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10화 (10/20)

<10>

리니아가 학생들의 가정마다 편지를 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여기저기서

다투어 그녀를 초대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 주내내 가정 방문을 다녀야 했다.

그녀에게서 수업을 받는 아이들 중 올머와 헬렌 웨스트가드의 아이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우선 그 집부터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올머가 테어도어의

형이란 점도 그 결정에 약간의 영향을 미쳤다. 그녀로선 테어도어와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사랑으로 충만한 가정임을 느낄 수 있었다.

테어도어의 집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집이었다.

리니아가 도착했을 때, 마침 맏이부터 그 밑으로 두 동생들은 아버지를 도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은 부엌에서 엄마를 돕고

있었다.

식사하는 분위기는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테어도어의 집과 비슷했다.

그녀는 식사시간 내내 곁에 앉아 자신을 유심히 뜯어보는 그 집 장남 빌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소년이라구? 그는 이미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스물한 살 정도로, 육체적으로는

완전히 성숙한 건장한 남자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열여덟 살 된 그의

여동생 도리스는 1월에 결혼식 날짜를 받아 놓은 예비 신부였다. 학교 수업과

마찬가지로 결혼식도 농사일이 바쁜 시기를 피해 잡아야 했으리라. 그녀가

첫 수업 때 잃어버렸던 학생들, 레이먼드와 토니는 그녀의 자신감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건 학교에 결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얘기했지만, 그애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을 뿐이다.

프란시스와 소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키폭키득 웃어 댔다. 선생님이

자신들의 집에 제일 먼저 찾아와 준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일부러 수업 일정에 대한 화제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루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고, 그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중하지만 아주 단호한

태도로 밀 수확이 끝나야 아이들이 학교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해왔을

뿐이다.

가족들이 모두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빌이

앞으로 나서며 클리퍼의 앞길을 가로막아 멈춰 서게 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네? 내가 깜박하고 두고 나온 것이라도 있나요?"

"아니에요.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어서 하는 얘기는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아이들이 수확을 도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항상 그래온 일이니까요.

당신도 알고 계시죠?"

"그래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논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

리니아는 반복되는 논쟁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녀가 논쟁이 계속되리라

예상하는 순간, 빌은 언제 그 이야기를 꺼냈냐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클리퍼의 말 안장에 한손을 올려놓은 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매혹적인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끊임없이 관심의 메시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춤 잘 추시나요?"

순간, 그녀는 너무 놀라 아무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내…… 내가 춤을 잘 추느냐구요?"

"네, 그래요! 아시잖아요. 하나, 둘, 셋……."

그녀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그거요. 조금은 할 줄 알지만……."

"좋았어요. 타작이 끝나고 나면 창고에서 뵙도록 해요. 추수가 끝나면 이곳엔

항상 춤과 음악이 있으니까요."

그녀에게 이처럼 노골적으로 호감을 보여 오는 남자는 여지껏 한명도 없었다.

그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빌이 공개적으로 호감을 표해 오자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프란시스와 소니는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킬킬거렸다. 리니아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요. 다시 만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뺨을 얼릴 듯 차가운 밤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말 위에서 그녀는 빌 웨스트가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햇빛에 바랜 금발 머리, 봄날의 클로버를 연상시키는

짙푸른 눈동자, 끝이 약간 구부러진 매부리코, 그리고 웃을 때마다 드러나

보이는 고르지 못한 치열……. 그는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얼굴과 남성답게 잘

발달된 근육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 남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글쎄 …….

미남이니?

약간.

매력적이니?

조금.

대담하니?

지금까지 만나 본 남자들 중 누구보다도 더 대담해.

그렇다면 그와 춤출 거니?

아마.

그러나 그와 춤추는 광경을 상상하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춤 상대는 테어도어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알렌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그애가 학교 생활에 협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과 관심을 할애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알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교실 분위기를 망쳐 놓았을 뿐이었다. 특히 기도 시간에는

연필로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거나 책상 위로 두 다리를 올려놓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란을 피워 댔다. 그리고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의 쿠키를 빼앗아

먹어 버리거나 아예 버리기도 했다. 리니아가 프란시스와 로즈안을 가장 귀여워한다는

걸 감지하고 나서는 아예 그 아이들을 점찍어 놓고 괴롭혀 대기 시작했다.

