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래퍼티 씨, 정말 운이 좋으셨습니다.]
닥터 노리스가 안경 너머로 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광대뼈가 모든 충격을 다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물론 광대뼈에 금이 가긴 했지만, 덕분에 눈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저 시퍼렇게 멍이 든 거라는 뜻이죠.]
미셀은 존의 손을 잡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존은 멀쩡한 오른쪽 눈으로 미셀에게 윙크를 하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고작 멍든 눈 때문에 나흘이나 입원을 하고 있어야 했다는 겁니까?]
닥터 노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휴가를 왔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휴가가 끝났으니 이만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해야겠군요.]
[퇴원을 하시더라도 며칠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이마도 몇 바늘 꿰맸고 광대뼈에도 금이 간 데다 경미한 뇌진탕 증세도 보였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제가 빈틈없이 지켜볼게요.]
미셀은 심각하게 존을 바라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집에 도착하는 대로 즉시 말을 타고 나가려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존은 머리 뒤쪽에 손을 고이고 나른하게 몸을 뻗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미셀을 바라보았다. 사고 후 나흘이 흐르는 동안 눈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아 이제는 왼쪽 눈도 조금은 뜰 수 있을 정도였다. 비록 얼굴은 온통 자줏빛 아니면 보랏빛 멍이 들어 있는 게 여전히 엉망이었지만, 시력을 잃을 염려는 없다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다행이었다.
[정말 긴 나흘이었소.]
존이 중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당신을 침대로 데려갈 거요.]
그 즉시 미셀의 피가 혈관 속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왜 그에게는 늘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건지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에게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고, 반응하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이제 뱃속의 아기가 자라면서 몸도 서서히 변해가겠지만 아직은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예민해진 피부가 즉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젖가슴 역시 그의 손길이 그리웠다는 듯 즉시 부풀어오르고 말이다.
미셀은 아직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 바람에 지난 나흘간 불편한 속을 그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입덧이 더 심해지는 바람에 늘 크래커를 입에 물고 살다시피 했고, 커피는 아예 마실 수도 없었다.
그녀의 사랑 고백에 그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기는 했지만, 자기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열정적인 키스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불을 끄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병실에 임시로 들여놓은 보조 침대에 누운 그녀에게 존이 말을 걸었다.
[미셀?]
그는 꼼짝도 않고 누워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미셀은 즉시 몸을 일으키고 어둠 속에서 그가 누워 있는 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당신을 사랑하오.]
존이 조용히 말했다.
갑자기 그녀의 온몸이 경련을 일으킨 듯 떨리기 시작하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행복의 눈물이었다.
[기쁘군요.]
그녀는 간신히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를 가장했다.
존이 어둠 속에서 소리내여 웃었다.
[이 조그만 장난꾸러기, 내일 당신 몸에 손을 댈 때까지 기다리라구.]
[기대하겠어요.]
다음날 아침, 그들은 퇴원 수속을 밟았다. 목장으로 전화를 걸어 네브에게 그들을 데리러 와달라고 한 뒤 미셀은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존을 돌아보았다.
[펠프스 씨는 로저의 흔적을 찾았다고 하던가요?]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짐짓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존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다치지 않은 쪽 눈으로 미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바지 지퍼를 올린 다음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녀는 갑자기 무력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에 살짝 몸을 떨었다.
존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무언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듯.
[당신과 펠프스 씨의 대화를 엿들었어요.]
미셀은 차분하게 말했다.
[나야 당연히 괴전화와 내가 몰던 차를 길에서 밀어낸 운전자의 정체를 연관시켜 짐작하고 있었지만, 당신은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존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 마지막 전화가 오고 난 뒤 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소. 그래서 앤디 펠프스에게 도움을 청했지. 하지만 앤디는 파리 행 비행기의 탑승자 명단을 몽땅 뒤졌는데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더군. 백맨을 찾기가 힘들어질수록 의심이 더 커졌지.]
[하지만 차사고 직후에는 내 말을 믿지 않았잖아요.]
존은 한숨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소. 처음에는 당신 말을 믿지 않았었지. 미안하오. 하지만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소. 당신이 운전은 물론 목장 밖으로는 아예 한 발짝도 나가려고 하지 않고 말수도 부쩍 줄어든 후에야 겨우 당신이 뭔가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 차렸지.]
미셀의 에메랄드빛 눈이 어둡게 변했다.
