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8화 (8/20)

<8>

다음날 아침,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구름이 얕게 깔린 안개 자욱한 날씨가

이어졌다. 크리스찬은 와들와들 떨며 재채기를 두 번이나 하고 나서야 침대

한 쪽 가장자리에 발을 내려놓았다. 리놀륨 바닥도 축축했다. 그는 속옷 위에

따뜻한 모직 반바지와 두꺼운 플란넬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마침 리니아 브란덴베르그도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오던 참이었다.

크리스찬은 그녀를 보자 온몸을 떨게 하던 한기도 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빗질을 하지 않은 머리칼을 대충 뒤통수 중간쯤에 묶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파란 세숫대야를 들고 서 있었다.

"좋은 아침."

그녀가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테너에서 소프라노까지 올라갔다.

순간, 당황한 그는 셔츠의 단추가 반밖에 잠겨져 있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후다닥 단추를 채웠다.

"좀 춥지 않니, 그렇지?"

"눅눅하기도 해요."

그는 여태껏 할머니 외엔 잠옷 차림에 맨발로 서 있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현기증이 일면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내 생각엔, 오늘 네가 들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아, 네. 저도…… 아, 그럴 것 같아요."

"그럼 학교에 나올 수 있겠구나."

그는 아버지의 반응이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날씨가 아주 나쁘면요. 하지만 내일은 다시 해가 나올 것 같은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황급히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물결치듯 찰랑거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꿈벅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여 자애들의 외모나 행동에 정신을 팔은 적이 없었다.

여자애들이란 땅다람쥐 사냥을 나가거나 강으로 수영하러 갈 때, 언제든지

바싹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구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쿵쿵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그녀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 뒤 대야에 물을 가득 부어 위층으로 다시 올라가는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가 세수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러자 그의 가슴속으로

마치 동굴을 탐험할 때와 같은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학교 선생님이야, 이 바보 멍청아! 넌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선

절대 안 되는 거야!

그러나 그는 젖 짜는 일을 돕기 위해 축사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동트기 전 새벽 무렵의 농장 마당은 안개에 싸인 채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소들, 돼지들, 닭들, 진흙 구덩이, 그리고 건초더미……. 이 모든

것들이 축축하게 습기가 묻어나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짙게 깔린 안개는

수탉들이 목청껏 외치는 기상 신호가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방풍림에 설치된 파이프관 위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작은 물방울들은

온몸을 파르르 떨더니 흙탕물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지평선 저 멀리 하얀

햇살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크리스찬은 축사 문을 활짝 열다가 또다시 심하게 재채기를 해댔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며 축축한 공기가 걷히는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침 일찍 축사에 들어서면, 늘 찌뿌드한 기분이 한순간에

모두 걷히곤 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더더욱 그랬다. 폭설이 내리거나

살을 에는 듯 추운 날씨에도 문만 꼭 닫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비록

천장에 거미줄이 더덕더덕 붙어 있긴 했지만. 가축들에게서 나오는 열기는,

습기나 추위는 물론 가슴을 짓누르는 우울증도 한꺼번에 쫓아 버리곤 했다.

테어도어는 이미 소들을 우리 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크리스찬은 젖 짜는 그릇을 집어들고 얼룩덜룩한 두 개의 젖무덤 사이에

바싹 당겨 앉았다. 늙은 캐티에게 이마를 기대자 훨씬 더 따뜻했다.

"너 아직 졸고 있는 거니?"

테어도어가 줄지어 선 젖소들 저쪽 어딘가에서 짜 놓은 우유를 양동이에

부으며 소리쳤다.

크리스찬은 캐러멜 색이 도는 들고양이의 털을 바라보다가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에 대한 부질없는 공상에 빠져들었던 자신을 깨닫고는 움찔했다.

"오, 죄송해요.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네가 오늘 아침에 캐티한테서 짜낸 우유가 정어리 캔으로 두 통은 될 거다"

"오, 알았어요. 이런……."

