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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유혹-11화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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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셀도 알고 있었다. 가장 원치 않는 짓이 로저를 다시 보는 일인데도 로저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지금 그를 찾아내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아니, 미친 짓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로저를 찾고 싶었다. 아직 죽고 싶진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야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미셀은 존과의 삶을 원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고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요즘 존의 상태는 그들의 관계에 더욱 회의를 갖게 만들었다. 그녀가 뭘 해도 그를 기쁘게 만드는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침실에서만큼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그것은 그의 강한 성욕 때문일 터였다. 아마 상대가 어떤 여자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셀의 신경은 너무 예민해져서 오늘 아침에는 제대로 식사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아침 식사를 포기하고 존이 픽업 트럭에 올라타고 목초지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오늘 외출에 대해 존에게 알리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그가 알게 되면 대체 무슨 일로 나가는 건지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했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결국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녀는 단지 30분 정도만 나갔다 올 생각이었고, 솔직히 자신을 미끼로 내놓을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그저 집까지 운전을 해서 갔다가 곧장 돌아올 작정이었다.

좁은 도로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면서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제3호 태풍인 허리케인 칼이 대서양에서 발생하여 쿠바 열도 쪽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벌써 초가을로 접어든 지 오래건만 여전히 무덥고 습도가 높은 걸 보면 태풍이 플로리다를 덮치는 건 시간 문제인 듯싶었다.

그녀는 혹시나 나무 아래 차가 정차되어 있는지 살펴볼 요량으로 양쪽 도로 주위를 꼼꼼히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하고 느긋한 아침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제외하면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신경이 곤두선 채 존의 목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돌리던 미셀은 바로 그 순간 욕지기가 확 치밀어오르는 바람에 황급히 차를 세웠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비어 있는 뱃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발작적인 구역질이 끝나자 미셀은 완전히 맥이 빠진 채 식은땀을 흘리며 핸들에 머리를 갖다댔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감기 바이러스치고는 너무 오래 사람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핸들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한줄기 바람이 열린 문으로 들어와 얼굴에 맺힌 땀을 식혀준 순간, 미셀은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아마 앞으로 아홉 달 내내 바이러스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미셀은 몸을 뒤로 기대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임신이 분명했다. 언제 임신이 되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분명 존이 마이애미에서 돌아온 그날 밤에 생긴 아이리라. 그날 존은 피임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곤히 잠든 그녀를 열정적으로 덮쳤었다.

최근 신경이 너무 곤두서 있는 바람에 생리가 늦어지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존의 아기뀉존의 아기가 이미 5주 전부터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다니. 미셀은 조심스럽게 배를 어루만졌다. 비참한 와중에도 최상의 만족감이 그녀를 채웠다. 로저와 관련된 문제도 지금 그녀가 느끼는 이 맹목적인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셀은 그동안 얼마나 속이 울렁거렸는지를 떠올리고 절로 미소를 지었다. 어느 잡지에선가 입덧이 심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유산할 확률이 적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아기는 아마 크녹스 요새처럼 안전할 것이다. 입덧으로 견디기 힘들 만큼 몸이 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것조차 너무도 행복하게 여겨졌다.

[세상에, 아기라니·.]

미셀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조그만 아기를 떠올리며 황홀하게 속삭였다. 존 래퍼티의 자식이라면 분명 개구쟁이가 되리라.

하지만 갓길도 아닌 차도 중간에서 마냥 차를 세우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구역질이 멈추길 바라며 기어를 넣고 조심스레 목장으로 차를 몰았다. 이유를 알게 되니 어떻게 하면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서 의사에게 검진도 받아야 했다.

울렁거리는 속은 예상했던 대로 토스트 한 장과 묽은 차 한잔으로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속이 가라앉자 미셀은 곧 임신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에 잠겼다.