[공포에 질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거예요.]
미셀은 조용히 속삭이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펠프스 씨한테 또 다른 연락을 받은 게 있나요?]
[아니, 백맨을 찾아내기 전에는 연락하지 않을 거요.]
미셀은 다시금 몸을 떨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신을 죽이려 했어요. 미리 무슨 조치를 취해뒀어야 했는데..]
[뭘 어떻게 조치를 취해둔단 말이요?]
존이 거칠게 말했다.
[그날 당신이 나와 함께 있었다면 총알은 유리창을 부수는 대신 당신 몸에 박혔을 거요.]
[그는 질투심으로 제정신이 아니에요.]
로저를 떠올리자 욕지기가 치밀었다. 미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아래로 내려 배를 감쌌다.
[로저는 미쳤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알고 완전히 미쳐버린 거예요. 처음 두 번의 전화에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아마 내가 정말 당신 집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죠. 내가 다른 남자와 얘기만 해도 난리를 치던 사람이니 당신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마..]
미셀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멈췄다.
존은 가만히 미셀을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는 그녀를 달래려는 듯 가만히 어루만져 주었다.
[그자가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군.]
[비치 섬너가 알려줬을 거예요.]
미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그 가벼워 보이던 여자 말이오?]
[그 가벼운 여자는 내가 아는 한 세계 최고의 수다쟁이예요.]
[백맨은 마침내 자기가 그렇게 의심해 마지않던 대로 당신의 다른 남자를 찾아냈다고 생각했을 거요.]
순간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던 미셀이 나지막이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결국 그는 다른 남자를 찾아냈어요.]
[뭐라고?]
존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미셀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떨리는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언제나 당신이었어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난 로저가 날 사랑하는 만큼 그를 사랑해 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로저는 결국 그 사실을 눈치챘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도 짐작했구요.]
그는 미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젠장, 당신은 늘 날 싫어하는 것처럼 행동했잖소!]
[당신한테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으니까요.]
미셀은 씁쓸한 표정으로 존을 올려다보았다.
[난 그때 겨우 열여덟 살이었어요. 당신을 보기만 해도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구요. 게다가 어떤 여자든 당신을 한 번 보기만 하면 완전히 이성을 잃고 당신 발 밑에 엎드리더군요. 다들 나보다 훨씬 경험도 많고 또 아름다운 여자들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때는 설사 당신이 나라는 존재를 의식했다고 해도 그런 당신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난 늘 당신을 의식했었어.]
존이 거칠게 말했다.
[결코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었소. 하지만 당신은 늘 나한테서 무슨 나쁜 냄새라도 나는 것처럼 코를 잔뜩 쳐들고 깔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 그래서 당신을 보기만 해도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그냥 내버려둔 거요. 난 당신을 위해 새로 집을 짓기까지 했소. 당신은 전에 내가 살았던 낡은 집보다 더 나은 환경에 익숙한 사람이니까. 당신이 수영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수영장도 만들었소. 그런데 동부로 가더니 그 잘나빠진 부자 녀석과 결혼해 돌아오지 않더군. 빌어먹을, 그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아오?]
[당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와 결혼했어도 별로 상관이 없었어요.]
그녀는 여전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그때도 날 가질 수 있었소.]
[일시적인 침대 파트너로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그때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구요. 난 당신의 전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당신과 영원히 함께 살고 싶었지만, 당신처럼 여자관계가 복잡한 사람에게 결혼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어요. 지금은..]
미셀은 어깨를 으쓱하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요.]
냉혹한 분노가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그건 당신 생각이지.]
그는 으르렁거리듯 내뱉고는 곧장 미셀의 입술을 덮쳤다.
미셀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입술을 열고 순순히 그가 원하는 걸 내주었다. 이제는 이렇게 자신을 그에게 내주지 않았던 적이 있긴 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는 지난 나흘간의 금욕 생활로 인한 욕구불만을 해소하려는 듯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맛보며 거칠게 온몸을 애무했다. 하지만 그 열정적으로 전해지는 강한 욕구도, 굶주린 듯 거친 손길도 그녀를 두렵게 만들지는 못했다. 미셀은 그의 맨어깨에 손톱을 박으며 고개를 뒤로 젖혀 그의 입술 앞에 매끄러운 목덜미를 드러냈다.
