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을빛 유혹-7화 (7/12)

7

다음날 아침, 그녀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눈을 떴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후로도 한참을 커다란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미셀은 지금 존의 집, 그의 침대에 있었다. 존은 이미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일을 나간 후였다. 물론 그녀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푹 자라는 말을 남긴 다음에 말이다.

무심코 기지개를 켜던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벌거벗은 상태라는 걸 발견했다. 게다가 온몸 구석구석 쑤시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녀는 존의 체취가 남아 있는 시트에 다시 몸을 묻었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폭풍처럼 거세게 휘몰아 닥치던 쾌락의 기억을 떠올리자 미셀의 몸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존은 지난밤 거의 잠을 자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가 하루 일과를 시작하러 나간 후에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랬어도 존과 함께 나갔어야 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스스로를 나무랐다. 혼자서 가정부 에디를 마주 대할 생각을 하니 어색해서 죽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에디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밤에는 존이 창피할 정도로 서둘러 그녀를 2층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에디와 제대로 인사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키도 크고 당당한 태도를 지닌 에디는 언뜻 보기에도 그리 호락호락한 타입은 아닌 듯싶었다. 아마도 에디는 그녀가 그리 맘에 들지 않는다 해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테지만.

마침내 미셀은 침대에서 나와 샤워를 했다. 이제 뜨거운 물을 아끼느라 대충 몸을 씻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덕분에 그의 집은 매우 쾌적한 상태였다. 그것 역시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미셀이 포기했던 안락함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라면 정신적으로야 어떻든 최소한 육체적으로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갑자기 전에는 한 번도 존의 집에 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저 그녀의 집처럼 전형적인 목장주의 저택일 거라고만 생각했을 뿐. 당연히 집 안이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이사를 오면서 내부 구조를 완전히 개조했기 때문에 전에 살던 코네티컷의 집만큼이나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는 반면, 존의 집은 스페인 풍의 저택으로 지은 지 8년밖에 되지 않은 새집이었다.

어도비 벽돌(햇빛에 말린 찰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해 집 밖의 열기를 완벽하게 차단했고, 높은 천장이며 집 안 곳곳에 놓은 화분들이 실내 공기를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맨 처음 줄줄이 늘어선 화분을 보고 대체 누가 저 많은 화초들을 돌보는 건지 궁금했지만, 곧 에디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집은 또한 수영장을 중심으로 U자 형 구조를 취하고 있어 집 안 어디에서든 수영장과 파티오(스페인식 집의 안뜰)를 볼 수 있었다.

미셀은 그 사치스러움에 내심 놀랐다. 존이 가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았지만, 그래도 목장 이외의 다른 것에 돈을 쓰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어쨌든 집안 곳곳에 그이 존재가 반영되어 있고 모든 것이 그의 안락함을 위해 조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과연 그가 지었음직한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마침내 미셀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에디가 호전적으로 나오든 말든 언제까지 2층에 숨어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부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냥 커피 냄새를 따라가면 되었던 것이다.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곧 에디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에디의 얼굴을 본 순간 미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에디는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존에게 이제 이 집에도 여자를 데려올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했죠.]

안도감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일 에디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봤다면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던 몇 년 전의 그녀와 전혀 달랐다. 장밋빛 인생에 대한 환상이 깨짐으로써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고나 할까?

미셀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에는 제대로 소개도 못한 것 같은데..전 미셀 캐보트라고 해요.]

[전 에디 워드랍니다. 참, 아침 드셔야지요? 요리도 제 담당이거든요.]

[말씀은 고맙지만, 나중에 먹을래요. 조금만 기다리면 점심때잖아요.]

미셀은 조심스레 사양의 뜻을 비치고 수줍은 듯 말을 이었다.

[존은 주로 어디서 점심을 먹죠?]

[근처에 일이 있으면 집에서 먹는 편이에요. 그럼 커피라도 드릴까요?]

[제가 직접 따라 마실게요. 커피잔만 꺼내주세요.]

에디는 싱크대 왼쪽에 있는 찬장에서 커피잔을 꺼내 미셀에게 건넸다.

[하루 종일 같이 지낼 사람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에디가 흐뭇하게 말했다.

[사실 여기 카우보이들은 하나같이 말수가 적은 사람들뿐이거든요. 안 그래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너무 잘됐어요.]

