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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유혹-8화 (8/12)

8

미셀은 신경이 곤두선 고양이처럼 침실 안을 서성였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난 가고 싶지 않아요.]

미셀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이디에게 나랑 같이 갈 거라고 하기 전에 왜 내게 먼저 묻지 않았죠?]

[당신이 지금처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으려고 할 게 뻔하니까.]

존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평상시의 우아함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침실 안을 왔다갔다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셀을 집으로 데려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씩 자기 목장을 둘러보는 걸 제외하고는 전혀 외출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든 필요하면 사용할 수 있도록 메르세데스 차 열쇠도 주었지만, 그가 아는 한 미셀은 메르세데스를 몰고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충분한 돈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하러 나가는 걸 본 적도 없었다. 토요일 밤마다 열리는 바비큐 파티에도 미셀은 늘 어떻게든 참석하지 않으려고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그는 잠시 미셀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그런 생각 자체를 지워버렸다. 전에 그녀가 만나던 남자들에 비하면 그가 세련되지도 못하고 재정적으로도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는 그런 오해를 하기엔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밤 열렬히 애타게 그의 품에 안겨드는 미셀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를 창피하게 생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녀에 대한 선입견의 대부분은 잘못된 것이었다. 미셀은 결코 편하게 놀고먹는 생활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껏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호를 받은 것뿐. 오히려 그녀는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빌어먹을, 심지어 그녀는 소뿔에 받쳐 부상을 당하기 일쑤인 카우보이들의 일마저 해보고 싶어했을 정도였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감시했으니 망정이지,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부상을 당해도 열 번은 더 당했으리라.

어느새 그는 그녀의 아버지만큼이나 미셀을 보호하고 싶어하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걸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리는 건지도 몰랐다. 마이애미 같은 대도시라면 그녀가 누구와 동거를 하든 아무든 관심을 갖지 않겠지만, 이곳은 아직 엄격한 윤리 기준이 남아 있는 시골 마을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가 아닌가!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으레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불리한 게 현실이었다.

더욱이 그는 소문 따위에 신경을 쓰기에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자긍심이 강한 남자였다. 그는 미셀을 자신의 여자로 생각했고, 그 호칭에 어울리는 결렬한 소유욕을 유감없이 드러내곤 했다.

그랬다. 그녀는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소유했고, 매번 그녀를 가질 때마다 그녀와의 연결 고리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그녀가 목장에서 숨어 지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끝을 낼 때가 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그녀가 계속 숨어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여자인 것에 익숙해져야 하리라.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그와의 사이에 일정거리를 두고 그 거리를 조심스레 유지하고 있었다. 속마음을 감추고 있을 때면 미셀의 눈에서는 반짝임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물을라치면 교묘하게 말을 흐리거나 발뺌을 하곤 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을 파괴해 버리리라 다짐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원했다. 육체와 정신 모두를.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까다롭게 구는 것도 보고 싶었다. 지금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지만, 그는 그것이 미셀이 지닌 성격의 일부라는 걸 잘 알았다. 혹시 나한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에 성질을 부리고 싶어도 못 부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는 분통이 터졌다. 그녀의 전부를 원했기에..

미셀은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마지못해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졌다.

[당신이 에이디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부츠를 벗고 이어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물론 좋아해요.]

미셀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그녀의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는 거지? 여기로 돌아온 뒤 그녀를 만난 적이 있소?]

[아뇨. 하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래서 파티에 참석할 기분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할 일도 너무 많았고]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핑계거리가 없잖소.]

미셀이 고개를 들고 그를 흘겨보았다.

[열여덟 살 때도 당신이 사람을 못살게 구는 나쁜 녀석이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도 그렇다니 믿어지지가 않네요!]

그는 자꾸만 미소가 떠오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던 것이다. 존은 침대로 다가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문질렀다.

[편하게 생각해요.]

존은 달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예전엔 늘 그런 모임에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잖소? 다 아는 사람들이고 말이오. 아마 당신을 보면 모두들 좋아할 거요.]

미셀은 그가 시키는 대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목장을 떠나면 안전하지 않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는 아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 이유를 캐물을 거야. 그럼 뭐라고 말하지? 두 통의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고? 누군지 전화를 걸어놓고 아무 말도 없이 끊어서 불안하다고?