프란시스를 보고 바보천치라고 놀리며 욕을 하거나 그애의 치마를 들춰 팬티를

벗겨 내리기도 했다. 프란시스가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을 보는 동안 반달 모양의

틈 사이로 꽃뱀을 던져 넣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는 장난이 극에 달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곤 했다. 그리고 급우들 중 누군가를

못살게 굴거나 선생님을 괴롭힐 때마다 알렌의 표정에는 지극히 만족스런 빛이

감돌았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었다.

리니아는 알렌의 가정 방문이 지극히 공포스러웠지만, 순발력 있게 대처해

보기로 결심했다. 알렌의 집에 도착하니 아직 저녁 식사 시간 훨씬 전이었다.

놀랍게도, 알렌이 마중을 나와 클리퍼를 자기가 묶어 놓겠다고 말했다. 세버트

목사가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리니아는 그의 아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릴리언 세버트는 검은 머리칼을 산뜻하게 쓸어 올려 단정히 묶고 있었는데,

티없이 고운 상아빛 피부와 어울리지 않게 콧구멍이 상당히 넓은 매부리코였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녀의 담갈색 눈동자와 장방형의 입술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매부리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다른 농부의 아내들과는

달리 이랑무늬가 새겨진 황갈색 인조견 드레스 위에 횐색 오르간디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만든 양잿물 비누 냄새를 풍기는 대신 스피아민트향과

쑥국화향, 그리고 그외 여러 가지 향이 섞인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버트 목사의 집은 다른 농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현관 바닥에는 커다란

원형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부엌에는 밀을 가는 분말기가 놓인 장식장도 보였다.

중국식 찬장 맞은편으로는 거실과 부엌을 경계짓는 유리로 된 아치형 문이

달려 있었다.

또 벚나무로 만들어진 식탁 위에는 담갈색 식탁보가 덮여있었는데, 얼마쯤

지나자 레이스가 수놓인 냅킨과 수프가 담긴 그릇이 날라져 오기 시작했다.

알렌도 학교에서는 처치 곤란한 난폭꾼이었지만, 집에서는 얘기가 전혀 달랐다.

부모 앞에서는 거의 알랑방귀를 뀌듯 정중한 체했고, 심지어 식사가 시작될

때는 자기 어머니가 앉을 의자를 끌어내 주기도 했다. 존경스러울 정도의 세련된

행동과 공손함을 보였다. 나무랄 데 없는 식탁 매너까지 갖추고 있었다. 목소리

역시 학교에서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마틴 세버트가 명령을 내렸다.

"알렌, 이제 리비가 식탁 정리하는 걸 도와주어야지. 그래야 너희들의 임무가

완전히 끝나는 거다."

세버트 부인이 상냥한 목소리로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여보, 당신도 아다시피 그런 일은 남자애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리비가

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세버트 목사는 컵을 단단히 움켜 잡은 채 아내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식탁 주위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그러자 알렌이 엄마의 뺨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끝내줬어요. 엄마의 호박 파이는 정말 최고예요."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손을 토닥여 준 뒤 말했다.

"어서 올라가기나 해라. 너는 아첨꾼이야."

알렌의 탈출이 성공을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세버트 목사가 다시 끼여들었다.

"내일은 학교가 끝나고 일찍 돌아와서 상자에 장작을 가득 채워 넣을 수

있겠지?"

알렌은 이미 문 밖으로 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꽉 차 있는 걸요."

알렌의 발소리는 이미 거실을 지나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자기 방으로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렌이 사라지고 나자 리비가

식탁을 깨끗이 치웠다. 그리고는 그애 역시 사라져 버렸다.

"커피 좀 더 드실래요?"

세버트 부인이 세 사람의 컵에 커피를 다시 채우며 물었다.

식탁 주위로 침묵이 감돌았다. 리니아는 마음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얘깃거리를

꺼내 놓기 위해 용기를 짜내려고 노력했다. 목을 축이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는데, 긴장감으로 굳어진 위장까지 내려가는데 20분도 더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세버트 씨, 세버트 부인……."