그는 마침내 자제력을 완전히 잃은 듯 단단하게 솟아오른 남성을 그녀의 아랫도리에 마구 밀어붙이며 미친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잠시 후에야 그는 언제 간호사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억지로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강렬하고 농밀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띈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도착하는 게 네브의 신상에 좋을 거야.]
존은 거칠게 중얼거리며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빨갛게 부풀어오른 그녀의 입술과 욕망으로 나른하게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불러일으킨 욕망에 취해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 그를 흥분시켰다. 그는 거친 숨을 토하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미셀은 옷가지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침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방 안에서 옷을 입다가 존을 깨울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 존은 평소보다 깊이 잠이 드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가 깨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금 로저를 찾아나설 작정이었다. 이미 한 번 존을 살해할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두 번째 기회도 놓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존의 성격으로 보건대,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지시대로 따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목장 일에 매달릴 게 분명했다. 그것도 무방비 상태로.
지난밤 두 사람은 앤디 펠프스와 얘기를 나누었다. 앤디는 로저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가 공항에서 파란색 시보레를 렌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이름이 에드워드 월쉬라는 것도.
순간 익숙한 한기가 미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에드워드는 로저의 중간 이름이고, 월쉬는 그의 어머니의 처녀적 성이에요.]
미셀이 속삭였다. 존은 한참 동안 미셀을 지켜보다가 펠프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저가 다시 존을 해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로저에게 하도 많이 당해서 그런지 자신이 다치는 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지만, 존과 자신의 뱃속에 있는 새 생명을 생각하면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겁이 나도 계속 이런 상황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 누워 생각에 잠겨 있던 미셀은 갑자기 로저를 찾아 낼 방법을 깨달았다. 로저는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이 근처에 있는 게 분명했다. 미끼를 이용해 덫을 놓는다면 아마 로저는 제 발로 그 덫에 걸어 들어올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바로 그 미끼라는 것. 그리고 존이 구출해 줄 때까지 로저와 그 덫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셀은 부엌 식탁 위에 존에게 쓴 메모를 남겨놓고 입덧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래커를 몇 개 먹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크래커를 조금 챙겨서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녀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존이나 다른 사람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로저와 함께 있어도 그녀는 지극히 안전할 것이다. 미셀은 조용히 복부를 감쌌다. 제발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할 텐데.
메르세데스는 소리도 없이 단번에 시동이 걸렸다. 그녀는 기어를 넣고 전조등도 켜지 않은 채 조용히 마당을 빠져나갔다. 에디를 비롯해 누구도 깨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곧 커다란 참나무 차양 아래 마치 폐가처럼 음산하게 서 있는 그녀의 집이 눈앞에 드러났다. 미셀은 바로 집 앞에 차를 세운 다음 현관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잠시 어둠 속에 서서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30분 정도면 새벽빛이 어스름하게 비칠 것이다. 이제 곧 에디가 식탁에 놓인 메모를 발견하고 존을 깨울 터이니 그 사이에 로저를 끌어들일 덫을 놓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현관의 전등을 켜는 미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집 안 내부가 곧 환한 불빛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어서 거실 등을 켜고 다음으로 서재와 부엌의 불을 차례로 밝혔다. 그리고는 창문마다 커튼을 활짝 젖혀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로저를 끌어들일 덫이었다.
미셀은 세탁실의 불을 켜고 예전에 가정 형편이 윤택하던 시절 가정부가 사용하던 작은 별채에도 불을 켰다. 그리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존이 처음으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침실의 불빛도 밝혔다.
새벽이 오기 직전의 어둠 속에 그녀의 집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녀는 맨 아래 계단에 앉아 로저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니, 어쩌면 존이 먼저 들이닥칠 수도 있다. 만약 존이라면 엄청 화가 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로저가 먼저 오리라 확신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막 진주빛으로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현관문이 열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 보면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베란다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그의 발소리 역시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도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저, 안녕?]
미셀은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침착해야 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체중이 약간 불었고 머리숱도 조금 줄어든 듯했지만 그 외에는 예전의 모습과 거의 똑같았다. 눈빛 역시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심각해 보이면서도 약간의 광기가 느껴지는 그런 눈빛 말이다. 그 심각한 면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줌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비록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는 못할망정 살인을 계획하고 그것을 완벽히 수행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
로저는 오른손에 든 총을 옆으로 떨군 채 제자리에 멈춰섰다.
[미셀.]
