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사벨 롤러는 노스 다코타를 향해 마차를 몰았다. 꼴사나운 모습의 그 물건은
대형 포장마차보다도 길었는데, 철로 위를 덜컹거리며 달리다가 가끔 선로를
벗어나는 기차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마차 지붕 위에는 검은 연통이 달려 있고 양측면으로는 양동이나 대야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어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철금 켜는 소리가 났다. 마차는
방향을 바꿀 때마다 양옆에 대어 놓은 지저분한 널빤지 때문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렸다. 덕분에 마부석에 양 무릎을 확 벌린 채 앉아 있는 그녀의
양손이 누렇게 물든 들판을 향해 반가운 인사라도 하듯 흔들거렸다. 그녀의
곱슬머리는 햇빛을 받아 붉은색으로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사벨에게 여자다운 면이라곤 그녀의 이름밖에 없었다.
그녀는 짐을 끄는 말처럼 힘이 세고 성격도 괄괄했다.
그녀는 늘 대평원이 자신의 집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추수가 끝난 뒤 그녀가
어디서 겨울을 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출신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 그녀는 큰소리로 시끄럽게 고함을 쳐댔다.
"나는 악마가 물소랑 엉켰을 때 생겼다. 악마한테는 불 같은 성격을 물려받았고,
물소한테서는 생김새를 물려받았지!"
그녀가 하는 일은 어떤 여자도 감당해 내기 힘든 거친 것들이었다. 그녀는
난폭한 노새 한 쌍을 몰고 다녔는데, 그것들이 끄는 건 움직이는 부엌과 식당뿐만
아니라 그녀의 흔들거리는 집도 포함되었다. 그 거대한 마차를 멍청한 노새
두 마리로 조종한다는 건 남자들이라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리라. 그렇지만
이사벨은 매일 네 번씩 스무 명 가량 되는 일꾼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는 엄청난
노동만큼이나 마차 모는 일도 수월하게 해냈다.
이사벨이 테어도어의 농장을 드나들은 것도 9년째였다. 들가의 거친 길로
이사벨의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나타나자, 테어도어는 모자를 뒤로 밀어 올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벨이 지나간다."
존은 이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마차를 바라보았다.
"응, 벨의 마차가 맞군."
테어도어가 다시 말했다.
이사벨은 마차를 멈춰 세운 뒤,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일어서며 자신의
모자를 열광적으로 흔들어 댔다.
들판에선 일꾼들이 그녀를 부르며 고함을 질러 대고 휘파람을 불어 대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며 사방에 진동했다.
"이봐, 내 사랑 벨! 당신의 정강이는 여전히 록키산맥만하구려."
이사벨은 자신의 정강이를 내려다본 뒤, 입을 오무리고는 양철 빨래판 위를
숟가락으로 긁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로 외쳤다.
"내 정강이에 대해 유감이 많은 모양인데 이리 올라와 봐요. 주둥이를 한
번 쥐어박아 줄 테니, 이 몸에 걸린 해충 같은 인간아!"
"소다리, 벨!"
그 남자가 다시 소리쳤다.
"소다리라구, 맙소사! 지금 물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이사벨이 높다란 마차 위에 떡 버티고 서자 푸른 하늘 사이로 그녀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녀의 주먹이 엉덩이께에 꽂혀 있었다. 그 순간, 거기 있는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놀려 대기 시작했다.
"이봐, 벨, 당신을 옥수수 자루처럼 어깨 너머로 집어던질 만한 남자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수?"
"전혀! 난 아직 흔자야. 작년에 당신을 본 이후로 여러 명 내 어깨 너머로
집어던지긴 했지만!"
남자들이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대자 그녀도 자기가 한 농담에 스스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벨, 내가 당신과 춤추는 첫 번째 상대야. 작년에 나랑 약속한 거 알지!"
"약속? 웃기네! 다른 사람들처럼 줄이나 서시지!"
"벨, 감자만두 만드는 법은 이제 배웠겠지?"
"누구한테? 당신한테 말야, 콥? 이 오줌싸개 개미야."
그녀는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앞으로 몸을 구부렸다.
"당신 뺨에는 아직도 그 냄새나는 소똥 덩어리가 붙어 있나 보지? 여기까지도
냄새가 날아오는 것 같은데!"
"좋아. 아무튼 난 아직도 12피트 높이에 있는 메뚜기도 잡을 수 있는걸!"
이사벨은 마차에 등을 기댄 자세로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한 쪽 무릎을
들어 찰싹 때린 후 소리쳤다.
"이봐요, 테어도어, 요리사와 수다나 떨고 있는 이 쓸모 없는 게으름뱅이들한테도
임금을 줄 거예요?"
테어도어, 그는 옆에 서서 상스런 소리들이 오가는 것을 기분 좋게 듣고
있다가 이내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이들도 일손을
잡기 시작했고, 모두 다 상쾌한 마음으로 자기의 맡은 일로 되돌아갔다.
매년 이사벨이 도착하는 시기는 일정했는데, 그녀가 오고 나면 일과 재미가
한 데 어우러져 한층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다.