존에게 알리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고, 또 제일 큰 무제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도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랬다. 존의 입장에서 보면 이 아기는 그를 원치 않는 여자에게 잡아매는 짐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어쨌든 존에게도 이 뱃속의 아기에 대해 알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존이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그를 붙잡기 위해 아이를 이용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존이 없는 미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질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떠나보낼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존과 함께한 첫날부터 언젠가 그에게서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때를 대비해 의식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만일 존이 아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어떻게 하지? 존은 진지하게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원하지 않는 결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감지덕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던져주는 애정의 부스러기로 만족하거나, 아니면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결혼을 세상 그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는 자신에게 그를 거부할 용기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너무나 비참한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요즘은 너무 쉽게 눈물이 나왔다. 미셀은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의 감정은 우울함과 황홀함 사이를 가파르게 오가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나 복잡해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에게 이신 사실을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녀 혼자서 무슨 계획을 세우든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어찌됐든 그와 함께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그녀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밖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일꾼들이 분주히 오가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에디가 2층 침실에 있는 자신을 소리쳐 부를 때까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셀, 누가 다쳤나 봐요. 카우보이들이 부상당한 사람을 하나 데리고 오는데뀉·.오, 하느님, 보스가 다쳤어요!]

에디는 거의 비명처럼 마지막 말을 토해냈다. 그 즉시 미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도 미셀은 자신이 어떻게 계단을 내려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거라곤 마침내 현관에 도착했을 때 에디가 비틀거리는 자신을 부축해 주었다는 것과, 네브와 다른 남자 하나가 존이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존은 얼굴에 수건을 대고 있었고, 손이며 팔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의 셔츠 역시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미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기보다 몇 배는 더 힘이 센 에디의 팔을 뿌리치고 존에게로 달려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존은 네브의 팔을 뿌리치더니 수건을 자지 않은 손으로 미셀을 거세게 포옹했다.

[난 괜찮소.]

존이 푹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냥 최악의 상태처럼 보이는 것뿐이오.]

[보스, 어서 의사에게 가보는 게 좋을 거유.]

네브가 혀를 쯧쯧 차며 충고했다.

[빨리 상처 부위를 꿰매야 한다구요.]

[그렇게 할 테니 걱정 말고 이만 카우보이들에게 돌아가 아까 하던 일이나 마무리짓게.]

존은 미셀의 머리 위로 네브에게 경고의 눈짓을 보냈다. 눈치 빠른 네브는 즉시 그 경고를 알아차린 듯 미셀 쪽을 흘끗 쳐다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미셀은 존을 부축해 부엌으로 들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팔은 미셀의 어깨에 무겁게 둘러져 있었고, 그것만 봐도 그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존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식탁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트럭을 몰다가 잠시 균형을 잃고 나무를 들이받았소.]

존이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핸들에 얼굴을 부딪혔고.]

미셀은 다친 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수건을 들쳤다. 그는 그녀의 가벼운 손길에도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찔했다.

[상처를 좀 봐요.]

미셀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유리 잔해를 발견하고는 달래듯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수건을 떼어냈다. 다음 순간 눈앞에 드러난 참혹한 광경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의 왼쪽 눈두덩은 너무 부어서 아예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이마에서 광대뼈 주위까지 검푸른 색으로 멍이 든 것이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이마를 가로질러 길게 찢어진 상처 부위에선 심하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셀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에디, 얼음주머니를 그의 눈에 대주세요. 그렇게 하면 부기가 더 심해지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난 지갑과 차 열쇠를 가져올게요.]

[잠깐만 기다려.]

존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먼저 좀 씻어야겠소. 온몸이 피와 유리 파편으로 뒤범벅이 되었으니.]

[그게 뭐 급한 일이라고..]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건 아니라니까.]

존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도중에 끼여들었다.

[우선 셔츠 벗는 거나 좀 도와달라구.]

