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리니아가 위층에 올라가 있는 동안, 테어도어는 집을 살그머니 빠져나와
들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그는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골치 아픈 일이 있다면, 그건 여자와 한 쌍으로 맺어지는 일일 것이다. 이제
와서 그가 누구를 짝으로 만나 산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는 조그만 계집애를 앞에 놓고 자신을 대하던 어머니의 태도를 생각하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가방이나 옮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앞으로 얼마나 더 다 큰 아들을
들들 볶아댈 것인가? 그의 얼굴은 아직도 당혹감으로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어머니에게는 그를 그런 식으로 망신시킬 어떤 권리도 없었다! 그는 완전히
다 자란, 서른네 살의 성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존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면……. 그는 차라리 그렇게 되길 하늘에 대고 빌었다.
테어도어는 아직도 언짢은 기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밭에 도착했다. 멀리서
존과 크리스찬이 각각 말을 몰며 밀을 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밀밭
끄트머리에 앉아 기다렸다. 그들이 들판 가장자리에서부터 방향을 바꿔 가며
일하고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결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빙빙 도는
둥근 모양의 칼날이 빽빽이 자라 오른 곡식을 베어내고 있었는데, 베어진 곡식들의
맨 윗부분은 황금색으로 빛났지만 칼날이 지나간 밑둥 쪽은 벌써 색이 변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구역씩 나란히 나아가고 있었는데, 존이 몰고 가는 기계가
약간 앞선 채 그 뒤를 크리스찬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지평선
위의 점이 되었다가 다시 테어도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되돌아오기
시작하자, 말이 내는 고생스런 발굽 소리와 함께 점점 더 뚜렷이 두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나무로 만든 절곡기가 움직일 때마다
내는 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그는 밀대가 앞으로 고꾸라진 뒤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태양 아래 잘 말려진 밀보다 더
달콤한 것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물론 달콤한 것은 또 있었다. 올 가을 밀 값이 상당했던 것이다. 유럽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곡식들이 종류에 상관없이 금값이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서서 절곡기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테어도어는 전쟁이야말로
자연을 파괴하는 신성 모독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말로는 이곳에서
수확한 밀이 곧 미국 병사들의 군량미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직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훈련소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신병들로 넘쳐났지만,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들은 제복과 총도 배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대신 그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빗자루를 부둥켜안은 채 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테어도어는
자신과 애송이 선생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마치 전쟁처럼 느껴졌다.
그는 존이 바로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존은 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며 동생을 불렀다. 그리고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말 위에서 내려왔다. 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자 마구가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오후의 분위기가 한층 더 무르익었다.
"돌아왔구나."
존이 모자를 벗은 뒤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그래, 그 남자를 데리고 왔니?"
"응."
존은 언제나 그랬듯이 고개를 끄덕 이면서 알아들었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는 무슨 일에건 불평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재치가 있는 것도, 특별히
이성적이지도 않았다. 서른여덟 나이에 테어도어보다는 어깨가 약간 더 단단하고
두상이 작은 편이었지만, 자질구레한 일 처리에서부터 화를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매사가 전부 느렸다. 그는 체구가 크고 튼튼했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 일을
서두르는 능력은 부족했지만, 너그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체격은 작업복과
코가 뭉툭한 장화, 그리고 얇은 플란넬 셔츠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고있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그는 셔츠 단추를 목부분까지 잠그고 팔 소매도
꼭 잠그고 다녔다. 그런데도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위에 대해서도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들판이 얼마나 멀리까지 펼쳐져 있을까 하는 것과, 그 안에서 능력껏 일한
뒤 자신의 하루 식사를 얻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기 힘으로 일해서 식사를
구할 수 있는 한, 인생에서 더 이상의 것을 구하는 일이 없는 선량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곡식 베는 속도가 점점 나아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우리 셋이 함께 일하면 오늘 안으로 이쪽 구역을 거의 끝낼 수 있겠는데……."
존은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밀대를 우물우물 씹으며 시선을 들판 저편으로
향했다.
테어도어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호기심이 부족하고 늘 어린아이
같은 존의 성격 때문에 곤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존의 그런 성격이 테어도어로 하여금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하고
지켜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여자로 바뀌었어"
테어도어가 존에게 소식을 전했다.
존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 왔지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여자였다니까."
테어도어가 다시 설명했다.
"누가 여자라는 거예요?"
어느새 잽싸게 옆에 와 앉아 있던 크리스찬이 물었다
그도 두 성인 남자와 마찬가지로 줄무늬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맨발에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았다. 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이는 그의 팔뚝에서 어느새
알통이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은 아직 호리호리했고,
얼굴은 길고 각이 져 핸섬해 보였다. 그의 눈썹 모양은 아버지를 빼닮았는데,
테어도어에게서 가끔씩 느껴지는 냉소적인 분위기는 훨씬 덜한 편이었다. 입술은
어머니를 닳은 듯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좀더 도톰해 감각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자라면서 2개국어를 사용해 온 탓인지 영어 발음 속에 노르웨이어 발음이
약간씩 섞여 있었다.
