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5화 (15/20)

<15>

그해는 올머와 헬렌의 집에 모두 모여 추수감사절을 보내기로 했다. 식탁에는

음식이 하도 많이 차려져 있어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리니아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격식에 맞게 차려진 식탁이었다.

하얀색 도자기 그릇에서 하얀색 냅킨에 이르기까지 식탁 위에 사용된 모든

것이 순백색이었다. 단지, 반투명한 젤리와 전채요리, 설탕에 조린 과일들이

접시에 담겨 일렬로 죽 늘어서 있어 하얀 눈 위에 점점이 뿌려진 보석처럼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올머가 간단하게 식전 감사기도를 올렸다. 다음

순간, 헬렌이 급습하듯 다가와 버터 소스를 얹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를

커다란 은제 접시에 푸짐하게 담기 시작했다.

오, 안 돼…….

리니아는 생각했다.

예절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노르웨이인들 같으니라구!

리니아가 칠면조 고기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접시가 손에서 손으로

넘겨졌다.

드디어 그 접시가 앞에 왔을 때, 그녀는 가능한 한 자기를 거치지 않고 곧장

프란시스 쪽으로 넘어가도록 살짝 물러났다.

그러자 프란시스가 소리 쳤다.

"선생님은 루테피스크를 잡숫지 않으실 거예요?"

"으응, 프란시스."

리니아가 속삭였다.

"하지만 루테피스크는 잡수셔 야만 해요. 추수감사절에 먹는 음식인걸요!"

프란시스의 목소리는 집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매우 컸다.

사람들의 눈길이 곧장 리니아에 게로 꽂혔다.

"난…… 저 음식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미…… 미안하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될까요?"

옆자리에 앉은 클라라가 킥킥거리고 있었고, 건너편에서는 테어도어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다시금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그 빵처럼 생긴 이상한

음식을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그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 테어도어가 자기를 따라하라는 시늉을 해

보이며 그 요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녀는 먹기 전부터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따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가

얼른 음식을 삼킨 후 만면에 웃음을 떤 채 그녀를 향해 윙크를 보냈다. 지난번

키스를 나눈 이후 처음으로 친근감 어린 감정의 교환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갑자기 그 이상하게 생긴 음식이 아주 부드러운 맛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루테피스크를 다 먹고 나자 칠면조와 드레싱이 나왔다. 그리고 하얀 색깔의

감자칩, 조개 모양을 낸 옥수수, 복숭아가든 크림, 그리고 맛있는 사과와 호두로

만든 샐러드가 함께 나왔다.

식사 시간 내내, 리니아는 테어도어의 시선이 계속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 쪽에서 먼저 시선을 던질라치면 그는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려 버리곤 했다.

식사가 끝나고 남자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는 동안,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접시 닦는 일을 거들었다.

접시 닦는 일이 끝나자 리니아는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존은 흔들의자에서 졸고 있었고,

트리그 역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고있었다. 여자들이 접시를 다시 정리하느라

내는 부산스런 소리를 제외하고는 집 안 전체가 아주 조용했다.

로스가 소파에 길게 누워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잠든 모습도 보였다.

그 옆에는 테어도어가 누워 책꽂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리니아는 잠든 테어도어의 모습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그의 정장용 상의와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고, 셔츠의 소매 단추도

풀어져 있었다. 그는 입술을 약간 벌린 채 편안한 표정으로 가지런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그의 잠든 표정은 너무도 조용하고 창백해 차라리 상처받기

쉬운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방에서 베개를 들고 나와 그의 곁에 가 앉았다. 테어도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하품을 해대며 그녀를 맞이했다. 잠시 뒤 그에게서 가벼운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을 깨우려던 건 아니었어요."

리니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냥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자고 있지 않았소."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 것 같더군요."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랬소?"

그녀가 베개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최근에 당신은 내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어요."

"당신 역시 내게 말을 많이 걸지 않았잖소."

"알아요."

그녀는 베개에 턱을 괴고 앉아 검게 탄 그의 팔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편안하게 누운 상태로 눈만 살짝 떠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화가 나 있소?"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테어도어는 상체를 일으켜 얼굴을 그녀 쪽으로

들이밀었다.

