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출근 첫날 아침, 그녀는 수탉의 기상 나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네모진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새벽이 상쾌한 하루를 약속하고 있었다. 니사가
부엌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고대하던 일이 시작되었다.
리니아는 활력에 넘치는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머리 모양에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단단하게 꼰 머리칼을 양쪽 귀에서
목덜미 쪽으로 초승달모양이 되게 얹어 뒤통수가 납작하게 보이도록 했다.
새로 산 초록색 치마와 그에 어울리는 체크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목까지 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나서 허리띠를 꽉 졸라맨 뒤 거울 앞에 서서 발꿈치를 들고
허리가 휠 정도로 이리저리 확인을 했다.
치마는 앞쪽에서 보면 그냥 평범해 보였지만, 뒤쪽으로 풍성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그녀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발끝을 들고, 팔짱을 낀 채 손목을 우아하게 치켜올린 자세로
거울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어머, 고마워요, 로렌스. 얼마나 기다리던 날인지……. 당신도 아다시피
오늘이 첫 수업이잖아요. 난 오늘 온통 아이들에 둘러싸인 채……."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저런 시계를 잊었네요. 찾으러 올라갔다 와도 되죠?
그녀는 별난 행동을 멈추고 옷장 쪽으로 가서 우아한 모양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종이처럼 얇은 금으로 겉뚜껑을 만들어 그 위에 온통 장미꽃을 새겨
넣은 그 시계는, 부모님으로부터 졸업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시계를
가슴 위로 늘어뜨린 뒤 다시 돌아서서 자신의 모습을 긍지에 찬 시선으로 감상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아래층으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니사만이 식탁에서 난롯가로
왔다갔다하며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저, 안녕히 주무셨어요, 여러분! 음…… 냄새가 참 좋은데요, 니사."
리니아의 목소리는 잠을 깨우는 수탉의 그것처럼 씩씩하고 우렁찼다. 그녀는
자기 자리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존과 크리스찬은 그녀가 아침 인사를 건네자 우물쭈물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아래로 떨구었다. 테어도어는 음식 접시에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글쎄, 내가 지금 뭘 바라고 있는 거야.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아무것도 잘못된
게 없는데……. 테어도어는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첫 수업을 하기엔 더없이 아름다운 날씨죠."
그녀가 떠들썩하게 말했다.
니사를 빼놓고는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이에요. 우리 모두 날씨가 좋길 기도했는걸요."
리니아는 식사중에 몇 번이나 침묵을 깨기 위해 분투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셈이었다. 그녀는 음식에 관해 니사에게
아첨을 떤 뒤, 능청스레말했다.
"이렇게 잘 먹다가는 곧 뚱보가 되어 버릴 거예요. 금요일날 먹었던 샌드위치도
정말 맛있었어 요."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뭘 넣었죠?"
"혓바닥."
리니아는 속이 훌렁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혓…… 혓바닥?"
"소 혓바닥."
니사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 혓……."
그러나 그녀는 그 단어를 다시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네 사람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모아지는 동안,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메스꺼움을 참았다.
"전에 소 혓바닥을 먹어 본 적이 없나 보죠?"
니사가 물었다.
"네, 안 먹……."
"하지만 맛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혓바닥이었다구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지금은 전쟁중이잖아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소의
어떤 부위도 함부로 버리지 않아요. 안 그러니, 얘들아?"
리니아는 자신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졸지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오늘 내 샌드위치에도 또 그게 들었나요?"
"물론, 넣었어요. 그게 내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신선한 고기인걸요. 물론
그것 대신 달걀 프라이를 넣을 수도 있어요. 당신이 원하……."
"오, 아녜요, 아녜요."
리니아는 강력히 주장했다.
"난 당신에게 안 해도 될 일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 혓바닥, 맛있겠죠,
뭐."
어쨌든, 그날 아침은 평소와 달리 식탁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테어도어의
눈길도 예전에 비해 그녀에게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가 조롱하듯 말했다.