어찌됐든 그녀는 존이 완벽하게 군림하고 있는 성역 같은 이 목장을 떠나면 누군가 악의를 가진 존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미셀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과잉 반응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집에 혼자 있을 때도 충분히 안전한 기분을 느꼈으니까. 아무래도 끔찍했던 결혼 생활로 인해 감정적인 잔재가 남은 것 같았다.

그녀는 마침내 항복했다.

[알았어요. 가기로 하죠. 파티는 몇 시부터 열리죠?]

[두 시간 후에.]

존은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긴장감이 사리지는 걸 느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미셀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할 시간이 빠듯하군요.]

[같이 샤워하면 되잖소?]

그는 마지막 속옷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욕실로 그녀를 초대했다. 그가 기지개를 켜자 상체의 근육이 불끈거렸다. 미셀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파티에는 좀 늦게 가도 되니까.]

미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맙지만 당신 먼저 샤워해요.]

미셀은 파티 때문에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그 기분 나쁜 괴전화도 그렇지만, 파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누구의 동정도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존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지도 걱정스러웠다. 비록 이 지역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해 악의에 찬 험담을 하는 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그녀는 존의 말대로 에이디 레이필드와 그녀의 남편인 스티브를 좋아했고, 또 주말 파티를 즐기기도 했다. 아마 에이디의 파티에는 주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몇몇 부부는 아이들도 데려올 테고 말이다. 그런 다음 바비큐를 먹거나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들과 수영을 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대략 10시쯤 되면 파티가 끝날 터 였다.

미셀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옷을 골랐다. 일단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겨 목덜미 부근에서 한 번 꼰 다음 핀을 꽂고 화장은 최소한으로 했다. 그런 다음 낙낙한 흰색 면바지에 박스형의 흰색 티셔츠를 걸치고 한쪽 허리춤에 옷자락을 묶어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마직막으로 간편하고 편안해 보이는 샌들을 신는 걸로 마무리를 했다.

존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대충 입은 것으로 보이는 옷차림임에도 불구하고 미셀의 모습은 우아해 보였다. 아마 그녀라면 사료 포대를 걸쳐도 멋있어 보일 것이다.

[수영복도 잊지 말고 챙기도록 해요.]

그는 미셀이 그런 종류의 파티에서 종종 수영을 즐겼던 걸 기억해 내고 말했다.

미셀은 지갑에서 뭔가를 찾는 척하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수영도 하지 않을 텐데요, 뭘.]

[왜?]

[그냥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존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셀이 수영을 하고 싶지 않아 했던 때가 있었던가? 그녀의 아버지는 수영을 즐기는 딸을 위해 플로리다로 이사 온 첫 해에 마당 한구석에 수영장을 만들었고, 미셀은 거의 하루 종일 물 속에서 지냈었다. 미셀이 결혼한 뒤로 수영장을 사용할 사람이 없어지자 그녀의 아버지는 곧 수영장 물을 비워두었다. 그리고 그 뒤로 캐보트 목장의 수영장엔 다시 물이 채워진 적이 없었다.

문득 그의 집에서 지낸 지 한 달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수영장을 사용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다. 그는 발코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으로 수영장 물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 자신은 거의 수영을 즐길 짬이 없었지만, 그는 8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커다란 수영장을 만드는 걸 잊지 않았다. 그에 어울리는 사치스러운 조경 공사도 물론이고. 단지 그녀를 위해서 말이다!

빌어먹을, 모든 게 그녀를 위해서였다. 커다란 저택과 사치스러운 수영장. 심지어는 메르세데스 벤츠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비록 그때는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지만 미셀을 위해서 이 모든 걸 갖추었다는 게 진실이었다. 대체 미셀은 왜 저 수영장을 사용하지 않는 걸까?

방을 나서던 미셀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감지하고 잠시 긴장했다가 곧 마음을 놓았다. 더 이상 추궁할 기색이 아닌 듯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수영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 걸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수영을 하고 싶어하는지, 차가운 물이 더위에 뜨거워진 피부에 감기는 감촉을 얼마나 열망하는지 그가 안다면.... 하지만 그녀는 개인 사유지인 그의 집에서조차 수영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