존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미셀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주면서 그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셔츠를 벗겨주고 보니 갈빗대 주위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제서야 미셀은 존이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개수대로 가서 손과 팔에 묻은 피를 씻어낸 다음 미셀이 젖은 수건으로 가슴과 목, 그리고 등까지 조심스럽게 닦아주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머리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미셀은 의사에게 보이기 전까진 다른 데는 몰라도 머리엔 손을 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 일을 마친 후 그녀는 곧장 2층으로 뛰어올라가 그에게 갈아 입힐 깨끗한 셔츠를 가지고 왔다. 그 사이에 에디는 얼음을 꺼내 깨끗한 수건에 싸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놓았다. 미셀이 조심스럽게 왼쪽 눈 위에 얼음주머니를 갖다대자 그는 일순 진저리를 쳤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 인근 병원으로 가는 내내 미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존이 다쳤다. 존이 다치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못해본 일이었기에 그녀는 심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화강암처럼 단단해 보이고 피곤이나 질병, 부상 같은 단어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그였건만, 지금 피멍이 들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은 그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존은 결코 부상에 굴복하지 않고 여전히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존은 곧장 응급실로 옮겨졌다. 의사는 일단 상처를 깨끗이 소독하고 찢어진 이마를 꿰맸다. 이마를 제외한 다른 부위의 상처는 꿰매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경미해서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퉁퉁 부어오른 왼쪽눈이었다.

[템파의 종합 병원으로 가서 안과 전문의의 검진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퉁퉁 부은 존의 왼쪽 눈을 주의 깊게 검사한 후 의사가 말했다.

[내겐 그런 검사 따윌 받을 시간이 없소.]

존이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 눈입니다.]

의사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큰 충격을 받아서 광대뼈에 금이 갔을 정도예요. 물론 한쪽 눈이 멀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저도 더 이상·.]

[그는 갈 거예요.]

미셀은 얼른 의사의 말을 끊고 끼여들었다.

존은 즉시 화를 내며 오른쪽 눈만 가지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 역시 지지 않고 그런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너무 미묘해서 그 차이를 설명하긴 힘들지만, 한쪽 눈에 비친 미셀은 이상하리만큼 예뻐 보였다. 창백하고 긴장된 얼굴임에도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한쪽 눈으로 봐도 이럴진대 두 눈으로 보면 얼마나 더 멋져 보이겠는가!

존은 으르렁거리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당신만 같이 가준다면 그렇게 하겠소.]

그는 순순히 템파 행을 승낙한 이유를 그녀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두었다. 중요한 건 그녀를 목장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템파까지 그녀가 같이 가준다면 앤디 펠프스가 그의 차에 총을 쏜 녀석을 찾아내는 동안 미셀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

백맨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확신으로 변한 상태였다. 백맨의 위협은 단순히 전화로 미셀을 괴롭히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고로 위장해 미셀이 탄 차를 차도에서 밀어낸 것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섰다. 총기 사고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니까.

사고를 당할 때 미셀이 함께 있지 않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처음엔 총알이 자신을 노린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총알이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 날아온 것 같아서였다.

빌어먹을, 차 유리가 깨질 때 균형을 잃지만 않았어도! 그는 총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핸들을 홱 틀었고, 트럭은 풀밭을 미끄러져 내려가 커다란 밤나무에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그는 핸들에 얼굴을 들이박고 잠시 의식을 잃었었다. 그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이미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조사하기에는 때가 늦어 있었다. 백맨은 이미 멀리 가버린 후일 테고, 섣부르게 조사한답시고 그나마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지우게 되면 큰일이니 말이다. 그 시점부터는 차라리 전문가인 앤디 펠프스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앰뷸런스를 부르겠습니다.]

의사가 응급실을 나서며 말했다.

[앰뷸런스는 싫소. 난 미셀과 함께 갈 거요.]

존의 고집스런 태도에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래퍼티 씨, 뇌진탕 증세도 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당신은 지금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해야 한단 말입니다. 게다가 만일 눈에 손상을 입었다면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앰뷸런스를 타고 템파까지 가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에요.]

존은 잔뜩 인상을 썼다. 미셀 혼자 메르세데스를 타고 템파까지 오게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백맨에게 미셀을 고스란히 갖다바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셀은 그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럼 미셀도 나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가면 되겠군.]

[전 메르세데스를 타고 곧바로 뒤따라갈게요.]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미셀이 그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잠깐 집에 들러 갈아입을 옷가지도 챙겨야 하니까요.]