로저는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미셀의 태도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평생을 예의범절이라는 틀 속에서 살아온 남자답게 그는 습관적으로 점잖게 인사를 건넸다.
미셀은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커피 한 잔 할래요?]
집에 커피가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설사 남은 커피가 있다고 해도 유통 기한이 훨씬 지나 있을 테지만, 그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을수록 유리하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새벽 일찍 일어나는 에디가 부엌 식탁에서 메모를 발견하는 즉시 존을 깨울 것이다. 존이 앤디 펠프스에게 연락을 했으면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15분 정도만 로저를 상대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그녀는 그저 불이 환히 밝혀진 집을 보고 존이 정신없이 뛰어들어와 로저를 놀라게 하는 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랬다간 로저가 이성을 잃고 총을 마구 난사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찌됐든 지금까지는 모든 게 그녀가 생각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로저는 열에 들뜬 눈으로 아무리 봐도 충분치 않다는 듯 미셀을 바라보며 멍하니 되물었다.
[커피?]
[네. 난 커피를 마실까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혹시 당신도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을까 해서요.]
커피는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커피를 뽑을 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로저는 매우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자고 청한 의도가 달리 있으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다.
[아, 그래? 커피라. 꽤 괜찮은 생각이야. 고마워.]
미셀은 로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뽑는 동안 잠시 대화를 나눌래요? 아마 내게 궁금한 게 많을 거예요. 나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퍼졌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커피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커피 사는 걸 잊어먹었는지도 몰라서요. 이번 여름은 정말 무더웠죠? 그래서인지 자꾸만 아이스티를 찾게 되더라구요.]
[그래, 정말 더웠어.]
로저는 순순히 맞장구를 치며 그녀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왔다.
[콜로라도의 산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어지더군. 거긴 이맘때쯤이 제일 지내기 좋으니까.]
미셀은 찬장에서 반쯤 남은 커피 봉투를 발견했다. 유통 기한이 지난 지 오래라 마실 만한 것이 못 되겠지만, 미셀은 전혀 개의치 않고 커피 메이커에 물을 부은 다음 원두를 종이 필터에 떠넣었다. 미셀의 커피 메이커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한 번 커피를 뽑으려면 거의 10분이 걸릴 정도였다. 곧 커피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켰다.
[거기 앉지 그래요.]
미셀은 식탁 건녀편 의자를 가리켰다.
로저는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총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미셀은 총을 보지 않으려고 황급히 몸을 돌려 찬장에서 머그 잔을 두 개 꺼냈다. 그런 다음 그의 맞은편에 앉아 존의 집에서 가져온 크래커를 먹기 시작했다. 긴장이 되어서인지 크래커를 먹어도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신도 크래커 좀 드실래요?]
미셀은 문득 생각이 난 듯 크래커를 권했다.
로저는 그제서야 자신이 온 목적을 기억해 낸 듯 광기 어린 눈을 들어 서글픈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사랑해.]
로저가 속삭였다.
[이렇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데 어떻게 날 내버려두고 떠날 수가 있지? 난 당신이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랐어. 예전과는 모든 면에서 달라질 거라고 했는데도 그 야만스런 목장주의 집으로 옮겨가다니! 대체 왜 날 속이고 바람을 핀 거지?]
미셀은 그의 목소리에 갑작스럽게 끼여든 분노를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미셀의 심장이 다시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구역질이 날 정도였지만, 그녀는 간신히 약간 놀란듯한 어조를 꾸며낼 수 있었다.
[어머, 로저, 거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전기가 끊겨 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구요. 당신도 내가 전기도 물도 없이 이곳에서 혼자 지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로저는 다시금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고기를 내저었다.
[달링, 거짓말 마.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놈과 같이 살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난 당신이 원하는 건 모든 다 해줄 능력이 있다구. 당신도 알잖아? 그 많은 옷이며 보석, 파리에서의 쇼핑까지·..그런데도 나한테서 도망쳐 그 소 냄새나 풀풀 풍기는 목장주 녀석과 놀아나다니.]
로저의 입에서 달링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신에 밀려드는 공포를 가라앉히려 갖은 애를 썼다. 만일 지금 공포에 사로잡힌다면 영원히 로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대체 존이 오기까지는 몇 분이나 남았을까? 7분? 8분?
