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테어도어는 석탄을 창고에 모두 옮겨 놓은 후 텅 빈 마차에 삽을 싣고 허리를
펴며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팔로 대충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장갑을 벗어 놓고 운동장에 있는 펌프 쪽으로 한가로이 걸어갔다.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온몸의 힘을 펌프에 싣자 얼음처럼 차갑고 깨끗한 물이 더러운 바닥으로
용솟음치듯 쏟아졌다. 그는 대충 얼굴과 가슴의 땀을 씻어 낸 후 손으로 물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는 말을 매어 둔 곳으로 되돌아오다가 계단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리니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다른 쪽 팔꿈치를 받친 채 하릴없이
계단 난간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입가의 물기를
손으로 닦아 내며, 문득 자신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쳐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내 놓고, 넓적다리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벌어진 셔츠를 움켜 잡고 단추를 채웠다. 그 동안 그녀가 시선만이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끝까지 좇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가슴을 다 열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만, 테어도어 만큼 털이 잔뜩 나 있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바지를 무릎이 다 보이도록 걷어붙이고 물이 뚝뚝 흐르는 모습을 딸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급히 소매를 내리고 단추를 채우는 등 부산스레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는 반바지 길이만큼
걷어올린 바지 속으로 셔츠자락을 구깃구깃 집어넣은 뒤, 접어 올린 바지를
마저 내렸다.
그리고 머리칼도 손가락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드디어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갈 준비 되었소?"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에게 멋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은요?"
테어도어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으며 말했다.
"마차를 가져 오겠소."
마차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허리를 구부려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는, 조금 전에 그녀에게 세수하고
난 모습을 들켰을 때의 느낌이 얼마나 껄끄러웠던가를 생각했다. 리니아는
마차 뒤로 물러나고 있는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그의 뒷목덜미 쪽 머리칼이
물에 젖으면 얼마나 검고 곱슬해지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에게 시선을 던지지도,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존의 집이
있는 곳을 지나쳤다. 파란하늘을 바라보며 드디어 테어도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크리스찬이 감기에 걸렸소. 그래서 석탄 내리는 일을 돕지 못했던 거요."
그녀가 테어도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혼자 오게 된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억지로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메우는 데 어떤 표현이 적절할지 생각해 내려고 애썼지만, 그의
머리와 가슴으로 흘러내리던 물방울의 잔상이 기억 속에 박혀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저런, 불쌍한 크리스찬! 감기에 걸려 앓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날씨와
풍경인데, 안 그래요?"
그는 열심히 풍경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그녀의 숨결 하나하나에서
신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염원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밀밭을 바라보는 그녀의 태도가 메린다와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그는 일부러 풍차가 있는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부드러운 미풍에 풍차의
날개가 천천히 돌면서 헐겁게 조여진 날개깃이 최정점에 이르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풍차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풍차에는 마음의 평안을 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죠, 그렇죠?"
"평안이라구요?"
그의 눈동자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으로 여행을 나섰다.
"으음, 그런 생각 안 들어요?"
그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설령 있었다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것 같소."
그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녀와 너무 가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난 존이 집 주위에 나팔꽃을 심어 놓은 걸 봤어요,"
빙빙 도는 날개깃 사이로 활기 넘치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가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아버지를 도와 존 형과 함께 이걸 짓던 기억이 나는군."
리니아는 그가 아직도 풍차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근육이 단단해지기 전, 그리고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운 무관심으로 무장하기 전의 어느 어린 시절이 그 풍차에 서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내려 지평선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속쌍꺼풀이 살짝 엿보이고, 입도 얼마쯤 벌어진 상태였다. 대평원의 초원처럼
길고 짙은 속눈썹이 그의 뺨에 끝이 뽀족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메린다는 항상 말하길……."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떨구며
곁눈질로 그녀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즐거움이 사라져 있었다.
"마차를 좀 손질해야겠소."
그는 들릴 듯 말 듯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 뒤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고 가슴에 교사용 지침서를 안았다.
"메린다가 누구죠?"
그는 그녀의 눈길을 외면한 채 고삐를 조금 늦추었다.
"아무도 아니오."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지침서를 북북 긁어 대며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오, 메린다는 항상 무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메린다가 아무도 아니라구요?"
그는 마차에서 내려 말의 궁둥이 쪽으로 가더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석탄 가루가 납작하게 늘어붙은 채 뒤엉켜 볼썽사나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관자놀이와 목덜미 쪽은 아직도 여전히 축축한 상태였다. 그녀는 그
물기를 닦아주고, 그가 용기를 내어 고백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가 다시
얘기를 꺼내기까지는 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린다는 내 아내였소."
