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리니아는 유럽에서 계속 진행중인 전쟁을 생각했다.
윌슨 대통령은 프랑스에 계속해서 원조를 하게 되면 몇 주일 안에 밀가루와
고기가 동이 날 것이라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과 여기저기 보이는 거대한 소 떼들을 보며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정말 바보 같군, 밀과 고기는 절대 바닥나지 않아!"
항상 그렇듯이 전쟁이 보여 주는 투영 물들이란 비참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좀더 즐거운 일들로 관심을 돌려 보기로 했다.
땅다람쥐들과 프레디독이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그녀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와
마주치자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리니아는 기운 차게 걸으며, 교사용 지침서 사이에서 발견한 학생들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크리스찬이 반 아이들의 대다수가 자기 사촌들이라고 했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명단에 오른 열네 명의 아이 중 여덟 명의 성이 모두 웨스트가드
였던 것이다. 그녀는 니사에게 그 아이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뒤 서둘러
가정 방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부츠가 이곳 사람들이 신는 단화보다
훨씬 비실용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갈길을 걷다 보니 구두창 밑으로
울퉁불퉁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왔고, 높은 구두 굽은 돌멩이에 걸릴 때마다
발목을 비틀거리게 했다.
드디어 집으로 연결된 도로로 터벅터벅 들어설 때쯤, 그녀의 발은 온통 상처투성이에다
왼쪽 발에는 물집까지 잡힐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니사는 그녀가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부엌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생각보다 길이 멀었나 보군요?"
"새로 사 신은 구두 때문이에요. 여기저기 살이 닿는 곳마다 통증이 느껴져요."
니사는 린니아가 산에 오르듯 힘겹게 계단을 올라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무척 예쁘기는 하군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튼튼하고 질긴 신발이 더 적합해요."
"나도 그 사실을 깨달아 가는 중이에요."
리니아는 부엌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는
발목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주춤거렸다.
니사는 손을 허리에 대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물집이 생긴 것 같군요, 그렇죠?"
리니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신발을 벗고 살펴봐야겠어요."
그 부츠를 벗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발목 위쪽으로는 살갗과 가죽이
완전히 밀착된, 새로 나온 카우보이 부츠보다 더 확 끼는 신발이었다. 잠시
후, 리니아가 부츠를 세게 잡아당겨 몸부림치듯 벗어 버리자 니사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당신이 그 구두를 그렇게까지 빨리 벗는 줄 누가 알겠어요. 다른 쪽도 마저
벗어 볼래요?"
리니아의 표정이 비통하게 변했다.
"문제없어요."
"자, 보아 하니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군요."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침실로 갔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길에 무거워 보이는
직물 슬리퍼를 들고 왔다. 까만 양털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시어즈 로빅
회사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자, 이제 그 물집을 좀 보도록 합시다"
그때, 리니아에게 분통터지는 일이 생겼다. 니사가 다시 물집에 바를 연고와
가제를 가지러 자리를 뜬 사이, 그 남자가 부엌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곱고 포동포동한 허벅지를 드러내 놓고 그 위에 맨발을 올려놓은 채
물집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입구에 서 있는 테어도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다리를 내리다가
긴 치마가 뒤엉키는 바람에 바늘땀이 푸드득하며 터지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반항적인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우유통을 가지러 왔소."
식료품을 저장해 놓은 방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가 남긴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니사가 다시 침실에서 연고통을 가지고나왔다. 그리고 리니아의 발을 치료하기
위해 무릎을 막 꿇는 순간, 테어도어가 식료품 저장실에서 나오면서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 그러니까……."
"내 새 구두 때문에 물집이 생겼어요!"
리니아가 소리 쳤다.
갑자기 아무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 소리 지르는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훨훨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테어도어를 찌를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파르고 사범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묻고 대답하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특히 지금 당신이 흥미 있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요!"
화가 난 그녀는 니사의 손에 들려 있던 연고와 가제를 잡아챘다.
"고맙지만,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니사."
화가 잔뜩 나 찌푸려진 얼굴로 그녀는 연고통 뚜껑을 열고 직접 발바닥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테어도어와 니사는 놀란표정으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니사가
리니아의 발을 향해 바늘을 들어 올리며 냉담하게 충고했다.