흉터 자국들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의미해졌다는 건 알고 있지만, 누군가 그 자국을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로저에게 맞은 흉터가 뚜렷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거의 습관처럼 상처 자국을 감추곤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존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도 피하고 싶은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럴 경우 그녀는 되도록 그를 마주본 상태에서 옷을 벗거나 입곤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조심스러운 행동 덕분에 존은 미셀이 그의 앞에서 알몸이 되는 걸 꺼려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이 되어 그와 침대에 있을 때는 아무 상관없었다. 희미한 불빛밖에 없는 데다 존 역시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조차 미셀은 늘 의식적으로 잠옷을 챙기곤 했다. 설사 자는 동안엔 벗고 있었다고 해도 침대를 나설 때면 꼭 잠옷을 챙겨입었던 것이다. 상처 자국에 대해 설명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파티는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맛있는 음식과 친밀한 대화, 그리고 즐거운웃음소리로 꽉 차 있었다. 에이디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로 마음이 따뜻하고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두 아이를 낳으면서 체중이 약간 늘긴 했지만, 에이디의 얼굴은 예전과 똑같이 행복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스티브는 가끔 아내의 입을 손으로 막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곤 했다. 에이디는 남편이 그런 방법을 사용할 때마다 누구보다도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스티브와 나만 아는 아주 오랜 농담거리야.]

에이디는 아이들에게 줄 타코를 만들면서 설명했다.

[데이트를 할 때 나한테 키스를 하기 위해서 종종 그 방법을 사용했거든. 어머나, 그런데 너 정말 예뻐 보인다! 뭔가 아주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저기 서 있는 섹시한 남자와 관련이 있는 거겠지? 아, 너도 옛날에 내가 존이 말을 걸 때마다 거의 기절할 것처럼 굴던 거 기억하지? 그때 넌 그에게 아무 느낌도 없다고 거만을 떨었잖아.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엉덩이에 뿔날걸.]

에이디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놀렸다.

에이디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마주보던 미셀도 그만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수영장 반대편에서 다른 목장주와 얘기를 나누던 존은 미셀의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랫도리가 단단하게 부풀어오르자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흥분한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 몸을 튼 채 다시 상대방과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왜 미셀은 좀더 자주 저런 식으로 밝게 웃지 않는 걸까?

미셀은 한껏 파티를 즐겼다.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사실 이렇게 마음 편한 모임에 참석하는 걸 그리워했었다. 세련된 공식 디너 파티나 요트 파티, 자선 기금 파티 등 존이 그녀가 즐겼던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파티는 사실 미셀로선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게 대부분이었다. 미셀은 지금처럼 수영장으로 대포알처럼 다이빙해서 뛰어들며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들의 소리와 그 바람에 수영장 근처에 서 있던 어른들에게 물이 튀었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다들 껄걸 웃어젖히는 소리들이 뒤섞인 편안한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그녀가 참석했던 다른 파티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남자들은 끼리끼리 모여 소 사육과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문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지쳐 나가떨어질 무렵쯤에는 남녀 가릴 것 없이 한데 어우러져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존은 자연스레 미셀 옆에 앉아 그녀의 팔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 소유욕이 넘치는 손길에 미셀은 즉시 반응을 했다. 홀딱 반한 바보처럼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 사이에 흐르는 열기를 눈치챘을 정도였다.

미셀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역시나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노골적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집에 갑시다.]

존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렇게 빨리요?]

그들이 돌아가겠다고 하자 에이디는 아쉬운 듯 그들을 만류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그들의 귀에 바로 그 순간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목장주라면 으레 그렇듯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밤하늘로 향했다. 이 더위를 식혀줄 폭풍의 흔적을 찾아서. 서쪽하늘 멀리 검은 구름을 뚫고 번개가 내리꽂혔다.

스티브 레이필드가 중얼거렸다.

[어서 비가 좀 내렸으면 좋겠군. 벌써 한 달이 넘게 가물었으니..]

미셀은 문득 존이 처음 그녀의 목장에 찾아왔던 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또한 템파에서 돌아오던 밤에도 비가 내렸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의 눈빛이 번득이는 걸 보니 존 역시 그녀와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원한 비 냄새와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폭풍우의 전조를 알렸다. 사람들은 비가 쏟아지기 전에 돌아갈 작정으로 음식을 챙기고 파티오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픽업트럭과 자동차에 올라타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파티는 즐거웠소?]

존이 고속도로로 차를 진입시키며 물었다.

미셀은 마치 포크처럼 번개가 내리꽂히며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그의 온기를 찾아 자연스럽게 좀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네, 아주 즐거웠어요.]

그는 트럭 운전대를 단단히 잡은 채 차를 운전하는 데 집중하려 했지만, 기어를 바꾸려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젖가슴이 스치자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 잘못됐어요?]

