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셀, 전화예요!]
에디가 부엌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미셀은 막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러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곧장 서재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미셀의 마음은 온통 자기 목장에 가 있었다. 현재 그녀의 소들은 모두 최상의 상태였다. 존이 주선해 준 대로 판매만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조만간 파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은 그런 그녀의 예상에 아무 말 없이 인상을 썼을 뿐이다.
[여보세요?]
미셀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침묵.
익숙한 한기가 등줄기를 따라 흘렀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는 손가락 관절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수화기를 틀어 쥔 채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미셀]
속삭임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상대방의 정체를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안 돼요.]
미셀은 거의 반사적으로 부르짖었다.
[다시는 내게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제발 날 가만히 놔둬요.]
미셀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책상에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곧 두려움에 휩싸였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로저가 어떻게 알아냈을까? 오, 하느님, 로저가 다시 날 괴롭히는 걸 존이 알게 된다면? 존은 아마 엄청 화를 낼 것이다. 아니, 화를 내는 것 이상일 것이다. 어쩌면 로저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로저는 존이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할까? 날 바꿔달라고 할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다 전화를 끊을까?
침묵. 미셀은 곧 지난번의 그 정체 모를 이상한 전화들을 기억내 냈다. 기분 나쁜 침묵이 흐르던 그 전화들 말이다. 그제야 그녀는 그 전화들이 다 로저의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화를 건 사람은 분명 로저였다. 왜 전에는 몰랐을까? 로저라면 그녀가 사는 곳 정도는 쉽게 찾아낼 정도로 돈도 있고 그녀에게 편집증적인 집착을 갖고 있지 않은가!그는 분명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물론, 그녀가 존과 친밀한 관계라는 것도 알아냈을 것이다. 그의 격한 질투심을 생각하자 저절로 속이 울렁거렸다. 로저는 라이벌로 생각하는 남자에게서 그녀를 납치해 그녀가 속한 곳으로 데려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2년도 더 지났는데 여전히 로저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니.
법원에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아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존이 로저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존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로저에게 구타당한 얘기를 털어놓았을 때 존이 보였떤 격한 반응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절대 로저와의 문제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곧 미셀은 그 문제에 있어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서재 문이 열리더니 존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들어선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서재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고 에디가 얘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흔치 않은 일이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테고.
너무나도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미셀은 미처 얼굴 표정을 수습할 틈이 없었다. 존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창백하게 질린 미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전화기 쪽으로 향했다.
그녀에 관해서라면 그는 아무리 작은 것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로저의 전화를 받은 충격에서 회복될 시간이 있었다면 또 모를까, 그녀는 이제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왜 그는 이렇게 빨리 마구간에서 돌아온 걸까? 아니,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지 않은 게 실수야. 그랬더라면 샤워를 하는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내심 후회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그 남자한테서 온 전화였소?]
존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셀은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그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 존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 남자가 뭐라고 한 거요? 당신을 협박했소?]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협박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그가 뭐라고 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서.]
미셀의 목소리에는 평정을 잃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을 떨쳐내고는 곧장 서재를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존은 그런 그녀를 제지하며 한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 녀석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지?]
미셀은 화들짝 놀라 그의 손에 들린 수화기를 뺐으려했다.
[아뇨, 그러지 말아요!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구요.]
존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수화기를 뺐으려는 그녀의 팔을 거머쥐었다.
[그 녀석에서 당신을 괴롭히려면 먼저 나를 상대해야 할 거라는 점을 알려줄 거요. 그러니 어서 그의 전화번호나 알려주시오. 아직 기억하고 있을 거요. 당신이 정 알려주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알아보겠소.]
[비공개 전화번호예요.]
존은 한동안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알아낼 수 있소.]
미셀은 그가 그렇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존은 한 번 결심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결국 그에게 대항하는 걸 포기하고 로저의 전화 번호를 알려주었다.
존은 곧장 그녀가 불러준 전화번호를 눌렀다. 미셀의 귀에 신호음이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침내 누가 전화를 받은 듯 신호음이 떨어지자 존은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감히 어느 누구도 그의 기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듯.
[로저 백맨을 바꿔주시오. 지금 당장.]