곧 겨울이 오고, 그들은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가 눈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벨의 식탁 주위로 풍성한 음식과 웃음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나중에 일이 모두 끝나고 주머니에 돈이 넉넉해지면 춤도 추게 될 것이다.
아침에는 서리가 내렸지만, 오후가 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햇볕 아래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밀단을 탈곡기에 집어넣으면 기계는 알곡과
나머지 버릴 것들을 구별해 두 개의 다른 방향으로 뱉어 놓았다. 밀을 가득
실은 마차가 정기적으로 들판을 떠나 마당에 있는 곡식 더미로 향했고, 그
짐 실은 마차에 의해 찌꺼기인 건초더미들도 늘어 갔다.
정오가 되자 이사벨이 마차에서 나와 개수통을 나무 주걱으로 두들겼다.
남자들은 쇠스랑을 내려놓고 앞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마차 뒤쪽에 그녀가
마련해 놓은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로 향했다. 마차 안을 볼 수 있도록 양옆으로
열어 놓은 미닫이 문을 통해 구수한 냄새가 빠져나오는 동안, 그들은 태양을
벗삼아 손을 씻었다. 바로 그 앞에서는 이사벨이 크고 검은 요리용 풍로 주위를
바삐 움직이며 돌아다녔다. 이윽고 그녀가 꺽꺽대는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부엌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당장 그 씹는 담배나 뱉어요, 콥! 말을 안
들으면 감자 분쇄기를 가져다가 그 담배를 다 없애 버릴 테니까.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동안 그리 행복하지 못할걸!"
옆에 있는 남자들이 팔꿈치로 살짝 찌르며 웃어 보이자 콥은 마지못해 담배를
뱉었다.
다시 이사벨이 난폭하게 명령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말아요. 내 말 들려요,
콥? 내가 이 식탁에 차려 놓은 건 무엇이든 맛있게 먹어야 해요. 다 먹고 나면
내가 당신을 어깨에 걸쳐 매고 토요일 밤 춤추는 데 데려간다고 약속하죠!"
남자들이 안으로 하나 둘 모여들며 계속해서 낄낄거렸다.
식탁에는 구운 쇠고기와 돼지고기, 잘 다진 감자, 고기 수프, 녹색 콩과
옥수수, 딱딱한 롤빵과 시큼한 맛이 나는 양배추샐러드, 사과 주스, 진한 커피
등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 위의 음식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이사벨은 남자들이
앉은 의자 뒤를 바삐 움직이며 다 먹어치우도록 재촉했고,외설적인 농담을
되받아쳐 대기도 했다.
그녀는 테어도어를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짓궂은 말도 던지고 등도
두들겨 대고 때론 억지 섞인 농담도 했다.
그러나 그날 밤, 다른 모든 이들이 달콤하고 거친 건초 더미가 있는 새 침실로
자러 간 다음, 테어도어는 찬물로 대충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골담초 덤불 곁에 있는 이사벨의 마차에서 불빛이 연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노크를 한 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무릎 높이 정도에
있는 계단을 내려다보며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빛이 이사벨의 머리칼을 통과해
테어도어의 얼굴 위에 석양과 같은 색깔로 비추어졌다. 그녀는 무명 모슬린
잠옷 위에 연초록색 숄을 두르고 있었다. 문을 열어 환영의 인사를 보내는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 그녀에게선 시끄러운 목소리와 마귀
할멈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원숙한 한 여성이었으며 거친
외모가 주는 인상도 조용한 위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안녕, 테드? 계속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참 좋은 밤이오.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왔소."
"들어와요."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데여도어는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테어도어는 한 쪽 겨드랑이를 이사벨에게 베개로 내어 준 채 느긋하고
한가하게 누워 있었다. 그녀의 손은 그의 가슴 위를 매만지고,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여자들과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왜 당신을 낚아채는 여자가
하나도 없죠?"
"난 낚아채이고 싶지 않소."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일로 창피 해하다니……."
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결혼하지 않는 거요, 벨?"
"나한테 묻고 있는 거예요, 테디?"
이사벨이 그의 가슴을 장난스럽게 찰착 때렸다.
"난 그렇게 긴장된 삶은 원치 않아요. 성가시거든요. 당신도 나처럼 떠돌아다니는
집시들이 한 곳에 정착하려 들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가끔씩은 그런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거야 여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을 가져 보고 싶기 때문이죠."
그의 손이 오른쪽으로 돌아 그녀의 가슴 위로 올라갔다.
"당신이 여자라고 느낄 때가 있지. 바로 이런 때……."
그녀는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넋을 잃은 사람처럼 타오르는 호롱 불빛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테디, 당신은 내가 밖에 있을 때와 이렇게 안에 있을 때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나요?"
"한두 번쯤."
"난, 다른 남자들이 나를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는 숱 많은 빨간 머리에다
엄청난 야채 더미에 둘러싸인 요리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지금까지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 것에 대해 당신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그는 양팔로 이사벨을 끌어안았다.
