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수확기가 끝났다는 것은 곧 겨울의 시작을 의미했다.
11월 초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며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리니아도 그녀의 조그만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고는
기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 한밤중에 노스 다코타가 요정 나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 출근길을 절반도 가지 못해서 눈이 결코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성가시다는 생각조차 들기 시작했다.
미라처럼 몸을 옷으로 둘둘 감은 채 출근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그녀는 최선을
다해 민첩하게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몸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신이여, 눈 오는 날 꼭 이렇게 불편한 각반을 착용해야만 하나요? 좀더 편리한
것을 누군가로 하여금 발명하게 하실 수는 없나요?
문제는 각반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속에는 손목에서 발목까지 온몸을
두루 덮을 수 있는 두껍고 긴 내의가 있었고, 그 위에 검은 모직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꼭 끼는 고무줄 밴드가 허벅지 위의 서혜부까지 돌돌
말려 올라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고무로 만든 덧신까지 신고 있어서
그녀는 마치 작은 통이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눈이 학생들의 기분을 들뜨게 했는지 교실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모피 냄새와 아이들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
그리고 휴게실은 엉망진창이었다. 휴게실 의자 밑에는 각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모피 목도리들과 주인을 잃은 벙어리 장갑과 덧신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점심 시간이 끝날 즈음에는 난로 앞에 두르는 낮은 울타리에 벙어리 장갑들이
주르르 걸렸는데, 모피 그을리는 악취가 교실 안에 진동했다.
리니아는 반장을 선임한 뒤, 그로 하여금 어떤 학생도 손수건 없이는 학교에
오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검사를 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옷을 개켜 포개어 놓을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옷장을 구비하는 문제에 대해 댈 교장에게 건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첫눈 때문에 들뜬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여우와 거위 놀이를 했는데, 리니아도 1학년 아이들처럼 들떠 열광적으로
놀이에 참여했다.
저학년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며 추수감사절에 관한 이야기로 재잘재잘
수다꽃을 피웠다. 또 고학년 남자아이들은 겨우내 샛강 저지대를 따라 덫을
놓아 밍크 잡을 궁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첫눈이 내리자 집 안에서 하는 일도 달라졌다. 농장 주변의 일과도 변했다.
모든 일들이 느슨해졌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아침이면 부엌에서 우유 데우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크림 분리시키는 일도
전처럼 집 밖에서 하지 않고, 집 안에서 했다. 축사에서 살던 고양이도 부엌
난로 곁으로 거처를 옮겨왔고, 저녁에는 뜨개질 바늘을 손에 들고 있는 니사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리니아는 두 마리의 고양이들의 지혜를 따라 위풍이 센 자신의 방 대신 부엌에서
시험지를 채점했다.
날씨가 몹시 추워지자 리니아도 학생들처럼 얼굴에 따스한 모피 목도리를
휘감고 출근을 했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두꺼운 벙어리 장갑을
낀 그녀의 손가락은 모두 얼어 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테어도어와 존이 우물가의
조그만 헛간 옆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마당을 가로질러
그들에게 향하며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어요. 그런데 두 분이 지금 무얼 하시는 거예요?"
"소를 잡으려고요."
존이 입으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이곳에서요?"
놀라움을 가득 담은 눈이 두 남자의 눈으로 향했다.
그 헛간은 가로 세로가 6피트 남짓 되는 작은 규모로, 한가운데 쪽문이 나
있었다.
테어도어와 존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따금씩 그 조그만 아가씨는 아주 우스꽝스런 질문을 하곤 했던 것이다.
"아니오."
테어도마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곳은 우리들이 겨우내 먹을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요. 암소를 잡기 전에
얼음을 준비해 두려는 거요."
"아, 네……."
그들은 바닥 아래 장방형의 깊은 구멍 속으로 바쁘게 물을 퍼부어 넣었다.
그녀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오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부엌을 지나다가 속이 홀랑 뒤집힐 것
같은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남자가 식탁 위에서 도살한 소의 몸뚱어리를
톱으로 써는 데 열중하고있었던 것이다. 니사는 그 옆에서 소시지 재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불쾌한 수술대 옆을 지나치면서 리니아는 멀미 비슷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자 테어도어가 되레 씩 웃으며 놀려댔다
"소고기 자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어쩐
일이오?"
그녀는 그 구역질 나는 광경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부엌을
지나쳤다.
그날 저녁, 테어도어와 니사, 그리고 크리스찬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식탁에 앉아 쇠고기 조각을 얇고 길게 잘라내 작은 통 속에 집어넣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리니아가 물었다.
"소고기를 말려 저장하려구요."
니사가 작업에 열중한 채 대답했다.
"대략 2주 정도 고기를 소금에 절여 두었다가 곡식 창고에 매달아 말리면
모든 일이 끝나는 거예요. 아주 간단하죠."
부엌에서는 그날 밤 내내 구수한 향기가 진동했다.