"새로 온 선생님 말이다."
테어도어는 좀더 강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테어도어는 한마디 덧붙이기 전에
잠시 침묵을 지키며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아니, 여자라고 할 수도 없겠다. 여자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계집애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거다. 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더구나."
크리스찬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보다 어리다구요?"
그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집 쪽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그녀가 우리 집에서 지낼 거래요?"
그는 아버지의 대답을 몇 마디 듣지 않고도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여자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 할머니가 그녀를 위층으로 데리고 가서, 방을 보여 주시더구나."
크리스찬은 아버지의 말뜻을 다시금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함께 지내자고 말했던 것이다.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때 보여요?"
테어도어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풋나기에다 어치처럼 수다스럽고 시건방지더라."
크리스찬은 싱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데요?"
테어도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네가 왜 관심을 갖는 거지?"
크리스찬의 얼굴색이 약간 발그레해졌다.
"그냥 한 번 여쭤 본 것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테어도어는 험악한 인상을 만들며 목소리를 깔았다.
"볼품도 없고 매력도 없게 생겼더라."
그의 대답은 심술궂었다.
"당장 선생님이 어떻게 생겼나 보러 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자,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야지"
추수 때가 되면, 남자들이 들판에 나가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가 늦어지곤 했다.
리니아는 정중히 저녁 식사 준비를 거들겠다고 말했지만, 니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청을 일축해 버렸다.
"선생님의 숙식은 여기서 해결해 드려요. 아무런 조건 없이요. 두 가지 모두
당신의 월급 속에 포함된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래서 리니아는, 비록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집 안을 두루 살펴보러
나가기로 했다. L자 모양으로 지어 놓은 두 개의 곡물 창고 뒤로 돌아가 보니
집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돼지 우리가 있었다. 그리고 가축의 먹이를
저장하는 창고도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축사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는 별로 흥미를 느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축사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굴처럼 뚫려 있는 많은 수의칸막이 방들이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그 중에서도 마구를 정리해 둔 방은 그녀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파르고에서 말과 마차 전세업을 하는 곳에서조차도 이렇게 많은
양의 가축들은 본 적이 없었다! 기병 연대가 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수백 개의 밧줄들과 끈들, 톱질 모탕들, 작업대가 잘 짜여진 거미줄처럼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마구실은 한마디로 감탄이 터져나올 정도였다
그곳은 분위기가 독특했다. 그리고 특유의 향기가 풍겨 나왔다. 남자가 어쩌면
이렇게 꼼꼼하게 정돈을 잘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이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고삐는 두꺼운 나무 못에 느슨하게 매달려 끝 부분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지 않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작은 가죽 끈들은 철사 대신 밧줄에
깔끔하게 감겨져 있었는데, 첫눈에 매듭이나 튀어나온 부분이 전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둥그스름하게 생긴 가죽들은 따로 분리된 채 손질되어 있었다.
안장용 가죽은 안쪽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X자형의 톱질 모탕위에 두꺼운
양가죽을 뒤집어씌운 후 그 위에 걸쳐놓았다. 거칠거칠한 의자에는 도찰제가
든 생철 그릇들, 기름, 안장 닦는 비누가 약국의 진열장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말 발굽을 박는 도구들, 큰 가위, 그리고 말의 털을 손질해 주는 쇠빗
역시 제자리에 놀랄 정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서쪽으로 난 창문 아래쪽에는
낡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등받이 부분과 팔걸이 부분이 거의 시커멓게
변한 상태였다. 의자의 시트에는 두 군데 정도 희미하게 얼룩이 남아 있었고,
다리는 용수철을 덧대 단단히 보강해 놓았다. 그리고 한 쪽 팔걸이에는 더러운
헝겊 조각이 정확히 반으로 접힌 채 걸려있었다. 마치 여자들이 손으로 매만진
것처럼 말끔하게.
그녀는 테어도어가 보기보다 꼼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생활의 전부가 일하는 것뿐, 논다는 건 생각도 못하는 사람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화 잘 내고 성미 급한 사람에게 이런 깔끔한 면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자 조금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슬슬 시장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마구실에서 일하고 있는 테어도어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세안과 머리 손질을 다시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한 손에 머리빗을 들고 둥그스름한 거울 가까이 서서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속삭였다.
"당신은 여자를 다루는 것보다는 말이나 다루는 게 낫겠어. 사실, 여자 다루는
솜씨보다는 마구馬具 다루는 솜씨가 훨씬 낫거든!"
