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내 안에 가득한 사랑 - 상>
press : <영언문화사>
year : <2000>
author : <라빌 스펜서>
<1>
1917년
리니아 브란덴베르그는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기찻간 바닥이
덜그덕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야릇한 환상 속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두 발을 단정히 모으고 앉아, 난생 처음으로 신어보는 아름다운 구두에
연신 감탄 어린 눈길을 보냈다. 그 구두는 발목과 발등 부분에 부드러운 새끼
염소 가죽을 대고 앞부리 부분에 에나멜 가죽으로 포인트를 주었는데, 그 부분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단추나 지퍼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데도 긴 가죽 속으로 정강이부터 발목까지 미끄러지듯 들어가 확
긴 상태로 고정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이 구두가 난생 처음 신어
보는 굽 높은 신발이었다. 구두 굽 덕분에 키는 고작 1인치 가량 더 커 보이는
정도였지만,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깜찍하게 생긴 마차를 몰고 마중
나와 있을 그 남자를 상상했다. 물론 그는 그녀를 이 마을 학교의 선생으로
고용한 사람이다.
"브란덴베르그 양?"
그의 굵직한 목소리에는 교양이 담겨 있다. 비버 털로 만든 모자 아래로
얼핏 보이는 황금빛 머리칼이 눈부시다. 홀릴 듯한 미소는 그의 잘생긴 얼굴로
인해 차라리 제값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댈 씨?"
"드디어 이곳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글세,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그 가방을 들어 드려도 될까요?"
그가 마차의 짐칸에 그녀의 가방을 싣는 동안, 그녀는 정장용 코트를 입은
그의 멋진 어깨를 주의깊게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마차에 오르도록
도와주기 위해 앞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녀는 그가 입고 있는 셔츠의 칼라가
요즘 한창 유행하는 셀룰로이드 칼라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조심하십시오."
그녀는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도록 권하는 그의 길고 파리한 손가락에 매료된다.
갈대처럼 가늘고 얇은 채찍으로 후려치자 말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고,
그 사이 두 사람의 팔꿈치가 가볍게 부딪친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당신이 앉은 왼쪽으로 오페라 극장이 보일 겁니다.
이곳에서 가장 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이지요. 첫 번째 공연 때 당신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오페라 극장이라구요!"
그녀는 우아하게 손가락을 가슴에 가져다 대면서 숙녀다운 놀라움을 표시한다.
"어째서 이곳에 오페라 극장이 있으리라는 걸 상상도 못했을까?"
"당신의 미모는 여배우들을 부끄럽게 만들 겁니다."
그는 태양도 무색해질 만큼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통 좁은 부츠와
새로 사 입은 모직 숙녀복, 그리고 챙이 달리지 않은 모자를 꼼꼼히 살펴본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무례하다고 생각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옷을
고르는 데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 나신 것 같습니다,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브란덴베르그 선생님?"
환상에 잠긴 그녀를 깨우는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당신이 내릴 노스 다코타 알라모입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웃고 있는 연장자를 향해 미소로 대답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바깥쪽으로는 끝도 없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창 밖을 눈여겨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시가지가 시작된다는 표시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기차는 휙하는 경적소리와 함께 이제 완전히 속도를 잃고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기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에게는 조금 전 상상했던 모든 것이 현실로 펼쳐질 것이다.
그녀는 오직 지도 위에 적힌 글자로만 보았던 알라모라는 도시를 이제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그 마을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녀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학생들로, 친구들로, 그리고 어쩌면 아주 친한 이웃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녀가 만나게 될 새로운 얼굴들은 결국 모두 낯선 사람들이다.
그녀는 수천 번도 넘게 알라모에 잘 아는 사람이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러나 걱정할 건 하나도 없다. 단지 낯설고 생소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에
느끼게 되는 신경 과민 증상에 불과하니까.
그녀는 손을 목 뒤로 올려 익숙치 않은 머리 모양을 매만져보았다. 머리를
초승달 모양으로 꽈리를 틀어 올렸는데, 모양을 바로잡기 위해 머릿속에 찔러
넣은 머리핀이 흘러내린 것 같았다. 그녀는 어설픈 손가락 놀림으로 몇 개의
머리핀들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난 뒤, 모자가 제대로 씌워져 있는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치마 주름을 바로 펴고 마지막으로 구두를 살펴봄으로써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그때 마침 기차는 마지막 괴로운 숨을 거두듯 몸체를 부르르 떨며
완전한 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그녀는 옷가방을 끌어내리며 창문을 통해 바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전부라곤 작은 읍내에나 있을 법한 초라한 역의
모습뿐이었다. 네 개의 정방형 기둥으로 떠받친 지붕, 순무색을 칠한 여섯
쌍의 나무틀 창문이 기본 골격을 이룬 역사(驛舍)만이 철로를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역사를 나섰다. 어디에도 자신을
마중나온 승객용 마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먼지를 내며 달려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다시 한 번 두리번거렸지만, 길은 7월의 밝은 햇살을 받으며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혹시 교장 선생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한 남자가 역사의 그늘진 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이상스레 마음의 긴장이 모두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 새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 분명 아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가르칠 어떤 학생의 부모로 밝혀질
것이다. 그녀는 그를 향해 잠깐 동안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줄무늬
작업복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땀에 절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 가득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녀는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새장
같은 창문을 등지고 앉아 표를 파는 사람 이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아저씨."
