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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유혹-9화 (9/12)

9

상대방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존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검은 눈 역시 잔뜩 가늘어진 상태였다.

마침내 그가 짜증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부채를 정리해 드린 지 겨우 석 달밖에 안 됐는데 또 모든 게 엉망이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셀은 장부에 숫자를 기록하다 말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전화를 받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듣기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대체 뭐라고 했기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말했다.

[좋습니다. 내일 가죠. 하지만 전처럼 또 파티에 가고 안 계시면 곧바로 되돌아올 겁니다.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으니까요.]

존은 거칠게 전화를 끊고 한바탕 욕설을 중얼거렸다.

[누구예요?]

미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그는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미셀은 깜짝 놀랐다.

[당신 어머니요?]

존은 잠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미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충격받은 얼굴을 할 것까진 없잖소. 나도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태어났으니 말이요.]

[하지만 어머님이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은걸요. 난 당신 아버님처럼 어머님도 이미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났으니까. 내 어머니는 목장 생활에 좀처럼 적응을 못 하셨지. 마이애미의 번화함과 팜 비치의 부유함을 너무나 사랑하셨거든. 결국은 어느 화창한 봄날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소.]

냉소적인 그의 어조에 미셀은 마음이 아팠다.

[그때 당신은 몇 살이었어요?]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그쯤 됐을 거요. 하지만 어머니가 떠난 후에도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늘 집이 너무 작고 오래됐다는 둥, 제대로 된 옷이 하나도 없다는 둥 불평을 늘어놓던 모습밖에 없었으니까. 어머니가 계실 때도 엄마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던 아이는 아니었고.]

미셀은 존이 결혼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와 똑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얘기는, 심지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얘기조차 늘 대수롭지 않은 듯 내뱉곤 했다. 마치 정말로 별 의미 없는 얘기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냉혹한 남자였다. 강철 같은 의지와 오만함이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 주된 골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가 집을 나갔는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소년티를 겨우 벗은 젊은 청년이 갓 결혼한 아내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겠는가!

존은 무슨 일이든 해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도움을 바라는 사람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카우보이들도 그의 명령에는 보조건 복종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마지막 한 방울의 땀까지 쏟아가면서 일에 임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목장에서는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럼 지난번에 마이애미에 간 것도 당신 어머니 때문이었나요?]

[응. 1년에도 몇 번씩 금전적인 곤경에 처하거든. 일이 터지면 늘 내게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자기를 구하러 날아와 줄 것을 요구하지.]

[그럼 당신은 늘 마이애미로 가구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별다른 정은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이번에 가서는 전화나 해줘요.]

미셀은 자신의 말을 강조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기 위해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 마이애미 행 비행기편을 알아보던 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미셀 쪽을 돌아보며 수화기를 막고 물었다.

[허니, 나랑 같이 가지 않겠소?]

순간 미셀의 눈에 공포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즉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고맙지만 안 될 것 같아요. 서류 정리도 해야 하고, 또 다른 할 일도 있구요.]

그녀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밀린 일을 정리하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는 건 두 사람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뻔한 변명에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수화를 막고 있던 손을 치우고 항공사 직원에게 말했다.

[네, 한 자리면 되겠네요. 맞습니다. 아니, 그냥 편도로 하겠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는 비행기편 명과 출발 시간을 메모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사고 이후로 미셀은 목장 밖으로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메르세데스는 이미 사흘 전에 완전히 수리가 끝나 집으로 가져왔지만, 그 후로도 계속 차고에 주차되어 있는 상태였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한동안 운전을 피하는 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미셀의 경우는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는 확신했다.

미셀은 이제 장부에 적힌 숫자를 합산하기 시작했다. 존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완전히 일에 몰두해 있는 미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미셀은 서류 작업을 완전히 도맡다시피 하고 있었다. 장부에 관해서는 오히려 그가 미셀에게 물어봐야 할 정도였다. 그럴 때면 기분이 좀 묘했지만, 저녁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대만족이었다.