[그럼 한 시간 정도 후에 앰뷸런스를 부릅시다. 그 사이에 목장에 연락해서 네브한테 우리 옷가지를 챙겨오게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메르세데스를 몰고 가라고 하면 될 테니까.]

존은 명쾌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의 결심을 강조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지 않는다면 템파까지 가는 일은 없을 거요.]

미셀은 그의 결심이 무척이나 확고하다는 걸 깨닫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템파의 병원으로 가는 문제에 대해선 쉽게 양보한 사람이 그녀와 같이 가는 문제에 대해선 저렇게 고집을 부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네브를 시켜 차를 몰고 목장에 가져다 놓으면, 아무런 이동수단도 없이 템파에 머무르게 되는 셈이 아닌가! 거기에 따른 불편함을 그가 모를 리 없건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고집하는 이유를 알아낼 시간이 없었다. 어쨌든 존이 앰뷸런스를 함께 타고 가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녀로선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셀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 그녀에게 목장으로 전화를 해서 네브한테 두 사람의 옷가지를 챙겨오라는 지시를 전하라고 했다. 그녀는 즉시 목장으로 전화를 하러 나갔다. 존은 문이 닫힌 후에도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불쑥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 선생, 여기 어디에 사용할 수 있는 전화가 또 있소?]

[여기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침대에서 일어나면 안되고, 함부로 걸어다녀선 더더욱 안 됩니다. 급한 용건이라면 부인께 부탁하시죠.]

[그녀가 모르게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요.]

존은 미셀을 그의 아내로 착각한 의사의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부탁 하나 합시다. 보안관 사무실에 연락해서 앤디 펠프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시오. 하지만 펠프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알려서는 안 되오.]

의사는 잠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 커다란 남자를 살펴보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지금쯤 완전히 정신을 잃고 드러누워 있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마치 온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어쨌든 그는 엄청난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정신을 유지하며 강철 같은 권위를 드러내는 이 남자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이대로 누워 있겠다고 약속하시면 전화를 걸어드리죠. 래퍼티 씨, 잘못하다간 한쪽 시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나머지 인생 동안 한쪽 눈에만 의지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시라구요. 좀더 안정을 취하고 계실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존은 한쪽 입술 끝을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사 양반, 그건 내가 이미 한쪽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 것 정도는 미셀의 안위에 비하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 어느 것도 미셀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지금처럼 강한 충격을 받은 후에는 일단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습니다. 동맥류 굴절이 안와, 즉 눈구멍까지 전이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안와는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1차로 압력을 대신 받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동맥류 굴절이라 해도 시력은 구할 수 있지만 일단 수술을 받아야 하죠. 그 외에도 신경 조직에 손상을 입었거나 수정체가 탈구됐을 수도 있고, 또 망막이 파열됐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안과 전문의가 아니라서 확실한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가능한 한 안정을 취해야만 더 심한 손상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죠.]

답답해진 존은 자리에 누워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마비된 것 같은 증상을 무시했듯이 통증도 애써 무시해 버린 채. 이미 손상을 입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광대뼈가 부서졌을 수도 있고, 안와가 망가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얼굴이 망가졌거나 한쪽 눈이 멀었따 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미셀이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었다.

그는 가능한 한 사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총알이 차창을 박살내기 전에 백맨의 위치를 알려주는 반사광 같은 걸 봤던가? 혹시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왔을 가능성은? 아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걸어다니기에는 목장이 너무 넓으니까. 그렇다고 말을 타고 왔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말을 빌리는 건 차를 렌트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든 일이었고,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쉬웠다. 그렇다면 차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가 정말 차를 몰고 목장으로 들어왔다면,대체 무슨 수로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앤디 펠프스는 네브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미셀을 의식한 앤디는 존에게 잘생긴 얼굴이 망가졌으니 어떡하냐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존이 네브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는 동안 옆에서 기다렸다. 네브와 얘기가 끝나자 존은 곧장 미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브가 가져온 물건들을 한 번 살펴봐야 하지 않겠소? 혹시 빠뜨린 물건이 있으면 네브에게 일러두고. 그럼 그가 템파까지 가져다 줄 테니까.