"당신은 좋은 여자요, 벨. 그리고 요즘에서야 생각하는 건데, 당신은 내
형제들 외에 유일한 친구인 것 같소."
그녀는 턱을 치켜들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이에요?"
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다시 한 번 그녀를 꼭 껴안았다.
"정말이오."
"이제 우리가 늙어 가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테디. 난 친구를 사귈
만큼 한 곳에 오래 머무른 적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아마 매년 이곳으로 되돌아오려고
그렇게도 애를 태우나 봐요."
"그리고 나 역시 이곳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잖소."
그녀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며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러는 게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나요, 테디?"
그는 천장에서 너울대며 춤추는 불꽃을 유심치 바라보았다.
"성서에는 그렇다고 쓰여 있지. 하지만 우리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잖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없어요. 그런데 당신 아들은 어때요? 그애가 우리
사이를 알게 되면 별로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오늘 밤 이리로 오기 전에 그 점에 대해 약간 생각을 해봤소. 크리스찬은
지금 한창 예민할 나이니까, 우리 일을 알게 되면…… 글쎄, 좋지는 않겠지.
그애는 지금 새로 온 여선생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소. 소년들은 대개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갖게 되지."
"당신 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선생님은 귀여운
데가 있어요, 안 그래요?"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그녀가 했던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
더 그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그렇소? 난 아직 그녀를 가까이서 쳐다본 적이 없어서……."
"세상에! 어쩜, 당신은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죠? 그 여자는 한눈에
봐도 미인임을 알 정도로……."
테어도어가 낄낄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침대에서 뒹굴듯 내려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소스 담는 접시를 들고 테어도어의 곁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녀는 천장 위로 날아 올라가는 연기를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쳐다보았다.
그는 부산스레 움직이던 그녀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당신도 썩 못생기지는 않았어, 벨."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담배 연기로 도넛 모양을 완벽하게 만들어 공중으로
날렸다.
"그 점이 바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예요, 테디. 당신은 정말 마음이
넓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는 반쯤 타들어간 그녀의 담배를 쳐다보며 마음속에 리니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이사벨의 입술에 꽂혀 있던 담배를 빼앗아
물고는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는 전에 없이 썼고, 그는 이사벨의 가슴
위에 놓인 접시에 담배를 비벼 껐다.
금요일 밤이었다. 오스카 쿤스턴의 비어 있는 창고에서 8시에 댄스 파티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리니아는 그날 밤의 행사를 위해 오후 내내 준비를 했다.
머리를 손질하고 입을 옷을 고르는 동안 로렌스의 끊임없는 방해만 없었어도
아마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에는 특별한 경우를 위해 아껴 두었던 값비싼 아몬드열매로 만든 크림을
부드럽게 펴 바르고, 입술에는 액체로 된 루즈를 발랐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낄낄거렸다. 창녀처럼 보이는데,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학부모들이 이런 네
모습을 보며 뭐라고 생각할까?
그녀는 루즈를 지우려고 애써 봤지만, 아무리 문질러도 닦아지지 않았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거울을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더욱 붉어졌다. 그녀의 입술은 새빨간 것뿐만 아니라 부풀어올라 있기까지
했던 것이다! 성숙한 여인의 모습에다가 자기 만족에 빠진 모습까지 갖춰진
꼴인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처리해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을 열었다.
"어머, 크리스찬이구나. 근사한데! 너도 댄스 파티에 가는 거니?"
크리스찬은 교회에 갈 때 입는 바지와 횐 셔츠를 입고, 반짝거리게 닦은
신을 신고 있었다. 머리칼은 기름을 발라 뒤로 매끈하게 넘겼는데, 정수리
부분은 수탉의 벼슬 형태로 빗어 올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완전히 치명적이었다. 마치 장례식이 거행되는 집 응접실에서 나는 카네이션
냄새 같았던 것이다. 무얼 발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너무 많이 바른
것 같았다. 리니아는 코를 거의 틀어 막다시피 했다.
"물론이에요. 난 작년 11월부터 댄스 파티에 가기 시작했는걸요. 그때, 열여섯
살이 됐었거든요."
"잘됐구나.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어린 나이서부터 춤을 추기 시작하나
보지?"
"네, 아빠는 열두 살 때부터 춤을 추었다고 하시던걸요. 하지만 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아빠는 그때와는 달라진 게 많다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 라고 말씀하셨어요."
"기다리라고."
크리스찬은 얼굴이 빨개진 채 발꿈치를 살짝 들며 얌전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기다리라고."
크리스찬이 불쾌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얼른 손뼉을
치며 말했다.
"오, 이런, 나를 좀 봐! 시도 때도 없이 선생 노릇을 하려고 든다니까. 잠깐만
기다려. 코트를 가져올게."
하느님 맙소사, 그녀를 보라! 컬이 생긴 그녀의 머리칼은 온통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금방 풀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누군가의 키스를 기다리는 듯 온통 붉게 물들어 보드랍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한 여인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는 심정을 성인 남자라면
어떤 식으로 그 상대에게 알릴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은 채 가슴속에서 심장만 두방망이질을 쳐댔다.
