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내 안에 가득한 사랑-3화 (3/20)

<3>

어디선가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아침이 밝아 오기도

전이었다. 이곳 학교는 9월 첫째주 월요일에 2학기 수업이 시작되므로, 이제

사흘 밤만 더 지나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녀는 축사에 켜진 호롱불빛을 의지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잠깐 동안 어리둥절했다. 모든 것이 낯설어 보였다. 그녀는 끙끙대며

침대 속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지난밤엔 낯선 침대 속에서 그리 푹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좀더 자고 싶은 유혹을 받았지만, 아래층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를

듣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세숫대야에 담겨 있던 물에 손을 넣어 보니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는

테어도어나 크리스찬에게 가서 물을 좀 데워 달라고 해볼까 망설였다. 아직

난로에 불도 지피지 않았을 것이다. 창문 쪽을 내다본 그녀는 아직 이른 새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난로 연통 쪽으로 눈길을 돌린 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연통을 만져 보았다. 뜻밖에도 연통은 따뜻했다.

그녀는 푸른색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단추를 꼼꼼히 채웠다. 그리고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내려오려 했지만,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니사가 계단 아래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벌써 탄탄하게 트레머리를

해 올리고 회색과 붉은색 꽃무늬가 어우러진 모슬린 드레스 위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뻣뻣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요?"

"나, 나는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침 식사를 하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일러요. 열 마리나 되는 소의 젖을

짜려면 한참 걸리거든요."

"그럼 두 사람은……."

그녀는 니사의 머리를 흘끗 쳐다보고는 얼른 세숫대야를 뒤로 감췄다.

"벌써 일하러 나갔나요?"

"장애물들이 없어진 셈이죠. 어서 내려와요."

니사는 계단을 딛고 서 있는 리니아의 맨발로 시선을 옮겼다.

"슬리퍼를 안 가져 왔나 보죠?"

리니아는 발가락을 바로 편 뒤 시선을 그리로 옮겼다.

"네, 하지만 괜찮아요."

고향 집에서는 잠자리에서 나오면 슬리퍼를 신지 않고도 곧장 화장실에 갈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글쎄, 그렇지 않아도 지금 슬리퍼를 만들고 있었는데, 다되면 당신에게

주어야 할 것 같군요.자, 물이 식기 전에 어서 내려와요."

니사가 무뚝뚝하고 독재적인 성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니아는 그녀가

좋았다. 잠시 뒤면, 남자들이 돌아와 부엌 안이 북적거릴 것이다. 니사는 리니아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갑자기 방향을 급선회해서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금방울새의 비상飛上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동작은 한 가지 일을 마치기도

전에 다음 동작으로 옮겨 가는 식이었다.

니사는 실내에 온기를 불어넣는 큼지막한 주철 난로의 뚜껑을 열고, 옆에

놓인 석탄 통에서 석탄을 한 삽 떠 그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닫고 식료품을 보관하는 방으로 옮겨갔는데, 모두 한 동작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리니아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니사는 재빨리 뒤로 돌아서면서 부엌 한 쪽 벽에 놓인 긴 탁자 위의 물 양동이를

가리켰다.

"저걸 써요! 국자를 이용하면 될 거예요! 물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써도

돼요! 선생님이 씻는 데 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눈금 표시를 해놓을 생각이거든요."

리니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니사는 상대방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성질만

조금 고치면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세안을 마친 뒤 손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어 내고 머리 모양을 매만졌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녀는 다섯 벌의 옷을 가지고 왔다. 실크 블라우스가 딸린 잿빛 모직 정장,

맨체스터지로 만든 갈색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초록색 옥스포드지로 만든

치마와 거기에 맞춰 입는 체크무의 블라우스, 칼라 끝에 하얀 선을 맞춰 댄

체크무식 블라우스, 짙은 감색의 세일러복형 블라우스, 어깨에 잔주름을 단

횐색 블라우스와 폭이 넓은 회색 주름 치마가 그것이었다.