리니아는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그의 대답에 성난 표정을 지으며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웨스트가드 씨, 물론 당신이 알 리가 없지. 내가 영국인 배우와 비행사로부터
청혼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야. 그리고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남자들의
청혼에 퇴짜를 놓았다는 사실도."
그녀는 잠시 이마를 찌푸렸지만, 곧 손으로 머리빗을 탁 치며 득의 양양한
미소를 터뜨렸다.
"오, 그래,"
그녀는 유쾌하게 말을 마쳤다.
"청혼을 하도록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지."
그녀는 숨죽여 속삭이듯 웃고 나서는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릿결을 조심스레
빗었다
"영국인 비행사는 여왕이 특별히 초대한 궁중 무도회에 나를 데려갔었지.
그 다음날, 독일제 체렐린 비행선이 뒤셀도르프에 떨어뜨린 폭탄 때문에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렸지만."
그녀는 치마 윗부분의 후크를 건 다음, 마치 춤을 추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치마를 흔들어 댔다. 그녀의 얼굴에서 꿈꾸는 듯한 표정이 지나갔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다면……."
두 눈을 꼭 감고 좌우로 몸을 기울이자 작은 타원형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번쩍이며 지나갔다.
"그날 밤, 무도회가 끝난 후 우리는 그가 특별히 빌린 사륜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지."
그녀는 치마를 쓸어내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 그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거야. 그 슬픔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거야."
그녀는 잠시 동안 그를 애도했다. 그리고 기운을 북돋우며 장엄하게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난 비엔나 왈츠가 울려 퍼지는 금에서 그의 단단한 가슴에
안겨 빙글빙글 춤을 추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어."
그녀는 머릿결을 부드럽게 매만지면서 마치 백조처럼 목을 쭉 뽑았다.
"그리고 나서 로렌스가 나타난 거야."
갑자기 그녀는 빙그르 돌아 스탠드에 등을 기대 선 채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다.
"내가 로렌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니?"
그때였다. 갑자기 그릇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리니아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환상 속에서 깨어났다. 스탠드가 시소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주전자와 사발은 어디로 굴러떨어졌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니사가 고함을 질렀다.
"거기 무슨 일이에요? 당신, 괜찮아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계단을 급하게 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리니아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서랍장 쪽으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니사의 시선이 리니아에게서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그릇 파편으로 옮겨갔다.
"무슨 일이에요?"
리니아는 갑자기 습격이라도 당한 듯한 얼굴로 황급히 문 쪽을 쳐다보았다.
"오, 니사, 정말 죄송해요! 내…… 내가 주전자와 사발을 깨뜨렸어요."
니사가 안으로 재빨리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내가 어쩌다가 스탠드에 부딪혔어요. 첫달 월급을 타면 변상해
드리도록 할게요."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주전자와 사발의 가격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았다.
"이런,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네요. 당신은 괜찮아요?"
리니아는 그때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치맛단이물에 젖어 있을 뿐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물에 조금 젖은 게 다예요."
니사는 서랍장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지만, 리니아가 즉각 제지했다.
"여기 그냥 두세요. 내가 깨끗이 닦을게요!"
서랍장이 옆으로 옮겨지자, 산산히 부서진 그룻 파편과 리놀륨 장판 밑으로
물이 흘러들어가 장판지를 적셔 놓은 게 한눈에 들어왔다.
"어머, 내가……."
그녀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손해를 끼쳐 드려서……. 정말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리놀륨 장판까지
망쳐 놨어요."
니사는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양동이와 걸레를 가져 올게요."
니사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 바깥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니아는
얼른 창가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백일몽을 꾸고 있는 동안, 그가 집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정신없이 깨진 조각들을
모아 한 곳에 쌓아 놓은 다음, 손바닥으로 리놀륨에 흘러든 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이미 고여 있던 물이 리놀륨 속으로 흘러든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쪽 장판을 걷어올려 버렸다. 그러자 리놀륨에 고여 있던 물이
접힌 골을 따라 흘러내리며 그녀의 무릎과 치마를 적셨다.
"이런, 내가 치우도록 놔두라니까요!"
니사가 문 앞에 서서 명령했다.
"양동이에 깨진 조각들을 담아야겠어요."
리니아는 조심스럽게 깨진 그릇 파편들을 양동이 속에 집어넣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리고 앉았다. 어린아이처럼 순간적 기분에 빠져 버렸던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끔 그래왔던 것처럼 심란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파편들을 모두 치우고 나서, 니사는 쪼그리고 앉아 있는 리니아의 등뒤로
와 앉았다. 리니아는 비통한 표정으로 니사의 팔을 움켜잡았다.
"죄……죄송해요."
리니아가 속삭였다.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그리고……."
"그렇긴 해요. 아무도 자기가 처음 간 장소에서 이렇게 어수선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이 상처는 어떻게 된 거죠?"
