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3화 (13/20)

<13>

다음날 아침, 니사는 평소와 달리 늦잠을 잤다.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였다.

테어도어는 크리스찬을 깨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다가 막 방에서 나오는

리니아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즉각 멈칫했다. 계단 위를 올려다보는 그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리니아 역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순간, 전날 밤 나누었던 키스의 충격이다시금 되살아났고,

두 사람은 말을 잃은 채 서로의 눈동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리니아는 맨발에 목까지 올라오는 잠옷 차림이었다. 그는 그녀가 방금 침대에서

기어나왔음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그는 두꺼운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아직 면도를 하지 않은 탓인지 얼굴이

꺼칠해 보였다. 그녀는 코끝이 얼어 불그스레해진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아침 일찍 축사에 나가 일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좁은 복도 계단에 서서 서로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리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안녕."

그가 뒤이어 속삭이듯 인사를 건넸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크리스찬이 자도록 내버려 두려고 혼자 아침 일을 끝내고 오는 길이오."

이건 바보 같은 짓이다. 서로 태연한 몸짓으로 계단을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일까?

그와의 대화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오늘 아침 기분은 어떻소?"

그가 물었다.

"간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그런지 조금 피곤해요. 당신은 어떠세요?"

"나 역시 잠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괜찮은 것 같소."

테어도어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궁금했다. 그녀도

자기처럼 몇 번이고 키스하던 장면을 되새기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어젯밤엔 늦게서야 집에 돌아왔소. 어머니와 크리스찬은 아직 잠들어 있을

거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깨우는 게 나을 것 같소. 그렇지 않으면 예배 시간에

늦을 테니까,"

그가 계단 위를 향해 움직이자 그녀도 동시에 아래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입고 있던

옷의 실오라기 한 올조차 스치지 않고 지나쳐 갔다.

그녀가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리니아?"

그녀는 재빠른 몸짓으로 뒤로 돌아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그는 어느새 한 손으로 크리스찬의 방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리니아는

불쑥 떠오른 어떤 생각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가 자신의 방문 앞에

서서 방금 전처럼 조용히 이름을 불러 주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네?"

"보너는 갔소."

그러나 보너라는 존재는 벌써 리니아의 뇌리 속에서 흐릿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테어도어라는 남자에 의해 개기 월식 때처럼 완전히 가리워

졌던 것이다.

그녀는 테어도어를 바라보면서 온종일이라도 그냥 그대로서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을 돌려 크리스찬의 방문을 열었고, 곧 사라져 버렸다.

크리스찬의 방안에 들어선 테어도어는 숨을 돌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침대에서 뒹구느라 구깃구깃해진 잠옷 차림에 맨발인 그녀의 모습을 상기해

냈다.

계단 위에서 그녀와 닿지 않고 지나쳐 온다는 것은 보통의 인내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구!

지난밤, 그는 러스티의 팔에 안겨 있는 리니아를 끌어 내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타일렀었다. '나는 지금 그녀의 아버지 역할을 맡고 있는 거다'라고. 그러나

그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그처럼 분노가 들끓어 올랐던 것은 단지 아버지로서의

보호 본능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 웨스트가드. 너는 그녀가 곁에 있을 때마다 젊음의 샘물을 홀짝홀짝

떠 마시는 기분을 느끼는 중년의 수컷에 불과해. 너는 러스티 보너보다 다섯

살이나 더 먹었어. 보너에게 또래 여자들을 사귀라고 충고했었던 사실을 잊었니?

테어도어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침대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크리스찬은 평화스럽게 잠들어 있었다. 그는 양팔을 들어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아주 멋진 털들이 가슴 위에 부슬부슬 흩어져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다음달이면 이 아이는 열일곱 살이 될 것이다.

벌써 열일곱 살이라니……. 그런데 그는 열여덟 살짜리 꼬마 숙녀에게 마음을

휘둘리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열여섯 살이나 연하인

10대 소녀에게 30대 중반의 남자가 어떻게 이런 연정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크리스찬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시인할 줄 아는 꾸밈없는 성격으로

성장해 준 것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테어도어는 문득 잠들어 있는 아들의 머리맡에 앉아 모든 것을 고백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난밤 자신이 그녀와 키스를 했던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곳에 온 지 불과 한 달 남짓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정말이지 우스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크리스찬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테어도어는 그

아이의 감정이 진심임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테어도어는 자기 아들이 간밤에 일어났던 사건을 알게 된 후 발생할지도

모르는 우발적인 사태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보았다.

신이여, 이런 일들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에게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웨스트가드, 그녀에 대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면 결국 넌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리게 되고 말 거야. 그녀는 아다시피 너와는 어울릴 수 없는

여자야.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식탁이 깨끗이 치워지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 웨스트가드였다. 그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빗어

내리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모두들 그의 방문을 일가 친척의 의례적인 문안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식탁 주위에 둘러앉았다. 니사가 커피잔과 대추야자 열매로

만든 케이크를 가져 오며 올머와 헬렌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전쟁과 윌슨 대통령의 징병 제도 등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어디를

가나, 남자가 세 명 이상 모이면 전쟁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사람들은 대부분 연합국의 피해를 제때에 막기 위해서는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테어도어도 마찬가지였다.