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있던 존이 문득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후 그는 상대방에게 고맙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미셀을 꼭 끌어안았다.
[가정부라는 여자의 말로는 로저가 남프랑스로 여행을 갔다는 거요. 언제 돌아오는지는 모르겠다고 하더군.]
[그럴 리가! 분명히 방금 전 로저와 통화를 한걸요!]
존은 잠시 뭔가에 마음을 빼앗긴 듯 미셀을 놓아주고는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이만 올라가서 샤워나 하는 게 어떻겠소? 나도 곧 올라가리다.]
미셀은 다시금 절망했다. 존도 그녀를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로저는 남프랑스에 있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통화감이 좋았다. 그런데도 존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 자동차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서재를 나서는 미셀의 등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가정부의 말처럼 로저가 남프랑스에 있다면 왜 그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올 예정인지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미셀이 서재에서 나간 후로도 존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미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등에 난 작은 상처 자국들과 전남펴넹 대해 얘기할 때의 고통 어린 표정도 어른거렸다. 방금 전에도 미셀은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뭔가 분명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로저 백맨이 미셀에게 접근하기 전에 그를 지옥에 보내버려야 했다.
정보가 필요했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정보를 얻어야 했다.
미셀은 그에게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니까.
지난 여름 다이아몬드 만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 이웃인 레이첼 존스가 총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그때 존은 총상을 당한 레이첼을 부둥켜안고 있던 남자의 눈에 어린 지옥 같은 고통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그 남자는 마치 영혼이 갈가리 찢겨나간 것처럼 괴로워 보였다. 그 당시엔 그 남자가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가히 짐작조차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미셀이 위험에 처한 지금에야 그는 그때 그 남자가 겪었던 고통의 정도가 어떠했을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미셀이 없이는 그의 인생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결국 레이첼은 무사히 회복되어 지난겨울 그 검은 눈의 전사와 결혼을 했다. 존은 레이첼의 남편이 된 세이빈의 힘을 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도왔던 그 커다란 금발머리 남자의 힘도. 그들이라면 존이 미셀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심정을 이해하고, 그 짐승 같은 백맨 녀석을 잡는 데 기꺼이 도움을 줄 것 같았다.
존은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을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 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앤디 펠프스는 남아 있었다. 부보안관인 펠프스하고는 지난여름 다이아몬드 만에서 있었던 일로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존은 보안관 사무실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미셀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앤디 펠프스 씨를 부탁합니다.]
잠시 후 자신이 찾던 남자가 수화기 너머에 나타나자 존은 다짜고짜 용건을 말했다.
[앤디, 래퍼티요.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소?]
앤디는 DEA(마약 단속국) 요원 출신으로 아직 그쪽 사람들과 선이 닿아 있었다.
앤디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오?]
존은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앤디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미셀은 전화를 건 남자가 전남편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에 전화를 해보니 가정부가 그는 외국에 나갔다고 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미셀은 전화를 건 남자가 전남편이라고 확신하오?]
[그렇소. 그리고 그자가 프랑스에 있지 않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소.]
[별로 정보가 없군. 법원에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아내려면 그 전화를 건 사람이 전남편이 확실하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그 남자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잖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요. 그가 정말 외국으로 나갔는지 알아봐 줄 수 있겠소? 알아보나마나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런 척을 하는 것 같소? 뭔가 자신의 흔적을 덮어버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소?]
[래퍼티, 당신은 정말 그가 외국으로 나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소.]
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셀의 몸에 남겨진 상처 자국을 봤소. 그 미친 녀석이 다시는 미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하오.]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앤디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변했다.
[그 녀석이 이 근처에 있을 가능성은?]
[녀석이 자기 집에 있지 않은 건 확실하고, 또 프랑스에 있지 않다는 것도 아오. 하지만 이 근처에 있을 가능성은 솔직히 잘 모르겠소. 어쨌든 녀석은 미셀에게 전화를 걸었고, 미셀은 잔뜩 겁을 먹었소. 난 그자가 이 근처에서 어정거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곧 조사를 시작하겠소. 마침 부탁할 만한 곳도 있고. 어쨌든 그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올 경우에 대비해 전화기에 자동 응답기를 설치해 두도록 하시오.]