리니아는 니사의 팔소매에 자신의 피가 묻어난 걸 보고 얼른 손을 빼냈다.
"오 이런, 이젠 당신의 옷까지 망쳐 놨군요! 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나 봐요!"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이건 닦아 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잖아요. 내가 상처를 싸맬걸 가지고 올 때까지 그대로 있어요."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리니아는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시끄럽게
얘기를 나누고 있으리라.
니사는 곧 되돌아와서 깨끗한 헝겊 조각으로 그녀의 손을 안전하게 싸매
주었다. 그리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말했다.
"머리를 묶도록 해요. 그리고 5분 후에 아래층으로 내려와요. 우리 집 아들들은
식사 시간에 기다리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녀는 불행히도 한 손에 붕대를 감은 탓에 머리를 뒤로 올려 묶는 데 한참이나
고생을 해야 했다. 니사가 저녁이 준비 되었다고 부를 때까지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 그대로였다. 두 손은 머리를 단정히
하려고 아직도 기를 쓰고 있었지만, 머리핀들은 그녀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오고 있었다. 리니아는 치마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젖은 무릎, 젖은 치맛단…….
그러나 다시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거울에 살짝 비친 그녀의 머리는 핀이
겉으로 삐져 나오고 균형도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빌어먹을! 그녀는 머리를
힘껏 왼쪽으로 잡아당겨 보았지만, 오히려 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임시 변통으로 핀을 세 개 더 꽂아 넣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저녁 드세요!"
니사의 아들들이 기다리는 걸 싫어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리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부러 타닥타닥 걸으며 경쾌한 발소리가 나도록
했다.
그녀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부엌에 들어설 때였다. 그녀는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키 크고 억세게 생긴 세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들들이라더니?
물론, 테어도어라면 불행스럽게도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는 빨개진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젖은 치마를 입고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서 있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무식한 촌놈 같은 그를 무시한 채, 다른 두 사람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당신이 바로 크리스찬이군요."
그는 리니아보다 배는 큰 키에 아주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
비해서 훨씬 친절하고 귀여워 보이는 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짙은 갈색
눈동자는 아버지를 빼닮고 있었다. 황금빛이 도는 갈색의 젖은 머리칼이 곱게
벗겨져 있었는데, 아마 완전히 마르고 나면 금발로 변할 것 같았다. 방금 세수를
끝낸 얼굴로 앉아 있는 그는 나머지 두 사람과 달리 웃통을 벗고 있었고, 이마에는
모자를 써서 생긴 자국도 없었다.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안녕? 난 브란덴베르그라고 해요."
크리스찬 웨스트가드는 새로 온 선생님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풋나기에 어치처럼 수다스럽다고? 이것 참, 아빠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셨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고, 양손에는
땀이 축축이 배어 나왔다.
리니아는, 잘 익은 딸기처럼 붉어진 얼굴로 양손을 허벅지에 대고 부산스레
문질러 대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젖이 파도 위에 실린 코르크처럼
정신없이 오르내리다가 드디어 그녀의 손을 느슨하게 잡았다. 그리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당신 말씀은, 당신이 새로 오신 선생님이라는 뜻인가요?"
니사가 식탁 쪽으로 다가오면서 한마디 충고를 했다.
"네 예절을 좀 봐라, 이 젊은 친구야!"
그러자 크리스찬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리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요."
니사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내 아들 존이에요. 여기서 얼마 떨어진
집에서 살긴 하지만, 식사는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요."
그녀는 고갯짓으로 동쪽을 가리킨 후 다시 부산스럽게 난로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리니아는 테어도어와 아주 많이 닳은 얼굴, 그러나 그보다는 약간 더 나이
들어 보이고 앞머리 숱이 적은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줍음을 잘
탈 것 같은 적갈색 눈동자, 콧날이 우뚝 선 매력적인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
니사의 얄팍하고 가느다란 입매와는 전혀 닳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얼굴은 모자를 썼던 자국을
중심으로 위로는 황적색, 아래로는 황갈색의 피부가 빛나고 있었다. 겁이 많아
보이는 두 눈동자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연신 끔벅였다.
그러다가 소개가 끝나자 갑자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악수를 하기로 결정한
듯 엉거주춤한 포즈로 한 쪽 손을 내밀었다.
리니아는 두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안녕하세요, 존."
그녀가 간단한 인사말을 보냈다.
그는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의 장화에 시선을 꽃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먼 곳에서 전해져 오는 천둥소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낮게 쉬어 있었다. 그는 저녁 식사 직전에 세수를 했는지 말끔하고 산뜻해
보였으며, 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머리칼은 잘 빗겨져 있었다. 그의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는 목선까지 완전히 단추가 채워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체력이
굉장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거대한 손이
자신의 손을 덮어 오는 순간, 그녀는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리니아가 그 자리에서 인사를 건네지 않은 사람은 테어도어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향해 내쏘는 경계의 눈빛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도대체가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먼저 선수를 쳐서 공손한 태도로 그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인사드릴게요, 웨스트가드 씨"
그녀는 몸을 돌려 정면으로 그를 마주보고 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네."