저녁 시간이 되자 리니아도 다른 식구들처럼 맛있는 향기가 군침을 돌게
하는 스튜를 그릇 가득 받아 들고 방금 구워낸 빵 한 조각에 버터를 바른 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스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에 즐거운 대화를 곁들인다면, 정말이지 금상첨화일 텐데…….
얼마나 즐겁고 멋진 식사 시간이 되겠는가!
크리스찬이 니사에게 올해는 추수감사절 날 어디서 저녁식사를 하게 될 것인지
물었다.
"올머와 헬렌의 차례다."
니사가 대답했다.
"에이, 헬렌 백모의 음식 솜씨는 할머니보다 한 수 아래예요. 그냥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는 크리스마스 모임이 있을 거다. 너는 그때 내 음식 솜씨를
맛보면 되지 않겠니?"
존이 참견했다.
"엄마가 만든 다른 음식들도 물론 맛있지만, 이 심장 스튜에는 비할 바가
못 돼요."
"심장 스튜?"
리니아의 아래턱이 갑자기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먹고 있던
스튜가 담긴 그릇으로 집중되었다.
"을해는 여태껏 먹어 본 것 중 가장 큰 소의 심장이에요."
니사가 덧붙였다.
"많이 드세요."
존이 말했다.
갑자기 리니아의 내장이 난폭할 정도로 요동을 쳐 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을 오므린 채 멍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그릇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숟가락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세상에, 지금 입 속에 하나 가득 들은 음식물을 어떡해야 옳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테어도어가 말을 꺼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은 형의 말이 별로 탐탁치 않은 것 같은데……."
모든 사람의 눈길이 리니아에게로 모아졌다. 그녀는 깊은숨을 힘껏 들이마신
뒤 굳은 결의라도 한 듯 용감하게 목 안으로 음식물을 꿀꺽 넘겼다. 심장 스튜가
즉각 뱃속에서 거꾸로 넘어오려고 했다. 커피잔을 움켜 쥐고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삼켜 버렸다. 입 안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녀는 정신없이 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 심장 스튜에 이상한 거라도 들었어요?"
니사가 안경 너머로 리니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저어…… 저어……."
심한 욕지기를 눌러 참느라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지금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그다지 훌륭한 식사 예절이 못 된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테어도어가 웃음을 참으며 장난스럽게 끼어 들었다.
"실…… 실례해요."
리니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한 뒤 허겁지겁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녀의 요란한 몸짓에 식탁 위에서 냅킨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감싼 채 교양 없는 시골뜨기처럼 계단 쪽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2층에서 그녀의 방문이 난폭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탁에 둘러 앉은 나머지 네 사람의 시선이 번갈아가며 맞부딪쳤다.
"저 아가씨는 식탁에서는 왜 까다로운 편인 것 같구나, 그렇지 않니?"
니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어 보인 뒤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우리가 미리 얘기해 주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그 혓바닥 샌드위치에
대해서는 말예요."
테어도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2층에 올라간 리니아는 침대 위를 계속 뒹굴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부엌에서 이루어지던 작업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러다가 구역질이
오르기 시작하면 그 절정에 소의 심장이 떠올랐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다른
생각, 이를 테면 즐겁고 유쾌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차갑고
신선한 바람을 뚫고 자유롭게 내달리던 말들, 깨끗하고 티없이 하얗던 눈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우와 거위 놀이를 하던 모습 등등.
그때였다. 그녀의 방문 밖에서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듯 낮게 깔린 크리스찬의 목소리였다.
"별로."
크리스찬이 문을 열고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다.
"제가 도와드릴 거라도 있나 해서 왔어요."
"심장 스튜가 벌써 소화되어 몸 속으로 퍼졌을까봐 걱정이 돼."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녜요?"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문을 닫아 주면 좋겠어."
크리스찬은 문을 닫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를 바라보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속이 많이 불편하면 박하 짜낸 물을 마시래요.
그러면 좀 괜찮아질 거라고 하셨어요."
"고…… 고마워, 크리스찬."
"그럼, 주무세요."
"안녕,"
그날 밤, 테어도어는 침대에 누워 저녁 식탁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먹고 있던 음식이 소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일그러진 표정이라니……."
그가 그녀에게 매력을 느낄 때는 바로 그처럼 청순해 보일 때였다. 그녀가
낯선 음식 앞에서 주저할 때, 턱밑 바로 아래 목도리를 동동 동여매고 서 있을
때, 주름진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 칼라 위로 자연스럽게 내려뜨렸을 때,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매력에 저항해 싸워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에 저항하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푸른 두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볼 때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녀와 단둘이만 만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그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을 응시하며
바로 위층 방에서 잠들어 있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때로는 그녀가 서른
살, 아니 적어도 스물다섯살 정도만 되었더라도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는 베개를 껴안고 신음하며 복통이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데굴거렸다. 그리고는
마음속에 숨겨 놓은 소망을 깨끗이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억지로 잠을 청했다.