정장은 일요일에 입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세일러복은 그녀를 너무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고, 맨체스터지로 만든 옷은 아직 입기에 이른 감이 있었다. 초록색

치마는 출근 첫날 입기 위해 남겨 두었다. 그 옷은 부모님이 선물한 것으로,

그녀가 가지고 온 옷들 중 가장 어른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무난해 보이는 회색 주름 치마와 평범한 흰색블라우스를 골랐다. 그녀는 옷을

입은 뒤, 비판적인 시각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그녀의 머리 모양은 완벽했다. 옷차림도 깔끔했고, 그녀의 손에는 더 이상

붕대가 감겨 있지도 않았다. 옷차림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동시에 수수하고

품위 있어 보였다. 그는 그녀의 옷차림에서 결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그녀는 턱을 앞으로 쑥 내밀며

완고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테어도어처럼 늙고 제멋대로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거지? 그는 이 집의 주인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

그녀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침 식사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부엌

안에는 니사 혼자 있었다.

"어머, 어디 좀 봐요! 이젠 그렇게 앳되 보이지 않는군요!"

"그래요?"

리니아는 흰색 블라우스의 앞자락을 쓰다듬으면서 미심쩍은 눈빛으로 니사를

쳐다보았다.

"나이 들어 보여요?"

니사는 미소를 감춘 채 그녀의 옷매무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 그래요. 성숙해 보여요. 좋아요. 적어도…… 음…… 아무튼 열아홉

살은 되어 보이는군요."

"정말요!"

니사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리니아의 모습을 보며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잠시 뒤, 리니아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 게 있어요, 니사. 사실 난 크리스찬을 처음 본 이후로 학생들 중에서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아이들이 있을까봐 상당히 걱정했었거든요."

"어머, 설마……."

니사는 우물쭈물하며 턱을 몸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그 주름 치마를 입으니까 스무 살 정도로도 보이는걸요. 자, 한 번 돌아

봐요. 뒤를 잠깐 보자구요."

리니아는 니사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고 있는 동안,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렇지! 스무 살은 거뜬히 넘어 보여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리니아는 다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니사의 말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리니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나는 가끔…… 어려움을 느껴요. 실제 나이보다 조숙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 때문에요. 우리 아버지는 내가 꿈속을 헤매거나 엉뚱한 행동을 할 때마다

꾸짖곤 하셨지요. 하지만 사범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스스로 언행을 책임지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했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아마도 이

치마가 그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르죠."

니사는 앞에 서 있는 젊은이에 대해 따스한 애정을 느꼈다.

그녀는 단단히 겁이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힐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어른스럽게 보이려는 그녀의 노력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곧 가족들이 그리워질 거예요. 주위엔 모두 낯선 사람들뿐이고, 또 익숙해져야

할 새로운 일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어머, 아니에요! 그러니까…… 글쎄, 맞아요. 분명히 가족이 그리워질 거예요.

그렇지만……."

"하지만 이 점을 기억해 둬요."

니사가 말을 가로막았다.

"고집스런 노르웨이인보다 더 완고한 사람들은 없다는 사실을 말예요. 그리고

그 노르웨이인들이 바로 이 집에 살고 있는 사실을. 하지만 당신은 학교 선생님이에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아는 게 많죠. 그런데도 당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묵사발을 만들어 버려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당신을 존경하게 될 거예요."

리니아는 풀이 죽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테어도어 같단 말인가?

그 생각이 실제 상황에 영향을 미친 듯 그 순간 테어도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크리스찬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테어도어는 그녀를 보더니 잠시 멈칫하다가 세숫대야와 양동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에서 크리스찬은 그녀를 향해 거리낌없는 눈길을 보내왔다.

"잘 잤니, 크리스찬"

"안…… 안녕히 주무셨어요, 브라덴베르그 선생님."

"안녕, 일찍 일어났구나."

크리스찬은 솜뭉치를 삼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리니아의 상큼하고

앳된 얼굴, 아름다운 갈색 머리, 깔끔한 옷차림을 쳐다보며 서 있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혀가 굳어 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니사가 그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한마디 충고했다.

"꾸물거리지 말아라."

