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7화 (7/20)

<7>

테어도어는 지금처럼 심하게 화를 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주 오래 전,

아마도 메린다가 그와 아기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을 때였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틀렸다. 메린다가 말없이 떠나 버렸을 때의 분노는

당연한 감정이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적절치 못한 것임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테어도어는 이미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놓지

않는 훈련을 해오던 터였다.

저녁 식사 내내 그는 리니아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숨막힐 것 같은 열등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사는 다시금 침묵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긴장감 어린 식사 시간이 끝나자 테어도어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에서

위안을 찾기로 했다. 그는 식탁에서 물러나 입을 꾹 다문 채 문간 쪽에 걸려

있던 모자를 집어든 다음, 호롱불을 켜 들고 어둠을 가르며 축사 쪽으로 걸어갔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사방에서 진동을 했건만,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밝게 빛나는 달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살아 숨쉬는 밤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축사 문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가 그의 심란한 마음을 부추겼다. 그는 축사

안으로 들어간 뒤 다시 마구를 넣어 두는 방문을 열고 등잔불을 높이 쳐들었다.

하얀 벽 위에는 잘 정리한 마구들과 가죽들이 걸려 있었다. 어느 여자의 식료품

보관창고보다도 질서 정연했다. 이 곳에서라면 누구도 그를 비웃거나 우둔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그만의 완전 소유지였다. 이곳은 모든 것이 그의

지배 아래 있었다.

머리 위쪽에 있는 갈고리에 호롱을 걸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찡그린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드러났다. 바깥 세상이 침묵 속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익숙한 물건들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며 마음속에서 이는 분노를 달랬다.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 그는 단지 습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런데 리니아의 언어 생활은 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무식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얼마나 영어를 읽을

수 있게 되길 바랐던가? 그는 노르웨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영어 읽는 법을 약간 배웠을 뿐,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사는 데 다른 언어가 필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법도 바뀌었다. 아이들은 이제 노르웨이어보다는 영어를 훨씬 잘

쓸 줄 안다. 오직 노인들만이 모국어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어쩌다 우둔하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지? 리니아의 말을 떠올리자 다시

그의 얼굴로 온몸의 피가 솟구쳐 올랐다. 분노가 다시 엄습해 왔다. 그는 문짝을

부숴 버릴 듯 세차게 닫고는 두꺼운 바늘을 찾아 까만 채찍끈을 꿰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식한 자신에 대한 좌절감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실과 바늘을 내려놓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우둔하다. 우둔하다.

우둔하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열아홉 살밖에 먹지 않았지만,

30대 중반인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면전에서 감히

그런 말을 내뱉다니!

그는 여전히 떨리는 두 손으로 바느질을 계속했다.

'안 그렇지 않다'라는 말은 없단 말인가?

안 그렇지 않다? 그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틀림없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 학교 교육을 7년씩이나 받은 크리스찬조차 그런 말을

쓰지 않는가!

그의 손가락은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채 아래로 떨구어져 있었다. 그는 바느질을

할 생각은 않고 가죽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롱 불빛이 그의 밀짚모자와

어깨 위로 떨어져 손과 발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아직도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안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파란 눈을 반짝거리며 노스 다코타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심하게 모욕했었다. 문득 메린다가 떠올랐다. 그녀도

이곳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리니아처럼 심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가 버렸잖은가.

어쩌면 리니아의 출현으로 몇 해 동안 겨우 가라앉혔던 메린다에 대한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라 들끓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분노를 삭일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타고난 성격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다면

리니아 브란덴베르그의 예쁘고 깜찍한 엉덩이를 발길로 걷어차 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분풀이라도 하듯 거친 동작으로 가죽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도 없는 일인지

모른다. 어차피 그녀는 1년만 지나면 이곳을 떠날 사람이니까.

그는 1년 동안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창고 안을 한참이나 어슬렁거렸다. 그는 그녀가 집 안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마당 쪽으로 눈길을 돌려 그녀의

방에 난 작은 창문을 쳐다보았다. 비록 어둠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집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아래층으로

불러 내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는 그래서 안 돼 ……."

그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탓했다. 그 조그맣고 제멋대로 인 여자 때문에

이토록 속을 끓이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풍차를 지나

집으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잠자리에 든 듯 집안은 고요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엌 식탁 위에는 등잔불이 있었는데, 그를 위해

어머니가 남겨 놓고 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등잔불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방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그 방은

단순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가구들은 낡았지만 견고하고

잘 보관되어 있었다.