"가제를 싸매기 전에 물집을 터뜨리는 게 좋을 거예요."
내키지 않는 일을 시도하기 위해 바늘을 받아드는 리니아의 시선은 여전히
니사의 손 아래쪽에만 머물고 있었다. 니사는 테어도어가 리니아의 모습을
쳐다보며 입가에 즐거움이 담긴 굴곡을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테어도어
역시 다시 고개를 들다 니사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구제 불능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양손에 든 우유통을 흔들거리며
집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리니아는 구두로 마룻바닥을 쾅쾅 내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문 쪽을 쏘아보았다.
"저 남자가 나를 무진장 화나게 했어요!"
갑자기 자기가 말하고 있는 상대가 테어도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목소리를 약간 부드럽게 바꾸었다.
"죄송해요, 니사.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지만 그는…… 가끔씩
사람을 아주 화나게 할 때가 있어요! 난 정말……."
"당신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없어요. 자, 당신 생각을 말해 봐요."
"그는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곤혹스럽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는 기차역으로 나를 마중나와 서 있는 동안에도 내 모자와 구두를 보고
계속해서 웃어 댔어요.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그렇게 웃어 댔는지 훤히
알고 있다구요. 그리고 그는 무슨 일에건 눈을 붉히며 트집을 잡으려고 하고……."
"물론, 당신은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이 일도 단지 운이 조금 나빴던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물집은 생길 수 있는 일이죠. 그리고 테디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아요. 내가 고집쟁이 노르웨이인에 대해 말하면서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얘기한 거 기억나죠? 자, 당신은 내 말대로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항상 화를 내는 거죠?"
"그 얘길 하자면, 아주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구요. 그애의 문제죠. 자, 이제 당신이 최우선으로
할 일은 가제로 발을 감싸 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샌드위치를 만들 수 있도록
보내 주는 거구요.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집 세 남자들은 별로 참을성이 없거든요."
니사가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리니아는 댈 교장과 만났던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출석 명단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명단에 적혀 있는 첫 번째 이름은 크리스찬 웨스트가드였다. 그의 나이는
16세로 적혀 있었다.
"크리스찬이라면 이미 알고 있고……."
리니아가 말했다
"다음은, 레이먼드 웨스트가드, 16세?"
"그애는 내 큰아들인 올머의 아들이에요. 크리스찬과 아주 친하죠. 당신도
내일 교회에 가면 올머와 그의 아내인 헬렌, 그리고 나머지 친척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길 건너편에 있는 옆 동네에 살고 있거든요."
리니아는 다음으로 두 명의 이름을 읽었다.
"패트리샤와 폴 로멘, 15세."
"그애들은 로멘 씨의 쌍둥이 자식이에요. 올머의 옆집에 살죠. 아주 영리해요,
둘 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애 둘은 항상 모든 걸 치열하게 경쟁하거든요."
리니아는 다음번 이름을 읽기 전, 로멘 형제의 이름 옆에니사의 말을 메모했다.
"앤턴 웨스트가드, 나이 14세."
"우린 모두 그애를 토니라고 불러요. 그애도 올머와 헬렌의 아이죠. 수줍음을
좀 타긴 하지만, 얼마나 용감한지 몰라요. 토니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았던
적이 있는데,그래서인지 좀약한 편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아주
좋아요."
리니아는 그의 건강 상태를 메모했다.
"알렌 세버트. 15세."
"알렌은 목사님의 아들이에요. 그애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문제아니까요."
리니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문제아라구요?"
"난 가끔씩 그애가 자기 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할 줄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곳에서 선생님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사람, 목사님이거든요.
글쎄, 이곳에서 일하던 교사들이 그간 알렌이 저지른 온갖 짓궂은 장난들을
목사님께 조금이라도 귀뜸을 해주었더라면, 그애가 저렇게까지 다루기 힘든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지도 모르죠."
"어느 정돈데요?"
"툭하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들을 못 살게 굴고, 여자애들을 괴롭히죠.
아무튼 어디를 봐도 진지한 데라곤 하나도 없는 아이예요. 게다가 말썽을 부린
흔적은 또 얼마나 감쪽같이 숨기는지……. 조금만 지내 보면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너무 겁먹진 말아요. 그애를 만나기 전에 나름대로 대처
방안을 생각해 두면 괜찮을 거예요."