[한 가지 더 말해줄 게 있소.]
존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몇 주 전에 미셀이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소. 미셀은 파란색 시보레를 탄 남자가 그녀의 차를 차도에서 밀어버렸다고 했지만, 미셀이 몰던 차에는 파란색 페인트가 묻은 흔적이 전혀 없었소. 목격자도 전혀 없고. 그래서 그때는 그저 미셀이 운전 미숙으로 사고를 일으키고 당황한 나머지 그런 말을 지어낸 줄로만 알았지. 하지만 미셀의 말로는 그 차가 U턴을 해서 돌아와 그녀가 탄 차를 한 번 더 들이받았다고 하더군.]
[그냥 일반적인 뺑소니 운전자는 아닌 것 같소만.]
앤디가 날카롭게 말했다.
[미셀이 다른 말은 없었소?]
[그게 전부요.]
[당신은 그러니까, 그 파란색 시보레를 몰던 남자가 그녀의 전남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거요?]
[모르겠소. 하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건 모두 고려해 보고 싶소.]
[알았소. 조사해 보리다. 당신도 전화기에 자동 응답기부터 달고 미셀을 잘 지켜보도록 하시오.]
존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다 지껄였다. 그녀를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차사고 이후로 그녀는 목장 밖으로 아예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 존은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닫고 자신과 로저 백맨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이다. 그 사고가 났던 날 미셀의 말을 믿기만 했어도 시보레에 대해 제대로 조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셀이 자동차 사고와 백맨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미셀에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그녀는 이미 충분히 겁에 질려 있으니까.
앤디가 정보를 주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조사를 마친 후에는 이미 때가 늦을지도 몰랐다. 그는 다행히도 백맨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늦지 않게 밝혀진다면 기필코 그 자식을 찾아내 다시는 미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리라 다짐했다.
미셀은 갑자기 공포에 질려 분필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자던 존이 어깨를 뒤척이며 잠결에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미셀은 그가 잠에서 깰까 봐 얼른 다시 드러누웠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로저였다. 그 파란색 시보레를 운전하던 사람 말이다. 로저가 그녀를 죽이려 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 플로리다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그녀가 혼자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셀은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에 자신을 엄습했던 악의에 찬 한기를 기억해 냈다. 괴전화를 받았을 때도 그와 똑 같은 기운을 느꼈다는 것도. 지금까지 두 사건을 연관시켜 생각지 못한 건 자신의 불찰이었다.
로저는 그녀와 존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셀은 어떻게 로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도 추측할 수 있었다. 비치 섬너. 존과 그녀가 템파에 갔을 때 만났던 팜 비치에서 제일가는 수다쟁이. 그 소문이 필라델피아까지 전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미셀 캐보트가 정말 잘생긴, 보기만 해도 몸이 더워질 정도로 섹시한 남자와 잉꼬처럼 다정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었으리라. 비치가 전화에 대혹 나름대로 각색까지 해가며 그 섹시한 목장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로저는 아마 미셀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온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맹세한다고 속삭이던 로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런 로저이니만큼 존과 그녀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질투로 완전히 이성을 잃었을 게 뻔했다. 아마 마침내 다른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로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로저가 어딘가에서 그녀가 혼자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덫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저 예감만으로 로저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해봐야 경찰에서 나설 리가 없었다. 게다가 미셀은 경찰에 대해 그리 신뢰감이 없었다. 로저의 부모가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증거를 은폐하고 증인을 매수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제 로저가 그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로저가 그 돈으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을지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정말 청부업자를 고용했다면, 그녀로선 도대체 누구를 경계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속절없이 화를 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미셀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지만, 로저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그 후로도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목장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끔찍한 상상에 시달렸고, 덕분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식욕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존한테라도 사실을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에게 얘기만 해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쓰라린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계속 침묵을 지키게 만들었다. 차 사고나 괴전화에 대해 전혀 믿어주지 않던 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존은 전화기에 자동 응답기를 달긴 했지만 그녀에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듯 했고, 미셀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로저의 전화가 걸려온 후로 그들의 관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경직되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존은 그 문제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런 그를 보며 미셀은 이제 자기한테 싫증이 난 게 아닌가 싶어 전보다 더 그에게다가서기가 힘들었다. 다만 침대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았다. 그와 나누는 사랑은 여전히 갈망과 열정이 뒤섞인 뜨거운 행위였고, 횟수 또한 여전히 잦았다.