미셀이 나른하게 물었다.

존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끌어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그의 바지 사이 단단한 곳으로 가져갔다.

미셀은 부드럽게 신음 소리를 내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단단해진 남성의 윤곽을 따라 그렸다. 그녀의 몸 역시 자동적으로 그를 향해 숙여졌다. 존은 바지 지퍼가 열리는 걸 느끼고 큰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손이 열린 지퍼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잔뜩 성이 난 그 부분을 움켜쥐자 그는 헉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찔했다. 이어서 상상도 못해봤던 달콤한 고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녀의 손이 좀더 아래로 내려가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광란의 끝으로 몰아갔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지금 당장 그녀를 가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운전대를 거칠게 옆으로 돌려 트럭을 갓길에 댔다. 바로 그 순간 굵은 장대비가 차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왜 멈추는 거예요?]

미셀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트럭의 라이트를 모두 끄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앞으로 자신이 하려는 일을 설명해 주었다.

[존, 우린 고속도로 위에 있어요! 누구든 볼 수 있는 곳에 있다구요!]

[어두운 데다가 비까지 와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미셀의 바지 허리끈을 풀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무도 볼 수 없을 거야.]

그를 애무하고 흥분시키는 걸 즐겼고 그의 단단한 몸을 느끼고 자신도 흥분해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침실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뒤늦은 후회였다.

그의 입술과 손이 퍼붓는 관능적인 공격 아래 그녀는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트럭 차창 위로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마치 폭포 아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가 조수석 쪽으로 옮겨와 생생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그녀를 자신의 몸 위로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저 그의 거센 침입에 비명을 지르며 그의 품안에서 활처럼 몸을 젖힐 뿐.

그들은 한참 후 비가 완전히 멈춘 다음에야 집에 도착했다.

미셀은 축 늘어진 채 그의 품에 안겨 집 안으로 옮겨졌다.

존이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자 미셀은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존은 순순히 그녀의 요구대로 바로 옆자리에 몸을 뻗고 누웠다. 미셀의 몸은 아직도 그와 나눈 사랑의 여운으로 욱신거렸다. 그는 깊숙한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젖가슴과 배를 어루만졌다.

[옷을 벗겨줄까?]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셀은 그의 목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댔다.

[아뇨, 내가 벗을게요. 조금만 있다가요. 지금 당장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배 위에서 잠시 멈췄다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까 말이야, 너무 급해서 미처..]

[괜찮아요.]

미셀은 부드럽게 그를 안심시켰다. 임신 주기가 아니었다. 생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존이 그렇게 자제력을 잃고 폭발해 버린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베이비, 미안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사춘기 소년처럼 굴어서.]

[괜찮아요.]

미셀은 다시금 그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떨릴 정도로. 때때로 그에게 그 말을 하지 않고 그 소리를 크게 외치지 않기 위해서만도 엄청난 노력이 요구될 정도였다. 그 말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건 오직 그가 그들 사이에 거리를 두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만 그녀는 가능한 오래 이런 시간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파티에 참석한 이후로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아니, 황홀하다고 해야 할까? 그 후로도 며칠 동안이나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떤 일을 떠올릴 때마다 기쁨으로 몸을 떨었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이상한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미셀은 점차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쇼핑을 가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목장에서 지내는 게 마음 편한 건 여전했지만, 이제는 존의 성화로 가끔씩 메르세데스를 타고 간단히 일을 보러 다니기도 했고, 존과 함께 말을 타러 나가거나 장부 정리를 하지 않을 때면 친구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씩 자신의 집에 들러 주위를 점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 안의 고요함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존이 체납된 전기세를 내준 덕분에 전기는 다시 공급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미셀 역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도저히 존을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에 빠져 있었고, 그가 떠나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의 곁에 머물 생각이었다.

어느 날 아침, 미셀은 존의 부탁으로 차를 타고 나가 일을 본 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자신의 집에 들렀다. 폐가 같은 집 안을 둘러보고 환기를 시킨 다음 파이프가 새는 곳이나 그 밖에 수리가 필요한곳이 있는지 점검하다 말고 그녀는 문득 낯선 기분을 느꼈다. 이상했다. 그리 오래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왠지 자기 집 같지가 않았다. 존 래퍼티가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거의 없어졌고, 설사 그런 꿈을 꾸더라도 따뜻하고 강한 힘을 발산하며 바로 옆에 누워 있는 그의 존재를 느끼면 곧 안심이 되었다.

