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6화 (16/20)

<16>

동지점이 가까워지자, 날씨는 혹독할 정도로 추워졌다.

리니아는 출근길이 더욱 멀어졌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아직 어스름한 새벽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는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입김은 차가운 달빛아래 그대로 얼어붙었고, 그녀의 발 밑에서 부서지는

눈발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들판은 황금빛으로 출렁이던 시절을 완전히 잊은 채 눈에 덮여 있었고, 목화나무도

쓸쓸한 가지만을 앙상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시작 전에 마쳐야 하는 허드렛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가 심해질수록 그 일은 더욱 고역스럽기만 했다. 석탄 창고 주위에

쌓인 눈발이 획하며 불어온 바람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휘말려 올라갔다.

창고 안은 어둡고 싸늘했으며, 그녀가 삽으로 석탄을 담을 때마다 스산한

소리가 가라앉은 공기를 울렸다.

교실도 나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불을 피우기 위해 난로 뚜껑을

열자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이 교실 안에 메아리쳤다. 석탄을 집어넣고

난 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오르는 난롯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 봐야

교실 안은 전혀 따뜻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이 쌓이면, 그녀는 계단과 학교로 들어오는 길목까지 쌓인 눈을 모두 치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가 허드렛일 중 가장 최악으로 생각하며 치를 떠는 것은,

역시 마실 물을 긷는 일이었다. 펌프질을 할 때 두꺼운 벙어리 장갑을 끼긴

했지만, 별로 추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끔씩은 물을

휴게실로 들고 들어오다가 손이 몽땅 젖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작은 손가락들이 몽땅 동상에 걸려 버렸다. 그로 인해 그녀는 그 주 내내 통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그녀의 손가락은 특히 추위에 예민해졌다.

그녀가 '수프'를 떠올린 건, 추위가 아주 혹독할 정도로 심한 어느 날 펌프질을

하면서였다. 아이들이 토끼 요리를 할 수 있다면, 수프도 끓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들은 그녀의 의견에 대찬성이었다. 그래서 금요일은'수프의 날'이 되었다.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집에서 재료를 가져 오거나 요리법을 배워 왔다. 아이들은

수프를 끓이면서 잠시 추위를 잊었고, 협동심을 몸에 익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고의 보너스는 수프 그 자체였다.

혹독한 12월 한 달 동안 금요일마다 수프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달콤한 유혹이었다. 금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주를 너끈히 살아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리고 그 달엔 크리스마스 연극 준비가 일찌감치 시작되었다.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모두들 연극 준비에 열을 올렸다.

연극은 크리스마스 전 금요일에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리니아는 크리스찬에게 말구유를 만들도록 시켰고, 니사에게는 혼자서 옷을

만들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와 주도록 간청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못 쓰게

된 천에 별과 야자나무들, 그리고 사막의 모래 언덕을 색연필로 그려 넣으며

배경막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있는 아이들이 판지로 양과 낙타를 만들어 주면,

나머지 아이들이 그 모양을 천에 대고 그렸다.

프란시스는 하루 종일 웃음을 달고 다녔다. 그애의 소원대로 천사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리니아는 크리스찬을 요셉으로 뽑은 뒤, 나머지 아이들에게 그가

이제 열일곱 살이되어 학교에서 가장 웃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패트리샤 로멘은 길고 검은 머릿결 덕택에 마리아 역을 맡았다.

배경 음악은 아코디언 하나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스킵이 아코디언 연주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애가 할 수 있는 연주라곤 고작 한 손가락으로

'고요한 밤'의 음을 누르는정도였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한다는 통지서를 학생들 편에 각 가정으로 보냈다.

다음날 오후 4시,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리니아 혼자 남아 연극

대본을 손보고 있을 때였다. 교실 문에서 수줍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빨강과 까망의 체크 모자를 쓰고,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존! 안녕하세요!"

그는 모자를 벗은 뒤 휴게실과 교실 중간쯤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리니아 선생님."

그녀는 기쁨에 찬 미소를 지으며 교단 위에서 내려와 재빨리 교실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와,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필요로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존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어 구두코를 바라보았다.

"소문 한 번 빠르네요."

"크리스찬이 내게 얘기해 주었죠."

갑자기 소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어머, 존, 당신이 트리를 가져 오셨군요?"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졌다.

"어머, 정말이네요! 우선, 안으로 들어오세요. 밖은 너무 춥잖아요!"

그녀는 그의 어깨를 떠밀어 안으로 들이민 다음, 나무도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세게 밀어 닫았다.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쳐대며

트리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존의 볼에 격렬한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오, 고마워요, 존. 정말 아름다워요."

존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변했다. 그는 겸연쩍은지 발끝으로 교실 바닥을

문지르며, 벗어 든 모자로 넓적다리를 툭툭쳤다.

"아유, 천만에요. 하지만 이건 내가 최선을 다해 구한 거예요. 한 쪽이 불룩하게

가지가 좀 많긴 하지만, 선생님이 알아서 벽 쪽으로 돌려 놓으면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그녀는 다시 한 번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내일 아이들이 여기에다 장식들을 달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 냄새!"