유난히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아침, 미셀은 마침내 한계에 이른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빌어먹을 로저, 어떻게 하면 그를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내몰 수 있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나머지 인생도 내내 그를 두려워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전전긍긍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고,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혼을 쟁취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진단서는 아직 그녀의 수중에 있었다. 체면을 중시하던 로저의 부모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으니 예전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증거물이었다. 로저가 전에도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 말이다. 만약 로저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면 과의 통화 내용을 테이프에 녹음해 놓는 방법도 있다. 로저로 하여금 치명적인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필라델피아뿐만 아니라 플로리다에서도 돈이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건 알지만, 여기라면 로저를 보호해 줄 그런 친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단서를 비롯한 이혼 관계 서류는 그녀의 집 금고에 있었다. 미셀은 그 서류들을 이곳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비록 문을 잠가놓긴 했지만 빈집에 그런 중요한 서류들을 남겨 놓는 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리 안전한 금고가 아닌 탓이었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 수 있을 테니까. 만약 그 서류가 로저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녀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와 맞서야 한다. 그 사진과 진단서는 다시 구할 수도 없는 중요한 증거였다.
당장 서류를 가져오기로 마음먹은 미셀은 에디에게 말을 타고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목초지를 따라 그녀의 목장으로 가는 길은 원래 즐거운 승마 코스였지만, 오늘은 복부가 딱딱하게 뭉친 것처럼 긴장이 된 나머지 미처 승마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을 때 로저가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과, 파란색 시보레가 자신에게 달려들 때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뒷길을 통해 집에 도착한 미셀은 말에서 내리면서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지만 이상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재빨리 현관문과 창문들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모두 단단하게 잠겨 있었고 누군가 강제로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그제서야 미셀은 집 안으로 들어가 서둘러 서재로 갔다. 금고를 열고 마닐라 봉투에 담긴 내용물을 살펴본 그녀는 아무것도 흐트러지거나 빠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봉투를 셔츠 안에 잘 숨긴 다음 금고를 다시 잠갔다.
집 안은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 그런지 공기가 탁하고 더웠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녀는 갑작스레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빙빙 도는 걸 느끼고 서둘러 뒤쪽 베란다로 나가 한참을 벽에 기댄 채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때까지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로저가 다시 전화를 해올 때까지. 그때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미셀은 곧장 말을 타고 다시 존의 목장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미셀의 모습을 발견한 존의 일꾼 하나가 안도한 기색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세상에, 이렇게 돌아오신 걸 보니 정말 반갑습니다. 당장 보스에게 당신이 돌아왔다고 연락을 해야겠어요. 보스가 당신을 찾아 목장을 발칵 뒤집어 놨다구요. 꼭 지옥의 사자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이런,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어요.]
[왜요?]
미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 에디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일러두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대체 왜.
[전 잘 모르겠습니다.]
일꾼은 미셀에게서 말고삐를 받아들고 마구간 쪽으로 가버렸다.
미셀은 집 안으로 들어가 곧장 에디를 찾았다.
[왜 존이 화가 난 거죠?]
미셀의 물음에 에디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물어볼 정도로 가까이 가지를 않았어요. 어찌나 험악한 기색인지..]
[내 말을 전하지 않았어요?]
[물론 전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화를 벌컥 내더라구요.]
미셀은 존이 갑자기 급하게 장부를 확인할 일이 있어 자신을 찾았는데 자리를 비워서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서재로 가보았지만 장부는 전혀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그녀는 일단 셔츠 안에서 마닐라 봉투를 꺼내 존의 금고에 넣어두었다. 그제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존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곳이라면 그녀는 안전했다.