"자, 대답해 봐요.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거요?"

뺨이 불그스레해지더니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화나 있는 건 없어요."

그들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동안, 남자들의 코고는 소리만이 고요한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간신히 들릴락 말락하게

말했다.

"좋소."

그가 다시 아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이 어제 학교에서 신나는 향연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었소."

"물론 당신은 고소해 하고 있겠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 아녜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내가 고소해 한다고?"

"토끼 요리에 대해서 말예요."

그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토끼 요리에 대해 내가 뭘 고소해 한다는 거요?"

"오늘도 음식을 가지고 날 놀렸잖아요. 당신의 특별한 취미에 대해 감사의

뜻을 보내는 바예요. 엄청 맛있더군요."

그는 낄낄댔다.

"아까 식사할 때 당신 표정을 보니, 아주 맛있어 하는 것 같지는 않던걸,

그렇지 않소?"

"헬렌의 요리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단지 내 입맛과 맞지 않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행동에는 노르웨이인 특유의 잔혹성이 나타나 있었다구요."

테어도어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로스가 몸을

뒤척였고, 저쪽편에서는 존의 코고는 소리가 잠시 멈춰졌다. 아마 잠결에 웃음

소리를 듣고 놀란 모양이었다. 잠시 후 존은 코를 북북 문지르더니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테어도어는 리니아를 보며 즐거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알고 있길 바라오. 난 당신에게 루테피스크를 먹이려던 게 아니었소.

단지 음식 먹는 법을 가르친 것뿐이오."

"노르웨이인들은 장난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 같아요. 음식에서 쌕은 사과

냄새가 나는데도 갑자기 아주 맛있는 것처럼 먹어 대길 기대했단 말인가요?"

그는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동안, 내내 싱글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마시죠, 테어도어. 난 당신이 음식을 가지고

장난질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길 바라진 않아요."

그가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무…… 무슨 뜻이오?"

"그…… 그러니까……."

그녀는 대답을 찾느라 허둥거려야 했다. 하지만 무심코 던진 말이라 적당한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튼, 당신 나라의 국민성이 괴상하다는 건 알고 있나요?"

"노르웨이 인이어서 괴상할 게 뭐가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어떤 나라가

다 똑같다고 생각하오."

"모든 나라가."

"좋소. 당신은 다시 선생 노릇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별로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군."

"그래서가 아니에요. 내 말은……."

"오, 그랬군. 내가 깜박했었소."

그는 리니아가 허둥대는 모습을 자못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모습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테어도어, 내가 지금 당신을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줄 알아요?"

"……."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 머리를 루테피스크 통 속에 쑤셔 넣고 싶어요!"

그녀는 베개를 가슴 가득 끌어안은 뒤 다리를 꼬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 상황에서 만일 그가 그녀를 보고 실실 웃는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바보스런

짓이리라! 그녀는 그의 조롱 때문에 언짢아진 기분을 숨기느라 화석처럼 굳은

얼굴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몇 분쯤 흘렀다.

테어도어의 한숨이 그녀의 눈꺼풀을 위로 걷어올렸다. 그는 좀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몸을 꿈틀거린 뒤 리니아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내 생각엔, 당신이 나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데, 언제부터 수업을 시작하는

거요?"

그녀는 팔을 잡아빼 그의 얼굴 앞에서 휘저었다.

"난 관심없어요."

"교육비는 내겠소."

"교육비를 낸다구요? 웃기지 말아요."

그녀는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 정도의 능력은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런 뜻이 아녜요, 내 말은……."

"아하, 그럼 무슨 뜻이오?"

"난 그냥……내가 하고 싶어서 당신에게 수업을 제안했던 거예요."

그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시 후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입술을 꼭 다물고 있을 때는 마치 열두 살짜리 여자애 같소."

그녀는 아주 담백한 미소를 보낸 뒤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자신의 의견을 계속

피력했다.

"루테피스크를 권하던 때와 다를 바 없어요. 당신은 정말구제 불능이에요."