테어도어는 파란색 실로 가장자리에 코바늘뜨기를 한 흰색천이 씌워진 화장대

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등잔을 내려놓기 전에 오래도록 그 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파란색으로 수놓인 나비를 매만지니, 여린 손으로 한 땀 한 땀

자신의 외로움을 엮어 내던 한 여인이 떠올랐다. 그는 손가락으로 다채로운

무늬가 수놓인 끝자락을 따라갔으나, 못이 박혀 매끄럽지 못한 손에 올이 긁히면서

화장대보가 잡아당겨졌다. 그는 슬픈 마음으로 다시 바로잡아 깔아놓고, 천천히

화장대 맨 윗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옷가지 아래 수년 동안 깊숙이 넣어두었던

사진 하나를 찾아냈다. 타원형 액자 속에 담긴 여인의 모습은 액자를 들고

있는 그의 크고 거칠거칠한 손바닥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메린다가

그와 함께 지낸지 2년이 가까워 올 무렵 찍은 것이었다. 사진 속에서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다시 쓰려 왔다. 메린다, 메린다……." 난 당신을 잊을 수가

없어.

그는 화장대 위에 액자를 세워 놓고, 그녀를 바라보며 차차근 옷을 벗었다

그리고 불을 끈 후 침대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미소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어떤 여자도

흉내낼 수 없는 매력적인 그녀만의 것이었다. 그는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쏟아 내고 싶었다. 그러나 대신 이마 위에 올려놓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두

눈을 감고 눈물을 삼켰다. 외로움이라는 건 그들의 삶 속에서 이미 금욕주의와

함께 독특하게 자리잡은 일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것들은 아무도

모르게 스물거리며 기어나와 제어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고통으로 그의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겨우 서른네 살이었다. 그는 이 큰 침대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 이상의 시간을 앞으로도 홀로 잠들어야 한다.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식탁에 둘러앉으면 날마다 마주하는 얼굴들,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형……. 하지만 어머니와 크리스찬이 더 이상함께 식탁에 앉아 줄 수 없게

될 때, 그때는? 존밖에 없다. 그래, 그가 사랑하는 형. 그러나 그런 형도 메린다가

떠나고 난 후의 공허한 자리를 메꾸어 주지는 못했었다.

그가 메린다를 대신해 줄 여자를 원했을 때는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었다.

이곳에 사는 여자의 절반이 그의 친척이고 나머지 절반은 이미 결혼했거나

어머니 나이 정도의 노인들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무엇이 여자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부추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추수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어째서 자신은 이토록 진한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걸까? 보통 이때쯤에는 만족감과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던가!

그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이토록 바보 같고 초라하게

느끼게끔 하는지 그 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군가와 지금 알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메린다에 대해, 아주 오래 전 그녀가 만들어 놓은 상처에

대해,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이미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다시 고통을 주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겠는가? 그리고 누가 이토록 뒤범벅이 된 그의

감정들을 추스려 줄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리니아는 잠자리에 누워 테어도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있었다. 그녀는

저녁 식사 때 그가 자신에게 보였던 얼음처럼 차가운 태도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태도는 그녀에게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테어도어의 말은 틀렸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러므로 고집 센 그와 다투었다고 해서 그녀가 잠 못

이를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뇌었지만, 그녀는 눈이 따끔거리는

걸 멈추게 하기 위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들이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테어도어와 부딪친 직후 니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려는

니사가 당연히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노인네는 그녀를 위로할

만한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당신이 그 일로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건 알아요.

니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테디의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애는

이곳에 부임해 온 다른 선생님들과도 같은 문제로 늘 싸워 왔어요. 사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다음해에 다시 이곳에 오길 꺼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이 일만큼은 당신이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거예요. 아이들은 타작이

끝날 때까지는 학교에 못 갈 테니까요.

―그게 언제쯤이죠?

―오, 10월 중순 전후예요, 대략. 일꾼들이 오면 일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지요.

―일꾼들까지 필요해요?

이미 일할 만한 남자들은 아이들까지 모조리 일터에 나가있는데, 또 무슨

일꾼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일꾼들을 고용할 능력이 있다면 왜 지금 당장

데려오지 못하는 것일까?

―곧 미네소타 주의 추수가 끝날 거예요. 그러면 그곳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품을 팔게 되죠. 해마다 그래왔어요.