리니아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그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나이 차가 별 문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해가 갈수록 숫돌에 갈린 듯 단단한 근육이 붙어 갔고, 그녀의
눈에는 그런 테어도어의 완숙미가 더욱 보기 좋았다. 젊은 남자의 가냘픈 몸매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의 두 눈가에 생긴 한 쌍의 주름살도 오히려
그의 매력적인 얼굴에 개성미를 추가해 준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없을 때 그를 웃도록 만드는 요령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록 글 읽는 방법은 몰랐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가축들과 농장일, 그리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받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가르침만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그에게서 더욱더 많은 시간을 할애받고 싶었다.
그녀는 그와 키스했던 그날 밤을 회상하며,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고, 사랑의 느낌이 온몸을 샅샅이 쓸어내리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실제 인물의 대용물인 베개에 키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녀의 가슴속엔 테어도어라는 남자를 실제로 소유하고 싶다는
결심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11월의 중순 즈음의 어느 날 저녁, 웨스트가드네 식구들이 예고도 없이 카드
게임을 하자며 몰려 왔다.
조용하던 집 안이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해졌다. 어른들은
부엌에 마련한 몇 개의 식탁 앞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모여 앉고, 아이들은
크리스찬과 니사의 방이나거실로 날쌔게 숨어들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정신없이 놀이에 열중하는 동안, 리니아는 어른들의
카드 게임에 초대되었다.
리니아는 존의 파트너로 낙착되어, 네 명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의 오른쪽에는 로스, 왼쪽에는 클라라가 앉았다.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떤 일에서건 늘적지근한 존이 카드 놀이만큼은 예외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와 존은 적수가 없는 팀을 이루었다. 한 게임
한 게임 승리를 거듭하며 놀라울 정도의 성과를 올렸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올머가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컵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이 앉은자리에 하나씩 놓았다. 리니아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그 액체를 홀짝 들이켰다. 즉시 숨이 막혀 오고 입에 불이 붙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 부채질을 해댔다.
"아쿠아비트예요."
존이 킬킬거리며 그녀에게 그 음료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아…… 아쿠아비트라구요?"
간신히 입 안의 화끈거림을 진정시킨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이 술 안에 뭐가 들어 있는데요?"
"뭐, 약간의 감자와 회향 열매의 씨앗이 들어 있어요. 전혀 몸에 해롭지
않아요. 그렇지, 로스?"
그 두 형제 사이에 짓궂은 미소가 오고갔다. 존이 자기 잔을 기울여 깨끗이
마셔 버렸다. 그렇게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킨 그는 약 10초 가량 굳게 입을
다물었다.
리니아는 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곧 증기가 뿜어져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드디어 그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는 감미롭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밤이 깊어 갈수록 술잔에도 자꾸 술이 다시 채워졌다. 리니아는 그 방에
있는 남자들보다는 훨씬 적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엇비슷하게
취해 갔다. 방안의 분위기는 술기운을 빌어 더욱더 시끌벅적해졌다. 그들은
고함치거나 환호성을 부르며 떠들어 대기도 했고, 때론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웃어대거나 서로에게 애정 어린 욕설을
퍼부어 댔다.
리니아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테디, 망할 자식. 네가 카드를 몰래 숨기는 걸 알고 있어!"
리니아는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테어도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름달처럼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쿠아비트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불그스레했고,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려 돌돌 말려져 있었다. 그가 카드를 긁어 모으며
그녀에게 노골적인 윙크를 보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파트너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자기 방이 이상하게도 약간 기울어져 보였다. 술병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상표의 글자도 비뚤비뚤하게 보였다. 그제 서야 그녀는 자신이 기분 좋을 정도로
술에 취해 있으며 거기모인 아이들 중 3분의 1 이상이 자신의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했으므로
자꾸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거나 모든 사람들이 황금빛으로 아롱져 보였다.
여전히, 그녀와 존은 계속되는 승리에 환호성을 질러 댔다.
갑자기 로스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니사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여기 심장 스튜 좀 가져다 주세요!"
리니아는 잽싸게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그녀만큼은 자신의 고개 드는 동작이
잽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슬로모션 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니사가 눈길도 들지 않은 채 외쳤다.
"왜 그러니? 너,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계획적으로 제거하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로스?"
그는 저녁 식사 때 그녀가 얼굴이 창백해져 도망치듯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는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누구일까? 그녀는 궁금했다. 곧바로 테어도어가 용의자 선상에 떠올랐다.
테어도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킬킬거리고 있었다.
"잘 하는 짓이군요. 이 중 수다쟁이, 허풍선이가 누구죠?"
그녀가 범인을 밝혀 내고자 했다.
"존 형이오."
"테어도어예요."
테어도어와 존이 동시에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 순간 방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심장
스튜에 관한 에피소드는 리니아에게 유쾌한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녀도
사람들을 따라 웃음을 폭발시켰다. 부엌 안이 온통 웃음 바다가 되어 버렸다.