"소 심장으로 만든 스튜를 먹어 보려면 좀 기다려야 할 거요."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웨스트가드 식구들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단지 리니아만이 다시 식욕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설득력 없는 변명을 둘러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이 양해해 주신다면, 2층에 올라가서 수업 준비를 좀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계단 쪽으로 시들시들하게 걸어가서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니사는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남자들은 이미 들로 나가 버리고 없었다. 문 앞에 서서 니사가 말했다.
"크리스찬이 당신에게 이걸 드리라는군요. 그리고 당신 도시락통에 치즈
덩어리를 넣었어요."
리니아는 니사가 건네준 쥐덫을 손가락 두 개로 집어들어 교과서 위에 올려놓았다.
"오, 크리스찬이 기억해 줬군요.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은 뒤 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자, 이제 가 봐야죠. 내게 행운을 빌어 줘요."
"당신에겐 그런 게 필요없어요. 내 생각엔 그래요. 당신은 좋은 선생님이
될 거예요."
리니아는 20분쯤 걸리는 출근길을 행복감과 열정에 휩싸인 채 출발했다.
걸을 때마다 자박자박 소리가 나는, 자갈길을 걷는 그녀의 발걸음에 생기가
넘쳤다. 길가에는 이슬을 함빡 머금은 키 큰 풀들이 떠오르는 햇살 속에 반짝거리며
그녀가 걷고 있는 쪽을 향해 유연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수로 너머 들판 위에서는
방금 감은 여자의 머릿결처럼 기다랗게 베어놓은 곡식들이 마르고 있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추수기의 광경뿐이었다. 황금빛 햇살이 퍼지기 직전,
석탄 가루처럼 미세한 먼지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존의 집을 지나며 삼목으로 둥그렇게 바람막이를 쳐놓은 작은 날씨
표시 상자 앞에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젖소들이 축사 옆에 서 있고, 풍차
주변에는 참새들이 날갯짓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집 식구중 가장
키가 작은 사라세니안(낙상엽 식물의 일종)의 푸른 잎들은 나팔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 푸른 하늘을 향해 자라나고 있었다. 집과 풍차의 중간 거리쯤에는 빨래통이
놓여 있었는데, 그 주위로 분홍색과 하얀색의 테두니아꽃이 만발해 있었다.
이 모든 게 그의 작품들인가? 나팔꽃도? 그녀는 수줍고 조용한 남자의 고독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찌를 듯 아파 왔다. 뒤뜰 계단에는 고양이가 앉아 시커먼
발로 하얀 낯을 닦으며 아쉬운 대로 세수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는
이 집주인보다는 그 동물의 신세가 차라리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존은 정말 단순하고 착한 남자라고.
테어도어.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무지 단순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남자다.
물론 분명히 착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두 형제가 그리도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성격을 조금씩 섞어 놓을 수 있다면……. 존은 테어도어의 뻔뻔스러움을
조금 배우고, 테어도어는 그의 형의 수줍음을 조금 닮는다면? 그녀는 그가
익살을 부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웃음 없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그는 들뜬 기분에 빠져 본 적도 없을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에겐 젊은 시절이 있었고, 또 메린다와
함께 했던 시간도 있었다.
테어도어, 심보 고약한 늙은이 같으니 반드시 당신 얼굴에 웃음을 돌려놓고
말겠어.
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풍경을 음미하던 일을 중단했다. 하얀 건물, 감청색 하늘, 에메랄드빛
미루나무들, 황금색 밀밭, 곡식들이 있는 어딘가에서 노래 부르는 새들, 귓가를
윙윙거리며 나는 등에…….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그녀만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게 했다. 그녀는 이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귀중한 순간들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차가운 강철 난간을 붙잡고 콘크리트 계단을 밟아 오른 뒤, 나무로
만든 문 앞에 섰다.