그는 죄책감을 느끼며 들고 있던 우유를 양동이에 부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창고 안에는 오직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소리들만이 울려 퍼졌다. 우유가 금속과

만나는 소리, 우유가 우유를 만나는 소리, 기운 센 소들이 되새김질하느라

이빨을 부딪치는 소리, 커다란 젖무덤을 가진 소들이 축사 안으로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 소리 …….

크리스찬과 테어도어는 익숙한 침묵 속에서 일을 계속했다. 다시 테어도어의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오늘 잘에 나가 보면 어떻겠니? 석탄도 좀 사고."

"오늘요? 이렇게 이슬비가 내리는데요?"

"비가 오는 날을 기다렸었다. 맑게 갠 날을 그런 일로 허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도움을 받으실 작정을 미리 하고 계셨죠?"

"아침 먹자마자 떠나도록 하자."

크리스찬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충분히 심사 숙고한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빠?"

"응?"

크리스찬은 젖을 짜던 소의 따뜻한 옆구리에서 이마를 들고, 잠시 일손을

놓았다.

"오늘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을 학교까지 마차로 바래다 주고 와도 될까요?"

이번에는 테어도어의 손이 펌프질을 멈췄다. 그는 예전에, 그녀를 학교까지

데려다 줄 만큼 한가한 시간은 없다고 못을 박은 바 있었다. 어젯밤 안장 위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목 언저리가 어느새 후끈거리며 달아올랐다.

그는 그때 그녀가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아니라는 점에 기꺼이 동의했었다.

그녀를…… 아…… 그녀를 무엇에 비유해야 적절할까?

리니아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테어도어의 가슴속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나이 또래 남자들 중에는 리니아처럼 어린 여자들을 보면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 자신에게도 너무나 뜻밖의 감정이었다.

테어도어는 마음을 굳히고 일을 다시 시작했다.

"네 선생이 여기 도착하던 날 내가 그녀에게 해둔 말이 있다. 아무리 날씨가

나쁘더라도 학교까지 데려다 줄 여유는 없을 거라고. 너도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하지만 그냥 놔두면 학교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에 흠뻑 젖고 말 거예요!"

"네 할머니께 남는 판초가 있나 찾아보시라고 해라."

크리스찬은 불만으로 입이 퉁퉁 불은 채 젖 짜는 일을 계속했다. 빌어먹을

노인네 같으니! 아빠는 내가 필요하지 않아.

아빠도 알고 있어. 선생님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을

텐데……."

리니아는 옷을 모두 차려 입고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찬이 계단을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 잠시 후,

똑똑하고 날카롭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계단을

날아오르다시피 하느라 숨을 몰아쉬고 서 있는 크리스찬의 모습이 보였다.

"오, 내가 아침 식사에 늦은 건가?"

"아뇨. 할머니가 이걸 입으시래요. 나는…… 아휴……."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가능하다면, 선생님을 학교까지 바래다 드리고 싶었는데 ……. 그런데 아빠가

식사 끝나고 곧바로 일을 거들라고 하셔서요. 대신 할머니가 여분의 판초를

찾아주셨어요. 그리고 여기 우산도 있어요."

"어머, 고마워, 크리스찬. 이것만 있어도 충분하겠는데……."

그녀는 그에게 활짝 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나는 음…… 나는 씻으러 가야 해요. 이따가 아래층에서 봬요."

리니아는 문을 닫고 나서, 등을 기대고 선 채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였다. 크리스찬이 그녀의 학생이라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관심을 끌려고 애쓰는 크리스찬의 유난스런 행동들이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부드럽고 매력 있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결국은 소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모든 학생들을 좋아하듯

크리스찬도 좋아했고, 그것은 그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자 리니아는 테어도어를 주의깊게 살폈다. 그의 고집불통과는

어젯밤에 완전히 결별한 것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글쎄,

한 사람이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결국 두 사람 다 고집불통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은 들에 나가 일하기엔 날씨가 별로 좋지 않네요. 크리스찬이 학교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요."

테어도어는 음식 씹는 일을 멈추고 한결 누그러진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고 있었다.