리니아는 그렇게 많이 웃어 본 게 몇 년 만인지 헤아려 보았다. 여기 웨스트가드
집안 사람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정말로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떠들썩한 대가족의 일원이라도 된 듯한 착각 속에 사로잡혔다.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여기저기 큰 대자로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잠간의
휴식으로 힘을 재충전하고 나자 그들은 다시 카드 게임을 하기 위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다녔다.
"심장 스튜 아가씨, 이번 카드 게임 파트너로 나는 어떻겠소."
리니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테어도어가 바로 뒤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이마로 흘러내린 채 곱슬거렸고,
두 눈동자는 짓궂게 반짝거렸다.
그녀는 한 쪽 눈썹을 꿈틀하며 치켜올렸다.
"당신은 스스로 자화 자찬을 하고 싶은가 보죠, 테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꺼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한 손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내가 잘난 체한다, 그 말이오? 솔직히 난 얼굴에 구레나룻이 난 뒤로 게임에서
상대방을 누르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소."
"구레나룻이 난 뒤로 내내 이겨 왔다구요?"
그녀는 조롱하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쯧쯧! 정말 대단한 분이시로군요. 몰라 봬서 죄송했어요! 아마도 내 상대로는
너무나 과분한 분인 것 같군요. 어쨌든 트리그가 이미 내게 파트너를 해달라고
요청을 한 바 있기 때문에 그렇게는 안 되겠어요. 하지만, 자리를 잡으시지요.
우리를 패배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드릴 테니."
그녀는 옆자리의 의자를 빼내 그에게 권했다.
"트리그, 어서 오세요. 우리, 이 허풍쟁이 분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구요!"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리니아는 테어도어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때때로 아쿠아비트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그녀를
곁눈질로 훔쳐보곤 했다.
그리고 팔꿈치를 식탁 위에 기대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카드 패에 골몰하기도
했다
리니아와 트리그는 테어도어와 클라라에게 두 게임을 내주고 네 게임을 따냈다.
테어도어가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앉아 존에게 말을 건넸다.
"다음주에는 내 파트너로 '심장 스튜'아가씨를 점찍어 놨어, 형."
"어림없는 소리."
존이 대꾸했다
"내가 먼저 발견했잖아."
의자를 집어넣고 식탁을 치우느라 어수선한 틈을 타서 테어도어와 리니아는
서로 스치듯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는 그의 귀에 대고 들릴락 말락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요. 존이 나를 먼저 발견하긴 했지요."
그리고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버렸다.
사람들은 카드를 치운 뒤 널따란 참나무 식탁 위에 늦은 저녁 식사를 차렸다.
리니아는 테어도어가 내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식탁에는 진수 성찬이 차려졌다. '패티고만'이라고 불리는 바싹
구운 쿠키, '카멜로스트'로 알려진 맛있는 치즈, 그리고 그들이 '블라드포즈'라고
부르는 약간 수상쩍어 보이는 음식도 있었다.
리니아는 코를 벌름거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 '블라드포즈'는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테어도어가 놀려 대듯 조롱 섞인 말대꾸를 해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하기는커녕 커피만 홀짝거리며 그녀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존이 대신 대답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대답하셔야겠는데요?"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가 방안 가득 퍼져 나갔다. 그러나 테어도어만은 여전히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리니아가 존의 팔을 움켜 잡으며 물었다.
"블러드 소시지예요."
"블러드 소시지라구요!"
소시지에 선지를 넣다니…….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기절초풍할 듯한 표정으로
아랫배를 움켜잡았다. 테어도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음식이 깨끗이 비워지자 어른들은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마차 속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말을 몰아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어른들 몰래 술을 홀짝거리던 크리스찬은 할머니에게 들킬까봐 재빨리 2충으로
사라졌고, 니사는 찬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녀가 산책에서
돌아오자 이번에는 리니아가 산책길에 나섰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테어도어의 태도가 왜 그렇게 갑작스레 변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는 평소처럼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든 아쿠아비트의 효력에 저항하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진창에 현기증까지 나고 윙윙거리는
소리마저 들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엌 식탁 위에는 그녀를 위해 등불이 남아 있었다.
술에 취한 그녀는 등불을 계단 위로 옮겨 가는 것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등불의 심지를 낮춘 상태로 놔두고 2충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계단을 향해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갈 때였다.
어둠침침한 부엌의 후미진 곳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물체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 누구예요? 니사?"
리니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오."
리니아는 숨을 죽이고 다시 살펴보았다.
테어도어였다.
그가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맨발에 속내의
차림이었다. 그의 얼굴 위에 어두운 음영이 드리워져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뻣뻣하게굳은 몸과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을 통해 그가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아, 당신이로군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기대한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것 같은데……. 안그렇소?"
"나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곁을 지나쳐 계단 쪽으로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첫발을 내밀기도 전에 그가 한 팔을 내밀어 그녀의 몸을 빙그르 돌려
버렸다.
"왜 이러는 거예요?"
비좁고 어두운 계단 아래에서 그들은 거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
"갑자기 뭐 하는 짓이에요, 테어도어! 당신이 지금 내 팔을 너무 확 잡아
비틀어서 상처가 날 지경이라구요. 이 팔 놓으세요!"