드디어…… 나의 첫 수업…….
그녀는 사물함이 있는 휴게실을 지나 드디어 이중문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그녀가 해놓고 간 그대로였다. 그녀는 뺨 아래쪽에 가만히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교실의 길고 깨끗한 창문으로는 황금빛 아침 햇살이 퍼져 들어오고
있었고, 줄을 잘 맞춰 놓은 책상들은 참나무 마룻바닥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차양은 한가롭게 매달려 앞뒤로 흔들거렸고, 그 연결 고리들은 줄
지여 놓인 책상들 위에 물결치는 둥그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성조기는
제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시커먼 난로는 첫 번째 불꽃이 점화되길 기다리고
있었고, 잉크병 역시 첫 번째 잉크 채우기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칠판에
씌어진 그녀의 이름이 아이들이 처음으로 읽게 될 글자였다.
그리고 마룻바닥 한가운데 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그 생물체가 도망을 친다고 나온 곳이 교실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그래, 너도 안녕?"
그녀는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쪼르르르 가로질러 책장 위로 사라지는 쥐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거기가 바로 네가 숨는 장소로구나."
그녀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책장의 선반 뒤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손바닥을 털며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곧 널 쫓아 버릴 테니까 그때까지는 밖으로 코끝도 내밀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알았지?"
그녀는 교사용 책상에 앉아 납작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니사가 싸 보낸 치즈 덩어리가 한 켠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뚜껑을 닫은 뒤 책장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책장의 평평한 부분 위에 쥐덫을 설치했다.
그 다음, 그녀는 바깥으로 나가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 뒤 다시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와 단지에 부었다. 마지막으로 잉크병을 가득 채운 뒤 조바심
치며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수업 시작 5분전이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닫혀 있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양쪽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문 쪽에 서서 자신의 책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다시
그녀의 책상 쪽에 서서 문 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책상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시야에 와 닿는 모든 것들을 꼼꼼히 살폈다. 미루나무가
심어진 학교운동장이 교실의 하얀 벽을 그림틀 삼아 눈앞에 펼쳐졌다. 또 깔끔하게
절단된 벽면으로는 시커먼 난로 연통이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최초로 등교하는 세 명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리니아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을 향해 움직였다.
로스와 이브의 아이들이었다. 그애들은 가슴에 책과 얄팍한 통을 안은 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남자아이는 주근깨 투성이로, 진한 청색 반바지에
회색 멜빵을 메고, 앞부리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키가
큰 여자아이는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작은아이는
키 큰 아이 뒤로 슬금슬금 숨으려고만 했다. 그 여자아이들은 면으로 된 꽃무늬
드레스에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남자아이의 것과 마찬가지로 새 신임이
분명했다. 제일 어린 여자아이는 드레스 위에 빳빳하게 풀먹인 어린이용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머리를 뒤로 곱게 빗어 땋아 늘인 다음 노란색
리본을 묶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큰 애 둘이 합창하듯 인사를 했다.
리니아는 그애들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 이름은 노나, 맞지? 노나 웨스트가드."
"어머, 맞아요. 그리고 스킵과 로즈안이에요."
"안녕, 스킵?"
그러자 스킵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고, 로즈안은 손으로 입을
막고서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로즈안?"
노나가 무릎으로 동생을 살짝 건드리자, 그 장난꾸러기는 미리 연습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인사말을 더듬거리며 읖조렸다.
"안녕하세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노나는 몸을 앞으로 구부려 동생의 손가락을 끌어당기고는 명령했다.
"다시 잘 말해 봐,"
"안녕하세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이번에는 처음보다 목소리는 약간 더 분명해졌지만, 매혹적인 혀짤배기 발음은
여전했다.
리니아의 마음은 금방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녀는 로즈안과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몇 걸음 내딛었다.
"자, 로즈안, 내가 들은 바로는 오늘이 네가 처음으로 등교하는 날이라던데."