미셀은 왠지 모르게 존이 그녀를 병실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는 인상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말이 없는 부보안관과 존을 흘끗 쳐다보고는 네브와 함께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네브조차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섰다. 뭔지는 몰라도 다들 그녀가 알게 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존과 관련된 일이리라.

그는 비록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어쨌든 템파의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권유를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인 반면, 그녀가 혼자 차를 목로 템파까지 가는 일에 대해서만큼은 무척이나 비이성적으로 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비어성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었던 존 래퍼티가 말이다! 게다가 네브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문득 존이 부보안관과 은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녀와 네브를 내보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단지 친구의 문병을 온 것이라면 앤디가 저렇게 급히 달려올 리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존이 운전 미숙으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존은 운전 면허를 따기도 전부터 트럭을 몰고 목장의 거친 돌길을 다닌 사람이었다. 반사 신경 또한 뛰어났고, 그런 그가 트럭을 몰다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나무를 들이받았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당한 사고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었다.

로저.

바보 같으니라구, 미셀은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나무랐다. 존은 로저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실수였다. 로저의 편집증적인 질투심이 존에게로 향할 것을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로저의 입장에서 보면 존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아간 남자이니 말이다. 그녀가 로저를 유인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로저는 존을 스토킹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셀은 격한 분노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로저는 결코 존의 상대가 될 수 없지만, 비겁하게 뒤에서 몰래 기습을 한다면 문제가 달랐다.

미셀은 에디가 챙겨둔 조그만 가방 두 개를 흘끗 쳐다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브, 나 속이 안 좋아요.]

미셀이 속삭이듯 말했다.

[잠깐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네브는 금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간호사를 불러줄까요?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 같아요.]

[아뇨. 괜찮을 거예요.]

미셀은 애써 연약해 보이는 표정을 가장하고 거짓말을 했다.

[전부터 피를 보는 걸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래요.]

미셀은 네브의 팔을 살짝 두드려 주고는 얼른 화장실 쪽으로 갔다. 하지만 화장실로 들어가는 대신 칸막이 모서리에 숨어 네브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하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존의 병실 쪽으로 갔다. 병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다행히 완전히 닫힌 건 아니어서 미셀은 존이나 펠프스에게 들키지 않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었다.

곧 두 남자의 얘기 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총알은 왼쪽 약간 위에서 날아왔다고 생각되오.]

존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네브가 사고 트럭을 보여줄 거요.]

[총알이 트럭 좌석에 박혔을 가능성은?]

[아마 없을 거요. 총알의 궤도가 그 각도가 아니라서.]

[어찌됐든 탄피는 찾아낼 수 있을 거요. 항공사에서는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지만 다른 각도로 조사를 해볼 생각이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그는 템파를 거쳤을 테고, 그럼 공항에서 차를 렌트했겠지. 그의 인상착의만 알 수 있다면 확인하기가 훨씬 쉬울 텐데.]

[그건 모르지만, 그자가 파란색 시보레를 렌트한 건 확실하오. 그럼 조사 대상이 좀 좁혀지지 않겠소?]

[여기 플로리다 주에만 해도 파란색 시보레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어쨌든 미셀을 템파로 데려가는 건 좋은 생각이오. 백맨에 대해 조사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 당신이 원한다면 템파에 있는 동료들을 동원해서 경비를 서게 하겠소.]

[여기 의사가 내가 템파의 병원으로 갔다는 사실만 비밀로 해준다면 그 녀석은 아마 미셀을 찾아낼 수 없을 거요.]

[그건 가능하오.]

앤디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미셀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 네브에게 갔다. 네브는 잡지를 보고 있다가 미셀이 옆에 앉자 즉시 고개를 들었다.

[기분은 좀 나아졌습니까?]

네브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미셀은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대답이 제대로 됐는지 네브는 마음을 놓은 얼굴로 다시 잡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존이 당한 사고는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로저가 그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존이 괴전화나 차 사고에 로저가 관련되어 있다는 그녀의 말을 믿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이제야 그녀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쯤 돌아올 건지 꼬치꼬치 캐물었던 게 이해가 갔다. 존은 그녀를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오히려 로저를 유인하기 위해 사방을 돌아다녔으니뀉..존이 걱정을 한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그제야 존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제멋대로 행동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쓰디쓴 경험을 통해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지나치게 그 교훈에 얽매였던 것 같았다.