[당신이 정말로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지 확신이 없었어요.]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입술이 말라서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로저는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 당신은 알고 있었어. 그저 내게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 여왕처럼 살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그 땀내 나는 목장주 녀석을 선택했어. 미셀 달링, 그런 녀석이 당신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어? 그래?]
미셀은 이 모든 징후를 잘 알고 있었다. 로저는 지금 스스로를 광기에 찬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제 그는 곧 발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그의 비틀린 사랑 대신 존의 강인하고 깨끗한 남성미와 자연스런 정열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 채지 못했길 바란 게 무리였다.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 걸까? 6분?
[난 당신 집에 전화도 했어요.]
미셀은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절박하게 호소했다.
[당신이 이곳까지 와서 날 데려가 주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가정부가 당신은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난 정말로 당신에게 돌아가고 싶었다구요.]
순간 로저의 얼굴에 떠올랐던 분노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신이 당신이 내게 돌아오고 싶어했다니]
미셀은 식탁 위에 놓인 총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당신이 그리웠어요. 우리는 정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잖아요, 안 그래요?]
사실이었다. 질투심이 그를 좀먹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도 있었던 것이다. 로저는 무척이나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고, 또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그녀가 존을 잊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그와 결혼까지 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로저 역시 그들이 함께 보낸 즐거운 추억이 떠오른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때까지 내가 본 여자 중 제일 아름다웠어.]
로저는 부드러운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당신 머리가 마치 황금처럼 빛난다는 생각을 했어. 당신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을 때면 난 키가 3미터쯤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지. 당신에게 온 세상을 안겨주고 싶었어. 당신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도 할 수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총 쪽으로 손을 뻗었다.
5분?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과거의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의 마음속에 로저에 대한 동정심이 솟구쳤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로저가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 대단히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떤 의사도, 그 어떤 약도 그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우린 그때 정말 젊었어요.]
미셀은 한때 잘 알고 지냈던 젊은 남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 젊은 남자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는 불쌍하고 초라한 남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오직 그의 눈에 남아 있는 희미한 옛 추억의 잔재만이 그 젊은 남자의 존재를 알려주는 듯했다.
[준 베일리를 기억해요? 웨스 콜랜의 보트에서 물에 빠졌던 조그만 빨강머리 여자 말이에요. 준을 보트로 끌어올리려고 하다가 토니만 제외하고 다들 물에 빠졌잖아요. 준은 항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보트를 타러 나왔다가 물에 빠지자 마구 비명을 질러댔고, 우린 그런 그녀를 구하려고 미친 사람들처럼 물에 뛰어들었죠.]
4분.
로저는 마치 그 화창한 여름날의 그 남자로 되돌아간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커피가 다 끓은 것 같군요.]
미셀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둔 머그 잔에 커피를 따라 그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마실 만한지 어떤지 모르겠네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커피를 맛있게 끓이는 편이 아니라서.]
그게 존의 집에서 지내느라고 유통기한이 지난 커피밖에 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였다.
로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눈이 물기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가 천천히 총을 집어들었다.
[당신을 사랑했는데..]
로저는 서글픈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당신을 만지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뒷문이 쾅 소리가 나며 열렸고, 그 소리에 놀란 로저가 얼떨결에 총을 발사했다. 총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지는 것과 동시에 미셀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경첩이 떨어진 뒷문을 통해 두 남자가 로저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체격이 좀더 큰 남자가 로저에게 태클을 걸어 식탁 위로 넘어뜨렸다.
욕설과 고함 소리가 공중에 난무했고 식탁을 비롯해 부엌에 있던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금 총소리가 울려 퍼지며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싶더니 총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다음 순간 남자들이 동시에 총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제서 로저와 바닥을 뒹굴며 총을 잡으려고 다투는 남자들 중 하나가 존이라는 걸 알아차린 미셀은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외쳤다. 갑자기 총이 마룻바닥을 가로지르며 쭉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존이 로저를 깔고 앉아 그의 얼굴을 마구 주먹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거의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처럼 퍽퍽 소리가 이어지자 그녀는 다시 비명을 지르며 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앤디 펠프스와 또 다른 남자 역시 그녀와 동시에 달려들어 존을 로저에게서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존은 살기 등등한 얼굴로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몸을 휘감은 손들을 뿌리쳤다. 그녀는 격하게 흐느끼며 그의 등에 매달렸다.
[존, 안 돼요. 제발]
격하게 울부짖으며 그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로저는 병에 걸렸어요.]