그는 얘기를 하면서도 리니아의 눈길을 피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메린다는 항상 말하기를……."
그의 손은 맥없이 내려진 채 여전히 쿠브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손에 가서 멈추었다.
"메린다는 항상 말하기를, 풍차를 보면 우울한 기분이 든다고 했었소."
풍차의 날개깃이 머리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쿠브의 갈기를 쓰다듬는 그의 뭉뚝한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부지런히 일하느라 굵은 마디가 잡혀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기 손으로 그의 손등을 덮어 어루만져 주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그처럼 나이 많은 남자를 상대로 그녀가 별스런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일까?
"말해 줘서 고마워요, 테어도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뒤, 뒤숭숭한 기분을 떨구지 못한 상태로
집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의 아픈 가슴을 쑤셔 대지 않고 등을 보이며 돌아설 줄 아는 그녀에게
그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녀를 여자로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자신을 남자로서 의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자라고? 겨우 열여덟
살 먹은 소녀를 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의 내부에서 또다시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식탁에는 크리스찬이 보이지 않았다. 리니아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난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기로 결정했어요. 댈 교장 선생님도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라고 했거든요."
테어도어가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교실에 단둘이 있을 때 이후로 두
번째의 시선이었다.
"언제요?"
"초대받는 대로요. 난 아이들 편에 편지를 보낼 생각이에요."
"지금은 추수로 한창 바쁠 때요. 깜깜한 밤중에 방문하지 않는 한, 그들을
만나 보긴 힘들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니사와 존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테어도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애들의 엄마를 만나 보면 되겠군요."
수프를 떠서 한 입 삼키고 난 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면, 밤중에 가든가요."
테어도어는 어느새 수프 그릇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다.
리니아도 잠자코 멈췄던 숟가락질을 계속했다. 얼마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그가 말문을 열자,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끝낼 때까지 앉아서 기다릴 작정이오?"
"글쎄, 잘 모르겠어요. 내 생각엔 저녁 식사에 초대받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여전히 수프 그릇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가 말을 꺼냈다.
"갈수록 해가 일찍 저물 거요. 타고 다닐 말이 필요할 것 같은데……."
리니아는 깜짝 놀라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말…… 말이라구요?"
"타고 다니는 말 말이오."
그의 눈동자가 한순간 그녀를 주시했다.
"걸을 수 있을 거예요."
"클리퍼라면 가능할 거요."
그는 마치 그녀가 벙어리라도 되는 양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클리퍼?"
존과 니사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녀석은 우리 집에 있는 말 중에서도 최고요. 아주 순하죠."
"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손이 무릇 사이에 끼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숟가락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숟가락을 들어 올려 다시 야채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실 속의 화초'라는 단어가 신바람
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에 안장 얹은 말을 타 본 적이 있소?"
테어도어가 즉각 질문했다.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과감하게 마주보았다.
"아뇨."
테어도어는 식탁 건너편에 놓인 빵 조각을 포크로 쿡 찔러가져 간 뒤 버터를
발랐다. 리니아에 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마구실로 와요, 내가 타는 법을 알려줄 테니."
그녀는 아직 하늘에 희미한 빛이 남아 있을 무렵 축사로 향했다. 존의 집에
있는 풍차가 대평원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게 보였다. 어딘가 멀리서
젖소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닭들은 이미 닭장 속으로 들어간 뒤였고, 싸늘한
밤공기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축사 바깥문이 열려져 있었다. 그녀는 즐거움과 풍요로움이 섞여 있는 광경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친근한 분위기가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디 있어요? 나 왔어요."
그녀는 마구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문 쪽을 살피며 그를 불렀다.
테어도어는 벽 쪽에 서서 장비를 꺼내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입은 적이
있는 까만색 반바지에 빨간색 프란넬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모자는 쓰고 있지
않았다. 어깨 위쪽에 있는 굴레를 잡아당겨 빼낸 그는 등뒤에 있는 그녀에게
그걸 건네주었다.
"자, 여기 있소. 이걸 갖도록 하시오."
그는 톱질 모방에 걸쳐져 있는 두 개의 안장 중 작은 것을 골라든 다음,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갑시다."
"어디로요?"
그녀는 축사 중간 지점에서 그를 향해 질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우선, 말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안장을 내려놓은 후 밧줄에 고리를 만들며 명령했다.
