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을빛 유혹-6화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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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그녀는 동쪽 목초지로 소떼를 이동시키러 온 카우보이들 틈에 존이 있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기 때문에 뜻밖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잠시 실망에 잠겼다. 그러나 실망감도 잠시, 카우보이들을 도와 소떼를 이동시킬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그녀는 한껏 가슴이 부풀었다.

소몰이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흥분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기대감으로 환한 미소를 띤 채 말을 탄 카우보이들을 맞이했다.

[나도 돕고 싶어요.]

미셀의 초록색 눈이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힘든 육체 노동을 잠시 쉬게 되자 그녀는 마치 기생충이 된듯한 심정이었다. 물론 휴식을 취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은 남아도는 에너지를 주체 못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야외에서 일하느라 잔뜩 거칠어진 네브 루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떤 경우에도 미셀에게 일을 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는 보스의 명령이 떠오른 탓이었다. 보스의 입에서 누군가에게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보스의 명령을 따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아하기 짝이 없는 미셀 캐보트 양이 자청해서 험한 목장 일을 하겠다고, 그것도 소몰이를 돕겠다고 나선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미셀의 얼굴에 떠오른 환한 미소를 지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보스에게 나중에 잔소리를 듣는 게 더 내키지 않았다.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듯 네브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타고 나갈 말은 있으시오?]

미셀에게 말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 하는 소리였다.

미셀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밝아졌다.

[말은 없어요. 하지만 대신 트럭을 몰고 가면 되잖아요.]

미셀은 말을 마치자마자 헛간으로 달려갔다.

네브는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한 표정으로 미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의 주위에 모여 있던 다른 카우보이들 역시 혀를 끌끌 찼다.

더 이상 그녀를 말릴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보스의 명령이라 해도 그녀를 트럭에서 끌어내 집 안으로 던져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미셀이 순순히 집 안에 머물러 있을 것 같지도 않지만. 게다가 이미 보스가 미셀에 대해 상당한 소유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하긴 어떤 종마든 자기 암말에게 다른 종마가 접근하는 걸 허락하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소유욕은 인간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축을 키우다 보니 무슨 일이든 동물의 시각에서 보는 버릇이 있는 그의 견해였다.

그는 저 여자에게 강제로 손을 댔다가 래퍼티의 분노를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차라리 보스에게 혼이 나는 편이 미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미셀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네브는 곧 마음을 정했다. 여자들과 별로 접촉이 없는 남자들이 보통 그렇듯 그는 울음의 울자만 생각해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보스의 기분이 땅에 떨어지든 말든, 네브는 미셀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다.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없어지자 미셀에게는 온 세상이 달라 보였다. 따가운 햇살도 기분 좋게 느껴졌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음매음매 울어대는 소 울음소리와 손발을 착착 맞춰 소를 몰아가는 카우보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정말 즐거웠다. 미셀은 트럭을 모고 후미에서 소들이 대열을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도왔다. 문제는 맨 뒤에서 쫓아가다 보니 먼지를 온통 뒤집어쓰게 된다는 점이었다.

카우보이 중 하나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그녀에게 양보하고 대신 트럭을 운전하겠다고 제안했다. 미셀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카우보이의 말에 올라탔다. 미셀은 승마를 좋아했다. 처음 이곳 플로리다에 왔을 때도 목장에 살아서 좋은 점은 언제든 말을 탈 수 있다는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셀은 곧 즐기기 위해서 타는 승마용 말과 잘 훈련된 소몰이용 말을 타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잘 훈련된 소몰이용 말은 그녀가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송아지 한 마리가 대열에서 이탈해 자유를 찾아 달리기라도 하면 말도 곧 그 뒤를 쫓아 달려갔고, 미셀은 갑작스런 말의 움직임에 맞춰 말을 모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곧 말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미셀은 말 타는 재미에 어서 대열을 이탈해 혼자 달려가는 송아지가 생기기를 바랄 정도가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커다란 회색 종마 한 마리가 목초지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한 네브는 속으로 별의별 욕을 다 지껄였다. 빌어먹을, 이제 불호령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로군.

존은 행렬의 뒤를 쫓아가는 트럭을 발견하고 분노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그 트럭을 모는 사람이 미셀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말을 타고 달리는 카우보이들을 훑어보았다. 곧 모자 아래로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신나게 말을 모는 체구가 작은 기수가 눈에 띄었다. 곧장 네브에게 달려간 존은 거칠게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네브를 바라보는 그의 턱은 이미 잔뜩 굳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존은 살벌한 어조로 물었다.

네브는 턱을 긁적거리며 무리에서 이탈한 송아지를 향해 모자를 흔드는 미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저, 말리려고 했는데]

그는 존의 잔뜩 가늘어진 눈을 쳐다보며 변명조로 웅얼거렸다.