문득 앞으로 며칠간은 혼자 지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인상을 썼다. 마이애미에도 같이 시간을 보낼 여자들은 있었지만, 이제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는 오로지 미셀만을 원했다. 다른 여자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미셀처럼 그의 품에 꼭 들어맞는 여자는 없었고, 그냥 눈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흥분시키는 여자도 그녀뿐이었다.

존은 미셀이 이성을 잃고 마구 화를 내는 모습은 물론이고 까다롭게 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제일 큰 즐거움은 그런 미셀을 침대로 데려가 사랑을 나누며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어머니 때문에 며칠 동안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미셀의 곁은 떠나 있는 게 정말 싫었다.

다음 순간 그는 그런 감정이 단순히 섹스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셀이 원가에 마음이 상해 있다는 걸 알면서 그녀의 곁을 떠나 있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미셀이 절대 속을 털어놓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말인가! 그녀는 계속 아무 문제도 없다고 극구 주장했지만, 그는 그 정도 눈치도 못 챌 만큼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녀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몇 번 미셀이 두려움에 젖은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는 게 눈에 띄긴 했지만, 그녀가 두려워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확실한 건 그녀의 이상한 행동이 자동차 사고 이후로 시작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차를 망가뜨린 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녀는 마치 그가 뺨을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게서 멀어졌고, 무슨 짓을 해도 그 거리감을 좁힐 수가 없었다. 미셀은 뭔가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아니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고, 자꾸만 자신의 내부로 숨어들고 있는 듯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육체적인 거리감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사고가 났던 그날 밤을 제외하면, 미셀은 여전히 그의 품안에서 달콤하고 정열적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미셀의 정신과 육체 모두를 원했다. 사고 소식을 듣던 순간 그는 미셀을 갑자기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때문인지 그녀에 대한 욕망은 더욱 정도를 더해갔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광대뼈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그녀를 만지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켰다. 그를 바라보는 미셀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혀들었다.

미셀은 아무 말 없이 장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가 항상 감탄해 마지않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서재를 나섰다. 그는 즉시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언제든 마음껏 그녀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한껏 음미하면서.

서재를 나설 때쯤 그는 이미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곧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부츠 소리가 울렸다. 그의 마음은 이미 2층 침실과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에게 가 있는 상태였다.

때때로 눈이 멀 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는 악몽을 꾼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체 모를 전화도 없었고, 스키 마스크를 쓴 남자가 자신을 죽이려던 일도 없었으며, 그녀가 느낀 위험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자동차 사고는 사고를 위장한 살인 시도가 아니었다.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 현실에서는 에디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일을 하고 있었고, 말들은 활기차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얌전한 소들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으며, 존은 마이애미에서 매일같이 전화를 하며 집에 돌아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그 모든 건 결코 꿈이 아니었다. 존은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그가 마이애미에 가 있는 동안에도 낮에는 그가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곳 목장에서 그의 카우보이들에게 둘러싸여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밤에는 문제가 달랐다. 불안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계속 이어지자 그녀는 낮 동안 자신의 목장에서 혼자 지낼 때 그랬듯이 쉬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밤이면 완전히 지쳐 쓰러질 정도로. 그렇게 해서라도 잠을 자야 했다.

언제나처럼 미셀에게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존의 지시를 받은 네브 루더는 매일 딜레마에 빠졌다. 아무리 보스의 지시가 있었다고 해도 미셀이 뭔가 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말릴 수 있겠는가!