그는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죠?"
"저, 여기서 프레더릭 댈 씨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혹시 그분을 아시나요?"
"물론 알고 말고요. 여기서 그분을 만나기로 하셨나 보죠? 잠깐 앉아서 계세요.
곧 나타나시겠지요."
그녀는 숨을 들이쉬면서 긴장을 억눌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앉아서 기다리자니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아 그녀는 밖에 나가 서성이며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아까 본 농부가 서 있는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 낯선 남자를 흘끗 쳐다보고는, 어색한 시선을 다시 기차 쪽으로
돌렸다. 기차는 칙칙 소리를 내며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테어도어 웨스트가드는 새로 오기로 되어 있는 선생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역사의 출입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정확히 3분이 지났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이라곤 단 한 사람, 엄마모자를 몰래 쓰고 나온 듯한 비쩍 마른 소녀뿐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그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마침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길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다급히 주의를 역사 출입구 쪽으로
돌렸다.
'브란덴베르그 씨, 빨리 나타나시오. 난 일을 하러 가야 한단 말입니다.'
작업복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그는 조바심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또다시 그의 동작들을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팔짱을 끼며 시선을
길로 옮기려는 찰라, 또다시 그의 눈길과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은연중에 그 소녀를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짐작컨대 나이는 열여섯 살 안팎인 것 같고, 표정을 보니 자기 그림자에도
놀라 겁을 먹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모자에는 새 날개처럼 생긴 장식이
달려 있었는데, 귀여워 보이기는커녕 우스워 보인다고 하는 게 나을 성싶었다.
다음 순간, 웨스트가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 기차에서 더 내린 사람이
없는데, 역무원이 이동식 계단을 접어 올리고는 기관사 쪽을 향해 팔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철도커플링이 열차 아래서 쨍하는 소리를 내자 숨죽이고
있던 철근 덩어리가 다시 서서히 신음소리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덜컹거리며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기차가 떠나고 난 뒤, 리니아의
콧잔등 위로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날아와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손을 휙휙 내저어 파리를 쫓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그는 바쁠
때 시내까지 나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하는 것에 대해 점점
더 화가 치 밀어 올랐다. 그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북북 긁어댄 뒤, 낮은 목소리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챙이 눈을 가릴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 썼다.
'도시 녀석! 밀 농사 짓는 농부에게 해마다 이맘때쯤 해가 있을 때가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지 모르는구만.'
화가 난 그는 역사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클레븐, 그 젊은 자식이 다음 기차로 오지든 그놈한테 말하라구. 아휴,
젠장! 그냥 가 버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내가 좀더 기다리는 수밖에."
알라모에는 얻어 쓸 만한 마구간도, 빌려 탈 만한 말도 없었다. 그가 이
자리를 떠나 버리고 나면, 새로 올 선생은 농장까지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잃게 되는 것이다.
테어도어는 다시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오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그 소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도 두 손으로
코트를 움켜 잡고 있었다. 무어라 말문을 열 듯 입을 움직였으나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돌아서 버렸다.
그는 그 낯선 소녀에게 말을 한마디도 건네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그녀의 놀란 토끼 같은 두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소?"
그녀는 거의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다시 돌아섰다.
"네. 하지만 아직 기다리는 중이에요."
"음, 나와 처지가 같군. 난 엘 아이 브란덴베르그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중인데……."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며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바로 그 브란덴베르그예요."
"당신이!"
그녀의 미소는 곧 그의 우거지상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신일 리가 없어. 엘 아이 브란덴베르그는 남자란 말이오!"
"남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난 남자가 아니란 뜻이에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웃고 난 뒤, 숙녀가 갖추어야 할 예절에 대해 기억을
떠올린 듯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리니아 이레인 브란덴베르그예요. 그리고 당신이 보고 계시다시피
난 분명히 여자입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모자와 머리칼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경멸하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내민 손으로 고집스럽게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그리고 내가 묵게 될 집이 어딘지 알고 싶어요. 웨스트가드 씨 댁이라고……."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거칠게 대답했다.
"웨스트가드가 바로 나요! 그렇지만 내 집에는 여자라고는 아무도 살지 않소.
우리 교육위원회에서는 엘 아이 브란덴베르그가 남자일 거라는 생각으로 그를
고용했던 거요."