빌은, 이미 독일해군이 육군과 함께 러시아를 붕괴의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이 카포레토에서 이탈리아를

산산히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월슨의 분투를 백퍼센트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다 건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남자들의 해박한 지식을 엿본

리니아는 두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놀랐다.

심지어 크리스찬마저 토론에 가세하여 전투기 종류와 공중전에 관한 생동감

넘치는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전쟁에 관련된 화젯거리가 바닥을 드러내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일상의 얘기로

돌아왔다. 첫눈이 언제 내릴 것인지, 마을의 닭을 잡아먹는 여우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그 이야기도 거의 시들해질 무렵, 빌이 선언하듯 말했다.

"마차를 가지고 왔는데……. 리니아, 마차를 타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지

않겠어요?"

잠시 멋쩍은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리니아는 테어도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어도어는 깜짝 놀라며 반대의 표정을 띠었다가 곧 의식적으로 그

표정을 지워 버렸다. 리니아는 그의 표정 변화를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마차를 탄다고요? 음, 글쎄……."

"홀만 다리를 따라 내려갔다 오도록 해요. 샛강을 따라 펼쳐진 경치가 일품이거든요.

특히나 둥근 달이 비출 때면 그 아름다움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예요."

"날씨가 너무 쌀쌀한 것 같은데……."

"내가 가죽으로 만든 무릎덮개를 준비해 왔어요."

그가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다시 테어도어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배 위에 깍지 긴 손가락 마디가 석고처럼 빳빳하게 굳은 채 위로

치켜세워져 있었다.

니사가 말문을 열었다.

"그래, 젊은 사람들끼리 잠깐 나갔다 오도록 해요."

"어때요, 리니아?"

빌이 집요하게 다시 물어 왔다.

더 이상 핑계거리를 찾을 수도,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멋진 생각이네요. 코트를 가지러 올라갔다 올게요."

그들은 차갑고 깨끗한 밤 공기를 가르며 홀만 다리까지 마차를 타고 달렸다.

강 하류 쪽에 솟아 있는 사향쥐 언덕에 다다랐다.

빌과 함께 있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예의 바르고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지, 그녀의

가족들은 어떤지, 이듬해 여름까지 세워 놓은 계획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등등을

물었다.

그녀는 그에게 장래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가 육군에 지원할 것을 고려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늘 다른 세상의 일로만 여기고 있던

전쟁이 그녀 주위로 성큼 다가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가

빌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는 웨스트가드 가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빌이 전쟁터로 나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언급했었어요. 연합군에 가담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 말예요.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예요. 나도 내

몫을 해내고 싶어요."

이곳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루스벨트의 말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농부잖아요."

"밀을 수확할 남자들은 나 말고도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한 명이라도 더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죠."

리니아는, 빌이 참호 속에서 총검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갑자기 심각해진 그녀는 살며시 그의 팔짱을 꼈다.

그는 즐거운 듯 흔쾌하게 웃었다.

"허허, 나는 아직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어요, 리니아. 내 친구들은 아직

내 생각이 어떤지조차 알지 못하는걸요."

"당신이 영원히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 누구 하나라도 다치길 원치 않아요."

한 시간이 채 못 되어서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마찻 길에 올랐다.

집 앞에서 마차가 멈춰 서자 빌이 장갑 긴 손으로 리니아의 손을 감싸잡았다.

"다음주 토요일 밤에 또 댄스 파티가 있을 거예요. 나와 함께 가 줄 수 있겠어요?"

"나는……."

그녀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새 빌과 테어도어의 외모를 비교해보고 있었다. 빌의

들창코와 테어도어의 매부리코, 빌의 금발머리와 테어도어의 갈색 머리칼,

빌의 선명한 녹색 눈동자와 테어도어의 갈색 눈동자……."

그녀는 테어도어를 만난 이후로 다른 누구도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었다.

테어도어야 말로 그녀가 함께 춤추러 가고 싶은 유일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같이 갈 거죠, 리니아?"

그녀는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설득력 있는 핑계를 둘러대서 빌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을까?

한편으로, 그녀는 빌과 함께 댄스장에 간다면 테어도어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빌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듯 천천히 걸어서 그녀를 뒷문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다. 한 쌍의 젊은

남녀는 하늘 위로 올라갔다 내려와도 충분할 만큼 오랜 시간을 꾸물거렸다.

"안녕, 잘 자요, 리니아."

"안녕, 잘 가요, 빌,"

"토요일 밤에 만나요."

"그래요. 산책, 즐거웠어요."

그가 떠나고 나자 그녀는 빌의 키스를 테어도어의 그것과 비교해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 없고 시무룩한 남자의 키스가 빌처럼 젊고 매력적인 남자의

키스보다 더욱더 그녀를 흥분시켰다는 사실은 어딘가 좀 불공평한 것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엌 식탁 위에서 등잔불이 어슴푸레 빛을 발하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전신으로 피로감이 몰려들며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끌려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녀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빌은 정말 전쟁터로 떠나 버릴까? 다른 젊은 남자들도?