그가 다시 팔을 뻗치자 그녀는 소파 쪽으로 몸을 빼며 그를 피했다. 그녀가

질겁하는 표정을 짓자 그의 얼굴에서도 농담 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난 글 읽는 방법을 배우고 싶소. 날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리니아?"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입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빛은 그녀가 소녀가 아닌 한 여자로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는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는 짓궂게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약속하오."

"좋아요, 싼값에 가르쳐 드리죠."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마주잡고 아주 힘차게 흔들어 댔다.

"싸게."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가 덧붙였다.

"테어도어!"

그녀가 학생을 나무라듯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좋아요. 이제부터 당신은 내 선생님이오. 그러니까 지금처럼 다른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하게 불러 주시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나를 그냥 리니아라고 불러 달라는

말을 하려고……."

"그렇게 하겠소."

그가 약속했다.

수업은 그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니사는 흔들의자를 난롯가로 끌고가 앉았다. 크리스찬은

리니아와 테어도어가 앉아 있는 식탁에 책을 펼쳤다.

리니아는 풋풋함이 물씬 풍기는 어린아이들의 얼굴이 가득한 교실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손에 펜을 쥐고 앉아 있는 테어도어를 바라보았다.

단지 덩치가 큰 학생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려했지만, 역시 아이들을

가르칠 때와는 다른 주의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 알파벳부터 시작하도록 해요. 당신이 관심을 가지고 기억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만한 자료도 보여 드릴게요."

그녀는 학교에서 쓰는 교재들 중 가장 큰 글자판을 꺼냈다.

몇 분 후, 그녀는 절반 정도 채워져 있는 병을 그린 후, 그 병 테두리에

A자가 나타나도록 했다.

그리고 글자판을 테어도어 쪽으로 돌려 보여 주었다.

"A는 아쿠아비트aquavit의 A예요."

그녀의 시선이 두꺼운 글자판 위를 지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

아주 천천히 미소가 번지더니 소리없는 즐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A는 아쿠아비트."

그가 고분고분 따라했다.

"아주 좋아요. 이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세요."

그녀는 연습장을 꺼내 백지를 펼치더니 그 위에 두 개의 A글자를 써 넣었다.

"자, 여기 보세요. 여기에 당신이 배운 글자 A를 열을 맞춰 계속 써 보세요."

그녀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요구대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A에는 몇 개의 다른 발음들이 있어요. A는 아쿠아비트aquavi떼 쓰일 때는

'아', 애플apple에 쓰일 때는 '애', 그리고 에이스ace로 쓰일 때는 '에이'

발음이 나요. 그리고 얼웨이스alwa 로 쓰일 때는 '어' 발음이 나죠. 각각의

단어들은 모두A로 시작되지만 당신의 귀에는 모두 다른 소리로 들릴 거예요.

또 예를 더 들어 볼까요, A는 암arm, 애니멀animal……. 이제 당신이 예를

하나 들어 봐요."

"어텀 autamn."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대답했다.

"맞았어요. 어텀autamn의 A는 얼웨이스always의 A와 같은 A로 시작되죠."

"어드바이스advice도 있소."

"또 맞았어요."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자, 이제 에이스ace와 같은 발음을 생각해 보세요."

"에이트eight."

리니아는 손을 번쩍 들었다가 식탁 위에 쿵하고 내려놓았다.

"당신이 옳아야만 하겠죠. 하지만 사전은 당신이 틀렸다고 하는군요. 영어를

배울 때는 영어 방식대로 해야 해요. 에이트eights는 I로 시작하는 단어이고,

E는 나중에 배우게 될 거예요. 지금은 단지 A만 기억하도록 하세요."

테어도어가 A를 열심히 쓰고 있는 동안, 리니아는 또다시 글자판 위에 소시지가

B처럼 꼬부라진 모습을 그렸다.

"B는 블러드 소시지blood-sausage예요."

그녀는 그에게 글자판을 보여 주었다.

"블러드 소시지?"

그는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며 새삼 그녀의 재치에 놀랐다.