존의 눈동자는 이제 새까맣게 변한 채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뿜어냈다.

[젠장, 보스, 여긴 그녀의 땅이고 저건 그녀의 트럭이란 말이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었겠수? 그녀를 꽁꽁 묶어놨으면 만족스럽겠수?]

[하지만 미셀은 트럭이 아니라 말을 타고 있잖아!]

존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게 차 안이 먼지로 가득 차서.. 빌어먹을!]

네브는 그에게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은 듯 갑자기 도망치는 송아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존은 네브가 달려가게 내버려두고 미셀에게로 말을 몰았다. 네브에게는 나중에 다시 주의를 줄 생각이지만, 이미 그의 분노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셀은 그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환한 미소여서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돌아온 뒤로 그런 미소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한 번도 그런 미소를 짓지 않았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미셀은 행복해 보였다. 저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면 네브가 그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소?]

존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네, 아주 즐거워요.]

미셀은 도전적인 시선으로 존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변호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소. 내일 모레까지는 서류가 준비될 테니 사인을 하러 오라고 하더군.]

[잘됐군요.]

목장 대지는 뭉턱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이제 가장 큰 부채는 청산을 한 셈이었다.

존은 안장에 한쪽 팔을 짚은 채 미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집까지 나와 경주하지 않겠소?]

[왜, 빠른 관계를 위해서요?]

미셀은 새침하게 물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가슴으로 미끄러졌다.

[그보다는 느린 쪽을 생각하고 있었소.]

[그래서 당신의 카우보이들에게 또다시 소문거리를 마련해 주자구요?]

그는 짜증스러운 듯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가 한밤중에 슬그머니 당신 집으로 숨어들기를 원하는 모양인데, 젠장, 우린 더 이상 사춘기 아이들이 아니란 말이오!]

[물론 아니죠.]

미셀은 순순히 동의했다.

[나, 임신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불쑥 털어놓았다.

그는 안심을 해야 할지, 짜증을 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사랑을 나누려면 며칠은 기다려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미 욕구불만에 휩싸여 있던 그는 내심 저주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더 이상 궁금해하면서 2주를 기다릴 필요는 없게 됐군.]

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네,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날 아침 생리가 시작되자 그녀는 뭔가 아쉬운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여자가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존은 너무나도 남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면서 다른 남자를 마치 잡종가축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회색 종마가 그의 몸 아래에서 꿈지럭거리자 존은 강한 다리를 이용해 즉시 그 큰 짐승을 제압했다.

사실은 빠른 관계든 뭐든 오늘은 시간이 없소. 오후에 마이애미로 가봐야 하거든. 아마 이틀은 돌아오지 못할 거요. 내일 모레까지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당신 먼저 템파로 가서 서류에 사인을 하시오. 난 돌아오는 길에 하면 되니까.

미셀은 대열 후미를 덜컹거리며 따라오는 낡은 트럭을 흘끗 바라보았다. 걸어서는 돌아올 수도 없는 먼 거리를 저 낡은 트럭을 믿고 갈 수는 없었다.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어요.]

[내 메르세데스를 타고 갔다와요. 목장에 전화를 하면 네브가 사람을 시켜 차를 갖다줄 거요. 당신이 저 차로 식료품을 사러 가는 것도 안심이 안 되오.]

그저 이웃지간에 차를 빌려주는 그런 정도로, 아니 단지 연인으로서의 마음씀씀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존은 이미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밝힌 상태가 아닌가! 만일 지금 그녀가 순순히 그의 차를 빌려쓴다면 그에게 더 의존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템파까지 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의무감은 하루 빨리 그 서류에 사인을 해서 채무를 없앨 것을 주장했으므로, 그녀는 어느새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게다가 존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라 더 이상 망설일 수도 없었다.

[알았어요.]

미셀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음성으로 대답했다.

존은 그녀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후 그는 과연 이대로 마이애미로 가야 할지, 아니면 미셀과 템파까지 동행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었다. 미셀이 템파까지 저 낡은 트럭을 끌고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굶어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비록 어머니를 경멸하긴 하지만 어찌됐든 그를 낳아준 어머니가 아닌가 말이다!

마이애미까지 미셀을 데려갈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거긴 팜 비치와 너무 가까웠다. 팜 비치엔 그녀의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을 터였고, 그들과 만나게 되면 다시금 옛 생활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돈많은 바람둥이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가능성도 많았다.