오후가 되자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미셀은 문단속을 하고 집을 나와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뭔가 차가운 냉기가 그녀를 엄습했다. 미셀은 얼른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언제나처럼 나뭇가지 위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벌레들도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럼에도 뭔가가 달랐다. 뭔가 악의적인 기운이 서려 있다고나 할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도 그녀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즉시 문을 잠갔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꾸만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못 걸린 전화가 분명한데도 괜히 위축되어 지낸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주변 공기가 이상하다고 두려워하다니.

존의 목장으로 통하는 2차선 도로는 늘 한산한 편이었기에 그녀는 백미러를 거의 보지 않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선가 나타난 차 한 대가 그녀의 차 뒤쪽으로 스칠 듯 바짝 다가섰다가 왼쪽으로 추월하려 했을 때도 무심히 오른쪽으로 차를 몰아 상대편 차가 빠져나갈 길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차는 그대로 지나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차쪽으로 아예 방향을 트는 게 아닌가!

[조심해요!]

미셀은 소리를 지르며 운전대를 옆으로 홱 돌렸지만, 이미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커다란 파열음이 들린 후였다. 그녀가 탄 메르세데스 스포츠카는 충격을 받고 즉시 오른쪽으로 밀려 나갔다. 그녀는 황급히 있는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오른쪽 바퀴가 갓길의 모래흙에 처박히며 차체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그녀는 온힘을 다해 메르세데스를 다시 차도로 올려놓을 수 있었다. 얼마나 운전대를 잡고 씨름을 했는지 미처 상대편 운전자를 욕할 정신도 없을 정도였다.

맥이 빠진 나머지 핸드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운전대에 고개를 숙인 해 축 늘어져 있던 그녀는 다음 순간 들려온 타이어 스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차를 들이박았던 차가 갑자기 난폭하게 U턴을 해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미셀은 누가 운전을 하든 제발 보험에 들어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 차는 파란색 대형 시보레 밴이었다. 미셀은 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윤곽으로 미루어 운전자가 남자라고 판단했다. 단지 윤곽만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자가 검은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를 본 순간,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소형 메르세데스 스포츠카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앞으로 튀어나갔다. 백미러를 통해 다시 그녀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오고 있는 시보레를 발견한 그녀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시보레와의 충돌로 뒤쪽 범퍼에 충격을 받은 소형 스포츠카는 빙그르르 돌면서 차도를 벗어나 갓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갓길 옆에 심어져 있는 커다란 소나무 기둥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무 바로 옆 잡초가 우거진 곳에 처박혔다.

차가 처박힐 때의 충격으로 미셀의 비명 소리가 멈췄다. 그녀는 마치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멍하니 부서진 차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충돌 당시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미셀은 미친 듯이 문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나무 기둥이 문을 막고 있는 탓이었다. 몸을 틀어 반대편 차문을 열려던 그녀는 그제서야 안전 벨트를 착용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떨리는 손으로 안전 벨트를 끄른 그녀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시보레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고는 차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기세로 바닥에 굴러 떨어진 그녀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자동차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주위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와 가쁜 숨소리를 제외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로저가 화를 내며 난폭하게 굴 때마다 사용했던 호흡법을 시도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내뱉기를 서너 번 반복하자 곧 심장 박동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서 귓전에서 웅웅거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오, 맙소사, 그 미친 차는 어디로 간 걸까? 그녀는 조심스레 차 지붕 위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파란색 시보레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차를 들이받고 그대로 달아나 버린 듯했다. 그녀는 거의 기다시피 텅 빈 차도로 나왔다.

미셀은 방금 일어난 사건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운전자는 고의적으로 그녀의 차를 차도에서 밀어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만약 그녀의 차가 커다란 소나무에 정면으로 부딪혔다면 그녀는 지금쯤 죽은 목숨일지도 몰랐다. 그 검은 스키 마스크를 쓴 남자는 대형 시보레 밴을 타고 있는 한 그녀의 차를 길에서 밀어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남자는 그녀를 죽일 작정이었다!

다른 차가 차도에 나타난 건 그로부터 5분 정도 지나서였다.

잠시 동안 미셀은 그 시보레가 다시 나타난 줄 알고 끔찍하게 겁을 집어먹었지만, 곧 다른 차라는 게 밝혀지자 비틀거리며 차도 중앙으로 나가 깃발처럼 손을 흔들었다.