그녀는 황홀하다는 듯 나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는 요정처럼 예쁘게 생긴 리니아가 나무 주위를 돌며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왜 테디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청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는

매력적인 작은 아내가 되어 테디를 힘있는 남편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테디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얼굴에 코가 있다는 것만큼이나 명백한

사실 아닌가.

"향이 너무 좋아요."

그녀가 꿈결을 헤매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물론이죠. 그 어떤 것도 소나무의 신선한 향보다는 향기롭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신바람 나게 교단 쪽으로 달려갔다.

"어디다 놓을까요, 존? 이쪽? 아니면 저기? 참, 아이들이 별을 그려 놓은

걸 좀 보세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멋지죠?"

존은 배경막에 그려진 그림들을 뜯어보며 곰처럼 둔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예쁘군요. 좋아요. 나무를 저쪽에 옮겨다 놓으면 어떨까요?"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 나무를 어떻게 세워 놓아야 할지……."

존은 교단 쪽에 나무를 가져다 세워 보았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버팀대를 만들 재료를 가지고 왔으니까. 바깥에 있는 짐마차

안에서 꺼내 와야 해요."

그는 망치, 톱, 나무를 가지고 돌아와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일에 몰두해 있는 존을 지켜보며 말했다.

"당신도 웨스트가드 집안 사람이니까 어떤 것이든 다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존이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책상모서리 위에서 톱질을 하다가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대충 많이."

존은 어법이 거의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테어도어는 신발에서 마구까지 못 고치는 게 없어요. 그리고 테디는 정말

똑똑해요, 그렇죠? 하지만 성격이 좀 괴팍한 것 같아요."

존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테디의 성격이 그래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음, 난 그렇게 생각해요."

존이 머리를 긁적인 뒤 모자를 똑바로 고쳐 썼다.

"테디는 내게 결코 화를 내지 않아요. 심지어 내가 아주 느리게 움직일 때조차

그렇죠."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난 정말 꽤나 느리죠."

그가 덧붙였다.

그는 오래도록 톱날을 바라다본 뒤 평소의 속도대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심장이 따뜻하게 젖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테어도어에게서 느끼는 심장의 떨림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껏

존이 자신의 행동이 느리다고 생각하고, 또 그 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두 형제 사이에 흐르는 조용한 사랑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당신은 느리지 않아요, 존. 당신은 단지…… 성급하지 않을 뿐이에요. 그

둘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어요."

존이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는 그의 비쩍

마른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작은 위안의 말에도 그의 얼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선물을 받은 이의 행복한 표정, 바로 그것으로 변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행사 때 오실 거죠, 존?"

"저요? 그럼요. 크리스찬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걸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어…… 테어도어도 오나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테디요? 물론이지요. 테디가 오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고 있어요.

우린 모두 참석할 거예요. 걱정 말아요."

존의 약속대로 모두가 행사에 참석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가족'들까지도 모두 참석했다.

덕분에 교실엔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모두 확 차 버렸고, 하는 수 없이

암송대 위며 휴게실의 모든 여분의 의자들까지 동원시켜 관람객들을 앉히는데

사용해야 했다.

리니아는 조마조마했다.

니사에게서 얻은 두 장의 천이 무대 앞에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그 뒤로는,

천사인 프란시스 웨스트가드가 막이 오르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애는 긴

흰색 의상을 걸치고, 주석으로 만든 후광을 머리 위에 꽂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후광을 두른 천사 프란시스의 금발 머리가 어느새 줄줄 흘러내려져

있었다.

로즈안은 천사 후광을 잃어버리고 울고 서 있었다. 노나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급파되었다. 게다가 말썽꾸러기 소니가 무대

위로 졸랑졸랑 걸어나오더니 막을 올리는 줄에 손을 댔다 순간,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막이 반쯤 올라가 버렸다.

리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순발력 있는 크리스찬이

뛰어나가 소니를 번쩍 들고 무대 밖으로 나온 뒤 막을 원래대로 처리함으로써

사건을 해결했다.

관람석 앞쪽에 놓인 난로 위에는 커피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핫초콜릿도

달콤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그 밤의 공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진행표와 무대를 번갈아 쳐다보며 확인하고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니사와 힐다 쿤스턴은 테이블 위에 음료수와 과자, 땅콩빵 등을 차려 놓으며

다과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댈 교장도 아내와 함께 와 있었다. 리니아의 시야에

테어도어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녀는 펄쩍 뛰어오르고 싶을 만큼 기뻤다.

자, 이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비는 것만 남아있었다. 그건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첫 작품이 테어도어의 눈에 의해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니가 빨간 치마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선생님, 머리 위에 쓰는 수건을 뺐겼어요."