그러나 그녀의 말과는 정반대로 그는 더욱 세게 그녀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조그만 아가씨, 아쿠아비트를 마셔서 분별력을 잃을 지경까지 갔으면, 정신을
차리고 우유를 고수했어야지. 어쨌든 그런 무모한 행동은 당신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썩 잘 어울리는 것들이긴 하지!"
"내 나이 또래 아이들이라구요! 나는 지금 열여덟 살 먹은 성인이에요. 아시겠어요,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씨? 나를 어린애 취급하다니 정말 유감이로군요!"
그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치켜세웠다.
"열여덟 살이면 다 컸다 그 말이오?"
그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투덜거렸다. 그에게 큰소리를 칠 수 없는
것이 속상했지만, 잠들어 있는 집안 식구들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열여덟 살과는 달라요!"
그는 낮은 목소리로 조롱하듯 비웃었다.
"당신이 집을 떠나와 새 날개 모자를 쓰고 아쿠아비트를 마셔 댄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오, 이 작은 아가씨야. "
다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나를 자꾸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요! 내가 전에 분명 말했을……."
"그래서 오늘 밤 장난삼아 존과 연애를 해볼 생각이었소?"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양팔을 확 잡고는, 그녀가 간신히 발끝으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들어 올렸다.
"형은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오,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을 테지? 그러나 그 말이 결코 형이 감정까지 메마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오. 그런데 오늘 당신이 형을 대한 태도는……. 당신은 대체 그런 행동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질 수 있지? 만에 하나 형이 당신의 허튼소리에 빠져든다면
어떻게 할 셈이오? 형은 여느 남자들과는 다르오. 형은 단지 당신이 놀려 대느라고
한 말에도 감동을 받거나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 미쳤군요! 난 존과 장난삼아 연애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아요!"
너무도 얼토당토 않은 말에 기가 질려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오, 그럼 오늘 당신의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형의 파트너가 되어
팔에 매달리는 따위의 친밀한 행동을 보이는 것도 모자라 형이 먼저 자신을
발견했다며 허튼소리나 해대고……."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테어도어에게 이런 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 그렇지만 난 전혀 다른 뜻은 없었어요."
"당신 생각 따위는 중요치 않소."
그가 몸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그녀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술기운이 다시 온몸을 흔들리게 했다.
"조그만 소녀가 어른들 흉내를 내느라 아쿠아비트 같은 독주를 퍼마셔 대면
반드시 무슨 일이든 생기게 되지."
그녀는 그의 말을 반박하지도, 그렇다고 그의 말을 시인하지도 않았다. 그가
잡고 있는 팔이 저려왔다. 팔에 검푸른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 테어도어, 당신은 정말 눈이 멀었군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몸을 의지한 채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아직 노인이 아니듯 나도 이제 어린 소녀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
사실을 언제쯤 받아들일 거죠?"
그녀의 몸이 갑자기 활활 타오르는 장작으로라도 변한 것일까? 그의 두 손이
불에라도 덴 듯 정신없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그의 속내의를 움켜 잡아야 했다. 그녀의 두 주먹 아래에서 그의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요, 테어도어,"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몸에서 거칠게 떼어 냈다.
"당신은 취했소, 브란덴베르그 선생."
"내가 술에 취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은가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칠게 말했다.
"처음에는 존이고, 이번에는 나라고? 형제끼리의 대결, 말하자면 그런 거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제발……. 아니란 말예요."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바 없는 강력한 긴장 상태에 빠져 팽팽히
맞섰다. 그의 두툼한 손가락이 그녀의 보드라운 손목으로 파고들었다.
어두운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그날 밤은 집요하게 그들의 가슴속을 두근대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리니아는 가냘프게 흐느끼며 그에게로 몸을 내던져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압박했다.
그는 완전히 굳은 자세로 10초 동안이나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를 떼어 내기 위해 그녀의 어깨 위로 양팔을
걸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완고한 태도로 계속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한다면
죽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을 맛보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주 열렬히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떨리고 숨이 가빠 올 때까지 밀치고 매달리는 무언의 전쟁을 거듭했다.
갑자기 그가 굴복해 버렸다. 그의 억센 두 팔이 그녀를 뽑아 내듯 들어 올리자
두 사람의 가슴이 서로 맞닿았다. 내키지 않는 항복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그는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벌려 어린애처럼 악다문 그녀의 입술을 혀로 가볍게 핥았다.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녀의 입술 위에서 그가 속삭였다.
"먼저 키스를 요구했잖소, 꼬마 아가씨. 자, 이제 입을 열고 성인들이 키스하는
법을 받아들여요."
그의 혀는 고집스럽게 되돌아왔고, 그 감촉으로 리니아는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지금의 키스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 러스티와 키스했을 때의 역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용감하게 입을 열었다. 테어도어의 혀가 대담하게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오더니 감칠맛 나는 관능적인 원을 그리며 헤엄쳐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충격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수줍음을 타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했다. 그의 혀에서 아쿠아비트와 커피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육체는 전에 알지 못했던 흥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다.