테어도어는 손과 얼굴을 씻은 뒤 수건을 들고 일어서다가 담장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크리스찬은 오늘 아침에도 열세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조그만 아가씨를 넋을 빼고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리니아는 깔끔하게

닦은 구두를 가지런히 모으고 얌전히 서 있었다. 산뜻하게 말아 올린 머리

모양이 그녀의 목을 더욱 길고 우아해 보이도록 했다.

테어도어는 머릿속에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네 차례다, 크리스찬."

테어도어는 다시 리니아에게 등을 보이고 섰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테어도어."

그녀는 그제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잘 잤소? 제시간에 내려왔군요."

"물론이죠. 시간 엄수는 예절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니까요."

그녀는 대답을 마친 뒤 식탁 쪽으로 돌아섰다

시간――뭐? 그는 그녀가 말한 단어의 뜻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며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당당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늘 아침에는 존이 일손을 돕지 않았나 보죠?"

그녀는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입을 열도록

만들었다.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어젯저녁 때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존에게도 돌봐야 할 가축이 있소. 크리스찬과 나는 우리 집 소의 젖을 짜고,

형은 형의 집에 있는 소의 젖을 짜야 하니까."

"난 그가 세 끼 모두 여기서 먹는 줄 알았어요."

"조금 있으면 올 거요."

니사가 신선한 베이컨이 담긴 접시를 가져다 놓은 뒤, 토스트와 진흙처럼

생긴 음식이 담긴 사발 다섯 개를 들고 왔다. 또다시 테어도어가 노르웨이어로

기도를 시작했다. 그 동안 리니아는 그 진흙 같은 음식을 들여다보며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냄새도 색깔도 특별한 모양도 없는 그 음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기도가 끝난 뒤 다른

사람들이 그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거기에

설탕과 크림을 듬뿍 바르고 버터로 모양을 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맛을 봤다.

맛있었다! 바닐라 푸딩 같은 맛이 났다.

식사가 시작되고 얼마쯤 지나자 존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먹던 일을

중단하고 인사를 건넨 사람은 리니아뿐이었다. 그는 금세 얼굴이 벌개지면서

그녀를 쳐다볼 용기조차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더듬거리며

찾아 앉았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침묵 속의 게걸스런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일부러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맛이 참 좋군요."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숟가락질을 멈췄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또다시 그들은 숟가락질을 시작했고, 그녀는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물었다

"이게 뭐예요?"

그들 모두 그녀를 바보 취급하듯 쳐다보았다. 게다가 테어도어는 낄낄 웃으며

한 숟가락 더 떠먹기까지 했다.

"이게 뭐냐니, 그게 무슨 말이죠?"

니사가 반격했다.

"이건 로모그라우트예요."

테어도어가 다시 대답했다.

"로모그라우트."

그는 숟가락으로 앞에 놓인 사발을 가리켰다.

"로모그라우트가 뭔지 몰라요?"

"알고 있으면 물어 봤겠어요?"

"노르웨이인이라면 아무도 로모그라우트가 뭐냐고 묻지 않아요."

"글쎄, 난 이미 질문을 해버렸어요. 그리고 난 반만 노르웨이인이에요. 아버지

쪽이죠, 우리 엄마가 요리를 하는 동안에는 주로 스웨덴 음식을 먹었거든요."

"스웨덴 음식!"

세 사람은 즉각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방안에는 자신이 스웨덴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밀가루 음식의 한 종류예요."

리니아는 정보 하나를 얻게 된 셈이었다.

그들은 다시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침묵의 식사를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트림하는 과정까지 모두 거쳤다. 드디어 사발과 접시가 모두 비워지자 테어도어가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이제 당신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겠소. 필요하다면 당신의 새 날개도 가져가도록

하시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녀를 괴롭히며

즐기는 것일까? 그러나 이번엔 그녀가 당당하게 그의 말을 거부할 차례였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크리스찬에게 데려다 달라고 할 거예요."

테어도어의 눈썹이 양쪽 끝으로 치켜 올라갔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크리스찬이라, 후후."

크리스찬의 얼굴이 금방 먹고 난 베이컨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발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으니까, 금방 모셔다 드리고 올게요."