그제서야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온 듯 존은 천천히 주먹을 내려놓고 그녀를 앞으로 잡아당겨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존의 품에 안겨 그의 존재를 음미하는 것뿐이니까.
존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보안관이 바닥에 널브러진 로저를 일으켜 세워 등 뒤로 수갑을 채운 다음 증거물인 총을 비닐 주머니에 넣어 밀봉했다. 로저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누군지, 자신이 왜 여기 있는 건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존은 보안관이 로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내내 미셀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정신병자와 그토록 차분하게 부엌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걸까? 그 생각만으로도 존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제 미셀은 그의 품에 안전하게 안겨 있었고, 그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미셀은 그의 예전 여자관계를 빗대어 그를 하트 브레이커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머리와 여름처럼 싱그러운 초록색 눈을 가진 이 골든 걸이야말로 진정한 그의 하트 브레이커였다. 아마 그녀가 자신의 인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그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맨은 그녀에게 병적인 집착을 보였고, 그녀를 잃어버린 후 결국엔 미쳐 버렸다. 이제 존은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신도 미셀을 잃는다면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그 메모를 보고 수명이 한 20년은 줄어들었을 거야.]
존이 미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으르렁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와주었군요. 에디가 굉장히 일찍 일어났나 봐요?]
미셀은 여전히 그에게 매달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일찍 일어난 거요. 당신이 옆에 없기에 당신을 찾아 온 집안을 뒤졌거든. 덕분에 겨우 시간을 맞춰 도착할 수 있었던 거요. 에디가 그 메모를 발견할 때까지 있었다면 너무 늦었을 거야.]
앤디 펠프스가 엉망이 다 되어버린 부엌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찬장에서 새로 컵을 꺼내 커피를 따라 마셨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앤디의 표정이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변했다.
[이 커피는 완전히 맛이 갔군. 사무실에서 마시는 것보다 더 끔찍해. 그나저나 내가 지금 바지 아래에 잠옷을 입고 있다는 거 알아요? 존의 전화를 받고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잠옷 위에 그대로 바지를 걸쳤다는 거 아닙니까.]
그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존과 미셀은 그제서야 앤디를 돌아보았다. 앤디는 여전히 잠에서 덜 깬 것처럼 보였고 보안관 유니폼 대신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데다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설사 고릴라 복장을 입고 있다 해도 지금의 미셀에게는 최고로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술서를 작성해야 할 겁니다.]
앤디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법정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맞아요. 제정신이 아니에요.]
미셀은 푹 잠긴 음성으로 동의했다.
[지금 당장 진술서를 작성해야 하는 거요?]
존이 물었다.
[미셀을 좀 쉬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오.]
앤디는 새삼스레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미셀은 아예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고, 존의 얼굴도 차 사고로 인한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봐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신 편한 대로 해요. 진술서야 오늘 안에만 작성하면 되는거니까. 오후에 잠깐 틈을 내 보안관 사무실에 들러도 될 테고.]
존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셀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자신이 몰고 온 픽업트럭에 태웠다. 메르세데스는 나중에 다른 사람을 시켜 가져오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의 목장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미셀은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이 아직 믿어지지 않는 듯 여전히 멍한 상태로 트럭에서 내렸다. 그는 그런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에디를 비롯해 집 안에 모여 있는 카우보이들을 발견한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들을 지나쳐 곧장 2층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굳게 닫은 다음 그는 마치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곧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워 꼭 껴안았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오?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존은 자신이 그녀에게 털끝만한 상처도 못 입힌다는 걸 잘 알면서도 짐짓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미셀은 몸을 가늘게 떨면서 존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당신, 나랑 곧 결혼해 줘야겠소.]
존은 욕구로 거칠어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잠시 백맨의 말을 들었는데, 내가 그 자식만큼 당신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제공할 수 없을 거라는 점에서는 그의 말이 맞을 거요. 하지만 맹세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겠소. 이대로 당신을 보내주기에는 너무나 당신을 사랑하니까.]
[내가 언제 당신 곁을 떠나겠다고 한 적이 있나요?]
미셀이 반항하듯 웅얼거렸다. 아니, 이 남자가 방금 뭐라고 했지? 결혼? 이 남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미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황홀한 미소에 존은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 머무르겠다고 한 적도 없었잖소.]
[어떻게 내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여긴 당신 집이라구요. 당신이 먼저 말을 해줬어야죠.]