예전에 창자에 선지를 넣어 만든 소시지를 본 기억을 더듬어 그렸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냄새가 난다는듯 짓궂게 코를 쳐들어 보였다.

"b는 베드bad, 블러키blukky, 버켓buckets 등이 해당돼요! "

수업은 그녀의 재치로 분명히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찬은 아버지가 첫 번째 수업을 받는 걸 지켜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리니아가 물었다.

"B로 시작되는 단어에 뭐가 있지요?"

테어도어는 즉시 '버드윙Bird-wing'이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쓰고 다니던

새 날개 같은 모자를 비꼬았던 것이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꾸짖었다.

"브렛brat이란 말도 B로 시작하죠. 그러니까 테어도어 당신도 자신을 좀

돌아볼 줄 아는 게 좋겠군요."

브렛brat이란 말은 그녀가 화가 날 때면 속으로 외쳐대곤 하던 욕지거리였던

것이다.

니사는 자신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들려온 단어가 귀에 거슬렸는지 안경 너머로

그들을 살폈다. 마침 테어도어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다시 건너편에 앉은

리니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뜨개질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탁 쪽에서는 웃음 소리가 연신 터져나왔고, 그때마다

니사는 이따금 하품을 해가며 흐뭇한 표정으로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리니아가 말 한 마리를 그린 후 클리퍼clippa의 C를 써 넣자 테어도어는

그림이 말보다는 오히려 쥐에 가깝다고 투덜거리더니만 그 옆에 석탄coal을

그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각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찾았다. D는 디퍼dipper,

E는 에그egg, F는 펜스fense, G는 그레인grain, H는 힘널hymnal…….

그들이 알파벳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동안, 크리스찬은 보고 있던 책 위에

연신 고개를 떨궈 가며 방아를 찧어 댔다. 그러자 니사가 뜨개질감을 옆에

치워 놓고 일어나 말했다.

"크리스찬, 그렇게 꾸벅꾸벅 졸지 말고 이쪽으로 오너라."

두 사람은 리니아와 테어도어가 J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도 수업이 끝날 때까지 부엌에 남아 있기로 마음을 굳혔다.

테어도어는 리니아가 과일 항아리 테두리에 글자가 나타나도록 J를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엌 안은 니사의 흔들의자가 흔들리는 소리와 크리스찬이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아주 조용했다. 호롱불이 은은하게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다음은 K였다.

"K는……."

키스Kiss!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리니아의 심장은 거칠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식탁 건너편에 있는 갈색 눈동자와 격돌했다. 그날의

격앙되고 흥분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깊은 갈색 눈동자를

붙잡자 그 역시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그녀의 시선에 뜨겁게 대답했다.

"K는……."

그가 그녀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되풀이했다.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단어를 찾아보세요."

그녀의 상기된 얼굴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K로 시작되는 글자를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은 당신이오."

불빛을 받아 얼굴이 황금빛으로 변한 테어도어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느끼는 미묘한 끌림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어느새 L자로 접어들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앞에 놓인 종이 위로 고개를 잔뜩 숙인 채 열심히 연필을 굴리고

있었다.

"테어도어."

리니아가 조용한 음성으로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자 글자판이 그녀의 코 아래쪽을 가린 채 세워져 있었다.

글자판에는 커다란 접시에 음식이 담겨 있었다.

"루테피스크lutefisk의 L자예요."

그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그녀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 역시 이곳에 와서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의

웃음 소리가 부엌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니사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며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된 순간을

맞이했다. 그의 시선에 이끌려 그녀는 어느새 들고 있던 글자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손등에 턱을 괴고 다른 한 쪽 손의 집게손가락을 뺨에 댄 채 그녀를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메린다도 늘 저런 시선으로 쳐다보았을까?

"너무 늦었어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아…… 그렇군. 나도 이제 끝낼까 생각했었소."

그가 주먹을 쥔 채 기지개를 펴자 그 반동으로 식탁이 흔들거렸다.

"위층으로 올라가야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건너편에 앉아 여전히 팔과

다리를 힘있게 쭉 펴고 있는 건장한 남자가 그녀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기지개를 켠 후 다시 몸을 바로 했다.

