한 무더기 들고 돌아섰다.

"뭘 말하라는 거죠?"

"네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잠시 동안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부정해 버릴까 하는 생각에 침대가에 주저앉아

무릎에 놓인 옷가지들을 침울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엄마, 난 지금 사랑에 빠져 있어요."

그녀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사랑에 빠져?"

주디스는 정색을 하며 방을 가로질러 리니아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딸의 손을 잡았다.

"아드리안과?"

그렇게 묻는 주디스의 눈은 희망으로 가득 차 반짝거리고있었다.

리니아는 단지 수심에 잠겨 숙인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그러면 크…… 크리스찬과?"

리니아는 또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어머니의

심문하는 듯한 눈을 마주보았다.

"오, 얘야……."

주디스는 심각하게 말했다

"그애의 아버지…… 그 사람은 안 돼."

"그의 이름은 테어도어예요."

주디스는 놀라서 리니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틀림없이…… 30대 중반은 되었을 거야."

"서른네 살이에요."

"그리고 결혼한 적이 있어."

"오래 전 일이에요."

"오 얘야, 바보처럼 굴지 마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나저나 얼마나

진행된 거니?"

"아무것도 진행된 것은 없어요."

리니아는 화가 나 손을 홱 내저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나를 어린애라고 생각해요."

주디스는 가슴을 누르면서 조용히 외쳤다.

"오, 다행이야."

리니아는 빙 돌더니 낙담한 듯이 쿵 하고 침대 위에 앉았다.

"엄마, 너무나 혼란스러워요.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뭘 어떡해? 그를 네 머릿속에서 당장 지워 버려라. 그는 네 아버지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잖니. 네가 해야 할 일은 아드리안 미첼을 계속 만나는 거란다.

내 생각엔 아드리안도 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주디스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드리안이 네게 관심을 보이지?"

"그런 것 같아요."

리니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키스하는 것이 관심의 표현이라면 말예요."

"그가 키스했다고?"

주디스는 즐거운 듯이 되물었다.

"그래요. 꽤 능숙하던 걸요. 나도 그의 키스에 마음을 담아보려고 노력했어요.

진짜예요, 엄마.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주디스는 새로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까지는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리니아. 알겠니?"

"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엄마…… 엄마는 아빠가 단지……. 그래요,

아빠가 방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온몸이 뜨거워지거나 숨이 멎을 것처럼

느낀 적이 있었나요?"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감정이었다. 리니아는 어머니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니아!"

주디스의 눈이 놀라 휘둥그래졌다.

"있었어요?"

주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방에서 나가려는데, 리니아가 어깨에 손을

얹고서 말렸다.

"오, 엄마,"

리니아는 거의 필사적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일어날 거니까요.

아니,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테디가 들어설 때마다, 심지어는 우리가 싸울

때조차도 그런 일은 일어난단 말이에요!"

주디스는 갑작스레 변한 딸아이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가…… 네가 그와 싸운다고?"

"오, 우리는 항상 싸워요."

리니아는 일어나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테디는 나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거의 필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싸움을 걸어 오곤 했죠. 그는 항상 자신이 나에게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극복할 수 없는 장애로 생각하죠. 하지만 난 달라요."

주디스는 당황스러움에서 벗어나 다시 딸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 남자의 말이 맞단다, 리니아. 그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

"그렇지 않아요."

리니아는 고집스럽게 우겼다.

"그에게는 네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다. 그 남자와 넌 절대로 어울릴 수가

없어 리니아, 꿈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거란다. 한때의 감정에 지나치게 휩쓸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들의 곤혹스러운 눈길이 부딪쳤다.

리니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내가 아드리안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길 바라죠? 나도 그럴

수 있기를 정말 바라요, 정말로요. 하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아요. 지난밤에

그가 내게 키스했을 때 난 그걸 확신했어요."

"푸! 너는 항상 그랬다.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지. 하지만 내 말을 좀 들어 봐라……."

주디스는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 그 사람…… 그…… 테어도어? 최소한 그 사람도 양심은 있을 거다.

그는 너보다 아는 것도 많고, 둘 사이에는 너무 큰 세대차가 있어.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살다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단다. 일이 더

진전되기 전에 사태를 똑바로……."

그러나 주디스 브란덴베르그는 조용히 빗물통을 만드는 게 나았을 것이다.

리니아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고집스럽게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엄마.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에요.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이상,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결코 헛되이

낭비할 수 없는 선물임을 그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어요."

그녀는 똑바로 섰다. 그리고 주디스는 딸의 눈동자에서 결연한 의지를 보았다.

잠시 후 리니아의 목소리는 생각에 잠긴 듯 여성스러운 어조로 부드러워졌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도 나를 사랑해요.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귀중한 감정이에요. 만약 내가 또래의 남자에게서

그것을 결코 찾지 못한다면 어떡하시겠어요?"

주디스의 곤혹스러운 눈이 한참 동안 리니아에게 머물렀다. 그녀의 눈에는

미약하지만 막연한 인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그녀의 조그만 딸이 자라고

있었다. 딸아이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주디스는 어떠한 합리적인 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사랑에 대항하여 논쟁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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