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1화 (11/20)

<11>

그날 밤, 리니아는 마구실에서 풍차의 새로운 날개를 만들고 있는 테어도어를

찾아냈다. 그는 한 쪽 무릎에 나무로 만든 풍차 날개를 올려놓고는 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테어도어, 잠깐만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풍차 날개가 바닥에 긁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뺨이 심홍색으로 달아올랐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다행히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피해

다니느라 애쓴 보람도 없이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치자 톱자루를 들고 있는

그의 주먹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들어가도 돼요?"

"여긴 그리 넓지 않소."

그는 바닥에 떨어진 풍차 날개를 들어 올려 다시 작업을 시작하며 대답했다.

"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당신이 앉은 곳에서 떨어져 앉도록 할게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못 통 위에 자리를 잡았다.

"테어도어, 학교 일로 문제가 좀 있어서 왔어요.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데

제게 조언을 좀 해주실 수 있겠어요?"

그녀의 눈길이 여전히 테어도어에게 머물러 있는 동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테어도어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사람은 없었다. 특히 여자들은!

니사는 독재자였고, 메린다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시기에조차 그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았었다. 그의 곁에서 도망칠 때에도 그는 메린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리니아 브란덴베르그는 처음부터 달랐다.

못 통 위에 요정 같은 포즈로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다소곳이 올려놓은

그녀의 커다랗고 푸른 두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조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테어도어는 일감을 옆으로 치워 놓고 온 신경을 그녀에게 집중했다.

"무슨 일이오?"

"알렌 세버트 때문이에요."

"알렌 세버트?"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애가 당신에게 뭔가 골칫거리라도 안겨 됐소?"

"네."

"그런데 왜 내게 온 거요?"

"당신이 내 친구이기 때문이죠."

"내가?"

그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녀는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요, 난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알렌이 계속 그렇게 골치를

썩히거든 당신에게 상의해 보라고 클라라가 내게 얘기해 줬거든요."

테어도어는 새삼 친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가족들

외에 달리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튼 친구가 생겼다니 듣기에 좋았다.

비록 그녀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알렌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그러는 거요?"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지만, 증명할 수 없는 사건들은 무진장해요.

첫 수업 때부터 그애는 작은 폭탄 같았어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아이들을

못살게 굴어요. 특히 프란시스는 완전히 그애의 놀이 감이고, 심지어는 나한테도……."

"프란시스? 내 조카 프란시스를 말하는 거요?"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문제에는 늘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던

그가 갑자기 공격적 자세를 취하자 남성다운 인상이 짙어졌다. 테어도어에게도

프란시스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늘 우둔하다고 놀려 대죠. 알렌은 아이들의 약점을 꼬집어내 놀려대는 데

아주 능숙해요.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프란시스의

땋은 머리를 조금씩 잘라 낸 것도 알렌의 소행 같아요. 그리고 프란시스가

변소에 있는 동안 문을 잠그고 뱀을 집어넣은 것도. 이번엔 여자아이들의 변소

뒷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놓은 것을 발견했죠. 모든 게 알렌의 짓이라는

걸 증명할 순 없지만, 난……."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나서 두 손을 싹싹비비며 몸을 떨었다.

테어도어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

"당신에게 한 짓은 뭐요?"

그녀는 재빨리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막연한 추측에 불과했고, 자신의 가슴을 알렌이 훔쳐보고

있었노라고 테어도어에게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오, 아뇨. 내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튼 그애가 저지른 말썽은

그것만이 아녜요. 그 외에도 자질구레한 것들이 아주 많죠. 그런데 문제는

그애의 장난이 날이 갈수록 은밀해져 가고 있다는 거예요. 심한 장난일수록

흔적을 남기는 일이 없죠. 그리고 알렌은…… 다른 사람이 상처 입는 걸 보면서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아이 집에 찾아갔을 때, 그런 얘기를 해봤소?"

"그러려고 노력했지요. 그러나 그애 엄마가 금쪽같은 자기 아들에 대한 내

얘기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어요. 세버트 목사님이라도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려나 하는 기대를 해봤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목사님 역시 자기 아내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어요. 성경을 끼고 사는

자기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리니아는 바닥을 쳐다보며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틴은 나쁜 사람이 아니오. 단지 릴리언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오. 그는 자기 주장이 없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애원하듯 말했다.

"그들의 도움 없이 나 혼자 힘으로 알렌을 다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테어도어의 눈동자에 따스한 동요가 일었다. 그는 겨드랑이가 꽉 조이도록

팔짱을 꼈다.

"알렌이 두렵소?"

"두렵냐구요?"