리니아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한 후 다음 번 이름을 계속해 읽었다.
"리비 세버트, 열한 살."
"알렌의 누이동생이에요. 참 귀여운 아이예요. 아이답고 착하죠. 그런데
부모님의 관심이 온통 알렌에게만 가 있는 터라 그게 좀……."
"프란시스 웨스트가드, 열 살."
"그애도 올머와 헬렌의 아이예요. 특별한 아이죠. 적어도 나한텐 그래요.
다른 애들에 비해 행동이 좀 느리긴 하지만, 그애처럼 명랑하고 사랑스런 아이는
본 적이 없어요.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그애가 당신에게
선물을 줄 거예요. 선물을 받고 나면, 그애가 그걸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그 흔적이 보일 거예요."
리니아는 미소를 지으며 그 이름 옆에 꽃을 그려 놓았다.
"노나 웨스트가드, 열 살."
"노나는 내 아들 로스와 그의 처, 이브의 딸이에요. 그애가 다섯 명의 형제들
중 맏이죠. 동생들에게 엄마 노룻을 톡톡히 하고 있죠. 아마 그 명단에 스킵과
로즈안이라는 이름도 있을 거예요. 그애들이 노나의 누이동생과 남동생이에요."
니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니아는 니사의 말에서 손주들에 대한 할머니로서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니아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벤트 린다와 자넷 쿤스턴."
"벤트는 내 딸 클라라의 아이예요. 클라라는 트리그 린다라는 잘생긴 청년과
결혼해서 아이를 둘 낳았죠. 내년 2월이면 세 번째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랍니다"
니사는 꿈을 꾸는 듯 시선을 아득한 곳으로 던지며 하던 일을 잠시 멈췄다.
"오 하느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더니, 클라라가 혼자서 학교에 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참, 다음이 누구했죠?"
"자넷 쿤스턴요."
"그애는 오스카 쿤스턴의 딸이에요. 당신도 알고 있죠? 여기 교육위원회
회장 말예요."
"네, 물론 알고 있어요. 자, 이제 일곱 살짜리 학생이 두 명 있군요. 로즈안과
소니 웨스트가드."
"사촌지간이에요. 로즈안이 로스의 아이라는 얘기는 아까 했었죠? 소니는
올머의 자식이에요."
리니아는 메모를 하는 동안 누가 누군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니사는 샌드위치를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갖다 놓고, 다시 난롯가로 걸어가는
동안 내내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을 만나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을 거예요. 일부러 외우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요.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알고 지내죠. 당신도 곧 그렇게 될
거예요."
"대체 손주가 몇 명이나 되는 거죠?"
"열세 명이에요. 클라라가 낳게 될 아이까지 합하면 열네 명이군요. 난 언제나
어리둥절해요. 존이 아직 장가도 안 들었는데도 손주들이 그렇게 많다니…….
그리고 메린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남자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니사는 입을 재빨리 다물어
버렸다. 니사는 건너편에 서 있는 테어도어에게 경계의 눈빛을 던지다가 재빨리
식료품 저장실로 가 버렸다.
메린다가 누굴까? 리니아는 궁금했다. 테어도어의 아내일까? '메린다가 그러지만
않았어도'라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리니아는 테어도어와 크리스찬의 얼굴을 은밀한 시선으로 살폈다. 그녀는
아내가 있는 테어도어를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그 여자는 테어도어의 어떤
점을 사랑했을까? 크리스찬의 잘생긴 입매와 두툼한 아랫입술은 엄마를 닮은
것일까?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테어도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는 물동이가
놓인 곳으로 가서 국자로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리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다시 물동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더욱 느린 동작으로 손등을 들어 아랫입술을 닦았다. 그녀의 가슴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아주 짧은 순간 마주친 눈길이 그녀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어
시선을 떨구게 했다.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왔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샌드위치
두 개를 집어 하나를 크리스찬에게 건넸다.
"자, 가자."
"저녁 식사 때 봬요."
크리스찬이 문을 나서며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저녁 식사 때 보자."