"크리스찬은 오늘 학교에 갔지…… 가지 않을 거요. 밀을 추수하는 대신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테어도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의 입술이 끈 달린 자루처럼 오므라들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충돌의 시간이

몇 분쯤 지속되었다. 그녀는 먹고 있던 계란 프라이 위에 토스트를 얹은 뒤,

다시 그 위에 냅킨을 얹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일으킨 소동은 니사, 크리스찬, 그리고 존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들은

그녀가 사라져 버린 계단을 한참 동안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테어도어는

자리에 앉아 아무 일 없다는 듯 계란과 베이컨을 조용히 씹고 있었다.

크리스찬은 이슬비 내리는 흙탕길로 터벅터벅 걸어나가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다시 그녀를 바래다주고 싶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이 쿠브와투스에게 마구를 매단 뒤 마차에 올라앉아 골이

잔뜩 난 채 아버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두 번이나

연거푸 재채기를 해댄 다음, 앞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때 까만 고무 판초와

너덜너덜 해진 밀짚모자를 쓴 아버지가 집안에서 걸아나왔다. 테어도어가 마차에

올라타자 크리스찬은 다시 한 번 더 재채기를 했다.

"감기 걸렸니?"

크리스찬은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감기에 걸리든 말든 아버지가 걱정할 게 뭐람! 아버지는 자기 일 외에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잖은가,'

테어도어가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에 크리스찬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채찍질을 해댔다. 말들이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나가자, 테어도어는

날렵하게 자리에 엉덩이를 갖다 댔다. 그리고 아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눌러 쓰고 어깨를 구부린 채 앞만 똑바로

내다볼 뿐이었다.

테어도어는 칙칙하고 우울한 날씨가 자신의 기분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말들은 비에 홍건히 젖은 무채색의 시골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들판은 털이 듬성듬성 빠진 누렁개를 연상시키며 꼴사나운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베지 않은 곡식들은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는 지친 노인네들처럼 빗속에

무거운 머리를 앞으로 푹 떨군 채 서 있었다.

드디어 크리스찬의 고함소리에 의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이 깨졌다.

"아버지는 내가 선생님을 학교까지 바래다 주도록 허락했어야 했어요!"

테어도어는 아들을 유심히 살피며, 적절한 대답을 생각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저 녀석이 선생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못해 죽을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말했잖니, 그녀가 여기 온 첫날 내가 해둔 말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 집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를 돌봐 주는 곳이 아니다."

크리스찬은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도대체 아버지가 선생님을 반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왜 그렇게 선생님을 싫어하시는 거죠?"

"그만 입다무는 게 좋겠다."

크리스찬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며 말했다.

"아휴, 제 얘기 좀들어 보세요, 아빠. 전 벌써 열일곱살이 라구요. 그리고……."

"아직 아냐, 그렇지 않았어!"

테어도어는 화가 치미는 통에 얼떨결에 또 어법에 틀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오히려 더 화가 났다.

"두 달만 더 있으면 열일곱 살이에요."

"그럼, 그땐 지금처럼 고개 뻣뻣이 들고 아빠한테 대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건 적절한 표현이 아니에요, 아빠. 아무튼 정신이 이상 한 남자가 아닌

이상 이유없이 남을 욕해선 안 되는 거라구요."

"오 남자란 그렇다? 후―."

테어도어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게도 안달이 난 거지? 그 채찍은 내게 다오. 아무래도

너는 말 주둥이에 아무런 득도 되지 못…… 않겠다.

테어도어는 크리스찬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그애의 손에서 채찍끈을 잡아챘다. 빗방울이 말려 올라간 그의 모자 챙에 모여

있다가 코끝으로 도르르 굴러떨어졌다.

"나한테는 전혀 묻지 않았잖아요, 아빠. 아빠는 나한테 학교에 가고 싶은지

아닌지, 먼저 물었어야 했어요. 하지만 아빤 제게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요.

내 문젠 데도 말예요. 지금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세요? 지금 당장 학교에

가는 거라구요."