그것이 그의 대답의 전부였다.
그는 파란색 면 셔츠와 검은색 멜빵 바지를 입은 채 못마땅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더욱 짜증나게 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 어머니께서 내가 앞으로 지낼 방을 보여 주셨어요. 굉장히 넓고 좋던데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는 날카로운 반격을 해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의 화제로 말머리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모두들 여기에 이렇게 서서 밤이라도 새울 생각인가요? 저녁 식사는 안
할 거예요?"
"식사는 벌써 준비되어 있다. 자, 자리에 앉으려무나."
니사는 눈처럼 횐 천을 씌운 둥근 참나무 식탁 위에 그릇을 거의 다 옮겨다
놓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가 당신 자리예요."
니사는 자기 의자와 존의 의자 사이에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도 테어도어와 자리를 조금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개심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려는 의도 같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보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가 눈에
띄게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테어도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기도합시다."
그는 팔꿈치를 음식 접시 양옆에 세우고 깍지 긴 손가락 마디를 이마에 갖다
댔다. 리니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가 이그는 대로 따랐다. 그러나 테어도어가
굵직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조리기를 시작하자, 리니아는 모아 쥔 손가락
사이로 난 구멍을 통해 놀라움이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기도하고 있는 사람 입에서 노르웨이어가 유창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깍지 긴 손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의 입술로 저절로 눈길이 쏠렸다. 순간,
놀랍게도 손가락 사이로 난 구멍을 통해 그녀를 훔쳐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붕대를 감고있는 그녀의 손 쪽으로 시선을 부랴부랴 옮겼다.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죄라도 짓다
들킨 사람처럼 후다닥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아멘을 합장한 뒤, 제일 먼저 식탁 위에 팔을
내려놓았다. 기도가 끝나자, 경주라도 하듯 여덟 개의 손이 각자 앞에 놓인
음식 그릇을 잡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네 개의
숟가락이 네 개의 접시 위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왼쪽으로 음식이 담긴 그릇을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리니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도 그릇을 나르는 일에
동참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존의 손이 분주히 움직이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존이 양쪽 손에 그릇을 들고
쩔쩔매게 되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빈손으로 앉아있는 리니아에게로 쏠렸다.
존이 옥수수가 든 그릇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그제서야
음식 그릇의 대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테어도어의 시선이 다시 붕대를 감고
있는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낮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가 니사에게 물었다.
니사는 자기 접시에 담겨 있는 감자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위층에 있는 주전자와 사발을 깨뜨렸거든, 그래서 그걸 치우다가 그만 손을
다쳤지."
그가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난처한 질문을 해오면 어쩐담!
리니아는 네 사람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다시 옥수수 그릇을 들고 있는 붕대 감은 그녀의 왼손을 쳐다보았다.
그릇을 나르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곡예는 시작이 그랬듯 예고
없이 갑자기 끝나 버렸다. 네 쌍의 손이 네 개의 그릇을 향해 일제히 움직였고,
네 개의 머리가 일제히 숙여졌다. 네 사람의 맹렬한 노르웨이인들은 거의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다. 그 동작이 지나칠 정도로 거칠었기 때문에 리니아는 식사도
잊은 채 멍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까마귀 떼 속의 백조처럼 특별나 보인다고 느꼈다. 아무렴,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본보기가 되리라.
그녀는 갈색 그레이비 소스를 얹고 올스파이스로 맛을 낸 비프스테이크를
바른 자세로 앉아 차분히 먹었다.
그들의 식사 매너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접시 돌리기도 그랬지만, 끔찍한
소리까지 내며 식사를 했다.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접시가 다 비워질 때까지 음식만 계속해서
먹어 댔다. 그리고는 다시 차례대로 음식이 담겨져 있던 그릇을 가져다 비웠다.
그들의 식사 예절이란 동굴에 사는 원시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감자 샐러드!"
테어도어는 빵조각을 그레이비 소스에 찍어 게걸스럽게 먹고 난 뒤 그 손가락을
소리나게 빨면서 존에게 소리쳤다. 리니아는 존이 테어도어에게 건네는 감자가
담긴 그릇을 혐오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크리스찬이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리쳤다.
"고기!"
그의 할머니가 고기 그릇을 식탁 건너편으로 밀었다. 리니아 외에는 아무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끌벅적하게
먹는 소리만이 더욱 요란해져갔다.
"옥수수!"