"맘대로 해라. 내 일 하나를 더는 셈이로구나."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문 밖으로 사라졌다. 리니아는 그런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뒤로 돌아섰을 때 그 자리에는 니사가 서 있었다.

그러나 니사가 한 말은, 단지 식탁 치우는 일을 거들어 달라는 얘기와 점심

도시락을 싸 주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사다리와 양동이, 걸레를 준비해

가라고도 했다.

크리스찬은 그녀가 이곳에 올 때 탔던 그 마차로 학교까지 태워다 주었다.

리니아는 마차에 올라탄 뒤, 몇 분도 안 지나 테어도어의 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천국 같은 아침 날씨였다. 태양이 지평선 위로 손가락

마디만큼 떠올라 황금빛 광선을 위아래로 방사하면서 자기 몸체를 더욱 오렌지

빛으로 빛나게 했다. 들판이 그 빛에 물들며 황금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이라 바람조차 잠들어 있는지, 밀밭을 거대한 덩어리로 착각할 정도였다.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모든 것이 고요 속에 잠든 채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종달새의 지저귐이 그들의 귓가에 경쾌하게 들려오자 말들마저도 귀를

종긋 세우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길가 왼쪽으로 보이는 들녘에 해바라기가

황금빛 머리를 들어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봐, 해바라기야. 예쁘지 않니?"

크리스찬은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학교 선생님이라면서 그녀는 아직

해바라기의 속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는 저걸 아주 싫어해요."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크리스찬을 쳐다보았다.

"어머, 왜? 저것들을 좀 봐. 해를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모습을 말야."

"이곳에서 해바라기는 페스트와도 같은 존재예요. 밭에 한번 뿌리를 내렸다

하면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 되거든요."

"오……."

그들은 계속 말을 몰았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농장일에 대해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은 것 같아. 내게 가르쳐 줄

수 있겠니?"

"내가요!"

그는 놀란 갈색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글쎄,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하지만 당신은 선생님이잖아요."

"학교 안에서는 그렇지만, 밖에서는 오히려 네게 배워야 할게 더 많을 것

같은걸. 저건 또 뭐지?"

"러시아엉겅퀴!"

그가 대답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희미한 녹색 반점처럼 보이는 그 풀을 계속 가리켰다.

"아."

그녀는 그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미리 말을 막았다.

"테어도어는 저것들도 역시 무척 싫어한단 말이지, 맞지?"

"그것들은 해바라기보다도 더 지독해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마차가 달리는 동안, 줄곧 러시아엉겅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지만 모두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다시 한번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구. 아마 겨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그린 러시아엉겅퀴 그림을

보게 될 것 같구나."

그는 러시아엉겅퀴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리니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생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이 어느새

목을 길게 빼고 뒤를 돌아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그를 붙잡으며 환하게

운자 그는 다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저기가 존 삼촌의 집이에요."

그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알고 있어."

"숙모, 삼촌, 사촌들이 이 근방에 쫙 깔려 있어요."

그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꺼내며, 여자 앞에서는 거의 입을 다물다시피 했던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빼고 대략 스무 명 정도 되죠."

"할머니, 할아버지?"

"종조모와 큰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요. 그분들이 몇 분 되시거든요."

"끔찍하군!"

그녀가 큰소리로 말했다.

"스무 명이라고?"

그는 고개를 흔들며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는 학교 선생님이

그런 말투를 쓰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상기하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내려놓은 뒤 초조하게 무릎을 비벼

댔다.

"난 좀더 스스로를 단속해야 할 것 같아, 그렇지? 나는 가끔씩 내가 교사라는

걸 잊어버리곤 하거든."

잠시 동안, 크리스찬도 마찬가지였다.

마차를 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난생 처음 마차에 탄 여자가

내리는 것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 쪽으로 재빨리 돌아가는 동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녀가 웃으면 어떡하지? 그가 아는 어떤 여자는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여자들이란 별일 아닌데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의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자 그의 뱃속에 별나고 당황스런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녀는 심사 숙고 끝에 발을 활기차게 굴러 땅으로 뛰어내렸다.