한참 만에야 말을 꺼낸 리니아는 목사님이라고 불렀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옆으로 밀어 둔 채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렌에 대해 제가 말씀드리는 동안 어리둥절해하실지 모르겠군요."

세버트 부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세버트 목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렌에 관한 어떤 얘기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리니아가 말머리를 조심스레 꺼냈다.

"알렌은 이곳, 그러니까 집에 있을 때와 학교에 있을 때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 알렌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요. 부모님들이 학교에서

알렌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계셔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힘을 합쳐 어떻게든 그애를 바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바로잡는다구요?"

세버트 부인이 한 쪽 눈

섭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알렌은 어디에서나 똑바르게 처신하는 아이예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애가

학교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학교 탓이 아닐까요?"

그녀의 암시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다. 학교란 다름아닌 브란덴베르그 선생의

교육 방법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좌절감을 맛보고 있는 동안 세버트 부인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얼마나 잘해 나가실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어요."

그녀는 억지로 교양을 꾸미며 거만스레 말했다.

"사회성 측면에서 볼 때, 알렌은 다른 아이들과 친하게 잘 지내지 못해요.

놀이를 할 때도 그렇고,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마찬가지예요. 규범을 준수하는

문제도……. 그애는 일부러 규칙을 따르지 않아요.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죠. 한마디로 제멋대로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애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아이가 누구죠,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애

또래의 아이들 중 학교에 나오는 아이는 아무도 없어요. 당신은 열다섯 살

먹은 아이가 1∼2학년 아이들과 함께 돌차기 놀이나 하며 신나게 뛰어 놀길

원하나요?"

세버트 부인의 매끄럽지만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리니아의

자존심을 깎아 내렸다. 그녀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니사의 집이 차라리

고향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온몸이 떨려 왔지만, 차분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썼다.

"친하게 지낸다는 말이 이럴 때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리니아는 적절한 다른 단어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머릿속의

생각을 불쑥 내뱉고 말았다.

"알렌은 다른 아이들을 못살게 괴롭혀요."

"아이들은 누구나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예요. 나도 아이였을 때 그랬으니까요.

아마 이이도 그했을걸요. 안 그래요, 여보?"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비뚤어진 성격이 내재하지는 않는다. 리니아는

학부모에게 차마 그런 이야기까지는 꺼낼 수가 없었다.

세버트 목사는 아내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리고, 리니아에게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했다.

"정확히 그애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애초에 구체적인 사건을 일일이 이야기할 작정은 아니었지만, 알렌의 부모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 버렸다. 리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프란시스와 뱀에 얽힌 사건을 이야기했다.

릴리언 세버트가 물었다.

"알렌이 뱀을 잡는 걸 본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뇨, 그렇지만…….

"그럼, 됐군요."

세버트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리니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조건 자기 자식을

싸고도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리죠. 운동장에서 공차기 시합을 하게 되었을 때였어요.

알렌은 시합에 참여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는 프란시스가 점심으로 싸온 쿠키를

훔쳤죠. 프란시스가 내게 와서 알렌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세버트 씨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알렌이 훔쳤……."

"프란시스라구요?"

릴리언이 남편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아이가 프란시스 웨스트가드, 맞죠? 그 우둔한…….

올머와 헬렌의 자식 말예요."

리니아는 식탁 밑에 놓인 두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프란시스는 우둔하지 않아요. 그애는 단지 다른 아이들보다 동작이 조금

느릴 뿐이에요."

릴리언 세버트는 우아한 동작으로 커피를 들어올리더니 홀짝거리며 한 모금을

마셨다.

"아, 느리다…… 맞아요."

그녀는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의 달콤한 맛을 더 즐기려는지

다시 컵을 입가로 가져 갔다.

"어린아이가 한 말을 가지고 목사님의 아들을 도둑으로 단정지어도 되는

건가요?"

그녀는 비난하듯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거만스럽게 말했다.

"아무튼,"

그녀는 남편과 리니아를 향해 차례대로 활짝 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렌이 남의 쿠키를 훔쳤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난 알렌이 학교에

갈 때마다 도시락을 넉넉하게 싸주거든요. 그리고 아까도 들으셨겠지만, 그앤

내가 해주는 요리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해요. 그애가 쿠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엔

나도 동감이에요. 하지만 그앤 항상 충분한 양의 쿠키를 먹을 수 있도록 배려받고

있어요."