리니아는 갑자기 찾아든 정적으로 인해 접시에서 눈길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옥수수 그릇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이다.
"옥수수를 달라고 했어요."
크리스찬이 다시 말했다.
"오, 옥수수!"
그녀는 옥수수가 담긴 그릇을 집어들어 그가 앉아 있는 쪽 식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오, 하느님, 이 사람들은 늘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하나요?
하지만 그들이 말 한마디 없이 식사에 열중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시간을 벌은 셈이었다.
계단 모양의 안경을 낀 니사 역시 잿빛 여우같이 생긴 머리를 접시에 처박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예절교육에는 실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두 아들을 교육시킨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여하튼, 테어도어 대신 그녀가 리니아를 달갑게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리니아는 지금쯤 저녁 식탁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점만큼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존, 그녀는 존의 옆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그를 귀머거리로 착각할 뻔했다.
그는 빨간 체크무늬 소매를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넓은 어깨를 힘에
겨운 듯 앞쪽으로 구부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악수하기를 주저하다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얼굴을 붉히던 그의 예의바른 모습을 기억 속에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절대로 존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크리스찬, 그녀는 식사 시간 내내 그가 보내오는 수상쩍은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덩치도 아주 크고 키도 아주 컸다. 키도 그녀보다 머리 반만큼은
더 크고 어깨도 쟁기질하는 말처럼 떡 벌어진 그가 그녀를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니사는 그를 '테어도어의 아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나 존보다 오히려 더 어른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리고 새로
온 선생님에게 홀딱 반해 있음이 확연했다.
테어도어, 무엇이 그를 저토록 심술궂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만들었을까? 리니아가 그에게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그와 함께 살게 될지는 몰라도, 그 동안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에게 대항해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부드러운 구석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 그녀는 테어도어의 그런 면을,
그의 영혼의 아름다운 구석을 찾아내 보겠다고 다짐했다.
테어도어에게서 그런 면을 발견하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노력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뜻밖에도, 그녀의 시선에 잡힌 테어도어의 모습이 전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해맑았고, 얼굴에는 잔주름살 하나 없었다. 다만,
미간 사이에 희미한 주름이 잡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서
총명함을 읽을 수 있었다. 동시에 호전적인 성격과 그를 억누르고 있는 자제심을
발견했다. 그의 머리칼은 갈색 곱슬머리였다.
콧날이 오똑하고 매력적인 얼굴이 햇볕에 갈색으로 그을어 더욱 돋보였다.
존과 달리, 그는 칼라의 단추를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셔츠 안으로 보이는
목덜미가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가 고집스럽게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그의 양팔을 향해 던지고 있던 시선을 슬며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존의 팔뚝과 달리 그의 팔뚝은 근육이 튀어나올 듯 불거져
있었고, 손목은 가늘었지만 힘이 느껴졌다. 그의 나이는 40 정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30대 중반? 아마도 그 정도일 것이다. 크리스찬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그 정도는 되었어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30대 중반은 굉장히
많은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식사를 하고 있는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아직도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당황스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다가 줄곧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크리스찬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향해 짧은 미소를 보내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그럼, 이제 곧 내가 가르칠 학생들 중 한 명이 되겠구나, 크리스찬."
오랜 침묵이 끝나는 그 순간, 식탁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식사를
중단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 막 돋아나오는 송곳니라도 보듯이.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들이 왜 그런 시선을 던지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내 이야기가 틀렸나요?"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크리스찬이 대답했다.
"아뇨. 저, 그러니까 내 말은……. 선생님 말씀이 틀리지 않다는 뜻이에요.
네, 그래요. 제 선생님이 될 거예요."
리니아가 아직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그들은 다시 자기 앞에
놓인 접시로 관심을 돌려 식사에 몰입했다.
"크리스찬, 몇 학년이 되는 거지?"
그녀의 질문에 그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모든 동작을 중지했다. 크리스찬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계면쩍은 듯 대답했다.
"8학년요."
"8학년?"
그는 최소한 열여섯 살은 되었음이 분명했다.
"학교를 쉰 적은 없니? 내 말뜻은 혹시 앓아 누웠던 적이라도 있느냐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서서히 두 뺨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뇨. 모든 학년도 쉬지 않았어요."
"어느 학년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나는 어느 학년도 쉬지 않았어요."
그녀가 틀린 문장을 고쳐 주었다.
그는 잠깐 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오, 맞아요. 제가 틀렸어요."
그녀는 그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그들이
왜 그리 모두 놀란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대화를
나누면서 예절 바른 식사를 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가
꺼낸 화제를 친절하게 이어받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은 다시금
입을 다물고 위장을 채우는 일에 매달렸다. 또다시 음식을 게걸스럽게 씹어
삼키는 소리만이 부엌 안을 가득 메웠다.