크리스찬은 사다리를 든 채 마차를 뒤로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렀고, 그녀는

양동이와 걸레를 날랐다.

그녀는 건물 앞에 이르러서야 당혹스런 사실을 깨달았다.

"오, 열쇠 가지고 오는 것을 잊어버렸나봐!"

그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아요. 이 근방에서는 아무도 문을 잠그지 않거든요."

그는 사다리를 주춧돌 옆에 세웠다.

"안 잠근다고?"

그녀는 뒤를 돌아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문을

잠그는 일을 당연시했던 것이다.

"자, 열렸어요. 이제 들어가셔도 돼요."

그녀는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가.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다. 도시에 있는 커다란 학교는 비록 아니지만, 지금 이 건물 전체가

그녀의 일터이고 교육에 대한 책임 역시 그녀 혼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녀는 문을 열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야트막한 천장과 아직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마룻바닥, 그리고 끝쪽으로 창문이하나 나 있었다. 또 곧장 앞쪽으로

가면 커다란 이중 문이 있었는데, 그 양쪽으로 흠집이 난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코트나 재킷을 걸 수 있도록 쇠로 된 옷걸이도 놓여 있었다. 의자의

왼쪽에는 파란 페인트칠이 된 네모난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자기로

된 단지가 뒤집어진 채 올려져 있었다. 손잡이 쪽에 문양이 새겨져 있고 나무로

된 마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물통 같았다. 마개 밑쪽의 마룻바닥은 오랜 세월동안

물이 떨어진 흔적 탓인지 희뿌옇게 바래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못에 큰 빗자루가 걸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 쪽을 보니

종을 치는 밧줄이 둥근 지붕 아래 매달려 있었는데, 밧줄 끝을 매듭지게 묶어

놓아 손으로 잡기 편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흰색으로 칠해진 넓은 이중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교실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양동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잠깐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범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필

냄새와 도전의 냄새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만약 리니아 브란덴베르그가 마음을

굳게 다지지 않고 소녀 같은 환상에 취해 있었다면, 완전한 어른이 갖추어야

할 모든 책임을 요구하는 이 상황에 당황했을 것이다.

"오, 크리스찬, 여기 좀 봐……."

그는 이미 그곳에 수천 번도 더 왔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시야

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이었다.

길고 좁은 창으로 햇빛이 흘러들어와 볼트로 다리를 조인 책상들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창과 창 사이의 벽에는 벽걸이용 호롱불이 걸려 있었고, 주철로

만든 난로에는 새로 단 듯 윤이 나는 연통이 달려 있었다. 그 연통은 천장을

통해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교실 바닥보다 약간 높은 앞쪽 교단위에는 실망스럽게도

호롱불이 덩그마니 놓인 네모진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조그만 책장이 세워져 있었는데, 바랜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말아

접을 수 있는 세계 지도도 있었다. 교실 정면 벽에는 칠판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흥분으로 경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곳은 다른 시골 학교의

풍경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그녀가 처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될 교실이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녀의 가슴이 다시 달뜨기 시작했다. 교실을 가로질러 종종걸음을 치자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그녀를 향해 달려오던 쥐가 발소리에 놀랐는지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서며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머! 이것 좀 봐! 우리 교실에 식구가 하나 더 있었네."

크리스찬은 쥐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소녀를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쥐를 보면 기절할 듯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쥐덫이 있는데, 선생님께 갖다 드릴게요."

"고마워, 크리스찬. 이 녀석이 책과 종이들을 모두 갉아먹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겠지? 이미 사고를 저질러 놓지 않았다면 말야."

그녀는 책장에서 무작정 책을 하나 골라 뽑은 뒤 펼쳐 보았다. 석유에 관한

글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쥐가 갉아먹은 책 가장자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큰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호레이스 글릴리는, 노동과 여가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인간 삶의 영역을

넓혀 준 사람은 은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9세기는 발명과 발견, 진보와

인류 문명과 행복의 증진을 그 어떤 시기에 이루어 놓은 것보다도……."