그래,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들 하는 것이로군! 오, 테디, 테디, 나에게
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줘요.
그녀는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켰고, 그들은 한 몸처럼 서로 뒤얽혔다.
거칠게 뛰는 심장 고동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이 행복한 느낌이 영원히 지속되길 빌었다. 그러나 시작이 갑작스러웠듯이
끝 또한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가 거칠게 그녀를 밀어냈던 것이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얼굴 위로 세차게 퍼부어졌다.
그가 악다문 이빨 사이로 사납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불장난을 하고 있어, 꼬마 아가씨."
그리고 나서 그는 리니아를 혼자 내버려 둔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축축하고 떨리는 자신의 입술을 더듬어 만져 보았다. 당혹스러웠다.
한편,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 친숙한 냉기가 감도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덮고 누웠지만,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기분
좋게 아파 왔다. 머릿속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증상이 결코
아쿠아비트 탓만은 아니리라.
다음날 아침, 리니아는 마음속에 생생한 키스의 기억을 담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마치 키스의 흔적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듯 자신의 입술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기지개를 쭉 켜며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았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항상 미소가 머물도록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미소 떤 얼굴이 항상 그녀에게 머물기를 바랐다. 갑자기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도대체 다른
여자들은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 아침 어떤 표정으로 남자를 대하는 걸까?
아침 식사 때 그들은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던지고는,
두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는 부엌을 가로질러 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숙취 탓인지 머릿속에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의 미소를 대하자 두통이 더욱 중폭되는 느낌이었다.
"잘 잤소?"
그는 기대에 찬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외면하며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리니아는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결국그녀는 오후 늦게
마구실에 있는 그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는 그녀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낡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말 안장을 손질하고 있었다.
"안녕, 테어도어."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오자 그의 심장에 일대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가다듬어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어젯밤과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난다면……. 그는 자신의 자제력을 신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제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의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는 어깨너머로 시선을 힐끗
던진 뒤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겠어요."
그는 무표정한 시선을 다시 한 번 어깨 너머로 던졌다.
"무슨 일 말이오?"
그녀는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그는 지금생판 남을 대하듯
메마른 시선을 던지며 '무슨 일이냐?' 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어 바닥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도 잘 알잖아요."
"아하, 당신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는 거 말이오?"
그는 다시 말 안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머릿속은 아직도 엔진의 스팀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지끈거리고 있소."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그의 딱 벌어진 어깨를 응시했다.
"당신은…… 기억나지 않나 보죠?"
그는 어젯밤의 일을 생생히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전부 다는 기억나지 않지만, 조금은 기억나요. 두 번째 게임 때 당신이
내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했었잖소. 그리고는……."
그녀는 머리끝으로 온몸의 피가 몰리는 느낌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앉아있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맞아요, 그랬죠. 그리고 내가 다음주에 또 존의 파트너가 되어 주기로 했다는
얘길 듣고 당신은 기분 나빠했어요. 그것도 기억하지 못하나요?"
"유감스럽게도 생각나지 않소. 그 아쿠아비트가 너무 독했소. 그래서 오늘
이렇게 톡톡히 그 대가를 치루고 있잖소."
리니아는 잠시 동안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멍청히 서 있었다.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다 한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며 전신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아냐,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완고한 노르웨이 고집불통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왜지?
대답은 명백했다.
그 키스로 인해 그 역시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그 충격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강경한 태도로 발길을 돌려서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는 의자를 돌리고 앉아 이맛살을 찌푸린 채 텅 빈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그는 말 안장을 놓아 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기름때 묻은 헝겊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작업대
가장자리를 버팀대 삼아 잡고 조그만 창문을 통해 눈발 날리는 방목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들을 초원으로 놓아 주던 날, 그녀는 그의 팔에 따스하게 기대
왔었다. 그리고 어젯밤, 그녀는 그의 가슴에 안겨 온몸을 떨며 흥분했었다.
그 느낌들……. 그리고 그녀는 양팔을 그의 목에 감고 매달렸었다. 입술을
대고……. 그를 유혹했었다. 순진 무구한…….
그가 턱에 힘을 주자 두 뺨의 근육이 실룩거렸다.
풋나기 같으니라구! 아직까지 키스하는 요령 하나 터득하지 못한…….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작업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녀가 갑자기 나이를 먹거나 자신이 더 젊어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웨스트가드 식구들은 리니아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지냈다.
그들을 떨어져 있게 한 것은 농작물을 수확하는 시기뿐이었다.
지금은 수확기가 끝난 겨울철이었기에, 그녀는 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모두들 아주 자연스럽게 니사를 찾았고, 그래서 테어도어의 집은 다른 사람들의
집보다 훨씬 더 자주 모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리니아는 그들 개개인의 특성을 점차 파악하게 되었다. 각자가 차지하는
집안 내에서의 역할도.