바로 이 사람이 테어도어 웨스트가드였다. 그녀가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게
될 하숙집 주인. 그녀는 맥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면서 내민 손을 내려뜨렸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
"당신들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다니 죄송하군요, 웨스트카드 씨 하지만 일부러
속이려던 건 절대 아니었어요."
"흥! 엘 아이라고 머릿글자를 쓰는 여자가 다 있다니!"
"여자는 서명을 할 때 머릿글자를 쓰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그녀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오. 그렇지만 대개는……. 어쨌든, 당신은 조그만 마을의 교육위원회가
남자 선생을 고용하고 싶어하리라는 추측을 하고, 일부러 속였을지도……."
"난 그런 일 따위는 한 적이 없어요! 내 서명은 언제나……."
그러나 그가 그녀의 말문을 거칠게 막아 버렸다.
"여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교실에서 한가하게 칠판에 분필을 긁적 대는
도회지와는 판이하게 다르단 말이오. 선생! 여긴 학교까지 1마일이나 걸어서
출퇴근을 해야 하고, 겨울엔 직접 불을 지피고 눈을 삽으로 치워야 하오. 당신이
이곳의 겨울 날씨가 얼마나 매서운지 알기나 한단 말이오! 난 당신처럼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소. 영하37도가 넘는 추위와 으르렁거리며
불어 대는 눈바람만 해도 괴로운데, 학교 안에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를 키울
생각 따윈 없소."
"난 당신에게 그런 걸 부탁한 적 없어요!"
그녀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프레더릭 댈
교장 선생은 그녀를 마중하라고 어떻게 이런 수다스런 남자를 내보냈단 말인가!
"그리고 난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가 아니에요!"
"오, 아니시라구요?"
그는 알라스카 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혹독한 날씨 속에서 그녀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실망스런 어조로 말했다.
"우리 집에는 여자를 들여놓을 수 없소."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하숙을 하도록 하지요."
"누가 하숙을 친다는지 아시오?"
"잘……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댈 씨에게 물어 보면 될 거예요."
그는 잔뜩 언짢은 표정으로 "흠" 하고 경멸 섞인 콧소리를 냈다. 순간, 그녀는
그의 코를 나무 막대기로 쿡 쑤셔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쉽지 않을 거요. 지금까지 선생님의 숙식은 항상 우리 집에서 책임져 왔소."
"웨스트가드 씨, 그래서 나를 어쩌겠다는 거죠? 이곳에 이렇게 세워 놓은
채 떠나실 건가요?"
그의 입술은 말라빠진 딸기처럼 오그라들었고, 밀짚모자의 넓은 챙 아래로
뚫어질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찌푸린 눈에는 언짢은 표정이 역력했다.
"난 우리 집에 여자를 머물게 할 순 없소."
그는 고집스레 팔짱을 낀 채 선언하듯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말했다.
"정 안 된다면…… 당신 집이 안 된다면, 당신보다 덜 고집불통인 누군가의
집에서 살게 해주세요. 나도 그편이 훨씬 행복할 테니까요. 그리고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당신을 상대로 소송을 걸겠어요."
이런 마중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녀는 소송 준비를 어떻게 시작하는지조차
몰랐지만,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황소를 설득하려면 무슨 수든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송이라구!"
웨스트가드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는 고집불통이라는 단어도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조그만 풋나기가 내뱉는 협박에 약간은 겁이 나기도 했다.
리니아는 어깨에 힘을 주면서 그가 자신을 세상 물정에 밝은 뱃심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노력했다.
"난 계약서를 갖고 있어요, 웨스트가드 씨. 거기에는 내 연봉 가운데 방과
식사의 제공이 포함된다는 항목이 적혀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파르고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계신다구요. 따라서 내가 받게 될 대우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서면 계약 위반으로 알라모 교육위원회를 고소할 거예요. 당신 이름으로……."
"좋아요, 좋다구요!"
그는 크고 거칠거칠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그만 재잘거려도 돼요, 아가씨. 오스카 쿤스턴이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을 허락만 한다면, 그 사람 집에 당신을 내려 드리지요. 그 사람은 이 지역의
교육위원회 회장이니까, 그에게 이 일거리를 주면 되겠군."
"내 이름은 브란덴베르그예요. 아가씨가 아니란 말예요!"
그녀는 치마를 탁탁 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투덜대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마차와 말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현실은 낮 동안 그녀가 상상했던 낭만적 꿈을 완전히 비웃고 있었다. 깜찍하고
멋들어지게 꾸민 마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혈통이 의심 가는 말라빠진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농장용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룩한 주머니들을 양쪽으로
주렁주렁 매단 채 그는 그녀를 마차에 오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자기만 먼저
마차 위로 기어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치마를 걷어올린 다음,
어깨 높이나 되는 자리를 향해 손에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움켜 잡고 올라가야만
했다.