그녀는 멍하니 식탁 주위를 배회하다가 테어도어의 의자 등받이 위에 손을

얹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상황이

현실로 닥쳐올지라도 테어도어는 나이가 많아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 멋진 마차 산책이었소?"

어둠 속에서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몸 속에서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팔짱을 헐겁게 낀 채 거실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위아래가 붙은 속옷을 입은 위에 멜빵이 달린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치 사과 살이 껍질 속을 채우듯 속옷을 맨살로 꽉 채워 입고 있어서 그의

전신이 터질 듯 부풀어 보였다.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소매 아래로 검은 털이

숭숭 나있는 거칠고 근육질의 전박이 드러나 보였다. 또한 목 부위에 있는

단추들이 열려 있어 검고 무성한 가슴 털도 들여다보였다. 그는 빌보다 훨씬

더 야성미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래요."

그녀는 꼿꼿이 서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질투심을 애써 떨쳐낸 뒤 침묵을 지켰다.

등불 아래 비치는 그녀의 피부는 살구빛이 감돌았다. 그녀의 입술은 살짝

갈라져 있었고, 두 눈은 항의하듯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의자를 어루만진 적이 없다는 듯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아가씨는 무의식중에 사람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차로 샛강을 따라 내려갔어요."

그는 그녀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밖에 나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전신이 뒤틀릴 정도로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태연을 가장한

채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아무 관심 없는 듯 행동했다.

"그곳은 밤 경치가 아름답소."

고집불통, 노르웨이 촌놈!

리니아는 그의 태평스런 태도에 약이 바짝 올랐다.

"그는 토요일 밤 댄스 파티에 나를 초대했어요."

"아, 그래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소?"

"그러겠다고 대답했어요."

테어도어는 한참 동안이나 꼼짝도 않은 채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빌은 젊었고, 따라서 그럴 만한 권리를 가졌다. 그렇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초대에 응한 리니아의 태도는 뭐란 말인가!

그는 몸을 홱 돌려 버렸다.

"아주 잘했소."

그가 문의 손잡이를 잡아 비틀어 열며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물었다.

"당신도 댄스 파티에 오실 거죠?"

그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했다.

"아마 그럴 거요."

"그럼 그때는 나와 춤을 출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에 간절한 바람이 담겼다.

"당신은 그 젊은 친구와 춤추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거요."

그녀는 애원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테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잘 자시오, 리니아."

침실에 들어온 그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순진무구한 표정의 앳되고 예쁜 얼굴, 긴 속눈썹을 가진 푸른 두 눈동자…….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밝게 빛나며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두 팔을 양옆으로 쭉 내뻗은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하느님, 빌은 젊고 지혜롭습니다. 그런 그가 그녀를 가슴에 품기 직전까지

왔습니다. 이대로 물러선 채 지켜보아야만 합니까? 이 가슴의 떨림은…….

날씨가 점점 추워졌다. 집집마다 창고에 건초 더미가 차곡차곡 쌓여 가기

시작했다.

오스카 쿤스턴이 목요일에 학교로 리니아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토요일에

있을 댄스 파티를 학교 교실에서 열기로 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교실에서요?"

"봄이 가까워오고 창고가 다시 비워질 때까지는 주로 이곳에서 댄스 파티가

벌어질 거예요. 아이들에게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테어도어가

와서 난로에 불을 지피고 전반적인 준비 상태를 점검할 거예요."

또다시 테어도어가 거론되었다. 그녀가 빌과 춤을 추기로 약속했다고 말한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있는 터였다.

"제가 그에게 부탁해야만 하나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요."

빌과 리니아가 한 마차에 타고 테어도어, 니사, 크리스찬과 그밖의 일꾼들이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모두 불을 지피고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책상을

한 쪽 구석으로 붙여 놓기 위해 일찌감치 학교로 갔다.

등잔불을 켜자 교실 안은 아늑하게 보였다.

리니아는 악단이 교단에서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교탁을 칠판 쪽으로 밀어붙였다.

니사는 휴게실 안에서 레몬 케이크를 잘게 썰고 있었다. 그 레몬 케이크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도착하며 가져 온 다른 음식들과 어울려 한 상 위에 펼쳐질

것이다.

크리스찬은 마룻바닥에 멧돌로 간 옥수수 가루를 뿌렸다.

테어도어는 난로에 불을 지핀 뒤, 벽을 따라서 한 줄로 붙여놓은 아이들의

그림을 들러보느라 교실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갑자기 그의 뒤쪽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러시아엉겅퀴예요."

그는 어깨 너머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리니아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늘 밤 그녀는 짙은 감색의 헐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벽에

그림을 그려 놓은 어린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도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소."

그는 손가락을 바지 멜빵에 건 채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다시 아이들의

서투른 시도를 감상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녀도 그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줄지어

걸린 그림들을 구경하는데 시간을 소비했다.

"할로윈의 작품들이 좀더 나아요."

그녀가 지적했다.

"호박들, 옥수수 껍질, 유령들……."

그들이 점점 옆으로 움직여 갈수록 작품들이 세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림의

크기도 점점 줄어들어, 맨 꼭대기의 그림은 작은 삽화 정도의 크기였다.

"크리스찬은 미술엔 별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작문 쪽에는 상당한 소질이

있어요. 여기, 그 아이의 글이에요."