잠깐 동안 그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리니아가 떨리는 눈빛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뇨."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어쨌든 프란시스의 일도 마음에 걸렸다. 테어도어는

조카들 중에서도 특히 그애를 아끼고 귀여워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때, 그

애에게서 향료 알이 든 병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향기를 가슴속으로 다시금 기억해 내며, 그는 갑자기 결심을 굳혔다.

"지금 내게 했던 이야기들을 크리스찬에게 다시 들려 주시오. 월요일부터

그 앨 학교에 보내겠소. 그럼, 알렌도 지금처럼 마음놓고 말썽을 일으키진

못할 거요."

리니아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떨렸다.

"크…… 크리스찬을요?"

그녀가 되물었다.

테어도어, 그 고집불통이 상황을 직시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와

약간 튀어나온 듯한 턱, 무적의 가슴을 가진 그가 로마 시대의 투사처럼 어깨를

뒤로 젖히며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세버트처럼 쓸모 없는 녀석은 가끔씩 계단에서 굴러 떨어뜨려 줄 자기보다

덩치 큰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소."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에요, 테어도어!"

"어쩐 일이에요 테어도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가 투덜거렸다.

"밀밭 일을 거들 일손을 하나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그는 그녀를 향해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렇게 자기 만족에 빠지지 마시오, 선생. 프란시스는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향료알이 든 병을 선물했었소. 그리고……."

"향료말이 든 병이라구요!"

리니아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킬킬거렸다.

"당신 얼굴에서 그 웃음을 당장 지워 버리시오. 물론, 프란시스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느리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그애의 마음은 황금보다도 더 귀할

거요. 앞으로 한 번만 더 프란시스를 괴롭히면 알렌을 내 손으로 흔들어 놓고

말 테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크리스찬이 알아서 잘할 테니"

월요일 아침에는,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나머지 고학년 학생들이 모두 등교했다.

그들은 수수께끼 같은 힘에 의해 한꺼번에 들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들의 출현은 교실 안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 왔다. 분주함과 새로운 긴장감이

곁들여진 쾌활한 분위기 속에서 저학년 아이들은 새로 온 고 학년들을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최고학년 아이들과 최저학년 아이들 사이에 기대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우정이 싹텄다. 큰 아이들은 꼬마들을 따돌리는 대신 형이나 오빠처럼 따뜻하게

돌봐 주었다.

운동장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땅다람쥐 사냥철이 지났기 때문에, 점심 시간이

되면 리니아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공놀이를 했다.

리니아도 공놀이를 좋아했다. 도시 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타자의 몸에 닿을락말락 공을 던지자 몸에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일곱 살짜리 소녀가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머리에 리본을 묶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리니아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모든 학생들이 출석을 하게 되자 그녀는 벼르고 벼르던 식사 예절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세익스피어는 '불안하게 먹은 음식은 소화 불량을 일으킨다'고 했지만,

난 감히 말하고 싶어요. 그는 아마 배고픈 노르웨이인들이 무리지어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 우리 오늘은 식사 예절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기로 해요."

남자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킥킥 웃어 댔다. 그러나 그녀는 확고

부동하게 밀고 나갔다. 양손을 허리에 얹은 극적인 포즈로 교실 안을 왔다갔다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트림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웃음 소리가 겨우 잦아들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함께 웃지 않았음을 깨닫고,

스스로 표정을 단속했다.

"내가 이곳에 선생님으로 있는 한, 이 교실 안에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그렇죠?"

침묵이 시작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알렌 세버트가 천장이 울릴

정도로 크게 트림을 내뱉었다.

아까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리니아는 알렌의 책상 앞에 와서 조용히 멈춰 섰다. 동시에 철썩 하는 소리가

나면서 알렌이 자리에서 나동그라졌다.

단두대 칼날이 떨어지듯 순식간에 웃음 소리가 멈춰졌다.

리니아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렌, 네가 지금 해야 할 가장 적당한 말은 '실례했습니다'야. 자, 반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보도록 해요."

"실례했습니다."

아직도 귀가 멍멍해 다른 대안을 구하지 못한 알렌은 앵무새처럼 그녀의

말을 따라했다.

그 이후로 리니아는 교실에서 트림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알렌 세버트는 따귀 맞은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10월에 첫 서리가 내리자 일하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리니아는 집

밖으로 한가로이 걸어나오다가 풍차 옆쪽에서 니사와 이야기하는 낯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리니아, 이리로 건너와 봐요! 콥이 왔어요!"

콥이라면 12년 전부터 테어도어의 농장에서 추수일을 거들었다던 사람이었다.