그녀가 책을 덮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마지막으로

읽은 구절이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는

용어들을 거침없이 읽어내는 그녀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리니아처럼

똑똑하고 별난 일을 좋아하며 뛰어난 영감을 지닌 여자는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곳을 사랑하게 될 거야."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며 푸른 두 눈에 굳은 결심을 담아 냈다.

"네, 선생님."

크리스찬은 그 이상은 아무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곳도 보여 드릴게요. 일단 운동장에 나가 보구요."

"다른 곳."

"바깥으로 잠깐 나와 오세요."

그는 뒤돌아서서 문으로 나가며 그녀를 인도했다.

"크리스찬."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그는 걸음을 멈춰 섰다.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난 너무 나이가 어린 건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니?"

"아뇨,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오래된 전통부터 시작해 볼까? 숙녀 먼저……."

그는 얼굴을 야생 장미꽃처럼 붉히면서 바지 뒷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지나가도록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곁을

지나치며 정중하게 말했다.

"고마워, 크리스찬."

바깥으로 나온 크리스찬은 그녀에게 펌프와 건물 서쪽 벽에 붙어 있는 작고

텅 빈 석탄 창고를 보여 주었다.

운동장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밀밭이 둘러싸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키 큰

목화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운동장에는 철봉틀처럼 생긴 굵은 막대에 널빤지를

매달아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학교 운동장을 다 둘러본 후 건물 지붕 위로 종탑을 쳐다보던 그녀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우리, 종을 울려 볼까?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들어 보고 싶어."

"그럴 수 없어요,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종이 울리면 추수하던 농부들이

모두 농기구들을 집어던지고 이리로 구름처럼 몰려올 거예요."

"오, 그러니까 긴급 신호라?"

"맞아요. 교회 종도 그렇구요. 그렇지만 그건 서쪽으로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녀는 자신이 또 철부지 같은 제안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월요일 아침까지 기다려야겠는걸. 학생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지?"

"글쎄, 확실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열두 명, 아마 열네 명, 대부분이

내 사촌들이죠,"

"주위에 그렇게 가까운 친척들이 많다니, 굉장히 부러운걸. 내 조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이 나라 어디에도 숙모나 삼촌은 없지. 그래서 부모님과

내 두 여동생, 그리고 내가 가족의 전부야."

"여동생이 있어요?"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와 이런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다니,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두 명. 한 명은 너와 동갑이고, 이름은 캐리야. 또 다른 한 명은 네 살

더 아래인데, 진짜 이름은 퍼지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 나이 또래 소녀들처럼

그 아이도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있지."

그녀는 갑자기 입 안에 공기를 잔뜩 머금어 뺨을 불룩하게 만든 뒤, 어기적거리며

걷는 포즈를 취해 뚱뚱한 사람을 흉내 냈다.

"그래서 우리는 그애를 땅딸이라고 불러."

그가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렇지만 그는 통통한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해서 숙녀의 몸매에 이르게 되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자애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번번히 여자아이들을 피해 왔었다.

지금까지는 그랬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은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앤 우리가 놀려 대는 걸 무척 싫어했어. 우리도 가끔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장난을 좀처럼 그치지는 않았지. 그렇지만 그애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어."

그녀를 보며 땅딸이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르고

뼈대가 가는, 그가 보아온 여자들 중 가장 완벽한 몸매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아, 선생님은 뚱뚱하지 않을 거예요."

"뚱뚱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쑥스러운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뚱뚱했어. 하지만 날 그렇게 봐주니 기쁜걸!"

갑자기 너무 오랫동안 학교 안에서 꾸물거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들판 쪽을 바라보며 뒷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을 꺼내 입으로 가져 갔다.

"저, 더 이상 필요한 일이 없으시면…… 저는 존 삼촌과 아빠를 도우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재빨리 돌아서며 그에게 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오, 물론이야, 크리스찬 혼자서도 있을 수 있어. 할 일도 많고. 여기까지

데려다 주어서 정말 고맙다."