"저 양동이를 갖고 따라오시오."
그녀는 귀리가 담겨 있는 함석판 양동이를 들고 그를 따라 해가 지는 어둑어둑한
어스름 속으로 걸어나갔다. 진흙투성이의 마당을 가로질러 노랗게 물든 풀밭
위에 멈춰 섰다. 거긴 땅이 제법 단단했다. 엉성한 가시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열두 마리의 말들이 떼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테어도어가 잇새로 휘파람을
불자, 말들이 일제히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놈도 발걸음을 떼지는
않았다.
"클리퍼, 이리 온!"
그가 어깨에 안장을 걸쳐 맨 채 리니아의 등뒤에서 소리쳤으나, 말들은 전혀
관심이 없는지 서로 갈기들을 핥는 척하더니 곧 풀 뜯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당신이 영향력을 잃은 모양인데요."
그녀가 놀려 댔다.
"그럼 당신이 한 번 해보시오."
"좋아요. 클리퍼!"
그녀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써보았다.
"이리 온, 총각!"
"클리퍼는 암놈이오."
테어도어가 그녀에게 신속히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녀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양손으로 양동이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어떻게 암수를 구별하죠?"
그는 미소를 짓더니 놀려 대듯 말했다.
"유심히 살펴보는 게 최선의 방법이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에요."
그녀는 등뒤에서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어깨 위로 그의 긴 팔이 감겨 왔다.
"쿠브."
그는 덩치 큰 밤색 말에게 명령했다. 리니아는 그렇게 가까이서 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 이 녀석은 숫놈이오."
그녀는 아주 가까이서 쿠브를 살폈다. 그리고는 테어도어의 팔이 치워지기도
전에 벌써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있는 노을처럼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클리퍼, 이리 온, 아가씨."
그녀는 다시 한 번 노력해 보았다.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네가 이리로 오면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우리가 원하는 건 너를 축사로 데리고 가는 것 뿐이야."
아직도 그 말은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마치 학생들에게 하듯이 말을 다루는 모습을 보며, 테어도어의 입에선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래봐야 클리퍼는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가르쳐야할 것이 상당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리니아는 자세를 다시 바로하며 안달이 난 듯 소리쳤다.
"저 아가씨는 내게 오지 않아요."
"양동이 손잡이를 탁탁 쳐 봐요."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말요?"
그녀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그의 턱에 이마를 맞부딪힐 뻔했다.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될까요?"
"한 번 해보시오."
"자, 클리퍼……. 아가씨, 이리 온."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그 녀석은 코를 벌름거리며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주둥이로 귀리가 든 양동이를 툭툭 건드렸다.
그녀는 미처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한 그 암말을 붙잡고는 한 손을 테어도어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이 즉각 다가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클리퍼가 귀리에 코를 파묻고 열심히 먹어 대는 걸보며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소매 안으로 그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테어도어는 경직된 자세로 즉각 손을 내렸다. 그리고
서둘러 클리퍼에게 굴레를 씌워 끌고 나갔다.
클리퍼를 끌고 말 무리 사이를 걷자, 모든 말들이 클리퍼를 따라 축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테어도어는 호롱에 불을 당겨 머리 위쪽에 안전하게 건 뒤, 즉각 말 타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아주 가까이 서서 때론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때론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그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했다.
"당신은 말에 대해서 완전 백지 상태니까 고삐의 중요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오. 말들은 가끔씩 발길질을 하거나 성깔을 부리기도 하니까. 그러나 또
너무 바싹 당기면 아예 발걸음을 띄우지 않기도 하죠."
"떼지 않기도. 계속 해요."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강의에 쏠려 있었다.
"떼지 않기도."
그는 순순히 그녀의 가르침을 되새긴 뒤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안장은 말 잔등의 두 견갑골 사이의 음기부가 잘 덮이도록 깔아야 하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안장의 뒷부분을 움켜 잡고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안장을 올려놓은 뒤에는 뱃대끈을 단단히 묶어야만 타고 다닐 때 흔들거리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시오. 이제부터 당신에게 안장을 올리고 뱃대끈을 묵는
요령에 대해서 일러주겠소.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 둬요."
그는 클리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가씨는 다른 말에 비해 그리 키가 큰 편은 아니니까 당신이 타고 다니기에
적합할 거요."
그는 안장을 들고 일어나 클리퍼의 등 위에 올려놓았다.
"안장 뒷부분을 꽉 움켜 잡……."