그는 작달막한 키에 혈색이 좋은 폴란드출신의 농부였는데, 웃옷에 달린 주머니에

항상 코담배 깡통을 넣고 다녀서 붙은 별명이 콥이라고 했다. 그는 양모로

만든 납작한 모자를 벗고 리니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갈색으로 변해

버린 침을 뒈퉤 뱉어 내면서 다른 망나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콥은 짐, 스탄, 그리고 그 외 여섯 명과 한 조를 이루어 왔다. 그 중 다섯

명은 예전에도 왔던 사람들이었지만 나머지 세 명은 테어도어의 농장이 처음이었다.

며칠 후, 러스티 보너라는 새로운 일꾼이 찾아왔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카우보이

장화에 스테트슨 모자를 구겨 쓰고 텍사스 롱혼이 새겨져 있는 큰 접시만한

은제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머릿결은 오닉스 색이 돌

정도로 까맣게 반짝거렸고, 미소는 치누크 바람처럼 장난스러웠다.

리니아는 교사용 지침서와 시험지를 들고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부엌문 가까이에

서서 니사와 얘기를 나누는 그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분은 누구시죠?"

그는 리니아를 가리키며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쪽은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이에요. 우리와 함께 살고 있죠."

니사는 그 남자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쪽은 러스티 보너예요. 방금 전에 일하러 왔어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리니아는 당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적인

관심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남자는 난생 처음 보았던 것이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는 느리고 점잖은 목소리로 뻔뻔스럽게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선생님"

그가 말하는 동안, 산학과 가죽끈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그가 모자를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리자 빨아들일 듯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길들여지지 않은 까만 머리털이 앞이마 위로 장난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느린

동작으로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보며, 그녀는 그와 손을 마주 잡기도 전에

이미 그 촉감이 어떠하리라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강단 있고 단단하고 억센

느낌.

"안녕하세요, 보너 씨."

말을 건넨 후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름은 러스티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나서야 그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이름이 나타내는 뜻 그대로 그의 살결은 녹이 슬은 듯 벌겋게 태양에 그을어

있었다. 웃는 모습 또한 녹이 슨 고철 마냥 흐물흐물거렸다. 그는 가뭄이 든

해에 자란 사람처럼 비쩍 말랐지만, 근육질이 숨겨져 있는 듯 단단해 보였다.

"러스티라구요?"

그녀는 그를 향해 신경질적인 미소를 보낸 후 다시 니사를 쳐다보았다.

"지금 보니 정말 귀엽게 생겼군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로데오 경기에 참가하느라 학교를 때려치운 것이 갑자기 후회스러운데요."

리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닳아빠진 그의 장화와 바닥에 딩굴고 있는 침낭

쪽으로 시선을 내려뜨리고 말았다. 그는 여자를 꾀는 데는 이골이 난 듯 그녀에게

지독하게 멋진 시선을 보내며 그녀의 몸매 치수와 나이를 어림잡는 것 같았다.

드디어 니사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창고에 침낭을 펴도록 해요. 다른 사람들도 축사 안에 있는 건초 창고에

머물고 있으니 거기로 가면 될 거예요. 해가 뜨기 한 시간 전에는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고, 저녁 식사는 요리 마차가 올 때까지는 우리 집 부엌에서 하게

될 거예요."

떠돌이 생활에 익숙한 듯 러스티 보너는 잠자리에 대해 까다로운 평을 달지

않았다. 아마도 매력적이고 여성스러움이 넘치는 리니아가 앞에 서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니사에게로 무뚝뚝한 눈길을 돌린 뒤, 모자를 벗으며 느릿느릿

말했다.

"오, 고마워요, 부인 친절하시군요."

잠시 후, 그는 한 손가락으로 침낭 끄트머리를 잡아 어깨에 걸치고는 모자를

푹 눌러 쓴 뒤 축사를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마치 살살 부는 미풍에

소나무가 흔들리듯 엉덩이가 실룩거렸다

"어휴!"

니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정말 어휴네요!"

뒷주머니가 터질 듯 확 끼는 청바지 속에서 흔들리는 그의 엉덩이를 쳐다보며

리니아도 한숨을 내쉬었다.

리니아를 쳐다보며 니사가 선언하듯 말했다.

"저 남자를 고용한 건 정말이지 대 실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대더니 손가락으로 리니아 쪽을 가리키며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 가능한 한 저 남자를 피해 다니는 게 좋겠어요. 알아듣겠어요, 내

말?"

기분이 언짢아진 니사는 연신 투덜거리며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런 남자가 여자들에게 베푸는 친절은 전혀 고마운 게 아니에요."

탈곡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직전의 일시적 정적이 고여 있는 일요일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미루나무들이 리틀머릭 강으로 금이파리를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고, 송꼬리토끼들은 살이 오를 대로 올랐다. 사향쥐는 겨울을 준비하는

탓인지 털이 하도 두꺼워 목에 주름이 몇 겹씩 잡힐 정도였다.