만일 지금처럼 죽기 살기로 일에 매달리는 미셀의 모습을 존이 본다면 네브의 머리가죽을 벗겨버리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셀은 네브에게 일을 해도 되겠느냐고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일을 할 뿐이었고, 그는 도저히 그런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미셀은 잡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일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보스를 그리워하고 있음이리라. 네브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존과 미셀의 관계를 인정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고,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닥치는 대로 일을 한 덕분에 침대에 눕기만 하면 곧바로 곯아떨어질 정도로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셀은 침대로 가는 걸 최대한 미루곤 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잠을 청하는 대신 서류 정리를 했다. 그 결과 아무리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던 서류와 송장들이 차곡차곡 종류별로 정리가 되어 쌓여갔다. 존이 집에 돌아오기 전에 모든 서류 정리를 끝내고 싶었다. 그 생각만 해도 미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일이면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오늘 오후 그의 전화를 받고 미셀은 마음이 많이 편해진 상태였다. 하룻밤만 더 지내면 다시 어둠 속에서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미셀은 10시쯤 모든 일을 끝내고 침실로 올라가 잠자리에서 입는 낙낙한 면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밤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덥고 습한 날씨 탓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 지친 나머지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든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침대에 누워 몸을 옆으로 돌리던 미셀은 온몸이 쑤시는 탓에 끙하고 신음을 흘리며 곧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존이 집 안에 조용히 발을 들여놓은 건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원래는 내일 오전 8시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지만, 미셀과 전화 통화를 하고 나자 어서 그녀의 날씬한 몸을 느끼고 싶은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공항에 전화를 걸어 그날 밤 출발하는 마지막 비행기편에 자리를 예약하고 서둘러 짐을 꾸린 다음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힘들겠지만, 수표장을 좀 조심해서 쓰도록 하세요.]

존은 퉁명스럽게 주의를 주면서 자신을 낳아준, 예쁘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천박해 보이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와 똑 같은 검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새빨갛게 칠해진 입술이 비아냥거리듯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여기서도 웬만한 얘기는 다 듣고 있단다.]

그의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랭글리 캐보트의 딸과 같이 산다는 소문이 사실이니? 그 랭글리라는 사람이 재산을 몽땅 다 잃고 죽어서 네가 그 딸을 돌봐주게 되었다고?]

존은 미셀에게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꼭 그렇게 된 건 아니에요.]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니? 그 사람 딸과 같이 살고 있는 거야?]

[네.]

그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짧았던 결혼 생활을 정리한 열아홉 살 이후로 존은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함께 살았던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비록 아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긴 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용을 당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미셀 캐보트와 함께 살고 있다면 그건 그가 원했기 때문이지 미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은 아니리라.

어두운 계단을 조용히 오르는 존의 심장 박동이 기대감으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어서 그녀 옆에 누워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느끼고 달콤한 체취를 맡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미셀을 깨우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일단 몇 시간이고 잠을 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다음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와 막 잠에서 깬 미셀의 피부가 핑크빛으로 변하는 그때가 되면 그녀를 가질 것이다.

그는 조용히 침실 안으로 들어가 등뒤로 문을 닫았다. 그가 들어서는 기척에도 미셀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몇 분 후 욕실에서 나온 그는 욕실 문틈으로 새오나오는 불빛을 이용해 옷을 갈아입었다.

바로 그때 존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저절로 침대 쪽으로 향했다. 순간 온몸의 세포가 긴장하고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회오리바람이 집을 덮쳐도 미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미셀은 시트를 침대 발치로 밀어낸 채 배를 깔고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오른쪽 다리는 똑바로 뻗어 있었고 왼쪽 다리는 살짝 구부린 채였다. 잠옷 대용으로 입는 얇은 면 원피스가 위로 말려 올라가 동그란 엉덩이가 드러나 있었다. 그의 눈길이 그 얇은 면 원피스 아래 노출된 엉덩이를 따라 그가 즐겨 어루만지는 실크처럼 보드라운 여성 쪽으로 향했다.

존은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욕구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남성은 이미 터질 듯 부풀어오른 상태였고, 그녀를 갖고 싶은 욕구로 온몸이 아리고 욱신거렸다. 미셀은 여전히 고르게 숨을 쉬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의 호흡이 격해졌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마치 암말 위에 올라타기 직전의 종마처럼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존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미셀을 가져야 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무방비 상태의 미셀은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따뜻해 보였다. 단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자제력은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다.

그는 다급히 벗어든 옷을 침실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녀의 위로 몸을 숙여 최대한 손에서 힘을 뺀 채 그녀를 돌아 눕혔다. 미셀은 잠시 한숨 비슷한 소리를 냈지만 순순히 그가 의도한 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의 욕망은 너무 다급해서 미셀을 깨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원피스 자락을 허리 위까지 걷어 올리고 허벅지를 벌린 다음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마지막 자제력을 발휘해 최대한 천천히 미셀의 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뜨겁고 촉촉한 속살이 그를 꽉 조이자 그의 목에서 거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셀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의 품에서 몸을 활처럼 휘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사랑해요.]