마틴 세버트가 앞쪽으로 몸을 구부리며 말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저로서도 알렌이 쿠키를 훔쳤다는 건 좀……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닐까요?"

리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에요. 모든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 프란시스의 쿠키를 빼앗은 적도 있어요. 그애가 되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몽땅 먹어치워 버리고 말았죠. 평소엔 빼앗은 쿠키를 양동이에

집어 처넣기 일쑤예요."

다시 세버트 부인이 아들을 변호하고 나졌다.

"당신은 그걸 보고 훔친다고 말할 수 있겠죠,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러나

나는 그걸 어린아이다운 장난이라고 말하고싶군요."

"내게 말할 기회를 좀 줘요."

세버트 목사가 끼어들었다.

"선생님도 아다시피, 안사람이나 나나 아이들을 기르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십계명입니다. 나도 알렌이 완벽하다고는 보지 않아요. 하지만

매일 밤 성경책을 읽으며 잠드는 아이가 도둑질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는 얘기군요."

리니아는 알렌이 적어 낸 단어들을 상기했다. 지겹고, 바보스럽고, 기도만

하고, 초콜릿 쿠키만 준다! 그 순간, 그녀는 그 단어들이 알렌 세버트를 상당히

잘 대변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알렌의 비뚤어진 성격이

그애의 부모에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렌의 부모 앞에 앉아 있는 동안, 리니아는 심한 무기력감을 느꼈다. 더

이상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알렌의 말썽이 장난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현실적인

증거가 더 필요했다. 그래야 목사 부부의 이해와 도움을 구할 수 있으리라.

"세버트 씨, 그리고 세버트 부인, 전 당신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느냐를

비판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또 그 부분에 대해 주제넘게 나서고 싶지도

않구요. 단지 제가 원하는 건, 알렌의 학교 생활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걸 인식해

주셨으면 하는 것뿐이에요.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해요. 제가 그애에게 무언가를 시키거나 부모님에게 도움을 바라는 건, 아직

그애에 대한 기대감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얘기도 되죠."

"특별히 그애가 시킨 일을 안 한 적이라도 있나요?"

세버트 부인이 다시 물었다.

리니아는 글짓기를 하라고 시켰을 때의 사건을 언급했다.

"그렇지만 그 단어들을 보고 당신은 무언가 느낀 게 있을테고……. 자, 그래서

지금 이렇게 우리 집에 와 계신 거잖아요."

"네, 하지만 그건……."

"요점은 말예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알렌은 아주 똑똑한 아이라는 거예요.

그건 그애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가 늘 해온 이야기이기도 하죠.

그런 아이일수록 최고가 될 때까지 끊임없는 도전을 필요로 하는 법인데, 당신의

교육방법 아래서는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군요."

세버트 부인이 너그러운 척하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니아의 얼굴은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은 이곳이 첫 부임지잖아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우리와 알게 된

지도 한 달이 채 안 되었구요. 그런데 당신은 알렌에게 벌써 문제아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하고 있어요. 그애는 이미 다섯 명의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받은

바 있는데, 모두 당신보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은 분들이었어요. 그리고……

남자들이었다는 점도 덧붙여 말하고 싶군요. 그런데 이제까지 한 번도 우리

아들이 문제아라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어요. 당신이 갑자가 그럴 얘기를

해서 저는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몰라요."

"릴리언, 난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

"그리고 나도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이 ……."

릴리언이 남편의 목소리를 덮어 버릴 정도로 큰소리로 다시 말문을 열자

리니아는 천장 위에 달린 전구 쪽으로 시선을돌려 버렸다.

"우리 아들의 장점을 곧 발견하게 될 거라고 믿어요, 마틴."

만약 세버트 목사가 아내의 말문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면, 그녀의 비난

섞인 표현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아마도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거예요. 다음번 저녁 식사

때는 선생님의 편견이 좀더 줄어들어 있길 바라요."

자신이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틴 세버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는 동안, 리니아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이 집에서 빨리 빠져나가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열기를 식힐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시군요. 그렇게 되길 저 역시 바라요."