로즈안은 리니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 안 가득 공기를 넣어 부풀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첫 등교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 너희들은 내게 그 중에서도 첫
번째 학생들이야. 너희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 안 한다고 약속한다면, 내가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
리니아는 아이들을 한데 모아 팔로 감싸안은 뒤 허리를 굽히고 비밀을 털어놓듯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만날 때까지 신경질이 나 있었어."
로즈안은 입에다 손가락을 가져다 세운 뒤, 위안을 주려는 듯 웃고 있는
노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로즈안의 또다른 손가락이 문 쪽을 가리켰다. 프란시스 웨스트가드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애들이 올머와 헬렌의 아이들임을
기억해 낸 리니아는 곧바로 나머지 두 형의 모습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두 아이 외에 손위 형들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사를 나눈 뒤, 모두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놀게 한
뒤, 리니아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계단에 가서 섰다. 그녀는
계속 길 쪽을 쳐다보며 아직 등교하지 않은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 나타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는 알렌 세버트였다. 알렌은 학교
운동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뒤늦게 야 나타나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는 그네
쪽에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리니아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 출석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지 않은
학생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녀는 크리스찬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 기억을 더듬다 보니 레이먼드 웨스트가드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확연히 떠올랐다. 키가 크고 얼굴이 각진 소년이었는데, 일요일에
그녀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크리스찬과 함께 자리를 떠났었다. 그리고 로멘
씨의 딸―금빛이 도는 다갈색의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속눈썹이 유난히
긴 귀여운 소녀였다― 은 이미 도착했는데, 그애의 쌍둥이 형제인 폴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또 누가 아직 안 왔지? 오, 그래……. 리니아는 출석표를
점검해 보았다. 앤턴 ― 니사는 이 아이를 토니라고 불렀었고, 리니아는 그
별명을 여백에 메모했었다 ― 토니 웨스트가드 역시 행방불명이었다.
리니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위장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그
녀석들, 벌써부터 새로 온 선생님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걸까? 첫날부터
의도적으로 지각을 하고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기로 했단 말인가?
크리스찬을 떠올리던 리니아는 그가 그런 책략에 가담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9시 10분이 지나도록 그녀는 아직 수업 시작 종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학생들을 둘러본 튀, 그 중 가장 재치 있고 진실을 얘기할
것 같아 보이는 한 아이를 골라 냈다.
"노나, 네게 물어 볼 게 좀 있는데?"
리니아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노나를 불렀다. 그애는 즉시 나머지 무리에서
뛰어나와 그녀의 앞에 와 섰다
"부르셨어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지금 9시 10분이야. 그런데 네 명의 학생들이 아직 행방이 묘연해. 그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고 있니?"
노나는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다.
"어머,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뭘? 뭘 모르고 있다는 말이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올 거예요."
"안 온다구?"
리니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 안 와요. 추수와 타작이 모두 끝날 때까지는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리니아가 다시 되물었다.
"추수? 오늘 말이니? 오늘 누구네 집에서 타작을 한다구?"
"아뇨, 선생님. 오늘만이 아니에요. 가을이 끝날 때까지 못나올 거예요.
그 오빠들이 추수를 도와야 하거든요."
그녀는 무슨 말인지 서서히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으로 향했다.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노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맙다고 한 후 종이 매달려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종에 매달린
두껍고 매듭진 밧줄을 흔들어 댔다. 밧줄에 온힘을 싣고 얼마나 종을 열정적으로
쳐댔던지 그녀의 몸이 마룻바닥 위에서 흔들릴 정도였다.
이상적인 첫 수업을 마음속에 그리던 그녀에게는 너무도 비참한 시작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해마다 이런 식으로 슬렁슬렁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의
귀중한 수업 시간까지 홈쳐 가며 밀을 추수하도록 시킨단 말인가?'아무렴,
사람들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결연한 의지로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꼭 쥐었다.