미셀이 잠에 취한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그의 뇌리에 내리꽂혔다. 오, 하느님! 그의 내부에서 모든 것이 부서져 내렸다. 그에게 한 말인지, 꿈속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한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깨워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게 하고 싶었다. 그럼 그녀의 마음속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려는 듯 거세게 그녀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미셀]

그는 그녀의 따뜻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절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미셀은 잠에 취한 와중에도 그의 손길을 알아채고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가 옆에 있으리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의문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곁에 있다는 게 그녀에겐 가장 중요했다. 곧 다른 모든 것이 하찮아 보일 정도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솟구쳤다. 그의 힘찬 진입에 그녀의 여성이 경련을 일으켰다. 온몸의 감각이 불타올랐다. 다음 순간 그녀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전율했다.

그는 강철 같은 허벅지 사이에 그녀를 꼭 가둔 채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이 조이는 느낌에 전율하며 절정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녀를 풀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리 해도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갈증을 만족시키고자 그는 다시금 그녀의 안으로 돌진했다.

그녀는 절정의 순간에 맛본 벅찬 감격으로 인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즉시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사랑으로 떨리는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존은 이번에는 좀더 부드럽게 그녀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절정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정신이 나갈 만큼 황홀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거의 새벽이 다 되어서야 완전히 녹초가 된 채 서로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그녀가 약간 놀란 투로 중얼거렸다.

[일찍 왔네요.]

그녀를 안은 존의 팔에 힘이 주어졌다.

[당신 곁에 있고 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진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았을지라도 그는 무슨 방법을 써서든 그녀에게 달려왔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따가운 햇살이 침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까지도 곤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존의 트럭이 주차돼 있는 것을 본 네브 루더가 그의 허락을 받을 일이 있어 집에 들렀지만 에디가 무서운 얼굴로 존의 잠을 깨우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존은 오후 1시가 지나서야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이며 몸이 온통 땀으로 끈적거려서 마지못해 눈을 뜬 것이다. 그에겐 더위와 피로를 쫓을 시원한 샤워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존은 미셀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면 원피스를 발견한 순간, 그의 입가에 남성 특유의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 그 원피스를 벗겨내 바닥에 내팽개친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것뿐이니까.

존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샤워 물줄기 아래 섰다. 하지만 미셀이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기억이 떠오른 순간, 그의 표정이 안타깝게 변했다. 그녀의 고백은 그를 거의 미칠 것처럼 만들었다. 그녀가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꿈속의 주인공일까, 아니면 나? 하지만 미셀이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렇다고 잠이 깬 후에 그 말을 되풀이한 것도 아니었다. 불확실함이 그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침대에서 그들은 완벽한 짝이었다. 그로서는 다른 여자들에 대한 생각 따윈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하지만 침대 밖에서는 그녀에겐 여전히 그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고, 그 사실은 그녀와의 사이에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감까지 느끼게 했다.

혹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예전에 그녀가 함께 어울리던 부류에 속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자신의 형편이 나빠진 후 그녀가 일부러 그 남자와 거리를 둔 거라면?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 자신이 몇 해 동안 만나지 못해도 누군가를 계속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미셀을 그런 식으로 계속 사랑해 왔기 때문에 순간 샤워 꼭지를 잠그던 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랑.

맙소사. 지난 수년 동안 그녀를 쭉 사랑해 왔으면서도 그는 그 감정을 호전적인 태도 아래 감추고 단지 욕망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이다. 그녀에 관해서는 자신이 아기처럼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는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종마라는 악명을 떨칠 정도로 수많은 여자를 거친 것도 미셀에 대한 그의 갈망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그가 사랑하는 특별한 한 여자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결코 미셀에 대한 사랑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국 미셀을 육체적으로 갖게 됐지만 정신적으로 또 감정적으로는 가지지 못했기에 그는 잔뜩 겁을 먹었다. 수건으로 젖은 몸을 거칠게 문지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든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질 때까지 필요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작정이었다.

