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5화 (5/20)

<5>

일요일 아침, 리니아는 테어도어와 크리스찬의 모습을 보고는 외출 준비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허드렛일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오는

평상시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니사가 계단

아래 서서 외쳤다.

"빨리 내려와요. 마차가 기다려요!"

리니아는 얼른 바깥을 내다보았다. 크리스찬과 테어도어가 하얀 셔츠에 검은색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앞좌석에 차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정장을 차려입은 두 사내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어머나! 두 사람 모두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

그녀는 마차 앞에 서 있는 니사에게 동의를 구하듯 웃어 보였다. 테어도어의

냉소적인 두 눈동자가 그녀의 우스꽝스런 모자에 잠시 머물다가 굽 높은 부츠를

신은 발 쪽으로 옮겨 갔다. 크리스찬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두 남자 중 아무도 숙녀들이 마차에 오를 때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니사가 혼자서 마차에 오르려고 하자, 리니아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그녀를 슬쩍 잡아당겼다.

"크리스찬, 난 네가 마차에 오르시는 할머니를 도와드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어. 할머니가 무릎이 좀 아프다고 하셨거든."

"내 무릎은 아무렇지도 않……."

"자, 니사."

리니아는 니사의 팔을 가볍게 치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도록 했다.

"잊으셨어요? 오늘 아침에 무릎 관절이 어긋난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게다가

크리스찬 같은 젊은 남자들은 매너를 뽐낼 수 있으니 좋고, 또 우리도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를 수 있으니 좋잖아요."

크리스찬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웃음

띤 얼굴로 니사와 리나아가 마차 뒷좌석에 오르는 것을 차례로 도왔다. 테어도어는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좌석에 앉자, 그는

리니아를 향해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소를 보낸 다음 말들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리니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묵묵히 앉아 침묵을 지키는 그들에 대해 순간적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은 유쾌했다. 쾌청한 날씨가

그녀의 기분을 달아오르게 했다. 산들바람이 길가의 잡초들을 흔들며 지나쳤고,

태양은 황금빛으로 세상을 포옹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향기, 순수하고 깨끗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벌름거리게 했다. 그녀는 그 향기가 분명 구름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리라고 상상했다.

마침내 길고 하얀 청탑이 눈에 들어왔다. 종소리가 부드러운 가을 바람을

타고 조용히 울려 퍼졌다. 열두 번째 종소리가 울릴 때쯤 그들이 탄 마차는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근처에 밀밭이 숨막히도록 넓게 펼쳐져 있고, 말뚝에 묶인 수십 마리의 말과

마차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교회 마당은 신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청명한 날씨를 즐기며 끼리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마차가 정지했을 때, 크리스찬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후 니사와 리니아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녀는 활짝 핀 미소로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들은

교회 계단을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그런데 니사가 손자의 팔을 뒤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리니아는 어느새 테어도어와 단둘이 앞서 걷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하지 않았고, 그 역시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걸으며 낯선 얼굴들과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배당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사람들의 존경심 섞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테어도어는 목사에게 그녀를 소개시켰다. 마틴 세버트 목사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잘생긴 30대 중반의 남자였고, 그의 아내는 마른 체구에 멋지게 차려입고 가식적인

미소 속에 뻐드렁니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세버트 부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리니아는 그들 부부의 아들이 니사의

말대로 진짜 문제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존은 가족 지정석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니아는 결국 크리스찬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배가 시작되자 크리스찬은 기도서를

보며 진행 순서를 살폈다. 테어도어는 팔짱을 낀 채 앉아 찬송가가 시작될

때까지 그 상태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찬송가를

부르게 되자 정성을 다해 목청을 돋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음색은 소리굽쇠가

울리는 듯 맑고 낭랑한 바리톤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노래 부르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입술은

노래를 부르느라 크게 벌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훨씬 덜 고약해 보였다.

완고한 인상도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 그리고 아치형 창문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받아 그의 눈동자가 풍부한 느낌으로 반짝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앞줄

좌석을 가볍게 톡톡 치면서 부르는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나갔다.