그러나 테어도어는 인사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먼저 나가버렸다. 리니아는
그의 뒷모습을 봐라보며, 방금 전 자신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짧은 대화 몇 마디만으로도
자신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니사는 난로의 화덕 위에 올려놓았던 커피포트를 들고 되돌아왔다. 리니아는
질문을 하기 전에 용기를 가다듬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메린다가 누구예요?"
니사는 식탁 가장자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주춤했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
"테디의 처였어요. 하지만 그애는 메린다에 대해 얘기하는걸 무척이나 싫어해요."
"왜요?"
니사는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는 입김을 불어 수증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앞치마를 들어서 아주 조심스레 안경알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메린다는 한 살배기 아기와 남편을 남겨 둔 채 도망가
버렸어요. 그 후로는 이쪽 근방에서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죠."
리니아는 숨이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한…… 한 살배기 아기를 버려 두고요?"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크리스찬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럼, 여기 그애 말고 테디의 아들이 또 있나요?"
리니아의 내부에서는 가슴을 저미는 동정과 더 묻고 싶은 충동이 뒤엉키고
있었다.
니사는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척했다. 출석 명단이
펼쳐졌다. 그녀는 정확한 페이지를 찾기 위해 다시 두 장을 더 넘겼다.
"아까 하다 만 게 여기까지였던가?"
리니아는 아주 점잖게 니사의 늙은 손을 마주잡았다. 그리고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난 메린다에 대해 알고 싶어요."
니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희미한 갈색 눈썹이 안경 때문에 더 퍼져
보였고, 눈꺼풀에 잡힌 주름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며 리니아를 꼼꼼히 살폈다. 바깥에서는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니사는 마당으로 시선을 던져
테어도어와 그의 아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알고 싶다면, 내 말해 드리리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자면 좀 길어요.
커피 한잔부터 해도 되겠죠?"
리니아의 선입견 때문일까? 커피를 가지러 가는 니사의 모습이 왠지 피곤해
보였다. 게다가 컵을 찾아 커피를 따르는 그녀의 눈망울 속에는 분명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까 1900년 되던 해 여름일 거예요. 내 남편 얄머는 테어도어 루스벨트야말로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물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루스벨트가 대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고, 월리스턴으로 그의 선거 유세용 기차가
지나간다는 소식이 이곳까지 전해졌어요. 얄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는 보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난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얄머에게 말했죠, 무슨 얘기하는 거냐구요. 헬게슨 씨에게 보낼 보리 맥주의
견본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요. 헬게슨 씨는 늘 우리가 만들어 보낸
맥주에서 두 병을 골라내 맛을 시험해 보고 클레임을 걸곤 했거든요……."
니사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어쨌든 우리 세 식구는 결국 월리스턴을 향해 떠나게 되었어요. 그 영웅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지을 정도였으니, 그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니사는 주먹을 움켜 쥐어 작은 망치처럼 만든 뒤 펼쳐져 있는 명단의 윗부분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월리스턴으로 가서 그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볼만한 구경거리였어요. 요란한 환호성 속에 객차의 지붕을 완전히 걷어낸
기차가 들어오고, 거기 루스벨트 씨가 마지막 차량에서 양손을 흔들며 서 있었죠.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울려 퍼졌고, 난 그 순간 내 남편 얄머의 얼굴에 퍼지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루스벨트와 똑같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테디의 어깨를 감싸고 그애 귀에 무슨 말인가를 외쳐 댔었죠."
니사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면서, 리니아는 당시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니사는 부질없는 공상에서 깨어난 듯 가슴에 얹고 있던 손을 커피잔으로
옮겼다. 그녀는 잔에 코를 대고 커피향을 음미했다.
"그래요, 그녀가 그 기차 어딘가에 있었어요. 메린다가 말이에요. 그녀의
아버지는 루스벨트 선거 운동원이었는데, 그녀도 아버지를 따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죠. 그날 정치 유세가 끝난 후에, 공교롭게도 우리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저녁 식사 모임이 있었어요. 주요 참모들이 테이블마다
흩어져 앉아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메린다와 그의 아버지가
우리 테이블에 앉게 되었죠. 그때 얄머와 내가 그 젊은 두 사람을 주의해서
지켜보았어야 했는데 ……. 우리 실수였어요. 내 남편은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나는 환상적으로 꾸며 놓은 호텔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거든요. 그러다 다시 악대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였어요. 나는 얄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죠. '여보, 저기 좀 보세요' 라구요. 테디가 그 아가씨와
춤을 추고 있었거든요. 그 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어느 땐가
테디가 우리에게 와서 그 젊은 숙녀와 산책을 하러 가겠다고 말했어요. 물론,
나는 깜짝 놀랐죠. 하지만 테디는 이미 열 일곱 살이었으니 허락할 수밖에
없었죠."