지금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미셀은 어떻게 반응할까? 당장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그러니 자기 곁에 머물러 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는 여자들을 대할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들었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난처함과 상대 여자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던 것을.

동정이라니! 만약 미셀이 그를 동정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그로서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정이었다. 그는 오만하다 싶을 정도로 확고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즉시 복종하는 것에 익숙한 남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자신의 감정이나 미셀의 감정, 두 가지 모두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더욱 불안해졌다. 사랑은 남자를 약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는 지금껏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빌어먹을, 약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는 벌거벗은 채 침실로 돌아와 속옷과 바지를 걸쳤다. 그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알몸으로 잠들어 있는 미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맙소사, 밝은 햇살을 받은 그녀의 금발머리가 황금처럼 반짝였다. 피부에서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배를 깔고 엎드린 채 한 손을 베개 밑에 넣고 잠들어 있었다. 그 덕에 그녀의 유연한 등 곡선과 탄력 있는 동그란 엉덩이, 그리고 길고 매끄러운 다리가 고스란히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그녀의 우아한 체형과 여성적인 곡선에 새삼 감탄했다. 그것과 비례해 그녀를 만지고 싶은 욕구 또한 더욱 커졌다.

대체 언제쯤 일어날 작정일까? 설마 하루 종일 잠을 잘 생각은 아니겠지?

존은 침대로 다가가 미셀의 맨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게으름뱅이, 이제 일어나야지. 벌써 2시가 다 됐다구.]

미셀은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베개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그래서요?]

그녀는 눈뜨기를 거부하며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존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일어나란 말이지. 당신이 이렇게 누워 있으면 난 옷도 입을 수가 없으니까. 온통 당신한테 정신이 팔려...]

존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미셀의 새틴처럼 매끄러운 어깨에 하얗게 자리잡은 작은 흉터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 아래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로 희미한 상처 자국이었다. 이어서 그는 또 다른 상처 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어루만졌다. 존은 완벽한 그녀의 피부에서 똑 같은 상처 자국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자국들은 그녀의 등 아래쪽은 물론 엉덩이와 허벅지 뒤쪽에도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상처 자국들을 찾아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손길 아래 미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호흡조차 멈춘 채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도대체 어쩌다가 저런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생긴 건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깨진 유리 파편에 찔린 거라면 상처 자국의 크기나 형태가 저렇게 다 같을 리가 없었다. 상처 자국은 사실 그렇게 깊지는 않은 편이었고 울퉁불퉁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온몸을 속속들이 만져보았으면서도 지금껏 상처 자국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였다. 게다가 지금은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어쨌든 사고로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면 그건 즉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흉터라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악문 잇새로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나직이 저주의 욕설을 내뱉었다. 그 절제된 욕설은 커다란 고함 소리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허공에 분산되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 억지로 자신을 보게 만든 다음 거세게 어깨를 움켜잡고 날카롭게 물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그는 단 세 마디로 모든 상황을 추궁했다. 마치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잔인하게 비틀린 존의 표정을 본 미셀은 그만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는 미셀의 어깨를 들어올려 얼굴을 바짝 들이민 채 악문 잇새로 똑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그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미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설사 목소리가 나온다 해도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겠는가!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누구 짓이냐니까?]

그는 마침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미셀은 그만 눈을 감았다. 곧 감긴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절망감과 수치심으로 그녀는 어쩔줄을 몰랐다. 하지만 존은 그녀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존, 제발]

그녀는 억지로 떨리는 입술을 열고 애원했다.

[누구지?]

그녀는 마침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저....전남편....로저 백맨이요.]

그녀는 흐느끼며 겨우 그 말을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했다.

존은 다시금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미셀은 잠시 몸을 버둥거렸지만 곧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조용히 숨을 죽였다.