그녀는 턱을 괸 채 나직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우린 오늘 굉장히 오랫동안 공부했어요. 당신이 공부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난 공부하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건지 몰랐소."

"언제나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난 필요에 따라서는 요술쟁이로 변할 수도

있죠."

그녀도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리스찬 말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그녀는 미심쩍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오, 크리스찬과 내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그애는 내 아들이오. 그러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도는

학부모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녀는 무심코 연필을 집어들어 글자판 위에 낙서를 했다.

"오……."

그녀의 눈길은 테어도어가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는 모습에

고정되었다.

집 안은 마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주 조용하고

아늑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 가 손톱을 물어뜯는 동작을

반복하며 테어도어를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빨간 직물 셔츠 속의 하얀 속옷이 가슴 언저리에서 살짝 내비치는 차림으로,

양쪽 엄지손가락을 멜빵 고리에 끼운 채 한가롭게 돌리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이마위로 내려와 있었고, 단단한 허벅지 위엔 검은색 바지가

탄탄히 감싸여져 있었다. 짙은 속눈썹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계속해 의자를

흔들거리고 있는 모습이 다시 그녀의 시선 속에 들어왔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자가 삐거덕거리는 소리에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였다.

"크리스찬 말로는, 당신이 지금까지 이곳에 부임해 온 선생님 중에 최고라고

했소. 오늘 밤 당신과 공부를 해보니 나 역시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군."

지금 이곳에서는 뭔가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온몸으로 그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내부에 이는 변화의

조짐이 그녀에게 그를 더욱 좋아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녀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테디 "

의자를 흔들거리던 그의 동작이 일순간에 멈춰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연필로 장난치던 그녀의 손놀림도 멈춰졌다.

"내가 뭔가 말을 잘못했나 보죠?"

순진한 표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모…… 모르겠소."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아래로 떨구어졌다.

"모든 사람이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테어도어라고

부르는 게 더 낫다면……."

그는 조심스럽게 의자를 식탁 아래로 정리해 넣으며 말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무뚝뚝하게 말하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꺽꺽대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식탁 위에 널려있던 연습지들을 그러모았다.

리니아의 가슴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리 주세요. 그건 내가 정리하죠."

그의 손에서 연습지들을 건네 받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가 발로 의자들을 밀어 식탁 정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그녀는 연습지들을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옷깃이 자연스레 스쳤고, 그 스침은 곧장

그들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날 밤 그들의 소망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난롯가로 가서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은

뒤 석탄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2층으로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려오다가 갑자기

멈췄다.

"그럼, 잘 자요, 테어도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주전자를 들어올려 꿀꺽 소리를 내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애정 어린 표정으로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가슴을 꼬옥 눌렀다. 가슴속에서 뭔가 벅차게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그녀 쪽으로 한 걸음만 더 다가선 다면, 그녀의

심장은 당장에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잘 자시오."

테어도어가 애써 입을 뗐다.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기대를 순식간에 실망감이 덮어 버렸다.

"내일 나머지 알파벳 공부를 하면 어떻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처럼 재미있는 수업이 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구상해 볼게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호주머니 속의 손가락들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생각했다.

'제발 올라가시오, 이 아가씨야, 어서……."

"그…… 그럼."

그녀는 무슨 얘긴가를 다시 꺼내려다 포기하는 것 같았다.

"잘 자요."

"잘 자시오."

그녀는 다시 뒤돌아섰고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테어어도어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어깨를 으쓱하며 두 눈을 감았다.

며칠이 흘러갔다. 리니아는 혼자서 키스하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아주 간단했다. 거울을 이용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을 이용하면 되었다.

또 차갑게 언 창문의 유리를 이용하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안이 도시락을 놓고 갔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애가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뭐 하세요?"

리니아는 칠판에 두 개의 입술 자국을 남기다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오, 로즈안!"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세상에, 로즈안……. 놀라서 기절할 뻔했잖니!"

"뭐 하세요?"

로즈안이 다시 물었다.