그 사건 때문에 리니아의 하루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그 사건은 명백히 교사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녀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곧장 테어도어에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에게 좌석을 지정해 주고 출석을 부른 후 수업을 시작했다.
우선 그녀는 집안 식구들 중 한 사람을 골라 짧은 글짓기를 해보라고 시켰다.
그리고 이제 1학년에 입학한 로즈안과 소니 웨스트가드를 곁으로 불러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알파벳 카드로 철자 공부를 시켰다.
나이와 학습 수준이 천차만별인 아이들을 동시에 공부시키려면 요령이 필요했다.
시간을 규모 있게 잘 쪼개어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할애해야 했고, 모든
학년의 교과준비를 미리미리 완벽하게 해두어야만 했다. 그녀는 비록 혓바닥
샌드위치를 억지로 삼켜야 하는 괴로움은 있었지만, 점심 시간이 돌아온 것이
너무나 기뻤다.
오전 시간 내내 쓰라는 글은 안 쓰고 빈둥대던 알렌 세버트는 점심 시간이
되자마자 땅다람쥐를 잡으러 사라지고 없었다. 땅다람쥐를 잡으면 상금을 탈
수 있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오후만 되면 좋아라고 뛰어다닌다는 이야기를
리니아도 언젠가 들은 절이 있었다.
다시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어느새 교실 안으로 들어온 알렌은
털이 숭숭 난 땅다람쥐의 발바닥을 프란시스 웨스트가드의 어깨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았다.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비명이 조용한 교실을 울렸다. 프란시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깨 위에 있던 것을 마룻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알렌 !"
리니아가 명령했다.
"지금 당장 프란시스에게 사과해, 그리고 당장 그 더러운걸 밖으로 가지고
가서 쓰레기통에 버려!"
알렌은 구부정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되레 그녀에게 대들었다.
"왜요? 난 안 갖다 버릴 거예요."
"땅다람쥐 잡으려고 학교에 나왔니?"
대답 대신 그애는 입가에 비웃음을 남긴 채 발을 질질 끌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건방진 태도로 허리를 굽혀 마룻바닥에서 땅다람쥐 발바닥을 집어들더니
휙휙 소리를 내며 휘둘렀다.
"뭐라고 하셨죠, 선생님?"
알렌의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까스로
감정을 억제하고 찌를 듯이 알렌의 눈을 쏘아보았다. 알렌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잠시 미적거리더니 손가락을 바지 뒷주머니에 꽃으며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사과부터 해."
그녀가 다시 명령했다.
알렌의 어깨가 잠시 움찔하더니 리니아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미안하다, 멍청아."
그가 투덜거렸다.
"밖에다 갖다 버려!"
리니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하면서, 드디어 자신이 심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음을 깨달았다. 사과를 했던 것이다. 그 소년은 방금 전보다는
오만 불손함이 조금 줄어든 태도로 문 쪽을 향해 발을 질질 끌었다. 느릿느릿
옮기는 발자국 소리가 마룻바닥을 울렸다.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말썽을 일으켜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알렌은
그 지저분한 발바닥을 갖다 버린 후 자리에 와 앉았지만, 내내 지겨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리니아는 그런 알렌의 모습을 일부러 못 본 척해 버렸다.
종을 울리러 가기 30분 전, 그녀는 교탁 앞에 서서 그날 아이들이 쓴 글들을
거두었다. 알렌은 단어들만 몇 개 나열해 놓았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 그애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교탁 앞으로 불러내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알렌이 적어 놓은 단어들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그 아이의
반항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지겹다
멍청하다
기도만 한다
깜깜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단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초콜릿 쿠키'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종이에서 시선을 들다가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알렌을 발견했다. 그애는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펼쳐진 책장 위에 두손이 포개져 있었다.
초콜릿 쿠키들 초콜릿 쿠키를 만들어 준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아이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렌의
눈동자가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리니아는 신경질적으로 가슴에 매달린 시계를 꺼내 뚜껑을 탕 소리나게 열었다.