리니아는 벤트에게서 빨간색 머릿수건을 빼앗아 소니의 머리에 야무지게

묶어 주었다. 그런 다음, 핀트의 머리 위에 둘러진 분장용 수건을 단단히 고정시켜

주었다. 리니아는 벤트가 향내 나는 몰약의 잔가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모든 확인이 끝나자 그녀는 벤트를 제자리에 데려다 세웠다.

"쉬 -이 -잇!"

드디어 막이 열렸다.

연극은 대성공이었다.

리니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깍지를 긴 채 무대 뒤에 서서 누군가 자기가

서야 할 위치를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갑자기 울어대는 아이가 생기지는 않을까,

흔들리는 요람이 부서지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또 누군가 무대

뒤에 쳐 놓은 배경막을 건드리거나 밟아 넘어뜨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내내 조바심을 쳤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실수를 하지 않았고, 마지막 박수

갈채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무대 위에서 자리를 지켰다. 무대 앞으로 걸어나가며

리니아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와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행사를

함께 도와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아이들과 저 중에 누가

더 많이 흥분했는지 말하기 곤란할 지경이에요."

그녀는 아직껏 손 깍지를 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며

깍지를 풀고 그녀는 긴장된 동작으로 조그맣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청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댈 교장과 그의 아내를 가리켰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 부부를 오늘 밤 모시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기대하지

못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존을 찾았다.

"존 웨스트가드 씨가 올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준비해 주시고, 또 무대를

세우는 일도 도와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존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빨간 체리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시선은 테어도어가 앉은 자리를 지나 니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니사 웨스트가드 여사께도 감사드립니다. 무대 막으로 쓸 수 있도록

빨간 린넨을 제공해 주셨거든요. 그리고 이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 가지로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모두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시라는 인사를 드려야 될 것 같군요.

전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내일아침 파르고로 떠날 거거든요.

그러니 모레 교회에서 여러분을 뵙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어머니들께서 준비해 주신 다과를 들기 전에 멋진 연극을 보여

준 아이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막이 서서히 내려지는 동안, 리니아는 뒤로 물러서며 아이들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우뢰와 같은 마지막 박수에 응답하기 위해 아이들과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리니아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교실

문가에 커다란 주머니를 어깨에 짊어진 산타클로스가 나타난 것이다. 산타클로스가

발을 뗄 때마다 양다리에 묶어 매단 작은 종이 노래를 불렀다.

"어…… 세상에……."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얗고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굵고 나직한 웃음 소리가 울려 나왔다.

"메에에에리 크리스마스, 여러분! 산타클로스가 커피 냄새를 맡고 이렇게

왔습니다!"

아이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객석에 앉아 있던 한 꼬마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쭈삣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리니아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녀가 산타클로스로 변장한 테어도어를 지켜보는 동안, 그는 종소리를 짤랑거리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즈안과 소니는 두 눈 가득 달빛을 머금은 사람처럼 완전히 산타클로스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리니아가 그 아이들을 팔꿈치로 살짝 찌르며 속삭였다.

"자, 산타 할아버지를 안으로 모셔야지?"

아이들이 수줍게 다가가 산타의 손을 잡고 앞으로 이끄는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앙증맞았다.

토니가 앞서 뛰어왔다.

"제가 산타 할아버지께 앉을 의자를 마련해 드릴게요!"

무대 위로 올라선 산타클로스가 친근한 갈색 눈동자로 리니아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였다.

"산타가 아주 먼길을 달려와서 힘이 좀 드는군요. 하지만 잠시 쉬면, 다시

힘이 솟을 거예요."

그는 고무 풍선처럼 부풀은 배를 지탱하며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 한쪽 허벅지 위에 들고 온 주머니의 입구를 벌렸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그 안으로 집중되었다.

그는 짓궂은 눈빛으로 아이들을 둘러보며, 착한 어린이만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객석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막을 수 없는 유혹에 이끌려

산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빨간 옷의 남자가 자루의 줄을 잡고 끈을 끄르려 할 때였다. 한 목소리가

대담하게 튀어나왔다.

"난 착한 어린이에요, 탄타"

로즈안이었다.

어른들이 모두 터져나올 듯한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동안, 천사 옷을 입고

있던 로즈안은 씩씩하게 그에게로 다가가 배를 쑥 내밀었다.

"네가 착한 어린이라구?"

산타가 과장된 몸짓으로 엉덩이를 들고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아, 됐다. 자, 어디 이 명단에 네가 있나 한 번 볼까?"

그는 기다랗고 하얀 종이를 꺼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척했다. 그러다가 동작을 멈추고 두꺼운 횐 눈썹 아래로 로즈안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로즈안은 아주 침착하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하, 여기 있군. 여기 로즈안이란 이름이 있어."

로즈안은 경쾌하게 지저귀는 새처럼 까르르 웃은 뒤 스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거봐! 하부지가 나를 아자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산타클로스가 로즈안을 무릎 위에 앉히자 그 아이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선물 보따리 안을 살폈다. 모든 사람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로즈안이 말했다.

"나 찾을 수 있어요."