리니아는 테어도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테어도어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도 상상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그녀는 테어도어가 젊은 여자와 밖으로 나가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모습도 상상해 보려고 했다. 역시 헛수고였다. 오로지 그의 성미
급하고 화 잘 내는 성격만 떠오를 뿐, 그런 쪽으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열일곱 살인지 뭔지, 아무튼 그 녀석 때문에 그날 열 받은걸 생각하면…….
우리는 밤새 그애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죠. 그리고 메린다의 아버지를 찾아가
봤는데, 그애 역시 밤새 안 들어왔다는 거예요. 새벽 5시쯤 되어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홀 안으로 들어오더군요."
니사는 안경 너머로 허공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성호를 그었다
"자자, 당신은 족제비가 닭장 속으로 뽐내며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우리 눈에 비친 그 두 사람의 모습이 딱 그랬어요. 사방으로 깃털이
날리고 있었죠. 나한테까지도 날아오더라니까요. 메린다 아버지가 그녀를 데려가며
호되게 야단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러나 메린다는, 비난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느라 밤새 밖에 나가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한탄하더군요."
니사는 식은 커피잔을 응시했다.
"난 그애들이 밤새 어디 있었는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 보지 않았어요.
솔직히,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냥 테디를 방안으로
밀어 넣고는 방문을 쾅 닫아 버렸지요. 맙소사, 그땐 대단했어요."
니사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이 일단락되는 줄로만 알았죠. 메린다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도록 테디를 그날 아침 일찍 호텔 밖으로 쫓아냈거든요.
그런데 1주일도 채 안된 어느 날, 우리 집 부엌 문 앞에 그 아가씨가 서 있지
뭐예요. 테디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난 그애의 당돌함에 머리를
내두르면서도 손으로 들판을 가리켰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단호히
뿌리 쳤어야 했는데……."
니사는 기억이 다시 흐릿해지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리니아가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니사는 고개를 들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그녀는 그 길로 테디에게 달려가 그와 결혼해
이곳에 정착하겠다고 말했어요. 테디도 우리들만큼이나 그녀가 하는 말에 놀란
것 같았어요."
"결국 두 사람은 순식간에 결혼식을 올렸죠. 얄머가 이 땅을 그때 그애들에게
주었어요. 그리고 이 집도 두 사람이 쓰도록 했지요. 우리 모두는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가길 바랐죠. 나중에야
그녀가 테디 문제로 자기 아버지와 기차 안에서 몹시 다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내 생각에, 메린다는 아직 철이 덜 든 소녀에 불과했죠. 끝까지 자기 아버지와는
화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아무튼, 그녀는 내 아들과 결혼했어요. 하지만 절대
어울리는 커플이 아니었죠."
니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도시 여자였어요. 무엇 때문에 시골 청년과 살기로 마음먹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니까요. 메린다는 이곳생활을 견딜 수 없어 했어요.
밀밭이 보이는 창가에 서서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미칠 것만 같다고 중얼거리곤
했죠. 하느님, 그녀가 밀밭을 보며 얼마나 저주의 말들을 퍼부어 댔는지, 또
평원을 보면서 이곳에는 나무들조차 제대로 없다고 얼마나 진저리를 쳐댔는지…….
게다가 태양은 그녀에게 피부발진을 일으켰고, 파리들은 그녀를 미쳐 버리도록
했어요. 또 축사 주위에서 나는 냄새에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지요. 테디가
어떻게 그런 여자를 농부의 아내로 삼으려고 생각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왜냐구요? 그녀는 텃밭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여자였거든요.
채소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다만 자기 손톱에 때가 낄까봐
기겁을 해댔죠."
니사는 경멸스럽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성호를 그었다.
"그런 여자였어요."
그녀의 얼굴에 슬픈 빛이 어렸다.