처음부터 존은 아무 조건 없이 그녀를 도왔다. 그녀 혼자 힘으로 돌보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목장 일을 아예 도맡은 건 물론, 목장이 이익을 낼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위안, 보호와 관심, 그리고 이제는 아기까지 주었건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싫증이 난 게 아니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느라 과도한 중압감에 시달렸던 것뿐이었다. 오로지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던 거였다. 그다운 행동이었다. 그의 보호 본능과 소유욕은 엄청난 것이어서 어떤 이성적인 논쟁으로도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삶에서 특별한 건 거의 없었지만, 한 번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건 영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그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한 존재였고, 그는 자신의 것은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었다.

펠프스는 그 후로도 존과 잠시 더 얘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미셀은 펠프스와 네브가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존의 병실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존은 즉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디가 제대로 물건을 챙겨 보냈는지 모르겠군.]

피멍이 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격한 분노에 휩싸였다. 어떻게 해서든 로저에게 이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마다 존에 대한 원시적인 보호 본능이 새겨졌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남을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고 차분하게 존의 손을 잡기 위해 그녀는 모든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에디가 뭘 어떻게 챙겨 보냈든 상관없어요.]

[난 괜찮을 거야.]

존은 나지막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최악의 경우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되더라도 그의 회복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존 래퍼티는 최고 순도의 강철로 만들어진 남자니까.

그녀는 앰뷸런스를 타고 템파까지 가는 동안 존의 옆에 붙어 앉아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 한쪽 눈만 사용한 탓에 눈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병원에 도착해서야 눈을 뜬 존은 그제서야 미셀이 얼마나 지쳐 보이는지 깨닫고 인상을 썼다.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 같았다. 눈만 다치지 않았다면, 그녀를 목장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할 필요만 없었다면, 그는 벌써 일을 하러 나갔을지도 몰랐다.

백맨이 사고의 배후에 있다는 의심이 든 즉시 그녀를 어디로든 보내야 했지만, 그녀를 자신의 눈에서 벗어난 곳에 두는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계속 옆에 둔 것이다.

그가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셀이 그를 바라보던 표정은·..여자들은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 애정이 있지 않은 한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않는 법이다. 미셀이 그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는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는 미셀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백맨의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그녀와 결혼할 작정이었다.

미셀은 존이 세 명의 간호사에게 이끌려 검사실에 가 있는 동안 입원 절차를 밟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간호사들의 표정을 보니 얼굴에 부상을 입었어도 그의 남성미에는 전혀 손상이 없는 듯했다.

미셀은 그로부터 세 시간 넘게 존을 만나지 못했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치밀어오르자 미셀은 즉시 카페테리아로 가서 눅눅한 크래커를 먹었다.

존은 아마도 이틀 정도는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걸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며칠 동안 그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그에게 자신의 상태를 숨길 수 있겠는가. 아무리 한쪽 눈이 다쳤다 해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더구나 임신과 출산은 존에게 있어 지극히 익숙한 것이었다. 암소는 송아지를 낳고 암말은 망아지를 낳는다. 목장의 모든 것이 짝짓기를 하고 번식을 했다. 감기라는 핑계로는 그리 길게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곧 그녀의 속이 울렁거리는 진짜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사실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녀 역시 그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길 바랐고, 임신의 모든 과정을 그와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로저가 그녀뿐만 아니라 아이의 목숨까지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알면 그가 뭔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셀은 명확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그들은 이 병원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것이 미셀의 안전을 의미하는 한, 존은 쉽게 병원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그가 이곳에 오기로 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펠프스에게 로저를 찾아낼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리라.

하지만 그가 퇴원할 때까지 펠프스가 로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들에겐 로저를 고발할 증거가 없었다. 지금쯤은 시보레의 수리도 완전히 끝났을 테고, 또 그가 존에게 총을 쏘는 걸 목격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 또한 그는 전화로 미셀을 협박하지도 않았다. 최소한 구체적인 말로는 협박한 적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미셀은 그를 잘 알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위협감을 느끼기엔 충분했으니까.