비버 털로 만든 모자를 쓴 신사는 어땠는가. 하! 이 무례한 시골뜨기가 한
행동을 그가 안다면 당장 마차 위로 뛰어올라와 햇빛에 시뻘겋게 그을은 저
주먹만한 코를 냅다 후려 갈겨줄 텐데……. 신경질 많은 저 남자는 그녀 다루기를
마치…… 마치……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겐 파르고 사범학교에서
수여한 교사자격증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정도로 미련하게
사는 동안 높은 교육을 받은 여자였다.
리니아는 그가 고삐를 가볍게 내리치며 '이럇' 하고 명령을 내리는 동안,
차츰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몰골이 말이 아닌 말들은 그녀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칙칙한 빙산들 사이로 그들을 이끌고 가고 있었다.
'오페라 극장이라구?'
정말 이곳에 오페라 극장이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더란 말인가? 이곳에서
가장 최신식 건물이라고는 가게와 우체국을 겸해 있는 건물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건물이라면, 철도 옆에 있는 큰 곡물 창고였다.
그 옆에는 허술하게 지은 작은 칸막이 건물이 몇 개 있었는데, 용구점과 술집,
약국과 이발소가 차례로 들어서 있었다.
그녀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웨스트가드는 폴란드 소시지만큼 큰 손가락으로 채찍을 잡은 채 앞만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살결은 늙은 인디언의 그것과 흡사했다. 늘 보아 오던
길고 파리한 손가락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 또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단단해 보이는 갈색 손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굽 높은 구두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그가 앞으로 몸을 바싹 구부린 채, 모자 아래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뽀족한 지팡이처럼 앉아, 새 날개를 단 우스꽝스런 모자
아래서 속물스런 두 눈을 번쩍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 가면서 변덕스런 괴짜로 변해 가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젊었을 때 기를 쓰고 한다는 게 고작 자신을
좀더 늙어 보이게 하려는 것이라니,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두 사람은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서쪽으로 몇 마일을 달린 다음,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누런색의 밀밭들, 그것이 전부였다. 타작하는 사람이 간혹
가다 보였다는 걸 제외한다면, 아직도 누런색의 평야가 계속 펼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렸을 때였다. 웨스트가드는 지금껏 지나오면서
본 풍경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농가의 마당으로 마차를 몰았다. 비바람을
막는 물막이 판자를 댄 집 건물과 서쪽에 방풍림으로 심어 놓은 목화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 나무는 윗부분이 약간 남서쪽을 향해 휘어져 있었는데, 집보다는
오히려 축사 쪽으로 부는 바람을 막는다고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육각형
모양의 곡물 저장 창고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모든 풍경 중에 가장 친근감
있게 보이는 건 역시 살랑거리는 바람에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풍차였다.
머리칼을 가닥지게 벗어 뒤통수에 얹은 트레머리 스타일의 한 여자가 문가에
나타났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반가움의 미소를 띠었다.
"테어도어!"
그녀는 성급하게 나무 계단을 내려온 뒤, 황금빛으로 물든 잔디밭을 건너오고
있었다.
"야아, 네가 데리고 온 사람은 누구니? 난 네가 새로 올 학교 선생님을 모시러
시내에 나갔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 남자예요, 힐다. 굽 높은 구두와 새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그 남자라구요."
리니아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감히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 비아냥거리다니!
힐다는 마차 옆으로 와서 멈춰 선 뒤, 눈살을 찌푸린 채 웨스트가드와 리니아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그 남자라구?"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려 이마에 그늘을 만든 뒤, 다시 한번 리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그녀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마치 그의 장난기를
꾸짖기라도 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라, 테어도어, 네가 지금 농담을 하는구나, 그렇지?"
웨스트가드는 옆에 앉은 승객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아녜요, 우리에게 농담을 한 사람은 바로 이 여자라구요. 이 여자가 바로
엘 아이 브란덴베르그래요."
리니아는 힐다 쿤스턴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뻗었다.
또다시 무례한 웨스트가드로 인해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아내며 힐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전 리니아 이레인 브란덴베르그라고 합니다."
그 여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여자로군요."
그녀는 외경심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카가 우리를 위해 여자 선생님을 고용했군요."
그녀 옆에 서 있던 웨스트가드가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생각에는 오스카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엄마 옷을 입고 성인인 척하는
여자애를 고용했으니 말예요. 어쨌든 저 사람은 우리 집에서 지내지 않을 거예요."
힐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왜 그러니, 테어도어? 언제나 네가 선생님들을 보살펴 드렸었잖니?"
"그랬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에요. 그 일 때문에 오스카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집에 있나요?"
웨스트가드의 눈동자가 집 쪽으로 향했다.
"나도 그애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구나. 오늘 아침에 서쪽 호밀
밭부터 추수를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왔던 길을 따라 나가다 보면 아마
그애가 보일 거다."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브란덴베르그 선생님은 여기에 내려놓고 가겠어요.