그녀는 벽에 걸려 있던 한 장의 종이를 떼어 내 테어도어에게 건네주었다.

"읽어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예요."

읽어 보라구?

그는 종이를 쳐다보며 입을 딱 벌린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다시 그녀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다음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는 무뚝뚝한 태도로

팔을 뻗쳐 아들의 작품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랑스런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면전에서 반응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아들의 작품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다 쓰고 남은 연필 동강보다도 무식하다는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괴로웠다. 종이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횐색 종이 위에 찍혀 있는 검은 글자들을 보며 하얀 밭 위에 쑥쑥 튀어나와

있는 옥수수대들의 곧고 평행한 행렬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서른네 살이었고, 그의 아들은 그보다 더 지혜로웠다.

이제 곧 리니아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종이 위의 한 지점을 손으로 지적했다.

"크리스찬이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살펴보세요. 당신이 보기에도

탐구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 같죠?"

온몸의 피가 그의 가슴으로 솟아올랐다. 다시 목까지 솟구쳐올랐다. 급기야는

그의 두 귓가까지 도달했고, 귀밑 털을 태울 정도로 아주 뜨겁게 달궈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 굴욕감에 젖은

채 그 종이를 다시 응시했다.

그녀는 그가 다 읽기를 기다리며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활달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눈을 흘겼다.

"어때요, 훌륭하죠?"

그의 표정을 슬쩍 넘겨다본 리니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굴이 홍당무로 변한 채 읽기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나도 그런 것 같소."

결국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잘 모르……."

그녀는 그의 얼굴과 종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증기 없는 열차의

엔진처럼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주……."

그녀의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뒷짐진 손을 하나 빼내어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오, 테어도어…… 글을 읽지 못하는군요?"

그녀는 그가 종이의 끝부분을 꽉 잡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발작적으로

침을 꿀꺽꿀꺽 삼켜 대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 나의 고집불통인 테어도어……. 왜 진작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죠?

그녀는 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이 점차 누그러져 갔다. 그녀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이 불편하고 제한된 공간에 서 있는 동안, 등뒤

쪽에서는 악대가 음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더니 종이를

넘겨주었다. 그 순간, 그들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여전히 그는 귀밑 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떻게 찬송가를 보고 부를 수가 있었죠?"

그녀가 속삭였다.

"찬송가는 암송하고 있소.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이나 찬송가를 불러 왔으니……."

"그러면 칠판에 쓰여 있던 그 문장들은요?"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모욕적인 말들을 칠판에 잔뜩 써 놓았다가

그에게 들켜 버려 곤혹스러웠던 날이 떠올랐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당신이 내 이름으로 칠판을 가득 채우고 싶어한다라는

것 한 가지뿐이었소."

"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신발 끝을 응시했다.

"난…… 당신이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고…… 내가 칠판에 써 놓은 글을 전부

읽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나는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

"지금 내 심정에 비하면, 그 절반에도 못 미칠 거요."

리니아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다시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긴장이 약간 풀어졌다.

그때 악단이 첫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이곳에는 학교가 없었소. 어머니가 노르웨이어 읽는 법을

약간 가르쳐 주시긴 했지만, 그때 우리들이 영어를 배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소."

"그런데 왜 진작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죠? 내가 당신을 무시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가 생각에 잠긴 눈길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크리스찬을 학교에 보내는 일로 언쟁을 벌인 후라 그랬을 거요.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겠소."

"아하."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자존심."

그녀는 종이 쪽지를 다시 제자리에 매달기 위해 손을 뻗쳤다.

"남자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매우 어리석은 편견을 갖고있어요. 영어에 관한

한 크리스찬이 당신보다 더 많이 알고있지요. 그렇지만 그 밖의 다른 많은

일들에 관해서는 당신이 크리스찬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잖아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본 채 몸짓을 섞어 가며 설명했다.

"아참, 그런 문제라면 당신이 나보다도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왜 요전날 밤, 당신들이 전쟁에 관해서 토론을 벌였었죠? 나는 바다

건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관해 당신들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어요. 통 몰랐다구요. 그리고 당신은 풍차를 설치하고 농사도 짓고…….

당신은 내게 말을 타는 방법도 알려 주었어요……."

그들의 두 눈이 마주쳤다.

무엇인가 즐거운 일이 그들 사이에 벌어질 것만 같았다. 행복의 예고편을

시사하는 따스하고 풍요롭고 찬란한 그 무엇이 그들의 입가에 웃음꽃을 피워

올렸다.

"여기 있었군요, 테디!"

정겨운 순간을 방해하면서 끼여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벨 롤러였다.

"발바닥이 근질거려서 못 견디겠어요. 치료할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에요."

그녀는 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방해가 된 것을 사과하기는 커녕, 테어도어가

제것인 양 성급하게 플로어로 끌고 갔다.

핑크및 행복감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불쾌해졌다.

예의 범절이라곤 손톱만큼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녀는 머리칼이 유난히도

붉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하마 같은 빨간

머리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테어도어를 빼앗겨 버리다니! 리니아는 그 빨간

머리 여자를 한 쪽으로 데려가 알렌에게 했듯 예절 교육을 시켜 주고 싶었다.