"칠판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지우느라근……. 그것 뿐이야. 정말로

희생적인 행동이지, 그렇지 않니? 그러니까 너도 칠판에 낙서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할 수 있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밖에 나가 펌프질하는 일이나 젖은 헝겊으로

칠판을 문지르는 일이 아주 고역이거든."

리니아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입술로 칠판을 몽땅 지 우셨다는 말이에요?"

로즈안은 속이 거북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리니아는 뒤로 물러서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전부 다 그렇게 지운 건 아냐. 이제, 네가 잊고 갔던 물건이나 찾아보렴.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로즈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시락을 챙겨 들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리니아는 테어도어에 대한 환상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알파벳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는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날도 역시 저녁 식사 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은 연신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녀는 1학년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방식 그대로, 테어도어에게도 ABC송을

암기시켰다. 알파벳을 '반짝반짝 작은 별'이라는 곡조에 맞춰 부르게 하는

암기 법으로, 왜 효과가 높았다.

A, B, C, D, E, F, Geee‥‥‥

H,1, f, K, L, M, N,0, Pee‥‥‥

0, R,S, and T, U, Vee‥‥‥

Double-ew and X, Y, Zee‥‥‥

"당신은 정말로 내가 그 노래를 부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테어도어가 어쩔 줄을 모르며 투덜댔다.

"물론 그럴 거예요. 이 방법이 글자를 배우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걸요."

이제 그녀는 발을 꼬고 팔짱을 긴 채 수업을 받는 이 덩치 큰 학생의 태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다른 건 곧잘 따라하던 테어도어도 이

ABC송만큼은 쉽게 따라 하려들지 않았다.

"나는 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괜한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왜요?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수업을 재미있게 이끌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난 서른네 살이오. 학교에서 배우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걸 당신도

알잖소."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배우는 데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가 불쾌한 눈길을 그녀에게 던졌다.

어쨌든, 그녀는 딱 한 번 그에게 노래를 따라 부르도록 할 수 있었다. 그것도

크리스찬이 킥킥 소리를 내며 웃어 대는 바람에 중간에 입을 꽉 다물어 버렸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가마구실이나 밖에 나가 일할 때 혼자 ABC송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번은 그가 부엌에서 크리스찬의 신발을 들여다보며 ABC송을 휘파람으로

읖조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뒤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그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뒤에서 조용히 콧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즉각 휘파람 부는 걸

멈추고 리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짓궂은 목소리로 노래를 계속

불렀다.

"당신이 이제 ABC송을 배웠으니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당신이 얼마나 짓궂은 사람인지 알고 있소? 난…… 당신이 날 자꾸 놀리면…….

당신은 서른네 살 짜리 1학년 학생을 놓치게 될 거요!"

수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테어도어의 언어 흡수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무리 많은 분량도 단지 두

번 정도 반복해 가르쳐 주면 모두 암기했다.

게다가 배움에 대한 열정 탓인지 그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타고난 호기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질문이 많은 편이었으며,

일단 배운 것은 하나도 빠짐 없이 조심스레 머릿속에 저장시켰다.

공부를 시작한 지 두 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받아 쓰기는 물론 간단한

문장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제일 먼저 만든 문장은 '그 고양이는 내

것이다'였다. 그런 다음 '그 책은 빨간색이다'와 '그 남자는 키가 크다'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문장을 만들도록

시켰다. '테어도어는 키가 크다'라고.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분간 우리 공부를 중단해야 할 것 같아요. 학교 크리스마스 행사 때문에

준비해야 할 것이 많거든요. 나도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그…… 그렇게 하시오."

그는 실망스런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우리 내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도록 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안색이 하얗게 바래 있었다.

"내년이라고요? 하지만 3주나 남았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면 크리스마스 때 집에 갔다 올 생각이에요."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천천히 다물어졌고,

파르르 떨리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머리 위에 얹었던 두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난 글 읽는 법을 배우기 위해 34년을 기다렸소.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은 공부가 아니라 그녀가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너무도 슬프고 적막하다는 느낌이 그를

엄습해 왔다.