다시금 그녀를 당황케 하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알렌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애는 시계의 쇠사슬에 긁힌 자국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싹하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알렌은 관심 없다는 듯 눈길을 창문 밖으로 돌려 버렸다.
바보같이 굴지 마. 알렌은 이제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된 소년일 뿐이야.
제발 그래야……."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알렌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뜯어보았다. 호리호리하고
비쩍 말랐지만, 키가 크고 어깨가 유난히 넓어서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는
듯한 체형이었다. 그리고 크리스찬처럼 한창 자라나는 튼튼한 근육질도 아니었는데,
그건 알렌이 농가의 아이들처럼 고된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소년의 티를 벗어버리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구레나룻 자리에서부터 뺨의 움푹
패인 자리까지는 가느스름한 솜털을 깎은 흔적이 보였다. 그의 눈썹은 두껍고
숱이 많았다. 다시 알렌의 시선이 가슴께에 느껴졌다. 그녀는 몸의 떨림을
간신히 감추며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얘들아, 이제 책상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해야지."
교실 정리가 끝나자, 그녀는 학생들에게 즐거운 오후를 보내라고 인사한
뒤 종을 울리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그녀가 팔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드는데,
신발을 질질 끌면서 한들한들 그녀 쪽으로 걸어오는 알렌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도 그애의 시선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가슴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즉각 잡고 있던 밧줄을 내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알렌. 내일은 더 좋은 하루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알렌은 훅 하고 기분 나쁜 입김을 내뿜더니 입을 꾹 다물고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테어도어와의 전투를 앞둔 그녀에게, 그날 일어난 모든 일들이 악몽 같기만
했다.
테어도어는 자신이 그 조그만 여선생에 대한 생각으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하고 있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건
결국 일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농사일 말고
다른 어떤 것에 이렇듯 집착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 외에는 특별히 관심가는 어떤 일도 없었다. 평생을
땅과 더불어 소박한 꿈을 키우며 살아온 것이다. 땅은 한 번도 그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메린다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 주기까지
했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땅과 가축들과 더불어 내성적이고 뚱한 성격으로
자라났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니사와 존, 그리고 크리스찬……. 하지만 그들도 결국 혼자 살아가야 하는
개개의 인간에 불과했다. 단지 서로를 친구삼아 지낼 뿐이다.
하지만 이 조그만 아가씨, 그녀는 뭔가 다른 존재였다. 언제나 보글보글
지글지글. 그녀는 잠시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어떤 친구일지, 그녀와 결혼하려는
남자는 엄청나게 참을성이 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미치는 그녀의 영향력을 떠올렸던 것이다.
테어도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의
화를 북돋우거나 굳어진 혀를 풀어지게 했고, 또 러시아엉겅퀴 같은 쓸데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거나 미사여구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그는 크리스찬이 오늘 학교에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녀가 틀림없이
놀랐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음을 지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마을
사람들을 비난하며 수다를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찬은 벌써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언덕 마루를 오르는 동안, 크리스찬은 내내 학교 건물이 있는
쪽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던 것이다. 테어도어는 장님이 아니었다. 바보라도
자기 아들이 여선생에게 홀딱 반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한때의 사랑인 것이다. 테어도어의 입술 한 쪽 끝이 미소로 인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크리스찬 나이 때 메린다를 만났던
기억이 떠오르자 테어도어는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메린다. 그녀를 기차 안에서 본 순간부터 그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조차
없었다.
그는 채찍을 불안스레 다른 손으로 옮겼다. 최근에는, 무슨 영문인지 메린다를
생각하면 악담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메린다는 과거 속의 인물이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메린다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테어도어는 말 안장에 앉은 채 몸을 꼿꼿이 편 다음, 해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쪽 하늘로 기울어 가는 해를 따라잡기라도 할 듯 달릴 준비를 했다.