최고령인 올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자주 조언을 요청했다. 행동이 굼뜬
존은 가장 많은 보호를 받았고, 응석받이로 취급되었다. 테어도어는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을 도맡아 함으로써 듬직한 형제로 대우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동정을 사기도 했다. 그가 외톨이였기 때문이다. 로스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식구들 중에 유머 감각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다. 클라라는 임신중이었다.
유일한 딸인데다 막내라 그런지 굉장히 활달했다. 그녀는 오빠들에게 이제
수치심도 모르는 뻔뻔스런 유부녀로 점 찍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조금도 마음 상해하지 않았다. 리니아는 클라라를
오래 사귈수록 점점 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실, 이곳에선 그녀가 거의
유일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리니아의 마음속에는 테어도어와 키스를 나눈 그날 밤 이후로 갖가지 감정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분노와 서글픔, 호기심과 초조함, 그리고 그를 원하는
마음…….
그녀는 테어도어 역시 자신에게 매료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연히 고개를 쳐들다가 건너편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흠칫하고 뒤로
물러나는 건 항상 테어도어 쪽이었다.
한 번은 식탁에서 각자 의자에 앉으려다가 서로 엉덩이를 부딪치게 되자
그의 얼굴빛이 진홍색으로 물든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단순히 그녀와 한 지붕 아래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화가
치민다는 듯이 행동하는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아예 그녀의 존재를 잊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아리송해졌다. 도대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그의
찡그린 얼굴, 그리고 맥빠지게 무표정한 얼굴 뒤에는 어떤 생각들이 숨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좌절감이 더욱 심해질수록 그녀는 클라라에게로 마음이 기울어 갔다. 하지만
클라라는 테어도어의 여동생이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테어도어와의 일을 클라라에게
털어놓는 것은 부적당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클라라 외에는 아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토요일, 리니아는 큰맘먹고 클라라의 집으로 찾아갔다. 클라라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문 밖까지 나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클라라는 사포로 계란을 문질러 닦는 일을 계속했다. 그녀가 사포로 계란을
문지를 때마다 아늑한 부엌으로 부드럽게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니아는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클라라의 바쁜 손놀림을 바라보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있었다.
"커피 마실래요?"
클라라가 물었다.
"아니, 됐어요, 저어……."
리니아는 무릎 위에 양손을 포개어 놓았다.
"클라라, 사실은 할말이 있어서 왔어요."
"굉장히 긴장되는데……. 분명 심각한 이야기겠죠?"
"아무튼, 내게는 그런 셈이에요."
리니아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흔들흔들 움직였다.
"당신은 지금 의자에서 애꿎은 니스만 벗겨 내고 있군요. 자, 그러지 말고
이제 얘기해 봐요."
클라라가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침착하게 말했다.
"내가 아쿠아비트를 마시고 조금 취했던…… 그날 밤을 기억하죠?"
클라라가 킥킥대며 웃었다.
"물론이죠.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 아직도 그때 일을 얘기하느라
정신없는 아이들도 있는걸요."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아요."
리니아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는걸요."
"당신들이 그곳에 함께 있을 때는 그랬겠죠. 하지만 난 그날 밤 그 이후에도
바보 짓을 했는걸요."
"우리가 떠나온 이후에 말예요?"
클라라는 바구니에서 또다른 계란을 꺼냈다. 계란을 사포로 문질러 대는
소리가 다시 경쾌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리니아는 마치 그 계란이 자신의 목구멍에 걸려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용기를 잃기 전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테어도어에게 키스했어요."
사포를 밀던 클라라의 손길이 멈춰졌다.
"당신이 누구에게 키스를 했다구요?"
클라라의 두 눈이 커졌다.
"우리 오빠 테어도어 말예요?"
"그래요."
클라라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목청이 터질 듯한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 놀라운 일이네."
그녀는 머리 위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오빠가 어떻게 하던가요?"
"내 키스에 답했어요. 그리고 나서 나를 미쳐 버리게끔 했죠."
"왜요?"
리니아는 식탁 위에 양손을 올려 깍지를 끼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테어도어가 말하길, 나는 그의 상대가 되기엔 너무 어리대요."
클라라는 다시 사포질을 시작했다.
"그럼, 당신의 생각은 어떤데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키스라는 걸 해보고 싶은 기분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행동했어요."
클라라는 젊은 아가씨의 찌푸린 이맛살을 주목하며 계속해서 웃음만 터뜨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이 어땠어요?"
리니아의 고개가 번쩍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클라라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 있는 웃음을 웃어 주었고,
리니아는 덕분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별부담 없이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어요. 러스티 보너와 한 것보다는 훨씬 나았어요."
클라라가 다시 짓궂게 물었다.
"러스티 보너와도 키스를 해본 적이 있어요?"
"쿤스턴 씨의 창고에서 댄스 파티가 있던 날 밤에요. 하지만 테어도어가
우리를 곧 발견했고, 금방 끝났어요. 그 일 때문에 러스티가 그 다음날 돌연히
사라져 버린 거예요. 테어도어가 그를 쫓아 버렸거든요."