우리 집에 데려갈 수는 없어요. 머무를 만한 곳을 찾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여기 있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요."
"여기에!"
힐다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가슴께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빈방이 없단다. 너도 알고 있잖니. 선생님을 애들 방에서
함께 지내도록 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야. 테어도어, 선생님을 네 집으로 모시고
가거라."
"싫어요, 힐다. 우리 집에서는 여자를 살게 할 수 없단 말예요."
리니아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들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고 있으니, 마치
자기가 아무도 내다 버리기 싫어하는 요강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둬요!"
그녀는 경찰관 앞에 선 사람처럼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소리를 질렀다.
"날 시내로 다시 데려다 주세요. 이곳에서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다음 기차로 되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진 않소!"
"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보렴, 테어도어, 넌 새로 오신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어."
"내가요? 이 사람을 고용한 건 오스카란 말예요. 우리에게 이 여자를 남자라고
말한 건 오스카라구요!"
"그럼, 오스카에게 가서 얘기해 보렴."
그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의 태도가 예의에 어긋난다고 느꼈는지 리니아에게로 손을 뻗쳐 손가락을
가볍게 톡톡 쳤다.
"테어도어의 말에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그가 곧 당신이 지낼 곳을 찾아낼
거예요. 그러다가 밀이 다 익어 바닥에 드러눕는다 하더라도 시간을 허비했다고
누굴 원망하진 못하겠죠. 자, 테어도어,"
그녀는 집 쪽으로 돌아서면서 명령했다.
"이 숙녀분을 잘 대해 드려라."
그리고 그녀는 종종걸음을 치며 집 안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웨스트가드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옆에
놓인 달갑지 않은 수탁물을 데리고 오스카를 찾으러 나서는 일뿐이었다.
대부분의 농장들과 마찬가지로 쿤스턴의 농장도 엄청나게 규모가 컸다. 자갈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그들은 오스카의 호밀밭, 귀리밭, 그리고 밀밭이 펼쳐진 지평선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오스카는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의 농장사람들이나
호밀을 베는 사람들조차 찾을 수 없었다.
웨스트가드는 눈살을 찌푸린 채 황금 물결 치는 밭을 지평선까지 죽 훑어보면서
꼿꼿이 앉아 있었다. 그는 대지 위로 돌풍이 일기 시작하는 조짐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움직이라곤 곡식들의 출렁임과 귀리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어딘가를 찾아 머리 위로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까마귀메가 전부였다.
마차는 추수가 끝난 들판 쪽으로 다가갔다. 수확물들이 묵직하게 엮인 채
끝이 안보일 정도로 멀리까지 드러누워 있었다. 곡식들은 햇빛에 건조되며
특유의 향내를 발산하고 있었다. 웨스트가드는 고삐를 살짝 당겨 말을 자갈길에서
이탈시켰다. 그리고 한 쪽은 추수가 끝나고 한 쪽은 아직 곡식들이 하늘을
향한 채 풍성하게 자라 있는, 잡초 무성한 길로 말을 몰고 갔다. 길은 울퉁불퉁했지만,
들로 향하는 지름길인 듯했다.
갑자기 마차가 요동을 치자 리니아는 횃대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모자를 좌 움켜 쥐었다.
조용히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는 웨스트가드의 입가에 잠시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모자를 고정시켜 놓은 핀을 다시 꽂느라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려 핀을 물었다.
그들은 바위투성이의 울퉁불퉁한 길에서 벗어나 약간 경사진 평지로 올라섰다.
드디어 오스카 쿤스턴이 있는 곳을 찾아냈던 것이다. 웨스트가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워워."
말들이 제자리에 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오스카 쿤스턴이 추수한 호밀들만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 정작 호밀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웨스트가드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모자를 벗어 머리를
긁으며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썼다.
그 순간, 리니아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저렇게 거친 행동이야말로 그에게 딱 어울리는 거야! 그는 이미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데 동의했으니, 이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그의 집에서 먹고
자게 할 수밖에.'
"내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일단은 우리 집에 있어요."
웨스트가드는 내키지 않는 듯 한마디 내뱉고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다시 방향을
돌렸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앞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우스꽝스런 모자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테어도어는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다시 출발했다. 어디를 가나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리는
곡식들의 물결뿐이었다.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고 있던 줄기들은 잠시 동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가 금방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아래로 떨구곤
했다.
리니아와 테어도어는 딱 세 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차를 몬 지 거의 한 시간이 되었을 때 리니아가 물었다.
"당신이 사는 곳에서 알라모까지는 얼마나 먼가요, 웨스트가드 씨?"
"12마일 정도 떨어져 있소."
그가 대답했다.