리니아는 재빨리 동의를 표한 다음, 랩킨을 손에 쥐고 식탁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덧붙였다.

"굉장히 맛있었어요, 세버트 부인. 초대해 주셔서 고마워요."

"천만에요. 우린 언제라도 대환영인걸요. 우리 집 대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답니다."

리니아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릴리언은 리니아의 손이 마치 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시 머뭇거렸지만, 가능한 한 우아하게 손님을 배웅했다.

위층에는 식당 바로 위쪽에 알렌의 방이 있었다. 알렌은 리놀륨을 간 방바닥에

엉덩이를 찰싹 붙이고 앉아 벽난로의 통풍 조절 장치에 얼굴을 바싹 대고 있었다.

그 장치는 금속으로 된 판지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알렌 오빠, 내가 다 일러바칠 거야."

리비가 문간에서 속삭였다.

"그 통풍 장치로 남의 얘기를 엿들어서 는 안 된다는 걸 오빠도 알고 있을

텐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아빠와 약속했잖아."

알렌은 마룻바닥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에, 물론이지. 하지만 선생님은 저기 앉아 나에 관한 온갖 거짓과 욕지거리들을

늘어놓고 있었다구. 엄마, 아빠가 나를 문제아라고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총력을

기울이더라."

"알렌 세버트, 오빤 그렇게 말할 처지가 못될 텐데. 내가 아빠한테 모두

말할 거야!"

어느 틈엔가 여동생 곁으로 다가온 알렌은 리비의 한 쪽 팔을 아플 정도로

세게 비틀었다.

"어디 한 번 그래 봐, 이 돼지코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고 보면 알게

될 테니."

"오빤 나한테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내가 아빠께 말씀드리면, 아빠는 오빠한테

성서 구절을 암송하도록 시킬 거야." 알렌은 더욱 세게 리비의 팔을 비틀었다.

"오, 아프지? 글쎄, 네 고양이 꼬리에 등유가 묻으면 네가 무진장 기뻐할

거야? 고양이들은 엉덩이에 등유가 묻으면 정말 기찬 춤을 추지. 네가 함께

춤추자고 해보려무나. 펑!" 알렌은 리비의 턱을 치켜들더니 거칠게 흔들어

댔다. 그러자 리비의 파랗고 커다란 두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으앙, 알렌! 오빤 정말 나빠"

"맘대로 해. 대신 저 노인네들한테 고자질하려거든 한 가지만 확실히 기억해

둬. 나는 학교에서 아무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는데, 선생님이 거짓말을 늘어놓은

거야."

알렌은 통풍 조절 장치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고약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저 여자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더 이상 여동생을 써먹을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 쪽으로 떠밀어

버렸다.

"로렌스, 난 맹세코 이렇게 기가 막힌 경우는 난생 처음 당해 봐! 어쩜 그렇게도

오만하고 제멋 대로일까 정말 꼴불견인 여자야! 하느님께 맹세할 수 있어,

로렌스. 만약 그녀가 한 번만 더 추잡스런 수다를 늘어놓는 날엔 그 주둥아리가

납작해지도록 두들겨 패 줄 거야!"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있지도 않은 로렌스를 상대로 혼자 떠들어 대는

것도 이젠 지겹다. 그녀의 목구멍에는 미처 내뱉지 못한 분노가 뒤엉켜 덩어리져

있었다.

리니아에게는 울분을 달래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바로

그때, 클라라와 트리그의 이름으로 된 우편함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클라라가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녀에겐 친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트리그였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놀랄 일이네요."

그는 그녀가 타고 온 말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테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뇨, 모든 게 좋아요. 단지……."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 순간, 클라라가 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리니아! 오, 이런 놀랍네요!"

그녀는 리니아의 손을 거머쥐더니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우리 집 꼬마 녀석들이 내내 말썽을 부리다가 이제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어요."

"오, 괜찮아요. 나 때문에 괜히 신경쓰지 마세요. 난 단지 지나던 길에 그냥…….

당신이 언제든지 커피 마시러 와도 된다고 해서……."

갑자기 리니아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뭔가 잘못됐군요. 무슨 일이에요?"

"난…… 난 친구가 필요해요."