로저의 이름을 말한 것만으로도 미셀은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더러워진 느낌이었다. 존에게서 몸을 숨기고 더러운 때를 북북 문질러서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존은 그녀를 놔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벌거벗은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힌 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따가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방 안이 온통 후끈거릴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셀의 몸에선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침대 시트를 벗겨 미셀의 몸을 감싸주고는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미셀이 전남편에게 구타를 당했다니.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분노가 그를 엄습했다. 그 벌레 같은 개자식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맨손으로 때려 죽였을 것이다. 죄책감은커녕 오히려 그 순간을 한껏 즐기면서.

미셀이 두려움과 고통으로 몸을 웅크리고 매가 내리쳐질 때마다 그 가냘픈 몸을 떨었을 것을 생각하자 눈에 불이 났다. 처음 사랑을 나눌 때 제발 아프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에게 사정했던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아니, 남자에게 그런 모진 대접을 받은 상태에서 그에게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는 수염이 난 거친 뺨을 그녀의 햇살 같은 머리카락에 대고 문지르며 단단한 팔로 그녀를 안전하게 감싼 채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녀로서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이 그녀에게로 전해져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그의 체온 역시 차가운 그녀의 피부를 온기로 녹여주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든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고 달래주었다.

마침내 미셀이 조금 몸을 비틀며 소리 없이 자신을 놓아달라고 요청했다. 존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 주고는 그녀가 욕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내내 지켜보았다. 그런 다음에도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아 곧장 그녀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가려 했지만, 욕실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는 순간 미셀에게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욕실로 뒤따라 들어가는 걸 포기하고 그녀가 나올 때까지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미셀이 여전히 창백하긴 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한결 핏기가 도는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뜨거운 샤워가 한기를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된 듯했다. 그녀는 욕실에 걸려 있던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괜찮소?]

존이 조용히 물었다.

[네.]

미셀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얘기를 좀 나눕시다.]

[지금은 싫어요.]

존은 자신을 바라보는 미셀의 공허한 표정에 가슴이 아렸다.

[지금 당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베이비, 좋소, 그럼 나중에]

그 시간은 그날 밤 존이 그녀를 부드럽게 절정의 극치로 이끈 다음에 찾아왔다. 어둠이 그들 주위를 방패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사랑을 나눈 후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미셀은 모든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존의 단호한 결심을 느꼈다. 결코 하고 싶은 않은 얘기였지만, 그래도 어둠 속에서라면 조금은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미셀은 로저에 대한 얘기를 힘겹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질투가 심했어요.]

미셀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질투심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죠.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물론이고 웨이터에게까지 어쩌다 눈길을 주기만 해도 난리가 났어요. 상대방이 잘났든 못났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무 상관없었어요. 처음에는 그저 자기 몰래 바람을 피고 있다면 소리를 지르거나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면서 그 남자가 누군지 대라는 식으로 윽박지르며 날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몰아댔죠. 그러더니 나중에는 급기야 구타가 이어지더군요. 그는 제정신이 돌아오면 늘 미안해했어요. 날 너무나 사랑한다면서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맹세를 했죠. 하지만 그건 말뿐이었어요.]

존의 몸이 경직되고 근육이 떨리기 시작했다. 미셀은 오히려 그를 위로하려는 듯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 번은 그를 고발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해서 그를 구해주고 내가 다시는 고발할 수 없도록 만들었죠. 그래서 난 그를 떠나려고 했지만 곧 그에게 잡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그는 만일 내가 다시 자기를 떠나면 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죠.]

[그 말을 믿었던 거요?]

존은 그녀가 얘기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분노로 거친 음성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향한 분노가 아님을 알기에 미셀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네, 믿었어요.]

미셀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믿고요. 그의 가족은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무사히 빼낼 만한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누구든 결코 그의 죄를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결국 그를 떠났잖소.]

[그의 부모님이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죠.]

[어떻게?]

미셀은 다시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 역시 가늘게 떨려나왔다.

[내 등에 있는 .상처 자국이요. 그가 그 짓을 했을 때 마침 그의 부모님은 유럽 여행 중이셨죠. 그분들은 즉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사건 기록을 없애거나 뇌물로 증인을 사려고 했지만, 때를 놓친 뒤였어요. 난 이미 상해 진단서를 발부받았고, 그 진단서는 그를 고소할 충분한 증거가 되어주었죠.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난 이혼을 요구했고, 그의 부모님에게 로저를 내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증거를 사용하겠다고 했죠. 그들은 가문의 평판이나 사회적 지위를 매우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가문의 평판 따윈 엿이나 먹으라고 해.]