리니아는 테어도어가 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 그래? 그럼, 어디 네가 찾아봐라."

그가 자루를 활짝 열어 보이자 로즈안은 아예 그 안으로 들어가다시피 해

갈색 종이 가방을 꺼냈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구의 것이라고 적혀 있지?"

테어도어가 물었다.

로즈안은 글자를 열심히 들여다본 뒤, 어깨를 으쓱하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글자를 아직 못 읽어요."

"오, 저런, 그럼 산타가 읽어 볼까?"

테어도어가 적혀 있는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프란시스 웨스트가드라고 쓰여 있는데?"

"그럼, 내 사촌 꺼예요."

로즈안이 소리쳤다.

프란시스가 선물을 받기 위해 앞으로 나오는 동안, 로즈안은 다시 선물을

찾기 위해 자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루 속엔 이곳에 모인 모든 아이들을 위해 선물이 하나씩 마련되어 있었다.

학교에 아직 다니지 않는 아이들의 것도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한 사람씩

산타의 무릎 위에 앉아 자신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리니아는 줄곧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장밋빛 사과, 팝콘, 땅콩, 그리고 껌까지, 그 자루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테어도어가 정말로 많은 준비를 했다는 걸 깨달으며 그녀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귀엽고 깜찍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며 눈을 빛내는 산타클로스가

아이들의 이름을 읽기 위해 나름대로 공부를 더 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처럼

훌륭하게 산타클로스의 역할을 해준 테어도어와 그를 따라 재미있게 즐겨 준

아이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선물을 받으러

가면서도 발을 질질 끌기는 했지만, 알렌 세버트도 선물을 받았다.

"리니아 브란덴베르그."

리니아는 자기 이름이 불리워지자 놀라 고개를 쳐들고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횐 눈썹 밑의 친근감 넘치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자, 이리로 올라와서 선물을 받으라고 쓰여 있군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테어도어가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요?"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당황스런 미소를 지었다.

산타클로스는 주위에 선 천진스런 얼굴들을 둘러보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도 이 산타의 무릎에 앉아'착한 일을 했으니

선물을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때요?"

"네!"

모두가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손뼉을 치며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누군가의 손에 손목이 잡혀 있었다. 온갖

방법으로 저항했지만, 그녀는 즐거운 눈빛의 산타 테어도어 앞으로 이끌려

갔다.

"자, 이리로 걸터앉으시죠,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가 무릎을 탁탁 친 뒤, 그녀의 손을 꽉 붙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는 그의 자루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든가 자루를 뒤집어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 그럼……."

테어도어가 그녀를 무릎에 앉힌 채 다리를 흔들며 얼러 대자 종소리가 딸랑딸랑

났다. 그녀는 균형을 잃었고, 그 기회를 놓칠 새라 테어도어가 튼튼한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았다. 리니아 역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말해 봐요, 꼬마 아가씨. 당신도 한 해 동안 착한 일을 했나요?"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녀는 그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태연히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최고로 착한 한 해였지요."

그는 그녀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 사람이 착했어요?"

아이들은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안이 큰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이 우이에게 뜨프를 끄여 줘서요!"

"뜨프?"

그가 되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배를 움켜 쥐고 웃었다. 테어도어의 손은 그녀의 허리 속으로

타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선물을 받아야겠군요. 하지만 우선,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산타의

볼에 키스를 해줘야죠."

그녀는 당황스러워 차라리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반강제로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그의 빳빳한 구레나룻 위에 키스를 하는 척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여주었다.

"언젠가 반드시 갚아 줄 거예요, 테어도어."

그가 직사각형의 꾸러미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눈동자는 흥에 겨워

반짝이고 있었고, 입술은 눈처럼 횐 수염에 대비되어 장밋빛으로 보였다.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끄러운

웅성거림을 방패삼아 속삭였다.

"여기서 끌러 보지 마시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준 뒤 자신도 일어나 빈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문 쪽으로 향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메에리 크리스마스!"

그의 출현으로 인해 그날 밤 행사는 더욱 성공리에 마감할 수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즐겁게 웃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리니아는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다가 문 쪽에 서 있는 댈

교장 부부를 발견했다. 그녀는 서슴없이 다가가 인사를 건넨 뒤 필요한 학교

비품을 구입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때 사라졌던 테어도어가 다시

나타나 리니아 곁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그녀는 말을 멈추고 테어도어를 바라보았다.

교실 안에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들 만큼 그들의 눈맞춤은

뜨거웠다. 테어도어는 어디서 씻고 왔는지 얼굴이 벌겋게 얼어 있었다. 분명

얼음을 깬 차가운 물에 벅벅 문지르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서 옷을 갈아

입었는지 웃옷에는 지푸라기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터였다. 전혀 짐작 조차하지 못했던…….

그는 아이들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아이들의 눈 높이에 자신을

맞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아이가 생겨도 그렇게 잘 어울릴

것이다. 생기기만 한다면 야…….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 후 겸연쩍게 호도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잠시 뒤, 그들은 다시 다과 테이블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어깨에 부딪혀 오는 인기척에 금방 테어도어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서서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약을 올렸다.