아이들에게 수업 시간을 되찾아 주는 일은 그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될 것이다.

눈물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실망감에 횝싸여 그들을 나무랐고, 테어도어와의

싸움으로 모든 기대가 산산히 부서졌다. 최악의 출발이었다. 수업 첫날부터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감정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후회스러웠다. 그녀는

눈물이 흐느낌으로 잦아들 무렵, 다시 테어도어를 생각했다. 그는 식사 시간

내내 그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양 취급했었다. 다시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그와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똑같은 식의 대접을 받았다.

그녀가 인사를 먼저 건네면, 마지못해 하는 인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그는 눈길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집 안에 있을 때는, 만사를

제치고 집밖으로 나가 버리곤 했다.

일요일 날, 결국 그들은 교회에서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팔꿈치가

행여나 그녀의 살갗에 닿지 않을까, 의식적으로 몸을 사렸다. 그의 미움을

받고 있는 지금 그녀의 마음은 위축되어 있었다.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며

선생으로서의 자기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녀는

마음을 모두 열어 보이고, 그의 차디찬 무관심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호소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그와 다시 친하게 지내고 싶었고, 집 안에 맴도는 긴장감도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껏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 중에 적을

만든 예는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테어도어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겨냥한 그의 의식적인 냉대는 결국 그녀의 화를 폭발시켰고, 아슬하게

유지되던 그들의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테어도어의 냉소와

무관심 속에서 금방이라도 말라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버트 목사가 찬송가 203번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오르간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신도들도 그 가락에 맞춰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천만다행으로

찬송가는 신도석에 나란히 앉은 그 두 사람을 한 데 모으는 역할을 해주었다.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리니아는 펴 든 찬송가 책의 가장자리로

테어도어의 팔을 슬쩍 찔렀다.

그가 뻣뻣하게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자 그녀는 새 날개처럼 생긴 모자 아래로

살짝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그제 서야 그녀가 화해를 청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곳이 하느님이 계신 성전임을 깨달았다. 위선을

가장하고 있을 장소가 아니었다. 그는 책 한 쪽 귀퉁이로 손을 뻗었다. 물론,

자신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화해 분위기는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는 그날도 식사 시간 내내 한마디의 말도 건네 오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앉아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리니아의 모습을 얼핏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애를 써가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가슴으로 물밀듯 밀려드는 기대감이 그를 멈춰 서게 했다. 그

순간, 파란 눈동자를 둥그렇게 뜨면서 그녀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두 뺨 위로 빨간색 무늬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번져 갔다. 마치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잠시 후 그녀의 속눈썹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듯 아래로 내려감겼다. 그리고 할말을 삼키듯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닫혀졌다. 그는 미묘한 실망감을 느끼며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오후 내내 방에서 틀린 시험지를 고치고 수업 계휙을 세웠다. 아래층에는

니사가 피곤을 풀기 위해 침실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집 안은 갈수록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고, 서까래가 드러난 그녀의 침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느새 해는 보이지 않고, 녹회색의 기운이 하늘을 완전히 장악한 채 북쪽으로부터

가볍게 번개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리니아는 어느 틈엔가 수업 준비에 쏟던 집중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창문을

흘깃 쳐다보니, 날씨가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테어도어와의 다툼으로

인해 생긴 감정의 골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로렌스에게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테어도어를 기억하니? 응, 나는 그 사람과 내가 아직도 껄끄러운 관계로

남아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려. 우리는 아주 심하게 다퉜거든. 그리고 지금 그는

날 쳐다보려고도, 내게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아!"

그녀는 슈미즈와 페티코트만을 걸친 채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한 쪽 손바닥으로는

가슴을 누르고, 다른 손끝으로는 이마를 짚으며 크게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하니, 로렌스?"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글쎄, 내 생각으로는 우리 두 사람 모두가 잘못한 것 같아. 그는 너무 자기

고집만 내세웠고, 그리고 나는…… 글쎄, 나는 그에게 지독한 말을 퍼부어

댔어."

갑자기 그녀는 머리 장식이 흐트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그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했어, 로렌스. 그는 정말고집 센 숫사슴

같았다구! 그는 세상의 모든 잘못이 자기보다 교육을 더 받길 원하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가……."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래, 맞아. 나는…… 나는…… 그래, 내가 그에게 우둔하다고 했어! 그게

뭐 어떻길래?"