그녀의 눈이 분노로 불을 뿜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리니아의 등을 두드렸다

테디일 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테디를 소리쳐 불렀다.

"이리 와요. 함께 춤추러 가요."

자기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다가온 사람은 실망 스럽게도 빌이었다.

리니아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즐거운 척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테디와

하마 쪽을 힐끗힐끗 훔쳐보았고, 그러느라 그날 저녁 파티를 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날도 전과 마찬가지로 테디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남자들과 춤을 추었다.

그녀는 검은 난로 주변을 원을 그리듯 돌아가면서 이따금씩 그가 춤추는

쪽을 몰래 훔쳐보았다.

빌어먹을!

테어도어의 춤솜씨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는 밤이 깊어 가도록 붉은 머리털의 여자와 계속 춤을 추었다! 리니아와는

춤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 밤과 오늘 초저녁에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이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성인으로 대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말았다. 그녀는 여전히 풋나기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안달이 날 정도로 초조해진 리니아는 그들을 아예 외면해 보려고 애썼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티 분위기도 서서히 파장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먼저 부딪혀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뻔뻔스런 얼굴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붉은 머리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미스 롤러. 내가 좀 끼어도 될까요?"

리니아를 엄청나게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그 바보 같은 여자가

죽은 시체라도 벌떡 일어서 버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왜 그래요, 나는 아직 멀었다구! 내가 한 남자와 손을 잡으면, 그 남자

기운을 고갈시켜 버린 다음에야 놓아 준다는 사실을 몰라요? 난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구!"

이렇게 외치고 나서 그 여자는 다시 테어도어를 끌고 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리니아는 그 자리에 서서 그대로 고꾸라져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얼른 교실 가장자리로 물러나와 불에 덴 듯 뜨거운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막말로, 저 한물간 창녀에게서 그는 무슨 매력을 느끼는 걸까? 그녀는 수레를

끄는 살이 피둥피둥 찐 말처럼 숨을 헐떡이며 테어도어와 춤을 추고 있었다.

리니아는 그 곡이 끝날 때까지고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면서 그곳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다가 테어도어가 이사벨에게 무언가 속삭이며 앞장서서 그녀를 휴게실로

이끌고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잠시 후, 그는 혼자서 교실 안으로 들어와 곧바로 리니아에게로 건너왔다.

그녀는 눈길을 신속히 바이올리니스트 쪽으로 돌려 버렸고, 썩은 오이 절임이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입을 악다물어 버렸다.

"자, 당신과 춤출 차례요."

굴욕감이 치 밀어 올랐다.

"괜히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테어도어."

그녀는 거만스럽게 콧대를 높였다.

"아니, 당신은 나와 춤추고 싶어했잖소?"

뻔뻔스런 그의 태도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장난스런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무력감으로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당장, 당신 얼굴에서 그 잘난 체하는 표정을 없애 버리도록 하세요,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씨. 천만의 말씀, 나는 당신 같은 사람과 춤추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어요. 당신에게 할말이 있었을 뿐이에요."

테어도어는 조그맣고 화 잘 내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는 화가 나면 열네 살먹은 애들이나 하는 식으로 시건방지게

콧대를 드높이는 대단한 성깔을 가진 여자였다.

"자, 할말이 있으면 지금 해요."

그는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유연한 몸짓으로

그녀를 빙글빙글 돌리며 밉살스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그래, 내게 하고 싶다는 말이 뭐요?"

리니아는 입을 다물고 그의 어깨 위로 쌀쌀맞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눈

높이를 그녀에게 맞추며 무릎을 굽혔다.

"당신이 나를 최종적으로 낚아채 온 것처럼, 고양이가 당신 혀를 물고 갔나

보군."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어린애 취급하듯 하지 말아요. 그렇게 생색내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는 몸을 곧게 펴서 능숙하게 한 바퀴 원을 돌며 명랑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당신은 내게 할말이 있을 텐데……."

그녀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댔다. "정말, 테어도어……. 당신은 사람을 너무

분통 터지게 해요! 가끔은 당신이 증오스러워요."

"알고 있소. 어쨌든 내가 춤을 잘 춘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렇지

않소?"

어느새 얽혀 있던 감정의 응어리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당신은 너무 우쭐대는 병이 있어요! 만일 지금이 수업 시간이라면, 나에게

무례하게 군 대가로 당신을 휴게실 구석에 벌 세웠을 거예요."

리니아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대식이오?"

그가 짓궂은 웃음을 보내며 물었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웃자 그도 따라서 웃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방금 전에 말다툼을

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고, 함께 춤을 즐기기 시작했다.

비록 어법은 엉망이었지만, 그의 말솜씨에서는 번득이는 재치가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춤솜씨는……. 그는 그녀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능수 능란하게

그녀를 리드해 나갔다.

그가 춤을 추는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녀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날, 멜빵 바지에 찌그러진 밀짚모자를 쓰고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던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내게 할말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그들은 상반신을 약간 뒤로 젖힌 채 미끄러지듯 스텝을 밟아 나갔다.

"뭐라고요?"

리니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이 아까 이사벨의 어깨를 찌르며 끼어 들었잖소."

"아, 그거요!"