크리스찬이 가고 나자 그녀는 혼자 남아 일에 착수했다. 마룻바닥을 쓸고

닦고, 책상의 먼지를 닦아 내고, 창문을 닦고 나니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다. 그녀는 휴식을 취할 겸 교실 앞 계단에 앉아 니사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고기가 곁들여진 샌드위치를 맛있게 삼키며 리니아는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대하면 얼마나 흥분될까 하는

생각으로 꿈에 부풀어올랐다. 어떤 아이들은 이해력이 빠르고, 어떤 아이들은

격려가 필요하며, 또 어떤 애들은 지나치게 대담해서 약간의 제재를 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테어도어와 존을 떠올리게 했고, 그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테어도어를 생각하느라 너의 즐거운 시간들을 망치지 말라구!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잠시 후, 그녀는 도시락 통을 닦으러 펌프로 가던 길에 서쪽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기 어딘가에서 테어도어와 존이 밀을 수확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찬도 그들을 뒤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곳의 땅은 아주 광대하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평원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황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리니아는 선명한 파란 하늘과

넉넉해 보이는 평야를 바라보면서 풍요로움과 아름다움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그녀에게 무엇을 보든 그것에서 좋은점을 발견할 줄 아는

재능을 지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상상력과 관계가

있는 듯했다. 그녀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최근, 그녀의 부모님은 그런 어린아이 같은 해결 방법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환상은 매혹적인 것이었다. 환상놀이는 그녀가 안 좋은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었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행복한 느낌을 맛보게 했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술에서 찬물을 닦아 낸 뒤 춤추듯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폴짝 뛰어오르기도 하고 몸을 뒤로 젖혀 그네를 흔들어 대기도 하면서

다시 그녀만의 마법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자, 안녕, 로렌스? 내가 너를 이렇게 금방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로렌스는 진짜 멋쟁이처럼 차려 입고 있다. 멋진 밀짚모자를 쓰고, 빨간색과

하얀색이 엇갈린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다. 그는 몸의 무게를 한 쪽 다리에

실은 자세로 서 있는데, 그로 인해 엉덩이가 불룩 튀어나와 보인다. 그녀는

늘 그 자세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함께 소풍 가자고 왔어."

"어머,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너와 깔깔대며 들판으로 소풍을 나가고

싶지도 않고 그럴 여유도 없어. 나는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 학교 선생님이야.

더군다나 너는 내게 설명을 해야 할 만한 난처한 입장에 빠지자 곧 떠나가

버렸었잖아. 난 네게 무척 실망했어."

그녀는 최대한 예쁜 모양을 내며 입을 비죽거렸다.

로렌스는 그네 뒤쪽으로 가서 흔들리는 그네를 잡아 세운다. 그리고 널빤지

위에 그녀를 앉히기라도 하려는 듯 가볍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는다.

"나는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할 곳을 알고 있어."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한다.

그녀는 그네 끈을 꼭 잡은 채, 계속해서 웃어 댔다. 그 소리가 평원으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프레더릭 댈은 마차를 타고 학교로 들어서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회색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날씬한 여자아이가 그네에 앉아 끈을 좌우로

꼬며 놀고 있었다.

그는 들판을 울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재빠르게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네의 매듭이 모두 풀렸다. 그녀는 다리를

바닥 쪽으로 쭉 뻗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일까?

그는 마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생각보다는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팔을 위로 뻗치고 있어 그녀의 가슴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건넸다.

리니아는 급히 자세를 바로하며 옆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네에서 내려와 치마를 손질하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브란덴베르그 씨를 찾고 있습니다만."

"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남자로 착각하고 있습니다만, 저를 만나셨으니

바로 찾으신 셈이군요. 제가 브란덴베르그예요."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불쾌 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 학교 교장 댈입니다. 아직 인사를 제대로 나눌 기회도 없었습니다.

내 실수죠. 하지만, 이렇게 만나다니 유쾌한 놀라움이군요."

댈 교장! 그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즉시 블라우스 소매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머, 교장 선생님, 죄송해요. 전 당신이 그분인 줄 몰랐어요."

"혹시 당신을 도울 일이 없나 해서 보러 왔어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물론이에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저는……."

그녀는 긴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다소 더러워진 치마를 살짝 털어 보았다.