소의 젖을 짜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뒤에 있는 크리스찬에게 신호를
보내며 생각했다. 산마루를 달려 내려가는 기분이 얼마나 상쾌한가를.
그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오래된 은제 태엽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다음,
미끄러지듯 산마루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테어도어와 크리스찬이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
작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기다리고 서있었다.
테어도어는 밀짚모자 아래로 그녀가 서 있는 모습을 보았지만, 쿠브와 투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그녀가 서 있는 바로 옆쪽으로 지나가면서도 완전히 그녀의
존재를 무시했다.
"웨스트가드 씨!"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 뒤, 말없이 스쳐 지나가는 그의 널찍한 어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불꽃 튀는 파란 눈동자를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무슨 일이오?"
그는 그녀가 뒤따라오는 동안, 몸을 앞으로 구부려 펌프질을 했다.
"당신과 할 얘기가 있어요!"
"그럼, 하세요."
"당신의 아들이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테어도어는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태연스레 채찍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물론 안 갔소. 그애는 오늘 나와 함께 들판에 나가 있었으니까."
"그림, 거기서 크리스찬이 무슨 일을 했죠?"
"누구나 하는 일을 했을 뿐이오. 추수를 도왔소."
"당신의 지시로요?"
테어도어가 즉각 허리를 곧추세웠다. 크리스찬도 말과 함께 멈추어 섰으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따로 지시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오, 아이들 스스로가 일을 거들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들에 나간 아이들 모두 그렇소."
마침내 그녀의 감정이 폭발했다.
"당신 양심에 귀기울여 보세요!"
그녀는 테어도어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어법은 지독하다구요. 그런데 당신 아들도 당신처럼 말하도록 키울
작정인가요? 물론, 당신이 크리스찬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에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쓱쓱 문질렀다.
테어도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이윽고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요? 어법에 맞게 영어를 말할 줄 아는 것이? 세상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소. 문제는 크리스찬이 일생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거요."
"오, 그래요? 그럼 그 문제에 대한 크리스찬의 생각은 어떨까요?"
그녀의 화난 두 눈동자가 크리스찬을 재빨리 쳐다보더니, 다시 그의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그 문제에 대해 크리스찬도 뭔가 할말이 있지 않을까요?"
그녀는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크리스찬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하고 싶은 말 없니, 크리스찬? 네 인생이잖니 . 네가 일생동안 무얼 하며
살 건지 생각해 둔 게 있을 텐데."
크리스찬은 너무 깜짝 놀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저걸 봐요!"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크리스찬은 당신한테 너무 세뇌 당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힘조차 없잖아요!"
"아가씨, 조금 지나치……."
"내 이름은 브란덴베르그예요!"
테어도어는 어깨에 힘을 주며 그녀를 쏘아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는 휴식의 종을 울리듯 장난조로 말했다.
"당신이 이대로 수업을 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소. 당신네들이 살아온
환경과는 완전히 달라요. 때가 되면 밀을 수확해 곡식 창고에 쌓아 두어야
하오. 그러려면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야 할 시간마저도 불가피하게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거요."
그는 손가락을 들어 지평선을 가리켰다
"이곳 사람들은 늙은 마님의 정원을 가러 주는 서투른 정원사가 아니란 말이오.
아시겠소? 글쎄, 당신은 저 들판을 바라보며 단순히 아름답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우리에겐 저 들판이 바로 생활이오. 평생을 땅을 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신처럼 고급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하시오? 크리스찬이 어법에
맞는 말을 하건 그렇지 않건, 그가 기르는 가축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거요."
그는 손가락을 어깨 높이로 치켜든 뒤 물 속에 코를 처박고있는 말들을 가리켰다.
"저 짐승들의 관심은 아주 단순한 거요. 일을 부려먹을 때 적당한 풀과 물,
그리고 마구 따위를 제대로 제공해 주느냐하는 거요. 소들, 말들, 돼지들,
그리고 밀! 이런 것이야말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거리요. 바로
이것이 당신이 교육을 전파하기 전에 기억해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들이오."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선 채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뺨에 대었다.