"루테피스크 냄새가 나는 걸 보고 산타클로스인 줄 알았어요!"

그녀는 그에게 뜨거운 커피를 한 잔 건네주었다.

"이걸 마시고 몸을 좀 녹이세요."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고맙소, 브란덴베르그 양."

그녀는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뺨에 감사의 키스를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산타클로스에게서

받은 갈색 꾸러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떨어져 있는 동안 얼마나 자신을

그리워해 줄 것인지 궁금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밤새도록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천만에요, 산타클로스 씨."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 쪽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휴게실에서는 크리스찬과 레이먼드가 구석에 숨어 킬킬거리고 있었다. 산타클로스가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에게 선물을 주던 모습을 떠올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실례해요."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다. 패트리샤 로멘 이었다.

두 소년은 서로를 흘끗 쳐다본 뒤, 갑자기 나타난 패트리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녀는 머리에 넓고 빨간 리본을 묶고 있었고, 둥근 칼라가 달린

체크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연극을 하느라 칠했던 화장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 잠시 나와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크리스찬?"

크리스찬이 우물쭈물 하자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으응, 나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핫초콜릿을 마시러 가려던 참이었어."

레이먼드가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제 휴게실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크리스찬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서, 그녀가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네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어서, 크리스찬."

그녀는 등뒤에서 선물을 꺼내 놓았다. 물방울 무늬의 녹색꾸러미가 그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나…… 나한테 주는 거니?"

"그래."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꼭 이유가 있어야만 주는 거니, 뭐."

"그…… 그러니까 이걸 내게 준다고?"

그는 얼떨떨하면서도 수줍은 표정으로 선물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내밀어진

자신의 손가락이 한 해 동안 얼마나 커졌는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우락부락해졌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다가 그녀의 시선과 정면으로 맞부딪치고 말았다. 갑자기

그의 가슴속에 이상야릇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하더니 점차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는 추수감사절 연극을 지도하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그리고 오늘 마리아 연기를 그녀가 얼마나 잘해 냈는지, 또 말구유를 사이에

두고 그의 반대편에 서 있을 때 얼마나 예쁜 모습으로 보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녀는 검고 짙은 속눈썹에 윤기 나는 곱슬머리, 야생 자두처럼 막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는 젖가슴과 깨끗하게 손질된 손톱으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난 선물을 준비 못……."

그는 갑자기 목 안에 무언가가 꽉 들어찬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발정기의 황소개구리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다시금 목을

가다듬어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널 위해 아무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어."

"괜찮아. 내 선물도 그리 대단한 게 아닌걸. 그냥 널 위해하나 만들어 봤어."

"네가 만들었다구?"

그는 꾸러미의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말 고마워."

"여기서 풀어 보면 안 돼.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기다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의 몸 속에서 환희가 터져나왔다.

오, 이럴 수가! 그녀의 입술은 너무도 귀여웠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혀가

인사라도 하듯 살짝 나오자 그의 심장은 쿵쾅거리다 못해 그대로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패트리샤는 오늘 아주 특별해 보였다. 날마다 함께 수업을 받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지금처럼 커다랗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그의 몸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의 심장이 또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용기를 내 그녀

쪽으로 조금 허리를 굽혔다.

패트리샤도 눈썹을 깜박깜박하며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크리스찬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섰다.

"패트리샤, 엄마가 기다리셔!"

그들은 죄 지은 사람들처럼 황급히 떨어졌다.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 열려진

문 앞에 서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야, 너희들 거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상관하지 마, 폴 로멘. 엄마한테 조금 있다가 갈 거라고 말씀이나 잘 드려."

폴은 짓궂은 시선을 천천히 거두며 교실 안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패트리샤는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쿵 소리 나게 굴러 대며 소리쳤다.

"오, 바보 같은 폴 녀석! 자기 일이나 신경쓸 것이지!"

"가 보는 게 좋겠다. 여기는 너무 추워.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구……."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팔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운지

그녀가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겹쳐진 팔 사이에서 도독하게

융기해 올라왔다. 또다시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야 될 것 같다. 그럼, 내일 모레 교회에서 보자. 괜찮겠지?"

"음, 그래."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패트리샤?"

문을 열기 직전에 크리스찬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왜?"

불길에 타오를 듯한 그녀의 눈빛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심호흡을 한 뒤 하루 종일 죽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넌 내가 여태까지 본 마리아 중에서 가장 예뻤어."

그녀는 얼굴 위로 웃음을 하나 가득 피어 올리며 문 안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은 학교 안에 켜져 있던 모든 등잔불을 끄고 문을 잠근 뒤 마차에 올랐다.

테어도어와 존은 찬바람을 맞으며 앞쪽에 앉았고, 크리스찬은 두 여자와 함께

뒤쪽에 앉았다. 그리고 뒤쪽 짐칸에는 행주, 솥단지, 커피잔, 리니아가 학생들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꾸러미들, 그리고 산타클로스의 옷이 엉킨 채 처박혀

있었다.