"제가 없는 동안 당신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을게요. 그리고

당신이 새로운 단어를 좀더 배울 수 있도록 크리스찬에게도 미리 일러 놓고

갈 생각이에요. 내가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아마 당신은 날 깜짝 놀래킬 정도로

실력이 많이 늘어 있을 거예요."

그녀는 투덜거리는 테어도어를 다독이며 침착하게 말했다.

"좋소."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얘기가 끝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도

그녀의 일손을 거들었다. 그녀가 의자를 식탁 아래로 집어넣던 손길을 멈춘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테디?"

"음?"

그가 심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난 당신에게 수업료도 내지 않았잖소. 그러니 당신은 내게 얼마든지 도움을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소."

"기차를 타러 읍내까지 가는데 마차를 좀 탈 수 있을까요?"

그녀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 상상되자 크리스마스의 모든 즐거움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날 예정이오?"

"크리스마스 전 토요일에요."

"토요일이라……. 글쎄……."

주위가 침묵 속에 잠겼다.

다시 테어도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집에 간다는 얘길 한 적이 없었잖소."

"난 당신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테어도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신은 가족에 대해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 편이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소.

가족들이 보고 싶은 모양이군요?"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우리 집에서 모두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거요."

"네, 알고 있어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얘기를 하던 날 밤, 심장 스튜를 먹고 있었잖아요. 기억나세요?"

"아, 그랬지."

그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나머지 손가락들로 엉덩이를 끝없이 두들겨 댔다. 지금은 잠잘 시간이었다.

그는 매일 밤 잠잘 시간이 되면 이렇게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곤 했다.

두 사람은 늘 두 시간쯤 기분 좋게 공부를 하고 난 뒤 식탁을 정리하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고 서로의 방을 향해 멀어져 갔었다.

그녀는 집에 가 있는 동안 그가 보고 싶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감정을

적나라하게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녀는 말 끝에 아쉬운 한숨을 달았다.

억지로 웃으려 노력하지만 우울한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주 그의 목소리나 표정 속에서 자신을 향한 애정을 발견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받은 순간, 그는 항상 뒤로 저만큼 물러서 버리곤 했다.

오늘은 왠지 그를 향한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를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할 만큼의 용기가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슬퍼 보이는군요. 뭔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혹시 그가 자신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그는 짤막한 한숨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오늘 밤은 무척 피곤하오. 그것뿐이오. 평상시보다 공부시간이 좀 길었던

탓인 것 같소, "

그녀는 의기 소침한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그가 왜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수줍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생각하는 만큼 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세대 차이인가?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는 그 이유 속에 사로잡혀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뭔가 그를 자극할 만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쳐들어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격렬한 감정을 담았다. 팔 소매 아래로 만져지는 그의 근육에서는

단단하고 강한 힘이 느껴졌다. 얘기를 꺼내는 그녀의 목으로 온몸의 피가 다

모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간단하게 선언했다.

"당신이 그리울 거예요, 테어도어."

그는 입술을 벌려 뭔가 할말을 찾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팔뚝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말해 봐요."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죠?"

"당신도 마찬가지로 두려워하고 있잖소."

그가 다시 투덜거렸다.

"오, 아녜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서 머릿결로, 다시 낯익은

그의 고집스런 갈색 눈동자로 눈길을 보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만약 내가 그 이유를 말한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요?"

테어도어의 갈색 눈동자에 망설임의 빛이 어렸다.

"나도 몰라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단지 내가 당신처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뿐이에요."

그녀는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치잖소. 그러니 나보다는 당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거요. 34에서 18을 빼는 정도의 단순한 계산 말이오."

테어도어는 자신의 팔뚝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손목을 떨쳐 버렸다.

"날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소? 만약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면 이 수업은 여기서 영원히 종지부를 찍는 게 좋겠소.

자, 이제 잠자리에 들러가시오, 리니아."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눈에 고정된 채 고통스러움을 담고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리니아라는 단어가 얼마나 정겨웠는지를

생각하며 떨고 있었다.

"테어도어, 나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당장 가시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제발……."

"하지만 당신은……."

"가시오!"

그가 다시 한 번 그녀가 가야 할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는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테어도어는 그 자리에서 고개만 떨구었을 뿐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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