"청소를 하던 중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청소?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연신 어깨

너머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사다리는 벽에 기댄 채 세워져 있었고,

마룻바닥은 아직도 물기가 축축했다. 그녀는 갑자기 그를 향해 손뼉을 치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을 사랑해요! 나의 첫 번째 부임지이기도 하죠. 너무 흥분돼요!

당신이 저를 이곳으로 오게 추천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당신은 정식 교사입니다. 내게 고마워하실 것 없어요. 그런데 웨스트가드

씨네 하숙집은 마음에 드시나요?"

"글쎄……."

그녀는 그에게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네, 아주 좋아요!"

"그렇군요. 나는 지금부터 학교 기물들을 둘러보아야 하고, 당신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으니, 서로 일이 끝난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지요,"

그녀는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상상했던 멋쟁이 댈이 아닌 진짜 댈

씨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는 겨우 5피트 정도 되는 키에, 비를 받치는 그릇처럼 뚱뚱하고 대머리였다.

남아 있는 머리숱은 5월제의 월계관처럼 그의 귓가에 성글게 덮여 있었다.

넌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를 그리고 있었지, 리니아? 그런데 처음에는

테어도어이고, 이번에는 저 사람이야.

그는 석탄 창고와 옥외 변소까지 살펴본 뒤, 교실 안을 둘러보기 위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을 모두 마친 후 그녀에게 물었다.

"웨스트가드 씨가 석탄에 대해 이야기하던가요?"

"석탄이라구요?"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88년도에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닥쳤었는데, 그때 몇몇 학교에 석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죠. 그래서 10월 초부터 다음해 봄까지 충분한

양의 목재와 석탄을 미리 준비해 놓으라는 법령이 생겼지요."

테어도어는 석탄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한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잘 몰랐어요. 그런데 웨스트가드 씨가 석탄을 가져 오나요?"

"늘 그래왔지요. 그와 이 학교 교육위원회 사이의 계약이니까요."

"웨스트가드 씨는 들판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을 거예요. 찾아가 보실래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2주 내에 다시 확인하러 올 겁니다. 그에게 그

점을 상기시켜 주시면 감사하겠군요."

그녀는 정말로 테어도어 웨스트가드에게 아무것도 상기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잊지 않고 전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학교 비품을 날라왔다. 분필, 잉크, 새 교사용 지침서 등등.

그녀는 그것들을 공손히 받아 들고는 두꺼운 교사용 지침서를 펼쳐 보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어린아이 같은 천진성 외에 교사로서의 열정을 발견하고

안심이 되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학교는 오전 9시에 시작되어

오후 4시에 파합니다. 아이들 등교 시간 직전에 난로에 불을 지펴 교실을 따뜻하게

하고 석탄을 관리하는 것도 당신의 임무에 속합니다. 당신은 이 지역의 중심

인물이라는 생각으로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도 늘 관심을 가져야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이 무척 쉬운 업무임을 곧 알게 될 겁니다.

모두들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잘 협조해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만약 급히 필요한 것이 있거나 내게 연락이 안 될 때는 그들에게 부탁하세요.

이 지역에서 교사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교사가 남자인 줄 알고 있는 한 그렇겠지.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가 마차에

올라타는 걸 지켜보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그를 다시 불렀다.

"댈 씨?"

"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88년도에 석탄이 떨어진 학교의 학생들과 선생님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9월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왜요, 모르시나 보죠? 대부분이 도움을 받기도 전에 얼어죽었지요."

갑자기 그녀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기차역에서 테어도어와 나눈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그녀를 겁주려고 그냥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은

분명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충고는 기억해 둘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물결치는 밀대의 흔들림을 바라보며, 열네 명의 아이들이 추위에 떨며 오도가도

못하고 그녀에게 목숨을 맡기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이런 환상 속에서는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비해 예리하고 분별력 있는 사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햇살이 머리 위에서 따사롭게 내리쬐고 땅다람쥐가 구멍 속으로 숨바꼭질하듯

숨고, 참새가 엉겅퀴 꽃씨를 한가로이 쪼고 있는, 풍요로운 들녘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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