부엌은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클라라는 울고 있는 리니아를 감싸안고 등잔불이

켜져 있는 둥근 식탁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 동안 트리그가 커피포트를 가져

왔다.

"당신 손이 너무 차갑군요. 이 밤중에 어디에 있다가 오는 거예오?"

클라라는 리니아의 손을 덮어 따뜻하게 문질러 주었다.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미안해요. 그리고 당신 어깨에 기대고 울어서…….

하지만 난 너무나 기분이 심란했거든요. 나는……."

"테디 때문이에요?"

"아뇨, 알렌 세버트 때문이에요!"

클라라는 뒤로 기대 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 그 쪼그만 똥 덩어리 말이죠."

뜻밖에도 리니아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제서야 리니아는 클라라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녀는 가슴께까지 배가 불러 있었다. 그렇게도

위협적으로 쏟아지던 눈물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분노도 어느로샌가

가라앉아 버렸다. 리니아는 이 여인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앤 정말 당신 말대로예요. 나 역시 얼마나 그렇게 부르고 싶었는지 몰라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얘기해 봐요. 알렌이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요?"

"지금 그애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에요."

리니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애의 엄마는……."

클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세 개의 잔에 커피를 가득 부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그 독일 여자 릴리언을 만나고 온거로군요."

리니아는 또다시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클라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당신이 웃음을 되찾아서 다행이군요.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요?"

"엄청나게요."

"그럼,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한테 이야기해 봐요."

리니아가 릴리언 세버트와 대결했던 점을 강조해서 언급하는 동안, 클라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화가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그 여자가 우리 프란시스를 뭐라고 불렀다구요?"

"우둔한 아이라구요. 목사 부인이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상상이나 가세요?"

"릴리언은 목사 부인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속물에 불과해요. 그녀는 남을

비난하는 화살을 자신에게도 돌려 볼 줄 알아야 해요."

"자기 아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교사로서의 내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녀의 태도에 완전히 질려 버렸어요. 그나저나 앞으로 알렌의 장난이

더 기승을 부릴 텐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클라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이 문제를 테디 오빠한테 이야기해 봤나요?"

리니아의 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랗게 떠졌다.

"아뇨 ."

"글쎄, 알렌이 계속 말썽을 부리면 테디 오빠한테 이야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리니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테어도어는 학교 문제로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오, 그래요? 하지만 그 문제로 조언을 구했다고 해서 당신을 바보 취급하진

않을 거예요. 만약 알렌이 그런 식이라면 오빠한테 한 번 이야기해봐요."

"좋아요. 생각해 보죠."

그때쯤 되자 커피포트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트리그 역시 숨이 멈출

듯 크게 하품을 했다.

"너무 늦었죠?"

리니아가 말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봐요. 이제 가 봐야죠."

리니아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축사로 갔다. 어둡고 조용했다. 그녀는 등불을

켜 들고 테어도어가 가르쳐 준 대로 안장을 마구실에 내려놓은 뒤 클리퍼를

다시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뱃대끈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늦었군요!"

그녀는 깜짝 놀라 한 쪽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오, 테어도어……. 당신이 거기에 있는 줄 몰랐어요."

그는 리니아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하던 참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와 봤던 것이다. 그녀가 무사히 도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지만, 동시에 화도 났다.

"이렇게 늦게 돌아다닐 정도의 분별력 밖에 없소? 아무튼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군!"

"클라라와 트리그네 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에요."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선 그의 표정에 실망감이 가득했다.

"여긴 당신이 살던 도시와는 시간 개념이 틀려요. 당신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미…… 미안해요. 난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어요."

"난 기다리고 있지 않았소!"

테어도어가 얼굴을 찌푸리는 동안, 그녀는 또다시 거칠고 미묘한 가슴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빌어먹을! 이봐 아가씨,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두 손은 그녀를 어루만지고

싶은 갈망으로 몸부림쳤다. 그는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단지 그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잠시 화가 났던 것뿐이라고.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말 쪽으로 손을 뻗쳐 뱃대끈의 매듭만 만지작거렸다.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오."

그가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클리퍼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고마워요, 테어도어."

그녀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혼자서 뒷마무리를 했다.