"난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테디는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그엔 자기 처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환희에 빠졌었죠.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녀의 불평은
침묵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그녀는 미친 사람 흉내까지 내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다가 크리스찬이 태어나자 나름대로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죠.
하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클라라의 말에 의하면, 메린다가 하루 종일 울고만
있다고 하더군요. 테디도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아내를 위해 밀밭을 전부
숲으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농장을 도시 한가운데로 옮겨다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떠나 버렸죠. 크리스찬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긴 채. 하지만 난 그 쪽지를 본
적도 없고 어떤 내용이냐고 묻지도 않았어요."
"그럼, 그 후로 줄곧 당신이 크리스찬을 돌보셨나요?"
새로운 슬픔이 니사의 눈동자에 어렸다.
"나와 클라라가 키웠죠. 우리 집 양반은 그해에 세상을 떴어요. 여느 해
봄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주일 예배가 끝난 후 묘지 청소를 돕고 오는 길이었죠.
집에 도착해 보니, 남편이 부엌 문앞에 서서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햇볕을
쬐고 있더군요. 그는 나를 보자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구요. 그리고는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넘어졌는데, 그
길로 세상을 뜨고 말았죠. 그는 내게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어요. 일을
하다가 죽고 싶다구요. 결국 소원을 이룬 셈이죠. 그는 평생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고되도록 일을 해왔고, 내 앞에서 생을 마쳤어요. 고통도 없이……. 그가
언제나 열심히 기도했던 탓일 거예요. 세상에서 자기 남편의 죽음을 그보다
더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있겠어요."
부엌 안에는 난로의 불꽃이 잦아들면서 내는 가벼운 한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니사는 뻣뻣하고 거친 손을 들어 올려 처진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그녀의 눈동자는 오래 전의 기억 속을 더듬는지 살포시 감긴
채 식탁보를 응시하고 있었다. 리니아는 목이 메어왔다. 그녀는 지금까지 죽음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해 오던 터였다. 그러나 이제 니사의 내리깔린
두 눈을 보며, 리니아는 갑자기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삶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니사는 커피가 차디차게 식은 줄도 모르고 컵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남편이 없는 집 안은 전과 같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존을 혼자 남겨 둔
채 테디와 아기를 돌보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오게 된 거예요."
"그럼 메린다는요?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리니아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에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메린다는 여기저기 떠돌다가 크리스찬이 여섯 살 되던 해에 필라델피아에서
교통 사고로 죽었어요."
리니아는 폐부에 꽉 차 있던 공기가 푸우하면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 울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어깨에 주었던 힘을 뺐다. 니사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출석 명단을 손톱 끝으로 톡톡 치는 소리가 주위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앞치마 자락을 두 무릎 사이에 축 늘어뜨린 채 앉아있는
니사의 얼굴로 오후 햇살이 내려앉아 뺨에 난 솜털을 하얗게 비추었다. 갑자기
그들이 앉아 있는 부엌 안으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망령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창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테어도어의 닫힌
성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었을 때 너무도 큰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짜증을 내고 심하게 대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설령 그러고
싶다손치더라도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미 오래 전에 받은 그의 상처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을.
그리고 크리스찬, 불쌍한 크리스찬…….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불쌍한 크리스찬.
"크리스찬은 사실을 알고 있나요?"
리니아가 애처로운 듯 물었다.
"엄마가 도망갔다는 사실요?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애는 착해요.
그애에겐 이 할미도 있고, 클라라 고모나 다른 친척들도 많잖아요. 물론 친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애는 잘 자라고 있어요. 자……."
니사가 다시 명단으로 눈길을 돌리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아까 쿤스턴의 아이까지 얘기했던가요?"
다시 니사가 얘기하면 리니아가 메모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지막 아이까지
모두 소개를 끝내자, 니사는 아무래도 불안한 듯 메린다의 얘기에 한마디를
더 보탰다.
"난 당신이 테디에게 내가 지금 한 말들을 들었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얘기라면 질색을 하거든요. 테디가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는
당신도 알 거예요. 난 당신이 크리스찬의 선생님이고 또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기도
하니까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린 거예요."