그는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제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부모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사실 그녀는 그 소식을 듣고도 별 느낌이 없었다. 그저 한 여자가 잔인한 구타를 당했는데도 그것보다는 가문의 평판을 더 중요시한 사람들이라면 살아봐야 별 가치도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제서야 미셀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좀더 자세한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아팠지만 이대로는 그녀와의 거리를 영원히 좁힐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이혼을 하고 나서 2년 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든 걸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왜 그를 마음속에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 건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존은 손가락 끝으로 미셀의 등에 있는 흉터 주위를 살짝 어루만졌다.

[이것 때문에 수영을 하지 않는 거요?]

미셀은 잠시 몸을 뒤척였다. 곧 어둠 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나왔다.

[네. 상처 자국이 보기 흉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요. 이제 많이 희미해졌죠. 그래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그 상처가 똑똑히 남아 있어요. 누군가 이 흉터 자국을 발견하고 왜 그런 자국이 생겼는지 물어볼까 봐 두려워요.]

[그게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난 후에 늘 잠옷을 입었던 이유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 거지? 난 그냥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구.]

그랬다, 그는 결코 스쳐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심장이었고, 또한 그녀의 심장을 부서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하트 브레이커였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이기도 했고, 또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 그 추악한 사실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난 내가 더럽다고 느꼈어요.]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창피하기도 했구요.]

[맙소사]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던 존이 다음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왜?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당신은 피해자라구.]

[알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걸요.]

존은 얼마나 그녀를 원하는지 알려주려는 듯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그의 키스는 미셀이 반응을 보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팔을 들어올려 그의 목을 감으며 열렬하게 키스를 되돌렸다. 잠시 후 그는 아쉬운 듯 입술을 떼고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한 다음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다시 잠옷을 입으려는 미셀을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제지하면서.

그들 사이에 비밀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 미셀은 기뻤다. 따뜻하고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맨살에 닿는 느낌 역시 너무나 좋았다.

그는 여전히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셀은 그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천천히 그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 곱실거리는 체모의 감촉을 느끼며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난 괜찮아요.]

미셀은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이미 다 끝난 일인걸요.]

[아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당신과의 약속대로 그 개자식이 당신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던 당신 전남편의 부모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혹시 그 이후로 그가 당신을 괴롭히진 않았소?]

미셀은 얼마 전 로저에게서 받은 전화를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내 집에 있을 때 몇 번 그의 전화를 받은 적은 있어요.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난 적은 없어요. 난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집으로 전화를 한 적이 있다고? 당신 집으로? 대체 언제?]

[당신이 여기로 나를 데려오기 전에요.]

[그를 만나고 싶소.]

존은 조용하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나른하게 누워 있던 존은 미셀의 전남편이 전화를 한 적이 있다는 말에 다시금 생생한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대체 그가 사용한 물건 뭐요?]

미셀은 갑자기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존은 그런 미셀을 다시 꼭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다그쳤다.

[말해보시오.]

[그가 뭘로 날 때렸는지 알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난 알고 싶소.]

[당신도 이미 알잖아요.]

다시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별로 특이한 물건도 아닌걸요.]

[벨트?]

미셀은 가슴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좀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가죽 부분을 손에 감았어요.]

존은 온 방안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신음을 토했다. 금속버클이 미셀의 여린 살 속으로 파고드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로 머리가 돌 것 같았다. 로저 백맨을 패주고 싶었다. 아니, 그를 아예 죽여버리고 싶었다.

미셀의 손이 애원하듯 그에게 와 닿았다.

[제발...]

미셀이 간절하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잠을 자도록 해요.]

하지만 존은 뭔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지? 당신 아버지라면 뭔가 해결책을 찾아냈을 거 아니오. 그를 보호하려고 그랬나?]

미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믿어주지 않으시더군요. 딸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내가 사태를 과장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마음 편하셨나 봐요.]

미셀은 결국 로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존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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