그녀는 그가 말을 몰고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또다시 그녀에게서 달아나 자신의 껍질 속으로 숨어 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더욱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고학년 남자아이들의

등교 문제는 아직도 보류 상태였다.

10월이 다가오자 바람이 꽤 쌀쌀해졌다.

알렌 세버트의 장난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양상도 다양해졌다. 로즈안의

도시락을 훔쳐 먹거나 못살게 굴었고, 양 갈래로 땋고 다니는 프란시스의 왼쪽

머리칼이 날마다 조금씩 잘려 나갔다. 어느 날인 가부터 프란시스의 머리……칼은

오른쪽이 눈에 띌 정도로 길어 보이기 시작했다.

프란시스가 점심 시간 내내 휴게실에 앉아 울고 있었다. 열살 차리 아이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며 리니아의 가슴도 슬픔으로 젖어 왔다.

"왜 그러니, 프란시스? 무슨 일이야, 응?"

프란시스는 고개를 돌리고, 마침 벽에 걸러 있던 윗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자리에 앉아 프란시스를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리니아는 프란시스를 다독여 주었다 귀여운 소녀였다. 조용하고 남을 성가시게

굴지 않는 성격으로, 항상 상냥했으며 공부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약간 혀짤배기 소리를 내긴 했지만, 스스로 그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형이었다. 리니아의 교사용 지침서 옆에 맛있는 쿠키나 빨간 사과를 갖다 놓기도

했고, 신발 끈을 묶을 줄 모르는 아이들의 구두끈도 묶어 주었다.

"왜 울고 있는지 선생님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니?"

"말할 수 없…… 없어요."

프란시스는 뺨에서 눈물을 훔쳐 냈다.

"어째서 말할 수 없다는 거지?"

"왜냐하면…… 선생님은…… 내가 말을 …… 모, 못한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리니아는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 주며 아이의 오동통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말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렌은…… 그래요."

"아니, 그애도 그렇지 않아."

"알렌은 그렇게…… 새, 생각……해요. 알렌은 나, 날…… 하, 항상 머,

멍청이라고 부…… 불러요."

리니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우선 프란시스에게

용기를 심어 주어야 했다.

"넌 멍청이가 아니야, 프란시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 . 그래서 네가 이렇게 울고 있던 거였구나. 알렌이 뭐라고 했는데?"

프란시스는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또 뭐가 고민인데?"

드디어 모든 비밀이 쏟아져 나왔다.

프란시스의 가장 큰 소망은 크리스마스 연극 때 천사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언제나 하얗고 긴 가운을 입고 머리 위에 반짝거리는 둥근

테를 두른 채 머리칼을 길게 풀어헤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머리칼이 점점 짧아졌고, 동시에 천사역을 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게다가 프란시스는 대머리가 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상당히 자제를 해야 했다. 그녀는 프란시스를

더욱 꼬옥 껴안아 준 다음, 아이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 내 얘기 좀 들어 봐, 프란시스. 너처럼 작은 소녀들은 대머리가 되지

않아. 대머리는 할아버지들만 되는 거야."

"그…… 그런데 왜 내…… 머리가 자…… 자꾸 짜, 짧아지죠?"

리니아는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 하지만 한 쪽만 짧…… 짧아요."

"한 쪽만?"

"이쪽요."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한 쪽 머리칼이 짧았다. 그리고 정돈되어 있지도

않았다. 리니아는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놀려 대듯 코에 간지럼을 태웠다.

"아마 네가 먹어치웠나 보다? 산수 문제를 푸느라 너도 모르는 사이 정신없이

핥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프란시스는 어느새 수줍은 미소를 지었지만, 두 뺨에는 아직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리니아는 숨을 한껏 들이쉬며 말문을 열었다.

"정말로 대머리가 되어 가고 있는 건지 알아낼 때까지 엄마한테 말씀드려

서 머리를 묶어 올려 달라고 해보렴. 나처럼 말야. 보이지?"

리니아는 아이에게 자신의 뒷머리를 보여 준 뒤, 다시 고개를 돌려 프란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핀으로 감추듯 말아 올리면 아무도 네 머리가 긴지 짧은지 못 알아볼

거야."

리니아는 알렌을 향한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프란시스의 상처를 달래

주었다. 알렌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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