남자들은 늦게서야 다시 돌아왔다. 신발을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오는 테어도어의
모습을 보며,리니아는 자신이 그의 모습 속에서 달라진 부분을 발견하길 기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정력적이지만,
침울하고 불행해 보였다. 저녁 내내 그녀는 그가 자신과 눈길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의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는 오후에 있었던 일로 그녀가
심하게 질책할 때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식구가 제자리를
찾아 식탁에 앉자, 존이 공손하지만 수줍음을 동반한 부자연스런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크리스찬도 어색한 인사를 보내더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테어도어는
앞에 놓인 접시에 시선을 집중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중반으로 접어들 때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무관심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증오심을 끝내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레이비 소스를 얹은 으깬 감자를 먹고 있는 그에게 시선을 맞춘
뒤, 침묵을 가르며 말을 꺼냈다.
"테어도어, 아까 오후에 당신에게 했던 말들을 사과하고 싶어요."
그의 턱 운동이 멈췄다. 동시에 놀라움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그날 밤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나를 걱정해서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비아냥거려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테어도어, 앞으로는 내가 옆에 있을
때는 내게 직접 말을 걸었으면 좋겠어요. 마치 내가 거기 없는 듯 내 머리
위에다 대고 말하지 말고요, 네?"
테어도어는 잠깐 동안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본 뒤 니사와 크리스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찬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놀라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느라 식사도
잊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녀는 또다시 식사 중에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빈 뱃속을 채우는 동안 잡담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테어도어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찬은 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어느새
분홍빛으로 변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하튼,"
그녀가 친절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당신과 나는 이제 잘못된 관계를 끝낸 거예요, 그렇죠? 앞으로는 좀더 어른스럽게
행동했으면 좋겠어요, 괜찮죠?"
테어도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쬐그만 아가씨가 사과를
했다! 지금껏 그는 여자에게서 사과를 받아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과와 동시에 그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었다. 흥! 그는 그녀의 아버지뻘이
될 정도로 연장자였다. 그는 그녀의 빈정거림이 무얼 뜻하는지 몰라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니사, 존, 그리고 크리스찬은 모두
그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손 하나 까닥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테어도어가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목구멍 속에 커다란 덩어리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 조그만 아가씨가 신선하고 천진난만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귀엽고 젊은지를
깨달았다.
"에, 아마도 가능할 테죠. 이제 식사나 합시다"
그는 유쾌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음식 접시로
돌려놓았다.
그려는 드디어 한 차례의 시합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리니아는 아직도 존이 놀라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 넉넉한 미소를 보낸 후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조그만 아가씨는 존에게 있어 새롭게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테디의 얼굴을 붉혀 놓고 항복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사가 테디를 다루는 방법은
이 조그만 아가씨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머리가 좀 둔한 그로서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했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는 테디를 순하게 길들여
놓을 수 있었던 다른 한 여자를 생각했다. 메린다, 메린다……. 그녀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귀엽고 자그마하며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커다란 눈동자를 가졌던
여자. 그녀는 언제나 그 커다란 두 눈동자를 이용해 테디의 목 언저리를 붉혀
놓곤 했었다. 그리고 메린다 역시 식사 때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항상 하는
이야기가 도저히 노르웨이인의 풍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르웨이인들은
문제점이 있어도 가슴에 쌓아 두기만 할 뿐 절대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존은 눈길을 들다가 니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니사는 존에게 눈을 깜박거려
보인 후 생각에 잠겼다. 리니아는 메린다와 닳은 구석이 있었지만, 훨씬 당차고
똑똑했다. 그녀는 시선을 그대로 옮겨 리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 때문에
형성된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얌전히 음식을 먹고있었다. 다시
테어도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골똘한 표정으로 저녁 식사에 몰두해
있었다.
'변덕스런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드디어 짝을 만났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날 밤, 니사는 아연으로 도금한 커다란 빨래통을 가지고 와 부엌에 있는
난롯가에 놓았다. 그리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을 퍼담았다.
"우리, 차례로 몸을 씻읍시다."
그녀가 선언하듯 말했다.
"누가 먼저 씻을래요?"
리니아는 사방으로 완전히 뚫린 부엌에 놓여진 임시 목욕통을 얼빠진 사람처럼
쳐다보다가 다시 거실로 통하는 복도를 힐끗 쳐다보았다. 복도 뒤편에서는
테어도어와 존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그냥 물을 조금 떠가지고 방으로 올라가서 대충 씻을래요."