그는 눈길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그의

눈에 담긴 따뜻한 미소를 읽을 수 있었다.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찬송가 책을 옆으로 살짝 밀어 그가 한 쪽 귀퉁이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그녀의 팔꿈치가 그의 팔에 살짝 부딪혔다. 순간, 그녀는

그의 노래가 분명치 않게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그녀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찬송가 책 가장자리를

붙잡은 채 그녀와 함께 찬송을 끝냈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는 동안, 마음의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멘이 합창되고 난 뒤, 테어도어는 그녀가 책을 접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설교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옆자리에서 풍겨 오는 비누와 머릿기름

냄새를 무시하고 설교에 집중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세버트 목사는 설교를 끝내며 짤막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는 오늘 새로 오신 브란덴베르그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 하는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시고 환영의 마음을 전합시다."

수십 명의 고개가 한 순간에 그녀 쪽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사람, 바로 그녀의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만을 불안하게 의식했다. 그 상황을

인식한 테어도어는 예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모자가 똑바로 씌워져 있는지, 칼라는 제대로 펴져

있는지, 머리 모양은 단정한지, 여기저기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산란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교회 안은 비어 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녀도 밝은 가을 날씨

속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외모에 대한 걱정도 잊은 채 새로운

얼굴과 이름을 연관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그 지극히 평범함 속에서 그들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커다란 덩치를 한결같이

까만색 양복에 횐색 셔츠로 감싸고 있었다. 여자들은 맵시보다는 편안한 착용감에

훨씬 많은 관심을 둔 것 같은 간편한 복장이었다. 모자 역시 그녀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수수하고 납작한 모자를 쓰고 구두는 전체적 분위기에 맞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가르치게 될 아이들을 모두 만나 보았다. 헤어진 후에도 그녀의

기억을 두드리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생김새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알렌 세버트와 니사가 언제나 느리다고 말한 프란시스 웨스트가드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녀는 웨스트가드 가家의 아이들만이라도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곧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어른들의 경우는 조금 수월한 편이었다.

올머와 로스는 테어도어와 닳은 데가 워낙 많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올머는 나이가 많아 머리칼이 듬성듬성 했고,로스는 테어도어보다 훨씬

잘 웃는 편이었다.

클라라는 배가 공처럼 부풀어 있었는데, 남편이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자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입보다 눈이 먼저 웃기 시작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녀는 오빠들에 비해 매력적인 얼굴은 아니었지만, 탐스러운 갈색

머릿결에 아름다운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코가 약간 길고, 입술도

좀 크고 두툼한 편이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환한 빛이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리니아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클라라는 리니아의 손을 꼬옥 잡고 공모자라도 만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 오빠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으려고 애쓰는 분이군요.

행운이 따르길 빌어 줄게요. 오빠도 아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리니아는 적당한 답변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난 클라라예요."

리니아의 눈동자가 완만한 곡선을 이룬 그녀의 배를 훑어 내려갔다.

"그런 것 같았어요."

클라라는 높이 솟아오른 배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의 팔꿈치를

겨드랑이 쪽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여기는 나의 트리그예요."

리니아는 그녀의 솔직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소박한

자긍심 같은 게 서려 있었는데, 거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트리그

린다는 리니아가 여태껏 본 남자들 중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그의 머릿결은

방금 광택을 낸 구리처럼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짙고 가지런한 눈썹 아래

거의 투명에 가까운 푸른색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한 노르웨이 인다운

그의 얼굴에는 흠 하나 없는 균형미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목에

감겨 있는그의 팔이 무척 듬직해 보였다.

"물론, 테디 오빠가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있겠죠?"

클라라가 말했다.

"그냥, 그럴만한 일은 없었……."

클라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한테는 우리 오빠의 결점을 감추지 않아도 돼요. 나는 테디 오빠를 잘

알아요. 오빤 노르웨이인의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죠. 고집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말예요."

그녀는 리니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

"하지만 오빠는 지금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는 거예요. 오빠가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때까지 시간을 좀 주세요. 시간이 흘러 오빠가 당신에게

다가가게 되면, 모든 게 극복될거예요. 그때쯤이면 우리 집에 난로를 하나쯤

없애도 될걸요. 커피 마시러 언제든지 와요.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리니아는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순간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일단 테어도어에 관한 얘기는 무시하기로 했다.

"어머, 고마워요. 나도 친구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엄마는 어때요? 당신에게 잘 대해 주시죠?"

"오, 물론이에요."