다시 새들, 곡식들, 그리고 말발굽 소리뿐이었다. 마침내 말이 끄는 탈곡기가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는 모습이 아주 조그맣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오른쪽으로 종탑이 있는 작은 횐색 건물을 발견하자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의 진지한 눈동자는 가능한 한 모든 세부적인 구조물들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길고 좁은 창문, 콘크리트로 만든 계단,
가장자리에 목화나무를 심어 작은 숲을 이룬 평평한 운동장, 펌프 등등. 그러나
웨스트가드는 탈곡기가 움직여 가는 모습만 계속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 좌석을 움켜 잡고 너무나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가는
그 건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고개를 빼고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얼굴을
홱 돌려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건물이 학교 건물 아닌가요?"
달리는 말 잔등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성질머리라곤! 돼지 머리통처럼 고약한 인간 같으니!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내게 먼저 알려줬어야죠."
그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심술궂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난 당신의 여행 안내자가 아니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고 감정을
추스렀다.
그들은 경사진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왼쪽에 있는 한 농가를 지나치게 되었다.
"여기가 내 형인 존이 사는 집이오."
"멋진데요."
그려는 빈정대듯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버렸다.
드디어 웨스트가드의 농장으로 꺾어지는 길고 좁다란 모퉁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건물이 있는 곳에서 마차로 10분 거리였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북쪽에는 방풍림이 길게 늘어서 있고, 계속 이어진
골담초 수풀이 그와 평행을 이루며 녹색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방풍림을
벗어날 때쯤 되어서야 눈앞에 농가가 나타났다.
집은 둥글게 돌아난 마찻길의 왼쪽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축사와 곡물 저장 창고, 풍차 등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내에서 오는 길에 내내 보아 왔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그 집도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었는데, 장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구조였다. 처음에는 횐색으로 페인트 칠을 한 듯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잿빛 사이로 여기저기 얼룩처럼 남은 희끗희끗한 부분만이
흰색 페인트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 집은 현관도 없고, 등을 기대고
쉴 수 있는 작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또 대평원의 태양으로부터
창문을 가리기 위해 처마 끝을 앞으로 돌출시키는 배려도 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문이 하나 나 있고, 양쪽 측면에 길쭉하고 좁다란 창문이 대칭을 이루며 나
있을 뿐이었다.
"자, 여기가 우리 집이오."
웨스트가드가 마차를 멈춰 세우면서 말했다. 그는 손으로 좌석과 발판을
잡고 펄쩍 뛰어내린 후 그녀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내려오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문안에서 청천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테디! 예의는 어디에다 가져다 버렸니! 그 어린 아가씨가 내려올 수 있도록
네가 도와드려!"
테디? 리니아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작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며 부엌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기세등등하게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곱슬곱슬한 잿빛 머리칼을 목덜미쯤에서 묶고 있었고,
철사로 테를 만든 타원형의 안경을 양쪽 귀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질을
해대며 그를 호되게 꾸짖었다.
테어도어 웨스트가드는 자갈길 한가운데 서 마지못한 듯 공손한 표정으로
바꾼 뒤, 마차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와 리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교당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아래로 깡총 뛰어내려오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비꼬아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오, 감사합니다, 웨스트가드 씨. 당신은 너무도 친절하시군요."
폭풍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가오자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재빨리
놓아 버렸다. 골무보다도 크지 않은 코와 희미한 갈색 눈썹, 버드나뭇잎처럼
가늘고 길쭉한 입술이 인상적인 그녀는 앞으로 툭 불거져 나온 턱과 튼튼해
보이는 양팔을 흔들어 대면서 그들에게 걸어왔다. 비록 등은 약간 구부러져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다급한 일이 생긴다면 상대방을 단번에 눕혀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키가 좀 작긴 했지만, 그녀에게선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니아는 그녀가 솔직
담백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새로 온 선생님이로구나. 하지만 내 눈에는 남자로
보이지 않는걸!"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리니아를 양팔로 감싸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루
살피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잘 가르치겠는데."
잠시 후 그 여자는 웨스트가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이 여자가 바로 그 남자예요."
웨스트가드가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 여자는 곧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침착한 태도로 돌변해 리니아를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당신이 이해해 줘요. 내가 가르친 게 부족한 탓으로 내 아들이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다우. 그나저나 아직 내 아들 녀석이 우리 두 사람을 서로 소개시켜 주지
않았군요. 나는 저 녀석의 엄마, 니사 웨스트가드예요. 그냥 니사라고 부르도록
해요."
그녀의 손은 뼈만 앙상할 정도로 말라깽이였지만, 힘이 느껴졌다.
"전 리니아 브란덴베르그예요. 그냥 리니아라고 부르시면 돼요."
"그러니까, 린나이누……."
그 여자는 노르웨이 억양으로 다시 발음했다.
"정말 예쁜 이름이군요."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웃음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리 오랫동안은 아니었다.