코트를 가지고 돌아온 그녀는 넋을 잃고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찬의 얼굴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호롱불 심지의
키를 줄인 다음,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서는 놀랍게도 니사가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당신도 가시려구요?"
리니아가 물었다.
"나를 빼놓고 내빼려고 한 모양이군요. 이래봬도 난 아직사지가 멀쩡하다구요.
춤을 추는 게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야 재미있지 않겠수."
니사는 하얀 칼라가 달린 짙은 감색 드레스를 입고 앞 가슴에 볼품없는 브로치를
달고 있었는데, 상당히 마음이 들떠 있었다.
밖에는 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야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주위의
남자들을 웃겨 대고 있는 빨간 머리 여자와 함께 테어도어가 덮개 없는 사륜마차에
앉아 있었다.
집 안에서 세 사람이 나오자, 러스티 보너는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안녕하세요, 웨스트가드 부인,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제가 도와드리죠."
그는 먼저 니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뭘 도와주겠다는 거죠?"
그녀는 손바닥을 부딪쳐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도움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했다.
"나는 테디와 함께 앞쪽으로 탈 거예요. 건초 더미 위에 앉아 가다가는 늙은이의
뼈가 금방 삐거덕거리고 말 테니."
남자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그녀는 재빨리 마차 앞쪽으로 가 버렸고,
러스티와 리니아만이 얼굴을 마주보며 서 있게 되었다. 이제는 리니아 차례였다.
"선생님?"
러스티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테어도어는, 돼지 비계가 녹아 내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돌변한 러스티가
리니아의 허리를 잡아 건초 더미 위로 들어 올리는 모습을 험상궂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러스티는 긴 다리로 도약하듯 힘있게 껑충 뛰어올라 가능한 한
리니아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고, 테어도어는 그런 그의 모습을 또다시
눈살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테어도어가 자세를 바로하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어리숙한 리니아는 러스티처럼
부드러움으로 사람을 흘리는 사람에게 빠져들기가 쉬울 것이다. 그녀는 이곳에
와서 아직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테어도어라도 그녀를
책임지고 보호해야 하지 않겠는가! 러스티는 암탉 모가지로 달려드는 족제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다가갈 것이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무슨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 조차 모를 것이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리니아는 러스티의 다리와 엉덩이가 자꾸 부딪혀
오는 것을 느꼈다. 마차 건너편에서는 수다스런 암탉이 자기가 이빨로 메기를
물어 뜯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남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교활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크리스찬만은 러스티의 무례함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은 무릎을 세운 자세로 마차 측면판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그녀는 러스티로부터 가능한 한 떨어져 앉기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크리스찬 쪽으로도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녀는 스스로 중심을
잡고 앉아 있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러스티는 자기 다리를 쫙 벌려 그녀
쪽으로 축 늘어뜨린 채 슬금슬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거기 모인 사람들
중 그만이 유일하게 데님 천으로 만든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작업복은 몸에 너무 꽉 끼어서 차라리 추잡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거침없는
성욕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약간의 두려움 마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조심하라던 니사의 말이 또렷이 기억났다.
오스카의 창고에 도착하자 리니아는 엉겁결에 번쩍 들어 올려졌다. 러스티가
어느새 그녀를 안아 내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래로 내려오자 그는
공손하게 뒤로 물러서며 모자의 챙을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저와 춤을 추어 주실 거죠, 선생님?"
생긋이 웃으며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상당히 긴장이 풀어졌다.
테어도어가 말을 돌보고 나서 창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리니아는 막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오르려던 참이었다. 마침 러스티 보너가 그녀의 뒤에 서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테어도어는
겨드랑이에 손바닥을 끼고 러스티가 사다리를 타고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도 뒤따라 올라간 다음 즉시 존을 찾았다.
"형과 얘기할 게 있어요."
그는 존의 팔을 붙잡아 모여 있던 사람들로부터 따로 불러냈다.
"보너를 좀 잘 지켜봐 줘요."
"보너?"
존이 되물었다.
"내가 보기에 조그만 아가씨를 눈독 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을?"
존은 영리하지는 못했지만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임무가 주어지면 화고
부동한 자세로 임했다. 그는 리니아를 좋아했고, 동생 테어도어를 사랑했다.
러스티 보너가 그의 빈틈없는 감시망을 빠져나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하모니카로 이루어진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자 오래지
않아 창고 안은 음악이 흘러 넘치게 되었다.
테어도어에게 안도의 한숨이 나오게 하려 했던지, 리니아에게 처음으로 춤을
신청한 사람은 그의 조카인 빌이었다.
"난 춤을 잘 추지 못해요.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 주어야만할 거예요."
빌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리로 와요. 한 동작에 두 스텝을 밟으면 돼요. 쉬워요."
그는 리니아를 플로어로 이끌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이 정말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왜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잖아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모두들 여기서 댄스 파티가 열린다는 걸 알았을까요?"
"소문이 돈 거죠. 그런데, 당신은 요즘 좀 한가한가요?"
"바쁘긴 한데…… 어마!"
그녀는 그의 발가락을 밟았고, 동시에 리듬을 깨뜨려 버렸다.