에디는 미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오십대 여자치고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체구를 지닌 그녀에게선 마치 수녀원장 같은 위엄이 풍겼다. 흰머리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온갖 역경을 겪고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경험한 사람 특유의 현명함이 느껴지는 얼굴은 그녀를 딱 제 나이로 보이게 했다.

어쨌든 에디가 잠자코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인 덕에 미셀은 한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과연 에디는 사물의 겉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디는 미셀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과 미셀이 집안일을 돕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래퍼티가 알면 난리가 날 거예요.]

에디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집안일을 하라고 내게 월급을 주는 거니까요. 이 집에 사는 한그의 화를 돋우는 일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결국 미셀은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방마다 고개를 들이밀고 살펴보는 등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 낭비나 하며 지낼 수 있을까?

그녀는 사실 목장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일을 마친 후에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되기 일쑤이긴 했지만, 그래도 매순간 보람을 느꼈다. 한 집안의 여주인이라는 미명하에 장식품 역할이나 하는 것보다는 힘든 노동을 통해 목표를 이루는 삶이 훨씬 자신에게 맞는 것 같았다.

목적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존과 함께하는 삶이 그의 기쁨도 걱정도 모두 함께하는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마치 남편과 아내처럼뀉·

미셀은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를 가까이 느끼고 싶어 옷장에 걸린 그의 옷가지를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미셀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만졌다. 그녀의 옷도 그의 옷 옆에 걸려 있긴 했지만, 그녀는 이 방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소유물일 뿐. 즐거운 침대 파트너이자 해가 뜨면 잊혀지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낫잖아, 미셀은 씁씁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존심이 다치든 어떻든 그가 원하는 한 이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미셀은 그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간절히 원하는 건 그의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와 결혼을 하고, 그의 연인이자 친구로서 진짜로 이 집에 속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아무리 상대가 존이라지만, 미셀은 다시금 결혼을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로저는 그녀의 신뢰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낙관적인 인생관마저 망가뜨렸다. 아니, 그가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너진 신뢰는 잿더미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미셀은 그제서야 자신이 로저와의 끔찍했던 결혼 생활로 위축된 것일 뿐,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게 존의 덕분이었다. 그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오랫동안 지속된 감정이었고, 더 이상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삶을 산다고 행각했을 때조차도 사실은 오직 그를 향한 사랑에 매달려 삶을 지탱했던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 미셀은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풍요로운 존의 목장을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했다.

존의 목장은 그녀의 목장과는 규모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모든 것들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헛간이며 울타리도 모두 새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말이며 소들도 건강하게 뛰놀며 풀을 뜯고 있었다. 물품창고 역시 그녀의 헛간보다 훨씬 훌륭했다. 캐보트 목장 역시 한때는 여기처럼 활기차게 돌아갔었다. 미셀은 언젠가는 자신의 목장도 이곳과 똑같이 만들리라 다시금 결심했다.

그런데 우리 소는 대체 누가 돌보고 있을까? 그녀는 문득 존에게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미처 알아볼 시간도 없었다고나 할까. 지난밤에는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 이끌려 이곳으로 -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침대로 - 왔고, 오늘 아침엔 그녀가 한참 잠에 취해 있을 때 그가 나가버렸으니 말이다.

석양이 질 무렵에야 존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미셀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부엌에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하루 종일 집에 돌아오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미셀이 그의 지붕 아래 있는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8년 전 이 집을 지을 때도 그는 미셀의 마음에 들지 어떨지를 고려했었다. 그래서 결국 팜 비치의 맨션처럼 호화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선까지는 사치를 부리면서 안락함을 염두에 둔 그런 집을 지은 것이다.

미셀은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청아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자 그는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몸이 새삼 의식됐다. 지금 그녀를 만진다면 크림색 드레스에 더러운 손자국이 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서 그녀를 만져야 했다. 아니면 거의 미칠 것 같았다.

[함께 올라갑시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곤 쿵쿵거리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미셀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혹시 날 여기로 데려온 걸 벌써 후회하는 건 아닐까? 그녀를 보고서도 키스는커녕 미소조차 짓지 않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한 것 같아 불안했다.