미셀은 오직 존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녀는 존을 원했다.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아 이 미칠 듯한 공포를 쫓아주었으면 싶었다. 미셀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운 소년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부탁인데 래퍼티 목장으로 전화를 좀 해주겠니? 래퍼티 씨에게 내가 사고를 당했다고 전해줘. 몸은 괜찮다고.]

[네, 알겠어요.]

소년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 이름은요?]

[미셀.]

그녀가 대답했다.

[미셀이야.]

소년은 소나무 옆 덤불에 처박혀 있는 그녀의 차를 흘끗 쳐다보았다.

[견인차가 필요할 것 같네요. 몸은 정말 괜찮으세요?]

[응, 부상을 입지는 않았어. 제발 서둘러 주면 고맙겠다.]

[걱정 마세요.]

소년과 얘기를 나눈 지 10분도 안 돼 존이 탄 트럭이 모습을 나타냈다. 존이 보안관 사무실에 전화를 한 건지 아니면 소년이 한 건지는 몰라도 지역 보안관의 차 역시 거의 동시에 반대편 방향에서 들이닥쳤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하늘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존은 트럭 바퀴가 채 멈추기도 전에 차문을 열고 뛰어내려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하지만 미셀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부상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서져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존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셀은 온힘을 다해 그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안전 벨트를 매고 있었어요.]

미셀이 속삭였다. 저도 모르게 한 줄기 눈물이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하느님 맙소사, 그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공포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해준 소년은 미셀이 부상을 입진 않았다고 했지만, 자신이 직접 그녀를 보고 품에 안아봐야 그 얘기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피라도 흘리고 있었다면 아마 그는 미치광이처럼 광분했을 것이다. 거세게 뛰던 그의 심장 박동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서야 그녀의 머리 너머로 망가진 차를 발견했다.

보안관이 서류철을 들고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부인, 몇 가지 질문이 있는데 대답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존은 마지못해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지만 그녀가 이름과 나이, 운전 면허증 번호 같은 일반적인 사항을 진술하는 동안에도 내낸 그녀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이윽고 보안관이 사건의 정황에 대해 묻자 미셀은 다시금 몸을 떨기 시작했다.

[차...차가 한 대 달려와 내 차를 길 밖으로 밀어냈어요.]

미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파란색 시보레 밴이었어요.]

보안관의 눈에 흥미를 느끼는 기색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자동차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사건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부인의 차를 길에서 밀어냈다구요? 어떻게 말입니까?]

[옆으로 바짝 차를 붙이고는 내 차를 들이받았어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셀은 주먹을 꼭 쥐고 격렬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차를 차도 밖으로 밀어붙였죠.]

[그 차가 너무 가까이 다가붙자 겁이 나서 당신 스스로 차도 밖으로 뛰어든 건 아니오?]

존이 눈썹을 한데 모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 남자는 날 차도 밖으로 밀어낼 작정이었어요. 그때는 브레이크를 있는 힘껏 밟아서 겨우 차를 세웠는데, 그 남자가 다시 U턴을 해서 돌아왔어요.]

[그러니까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 차를 세우더라는 말씀이십니까? 혹시 그 남자의 이름을 아시나요?]

보안관이 서류철에 뭔가 기재를 하면서 물었다. 사고 원인을 쓰는 곳에 범죄라고 적는 게 언뜻 보였다.

[아뇨, 차를 세운 게 아니에요. 그 남자는 다시 뒤쪽 범퍼를 들이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탄 차가 한 바퀴 빙 돌아서 저 소나무 옆 덤불에 처박힌 거예요.]

존은 머리를 홱 쳐들고 보안관을 돌아보았다. 두 남자는 곧 덤불 쪽으로 가서 몸을 숙이고 차의 손상 정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뭐라고 얘기를 나누었다. 미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대신 그저 길가에 서서 석양이 지는 경관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모든 게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마터면 살인 사건이 일어날 뻔했는데 저 귀뚜라미들은 어떻게 저토록 행복하게 울 수 있는 걸까? 모든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망가진 자동차를 보면 분명한 현실이었다. 파란색 시보레도, 그 검은 스키 마스크를 쓴 남자도 모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두 남자는 이윽고 그녀 쪽으로 돌아왔다. 존은 세심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미셀은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것 같았다. 혹시 차를 망가뜨렸다고 내가 화를 낼 줄 알았던 걸까? 메르세데스 벤츠는 확실히 고가의 차였다. 하지만 고작 차를 망가뜨린 일로 저렇게 겁에 질려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젠장, 그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아무리 비싼 차라 해도 자동차에 대해 무슨 편집증적인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망가진 차를 보니 기분이 좀 상하기는 했지만, 차라리 미셀이 혈통 좋은 순종 말을 다치게 했다면 오히려 화가 났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그녀가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괜찮소.]