그녀는 지금까지 고치고 있던 시험지 다발을 들어 한 쪽으로 치워 놓으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과하라구? 하지만 내게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바로 그잖아!"

첫 번째 천둥 소리가 하늘을 울릴 때쯤, 테어도어는 들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뒷주머니에 단단한 금속을 꽃은 채 걷고 있던 그는 밀밭 중간쯤에 이르러 심한

뇌우雷雨를 만나게 되자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수그렸다. 회색으로

뒤덮인 지평선 위에 또다시 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그는 다음 번 천둥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까지의 시간을 재면서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4시였다. 그날은 그들이 추수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저녁 늦도록 일한 지 3주째 접어들고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번개와 비바람이 치다가는 이미 베어 놓은 밀이 완전히 썩어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테어도어는 크리스찬에게 말들을 데리고 가 물을 먹이라고 시킨 뒤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따뜻한 물이 있는지 보기 위해 바로 난롯가로 향했다. 주전자를

한 손에 들고 잠시 쉬던 그는 귀를 종긋 세웠다. 리니아의 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지금 리니아와 함께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다시 귀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소리죽여

말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 침실에서는 니사가 코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천장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에

주전자를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계단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난 네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로렌스. 너는…… 그래,

너는 내가 지금껏 사귄 사람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좋은 친구야."

테어도어는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 상황 그대로였다. 그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울리는 천장에 계속 눈길을 두었다. 로렌스? 이 천둥치는

날씨에 로렌스라니? 그리고 그 남자는 리니아의 방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다시 그는 고개를 곧추세우며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간 뒤에도 역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벌이기에 이렇게도 조용한 걸까? 테어도어는 세숫대야에 물을 붓고,

여전히 귀를 쫑긋 세운 채 손을 닦았다. 그렇게 조용히 닦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크리스찬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문짝을 소리나게 여닫는 바람에

정적이 깨지고 말았다. 그 소리에 잠을 깬 니사는 정신이 덜 들었는지 비틀거리며

나와 안경을 귀에 걸면서 잔뜩 찌푸린 날씨에 대해 불평을 터뜨렸다.

테어도어는 일어나 얼굴을 닦으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위층에 누가 와 있나요?"

니사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위층에? 글쎄, 아무도 없을걸."

"얘깃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니사는 곧바로 천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테어도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작업복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축사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꽝하며 문짝이 열리는 소리,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리니아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불현듯 바깥이 어두컴컴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바닥으로 창틀을 짚고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북쪽 하늘에 빛이

번쩍하고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남자들도 다시 들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손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나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서로 맞부딪쳐 탁탁 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옳아, 로렌스."

그녀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어도어가 어디 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빛이 점점 가까이에 내리꽂히고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종종걸음을 치며 황급히 축사로 달려갔다. 바깥문이 소리없이 스르르

열렸다. 그녀는 문을 살짝 닫고 한숨을 내쉰 뒤 어둠침침한 곳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 길게 줄지어 선 창문들로 약간의 빛이 흘러 들어왔다. 덕분에 축사

끄트머리 쪽에 자리잡은 테어도어만의 작은 밀실을 찾아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 방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오렌지색 호롱 불빛이

번져 나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휘감았다.

문 틈으로 테어도어의 뒷모습이 절반 정도 보였다. 교회에 다녀온 후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면서 하얀 셔츠는 그대로 입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깨 위로 팽팽한

긴장감이 어린 채 그는 낡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발 뒤꿈치를 들고 살살 앞으로 걸어나가 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섰다. 그는 가죽을 문질러 닦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팔꿈치를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생동감 있게 불거져 나오는 그의 팔뚝

근육을 지켜보았다. 그 방은 비좁고 더웠으며 양잿물 비누와 가죽, 기름 냄새가

섞여서 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기 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으며, 그녀가 전에 보았던

때와 다름없이 주변 정리도 말끔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외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동작을 멈춘 채,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조각을 응시하며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내쉰뒤 다시 뻣뻣이

굳은 자세로 돌아갔다. 그가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테어도어?"

그의 눈길이 의자를 지나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쳐 지나가듯 다시 깡통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사람마냥 다시 가죽을 닦기 시작했다.

"내가 방해가 되었나 보죠?"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지금껏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

소리 없이 그의 뒤에 나타나서 그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그렇다, 방해라고

한다면 방해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자세로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고

있었는데, 애써 외면하려 해도 그의 시선은 팽팽하게 부푼 그녀의 가슴위로

달려가곤 했다.