테어도어는 언젠가는 이런 상황에 부닥치리라 예상한 바 있었다. 그는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로 결심했다.

"공부하려고?"

"그럼요, 물론 공부하기 위해서죠.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잖아요?"

"말해 보렴"

크리스찬은 즉각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흐릿한 지평선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단호히 입을 다물었다. 테어도어는 그런 크리스찬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노라니 그애를 키우느라 겪었던 고통의 순간들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선생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니, 그러니?"

크리스찬은 깜짝 놀란 듯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후, 크리스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눈길을 정면으로 향했다

"잘 모르겠어요. 글쎄, 만약 제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뭐라 말씀하실 거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감정은…… 이성적으로 충고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닌데……."

노발대발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아버지가 침착한 반응을 보이자 크리스찬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카 그 문제에 대해 기꺼이 대화하려는

태도까지 보인 것이다.

그들은 이런 문제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눈 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크리스찬의 얼굴에

가득하던 반항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대신 사춘기 소년의 혼란스러움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크리스찬은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때 사람들은 대개 어떻게들 행동하죠?"

"아마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

"선생님 생각을 잠시도 멈출 수가 없어요. 아시겠죠, 제 마음을?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밤에 침대에 누워서도 선생님의 몸짓이나 머리 빛깔 등을

생각해요. 그리고는 내가 선생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죠."

이 녀석 완전히 홀딱 반했군 하지만 자연스런 일이지.

테어도어는 생각했다.

"너보다 두 살이나 많아."

"알고 있어요."

"게다가 네 선생님이야."

"알아요, 안다구요!"

크리스찬은 신고 있는 장화를 노려보았다. 빗방울이 그의 뒷덜미를 적셨다.

"감정이 너무 빨리 진전되는 것 같다, 안 그러니? 선생님은 여기 온 지 고작

2주일밖에 안 됐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데는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요?"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크리스찬은 이제 그런 질문을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자라 있었다. 사실은 사실이고, 크리스찬에게 알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차 안에 서 있는 네 엄마를 본 순간,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나보고는 너무 성급하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넌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이잖니, 아들아."

"그럼, 엄마와 아빠는 그때 몇 살이었는데요?"

그들은 둘 다 대답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크리스찬도 두 달만 지나면

열일곱 살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두 사람보다는 분명 빠른 편이었다.

"사랑한다는 느낌은 어떤 거죠? 아빠는 엄마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어요?"

사랑? 정말이지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감정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그 조그만

아가씨가 말 안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바로 그 느낌을 받았었다.

테어도어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사랑한다는 느낌?"

그 느낌이 그에게 새롭고 신선하게 다시금 다가왔다.

"주먹으로 배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 같다고 할까?"

"엄마도 아빠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잘 모르겠다. 엄마 말은 그랬다고 하더라만."

"엄마가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했었어요?"

테어도어는 잠간 동안 껄끄러운 표정을 내비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엄마는 왜 떠나가 버렸죠?"

"엄마는 지쳤던 거야, 정말로 지쳤던 거야. 문제는, 엄마가 이곳을 너무

싫어하는 데서부터였지. 네 엄만 늘 슬픔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단다. 너를

낳고는 더욱 상태가 나빠졌지. 오, 하지만 네 엄마가 널 사랑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널 사랑했어. 네 엄마는 네 발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다정스레

노래를 부르곤 했지. 하지만 마음속 아주 깊은 곳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어.

태어나면서부터 슬픔을 간직한 여자 같았다. 그리고 그걸 극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 네 돌이 가까워 올 무렴, 네 엄마는 밀밭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물결, 물결뿐인 이 풍경이 나를 미쳐 버리도록 만든다'고 소리를 질러대곤

했었다. 그리고 나서 네 엄마의 목소리를 이곳에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지."

테어도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왠지 네 엄마는 이곳에 정을 붙이려 하지 않았단다. 늘 도시의 소음을 그리워했지.