"죄…… 죄송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테어도어가 플로어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난 그렇게 복잡한 스텝은 배운 적이 없어요."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 줄게요"
그는 스텝을 한 동작씩 잘라서 보여 주며 그녀가 익힐 수 있도록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크리스찬 말에 의하면, 당신들은 열두 살 정도가 되면 벌써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면서요?"
"내 경우는 열네 살이었어요.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도 아주 잘하고
있는걸요."
그녀의 얼굴이 발개지며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러자 그가 장난스레 그녀를
살짝 흔들어 댔다.
"자, 긴장을 풀고……. 더 재미있게 즐겨 봐요."
그가 옳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발은 좀더 부드럽게 음악에 맞춰 움직여졌고,
춤추는 것을 즐기게끔 되었다. 음악이 완전히 멈추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열광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오, 너무 재미있어요!"
빌은 흐뭇한 미소를 보내며 다음 곡도 신청했다.
빌은 부드럽고 예술적인 댄서였다. 리니아는 곧 웃음을 터뜨리며 그와 추는
춤을 즐기게까지 되었다. 두 번째 춤곡이 반 정도 지날 때쯤, 불과 여섯 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테어도어가 빨간 머리 암탉과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째서 테어도어가 저런 식으로 춤을 추리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마치 자신이 쾌속 범선이라도 된 듯 이사벨 롤러를 이끌고 플로어를
항해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무척이나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리니아의 눈빛과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낸 뒤 빙글빙글
돌며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음악이 끝났다. 그녀는 케니스라는 이름의 낯선 남자와 다음 곡을 추게 되었다.
그는 나이가 대략 마흔 정도이고, 올챙이처럼 배가 튀어나와 있었다. 다음은
트리그. 그는 자기 아내가 쉽게 지쳐 버려 한 곡씩 쉬어 가며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클라라가 그들을 쳐다보며 두 손가락을 들어 흔들었다. 리니아는 지금 춤추고
있는 곡이 끝나면 클라라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앞에 나타나 손바닥을 다리에 문질러 닦은 뒤 그녀에게 춤을 신청했다. 세상에,
학생과 춤을 추는 선생님도 있을까? 그녀는 클라라를 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클라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인 뒤
미소를 지었다.
"어쩝, 크리스찬, 너도 네 아버지처럼 춤을 잘 추는구나!"
"오, 벌써 아빠랑 춤을 추셨어요?"
"아니! 내 말은…… 그냥 보기에 그렇다는 거야."
테어도어는 지금도 그 빨간 머리 여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가 무어라 건네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리니아는 약간의 질투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 또 다른 한 쌍의 커플이 리니아의 주의를 끌었다.
"어머, 니사 좀 봐!"
그들은 존의 팔에 안겨 있는 니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밤이 깊어 갔다. 리니아는 웨스트가드 성을 가진 남자들과 차례로 춤을 추었고,
곧잘 음이 틀리는 깽깽이 연주자,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이웃 사람들,
그리고 교육위원회 회장인 오스카 쿤스턴과도 짝을 이뤄 춤을 추었다. 그들은
모두 실력이 좋았지만, 테어도어만큼 잘 추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그와
춤을 추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모든 여자들과는 춤을
추면서도 그녀만은 제외시켰다.
밴드가 잠시 쉬는 틈을 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즐겁게 보내고 있소?"
테어도어가 다가와 물었다.
"너무 재미있어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걸까?
그녀는 존과 춤을 추었다. 그리고 빌과 두 번 이상, 레이먼드와도 추었다.
그리고 나서 테어도어가 빨간 머리 여자와 플로어 저편으로 또다시 사라져
버린 동안, 클라라에게로 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테어도어를 찾았지만,
그는 자신의 파트너와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테어도어! 이리로 와서 내게 춤 신청을 하란 말야! 마침내 테어도어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자 리니아의 심장은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클라라를 플로어 뒤쪽으로 이끌고 가 버렸고, 그리고 잠시 후에는 다시
그 빨간머리와 춤을 추려고 하고 있었다. 말뚝에 기대 서서 옥수수나 먹고
있어야 할 것처럼 생긴 여자와 말이다! 도대체 그가 의도하고 있는 게 뭘까?날
밤새도록 무시하겠다는 건가?
리니아의 분노가 여전히 가라앉지 못해 부글거리고 있을 때 였다. 러스티
보너가 그녀 앞에 나타나 모자를 벗어 들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춤추실래요, 선생님?"
그녀는 플로어 가장자리에 서서 이미 두 곡의 연주가 끝날 동안 멀뚱거리며
서 있던 터였다 테어도어는 그녀를 계속해서 모르는 척 무시했다.
자 보라구, 테어도어!
"이 곡은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그는 팔 안에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왈츠에 몸을 맡기는 대신 노련한 발 동작으로 움직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주물러 댔다.
다른 남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눈을 뜨면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속눈썹의 숫자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눈을 반쯤 내려뜨자. 그녀는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겨우 떨리는 미소로 답례를 하자 그는 그녀의 등뒤로
양손을 보내 깍지를 끼었다. 그의 허리띠 버클이 그녀의 허리에 살짝 닿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즐겨 봐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가 질질 끄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네? 네……."