"아니오."

"당신을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당신이 거기 서 있는 줄 몰랐소."

"그랬군요."

그녀는 그 말 한마디를 겨우 내뱉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슨 일이오?"

"아무것도 아녜요."

그녀의 얼굴이 벌개졌다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며 아까 부엌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들어가도 될까요?"

"오, 물론이오."

그는 가죽 조각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얼마든지 하지만 워낙에 좁아 놔서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양팔로 가슴을 감싼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죽으로 온통 뒤덮인 벽을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여기가 당신이 여가 시간을 보내는 곳인가요?"

"그렇지 않지……."

그는 어법에 맞게 말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머릿속이 뒤범벅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 역시

불편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음……."

그녀는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마구들을 자세히 눈여겨 보며, 그의 말투 따위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가죽을 닦고 있었소."

"왜요?"

그는 머리 위에 높이 매달려 있는 물건들에 넋을 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당신은 잘 모를 거요. 가죽이 썩으면서 나오는 분비물이 있는데, 그걸 닦아

내지 않으면 유독 가스가……. 거기서 유독 가스가 나와서 축사 전체를 꽉

채우게 될 거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에요. 흥미로운데요."

테어도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일을 흥미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당연히 해야 할 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난 당신이 농장의 운영에 관한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알고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창고 안을 좀더 구석까지 살폈고, 그는 그녀가 이곳에 왜 왔는지에

대해 알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황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톱질 모탕이 있는 곳까지 한가로이 걸어갔다.

"어머 ! 깜박 잊을 뻔했어요."

그녀는 뒤돌아서 면서 쥐덫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 테어도어에게 말했다.

"학교에 원치 않는 손님이 있어요. 크리스찬이 덫을 놓으라고 주기는 했는데,

제대로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놓는 건지 좀 가르쳐 주실래요?"

테어도어는 쥐덫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등뒤로 가서 섰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단지 잠시 동안 그녀처럼 교육을 많이 받은 여자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쥐덫을 어떻게 놓는지 모른단 말이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 아버지는 늘 가게에다 쥐덫을 놓으셨기 때문에 난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며칠 전에 니사가 도시락에 치즈를 조금 싸 보냈길래 그걸로 미끼를

하려고 했었는데, 잘못하다 손가락만 부러뜨릴 뻔했었죠."

"무슨 가게요?"

"우리 아버지는 파르고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나 운영하고 계세요. 그런데

쥐라는 놈이 밀가루 푸대를 쏟아 구멍 내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당신 아버지가 변호사라고 알고 있었소."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뒤, 눈길을

쥐덫 쪽으로 떨어뜨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었어요. 하지만 악의를 품고 한 얘기는 아니에요.

당신이…… 당신이 그날 나를 너무 불친절하게 대해 당황했었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급소를 찌를 생각을 하다 보니……. 그러니까 나는……."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 뒤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까봐 겁이 났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돌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달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따라서 정직한 작은 숙녀는 결국 아주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두 뺨이 작약처럼 검붉게 변한 채,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은 모습으로 애꿎은 쥐덫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무 가장자리에

잉크로 찍은 도장 자국을 손톱으로 북북 긁어 대며 .

그가 커다란 한 쪽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 쥐덫을 이리 주시오. 이건 새로 나온 것 같군요. 내가 당신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겠소."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들리면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그녀는

테어도어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즐거움을 발견하고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그의 손바닥 위에 쥐덫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는 천장 갈고리에 걸린

호롱불을 홱 낚아채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뒤 그녀에게 등을 보인 자세로 섰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그와 너무 가까이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쥐덫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쳐다보며

지금껏 본 손 중에 가장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맨 먼저 당신은 미끼를 놓아야 하오. 여기에다 말이오."

그는 실제로 가죽 조각을 그곳에 올려놓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론, 알고 말고요. 거기에 놓으면 되잖아요. 난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서로 친근감

넘치는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그가 입고 있는 셔츠의 칼라가 목젖이 보이는

데까지 풀어헤쳐져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긴 속눈썹이 눈에 띄었다.

녹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그의 눈길을 멈추게 했다.

그들은 쥐덫의 사용법을 익히는 데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야 했다.

"평평한 곳에 올려놓고 한 쪽 끝의 활을 뒤로 힘껏 젖히면 되는 거요."