네 엄마는 결코 방풍림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라든가 골담초 덤불에 날아드는

꿀벌의 웅웅거림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테어도어는 실눈을 뜨고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을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엄만 결코 그 소리들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

크리스찬이 다시 재채기를 했다. 테어도어는 아무 말 없이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뒤 아들에게 건넸다. 크리스찬이 코를 풀자 테어도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 엄마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보면서 점점 더 말을 잃고 슬픔에 잠겨

갔다. 귀여운 눈이 점점 흐리멍텅해졌지. 그리고 더 이상은……. 내가 기차에서

처음 보았던 활기찬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어. 그리고 나서 어느날 엔가

네 엄마는 가 버렸단다. 영원히 가 버렸다."

테어도어는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날 난……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인생 중 최악의 날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슬픈 기억을 떨구어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네 엄마가 가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네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날 정도로 이곳을

싫어한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네 곁을 떠나는 건 네 엄마에게도 상처일 테니까.

쪽지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단다. 네가 나중에 크고 나면 이야기해 주라고.

널 사랑한다고……."

예전에도 들었던 이야기지만, 크리스찬은 그 말에 또다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사실, 살아오면서 엄마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 따위는 별로 없었다.

언제나 할머니가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 채워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바야흐로 성년의 길목에 접어드는

지금, 그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엄마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죠, 그렇죠?"

테어도어는 말의 엉덩이에 시선을 꽂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오, 물론 네 엄마를 사랑했다."

그가 대답했다.

"남자란 때때로 한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순간이 있단다. 설령

그 여자가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은 여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테어도어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두 사람의 가슴속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동안에도 마차는 비 오는 시골길을 말없이 계속 나아갔다.

그들은 드디어 잘에 있는 광산에 도착했다. 테어도어는 저울 위에 마차의

무게를 잰 뒤 노르웨이어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한 느낌에 젖어

들었다. 그의 어투에 대해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젖은 석탄 냄새와 흐르는 물소리에 횝싸였다. 테어도어가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 뒤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물론,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은 귀엽고 괜찮은 여자다. 나도 네 기분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건 아니란다"

테어도어는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네가 8톤 가량 되는 석탄을 실어야 한다, 알겠니?"

그러나 크리스찬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추위로 오솔오솔 몸이 떨려 왔고,

재채기도 연거푸 터져나왔다. 모자 챙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코에서 떨어지는

방을 중 어느 쪽이 빠른지 내기라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지평선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잘의

광산벽에도 비는 음산하게 계속해 내리고 있었다. 미학적인 면에서 볼 때,

자연 조건은 노스 다코타에게 그리 덕을 베풀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귀중한

연료가 푸르른 삼림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린다는 그 땅 속에 석탄을

대신한 무언가가 자라 주길 원했었다. 노스 다코타의 2만 8,000평방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땅 덩어리는 부드러운 갈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테어도어와 크리스찬은 빗속에서 석탄을 싣기 시작했다.

날씨가 너무 흐린 탓에 삽은 일없이 빈둥거렸고, 여기저기파인 구덩이에

빗물만 고이고 있었다.

크리스찬은 가끔씩 일손을 놓고 코를 풀거나 재채기를 해댔다. 축축한 냉기가

두 다리와 속옷 안으로 스물스물 기어 들어왔다. 입고 있는 웃옷이 젖어들기

시작하면서 한기가 뼛속까지 엄습해 왔다.

마차에 석탄이 가득 실릴 때쯤 크리스찬은 완전히 지쳐 있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 시간 반을 더 달려야 했다. 크리스찬은 축축한

손수건으로 코를 하도 문질러 대서 코끝이 쓰라릴 정도였고, 온몸은 오한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집에 반 정도 왔을 때쯤, 드디어 먹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리스찬의 몸을 따뜻하게 덥혀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괜찮니, 크리스찬?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테어도어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크리스찬은 또다시 재채기가 나올 모양인지 두 눈을 질끈 감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리고 햇살이 비추는 곳을 향해 연거푸 재채기를 하고 나서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았다.

"학교에 석탄을 내려놓으러 가기 전에 너부터 집에 데려다 주어야겠다."