그녀는 턱을 위로 치켜올렸다.

"당신에게 글을 가르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가 히죽 웃었다.

"내가 저 장난감 같은 책상 아래로 두 무릎을 끼워 넣기 위해 애쓰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칠판을 쳐다본다?"

"누가 여기서 가르친다고 했어요? 멍청이! 집에서 가르쳐 주겠다고요."

"집에서 가르쳐 주시겠다고요?"

그가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흉내내며 비꼬았다.

"그래요. 기나긴 겨울의 저녁 시간 동안 그보다 더 유익한 일거리가 어디

있겠어요?"

그는 코웃음을 치며 한 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당신이 나를 책임지고 떠맡겠다? 내 나이 정도가 되면, 머리가 우둔해지고

건망증도 심해진다는 걸 잊었소? 나는 당신이 가르치는 1, 2학년 학생들만큼

빨리빨리 지식을 흡수하지 못할 거요."

리니아는 또다시 나이를 들먹이는 테어도어에게 짜증이 났다.

"정말이지, 테어도어……. 당신은 마치 자신이 노망이라도 든 사람처럼 말하는군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거요."

그녀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 잔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망 든 남자들은 대부분 류마티즘에 걸려 있죠. 당신이 류마티즘에 걸린

뼈를 몸 안에 지니고 있다면 지금처럼 춤이나 출 수 있겠어요?"

"절대 그럴 수 없겠지. 내 뼈는 아주 튼튼해요. 보겠소?"

그는 우쭐거리며 자신의 팔뚝을 자랑스레 쳐다보았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진지해져 봐요!"

그녀가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며 꾸짖듯 말했다.

"선생님이 얘기하는 동안, 쓸데없는 농담을 해서는 안 돼요."

그들은 내내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춤을 추었다. 그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그녀의 눈에 고정되었다.

"내가 만일 공부를 시작하겠노라고 한다면, 그 조그맣고 건방진 녀석은 어떤

식으로 나를 가르치기 시작할까?"

"건방진 녀석 이라구요!"

그녀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반박했다.

"어떻게 감히…….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란 말예요!"

바로 그 순간 음악이 멈춰졌고, 그녀의 마지막 외침이 정적을 갈랐다. 호기심

많은 몇몇 사람들이 눈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리니아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얼굴을 붉히자, 고맙게도 그가 팔꿈치를

잡아 그녀를 플로어 밖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헤어지며

모욕적인 인사말을 건네는 걸 잊지 않았다.

"춤 잘 추었소, 꼬마 아가씨. 너무 늦게까지 놀다 들어가지는 마시오."

창피함만 조금 무릅쓴다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빌이 그녀를 집에까지 데리고 왔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

화가 나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그는 그녀의 어깨에 두 팔을 올려 의자

쪽으로 밀어붙이고 키스를 했다. 그녀는 테어도어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키스가 자신의 몸에 어떤 반응을 일으켜 주기를

하늘에 대고 갈망했다.

그러나 그의 키스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밤새도록 키스하고 싶어요."

"그래요?"

"음…… 내가 키스하는 걸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나, 나는 아마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테어도어 처럼 나를 계속 어린아이

취급만 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빌이 혓바닥을 그녀의 입 속으로 밀어 넣고 그녀의 양다리 사이에

자기 무릎을 삽입하려 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몸을 뒤로 홱 돌리며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나, 집으로 들어가 봐야겠어요."

"이렇게 빨리?"

"그래요. 지금 당장요, 빌. 그만해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요?"

빌은 갑작스런 그녀의 거부를 대하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냥 싫어요."

"전에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어요?"

"입 닥쳐요!"

그녀는 그를 세차게 밀어냈다. 그가 쿵 소리를 내며 덮개용 버팀대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래, 좋아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오!"

그가 머리를 만지며 투덜댔다.

"잘 가요, 웨스트가드 씨!"

그녀는 코트 자락을 홱 돌리며 날쌘 동작으로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리니아, 기다려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라, 그가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쳐 버렸다.

"나는 거친 사람을 혐오해요, 빌."

그녀가 고개를 치켜세우며 매몰차게 말했다.

"미안해요……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요, 리니아. 약속할 게요. 나는……."

"약속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다시는 당신과 함께 다니지 않을 거니까요."

"그렇지만 리니아……."

그녀는 그가 문 앞에서 웅얼거리는 걸 팽개쳐 둔 채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부엌 문을 잠근 뒤 문에 등을 기대고 서자 비로소 약간 안심이 되었다.

서둘러 2층으로 올라온 그녀는 어둠 속에서 옷을 벗어 되는대로 쑤셔박은

뒤, 오싹함으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실컷 울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눈물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는 근심 없는 즐거운 시간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근심 걱정이 없을 수 없고 즐거운 일보다는 힘들고 괴로운

일이 더 많다.

그녀가 진정으로 키스하고 싶었던 사람은 테어도어 한 사람이었지만, 사정이야

어떻든 그녀는 러스티 보너와 빌 웨스트가드 같은 남자들과 키스를 하고 있었다.