"생각보다 춤을 잘 추는데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솔직히 말해서, 난 다른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알고 싶지도 않구요."
"보너 씨……."
"러스티예요."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넓적다리를 자기 다리로 꾹꾹 찔렀다.
"당신 이름은 뭐죠?"
"리니아."
"린나이누."
그는 혀를 굴려 가며 한 음절 한 음절 음미하듯 발음했다.
"이렇게 부르니, 예쁜 이름은 아니군요."
그녀는 누군가가 목구멍 속에 손가락이라도 푹 쑤셔 넣은 듯 속이 메슥거렸다.
나쁜 인간, 테어도어!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부드럽게 나오고 있는 것에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이 근방에 살고 있나 보죠, 러스티?"
"아뇨, 몬테나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 전에는 아이다호와 오클라호마에 있었구요."
"어머, 상당히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군요."
그는 하얀 이를 내놓으며 슬쩍 미소 짓더니 그녀에게 다시 느긋한 시선을
보내 왔다.
"대부분 로데오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죠. 그건 정열적인 인생을 살게
하거든요, 리니아."
"여기에서는 밀을 수확하는 일을 하나요?"
"로데오 경기를 하는 철이 지났으니, 마른 잠자리와 넉넉한 세 끼 식사를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죠."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 오자 그녀는 움찔했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대로라면
세 끼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날이 많았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낯선 여자들과 이런 식으로 춤을 추어 댔을 러스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올해 로데오 경기에서는 우승했나요?"
"오, 물론이죠."
그의 목소리는, 몸을 자꾸 접근해 오는 그의 행동만큼이나 느끼하고 끈적거렸다.
"당신이 내 팔에서 해방되고 나면, 내 허리띠의 버클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엘 파소에서 열린 수송아지 타기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받은 거죠."
그녀는 그로부터 떨어지려고 애를 썼지만,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가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는 바람에 그녀는 얼굴이 맞부딪치지 않도록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할 지경이었다.
"로데오 경기를 본 적이 있어요?"
그녀는 그에게 완전히 포위 당한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아…… 아뇨."
"내 허리띠의 버클을 볼래요?"
그녀의 얼굴이 그의 셔츠 색깔만큼이나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히코리 나무만큼이나 단단했다. 그는 낮고
쉰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턱 끝을 그녀의 판자놀이 부근에 부벼 댔다. 그리고
긴 뿔소가 새겨진 벨트의 버클을 그녀의 복부 부근에 대고 문질렀다.
테어도어, 제발 이리 와서 날 좀 구해 줘요!
"당신의 뺨이 온통 붉게 물들었군요. 더워요, 귀여운 아가씨?"
"약간요."
그녀는 새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바깥은 시원할 텐데…… 나가 볼래요?"
"그럴 생각은 없……."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요. 자, 나를 따라와요. 우리 나가서 별을 헤아려
봅시다."
그녀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테어도어가 이사벨 를러와 웃어 대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더 이상 핑계 대는 일을 그만두어 버렸다. 러스티는
사다리를 그녀 앞으로 끌어당긴 후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서 위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어서 내려와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테어도어가 자신이 사라진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만약 그가 어디에 갔다 왔느냐고 물어
본다면? 러스티와 함께 별을 헤아리다가 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고소할까?
"이봐요, 올 거예요, 아니면……."
사다리를 내려가려는 찰라, 러스티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녀는 그의 억센 손에 잡힌 채 공중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비명을
질렀다.
바깥에는 달이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별들과 함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달아오른 그녀의 뺨에 와 닿는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오, 춤을 추고 나니까 덥군요."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재미있었소?"
"오, 그래요. 당신이 춤을 잘 추니까, 따라 추기가 훨씬 수월했어요."
"좋아요. 이번엔 다른 걸 좀 가르쳐 줄까 하는데……."
그는 그녀의 손을 낚아챈 뒤 한 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건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쪽으로 가서 멈춰 선 그는 갑자기 그녀의 팔을 꽉 움켜 쥐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보도록 끌어당긴 뒤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춤을 많이 추어 보지도 못했고, 그리고 로데오 경기도
본 적이 없고……. 귀여운 리니아, 내게 얘기해 봐요. 키스해 본 적은 있소?"
"무, 물론 키스해 본 적 있어요!"
그녀는 남자와 키스를 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설명할
수 없는 홍분 상태에 빠져 거짓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술에 키스하자 그녀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을
듯 쿵쾅거렸고, 스릴감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의 입술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불쾌하다고만 은 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모자 챙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로 온몸의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다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뒤덮었다.
이번에는 뜨겁고 축축한 그의 혀끝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게 뭐지? 충격이 그녀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손가락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겨우
발가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온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였다. 그의 혀는 그녀의
입술 언저리까지 축축해지도록 계속해서 빨고 핥아 댔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손의 힘을 늦추지 않은 채 명령했다.