침실로 들어서던 그녀는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셔츠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주춤 멈춰섰다. 무성한 체모가 나 있는 그의 넓은 가슴과 힘이 넘치는 어깨를 보자 저도 모르게 전율이 일었다. 그의 체모가 젖가슴에 쓸리던 감촉이 떠올랐다. 순간 그녀의 맥박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뭘 하면서 지냈소?]

존이 욕실로 들어가면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미셀은 자신을 엄습하는 관능적인 나른함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씁쓸한 어조로 서글픈 진실을 중얼거렸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몇분 후 그가 침실로 나왔다. 세수를 했는지 이마 위로 젖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 내려 있었다. 그는 애가 타는 듯 인상을 쓴 채 부츠를 벗고 바지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다시금 미셀의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그는 지금 당장 그녀를 침대로 데려갈 작정인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 당장 그에게 얘기를 해야만 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며 미셀은 불안한 몸짓으로 그의 부츠를 집어들어 한쪽으로 치워놓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미셀은 불쑥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단 말이에요.]

그는 기다려야 할 이유가 뭐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바지를 벗는 일에 열중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말해봐요.]

미셀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존이 갑자기 몸을 펴자 미셀은 흠칫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다. 거저 값비싼 물건을 얻을 순 없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채 하루도 안 돼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소.]

그는 감정을 감추고 담담하게 말했다.

[당장 메르세데스 벤츠 키를 주겠소. 그리고 내일 은행에 가서 당신 구좌도 개설해 주리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 듯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가 자신을 무슨 애완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저질 섹스 용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값비싼 차와 은행 구좌만 있으면 만족하는 여자처럼 자신을 생각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들었다.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격한 몸짓으로 더러운 부츠를 한 짝씩 차례로 그에게 집어던졌다. 다행히 그는 첫 번째 부츠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날아든 두 번째 부츠에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맞자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제기랄! 이게 도대체 무슨]

[그럴 수는 없어요!]

미셀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불꽃이 일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은행 구좌니 차 열쇠니 하는 건 다 필요 없다구요! 난 내 목장과 소만 있으면 돼요! 하루종일 당신이 집에 돌아와 같이 놀아주기만 기다리는 섹스 인형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따윈 추호도 없으니까요!]

존 역시 분노에 휩싸인 듯 청바지를 발로 차서 벗어던지고 속옷 차림으로 그녀 앞에 버티고 섰다.

잠시 후 그는 애써 화를 삼키고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난 당신을 섹스 인형 취급한 적 없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미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날 보자마자 곧장 침실로 불러들이더니 내 앞에서 옷을 벗었잖아요!]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건 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먼지투성이였기 때문이오. 당신 옷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키스도 할 수 없잖소. 당신 옷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소.]

드레스를 내려다보는 미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그냥 옷일 뿐이에요.]

미셀은 몸을 홱 돌리고 입을 열었다.

[더러워진 옷이야 빨면 그만이라구요. 그리고 난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지내느니 차라리 옷이 더러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을 하고 싶어요.]

[그 문제에 대해선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잖소.]

존은 그녀의 등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당신은 힘든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소. 그러다가 부상을 입기 십상이지. 물론 목장 일을 거드는 여자들도 있지만, 당신은 그 정도로 체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오. 당신 손목을 좀 보라구.]

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들었다.

[이것 봐, 너무 가늘잖아.]

미셀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당신은 날 자꾸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게 만들어요!]

미셀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어쨌든 당신과 함께 일을 나가게 해줘요. 난 소몰이를 할 줄도 알고]

존은 미셀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그녀를 부서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세게 끌어안았다.

[젠장, 베이비]

존이 중얼거렸다.

[난 당신을 쓸모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그저 보호하려는 거요. 당신 혼자 망가진 울타리를 수리하는 걸 봤을 때 내가 얼마나 끔찍한 기분이었는지 아오? 철사가 퉁겨 나와 당신 몸을 꿰뚫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당신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구요.]

[인정해. 하지만 당신과 난 경우가 다르잖소. 난 당신이 안전하길 바라오.]

그녀는 그 어떤 말로도 그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이 며칠만 더 계속되더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던 것이다.

[당신이라면 나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걸 지켜 보기만 해야 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심지어 집안일을 도우려고 해도 에디가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군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난 그냥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여기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건가요?

알았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잘 아오.]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다시 유한마담 같은 생활을 되찾고 그것을 한껏 즐기리라 기대했건만, 오히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예민해져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존은 미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생각에서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문질렀다. 다행히 그녀는 점차 긴장이 풀린 듯 팔을 들어올려 그의 목을 감았다.