테어도어에게 그녀는 늘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 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리니아는 눈발을 동반한 채

캐나다 서부에서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자연에 순응하듯 그녀는 실로 짜서 만든 따뜻한 속옷과 모피 각반을 꺼내

입었다. 그러나 학교 출근길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멀게 느껴졌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휴게실 출입구 앞에 서서 정이 든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상황이 바뀌면 사람의 기분도 이렇게 달라지는 것일까?

햇살이 빛나는 아침이면 이곳보다 더 기분좋은 곳은 없었다. 춤을 추는 밤이면

이보다 더 열광적인 곳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아이들의 목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고 휑뎅그렁한 창문 너머로 흙탕물을 뒤섞어 놓은 듯한 잿빛 구름만

보이는 날은 교실 안에 썰렁하게 냉기만 돌 뿐이었다.

석탄을 가지러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마침 바람이 석탄 창고 앞에서 깔대기

모양을 이루며 회오리를 치다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홱 잡아챘다.

난로 뚜껑과 집게를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결국 난롯불이 지펴졌고, 리니아는 발을 쬐면서 한참 동안 난로 옆에 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휴게실로 가서 살얼음이 언 주전자를 찾아냈다. 그녀는

주전자 안의 얼음 조각들을 메어 내며, 9월의 아침에 하는 허드렛일과 음산한

11월에 해야 하는 허드렛일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새삼 절감했다.

겨우 몸을 추스리고 펌프가 있는 밖으로 나왔다.

크리스찬이 도착하자 그녀는 펄쩍 뛸 정도로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한 명씩 등교하니 교실 안의 썰렁한 분위기도 따뜻하게 변해 갔다.

아이들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았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 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약간 메마르고 푸석푸석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로 가장자리의 갈색 잔디는 바람에 떨며 등을 낮게 구부려 한층

더 스산해 보였다. 구름들도 찌푸린 표정을 지은 채 자신들이 굽어보고 있는

아래쪽을 칙칙하고 어둡게 물들이며 이곳저곳으로 재빠르게 움직여갔다.

집 안마당에 도착해 보니, 마침 이사벨 롤러의 요리용 마차가 떠나가고 있었다.

집 안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일꾼들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집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니사?"

니사를 불러 보았다.

대답이 없었다.

"크리스찬?"

부엌 안은 따스했고, 돼지고기 굽는 냄새와 신선한 과즙 향이 코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집밖에서 나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니사?"

그녀의 방문을 열며 다시 불러 보았지만, 방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니사의 침실 안을 엿보았다. 그녀의 방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자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액자들이 죽 진열되어

있었다. 갓난아기 때 찍은 사진, 막 걸음마를 배우는 모습, 견진성사를 받고

있는 모습, 그리고 결혼식 때 찍은 사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놓여 있었다.

자식들에 대한 니사의 사랑을 물씬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화장대로 다가가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테어도어가 신부와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도 있었다. 그는 머리를 귀 위쪽까지

짧게 자르고 있었는데, 상당히 야윈 편으로 나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리니아의 시선이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 쪽으로 옮겨 갔다. 사진

속의 주인공은 제비꽃처럼 평화스럽고 우아한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매우 아름다웠고,

크리스찬의 그것을 닮은 입술이 도톰하게 눈을 끌었다.

그렇군요, 당신이 바로 메린다로군요……. 리니아는 한동안 그 사진에 넋을

잃었다. 테어도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또 심한 상처를 남겨 준 여인!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테어도어 앞에서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있었다.

그녀는 움찔하며 그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그 옆방을 응시하며 한숨을

쉬었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문 안쪽에

놓여진 것들을 본 적이 없었다.

"테어도어?"

그녀가 부드럽게 불렀다.

그의 방문은 집 안의 다른 모든 목재들과 마찬가지로 담갈색으로 페인트칠되어

있었다.

"안에 계세요?"

그녀는 손잡이 위에 손가락을 얹고 문을 밀었다. 방문이 소리없이 뒤로 밀렸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호기심이 더욱 강했다. 그녀는 조심스런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방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침상은 오늘 아침 테어도어가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여자의 손길이 닿지 않아 그런지 을씨년스러웠다.

붙박이장도 없는지, 그가 일요일마다 입는 검은 양복 한 벌과 멜빵이 달린

작업복이 벽의 옷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방바닥에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신발이 졸고 있는 한 쌍의 검둥오리처럼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슬쩍 눈길을 돌렸다.

꽃무늬 장식의 벽지는 색깔이 희미하게 바래 있었고, 화장대 위에는 메린다의

솜씨인 듯 자수를 놓은 커버가 덮여 있었다. 그 장식 덮개만이 유독 그의 어둠침침한

방안과 어울리지 않았다. 앞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그 화장대 위에는 타원형의

사진틀이 놓여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리니아는 사진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 속에는 또 다른 메린다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결혼식 때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리니아의 두 손이 저절로 사진 쪽으로 이끌렸다.

한 남자가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사진 속의 메린다는 매우 젊어 보였다. 기껏해야 지금 리니아 정도의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리니아의 마음은 울적해졌고, 그 당시와

현재 사이를 갈라 놓은 세월이 유감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그가 메린다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자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바라봐

준다면 그녀는 청춘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사진틀을 제자리에 정확히 올려놓은 다음, 다시 한

번 텅 빈 침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살금살금 그 방에서 빠져 나왔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더 이상 혼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그녀는 농장 전체에 깔려 있는 의로움과 메린다의 잔영, 그리고 가라앉은 날씨

등을 훌훌 털어 버릴 겸 그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녀는 모피 목도리를 목에 단단히 두르고 문 밖으로 나왔다.