클라라는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 앉으며 계란 닦는 일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내가 나서야 할 차례인 것 같군요."
"당신 미쳤어요? 내 말은 그런 게……."
"내가 미쳤냐구요?"
클라라가 킬킬거렸다.
"내가 왜 미쳐야 하는 거죠? 테디 오빠는 너무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는
경향이 있어요.전부터 오빠를 쾌활하게 해줄만한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는 당신이 바로 그 적격자 같단 말예요."
리니아는 테어도어의 집안 사람들이 그에 대한 자신의 호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클라라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예측도 하지 못했었다. 클라라의 긍정적인
반응을 대하자 왠지 모를 안도감으로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테어도어가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여전히 냉담한 반응만을 보였다.
트리그의 가족이 오후에 방문차 잠시 들렀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리니아는 테어도어가 아래층 부엌 식탁에 진을 치고 있는 관계로
위층 냉방에서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클라라의 고개가 방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안녕?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지금 막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들어오세요!"
"아휴, 방안이 너무 추워요."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양손을 문질러 댔다.
"당신 몸에 해로울까요?"
리니아는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질 것 같아 보이는 클라라의 배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내 말뜻은, 당신이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어도 괜찮겠느냐구요."
클라라의 두 눈이 리니아의 시선을 좇았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아, 이런, 그래요. 괜찮아요."
그녀는 리니아의 생활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싶은지 방안 구석구석을
기웃거렸다.
"이 방에 올라와 본 지 몇 년도 더 됐어요. 그런데, 정말 내가 당신 일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요?"
리니아는 하던 일을 옆으로 밀쳐 놓고는 뻣뻣하게 곱은 손가락을 무릎 사이에
쑤셔 넣었다.
"신경쓰지 말아요. 시험지 채점할 때 훼방 받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드무니까요."
클라라는 가장 점수가 좋은 시험지를 뽑아 들어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제자리에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다시피 난 당신이 정말 부러워요. 당신의 직업도, 그리고 집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것도……."
"내가 부럽다구요?"
리니아는 늘 행복해 보이기만 하던 클라라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래요. 어떻게 부럽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내 삶은 19세기에 살았던 디킨슨이라는
여류 시인보다 더 고약해요. 이곳에 꽁꽁 묶여 집 밖으로 멀리 나가본 적도
없거든요. 당신의 삶은 독립적이고…… 흥미진진할 것 같아요."
"그래도 두려움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난 당신이 두려워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클라라는 웃었다.
"당신 오빠가 역으로 나를 마중나왔던 날, 내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말해 준 적이 없나요?"
"테디 오빠가?"
클라라는 화장대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가며 킬킬거렸다.
그리고는 리니아의 개인 소지품들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물건 중에 아름답고
투명한 호박색 직사각형 조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돌멩이가 눈에 띄었다.
리니아가 학교 근처에서 주워 온 테어도어의 눈빛을 닮은 그 돌멩이였다. 클라라는
그 돌을 들어 올려 불빛에 비춰 보았다.
"으음, 늙고 고약한 테디가 젊은 아가씨에게 스스로 짐을 나르라고 시키던가요?"
그녀는 그 돌멩이를 제자리에 올려놓으며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게요. 그는 내게 적당한 다른 하숙집을 알아보라고
했어요. 자기 집에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면서요."
리니아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아마 메린다 때문일 거예요."
리니아는 관심이 끌리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한 번도 그 여자 얘기를 꺼낸 적이 없어요. 메린다라는 그 사람, 어떤
성격이었어요?"
클라라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한 쪽 무릎을 굽혀 들어 올린 뒤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메린다는 상반되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닌 여자였어요. 한가지는 우리가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건데, 정력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죠. 그녀는
테디와 결혼할 거라고 말하며 아무 예고도 없이 이곳에 왔었거든요. 또 한
가지는, 그와 정반대 되는 쪽으로 아주 조용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성격이었죠.
그 당시 나는 열한 살밖에 안 된 어린애였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는데,
성인이 되어 아이를 갖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메린다에게 문제가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이 출산 우울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출산 우울증이라구요?"
리니아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끼여들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요?"
리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클라라는 한 손을 불룩하게 나온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은 채, 다른 한 손을
등허리 쪽에 댔다.
"그건 아기를 출산한 다음에 나타나는 증상이에요. 이유도 없이 우울해지거나
눈물을 흘리게 되죠. 그런 증상은 산모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클라라가 설명하듯 차근차근 얘기해 주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구요?"
리니아의 눈길이 다시 클라라의 배 쪽으로 쏠렸다. 그녀의 얼굴 표정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리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거죠? 내 말은…… 아이가 태어난
순간이야말로 엄마의 일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은데 말예요."
클라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옳을 것 같죠, 그렇죠?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굉장히 우울해지면서
스스로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당신 말대로 이 세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