"그럼, 나를 고용한 목적이 뭐예요? 상황이 그렇다면, 당신이 직접 가르치면
되겠군요! 난 내 직업이 이곳 아이들의 시야를 넓혀 노스 다코타 바깥에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시켜 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완곡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만약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정도라면, 더 이상
얘기가 통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부모 라지만,
자식의 미래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노스 다코타 알라모야말로 크리스찬의 세상이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거요.
그리고 1년에 6개월은 학교에 보낼 테니, 그 정도로 타협하는 게 좋을 거요."
테어도어가 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그를 쫓아갔다
"그러니까 겨울이 지나면 다시 크리스찬을 학교 밖으로 끌어낼 작정이란
말씀이군요, 그런가요?"
대답 대신, 테어도어는 다시 축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가 치밀어오른 그녀는 뛰어가 그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내 앞에서 감히 등을 보이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은 성미가 고약……."
그녀는 이 상황에 맞는 통렬한 말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마침내 한마디 내뱉었다.
"당신은 냉소적이에요."
테어도어는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를 더욱 화가 나도록
만들었다
"당신은 오늘 출석한 아이들에게나 신경써요, 조그만 아가씨야!"
그는 그녀에게 붙잡힌 팔꿈치를 휙 잡아 빼냈다
"대답하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앞으로 계속 크리스찬을 학교에 안 보내고 농사를 거들도록 할 거예요?"
테어도어의 아래턱이 점점 고집스럽게 불거졌다.
"6개월은 내가, 나머지 6개월은 당신이. 그게 공평하겠군, 안 그렇지 않소?"
"안 그렇지 않소는 틀린 표현이에요. 그리고 지금 당신과 나한테 공평하냐
그렇지 않으냐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당신은 당신 아들이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모른 채 어른이 되길 바라나요?"
"이미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은 알고 있소."
"살아가는 데라구요!"
자제력의 실패였다 그녀는 관자놀이가 팽팽하게 당겨 오면서 머릿속이 어찔어찔해졌다.
"어머나, 당신은 어쩜 그렇게도 우둔하죠!"
테어도어는 부르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금발 머리를 북북 긁어 댔다.
"내가 우둔해서 당신의 하숙집 주인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당신을 먹여 주고 재워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오. 사실, 당신을
먹여 주고 2층을 따뜻하게 데울 정도로 충분한 돈도 받고 있지 않으니 말이오."
그는 다시 뒤돌아서 가 버렸다. 그녀는 이번에는 그를 쫓아가 붙잡지 않았다.
그때서야 옆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있는 크리스찬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는 말의 고삐를 바싹 쥔 채 불안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크리스찬, 미안하구나. 너보고 들으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어 . 내 말이
좀 지나쳤어."
크리스찬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랐다. 리니아의 등뒤에 서서 손에
든 고삐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는 고삐를 말의 궁둥이 쪽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장관하지 마세요."
그는 우물거리듯 한마디 내뱉더니 맥빠진 모습으로 말의 등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상관하지 마세요."
리니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말을 고쳐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그래, 장관이 아니라 상관이야. 어쨌든 내가 그런 식으로 이성을 잃어선
안 되는 거였어 네 아버지에게 우둔하다고 말한 것도 그렇구."
그녀는 축사 쪽을 흘끗 쳐다보며 주먹 쥔 두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쳐댔다.
"교육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선생님도 그걸 아셔야 해요."
크리스찬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무슨 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이곳이 아마도 내가 일생 동안 살아갈
곳이 될 거예요. 그리고 어쨌든 난 이 농장을 사랑해요."
이번에는 그녀도 그의 틀린 어법을 고쳐 주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공허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으로 축사 쪽으로 걸어가는 크리스찬을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