오늘 밤 테어도어가 몰고 온 마차는, 여름에 쓰던 바퀴를 나무로 된 겨울용

바퀴로 바꾸어 다는 바람에 달릴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요란했다. 또

산타클로스의 발목에 매달았던 종을 투스와 쿠브의 목에 달아 주었기 때문에

달리는 동안 내내 맑은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맑은 공기와 별이 흘뿌려진 밤하늘로 마차 달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퍼져

나갔다. 공기는 살을 에일 듯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워 콧구멍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축제의 여운이 남아 추운

줄도 몰랐다.

리니아는 산타클로스와의 일로 짓궂은 농담을 감수해야만 했고, 테어도어도

멋있는 턱수염에 대한 놀림을 감내해야만 했다. 로즈안의 '뜨프' 얘기가 나왔을

때는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느새 존의 집 앞에 다다랐다.

"내일 아침 읍내 가는 길에 들를 테니 같이 가요, 형."

테어도어는 존이 마차에서 내리자 내일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알았어."

존은 대답과 동시에 모두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표했다.

리니아는 낙담했다. 읍내로 나가는 길에 테어도어와 단둘이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위험에 빠져들지 않으려 미리 방지책을 강구해

놓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 무릎 위에 앉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 학교에서처럼 키스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단둘이만 있게 되면 늘 쓸데없는 배려를 하려 했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더 이상은 절대 다가서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존이 함께 가야 읍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말동무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곳은

겨울철에 사고의 위험이 많기 때문에 혼자서 멀리까지 여행하는 것은 금기

사항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존이 함께 간다는 것에 대해 당연히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기 전에 테어도어와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야말로 크리스마스에 그녀가 바라는 유일한 선물이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자 테어도어는 마차를 뒷문에 가까이 대고, 모두가 마차에서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내일은 아침부터 허드렛일을 해야 할 테고, 전 가족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그리고 존이 옆에 내내 붙어 다닐 테니까…….

테어도어가 마지막 짐을 부엌에 들여놓은 뒤 말들을 돌보기 위해 문 쪽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

그녀는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얻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먼저 주무세요."

리니아는 니사와 크리스찬에게 밤인사를 건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테어도어와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요."

그녀는 테어도어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벌써 마차 위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테어도어, 잠깐만 기다려요."

그가 발을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그는 그녀와 둘만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오늘 밤은 더욱 그랬다.

"당신과 얘기를 좀 나누었으면 좋겠는데요."

그는 부엌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바깥이라 추울 텐데……."

"아침에 학교에서 펌프질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

그때 니사의 방에 불이 켜졌다.

"그럼 , 축사로 가죠."

그가 대답을 하기까지 긴 시간이 흘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가 앞장을 서자 리니아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두 마리의 말도 터벅터벅

걸으며 그들을 뒤따랐다.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은 투명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풍차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하얀 눈밭 위에 드리우고 서 있었고, 축사는 반짝이는 흰 모자를

쓴 채 검은 그림자 속에 묻혀있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깨지자

말들이 짤랑짤랑 방을 소리를 냈다.

"당신은 정말 멋진 산타클로스였어요."

그녀의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번져 갔다.

"고맙소."

"내가 당신 목을 조르고 싶어했던 것도 아세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 만하오."

"왜 내게 미리 말 안 했어요?"

"놀라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망쳐 놓으라구?"

"당신이 매년 산타 노룻을 해왔나요?"

"몇 사람이 번갈아 가며 해왔소. 물론 아이들의 아버지는 제외시키지만…….

애가 아빠를 알아보면 곤란하니까."

리니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참, 선물 보따리를 끄르면서 애들 이름을 아주 잘 읽던데 언제 그렇게 연습했죠?"

"크리스찬이 도와됐소."

"언제요?"

그녀가 놀라서 물었다.

"마구실에서 연습했소."

"아하."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둔 선생으로서 가슴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테어도어는 항상 의외의 행동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곤 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속 공부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죠?"

그는 다만 조용히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그가 마차를 곡물 창고 뒤 차양이

쳐진 지붕 아래로 끌고 갔다. 달빛이 끊기면서 갑자기 깜깜해졌다. 그가 말들을

잠시 세워 놓고 마차에 덮개를 펴 덮는 동안, 리니아도 도왔다.

"로즈안이 당신 목소리를 듣고도 자기 삼촌이라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며 놀랐어요."

그가 껄껄 웃었다.

"나도 그랬소. 그애는 정말 귀엽고 똑똑한 아이요!"

"맞아요. 그앤 내가 아주 귀여워하는 아이예요."

"선생님은 편애를 해서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요. 하지만 선생님도 결국은 하나의 인간일 뿐이잖아요."

그가 자세를 바로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들은 말들을 사이에 둔

채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테어도어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감정을 억제하는 일이 점점 힘에

겨워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자신에게 경고를 보냈다.