그는 말이 엉덩이를 휘두르자 재빨리 피해 얼굴이 다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이 고리를 안장 뒤쪽에 걸고 있다가 단단하게 묶는데 사용하시오.
이 꼭대기에 묶으면……. 자, 보시오."
그녀는 좀더 가까이 다가섰다.
"처음엔 이걸 뒤로 보낸 뒤 둘둘 말고, 그 다음에 위로 세우면 되는 거요.
그리고 매듭은 항상 납작하게……." 알겠소? 그런 다음 힘껏 잡아당기면 되는
거요."
몇 단계의 능숙한 동작으로 매듭이 멋지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잡아 뽑는 한 번의 동작으로, 매듭은 쉽사리 풀어져 그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자, 당신도 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는 겁먹은 표정으로 매듭을 유심히 살피는 리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볼게요."
그는 다시 한 번 과정을 되풀이해 보여 준 뒤,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모습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그는 평생 말들과 함께 살아오다시피
했으니 오히려 말을 겁내는 그녀의 태도가 낯설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클리퍼 곁으로 옆걸음질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은 당신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살금살금 걸어 봐야 소용없소."
"정말 덩치가 크군요, 그렇죠?"
"다른 말들에 비해 클리퍼가 큰 편은 아니오. 겁먹지 말아요. 순한 말이니까."
그러나 리니아가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그 암말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눈동자를 굴리며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리니아는 얼른 뒷걸음질쳤다.
즉시 테어도어가 양동이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 암말의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프르르"
부드럽고 구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말이 잠잠해졌다. 리니아는 클리퍼의
밤색 털 속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을 목격하고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테어도어가 순한 양을 다루듯 암말을 다독이자 그녀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한 쪽 손에 여전히 양동이를 들고 서 있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저 녀석에겐 당신이 낯설기 때문에 좀더 살필 시간이 필요한 거요. 자,
갑시다. 곧 얌전해질 테니."
엄청나게 망설여졌지만, 리니아는 다시 두툼한 엉덩이가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매듭을 묶으려고 노력했다. 한번, 두 번……. 그녀는 난감한 시선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잊어버렸어요."
그가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였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바싹 붙어 서서 햇빛에
그을은 그의 손가락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테어도어의 팔에 가볍게 부딪히며 안장 쪽으로 다가온 그녀는 조용히 뱃대끈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테어도어가 다시 매듭을 푸는 모습을 신경이 곤두선 채로
지켜보았다. 다시 그녀 차례였다. 그는 주의를 집중하느라 잇새로 혀끝을 잘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시작부터 잘못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남자 넥타이를 매 본 적은 있소?"
그가 물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연신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뇨."
황금빛 호롱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그는 그녀의 뺨에
주근깨가 어지럽게 박혀 있다는 걸 그제서야 처음 발견했다. 검고 학구적인
두 눈동자는 그녀의 성실한 면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의 설명을 극도로 침착하고 엄숙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는 그녀가 정말로 어리고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애써 매듭 묶는 일로 관심을 돌렸다.
"아버지가 넥타이 묶는 건 본 적이 있소?"
"네."
"넥타이를 매는 것과 마찬가지 요령으로 하면 돼요. 매듭을 손가락으로 납작하게
만들면서……."
그녀는 혀끝을 살짝 꺼내 물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절반쯤 되어 갈 때였다.
그의 손가락이 다가와 그녀의 손가락을 꾹 눌러 정지시켰다.
"아니…… 납작하게."
그가 명령했다. 그리고 그의 다른 한 손이 그녀의 손등을 움켜 쥐며 매듭의
각도를 바꿨다.
"다른 방향으로."
팔로 불 같은 것이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더 세게
빼물었다 순간, 그가 즉각적으로 손을 빼냈다.
"자, 이제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보시오."
그녀는 꽉 움켜 쥔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매듭을 잡아당겼다. 매듭은 완벽하게
풀어졌다.
"내가 해냈어요!"
그녀는 기쁨에 넘쳐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함빡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거의 매듭을 묶다시피 한 그로서는 멍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은 그녀의 손동작을 유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의 심장을 춤추게
만들었다. 그녀가 꿈꿔온 백일몽 중의 하나가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결승점을
향해 두 손 벌리고 뛰어드는 여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테어도어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놀려 댔다.
"어휴, 그래 당신이 해냈소, 조그만 아가씨야. 하지만 능숙해지려면 아직
멀었소.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거요."