미셀에게 할 일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크처럼 부드럽고 탄력 있는 그녀의 몸이 감겨오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존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체취를 한껏 들이마셨다. 미셀은 하루 종일 그의 머릿속에 머무르며 자석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아무리 그녀를 가져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향한 욕구가 더욱 정도를 더해가는 느낌이었다.

존은 간신히 미셀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가기 전에 샤워부터 해야겠소. 몸에서 말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 같아.]

태양과 땀 냄새, 그리고 뜨거운 대지의 냄새가 어우러진 그의 체취가 그녀를 유혹했다. 미셀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혀로 그 뜨거운 피부를 살짝 핥았다. 그의 몸에 경련이 일었다.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 따윈 어느새 저만치 사라진 후였다. 그는 마치 황금 커튼처럼 드리워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찔러넣으며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미셀은 자신의 반응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존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기만 해도 그녀는 즉시 그에게 녹아들었다. 그를 사랑하는 건 그녀를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새로운 경지로 인도했다.

그녀는 그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곧장 침대로 직행하지 않은 건 그가 자제력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샤워. 샤워를 해야 한다니까.]

존은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빌어먹을, 당장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있소.]

존은 그녀가 자기와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하길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목장 운영에 있어서 서류 작업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미셀은 존에게서 몸을 떼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도 배가 고프니 서둘러 샤워를 끝내요.]

미셀은 저녁 식사 시간 내내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와 한 집에 있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건처럼 여겨졌다. 아침에 느꼈던 불편하고 어색한 기분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마도 존이 함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에디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에디의 말소리가 식탁의 침묵을 채워준 덕분에 혼자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존은 미셀에게 살짝 입을 맞추고 다정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토닥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되도록 빨리 끝내겠소.]

[당신과 함께 서재로 가겠어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미셀을 내려다보았다.

[베이비, 당신이 근처에 있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거요.]

갑자기 짜증이 확 치솟았다. 미셀은 답답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존 래퍼티, 당신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남성 우월주의자예요. 난 당신을 방해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구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내가 장부 정리를 해줄게요. 그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갑자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결코 남성 우월주의자가 아니오.]

설사 그렇다 해도 내가 장부에 손을 대는 건 원치 않겠지, 그녀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비록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존의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신이 계속 내게 일을 주지 않겠다면 난 당장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난 정말 뭔가 할 일이 필요하다구요.]

미셀은 허리에 손을 얹고 존을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장부 정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잖소.?]

[부전공이 경영학이었어요.]

미셀은 그 말과 함께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가 순순히 서재로 데리고 가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미셀. 빌어먹을!]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어쩔 수 없이 미셀의 뒤를 따라 서재로 갔다.

[내가 장부 정리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죠?]

미셀은 커다란 책상 앞에 놓은 의자에 앉으며 쏘아붙였다.

[그런 일이나 시키려고 당신을 이 집으로 데려온 게 아니니까. 난 그저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을 뿐이요.]

[그러니까 장부 정리를 하다가 부상당할 위험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그게 뭐죠? 혹시 내 손으로 들기엔 연필이 너무 무거운가요?]

존은 인상을 썼다. 당장 미셀을 서재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턱을 치켜들고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미셀을 자극하면 곧장 그 어둡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물론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 둘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그녀가 기꺼이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는 거지, 들고양이처럼 그를 할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어찌됐든 말을 타고 소몰이를 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겠지. 장부를 다시 검토하느라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알았소.]

그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마지못해 허락했다.

미셀의 에메랄드빛 눈에 조롱기가 어렸다.

[정말 자비로우시군요.]

그녀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건방지게 구는군.]

그는 의자에 앉으며 계속 투덜거렸다.

[저녁을 먹기 전에 당신을 사랑해 주지 않은 게 실수였던 것 같아. 그랬더라면 이렇게 건방지게 굴 생각은 못했을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은 정말 끔찍한 남성 우월주의자예요.]

미셀은 짐짓 오만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늘 그의 분노를 치솟게 만들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거래 영수증을 집어들었다.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그대로 따라하시오. 나중에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존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아마추어 회계사가 망치지 않아도 세금 관계는 충분히 복잡하단 말이오.]