"활을 뒤로 힘껏 젖히라구요."

그녀가 그의 말을 반복해 말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걸 활이라고 부르나요?"

"그렇소."

"왜요?"

그는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순간, 쥐덫이 탕하는

소리와 함께 작업대에서 마룻바닥으로 굴러 떨어겼다.

그녀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거 이제 아주 잘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쥐덫을 집은 뒤 놀려 대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며 다시 시범을 보였다. 가죽조각을 찾아내 쥐덫

위에 올려놓고 활을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자, 보시오."

이번에는 제대로 일을 마친 것 같은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말끔하게 정돈된 연장통에서 스크루드라이버를 꺼내 쥐덫 위에 올려놓고는

잘 걸리는지 시험해 보았다."

자, 이제 당신이 해볼 차례요."

그는 스크루드라이버를 다시 연장통 안에 넣고 쥐덫을 그녀 쪽으로 밀어놓았다.

"좋아요."

그는 자신이 가르쳐 준 대로 쥐덫을 설치하고 있는 그녀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잘못해서 용수철이라도 튀어올라 저 작은 손가락이 부러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훌륭한 솜씨로 일을 마친 후 작업대 위에 미끼를 갖춘

쥐덫을 올려놓았다.

밖에서는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네모진 작은 창가로 다가간

두 사람의 얼굴 앞으로 검푸른 하늘이 다가왔다. 갑자기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야릇한 침묵이 감돌았다.

"테어도어?"

그녀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빗방울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지만, 그 안은 습기도 없이 쾌적한

상태였다. 하지만 딱딱하게 말라붙은 테어도어의 목구멍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목이 완전히 말라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바라보았다.

"사실은, 쥐덫을 설치하는 법을 배우려고 온 게 아니었어요. 쥐덫은 처음에

한두 번 만지작거리다 혼자서 방법을 터득했거든요. 단지 핑계를 삼은 거였어요."

그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머릿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아직까지도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할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당신의 미숙한 영어 실력을 비웃고, 또 당신에게 심한 말도 하고…….

당신이 나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행동을

사과드려요. 미안해요, 테어도어."

그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려고 하자, 시선이 부딪치지 않도록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그런 것, 전혀 신경쓰지 않았소."

"정말이에요? 그런데 왜 그날 이후로 말도 걸지 않고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는 대답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쥐덫에 놓인 가죽 조각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튼튼하게 지은 축사가 몸서리를 칠 정도로 천둥이

무섭게 내리쳤다. 하지만 테어도어도 리니아도 전혀 움찔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할 때나 우연히 부딪치게 될 때마다 당신이 보이는 냉랭한 태도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해요. 우리 집 식구들은 당신 가족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죠,

우리는 함께 웃거나 떠들고, 또 서로의 일들을 함께 고민하거든요. 난 이곳에

온 후로 그런 생활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어요. 당신은 내내 나를 차갑고

딱딱하게 대했어요. 나만 보면 피했구요. 그럴 때마다 난 울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에요. 지금까지 나는 적을 가져 본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에게 아직 조금은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그리고 다시 약간이나마 깨달은 것이 있었죠. 아마도 당신이

나로 인해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것 같다는 것, 그리고 내가 다시 당신과

친구 사이로 지내길 원한다면 반드시 당신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 나를 좀 쳐다보면 안 되겠어요? 제발……."

그녀의 후회하는 눈빛과 그의 껄끄러워하는 눈빛이 맞부딪쳤다.

"미안해요. 당신은 우둔하지 않아요. 그런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그리고 당신이 아무리 틀린 어법으로 말을 한다 해도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테어도어, 나는 선생이에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는 그의 팔 위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의 가슴으로

뭔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는 그녀에게 향한 눈길을 다시 거둬들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당신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는 혹시나 그녀가 울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건 내가 교실 밖에 있을 때도 여전히 선생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1마일

떨어진 학교에 가 있을 때는 선생님이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자기 신분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그를 자신의 손길에서 놓아 주었다.

"오, 나도 내가 가끔씩 성격이 너무 급해진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 일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거예요. 나는 사람들이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마다 늘 고쳐 주었거든요. 여기에 와서도 아무 생각 없이 또 그랬지 뭐예요.