"난 우리 엄마의 철사줄 같은 머리칼까지도 사랑해요. 하지만 가끔씩 나를

미쳐 버리도록 만들기도 하죠. 우리 엄마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주문을 하거든,

무시하고 당신 주장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 엄마를 재미있게

웃겨 드리면 되거든요. 우리 집에 꼭 놀러오세요. 하루 종일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가다가 뒤돌아서서 한마디 덧붙였다.

"오, 참, 당신 모자가 아주 예쁘군요."

갑작스런 말에 리니아는 폭소를 터뜨렸다.

"내 얘기가 농담처럼 들렸나요?"

"함께 커피 마실 기회가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비록 임신중이었지만, 클라라의 움직임은 잽쌌다. 그녀가 가고 나자 리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테어도어와 가장 가깝게 지내온 클라라 때문이었다

그녀는 메린다를 아는 또다른 인물인 동시에 리니아의 우정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때 크리스찬이 나타나서 말했다.

"아빠가 떠날 채비가 되었는지 여쭤 보라고……."

그녀는 즉각 마차를 매어 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니사는 벌써 마차에

올라 있었고, 테어도어가 손에 쥔 채찍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톡톡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런, 나 때문에 못 가고 있는 거니?"

"저…… 밀 추수 때문에 그래요. 우린 날씨가 좋고 밀이 잘 여물어 있다면,

한 주 내내 일하러 가거든요."

"오!"

그러니까 그녀는 집주인의 기름통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잠간 세버트 목사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올게."

그녀는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테어도어가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건너갔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지체됐어요. 난 당신이 오늘도 들에 나가 일한다는

사실을 몰랐거든요."

"햇빛이 내리쬐는 동안에 밀을 건초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소? 자, 빨리 타시오. 갑시다."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 쥐고 차라리 안 도와주느니만 못할 정도로 거칠게

마차에 태웠다. 그녀는 교회 안에서 친밀감을 보이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리니아는 자기 방에서

모자를 고정시킨 핀을 빼내다가 퍼뜩 댈 교장의 부탁을 떠올렸다. 석탄!그

이야기를 꺼내 그를 귀찮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마침 그는 깨끗하게 얼굴을 씻고 멜빵 달린

작업복과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채 침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보풀투성이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던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끼고 있던 팔짱이 아주 서서히 풀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교회 안에서 그와 찬송가를 합창하던 친밀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었다. 마침내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해마다 이맘때 당신이 얼마나 바쁜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하지만 댈 교장

선생님과 약속했거든요. 당신에게 학교에서 쓸 석탄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시키겠다고

말예요."

"11월 중반쯤에 항상 몰아닥치는 폭설을 걱정해서 그럴 거요. 석탄 창고가

꽉 채워져 있지 않다는 건 곧 그의 해직을 의미하니까. 하지만 댈은 자기 창고에

밀을 쌓아 둔 걱정은 없소."

"창고에 밀을 쌓아 둘 걱정은 없소."

"뭐라고요?"

그의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쌓아 둘……."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오, 리니아, 네 입은 항상 머리보다 빨라서 탈이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에게 이야기했다고 그에게 말할게요.

미안해요, 당신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도대체 이 남자의 어떤 부분이 그녀를 이토록 안절부절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내가 시간이 나는 대로 석탄을 갖다 놓겠다고 그에게 말해 둘 테니 걱정

말아요. 자, 그럼 해 떨어지기 전까지 나는 밀을 베러 가야 하오."

그는 어깨로 밀치듯 그녀 곁을 지나 집 밖으로 나갔다.

오후가 그녀 앞에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리니아는 학교에 다시 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교탁 위에 놓인 교사용 의자에 앉아 첫째 주 수업계휙에 나와 있는

교과서들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우스터의 철자법, 맥거피의 독본, 래이끈 지능

산수, 몽테스와 맥낼리의 지리, 클락의 문법……. 책꽂이에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꽂혀있었는데, 몇 해 전쯤 집집마다 있는 대로 가져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예를 들어《새 단계 경제학》과 같은 책들은 이미 그녀가 대충 골라서

크리스찬에게 읽어 준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르칠 학생들, 특히 어린아이들의

수준에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이에 상관없이 꼭 배워 둬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식탁 예절이었다.

그걸 가르치는 데 따로 교과서는 필요 없었다! 그거야말로 최우선으로 가르쳐야

할 과목이었다.