[빌어먹을, 체면 따윈 엿이나 먹으라고 해!]
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당신이 나와 함께 있으면서 행복한지 어떤지 고민하느라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구.]
[행복이요? 난 이미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라구요. 당신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걸 내게 주었으니까요.]
미셀은 턱을 곧추세우고 말을 이었다.
[노동자의 붉은 피와 고귀한 푸른 피가 섞이면 아주 건강한 아기가 태어난다고 들었어요.]
존은 굶주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아이들을 좋아하길 바라오, 허니. 난 적어도 아이를 넷은 가질 생각이니까.]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미셀이 맞장구를 치며 배에 손을 갖다댔다.
[비록 그 때문에 몸은 괴롭지만 말이에요.]
그는 잠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당신, 임신했소?]
[네, 당신이 마이애미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 밤]
수줍은 듯 말꼬리를 흐리는 미셀을 바라보며 존은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리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내가 너무 부주의하게 행동했지.]
존은 눈에 띄게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당신은 정말 그랬어요. 혹시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걸 누가 알겠소?]
존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내가 그 생각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는지는 아마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당신은 어떻소?]
그는 그녀를 들어올려 무릎 위에 올려놓고 꼭 끌어안으며 그녀의 감촉을 즐겼다. 미셀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문질렀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는 거였어요. 값비싼 물건 따위는 필요 없어요. 난 목장에서 일하는 게 좋아요. 우리가 결혼한 후에도 내 자신의 목장을 이룩하고 싶을만큼. 당신의 아기를 갖는 것은..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존은 미셀의 황금빛 머리카락에 볼을 대고 그녀의 메모를 읽은 순간의 공포를 떠올렸다. 하지만 미셀은 이제 안전하게 그의 품에 있었고, 그는 그녀를 결코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는 그녀의 입에서 당신처럼 결혼 생활에 철저하게 헌신하는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자신은 나머지 인생을 그녀의 비위를 맞추느라 쩔쩔매면서 보낼 것이고, 미셀은 지금처럼 가끔씩 그의 명령을 무시하는 행동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지극히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고, 행복에 겨워 날뛰는 아이들과 목장 일에 의해 단단히 닻을 내릴 것이다.
[그래, 아주 멋진 삶이 될 거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의 결혼식 날 아침은 환한 햇살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야외 결혼식을 포기했을 정도로 날이 궂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길 잃은 벌처럼 며칠 동안 거세게 불어닥치던 허리케인 칼이 마침내 서부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먹구름도 함께 가져간 덕에 오늘 아침은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이 그들을 축복해 주듯 펼쳐져 있었다.
미셀은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으면서도 내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결혼식 전에 신랑이 신부를 보게 되면 악운이 닥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존과 미셀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될 터였다. 하지만 미셀은 그런 말을 믿지 않았고, 존은 전날 밤 미셀과 따로 방을 쓰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 엄청 화를 냈다. 당신은 내 옆에서 자야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 그에게 있어서 미셀과 단 하루라도 떨어져 있게 만드는 관습 따위는 지옥에 처박아 마땅한 것이었다. 로저의 일이 해결된 날부터 존은 미셀이 그의 눈 밖에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미셀도 그런 그의 기분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날 아침 존이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을 비교적 차분하게 받아들인 건 사실 그보다 먼저 신경을 온통 뒤집어 놓을 만큼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탓이었다. 그가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한 건 그날 밤의 일이었고, 그때 미셀은 존에게 거칠게 안긴 채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아기라구? 오, 맙소사! 아기라니..]
존은 자신의 아이가 그녀의 날씬한 몸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려운 듯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계속해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음날 아침, 크래커를 먹고도 미셀의 입덧이 가라앉지 않는 바람에 그는 미셀이 먹은 것을 다 토해낼 때까지 그녀를 부축하고 있음으로써 임신을 더욱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의 입덧은 어느 날 아침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어느 날 아침은 다른 날보다 더 심했다. 오늘 아침에도 존은 미셀이 눈을 뜨기도 전에 크래커를 물려주었고, 미셀은 눈을 감고 그의 품에 누워 아침을 오물거렸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아침이라는 확신이 서자 신랑이 될 존은 신부를 오랜 시간 동안 한껏 사랑해 주었다.