그녀는 얼룩무늬가 있는 작은 대야에 물을 부어 방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몸을 씻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양이었다.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목욕이란 황홀한
단어일 뿐이었다 그녀가 씻고 있는 동안, 존이 집으로 자러 가려고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은 점점 더 고요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흔들의자에 앉아 학생들 이름 옆에 적어
놓은 메모를 살펴보았다. 니사가 크리스찬을 부르는 소리가 2층으로 또렷이
들려왔다. 그녀는 크리스찬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목욕 후의
개운한 느낌을 떠올렸다. 얼마 후 테어도어가 목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
다리를 작은 빨래통 안에 접은 채 앉아 즐거워하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후 테어도어가 크리스찬을 불렀다. 빨래통을 바깥으로 함께 옮기려는
것 같았다.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존, 니사, 크리스찬, 그리고 테어도어……."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개성이 있고, 각각마다 그녀와 다른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첫눈에 좋아하게 되었다. 테어도어를 제외하고는. 테어도어를
대하면 먼저 경계심이 일었다. 그런데 지금 등잔불이 다 꺼진 늦은 밤에도
그의 웃음기 없는 얼굴이 그녀를 잠 못 들게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빨래통 안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그의 나체를 머릿속에서 지을
수가 없었다.
집 안은 정적에 잠긴 채, 저녁 식사 때 먹은 음식 냄새와 양잿물로 만든
비누 향이 희미하게 섞여 부엌 안을 맴돌고 있었다. 테어도어와 그의 아들은
빨래통을 들어내 마당에 쏟아 버렸다.
그리고 테어도어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테어도어가 낮은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크리스찬?"
"왜요?"
그는 리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그 단어를 조심스레
연습해 보았다.
"너, 비아냥이 무슨 뜻인지 아니?"
"아뇨, 아버지. 모르는 말인데요. 하지만 내일 브렌덴베르그 선생님에게
물어 보면……."
"안 돼!"
테어도어가 비명을 지른 뒤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안 돼, 그런 건 질문거리가 못 돼. 내 판단으로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초가을 밤, 귀뚜라미들의 합창 소리가 깊은 밤을 가르는 가운데 그들은 빈
빨래통을 맞잡은 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달은 서서히 그믐달을 향해 기울어져
가고 별은 쏟아질 듯 하얀 우윷빛을 밤하늘에 잔뜩 뿌리며 그림자를 길고 깊게
드리우고 있었다.
"선생님 귀엽죠, 그렇죠?"
크리스찬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봤니?"
"네, 선생님은 어치 같지도, 수다스러워 보이지도 않아요. 처음에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니?"
"분명히 그러셨어요. 하지만 이사벨보다 훨씬 덜 수다스러워요.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테어도어가 헛기침을 했다.
"내 생각엔 말이다 요리 마차를 몰고 해마다 이곳에 오는 이사벨을 보는
네 시각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그래요, 좋아요. 하지만 아무래도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은 수다쟁이가 아닌
것 같아요. 제 눈에는 멀쩡하게만 보이는데요."
테어도어는 달빛 아래 선 아들의 젊고 말쑥한 얼굴을 탐탁치 않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네가 지금 한 이야기가 선생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게 낫겠다."
"네, 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 같군요."
크리스찬은 낙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어두컴컴한 땅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한층 더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뭔데?"
"선생님은 러시아엉겅퀴가 귀엽다고 생각해요! 우리와 함께 들에 나가 러시아엉겅퀴를
그림에 담고 싶댔어요."
테어도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곧 크리스찬도 그 웃음에 합세했다.
"하긴 그녀는 도시에서 온 아가씨잖니. 우리만큼 그 풀의 속성을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잠시 후, 테어도어는 지난 14년간 혼자서 잠들어 오던 2인용 침대에 누워,
러시아엉겅퀴가 피어 있는 모습을 그려 보려고 노력했다. 도무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없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러시아엉겅퀴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34년간 수백 번도 더 보아 왔으나
하찮은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제대로 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 번엔 꼭 그 풀을 새로운 시각으로 눈여겨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