"입술을 벌려 봐요. 더 근사한……."
"싫어요……."
그의 혀가, 말을 하느라 잠시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를 돌로 지은 창고 벽 쪽에 밀어붙인 뒤 젖가슴을 움켜 쥐었다.
온몸을 뒤틀며 저항했지만, 그는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당황해 어쩔줄 모르는 동안 마음대로 그녀의 몸을 주물럭거렸다. 입 속에서
난폭하게 움직여 대는 그의 혀와 거친 손놀림, 그리고 아프게 머리를 눌러
오는 벽 때문에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만!"
그의 입이 다시 그녀의 간청을 숨막히도록 덮어 버렸다. 그녀는 거세게 몸을
비틀어 간신히 그의 입술에서 풀려 나왔다.
"그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벽 쪽에 더욱 세게 밀어붙인 뒤,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비벼 대기 시작했다. 심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가슴을 덮어 왔다. 그녀는 숨이 막힐 정도로 흐느껴
울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그때 테어도어의 조용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거기 있는 게 선생님 맞소?"
가슴을 누르고 있던 손이 사라지고, 겨우 그녀의 발이 땅으로 내려왔다.
안도감에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며 다시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테어도어의 건장하고 거대한 체구 안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너무나
창피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러스티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느릿느릿 돌아서며 대답했다.
"우리는 로데오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웨스트가드 씨?"
갑자기 테어도어가 리니아의 손목을 휙 잡아챘다.
"당신은 정말 바보요! 저런 남자랑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생각지 못했단 말이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리라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소?"
"자, 잠깐만요, 웨스트가드."
러스티가 느릿느릿 말했다.
테어도어는 리니아의 손목을 꽉 붙든 채 러스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여자는 아직 열여덟 살이오, 보너! 당신 나이와 어울릴만한 여자를 골라야
하잖소?"
"그녀도 거부하지 않았소."
러스티는 다시 느긋한 어투로 대답했다.
"오, 거부하지 않았다구? 당신 말은 들을 가치조차 없소. 내일 아침에 당신
임금을 챙겨서 떠나도록 하시오. 더 이상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러스티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어도어 곁을 지나 다시 댄스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다시 댄스장으로 돌아가지도 마시오. 당신과 브란덴베르그 선생이 함께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도록 하고싶지 않으니까."
테어도어는 앞서 발걸음을 내딛으며 리니아를 잡아당겼다.
"이리 오시오."
"테어도어, 나를 내버려 둬요!"
그녀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쳤지만, 그는 성난 몸짓으로 그녀를
창고 쪽으로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당신이 약간의 상식이라도 배운 후에야 놔 주겠소.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함께 댄스장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우리가 밖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온 걸로 생각하도록 해야하오.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당신 아버지
대신 내가 당신에게 엄한 벌을 내리고 말 거요!"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나를 당장 내버려 둬요!"
반항심에 가득 찬 아이 취급을 받으며 난폭하게 끌려 오던 그녀가 다시 한
번 저항을 시도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간 뒤, 사다리 쪽으로 그녀를 떠밀었다.
"자, 이제 저 위로 올라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
는 거요!"
그녀는 마지못해 사다리를 오르다가 치맛자락이 발에 걸려 기우뚱하자 속으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한 불량배에 의해 그녀의 모든 것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뻔했다
테어도어는 한마디 양해도 없이 그녀의 팔꿈치를 꽉 움켜잡고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그가 창백한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이는 동안, 그녀는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이끌려 다녔다. 그는 이를 뿌드득 갈며 그녀에게 명령했다.
"허수아비랑 춤을 춰도 이것보다는 낫겠소. 즐겁게 추는 척이라도 좀 해봐요."
그녀는 긴장을 풀고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곧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 이러고 못 있겠어요, 테어도어. 날 제발 보내 줘요."
"당신은 춤을 추어야 하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요."
그녀는 그와 춤을 추고 싶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녀는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의 등뒤에 놓여 있는
테어도어의 손은 분노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가슴에 쌓인 설움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목이 콱 잠기고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테어도어……. 나를 가게 내버려 둬요. 지금 보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울어 버리게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 둘 다 난처하게
될 거예요. 제발……."
테어도어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끌더니 니사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브란덴베르그 선생이 몸이 별로 안 좋은가봐요.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돌아올게요."
그녀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테어도어가 그녀의 뒤에 와 있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자 마음이 흔들렸다. 드디어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휙 돌려 벽 쪽으로 돌아서
버렸다.
"리니아, 이리 와요. 이곳에서 어서 벗어납시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리니아라고 불렀다. 그녀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꿈벅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동안에도 그녀는 축 늘어진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보너는 아침이면 떠나고 없을 거요. 이제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오, 테…… 테어도어. 난 너무 부…… 부끄러워요."
그는 호주머니 속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당신은 아직 어려요. 난 당신이 보너가 어떻게 나오리라 는걸 알면서 따라
갔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녀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뺨에 생긴 은빛 눈물 자국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난…… 난 몰랐어요. 오, 정말이에요. 테어도어……."
그는 심장에 가죽끈이 단단히 매어지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화가 누그러들었다.