몇 분 후에 존의 트럭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속도로 판단하건대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게 분명했다. 놀랐다기보다는 호기심에 미셀은 그를 마중하러 현관으로 나갔다. 타이어가 자갈길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트럭이 급정거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존이 차문을 열고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손에는 라이플이 들려 있었다. 딱딱하게 긴장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존의 눈에 검은 불길이 이글거렸다.
[제기랄,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셀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라이플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말을 타고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는 거, 에디한테 들었을 텐데요.]
옆으로 바짝 다가선 존이 그녀의 팔을 잡고 집 안으로 질질 끌고 갔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대체 어딜 갔었냐구. 사람들을 모두 풀어서 당신을 찾고 있었어.]
[집에 갔었어요.]
미셀은 존의 태도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펄펄 뛰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미셀은 턱을 쳐들고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내 집에 가는데 일일이 당신 허락을 구해야 하나요?]
[그래, 허니, 당신은 내 허락을 받아야 해.]
존은 즉시 맞받아치며 라이플을 다시 벽장에 넣었다.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외출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내가 당신의 죄수인지는 미처 몰랐어요.]
미셀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응수했다.
[빌어먹을, 죄수라니!]
존이 홱 돌아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미셀을 찾아다니는 동안 자신을 엄습했던 그 생생한 공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상황이 어떤지, 로저 백맨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미셀을 아예 침실에 가둬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미셀의 격노한 표정을 본 순간, 그는 자신이 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셀은 이제 본격적으로 그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소.]
존이 아까보다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총을 쏠 대상을 찾아 목장을 헤매고 다녔단 말이에요?]
미셀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오. 목장을 헤집고 다닌 건 당신을 찾기 위해서고, 총은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를 생각해서 들고 갔던 거요.]
미셀은 존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진짜 위험에 대해선 믿어주지도 않으면서 고작 말에서 떨어져 다칠까 봐 걱정하다니.
[도대체 어떤 위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미셀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이 목장에선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뱀도 사람을 물지 못할텐데, 아닌가요?]
존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미셀은 여전히 모욕을 당한 여왕처럼 당당하게 버티고 서서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녀가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보단 차라리 지금처럼 성질을 부리는 편이 훨씬 보기가 좋았다.
[당신은 화를 낼 때가 더 예뻐.]
그는 미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알면서 그녀를 놀렸다.
미셀은 그의 예상대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 이 멍청이 같으니라구..]
존 역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누구도 미셀처럼 거만한 어조로 멍청이라는 말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존은 즐거웠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멍청이라는 소리를 해도 좋았다. 존은 여전히 깔깔거리고 웃는 그녀를 확 잡아당겨 품에 안고는 도톰한 입술 사이로 천천히 혀를 밀어 넣었다. 미셀은 즉시 웃음을 멈추고 그이 터질 듯한 이두박근을 부여잡은 해 그의 혀를 입 안으로 맞이했다.
[제기랄, 당신이 너무 걱정돼.]
존이 입술을 살짝 떼고 중얼거렸다.
[항상 걱정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미셀의 애교 섞인 말에 존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 아니야. 당신이 내 눈앞에 안 보이기라도 하면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라구. 당신 혼자 지에 가보는 건 더 그래. 거긴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잖아. 부랑자들이 어슬렁 거릴 수도 있고..]
[부랑자들이 그렇게 외진 곳에 무슨 볼일로 어슬렁거리겠어요?]
미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범죄가 도시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잖소. 제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혼자서 거기 가는 일은 없도록 해, 응?]
존 래퍼티가 애원하듯 부탁을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미셀은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론 제발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그녀가 반발하고 나선 데에는 존이 너무 오만하게 굴었던 탓도 컸다. 존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당분간 조심하며 지낼 필요가 충분하지 않은가.
그녀의 집에서 느꼈던 어지럼증과 구역질은 아무래도 초기 감기 증상이었던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예의 그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만 하면 곧 끔찍한 어지럼증이 밀려들고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에 그날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음날에도 그나마 음식을 조금 먹을 수 있었을 뿐, 여전히 침대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일까지 낫지 않으면 병원에 가봐야겠소.]
존이 그녀를 꼭 끌어안고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냥 감기에 걸린 것뿐이에요.]
미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한테 가봤자 별 뾰족한 수도 없을 거라구요. 이대로 좀 쉬면 나아지겠죠.]