[걱정 말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줄곧 해왔던 일이니까]

미셀 역시 날카롭게 대꾸했다.

[허니, 당신 목장의 상태를 보면 썩 잘하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의 조롱에 미셀의 표정이 금새 일그러졌다.

존은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곧 그의 손에 들린 영수증을 낚아채 날짜별로 분류해 놓고 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존은 책상 앞에 앉아 미셀이 단정한 글씨체로 장부에 숫자들을 기록하고 계산을 마친 후 다시 한 번 계산기를 이용해 금액을 확인하는 걸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미셀은 정리를 모두 마친 후 장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 됐어요. 어디 잘못된 데는 없는지 확인해 보시죠.]

그는 묵묵히 장부에 적힌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좋소.]

마침내 존은 장부를 내려놓고 말했다.

미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할말이 그것뿐이에요?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는 게 전혀 무리가 아닌 듯싶네요. 당신에게 여자는 2 더하기 2가 뭔지 계산할 정도의 두뇌도 없는 그런 존재일 테니까요, 그렇죠?]

[난 한 번 결혼한 경험이 있소.]

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무나 의외의 말에 미셀은 깜짝 놀랐다. 그가 결혼한 적이 있다니. 그런 애기는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존 래퍼티와 결혼을 연관시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법적으로 그의 성을 공유하고 그와 한 집에 살면서 원할 때면 언제든 그를 만질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여자가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갑자기 그 여자에 대한질투심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누·..누구랑요? 대체 언제?]

미셀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오래 전에. 그게 열아홉 살을 막 넘겼을 땐가? 아무튼 아주 오래 전 일이요. 이성보다는 호르몬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었지.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아마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어쨌든 그 여자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과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남편을 원했소. 목장 생활이 자기한테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정확히 4개월이 걸리더군.]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혐오감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본 순간, 미셀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끼쳤다.

[왜 아무도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을까요?]

미셀이 속삭였다.

[10년이나 알고 지냈으면서도 당신이 결혼한 적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아마 당신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쯤엔 그리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기 때문일 거요. 그때는 이미 이혼한 지 7년도 넘었을 때니까. 게다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결혼 생활이 길게 이어졌던 것도 아니고. 그때는 사교 모임을 다니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았소. 그 여자는 목장주의 아내로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나와 결혼했던 것 같아.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금세 마음이 바뀌었지.[

[그녀는 지금 어디 살고 있나요?]

미셀은 존의 전처가 이 근처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모르겠소. 그리고 관심도 없소. 나와 이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아버지 정도 나이의 돈 많은 노인네와 재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소.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요.]

미셀로서는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존대신 다른 남자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존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움막집에서 방울뱀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존이 왜 그렇게 제트족의 생활방식을 경멸하는지, 왜 그렇게 남자에게 의지할 생각한 하고 아무 일도 하려 들지 않는다고 그녀를 나무라고 싫은 소리를 해댔는지 이해가 갔다. 그런데도 왜 내가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하기를 바라는 걸까? 그녀는 너무나 상반된 그의 태도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존은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미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가 결혼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건 분명했다. 그 역시 거의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아마 그녀가 결혼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만 않았더라도 그 얘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혼 당시 그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다 망해가는 목장을 제대로 운영해 보려는 열의로 가득했던 열아홉 살 청년이었다. 어쨌든 한때 결혼까지 했었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전처의 이름조차 잘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예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아마 지금 얼굴을 마주친다 해도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미셀이 결혼해 있는 동안에도 그는 결코 그녀의 얼굴을 잊은 적이 없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머리며 도도한 걸음걸이는 물론이고, 높은 광대뼈와 고집이 세 보이는 턱, 그리고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까지. 그는 미셀의 모든 걸 뚜렷이 기억했다.

크림색 드레스 차림의 미셀은 고고하고 초연해 보였다. 마치 접근 금지라는 팻말을 가슴에 달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사랑을 나눌 때마다 자신의 품안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그녀를 똑똑히 기억했다. 긴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몸을 비틀던 그녀를 떠올리자 그의 몸이 즉시 단단하게 굳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불편한 듯 몸을 들썩였다.