요리 마차는 정말로 가 버리고 없었다. 우습게도 이사벨 롤러에게 굉장한

질투심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녀의 마차가 떠나버리자 아쉬움이 느껴졌다.

카라가나 관목 숲만이 바람에 따라 제멋대로 흔들리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아쉬워하는 것은 요리

마차가 아니라 계절의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테어도어와 이사벨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메린다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생긴

그녀가 어떻게 테어도어를 유혹할 수 있었을까?

멀리 보이는 방목지에 말들과 함께 서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들이 테어도어, 크리스찬, 니사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말들을 옆에 세워 둔 채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목도리를

다시 단단히 묶고는 바람에 밀리듯 그들 쪽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테어도어의 말들은 강풍에 맞서 끊임없이 자리를 이동하면서 날아오르는

물보라처럼 꼬리를 치켜들고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리니아가 다가갔을 때, 테어도어는 '플라이'라는 암말의 얼룩덜룩한 코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세 사람이 모두 그녀를 향해 돌아선 뒤 크리스찬이 대답했다.

"지금 막 작별 인사를 하는 중이에요."

"작별 인사라니?"

그녀는 안색이 변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오늘은 말들을 풀어 주는 날이에요. 추수가 전부 끝났거든요. 일꾼들도

모두 돌아갔어요."

니사가 설명했다.

"말들을 풀어 준다고요?"

"그래요."

"어디로요?"

"어디로든."

"그럼, 말들을 자유롭게 놓아 준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니사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말들은 값이 많이 나가잖아요."

이번에는 테어도어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매년 그렇게 해왔소. 농사일이 시작되는 4월이 되면, 모두 살피고

멋진 모습으로 되돌아 올 거요."

리니아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어렸다.

"다시 돌아온다구요? 그러면, 여태껏 한 마리도 잃어버린 적이 없단 말이에요?"

"한 번도 없었소."

리니아는 그들이 이별의 슬픔을 마음속으로 억누른 채 번갈아 플라이의 코를

문질러 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돌아온다는 믿음이 없다면 생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축들을 저리 쉽사리 놓아 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말들을 모두 보낼 건가요?"

"늙은 쿠브와 투스를 제외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겨울을 나는 동안에도 마차를 끌 말은 필요하니까……."

목장에는 열두 마리의 말들이 있었는데, 쿠브와 투스가 맹꽁이 자물쇠와

담벼락을 코로 비벼 대는 동안 나머지 말들은 끊임없이 움직여 자리를 이동하며

바람 속에서 울부짖었다.

억세고 건장한 숫말 한 마리가 패거리 주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테어도어

일행을 재촉했다.

테어도어가 플라이의 고삐를 힘주어 움켜 잡으며 말했다.

"좋아, 서둘러 일을 마치는 게 좋겠다, 크리스찬."

"저도 동감이에요."

리니아는 테어도어와 크리스찬이 무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고삐를 풀어

주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니사에게로 다가갔다. 짐승들은 해방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느낀 듯 더욱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대며 성급하게 울어댔다.

드디어 크리스찬이 목장 끝 쪽에 있는 기둥 문을 활짝 열어제쳤다.

크리스찬이 무리 사이를 돌며 입으로 날카로운 휘파람을 부는 동안, 그들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휘파람 소리가 늦은 오후의 대기를 가로지르자

스물네 개의 귀가 종긋 세워졌다.

리니아는 그 광경을 보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너무나도 장엄한 모습이었다.

리니아는, 그 순간만큼은 진실되고 풍요롭게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자신의

삶 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녀의 왼편에는 테어도어가, 오른편에는 니사가 서 있었고, 크리스찬은

말들과 함께 있었다.

어느새 작은 눈송이들이 그녀의 얼굴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말들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앞발로 땅을 긁어 대는,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아름다운

그 광경을 바라보며 리니아는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드디어 말 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유를 향해 갈기를 휘날리며. 천둥

같은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 소리에 쿠브와 투스의 안타까운

울부짖음이 묻혀 버렸다.

리니아는 니사와 테어도어의 중간에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다가

두 팔을 그들의 어깨에 걸쳤다. 그 순간, 그녀는 그들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이 그녀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리니아는 테어도어에게 기댄 채 앞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숙였다. 그는 몸을

빼내려고 하지 않고,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말들이 자유로운 세계로

질주해 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저 말들은 어디로 가나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아마도 우선은 샛강을 따라 강 하구 쪽으로 내려갈 거요.

그곳에 야생 전초가 자라도록 해두었거든요. 수수 씨앗도 뿌려 두었고. 말들은

수수를 좋아하니까."

"그럼, 그 후에는요?"

테어도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말들이 추위와 식량 문제를 극복해 낼 수 있을까요?"

테어도어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턱 아래쪽에 붉은 체크 무늬 목도리가 이중으로 매듭져 묶여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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