"존이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져다 주었더군."

"존은 정말 사려 깊은 사람이에요."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다시 말을 몰고 마구간으로 가는 동안, 리니아는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살을 에이는 듯한 밤 공기 속에서조차 그녀의 아몬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이제 그 냄새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형은 당신에게 반해 있소.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세상에, 또 시작이었다. 그는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만 친밀한 빛을 띠면

곧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자신과 존의 관계를

이상하게 얘기하다니……. 그녀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존이요? 세상에,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거죠?"

"존은 지금껏 어떤 선생님에게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선물한 적이 없었소."

"그거야 부탁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테어도어는 냉소적인 웃음을 던지며 명령하듯 말했다.

"문이나 여시오."

그녀가 이중으로 된 마구간의 문을 열자, 그가 말들을 그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테어도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러스티 보너나 빌도 비슷한 예요. 결국 당신이 그들을 불러 모은 거 아니오,

안 그렇소?"

말을 마친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머리 위에 걸려 있던 등잔불에 손을 뻗어

집어 내렸다.

"러스티 보너!"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 그는……. 테어도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마구실로 등불이 사라져 버리자 그녀는 주먹을 허리에 꽃은 채 암흑 속을

성큼성큼 걸었다. 테어도어는 그녀가 무언가를 원할 때마다 항상 반대의 행동을

하며 싸움을 걸어오곤 했다. 리니아는 그의 터무니없는 오해에 기가 막혀 할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난 그들을 꾀어낸 적이 없어요. 마치 내가 난잡한 행동을 한 것처럼 말하는데…….

다,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군요!"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말의 목에 매달렸던 마구들을 풀어 주었다.

"그럼, 파르고 에서는 어땠소? 거기 사람까지도 당신은 이리로 끌어들였잖소?"

그는 다리를 벌리고 딱 버티고 서서 말의 목에서 풀은 종을 손에 움켜 쥐었다.

"파르고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녀가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는 작업대 위에 종을 내팽개치듯 던졌다. 둔탁한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테어도어가 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 박았다.

"그럼 , 로렌스는 누구요?"

그가 말했다.

격렬하던 리니아의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졌다.

"로…… 로렌스?"

그녀의 뺨이 얼룩덜룩한 분홍색으로 변하더니 이윽고 빨간 홍당무처럼 타올랐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로렌스를 어떻게 알죠?"

마침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전에 당신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은 적이 있었소."

그녀는 정말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환상 속의 로렌스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희미했다.

왜 그녀는 로렌스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다시피 하게 되었을까? 창문에, 칠판에,

그녀의 베개에 대고 키스를 했을 때 그 상대는 로렌스가 아닌 테어도어였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어린애로 취급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로렌스는 단지 환상 속의 인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로렌스는……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좋소."

그가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래야죠.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얘기가 될 테니."

그가 천장에 대고 더 큰소리를 질렀다.

"하!"

그녀는 그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에,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가!

"좋아요. 당신이 질투심을 느낀 게 아니라면, 왜 러스티…… 러스티 보너와

빌 얘기를 꺼낸 거죠?"

그는 작업대에 놓인 종을 손으로 후려쳤다.

"내 나이에 질투심 따위를 느끼지는 않소. 그건 당신처럼 불량기 있는 사람들이나

느끼는……."

"불량기가 있다구요?"

그녀가 소리를 꽥 질렀다.

"불량기라니……."

"그렇소!"

그가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계속 그녀를 몰아붙였다.

"내 말이 틀렸소? 당신은 아직도 거기가 축축이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말야!"

그녀는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당신을 증오해요,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병신 머저리 같으니라구. 내 생전에

당신 같은 남자는 처음 봐요."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나……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왔는데…….

그것뿐인데……. 다, 당신이 모든 걸 망쳐 왔어요."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급히 축사에서 나와 버렸다.

혼자 남은 테어도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그녀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따라 들어와 끊임없이 그의 자제심을

시험하는 그녀를 어떻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쫓아 버릴 수 있었겠는가. 비정상적이랄

만큼 모욕적인 상처를 입히며 싸움을 걸어야 했던 그의 심정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 세상에!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저주받은 감정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비참했다.

34세의 테어도어는 지금 변성기 소년처럼 마구실 한 쪽에 앉아 떨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울게 만들려던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어찌된 일인가? 그는 누구인가? 그는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가?

확실한 것은,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그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

정도이다. 그녀는 한여름의 태양처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화를 냈었다.

그가 별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놀라며 화를 낼 리 없지 않은가.

테어도어는 그녀가 잠자리에 든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질 때까지 마구실 안을

서성였다.

그는 그녀가 도시로 돌아가 편안함을 누리며 옛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젊은 숫사슴 같은 놈들과 그를 비교하게될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생활과 이곳에서의 생활도. 마침내 그는 다리를 쭉 뻗고 한숨을 내쉬었다.