"난 당신을 믿소, 조그만 아가씨.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낯선 남자를 함부로
따라나가선 안 돼요. 당신 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들려준 적도 없소?"
"없…… 없어요."
그녀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미…… 미안해요, 테어도어. 그, 그는 우리가 다, 단지 밖으로 나가 찬……
찬바람을 쐬…… 쐬는 것뿐이라고 말했어요. 그…… 그런데 그 다음에 그는
내게 키…… 나,난 단지 키…… 키스가 어떤 건지 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녀는 어깨가 들썩이고 고개가 흔들릴 정도로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 그래서 나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의 가슴에
기대어 왔다.
그의 손이 호주머니에서 나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쉬, 작은아가씨. 울 일이 아니오. 그냥 좋은 수업을 받은 셈 칩시다."
그의 어깨에 기댄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거예요. 나, 난 학교 선생님이잖아요.
거, 거기엔 학생들도 있었는데 ……."
"아무도 모를 거요. 자, 이제 눈물을 그쳐요."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의 셔츠에 축축하게 얼룩이 생겼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부러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가 긴장된 소리로 울려 나왔다.
"당신도 아다시피, 난 우는 여자를 달래는 일에는 전혀 익숙치가 않소."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한 줄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내 얼굴이 엉망이죠? 손수건
있으세요?"
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가 눈물을
깨끗이 닦아내자 그는 조금 안심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달빛이 얼룩져 있었고,
입술은 도톰하게 부풀어올라 있었으며,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보너의 입술과 손이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졌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그놈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갑자기 그의 목에 양팔을 감더니 축축한 뺨을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고마워요, 테어도어."
리니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당신을 창고 밖에서 보았을 때처럼 사람이 반가웠던 적은 없었어요."
그는 눈을 감았다. 이윽고 입술 사이로 거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그가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가슴으로 찰싹 달라붙으며 그의 온몸에 불을
질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살갗에서는 아몬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몸을 딱딱히 긴장시키며 그녀를 조용히 밀쳐냈다.
"자, 내가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그녀는 고분고분하게 뒤로 물러났지만, 한참 동안이나 두시람 사이의 빈
공간을 말없이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왜 나하고 춤을 추지 않았죠?"
그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실을 얘기할 순 없다 해도, 굳이
거짓말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신은 나를 뺀 모든 여자들과 춤을 추었어요. 결국 당신이 나를 러스티와
바깥으로 나가도록 종용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난 당신에게 질투심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거든요."
"나…… 나에게?"
"왜 내게 춤 신청을 안 했죠?"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춤을 추었소, 그렇잖소?"
"그건 춤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좋아요, 그럼 왜 나를 구해 주었죠?"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그가 손으로 제지했다.
"리니아!"
경고였다.
"왜요?"
"왜인지는 당신도 알 거요. 더 이상 묻지 말아요."
"왜 구해 줬죠? 말해 봐요, 테디 왜죠?"
그의 가슴에 불길이 일었다.
"리니아……."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뿐이었다.
"왜……."
그녀의 질문이 거의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가까이 다가선 그녀에게서 다시 아몬드 향이 느껴졌다 그녀는 거의 메를
쓰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 잡힌 그녀의 팔이 전율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손이 그녀를 확 움켜쥐었다.
이 순간, 그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팔이 들어 올려졌고 두 사람의
몸이 뜨겁게 하나로 조여졌다. 그녀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떻게 키스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여린 젖가슴은 그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달콤하지만 꼭 다물린 그녀의
입술이 한동안 그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그는 그 느낌을 마음껏 음미했다.
그러나 다시 상식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자 그는 그녀를 떼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가을 밤 속으로 거칠게 퍼져 나갔다.
"러스티 보너와 키스했을 때는 이,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요."
"쉬잇, 말하지 마시오."
"내게 다시 키스해 줘요. 제발, 테디……."
"안 돼!"
"하지만……."
"안 된다고 했잖소. 애초에 이러지 말았어야 했던 거요."
"왜요?"
그는 질문을 무시한 채 그녀의 팔을 이끌어 마차 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장 올라타시오!"
그가 거칠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테어도어……."
쌀쌀한 밤 공기를 가르며 한참을 달렸을 때에야 그들은 그녀의 코트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니아가 와들와들 떨면서 바싹 몸을 움츠리자
테어도어가 조용히 자기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다시 가서 코트를 가지고 오겠소?"
"아뇨, 그냥 집으로 갈래요."
바싹 웅크리고 앉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고, 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조여 왔다.
(하권에 계속)
<◈ 옮긴이>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서 백과사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옮긴 책에 <내가 선택한 남자>등이 있다.
<◈ 저자 소개>
라빌 스펜서
Lavyle Spencer
책 판매량이 2000만 부를 돌파한 경이로운 로맨스 작가이다.
그는 1979년 처녀작을 발표한 뒤로 멈출 줄 모르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쳐
세계적인 로맨스 작가로 발돋움하였다.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데다, 지금은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인생과 사랑에 대한 독특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로 늘 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감싸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