"나도 도울 수 있어요."

크리스찬은 자기 말이 억지라는 걸 느끼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당장 가야 할 곳은 바로 네 침대야. 석탄 실은 마차는 나 혼자서도

끌 수 있어."

크리스찬도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테어도어는 크리스찬을 침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 뒤, 어미 고양이처럼 야단법석을 떠는 니사를 옆에 남겨

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가 학교로 출발했을 때는 늦은 오후가 되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해는

나머지 구름들을 모두 내몰고 잘 여문 밀밭에 축복의 햇살을 드리우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크리스찬과 이야기를 나눈 후로 줄곧 마음이 심란했다.

'테어도어, 너 역시 그 조그만 아가씨 주위를 맴도는 눈길을 자제해야 해.

그녀가 너를 향해 던지는 묘한 눈길도 크리스찬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야

하구. 그앤 영원히 그 사실을 모르는 게 나아.'

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세운 뒤, 교실 문 쪽을 살피며 채찍을 든 채

땅 위로 잽싸게 내려섰다. 그리고 말머리 쪽으로 돌아 나와 쿠브의 콧잔등을

어루만지며 건물 계단이 있는 곳으로 끌어당겼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테어도어는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굵은 밧줄을 쳐다보다 뒷짐을 지고 교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안에서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그는

살짝 문을 밀었다.

"다음에 또 한 번만 장난질을 쳤다가는 네 부모님에게 이야기할 거야. 어차피

가정 방문은 할 테지만, 내가네 엄마와 아빠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 드릴

수 있으면 너 역시 좋지 않겠니? 안 그래 , 알렌?"

테어도어는 그녀가 지금 나무라고 있는 아이가 목사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네가 아주 지독한 날을 나한테 선물한 셈이라는 걸 알고있겠지? 너하고

테어도어가 말이야."

테어도어는 눈썹을 위로 치켜올리면서 수업 도중에 왜 자신의 이름이 들먹거려지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난 도대체 그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어. 크리스찬을 학교에 나올 수 있도록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때려 주었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목소리가 침착해지더니,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튼 다시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돼! 이번만은 용서하겠지만, 내일부터

학교에 나올 때는 태도를 좀 바르게 하는게 낫겠구나."

테어도어는 뒤로 물러서며 알렌이 휴게실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알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칠판 지우는 소리와

분필로 무언가를 적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테어도써, 이제 알렌은 갔으니까 조용한 가운데 한판 붙어 보자구."

테어도어는 엿듣고 서 있는 동안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면서 화가 치 밀어올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가고 있는 교실 안으로 들어설 준비를 했다.

"오, 좋아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갑자기 그는 자신이 거기 서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그녀에게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그와 한판 붙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지금 그녀가 자신의 말에 스스로

재미있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크리스찬을 학교에 보내 주면 봐주려고 했는데 말야, 안 그랬지? 너는

역시 고집불통에다 성미가 고약한 사람이야. 도무지 너와는 잘 지낼 수가 없겠어,

안 그러냐구! 그래, 어떤 방법으로든 크리스찬을 항상 바쁘도록 만들 작정인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 비아냥거림이 묻어났다.

"이젠 마구간에서 가죽이라도 문지르라고 할 셈인가?"

칠판에 써 놓은 글자들을 지운 뒤 그녀는 다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괘종시계, 멍청이, 훼방꾼…….

테어도어는 미소를 지으며 교실 문 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칠판에 단어들을 줄지어 써 놓은 뒤, 그 위에 손바닥을

대고 꽝꽝 쳐댔다. 그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이윽고 그녀는 칠판에

씌어진 단어들을 이용해 긴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테어도어의 눈길이 계속 그녀의 뒷모습을 좇는 동안, 그녀는 '괘종시계가

벽에 걸려 있다'라고 쓴 뒤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다음 단어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칠판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생기 넘치는

동작으로 칠판에 글자들을 또박또박 쓴 후 큰소리로 읽었다.

"나는 멍청이 테어도어를 좋아한다."