그는 미셀의 팔을 잡고 트럭으로 데려가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차는 보험 처리를 하면 그만이오. 당신만 다치지 않았으며 아무 상관없다구. 그러니 진정해요. 보안관이 진술서를 마저 작성하고 견인차를 불러주겠다고 했소. 그런 다음 곧 집으로 돌아갑시다.]

미셀은 답답하다는 듯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그 일은 어떻게 하구요? 파란색 시보레에 탄 남자가 날 죽이려고 했다구요. 정말이에요!]

그는 미셀에게 살짝 입을 맞추고 그녀의 어깨에 코를 비볐다.

[베이비,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난 화나지 않았소. 굳이 핑계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구.]

미셀은 트럭 조수석에 얼어붙은 듯 앉아 보안관에게 걸어가는 그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보안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 잘생기고 매력적인 로저 백맨이 사랑하는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라는 걸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예전의 상황과 똑같았다. 그녀의 아버지조차도 그녀가 가벼운 부부 싸움을 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미셀은 30도를 훨씬 넘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한기를 느꼈다. 존이 화강암처럼 내 뒤에 버티고 서서 어떤 경우든 날 보호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실제로 그는 마치 내 짐을 덜어줄 것처럼 굴기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모든 건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물질적인 것은 모두 제공해 주었지만, 추악한 진실을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나약했다. 로저도 자신이 준 상처와 공포를 보상하려는 듯 온갖 사치스러운 물건을 사주었다. 존도 그녀에게 살 곳과 먹을 음식을 제공하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엄청난 육체적인 쾌락을 주었지만, 막상 끔찍한 위협에 직면하자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대체 왜? 왜 모두들 내 얘기를 믿어주지 않는 걸까?

대체 누가 날 죽이려고 했던 걸까?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괴전화! 아무래도 그 괴전화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그 전화와 이번 사고는 그녀에게 똑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집을 나서면서 뭔가 악의에 찬기운을 느꼈던 걸 기억해 냈다. 어쩌면 시보레에 탄 남자가 날 몰래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남자는 날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그래, 그 남자는 어디든 있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였다. 항상 혼자였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잠시 존을 신뢰하면서 희망을 가졌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그에게 따뜻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탓인지, 막상 차가운 현실 속에 홀로 남겨지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견인차가 황색 점멸등을 깜박이며 도착해 메르세데스를 끌어올렸다. 미셀은 멍하니 소나무 옆으로 끌어올려지는 차를 쳐다보았다. 아예 움푹 들어간 차체를 보고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존은 그녀가 차를 망가뜨린 것에 대한 핑계로 이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지어냈다고 생각했다. 보안관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 차에는 파란색 페인트가 묻어 있어야 했지만, 덤불에 처박힐 때의 충격으로 증거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아니면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들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셀은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에디가 현관에서 달려나오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존은 당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만 남긴 채 지옥의 사자 같은 얼굴로 나가버리고,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괜찮아요.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면 좀 나아질 것 같아요. 몸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춥네요.]

그녀의 말에 존은 즉시 인상을 쓰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 더위에도 미셀의 팔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마도 사고로 쇼크를 받은 모양이었다.

[뜨거운 커피를 좀 만들어 줘요.]

존은 에디에게 지시를 내리고 미셀을 계단 쪽으로 데려갔다.

[목욕부터 시켜야겠어요.]

미셀은 천천히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뇨,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몇 분이면 돼요.]

그녀는 뜨거운 물로 금세 샤워를 한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마시고 에디가 준비한 식사를 몇 수저 먹기까지 했다.

그날 밤 미셀은 처음으로 침대에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존이 그녀가 정말로 괜찮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려는 듯 절실하게 그녀를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드러운 애무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그의 손길 아래 뻣뻣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가 긴장을 풀고 잠들 때까지 그냥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존은 그녀가 잠이 든 후에도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마터면 그녀를 잃어버릴 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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