그녀는 수업 계휙을 다 훑어본 뒤, 칠판 위에 '충성의 맹세'라고 쓰여진

가로대 앞쪽에 성조기를 펴 걸었다. 그런 다음 칠판에 커다란 글씨로 '브란덴베르그'라고

쓴 후 칠판에 기대서서 손에 묻은 백묵 가루를 털어 냈다. 그리고 만족스런

미소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일 아침 9시 수업 시작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이곳에 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현기증이 일었다

점심때가 되었지만, 그녀는 아직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자리에 앉아 교과서에 붙일 커다란

알파벳 글자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각각 그 글자를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A에는 사과 apple를 그렸다. B에는 헛간 barn을, 그리고 C에는

고양이 cat를 그렸다. 그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다. 가끔씩은

그 글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상징이 무엇일까, 고민하느라 그림 그리던 손을

멈추고 있기도 했다. 아이들이 쉽게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썼다. H에는 말 herse을 그렸는데, 균형이 잘 안 잡힌 말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M은 쥐 mouse를, S는 해바라기 sun-flower를 그렸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러시아엉겅퀴 thisle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그리려고 하니 그 생김새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태양이 머리 위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밖으로 나왔다. 한가로운

꿈을 꾸듯이 걷는 동안, 오후의 부드러운 미풍을 탄 미루나무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보내왔다. 그녀는 길 가운데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호박색 바위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이나 그 부드럽고 묵직한 바위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바위 틈 가운데 테어도어의 눈빛 을 떠올리게 하는

돌멩이가 있었다. 그녀는 그 돌멩이를 들어올려 가볍게 쓰다듬었다. 교회에서

그녀의 살갗에 닿던 그의 팔의 감촉이 떠올랐다.

그녀는 꿈을 꾸듯 길 한가운데 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로 안에서 드디어 러시아엉겅퀴를

발견했다. 공처럼 둥근 형태로 자라 있었다. 겨울에는 대평원의 바람 앞에

가시 철조망 역할을 해서 바람에 날려온 표적물들이 엉겅퀴에 많이 쌓인다고

했다. 그래서 봄이 오면, 손으로 걷어치워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9월, 작은

녹색 꽃들이 함박 피어 있었다. 두 마리의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고, 통통하게

살찐 호박벌이 꽃봉오리 속으로 꿀을 따러 날아다니고 있었다.

리니아는 허리에 스케치북을 대고 엉겅퀴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 이제 내게 이야기해 봐요. 저 식물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나요? 보라구요, 벌들이 꿀을 찾아 날아드는 모습을……."

밀밭의 언덕진 산마루를 오르고 있는 테어도어의 눈에 멀리 작은 건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니 마치 장난감 집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석탄 창고 옆의 비탈진 곳에서는 말들이 터벅터벅 걷고 있고,

그네도 있고, 햇빛을 받아 하얗게 눈부신 종도 있었다. 그의 시야에 한사람의

움직임이 잡혔다. 학교에서 좀 떨어진 수로근처에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모자챙 아래에서, 그의 갈색 눈동자가 미소와 함께 부드러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저 작은 아가씨가 저기 서서 무얼 하고 있는거야?

그녀는 잡초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손에 무언가를 들고 일에 몰두해 있었다.

세상에! 어린아이처럼 엉겅퀴를 그리고 있다니……. 차라리 그럴 시간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게 낫겠군.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낄낄거렸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더니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눈가에 대고

그늘을 만들었다. 그가 기분좋은 설레임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갑자기 두 팔을 하늘 높이 벌리고 춤을 추듯 공중으로 깡총깡총 뛰어 올랐다.

그는 고개를 약간 흔들며 웃음을 참았다.

아이 같군. 정말 아이 같아.

리니아는 들에서 밀을 베고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해 낫질을 해오고 있었지만, 말을 건네기엔 거리가 멀었다. 실로 놀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그림 솜씨가 자신에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펼쳐진 황금 물결의 거대한 대양이 품고 있는 웅장함에 비해 사람이나

말들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놀랄 정도의

격정이 그녀의 가슴속을 온통 뒤흔들며 외경심이 깃든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 드넓은 하늘의 아름다움이여.

황금색 물결치는 들판의 물결이여…….

그녀 앞에는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한 축복이 놓여 있는데, 세상 한 쪽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니……. 믿겨지지 않았다. 그녀는 밀을 베고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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