그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미소를 짓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파안대소할 뻔했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자기가 써놓은 문장을 곰곰이 살피다가 멍청이라고

쓴 글자 밑에 있는 힘을 다해 줄을 그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그래, 난 영원히 그럴 거야."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다음 단어 앞에 선 그녀는 적절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지 우물 쭈물거렸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테어도어는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칠판에 쓰여진 글자가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킬킬거리며

단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녀는 완성된 문장이 적혀 있는 칠판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녕하시오, 선생 ."

그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며 점잔을 빼고 말했다.

리니아는 깜짝 놀라며 몸을 홱 돌렸다. 테어도어가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잽싸게 뒤로 돌아 칠판 위에 써

놓은 글자들을 지웠다.

"테어도어, 비열하게……. 소리없이 이곳까지 들어온 이유가 뭐죠?"

그녀가 하도 지우개를 세차게 휘둘러 대는 바람에 테어도어는 저러다 학교

벽까지 뚫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열하게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난 말 두 마리를 묶으면서도 공부에 지장을

안 주려고 조용조용 움직였는데, 여긴 노새가 끄는 수레가 지나가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끌벅적했소."

그녀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옆에 놓인 분필통을 손바닥으로 눌러 댔다.

"뭘 원하세요, 테어도어? 난 지금 바빠요."

그녀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칠판 쪽으로 갔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는 끼고

있던 지저분한 가죽 장갑을 벗어 허벅지에 대고 탁탁 털었다.

"나도 알고 있소. 내일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요?"

"그래요, 그랬어요. 당신이 무례하게 방해하기 전 까지는요."

"무례?"

그는 중상모략을 당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 지저분한 장갑으로 가슴을 쳐댔다.

"그렇소. 나는 당신을 집까지 모시고 가려고 온 무례한 사람이오."

그 말은 그녀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오리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오, 그러세요? 해도 다시 나오고 비도 그쳤는데, 나를 마중하러 이곳까지

오셨다구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그 신사다운 생각이 출장을 갔었나 보죠?

크리스찬이 나를 바래다 주 겠다고 했는데, 당신이 못하게 했다면서요?"

"그애가 당신에게 말했소?"

"당신은 또 날 바보 취급하는군요. 크리스찬이 내게 한 말은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싶다는 게 전부였고, 그 다음 얘기는 굳이 할 필요도 없었죠. 당신은 나 같은

온실 속의 화초를 위해서…… 마차를 끌고 올 사람이 아니에요. 말해 보세요,

여긴 왜 왔죠?"

그는 장갑을 낀 채 왼쪽 복도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내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소? 조금 전 당신 얘기를

들으니 그런 것 같던데……."

그가 교단 쪽으로 다가오며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이렇게 왔잖소."

리니아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위험에서

구할 정도의 연출이 가능한 지성인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거만스럽게 외쳤다.

"그렇다면 돌아가는 길도 알겠군요. 당장 나가요! 난 당신이 크리스찬의

등교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기 전까지는 당신과 얘기하지도,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을 테니까요!"

"내 아들은 내 허락이 있어야 학교에 올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얘기했잖소."

그녀는 어느새 참을성을 잃고 있었다.

"오, 당신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그녀가 쿵하며 발을 구르자 분필 가루가 떨어지면서 주위에 뽀얀 먼지를

날렸다.

그는 교단 턱에 장화 신은 한 쪽 발을 올려놓고 그 위에 두 손을 포개었다.

"에, 고집불통이라 이 말씀이군요. 잊지 않았소."

"그래요. 당신은 고집불통이에요,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당신이야말로 오늘 아침 식탁에서 버르장머리없는 계집애처럼 뛰쳐나갔잖소."

적절한 응징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얼굴에 피어오른 불길을 다잡고 다시 공격에

나섰다.

"당신이 여기 온 이유가 나를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돌아가세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군요."

"물론 그 이유 때문에 온 건 아니오. 석탄을 가져다 놓기 위해서 왔을 뿐이오."

"내게 마차가 필요했던 건 오늘 아침이었어요."