조그만 아가씨! 그녀는 자신을 머리 땋고 다니는 사춘기 소녀 정도로 여기는
그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두 뺨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방향을 말 쪽으로
바꾼 그녀는 거만스레 턱을 쳐들고 거사라도 치를 태세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할 수 있어요. 당신의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다구요!"
그는 뒷걸음질쳐 물러나며 씩 웃었다.
"견갑골 사이에 담요를 올려놓으라고 했죠. 안장을 올…… 올려 ……."
바닥에서 안장을 들어 올리는 그녀는 혁혁 숨을 몰아쉬며 투덜거렸다
"……. 그리고 잘……."
그녀는 한 쪽 무릎 위까지 안장을 들어 올렸으나 그 이상은 역부족이었다.
"뱃대끈을 잘…… 잘……."
그녀는 다시 안장을 무릎으로 치켜올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시
한 번, 그러나 역시 실패였다.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다.
테어도어는 진지한 표정을 만들려고 무진장 애쓰며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도움의 손길을 뻗쳤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와 꼭 다문 입술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녀의
어깨는 클리퍼의 등허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초부터 그녀에게는 무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어도어는 지금 그녀를 말릴 도리가 없었다 마구실 안에는
그녀가 일어서도록 도와줄 수 있는 도구들이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지쳐 스스로
도움을 청해올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녀의 사랑스러운 입술과
안달이 나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표정, 맑고 푸른 밤 하늘을 날아다는 벌레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한참 동안이나 감상했다.
드디어 말 안장이 클리퍼의 잔등 위에 털썩 떨어졌다. 테어도어는 깜짝 놀라며
경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말등자를 건
뒤 헉헉거리며 뱃대끈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완벽하게 매듭을 만든 뒤 두
팔로 있는 힘껏 풀어 던졌다. 그리고 나서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댄 채도전적인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됐어요. 다음은 뭐죠?"
불빛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전력투구한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자신의 아들을 가르치는 성년도
되지 않은 여선생에게 자꾸만 끌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리고 태연한 척 말에게 다가가
뱃대끈을 당겨 보았다.
"너무 단단히 묶어졌소. 이 녀석이 달리기 시작하면 당신은 곧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 거요, 조그만 아가씨야."
"테어도어, 이미 한 번 경고했었죠.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란 말예요!"
그는 뱃대끈 아래에 여전히 손가락을 찔러 넣은 채 그녀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아하,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랬죠."
그녀의 눈동자가 화염에 횝싸인 듯 벌겋게 타올랐고, 주먹은 점점 더 단단히
쥐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도 부르지 말아요. 난 당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니까.
날 그냥 리니아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그는 잠시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가 꽉 묶어
놓은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 놓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안 될 거요. 이곳에서는 선생님들에…… 의 이름을 부르지 않소."
"오, 그것 참 어처구니없는 얘기로군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어깨 쪽으로 다가서자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뒤쪽으로 걸어가 말의 굴레를 치워 놓았을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난 거요?"
그가 냉정하게 물었다.
"난 화나지 않았어요!"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클리퍼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또 실수한 건지 생각해 보겠소. 여기 있소. 참, 더 배우고 싶은 게
있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 주세요."
그녀가 기분을 가라앉히고 다소곳한 자세를 취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서 굴레 장식을 씌우고 등자 높이를 맞추는 요령 등을 설명했다.
"이제 다 됐소. 그 다음엔 말에 오르기만 하면 되는 거요."
또다시 그를 놀라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녀가 고개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둥근 어깨를 유심히 살피며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뭐가 잘못됐소?"
그녀가 서서히 눈길을 들며 말했다.
"왜 우리는 종일토록 싸우기만 하는 거죠, 테어도어?"
그는 목구멍이 무언가로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온몸의 피가 용솟음치듯 끓어올랐다.
"나도 모르겠소."
"나는 당신과 있을 때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요.
당신 곁에만 오면 결국은 성난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게 되거든요."
그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으며 무덤덤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오."
물론, 그의 솔직한 심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와 관계된 일이라면 모두
간섭하고 싶었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불쾌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손바닥에 놓인 채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부드러운
뺨 위에 부채꼴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난 상관해 주길 바래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고 말머리를
돌렸다.
"저 녀석을 타 보고 싶지 않소?"
그는 클리퍼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물었다.
리니아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닌 것 같아요. 오늘 밤엔 타고 싶지 않아요."
"그럼 좋을 대로 하시오. 내가 당신에게 알맞은 높이로 등자를 맞춰 놓겠소."