니사 웨스트가드는 무슨 일이든 절대로 오랫동안 질질 끌 사람이 아니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찬 제비처럼 움직였는데, 동작 하나
하나가 매우 빠르고 경제적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녀는 오솔길을 따라 재빠르게 걸으며 그녀의 아들을 향해 새된 소리를
질러 댔다.
"거기 계속 서 있기만 할래, 테디? 이분 짐들을 옮겨 와야잖니!"
"그녀는 우리 집에서 지내지 않을 거예요."
리니아는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생각했다.
'또 시작이군.'
그러나 그 순간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니사 웨스트가드가 뒤로 돌아와
아들의 목덜미를 놀랄 정도로 세게 후려쳤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지내지 않을 거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이분은 이 집에서
계속 머물 거다. 그러니 그따위 생각일랑 네 머릿속에서 당장 날려 버려라.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새로 온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어쨌든 이분을 대하는 네 태도를 좀 자성해 보는 게
좋겠다. 그러기 싫으면 여기 사는 동안 네 밥은 네가 지어 먹고 설거지도 직접
하도록 해라. 나는 존과 살아도 되니까. 너도 알고 있지?"
리니아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치 싸우기
좋아하는 장닭이 곰에게 대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니사의 키는 겨우 아들 겨드랑이에
닿을 정도밖에는 안되었지만, 그녀가 호되게 꾸짖자 그는 한마디 말대꾸도
못하고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아래턱은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의 당황한 모습을 좀더 쳐다보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장닭이 그녀의 팔을 낚아챈
뒤 오솔길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고집불통, 성미 고약한 물건 같으니라구!"
그녀는 중얼거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여자 없이 살아와서 그래요. 당신이 이해하세요."
리니아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뭘 어떻게 이해하란
말이죠?"라고.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혀를 자제할 수 있을 만큼 현명했다. 다음 순간, 리니아의
머릿속에 여자와 한 집에서 살 수 없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니사가 여자라는
사실과 함께, 그가 말한 여자의 범주에 그의 어머니는 포함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니사는 열린 문 쪽으로 리니아를 밀어 넣었다. 부엌 안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주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대로 따뜻하고 습기도 없으니까
있을 만할 거예요. 게다가 이 집에는 우리 세 식구밖에 없으니까……."
리니아는 놀라 뒤돌아섰다.
"세 식구라구요?"
"테디가 당신에게 크리스찬에 대해 말하지 않던가요?"
리니아는 그녀에게서 끊일 새 없이 터져나오는 말줄기와 위압적인 목소리에
완전히 압도당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겨우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크리스찬은 테디의 아들이에요. 다시 말해, 내 손자라는 뜻이죠. 지금 밀을
베고 있는 중인데, 이따가 저녁 식사 때나되어야 돌아올 거예요."
리니아는 테어도어 웨스트가드의 아내라는 잃어버린 연결고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탓이었다.
"여기가 부엌이에요. 시장하면, 이 음식을 좀 들어 보실래요? 여태 수박
절임을 담그고 있었거든요."
참나무로 만든 크고 둥근 외다리 식탁 위에는 과일을 담은 항아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리니아는 니사가 그 병들을 다른 방으로 하나씩 옮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있었다.
"여기는 과일을 넣어 두는 방이에요. 내가 잠자는 방이기도 하고."
그녀는 문이 닫혀 있는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저 방은 테디가 쓰는 방이에요. 당신과 크리스찬은 2층을 쓰면 돼요."
그녀는 니사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리니아는 테어도어가 자신의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얼핏 보았다.
테어도어의 모습을 등뒤로 하고, 그녀는 니사를 따라 2충으로 올라갔다. 2층은
비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방문이 하나씩 나 있었다.
니사는 그 중 하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리니아가 여태껏 본 방들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것이었다. 외벽밖에
없는 벽에는 걸리거나 박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천장이
급경사를 이루며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아래로
들보들과 도리들, 보조 지붕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천장은 회반죽도 바르지
않은 채 벌거벗겨진 모습 그대로였다. 사방 벽 역시, 천장과 마찬가지로 마무리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문의 반대쪽 벽에는 창이 하나 있었는데, 그 만듦새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창이 동쪽으로 나있어 햇살은 거의
무시해도 될 정도였지만, 리니아의 방은 약간 덥다고 느낄 정도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바닥에는 짙은 초록색 바탕에 붉은색이 도는 커다란 양매추 무늬가 새겨진
리놀륨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방바닥 가장자리까지 완전히 깔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방으로 마루 판자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방문 오른쪽으로는 1인용 침대가 벽 쪽으로 바짝 붙여진 채 놓여 있었다.