그녀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 발은 진창을 철벅거리며 걸어오느라 엉망이 되어 버렸다구요. 교실은

또 어땠는 줄 알아요? 얼음으로 만든 집처럼 냉기가 돌아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어요."

분필을 문질러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테어도어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미안해요."

칠판 위를 움직이던 그녀의 손길이 멈춰졌다. 그녀는 어깨너머로 그의 태도가

진지한지 슬쩍 넘겨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발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어 내면서 그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서 미안해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다시 그녀의 눈길은 그가 끼고 있는 지저분한 장갑으로 향했다. 단지 그의

손에 끼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흥미에서 시작된 관찰일 뿐이었다. 그 장갑은

꽤나 오래 전부터 사용했는지 가죽이 너덜너덜했다. 어떻게 해야 그가 더 미안해하고,

다음에는 자진해서 태워 주겠다고 자청하도록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물론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당신은 날 화나게 만들었어요, 테어도어 난

당신이 미리 알아서 배려해 주길 바랐어요."

그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가

나자빠질 정도로 세차게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그가 미소 짓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의

싱글거리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치열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르다는 것과 그의 입이 매우 잘생겼다는 것, 턱의 생김새가 완벽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반짝거리며 빛나는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것 등이었다.

그의 웃음이 햇살 가득한교실 안으로 울려 퍼졌고, 그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갑자기 그녀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에게서도 드디어 즐거움 가득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다시 한 번 더…….

그리고 이내 그의 웃음 속에 합류했다.

교실 안으로 두 사람의 즐거운 웃음 소리가 계속되는 동안, 그녀는 잠시

시계를 들어 올렸다가 재빨리 가슴 위로 내려놓았다. 테어도어는 좀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결에 닿아 따뜻하게 데워져 있을 그 시계를 만져 보고 싶었다.

그는 침을 삼키려고 애써 보았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아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늙은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아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자신에게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이며, 탐탁치 않은 하숙집 주인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분별력이 되살아났다. 그는 교단에서 발을 내려놓으며 장갑을 힘차게 탁탁

털었다.

"나가서 석탄을 내려놓는 게 좋겠소."

그녀는 밖으로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느낌들이

몸 속에서 뛰어 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엉덩이가 여자에 비해

얼마나 작은지, 걷어올린 팔소매 사이로 튀어나온 구릿빛 팔뚝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투쟁의 세월이 고스란히 간직된 낡고 오래된 장갑 속에 숨어 있는 남자의 손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산하는지, 그녀는 난생 처음 그런 것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그녀는 다시 문장 만들기에 몰두했다. 그러나 창 밖에서

석탄을 삽으로 퍼 내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 갈수록 더 마음이 산란해졌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갔다. 석탄 창고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서자 삽질을 하고

있는 그의 어깨와 정수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탄탄한 어깨와 절도 있는 움직임, 그리고 햇빛에 번들거리는 근육질의

몸매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삽자루를 붙든 채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쪽으로 한 걸음씩 옮겨 가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그의 적갈색 머리칼

위에 풍성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들에 나갈 때마다 쓰는 밀짚모자를

지금은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오늘 아침에 내린 비에

흠뻑 젖어, 지금쯤 부엌 벽에서 물기를 말리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는 얼굴에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채 곁눈질로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의 머리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까만 물줄기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수건을 찾는지 한 쪽 장갑을

벗고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졌다. 손수건을 가지고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갑을

다시 끼고는 소맷자락으로 앞이마를 닦았다. 다시 삽질이 시작되었다 타닥타닥

리드미컬한 소리를 내며 석탄이 창고 속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그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 온 어떤 애송이들보다도

훨씬 완숙한 멋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테어도어 역시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의 맑은 눈동자 속에서 열기 같은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지금은 갈색 머리에

석탄 가루를 온통 뒤집어쓴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 지글거리며 타올랐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열망? 좋아하는 감정의

일종이었을까? 그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교실 창에 쳐진 커튼으로 향했을 때, 리니아는 그가

자신을 여전히 아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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