미셀은 책상 위에 놓은 서류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전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존이 당신 결혼은 왜 실패했냐고 물어볼까 봐 두렵기도 했고, 다시 사업에 관한 주제로 화제를 옮기는 게 안전했다. 게다가 마침 존에게 소를 파는 문제와 관련해 물어볼 것도 있지 않은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목장 운영자금 때문에 소를 몇 마리 팔아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중량을 더 늘일 필요가 있다는 건 알지만·..어쩔 수가 없어서요. 어쨌든 소를 팔려면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죠? 그리고 수송 수단은 어떻게 조치하죠?]

그 순간 존은 소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미셀이 몸을 움직이며 다리를 교차시키는 바람에 치마가 위로 밀려 올라가면서 늘씬한 다리가 그의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그는 당장 치마를 허리까지 말아올리고 그녀의 다리를 완전히 드러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지가 터질 듯 그의 남성이 부풀어올랐다.

[당신 소는 그냥 내버려둬요. 지금 팔면 제대로 돈을 받을 수 없소. 중량을 좀더 늘려야 하오. 그때까지는 내가 당신 목장도 함께 운영해 주겠소. 그러니 돈 걱정은 말고]

그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미셀은 즉시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2층으로 올라갑시다.]

그가 중얼거렸다.

저토록 강렬한 성적 욕망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걸 깨닫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미셀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정열은 종종 그녀를 꼼짝할 수 없게 제압했고, 지금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의 강철 같은 자제력과 부드러운 애무가 그녀를 보호해주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등뒤로 문을 잠그고 즉시 그녀의 드레스 지퍼를 내리기 시작한 존은 그제야 그녀가 떨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베이비, 날 두려워하지 마. 아니면 혹시 흥분 때문인가?]

[네.]

그의 손이 열려진 지퍼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젖가슴을 감싸쥐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애무의 손길을 느낀 순간 장밋빛 유두가 그의 손바닥 안에서 즉시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그녀는 나지막이 신음을 토하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어서 그의 단단함과 따뜻함 속에 파묻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지 그의 손길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양쪽 다란 말이오?]

존이 중얼거렸다.

[왜 내가 두려운 거지?]

미셀은 눈을 스르르 감고 그의 손길이 불러일으키는 열기에 몸을 맡겼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당신이 내게 느끼게 하는 기분 때문이죠.]

젖꼭지를 힘껏 빨아들이는 뜨거운 혀를 느끼고 미셀은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내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지.]

두 사람 사이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그에 따라 그의 목소리 역시 점점 허스키하게 변했다.

당장 당신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폭발할 것처럼 몸이 뜨거워져. 그리고 당신 안에 들어가 부드럽게 날 조이는 당신을 느끼는 순간 폭발을 하고 말지.

귓전에 울리는 그의 섹시한 목소리에 그녀는 계속 몸을 떨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존의 단단한 몸에 기대고 있지 않았다면 이미 바닥에 쓰러진 지 오래였을 것이다. 미셀은 미칠 것 같은 갈망을 담아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존은 미셀의 귓전에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계속해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다.

[베이비, 당신은 너무 섹시해. 지금 당장당신을 갖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이 드레스를 보자마자 이렇게 치마를 들어 올리고 ]

그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을 떠나 아래로 내려가 치맛자락을 위로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치마가 허리까지 말려 올라가자 그의 손이 즉시 그녀의 맨살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손을 당신의 팬티 속으로 넣어 이렇게 말이오. 팬티를 아래로 이렇게 끌어내리고..]

미셀은 그가 팬티를 엉덩이 아래로 끌어내리자 마치 온몸이 노출된 것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부분적으로만 맨살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야릇한 감각을 느끼게 해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은밀하게 어루만지자 그녀는 더욱 고조되는 쾌감에 마구 몸을 떨었다.

[당신은 너무 달콤하고 부드러워.]

존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날 받아들일 준비가 됐소?]

미셀은 대답을 하려 했지만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그저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는 온통 불이 붙은 듯 달아오른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몸속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빼기를 되풀이했다. 그녀가 완전히 자신을 맞을 준비가 됐다는 걸 알아차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경험이 많은 그였지만 그녀의 느낌을 한껏 음미하며 달콤한 고문을 계속 퍼부었다.

미셀은 그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손길과 허스키한 음성에 이끌려 그녀의 관능이 활짝 꽃을 피웠다.