그들은 결혼 예복도 함께 갈아입었다. 미셀은 남성적인 만족감으로 가득한 미소를 띈 채 셔츠 소매의 커프스를 잠그는 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존이 미셀이 입은 레이스 슬립과 가터 벨트를 너무 마음에 들어 한 나머지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결혼식에 지각을 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커프스를 다 채우고 나면 내 지퍼도 좀 올려줘요.]
미셀이 나직이 말했다.
존은 문득 고개를 들고 검은 눈을 빛내며 그녀를 살펴보았다.
[정말 한 입에 삼키고 싶을 만큼 맛있어 보이는군.]
미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건 결혼식을 내일로 연기하겠다는 의미인가요?]
그의 미소는 즉시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니, 그냥 오늘 할 거요.]
존이 커프스를 다 채우고 말했다.
[돌아서 봐요].
미셀은 순순히 돌아섰다. 존의 따뜻한 손가락이 드러난 맨살에 와닿자 즉시 온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존은 지퍼를 올려준 다음 미셀의 드러난 목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오늘처럼 특별한 아침을 그녀와 함께하는 걸 관습 때문에 포기하지 않은 게 더욱 잘한 일처럼 여겨졌다.
미셀은 옅은 미색 계통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드레스와 함께 맞춘 전원풍 모자를 쓸 예정이었다. 드레스와 모자의 색이 미셀의 금발을 더욱 빛나 보이게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미셀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와 별처럼 빛나는 눈빛은 드레스 색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건 방금 전에 나눈 뜨거운 사랑의 여운 때문이거나, 아니면 임신 초기의 징조 때문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것도 아니라면 행복 그 자체 때문일지도 몰랐다.
존은 마지못해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고 몸을 숙여 드레스 자락을 잘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미셀이 립스틱을 바르고 조심스럽게 모자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며 상의를 걸쳤다. 노란색의 긴 리본이 그녀의 등뒤에서 우아하게 나풀거렸다.
[준비됐어요?]
존은 그녀의 음성에서 처음으로 긴장한 기색을 느꼈다.
[물론 다 됐소.]
존은 확고하게 말하고 미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친구들은 모두 파티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조차 마이애미에서 날아온 상태였다. 존은 결혼식에 참석해도 되겠느냐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잠시 놀랐지만 곧 어머니의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로저 백맨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미셀은 며칠 사이에 말 그대로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로저에게 대항해 그의 존재를 완전히 몰아낸 후에야 비로소 미셀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짐을 지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그 어두운 경험은 그녀의 영혼을 질식시키고, 그녀를 지극히 방어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주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로저와의 문제를 해결한 덕분에 미셀은 과거의 기억에 대항할 힘을 갖게 되었다. 미셀은 더 이상 협박과 폭력에 의해 움츠러드는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불쌍한 로저. 그녀는 로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그녀의 삶을 지옥처럼 만들었다 해도. 미셀의 부탁에 존과 앤디는 로저의 정신 감정을 의뢰했고, 의사들이 로저의 상태를 진단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저는 만성이지만 점점 상태가 악화되는 퇴행성 뇌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건 현대 의학으로도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 중의 하나였고,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것도 머지 않은 장래에. 그려는 한때는 착하고 친절한 청년이었던 로저를 떠올리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를 돕고 싶었지만, 의사들조차 그의 치료에 별 희망을 갖고 있지 않는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존은 그녀의 눈에 드리워진 우울한 기운을 감지하고 그녀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는 백맨에 대해 미셀이 동정심을 느끼는 걸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뜻을 확실히 밝혔다. 백맨이 미셀에게 총을 겨누던 장면을 결코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몇 세기가 흐른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 불가능했다.
존은 미셀의 얼굴을 들어올리고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키스를 했다.
[당신을 사랑하오.]
존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셀 역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존은 미셀의 손을 잡아 팔짱을 꼈다.
[자, 이제 결혼하러 갑시다.]
그들은 나란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 파티오로 향했다. 파티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비쳤다. 마치 전날까지 계속됐던 폭풍의 위협을 사과라도 하듯.
미셀은 옆에 서 있는 키 큰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미래가 항상 순탄할 거라고 낙관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도 종종 존의 오만함과 자신의 고집이 부딪히는 경우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내심 그 싸움을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어쨌든 최악의 시간은 이미 지난 후였고, 미래에 닥칠 악천후와 갑작스런 돌풍 - 사실 어떤 미래가 그렇지 않겠는가? - 도 존과 함께라면 그녀는 얼마든지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