34년 동안의 삶이 갑자기 무겁고 뼈저린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보내자. 그리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그는 슬픈

결정을 내렸다.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그것만이 가장 최선의 방법일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존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읍내로 나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양은 눈 위로 반짝거리는 햇살을 반사시켜 사람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지만,

말들은 종을 매달지 않아서 그런지 덜 신나하는 것 같았다. 존도 그들 사이의

긴장감을 감지했는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역에 도착했다.

리니아가 개찰구 앞에서 두 남자와 함께 서 있다가 빗살문이 쳐진 창구 쪽으로

갈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테어도어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갔다 오겠소. 여기서 존 형과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화장실에 가서 새털 모자와 목도리를 다시 매만졌다. 그리고 대기실로

돌아오며 테어도어의 넓은 어깨와 묵직해 보이는 모직 상의를 눈여겨보았다.

그의 옷깃에서는 아직까지도 전날의 살벌한 기운이 배어 나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가 방금 전 던진 한마디 말은 그녀의 비참한 기분을 어느 정도

달래 주었다.

테어도어가 여전히 그녀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티켓을 내밀었다. 존이 그녀의

옷가방을 집어들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긴 나무의자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 앉았다. 그녀의 팔꿈치가 테어도어의 팔에 슬쩍 닿자 그는

황급히 팔을 빼내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리니아 선생님?"

존이 물었다.

그녀는 목 안에 잔뜩 모래를 쑤셔 넣기라도 한 듯 따끔거리며 아파 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아녜요, 존.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그게 다예요.

학교에서 아주 바쁜 한 주를 보낸 탓일 거예요."

다시 그들의 주위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테어도어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아마도 너무 단단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모양이다.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역무원의 안내 방송 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은 플랫폼으로 나갔다.

테어도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선로를 내다보는 동안, 기차는 멀리서 뿌하는

기적을 울리며 이미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리니아는 존의 손에 들린 가방을 받아들려고 손을 뻗치다가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고인 걸 발견했다.

이제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흐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갑자기 존을 얼싸안으며 흐느꼈다.

"괜찮아요. 모두 다 괜찮아요, 존. 정말이에요. 난 분명 당신을 그리워하게

될 거예요. 선물, 고마워요. 당신 것을 제일먼저 풀어 볼게요."

그의 팔이 잠시 동안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뺨에 작별의

키스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존."

"당신도요, 선생님 ."

그는 어느새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테어도어 쪽으로 돌려진 그녀의 표정은 존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테어도어."

그녀는 긴장으로 떨리는, 장갑 긴 한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서…… 선물. 아직 푸…… 풀어 보지 않……."

그러나 그가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천천히 손을 내밀어 오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혼란스런 그의 갈색 눈동자가 슬픔에 잠긴

그녀의 눈동자를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속눈썹 위로 다시 눈물이 젖어들더니 뺨에 은빛 줄기를 남겼다. 그는

그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의 가슴은 하얗게 비워졌고,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며 횐 연기 사이로 슬피 울부짖었다.

테어도어는 침을 삼켰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은 뒤, 뒤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녀의 옷가방이 떨어지고, 모자가 옆으로 비스듬히 돌아갔다.

"테어도어, 무슨 일인지……,"

플랫폼을 가로질러 한꺼번에 두 계단씩 밟고 성큼성큼 내려가는 그에게 이끌려

가느라 그녀는 제대로 숨도 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선로를 따라 건물 끝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천둥이 치고 있었다.

이윽고 수화물 열차와 역사의 벽 사이로 그녀를 데리고 간 그는 한마디 예고도

없이 무턱대고 그녀를 흔들어 댔다.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경적을 울려 댔다.

그는 그녀를 양팔로 감싸안고 힘과 위엄을 갖춘 키스를 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속을 휘저었고, 그의 팔이 그녀의 팔을 아플 정도로 꽉 조였다.

그의 키스가 거칠어졌다. 그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는 뒤통수를 꽉 붙잡아

얼굴을 들어 올린 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그녀의 입 안을 점령했다.

그녀의 눈에서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테어도어의 얼굴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거친 숨을 연신 얼굴 위로 뱉어 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랑하오."

그녀가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말이었건만, 그 소리는 기차가 내뿜는 경적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뭐라구요?"

그녀가 소리질렀다.

"사랑한다구."

그가 목이 쉬도록 비탄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어젯밤에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얘기 안 했어요?"

그들은 기차가 멈추기 위해 칙칙거리는 소음 사이로 대화를 나누어야 했으므로

자연 목소리가 높아졌다.

"두려웠소. 그래서 존과 러스티, 로렌스를 끌어들이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댔던 거요. 파르고에 가면 그를 만날 거요?"

"아니…… 아뇨!"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미안하오, 당신을 울게 해서."

테어도어는 그녀의 볼에 자국을 남긴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오, 아네요. 내가 너무 바보 같았…… 내가 너무…… 테어도어……."

"멈춰어어엇!"

차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어도어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왼쪽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