더 이상 로저에게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미셀은 지난 2년 동안 로저와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심정적으로는 계속 그에게 매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존은 그런 그녀를 그의 격렬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되살아나게 했고, 그의 자식까지 안겨주었다. 그녀는 이제 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로저와 직접 대면해 그 오래된 악몽을 직시하고 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끔찍한 두려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저 두려운 나머지 그를 피하기만 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존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아기를 위해서 로저와 맞서 싸워야 했다.

미셀은 존에게 배당된 병실로 가서 그를 기다렸다. 30분쯤 후 존이 휠체어를 타고 병실로 돌아왔다. 간호사들이 그를 침대에 눕힌 다음 병실을 나가자, 존이 기다렸다는 듯 악문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더 이상 못 참아! 누구든 한 번만 더 날 귀찮게 하면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 거야.]

존은 천천히 베개에 머리를 대고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 부분을 약간 들어올렸다.

미셀은 존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안과 전문의는 만나본 거예요?]

[세 명이나. 이리 와봐.]

그 낮은 목소리나 그의 오른쪽 눈에 번쩍이는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가까이 오라니까.]

그는 한쪽 손을 뻗으며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존 패트릭 래퍼티 씨, 당신은 지금 내게 그런 명령을 내릴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명심하시라구요.]

[그런다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미셀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 이리저리 움직이면 안 돼요.]

[움직이려는 게 아니야. 키스만 할 거라구.]

존은 얼굴의 부기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기랄, 몸이 따라주질 않아.]

미셀은 그제서야 그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존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찔러넣으며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려는 듯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마침내 그는 쾌락의 신음을 흘리며 마지못해 그녀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자기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긴 후에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주사나 맞고 엑스레이나 찍는 동안 뭘 하며 지냈소?]

[아,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실제로 거장의 손길이 움직이는 걸 보지 않고는 바닥을 닦는 일이 얼마나 예술적인지 모를 거예요. 게다가 별 네 개짜리 카페테리아는 또 어떻구요. 내가 먹어본 중에서 가장 눅눅한 크래커를 제공하더라니까요.]

미셀은 그가 자신이 내뱉은 마지막 말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존은 한때 그녀를 응석받이로 자란 여자라고 생각했던 걸 떠올리며 미소를 되돌렸다. 지금의 그녀를 보면 대체 무슨 이유로 그녀를 버릇없이 자란 부잣집 응석받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일도 못하게 했건만 미셀은 늘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또한 그녀는 포르셰 대신 낡은 트럭을 몰면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했으며, 실크 드레스를 좋아하는 한편 낡은 셔츠와 면바지도 즐겨 입었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여자의 버릇을 망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조 침대를 갖다달라고 해요.]

존이 성한 한쪽 눈을 짓궂게 빛내며 말했다.

[아니면 나랑 한 침대에서 자든지.]

[간호사들이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은데요.]

[문에 잠금 장치가 달려 있지 않소?]

미셀은 낄낄 웃었다.

[아뇨. 당신은 운이 없군요.]

존은 연인의 손길로 은밀하게 미셀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시력을 잃으면 날 싫어할 거요?]

그때까진 그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다는 생각 따윈 전혀 하지 못했던 그녀는 충격으로 헉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는 그런 그녀를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곧 그가 확실한 대답을 원한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몸에서 힘을 빼며 잠시 말을 골랐다.

[당신을 위해선 마음이 아프겠지만, 나로서는 당신이 한쪽 눈을 잃는다 해도, 아니 장님이 된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거예요.]

미셀은 결국 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말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 말이 튀어나왔고 이제 와서 취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순간 존의 성한 한쪽 눈이 검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지금껏 그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까만 밤하늘 같은 눈동자는 그녀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미셀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미셀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당신을 구속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내 감정이 그렇다는 거지 당신에게 뭘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그는 미셀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젠장, 왜 이렇게 날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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