테어도어는 자신의 접시를 말끔히 비운 후에야 뒤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후식은 뭐예요, 어머니?"
니사가 브레드 푸딩을 가지고 왔다. 리니아는 그들이 자기 몫의 후식을 먹어치우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며 기절 초풍할 지경이 되었다. 줄곧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던 그녀는, 돌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먹는다는 일이
아주 엄숙한 행위라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한가로운 잡담으로 신성불가침의
게걸스런 식사를 모독하지 않는다는 계율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식사중에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아 본 적이 없었다. 식사가 모두 끝나자,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내뿜어
대는 트림의 합창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커피를 마셔 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니사 조차도!
리니아는 그들의 식사 예절에 기가 질려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에게서
따로 떨어져 혼자 있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일었다. 여물통에 모인 돼지들
같은 그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신성한 의식이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테어도어는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서 리니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학교를 보고 싶다면, 내일 구경할 수 있을거요."
그러나 그녀가 정작 보고 싶은 것은, 학교가 아니라 자신을 파르고로 다시
데려다 줄 기차의 좌석표였다. 그녀는 환멸감을 숨긴 채 상당히 감격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러죠. 나도 앞으로 가르칠 교재와 보조 자료들로 어떤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지 보고 싶거든요."
"우리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소젖을 짜고 곧바로 아침 식사를 합니다. 식사가
끝나는 대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시오. 당신을 거기 데려다 주고 아침
나절에 들판으로 나가봐야 하니까."
"난 걷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학교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구요."
그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나는 새로 오는 남자 선생님에게 학교를 구경시켜 주고 의무 규정들을 알려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소."
그녀는 괘씸한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자라뇨?"
그녀가 핵심을 찌르며 되물었다.
"오라……."
테어도어는 균형 잡히지 않은 그녀의 머리 모양을 거만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잊고 있었소."
"지금 그 말은 내가 여기 있어도 된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아직도 오스카
쿤스턴의 집에 나를 던져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이빨로 윗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오스카는 당신을 위해 내줄 방이 없지 않소."
"그는 당신을 위해 내줄 방이 없소."
그녀는 그가 완전히 승리의 깃발을 들기 직전에 그를 진압할 수 있는 무기를
꺼내 놓은 셈이었다.
그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문장 구사가 잘못되었음을 충분히 인식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모욕적인 말로 그의 자존심을 더욱 구겨 놓았다.
"부정어를 두 번 연속 사용한 거예요. 따라서 오스카는 당신을 위해 내줄
방이 없지 않소는 틀린 문장이에요."
그는 새빨갛게 변한 얼굴로 두 다리를 뻗어 마룻바닥을 문질러 대더니, 이윽고
길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가리켰다.
"물론 그가 이런 지옥 같은 일을 원할 리 없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당신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는 거구. 하지만 아가씨, 지금이라도 내 집에서 나가 주시오.
알아듣겠소?"
"테어도어!"
그의 어머니가 고함을 질렀을 때, 그는 이미 문 밖으로 나가 버리고 없었다.
그가 사라진 뒤, 식탁에는 점점 더 무거운 침묵이 잠들기 시작했고, 분함을
이기지 못한 리니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저 녀석은 예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녀석이야!"
니사가 미안한 듯 고함을 질렀다.
"죄, 죄송해요. 내가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건 내 잘못이에요."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니사는 화가 난 몸짓으로 접시를 치우기 위해 일어나면서 선언했다.
"테디의 속에 언짢은 게 들어 있어서 그래요. 그때부터……."
그녀는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서, 식탁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크리스찬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어휴, 이젠 저 녀석의 성격을 바로잡기는 틀려 버린 것 같아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가 버렸다.
리니아는 존이 자신을 달래려고 취한 행동 때문에 깜짝 놀랐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굵직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에, 테디가 한 말은 별 뜻 없이 그냥 내뱉은 거예요, 선생님.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녀는 다정스럽고도 수줍은 눈길로 존을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는 모습 속에서 동생을 위한 공식 대변인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다음번에 그와 결투하게 될 때, 잊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존."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에 머물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즉각 자신의 손을 내리고 크리스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일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니, 크리스찬? 네 아버지와는 함께
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는 금방 대답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 없이 곧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곤란한 표정으로 삼촌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나 삼촌에게서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침을 꿀꺽 삼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뺨에는 아직도 발그스레한 빛이 돌고 있었다.
"네, 선생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다, 크리스찬. 내일 아침 식사 후 곧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할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를 들고 일어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 발짝도 떼기 전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언제 들어왔는지 니사가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밤 시간은 당신을 위해 쓰도록 하세요. 틀린 시험지를 고치는 일 같은 걸
할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하지만 난 아직 고칠 시험지가 없는걸요."
"올라가세요!."
니사가 파리를 쫓듯 손을 훼훼 내저었다.