리니아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다가 갑자기 말안장 쪽을 향해
발돋움을 했다. 다리를 쭉 폈으나 입고 있던 치마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녀는 치마를 걷어올린 뒤 한 쪽 발을 활꼴로 휘어지게 돌렸다. 그녀가 애초에
잘못된 도약을 하고 있는 동안, 테어도어는 그녀의 엉덩이와 발을 손으로 받쳐
힘껏 밀어올려 주었다. 마침내 그녀는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치맛자락이
뭉쳐 그녀의 다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고 다리를 풀어
보려고 했지만, 등자에 발이 닿으려면 아직도 2인치 정도나 모자라는 상태였다.
그녀는 안장 위에 앉아 테어도어가 키에 맞도록 등자를 조절해 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니아는 좀더 그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핏속에서 쉴새없이 꿈틀대는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반짝이는 머리칼을 매만져 보고 싶기도 했고, 그의 턱을 들어
올려 눈동자를 한없이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또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털어놓는 것도 듣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그녀가
절실히 원했던 것은 그의 손길이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았다.
그는 가능한 한 느린 동작으로 등자의 높이를 조절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을 최대한 연장시키고 싶었고,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호의를 최대한
베풀고 싶었던 것이다. 문득
한 여자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품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이 나이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어느 정도 절제된 것이었다. 그녀를 위해 더 이상 도울 일이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녀의 여리고 작은 발을 하릴없이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자를 이리도 끔찍히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던가. 그러나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럼 누구?
그녀를 살짝 어루만지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 일로 벌어질 난리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의 손길이 어느새 그녀의 발목 쪽으로 다가갔다. 세련된 까만색 부츠로
따뜻함과 단호함이 전해져 왔다. 그는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분명히 마사지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사지인 동시에 느릿느릿한 애무였다. 그녀는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을 말에서
내려 주기를 심장이 멎을 정도로 기다렸다. 그녀는 그 기다림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부르기를 거부함으로써 둘 사이의 벽을 부수지 않도록 신경써 왔던 이름, 리니아라는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자신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면, 만약 지금 눈길을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면……. 그는 어떤 상황이 뒤따를지 확신할 수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테어도어 ……."
그녀가 속삭였다.
갑자기 테어도어가 그녀의 발을 놓고 뒤로 물러나 버렸다.
바보 같은 짓이었음을 깨닫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평소의
분위기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제, 제대로 됐소. 다 타고 나거든 안장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시오. 난
평소 클리퍼를 축사가까이에 풀어놓아 디킨슨과 어울려 놀도록 해왔소. 당신도
그 점을 신경써 주면 좋겠소."
그의 말은 두 사람 사이에 불길처럼 타오르던 고조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맙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높고 칼칼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무언가를 찾으러 창고로 간다는 핑계를 대고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말에서 내려 준다고 그녀의 가냘픈
허리라도 잡게 되는 날엔 그의 자제력이 더 이상 버터 낼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야. 그리고 아들 녀석의 선생님이구 네 또래와
어울리기보다는 네 아들 쪽과 더 어울릴만한 나이란 말야. 테디, 넌 바보야.
제기랄, 어떤 여자가 자기아버지 또래의 남자를 원하겠어?'
잠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리니아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마치
거위 알이라도 삼킨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지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는 수확까지 올렸던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의 존재를 계속 의식하고있다는
사실이었다. 교실 안에서,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몸을 씻을 때, 그리고 조금
전 축사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았을 때……."
대단한 일이었다.
멋진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있었다. 열망이란 감정이었다.
그녀는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그 느낌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담요로
가슴을 단단히 휘감았다. 심장이 빠르고 힘겹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테어도어의 가슴으로, 목덜미로, 어깨로 물이 뚝뚝 흐르던 모습을 상기해 보았다.
굵은목과 헝클어진 머리칼……. 자신의 눈길을 피해 말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그의 모습을 상기해 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와 자신의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계산해 봤다 열여섯
살. 적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직 어른스럽지 못해 알
수 없거나 할 수 없는 일들을 그에게서 배워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테어도어의 조심성에 생각이 미쳤다. 그처럼 고집 센 늙은이는 본능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산란해진 그녀는 한 쪽 팔로 팔베개를 베고
누웠다. 눈을 감자 베개 위로 눈물이 떨어져 하얀 얼룩이 되었다.
"테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갈망하듯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리고 베개를
부둥켜안고 그의 입술에 입맞추듯 베개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