[속이 울렁거리는 거라도 진정시켜야 하지 않겠소?]
[오늘은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러다가 당신한테 감기가 옮으면 어떡해요?]
[그럼 내가 나을 때까지 당신이 내 시중을 들어줘야지.]
그는 미셀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가기가 옮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감기를 앓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니까.
다음날 아침, 미셀의 상태는 좀더 호전되었다. 하지만 아직 말을 타고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서재에서 장부 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을 하다 보니 컴퓨터에 회계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좀더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존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로저에게선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미셀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로저가 이 근처에 와 있다는 건 확실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로저가 모습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까? 로저와의 문제를 마무리짓지 않는 한, 그녀는 결코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어쩌면 그게 그녀가 해야 할 일일지도 몰랐다. 로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 말이다. 그가 어딘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파란색 시보레가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그런 사고를 저지른 건 아닐 테니까. 그때는 방심하다 사고를 당했지만, 지금은 그녀도 로저가 근처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호락호락하게 봤다간 큰코다칠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로저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 했다.
점심을 먹으로 집에 들른 존은 외출 준비를 마친 미셀을 발견했다. 그녀는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리고 얼굴에도 약간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몇 가지 살 게 있어서 마음에 다녀오려구요.]
미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는 길에 사다줄게요.]
존은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번 차 사고 이후로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던 그녀가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를 몰고 마을에 다녀오겠다니,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사고 이후로 지금껏 그녀가 목장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려 하는 것 때문에 걱정을 했으면서도 그는 갑자기 그녀를 마을에 가지 못하게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무슨 물건?]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도대체 어디를 가려는 거요?]
존의 심문하는 듯한 말투에 미셀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샴푸랑 린스, 뭐 그런 것들을 사려구요.]
[좋소.]
그가 조급한 몸짓으로 재우쳐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그리고 언제 돌아올 거요?]
[정말 당신은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군요. 목장주보다는 간수 노릇이나 하는 게 더 잘 어울렸을 텐데..]
미셀은 짐짓 그를 놀렸다. 그가 더 이상 마을에 가는 걸 막을 수 없도록.
[어쨌든 당신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마을 잡화점에 갈 거고, 3시쯤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미셀이 떠나는 걸 지켜보며 그녀를 말리지 못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 그녀를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하릴없이 서재로 가서 앤디 펠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다짜고짜 아직도 로저 백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앤디가 조사한 바로는 지난달 로저 백맨이라는 사람이 프랑스 행 비행기에 탑승한 기록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비행기가 아닌 다른 이동 수단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사를 마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존, 계속해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건 당신도 알 거요.]
[고맙소. 아무것도 아닌 일로 걱정을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만약의 경우란 게 있으니.
아, 이해하오.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전화해 주겠소.]
존은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심란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미셀에게 그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왜 그녀 혼자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지 얘기를 해줘야 했다. 하지만 앤디가 지적했듯이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할 게 많은 미셀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미셀이 평생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미셀은 마을로 차를 몰고 가는 내내 다른 차가 가까이 접근할 때마다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의심할만한 징조도 없었고. 그녀는 쓸데없는 상상이 아니었다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로저는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용감하지는 못했고, 혼자 자신의 목장으로 갈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미셀은 존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욕실로 달려가 속에 든 것을 몽땅 게워냈다. 처참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다음날 또다시 로저를 유인하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갔다. 그 다음날도 역시. 하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존의 기분만 상하게 만들었을 뿐. 그는 드러내놓고 그녀의 외출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아마 그녀가 이렇게 절망적인 심정만 아니었다면 당장 그의 손에 차 열쇠를 던져주고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로저는 그날 분명히 그녀의 집 근처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존의 목장과 그녀의 목장 사이의 도로에서 잠복하는 게 아닐까? 지난번 이혼 서류를 꺼내오려고 간 날엔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뒷길로 말을 타고 갔기 때문에 로저가 그녀를 발견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존은 절대로 혼자선 집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굳이 집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그 도로까지만 차를 몰고 나가보자. 만약 로저가 거기에 있다면 분명 그녀의 뒤를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