바람은 차가워졌지만, 아직 추수하지 않은 수수밭을 은신처 삼아 크리스찬과

레이먼드는 점심 후의 나른함을 즐기고있었다. 두 사람은 키도, 얼굴형도 서로

비슷해 올려다보았다.

"올해는 밍크를 잡으러 갈 생각이야."

크리스찬이 불쑥 말을 꺼냈다.

"밍크?"

레이먼드는 일부러 낄낄거리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행운을 빌어. 그렇지만 사향쥐 사냥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서쪽에 밍크가 상당히 많이 살아. 난 그쪽으로 갈 거야."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로이는 고개를 돌려 크리스찬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밍크는 무슨 일로 잡으려고?"

"아무것도 아냐."

크리스찬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레이먼드는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 흘러가는 구름을 응시했다

"이봐, 레이, 넌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글쎄……."

V자형 대열을 이루며 플로리다 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가 두 사람의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왔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경이에 찬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아한 피조물의 움직임은 살랑이는 바람결 속에 아득한 울림소리만을

남겨 놓은 채 멀리 사라져 갔다. 팔베개를 하고 누운 두 사람의 심장이 뜨겁게

차 올랐다.

"이봐,레이?"

"음?"

"너, 여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레이먼드는 기러기가 내는 쉰 목소리를 내며 낄낄 웃어 댔다.

"숲속에서 야생 곰이 무슨 짓이라도 벌이고 있던?"

그들은 성인 남자들이 쓰는 말을 흉내내며 자신들도 어른이 된 듯한 착각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어떤 선물을 해야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봐줄까?"

크리스찬이 마치 꿈길을 헤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물?"

그리고 나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찬은 레이먼드에게 잠시 경계

어린 눈초리를 던진 뒤, 다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며 한마디 꺼냈다.

"밍크 코트는 어떨까?"

레이먼드의 머리가 수수밭 위로 번쩍 올라왔다.

"밍크 코트라고?"

갑자기 그는 배를 움켜 쥐고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밍크를 잡아서 코트를 만들려구?"

레이먼드는 더욱 큰소리로 수선스럽게 웃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거북이처럼

발딱 뒤집어져서 데구르르 구르기까지 했다. 드디어 크리스찬이 벌떡 일어나

그의 복부에 일격을 가했다.

"아휴, 닥쳐. 너한테 얘기한 내가 잘못이지. 누구에게라도 얘기했다간 각오해.

노스 다코타 밖으로 집어던져 버리고 말테니!"

레이먼드는 아직 몸을 구부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밍…… 밍크 코트!"

태양을 향해 손을 펼치며 앞으로 쿵하고 쓰러지는 순간, 레이먼드가 다시

말했다.

"야아, 코트 만들 만큼 밍크를 잡으려면, 네 아버지 나이를 먹을 때까지는

밍크만 잡으러 다녀야 될 거다, 크크크."

크리스찬은 배 위에 손 깍지를 긴 채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누웠다.

"그냥 해본 소리다, 이 바보 멍청아. 나도 그 정도는 알고있어. 하지만 밍크로

벙어리 장갑을 만들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갑자기 레이먼드는 크리스찬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

쪽 팔꿈치를 세워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누군데?"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레이먼드는 한 쪽 엉덩이에 몸무게를 실어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너 미쳤니?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보다 겨우 두 살밖에 많지 않아."

레이먼드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의 사촌을 쳐다보았다.

"너 미쳤구나!"

"글쎄,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레이먼드는 크리스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긴 침묵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온몸을 수수대 쪽으로 날리며 벌렁 드러누워 외쳤다.

"우와!"

흥분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드디어 크리스찬이 긴 침묵을 깨뜨렸다.

"너 여자애랑 키스해 본 적 있니?"

"한 번."

"누구랑?"

"패트리샤 로멘."

"패트리샤 로멘! 그 수재?"

"그래, 머리가 좋은 아이지"

"어땠어?"

"글쎄, 한참 오래 전 일이라서……. 패트리샤는 이 근처에서 나와 사촌지간이

아닌 유일한 여자애잖아 하지만 다시 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 앤 나보다는 너와 키스하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랑?"

크리스찬은 놀라움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을 크게 뜨고 보라구, 웨스트가드. 네가 교실 안을 왔다갔다 할 때마다

패트리샤의 눈빛이 널 좇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야?"

"패트리샤가 그했단 말이지?"

크리스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수탉처럼 가슴을 부풀리며 팔을 들어

날개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레이먼드가 야유의 주먹을 한 방 날리며 그런

크리스찬을 덮쳤다.

크리스찬은 문득 아버지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해마다 이맘때면 요리

마차를 몰고 오는 이사벨을 떠올렸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자란

존재가 얼마나 수수께끼 같은 창조물인지, 그리고 더 이상 성가신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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