철재로 만든 침대 틀은 하얀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활짝 핀 장미 색깔의
침대보가 덮여 있었다. 그리고 침대 발치에는 조각천을 누벼 만든 이불이 얌전히
개켜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다리가 휘어진 모양의 네모난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코바늘로 짜서 만든 장식용 깔개가 덮인 채 등유를 넣은 호롱이 놓여 있었다
다른 한 쪽 벽에는 화장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눈처럼 하얀 면직물에
수를 놓고 가장자리를 레이스로 처리한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방문 왼쪽 중앙부로는
아래층의 부엌에서 올라와 지붕 바깥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커멓고 커다란 난로의
굴뚝이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 옆으로는 키 작은 스탠드 위에 주전자와 사발이
놓여 있었는데, 자다가 목이 마를 경우를 대비한 것 같았다.
창문 앞에는 참나무로 만든 큼지막한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등받이 부분에는 녹색과 핑크색의 얼룩무늬 천으로 만든 쿠션이 세워져 있었다.
리니아는 다시 머리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칠게만 보이는 서까래들을
쳐다보며 실망감을 감추려고 애를 써야 했다. 고향에 있는 그녀의 방은 벽에
꽃무늬 벽지가 도배되어 있고, 커다란 두 개의 창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
있었다. 해마다 봄이면 그녀의 아버지가 집 안의 목조 부분에 아이보리색 페인트를
덧입혀 주었고, 참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광택이날 때까지 문질러 댔었다. 커다란
벽난로에서 내뿜는 뜨거운 열기로 집 안 곳곳이 훈훈했으며, 새로 설치한 목욕탕에서는
언제나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들보와 서까래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다락방을 바라보며, 자신의
고향 집과 비교해 뭔가 호감이 가는 면을 발견해 정을 붙여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 꼼꼼히 방안 구석구석을 다시 살폈다. 풀을 먹이고 다림질을 하느라
엄청난 정성을 쏟았음이 확연한 화장대와 서랍장의 덮개, 수직기로 짠 실에
조각천을 엮은 장식품, 새로 올 선생님을 위해 방금 전에 깔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리놀륨 등을 그녀가 대충 훑어보는 동안, 니사는 옆에 서서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이 방은……. 이 방은 너무 큰데요!"
"네, 물론 크죠. 하지만 아무래도 이 서까래들에 당신이 머리를 쿵하고 부딪히게
될 것 같아 염려스럽죠?"
"고향에 있는 내 방보다 훨씬 크군요. 그곳에선 여동생 두 명과 한 방에서
지냈었거든요."
'리니아, 여배우가 되고 싶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야.'
리니아는 애써 실망감을 감춘 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방을 가로질렀다.
"내가 이 방을 써도 괜찮으시겠어요?"
니사는 느슨하게 팔짱을 낀 자세로 서서, 리니아가 창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발을 앞으로 쭉 뻗고 흔들거리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리니아는
효과를 더하기 위해 약간의 웃음을 보태며 휘어진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집에서는 한 방을 세 자매가 썼기 때문에 흔들의자를 놓을 만한 자리가
없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작은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너무나 기쁜 듯 말했다.
"사생활을 이렇게까지 완전히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걸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양팔을 쑥 내뻗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니사는 집주인으로서의 긍지로
인해 얼굴 가득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부엌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문 앞에는 테어도어가 가져다 놓은 그녀의 가방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니아는 새삼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가방을 위층에까지 옮겨다 놓을 만한 최소한의
매너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쯤은 웬만한 신사라면 기본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니사는 손님을 위해 사려 깊은 배려를 했지만, 아들의 의사에 반한 그녀의
환영이 리니아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니사, 난 당신과 당신의 아드님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고싶지 않아요. 내가
떠나는 게 낫다면……."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리니아. 내 아들 녀석에 대해서는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냥 내 말대로만 따르면 되는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리니아가 몸을 움직일 사이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짐을 챙겨 든 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까래를 이고 있는 그 방에 처음으로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 리니아는
조각 천으로 만든 깔개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우울한 심정으로 침대 속에
들어갔다. 갑자기 목구멍이 칼칼해지면서 눈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한 남자일 뿐이야. 그것도 아주 빙퉁맞고 심술궂은 남자, 늙고
못돼먹은 남자일 뿐이라구. 난 엄연히 자격증이 있는 선생님이구. 교육위원회
전체가 인정한 사람이잖아 그 남자의 인정머리 없고 속좁은 생각 때문에 고민할
필요 하나도 없다구!'
하지만 그 문제는 그녀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
그녀는 이곳에 도착하면 활짝 핀 미소와 환영의 악수들, 그리고 존경심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꿈꿔 왔던 것이다 존경심, 그래, 존경심이야말로 열여덞
살 나이의 그녀가 선생님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의 기대에 어울리지 않는 환영을
받았다는 이유로 바보처럼 울며 앉아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은 바보 같은 환상들을 모두 날려버리는 거야.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 침대 시트에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당신이 몽땅 망쳐 버렸어! 안 그래, 테어도어 웨스트가드? 하지만 난 증명해
보이고 말겠어.
당신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고 말 거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