하지만 당신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죽 조각을 집어들더니 짐짓 바쁜 척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팔 소매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난…… 당신과 인연이 끊기기 전까지는 계속…… 계속해 말을 고쳐

드릴 거예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을 얕잡아 보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만 이해하면, 당신에게도

해가 될 건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몇 살 이하의 아이들에게만 선생이라는

규정도 없구요, 안 그래요?"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다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안 그래요?"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런 식의 요구에 대응하는 데 익숙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데 긴 시간을

소비했다 그녀는 화를 버럭 내며 그의 팔을 홱 뿌리쳤다.

"당신은 정말이지 고집불통이에요, 테어도어. 계속 그런 식으로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침묵만 고집한다면, 당신 아들 크리스찬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거예요. 자기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걸 알면 크리스찬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당신은 나를 존경해 주어야하는

거라구요!"

"그러고 있소."

드디어 그가 한마디 했다.

"오, 물론 그러시겠죠."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어 엉덩이 쪽에 대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도 냉랭하게 대하나요? 하지만 난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테어도어. 난 적대감 따위에는 익숙하지 않단 말이에요."

창 밖에는 다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자기 자신조차

생각지 못했던 고백을 털어놓고 말았다.

"난 적대감이 무슨 뜻인지 모르오."

"어머!"

그의 고백은 곧장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호전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건, 아주 미워하는 사람한테 품는 감정이에요. 이를테면 전쟁중에 적군에게

품는 증오감 같은 거죠. 그러니까 이제, 우리 정식으로 화해하기로 해요, 그럴

거죠?"

그는 목구멍이 막혀 버린 것처럼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은 온통 그녀에게 가 있었다.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매력적이었고, 황금빛 불꽃과 함께 반짝거리는 그녀의 두 눈동자 역시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의 멋드러지게 굽은 콧날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러니까 다음에 또 한 번 당신이 고집을 부리면 난 완전히 미쳐 버릴지도

몰라요."

작은 폭탄과도 같은 그녀에게 이럴 때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무엇이겠는가?

"당신은 너무 말을 많이 했소,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방 안 저쪽으로 활기차게 걸어갔다. 그리고 톱질

모탕 위에 올려놓은 안장 중 하나를 골라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당신은 말을 너무 조금 했어요."

"우리가 완벽한 한 조를 만들었군."

"오, 모르겠어요. 내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우린 아주 잘해 오고

있잖아요? 글쎄, 당신은 좀 과장되게 말해서……."

그녀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며 놀려 댔다.

"랩소디를 낭송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는 작업대에 등을 기대며 그 위로 양팔을 얹었다.

"그럼, 그 말은 무슨 뜻이오?"

"이걸 보시죠."

그녀는 사전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집 안 어딘가에서 찾아낸 영어-노르웨이어

사전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 사전을 이용해 '랩소디'라는 단어의 뜻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며, 언젠가 또 모르는 단어와 마주칠 때마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큰 한숨을 내쉰 뒤, 손으로 뺨을 훑어 내리며 이마위로 입김을 훅

불었다.

"우, 기분이 괜찮은데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전염이라도 된 듯 테어도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녀가 말 안장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야아, 정말 재미있네. 끼럇."

그녀는 구둣발로 두 번이나 박차를 가했다.

"난 이제껏 말을 타 본 적이 없어요. 도시에 살았고, 우리집에는 말이 없었거든요.

우리 가족은 여행을 할 때마다 아버지가 빌려 온 마차를 타곤 했어요."

작업대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어색하나마 가벼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녀는 종알종알 재잘거릴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됐건, 그녀는 정말로 어린아이 같았다. 세상에, 남자와 둘밖에 없는 축사에서

말안장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다리를 내놓고 놀다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도

없단 말인가.

"당신도 알겠지만, 말 위에 얹어 놓지 않은 안장 위에 그런 식으로 앉혀

있으면 안장에 무리가 가서 좋지 않소."

"앉아 있으면."

그녀가 말을 고쳐 주었다.

"앉아 있으면."

그가 공손하게 되풀이했다.

그녀는 목을 쭉 빼고 치맛자락을 내려다본 뒤 다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런, 안 된다구요?"

그녀는 예고도 없이 발을 공중으로 날리며 튀어오르듯 바닥에 내려섰다.

"다음에는 안장 아래 말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죠?"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문 쪽으로 팔딱팔딱 뛰어갔다. 그리고 나서 다시

뒤로 빙그르르 돌아서서 손가락 두 개를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안녕, 테어도어.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그녀는 비가 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텅

빈 통로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로렌스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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