그의 너무나도 솔직하고 능숙한 기교를 접할 때마다 그를 한대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욕망으로 전율하며 자신을 어루만지는 그를 보면서 미셀은 상대에게 쾌감을 주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여자든 성적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남자가 자신에 대한 욕구로 몸을 떠는 광경을 지켜보는 건 무척이나 놀랍고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지금에 와서야 그녀는 존의 손에 의해 여자로서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며 쾌락에 휩싸이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미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자기 손으로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격렬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 채 그의 옷가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런 그를 쳐다보던 미셀은 그 웃음이 흥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나란히 침대로 쓰러졌다. 존은 천천히 그녀의 몸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은 강렬한 열정의 불길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다음날 아침, 미셀은 존이 일어나는 기척을 느끼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아직 일어날 것 없소.]

존은 걸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좀더 자도록 해요.]

그는 지난밤의 여운으로 발갛게 물든 몸으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미셀에게서 아쉬운 듯 시선을 떼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미셀은 헝클어진 금발을 걷어올리며 벌거벗은 몸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늘은 당신이랑 같이 목초지로 나갈래요.]

미셀은 그 말을 남기고 그보다 먼저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몇 분 후 존이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미셀을 만류하는 대신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맘대로 해요.]

그녀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존은 확실히 지나치리만큼 여성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남성 우월주의자였다. 그런 그와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나서기로 했고, 그 전략이 맞아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그녀 역시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미셀은 점차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서류 정리나 장부 정리는 이제 완전히 그녀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1주일에 세 번씩 정기적으로 사무를 봤고, 덕분에 존은 한결 여유 있게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처음 1주일 동안은 미셀이 정리해 좋은 장부를 몇 번씩 점검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실수도 찾아낼 수 없자 이제는 장부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미셀과 나란히 말을 타고 일을 나가는 걸 즐기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지긋지긋하게 무더운 날씨 때문에 너무 짜증이 나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으로 몸을 돌리다가도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미셀을 발견한 순간 짜증 따윈 금세 사라져 버렸다. 미셀의 다정한 시선을 받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기운이 났다. 그때만큼은 말 안 듣는 수소는 물론 그 어떤 것도 그의 기분을 망칠 수 없었다.

미셀은 먼지나 더위, 그리고 땀 냄새나 말 냄새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목장이라는 작은 세계에 스스로를 묻어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가 알던 미셀은 조그만 일에도 즐거움을 발견하고 웃을 줄 아는, 그리고 파티와 춤을 좋아하던 그런 소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만은 아낌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바람에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물론 그녀의 미소 역시 그와 그의 카우보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마치 거품이 터지는 것처럼 쾌활하게 울려퍼지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라져 버린 이유가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존은 그녀를 자신만의 사람으로 가지는 기쁨을 한껏 만끽했다. 매일 밤 그녀와 뜨거운 정열을 나누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정도를 더해갔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흥분 상태로 보냈고, 때로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단단하게 부풀어 올라 그것을 가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미셀은 서재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에디는 식료품을 사러 나가고, 그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날 아침 따라 여기저기서 계속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그녀는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뭐라고 해야 할지 망설이던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래퍼티 목장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느리고 깊은 숨소리만 들려왔을 뿐. 전화를 한 사람은 의도적으로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음란 전화는 아닌 듯했다. 음란 전화처럼 변태적이고 과장된 숨소리와는 전혀 종류가 달랐다.

[여보세요?]

미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시죠?]

상대방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자.

전화를 건 사람은 남자가 분명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한 사람이 남자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춘기 소녀의 장난 전화도, 잘못 걸린 전화도 아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수화기 너머로 무언의 악의가 느껴졌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3주 만에 처음으로 미셀은 혼자 고립된 채 협박을 당하는 듯한 그런 기분을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존의 얼굴을 봐야 했다. 소리 높여 욕설을 지껄이거나 아니면 놀란 송아지를 부드럽게 달래는 그의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오직 그의 체온에 둘러싸이고 나서야 이 정체 모를 한기를 쫓아낼 수 있으리라 그녀는 확신했다.

이틀 후 다시 괴전화가 걸려왔다. 우연히 그 전화 역시 마셀이 받게 되었다.

[여보세요?]

미셀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래퍼티 목장입니다.]

침묵.

미셀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조용한 침묵의 의미를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곧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울리며 요란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다시금 예의 그 한기가 밀려드는 걸 감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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