"1층에서 사라져 버리시라구요.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요. 내가 항상 해오던
일이에요."
리니아는 들릴락 말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니사는 리니아가 빈 컵과 소스가 묻은 접시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안경 너머로
계속해서 그녀의 모습을 좇았다.
"당신이 시험지 채점 같은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리니아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할게요. 그리고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집에 편지를 쓰기로 약속했거든요.
무사히 잘 도착했다고 알려드려야겠어요."
"좋아요! 좋아요! 올라가서 편지나 쓰세요."
그녀는 호롱불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다시 자신의 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전히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니사가 주전자와 사발 대신 가져다 놓은 푸른색
세숫대야가 보였다. 그 순간, 리니아는 이 방과 이 집 식구들에 대한 실망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까지도 모두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일시적인 기분에 빠져 실수를 범하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지 30분도 안 되어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생각나자
그녀는 다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녀는 첫 월급으로 받는 30달러를 주전자와 사발 값을 변상하는 데 써야만
한다. 게다가 그 일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매사에
적개심을 나타내는 테어도어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 남자는 정말로 야비한 인간이야!
그 남자에 대해 잊어버리자. 모두들 네게 그렇게 말했었잖니. 어른이 되어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거라구. 그들의 좋은점만 보려고 노력하는 거야!
그녀는 마음속에서 테어도어를 몰아내고, 편지지가 들어있는 나무 상자를
가지고 침대 위에 앉았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 캐리 그리고 땅딸아.
알라모에 무사히 잘 도착했어요. 이곳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작은
도시예요. 알아요, 아빠. 아빠도 그걸 걱정 하셨잖아요. 하지만 저도 이 정도라고는
생각 못했었어요.
역에서 웨스트가드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절 자기 농장까지 데리고
와주었구요. 그의 농장이 제 하숙집인 셈이거든요. 여기 농장들은 한결같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어요. 웨스트가드 씨는 이곳에서 그의 어머니인
니사(누구나 보자마자 호감을 느낄 만한 사람이에요. 다리가 짧고 약간 휘었는데,
성미는 불 같아요)와 아들인 크리스찬(나중에 내가 가르치게 될 8학년 학생
중 한 명이에요. 그런데 키가 나보다 훨씬 크고 몸집도 좋아요), 그리고 그의
형인 존(식사 때만 오고 나머지 시간은 근처에 있는 자기 집에서 지내요)과
함께 살고 있어요.
이곳에 도착해 처음으로 먹은 저녁 식사는 그레이비 소스를 얹은 스테이크와
감자, 옥수수,버터를 바른 빵, 그리고 브레드 푸딩이었어요. 지금까지 먹어
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나서
설거지를 도우려고 하자, 니사가 절 손 하나 까닥 못하게 하는 거예요. 캐리야,
퍼지야, 내가 더 이상 설거지를 하지 않게 된 게 무척이나 부럽지?
지금 전 제 방에 와 있어요. 불 끄고 그만 자라며 독서를 방해할 사람도
없다구요. 상상해 보세요. 난생 처음 저만의 방을 갖게 된 거예요.
거기까지 써 내려간 그녀는 자신의 방을 다시 한 번 휙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 훤히 드러나 있는 서까래들, 코딱지만한 창문, 파란색 세숫대야 옆에
놓인 서랍장……. 그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이곳에 대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
환상적인 꿈에 젖어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환상을
무참히 깨어 버린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집에는 여자를 들여놓을 수 없소!"라고.
그녀는 테어도어와의 적대적인 관계나 갑자기 무너져 내릴 듯 느껴지는 삶의
고단함 등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릴 만한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추려 내고
편지를 완성했다. 갑자기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녀는 상자 위에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흐느꼈다.
엄마 아빠, 정말 보고 싶어요. 밝고 명랑한 웃음을 잃지 않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캐리와 퍼지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설거지를 하던
때가 그리웠다. 예쁜 꽃무늬 벽지에 둘러싸인 침실에서 세 자매가 함께 지내던
때가 그리웠다. 불을 끄지 않는다고 싫은 소리를 해대던 불만 가득한 목소리도.
이렇게 황량한 대평원 한가운데 서 난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화 잘 내고
무뚝뚝한, 그리고 예절이라고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이 낯선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되나요?
아빠가 내게 정말 독립을 원하는지 알 수 있을 때까지 1년 정도 집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 보라고 말씀하셨을 때 잘 새겨들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모든
걱정거리들을 부모님께 바로바로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난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가슴에 묻은 채 작은 침대에 처량하게 엎드려 눈물을 삼키고 있어요.
그러나 그녀는 가족을 너무도 사랑했다. 위안을 받기 위해 그들에게 자신의
힘겨운 짐을 덜어 줄 수는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잉크로 쓴 편지지에 눈물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