미셀이 혼자 힘으로 목장을 경영해 보려고 애를 썼다는 건 인정하지만, 원래 힘든 노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가 아닌가. 더욱이 그동안의 힘든 노동과 희망 없는 미래에 지쳐 있을 테니 그녀를 책임져 준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즉시 안락한 생활로 돌아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설사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그로서는 그녀를 잃을 수도 있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그는 여자에 대해 불안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자신을 원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둘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그녀와 한 지붕 아래 살면서 같은 침대를 쓰고 마음껏 사치도 부리게 해주기 전까지는 결코 그녀에 대한 갈망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셀이 그를 원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원하는 만큼 그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그와 계속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토록 황홀한 경험을 함께 나눈 후에도 말이다. 그녀에게 조금은 가까이 다가섰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야속하게도 그녀는 그와의 거리를 더 벌려놓는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귀족적인 골격을 한껏 음미했다.

[내가 없는 동안 날 그리워할 거요?]

그는 마치 명령처럼 물었다.

그녀는 입술 한쪽 끝을 치켜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러길 원한다면요.]

[빌어먹을!]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 자존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존재요.]

[굳이 나까지 당신 자존심을 세워줘야 할 필요가 있나요?]

[물론이오. 당신은 더더욱 그렇소.]

[그 말은 좀 믿어지지 않는군요. 난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쌍방 통행이어야 의미가 있는 감정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바빠서 날 그리워할 틈도 없을 것 같은데요?]

[물론 정신없이 바쁘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귀찮을 정도로 당신을 그리워하게 될 거요.]

[조심해요.]

미처 억누를 새도 없이 그녀의 입 밖으로 말이 새어나왔다.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는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사실 며칠 동안 그를 볼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허전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자길 그리워할 거냐고 물었던가? 내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할지 아마 이 남자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그리움이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리라는 것도.

존은 미셀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일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네브에게로 갔다. 두 남자는 한동안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며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네브가 존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이는가 싶더니 존이 회색 종마에 박차를 가해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가 버렸다. 말과 기수는 곧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존의 부재로 인한 쓸쓸함과 허전함에도 불구하고 미셀은 다음 며칠 동안 우울해할 틈도 없이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존의 일꾼들이 힘든 일은 도맡아 해주었지만, 그 외에도 자질구레하게 할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마 카우보이들이라 그런지 소나 말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미셀은 현관에 페인트칠을 하거나 우편함기둥을 새로 만드는 등 잡다한 일을 해치우는 틈틈이 카우보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 목장은 거의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사람들로 북적대고 먼지와 가축 냄새, 그리고 욕설들로 가득한 것도 그랬고, 소들 역시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다.

송아지 엉덩이에 낙인을 찍고 거세를 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에 눈살을 찌푸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그녀 자신의 인생과 목장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과정으로 보이는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이틀째 되는 날 네브가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왔다. 미셀은 차 열쇠를 받으면서도 네브의 시선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정작 네브는 미셀이 존의 자동차를 모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한동안 털털거리는 픽업 트럭만 몰다가 메르세데스 벤츠의 힘과 성능을 느끼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지극히 조심스레 차를 운전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선 한때 값비싼 스포츠카를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몰았던 소녀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셀은 열여덟 번째 생일에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흰색 포르셰를 겁없이 몰고 다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 조그만 흰색 자동차의 가격을 듣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건만뀉· 만일 지금 그 정도 돈이 있다면 엄청난 부자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 모든게 다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리라.

그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에 사인을 하자마자 필요 이상으로 메르세데스 벤츠를 오래 사용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즉시 목장으로 돌아왔다.

그 주의 나머지 날들은 조용히 흘러갔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하루가 마치 10년처럼 느껴지는 나날들이었다. 최소한 그가 언제쯤 돌아올 거라는 걸 알면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틀 후면 돌아올 거라던 그가 닷새가 지나도 소식이 없자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사업차 간 것이라 해도 24시간 내내 일만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긴 어떤 여자가 그를 마다하겠는가! 사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든 말든 그녀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기도 했고.

한 가지 다행인 건 더 이상 로저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혹시 로저가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어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공연한 기우였던 것 같았다. 그녀로서는 제발 그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갔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사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던가. 어떤 이유든 상관없었다.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만 않는다면.

금요일 아침, 그녀는 존의 카우보이들이 건너오지 않은 덕분에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소들도 동쪽 목초지로 옮겨져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울타리 수리도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셀은 세탁기를 돌리고 잔디를 깎으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선 그녀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집 안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어쩌면 오전 내내 잔디 깎는 기계의 소음에 시달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물을 마실 생각에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하지만 수도꼭지에서 물이 몇 방울 똑똑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것마저도 곧 멈추고 말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수도꼭지를 잠갔다가 다시 틀었다. 하지만 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엔 온수 수도꼭지를 틀어보았다. 그것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절망적인 신음을 흘리며 미셀은 싱크대에 몸을 기댔다. 펌프까지 고장이 나다니뀉·.허탈했다. 몇 초 후에야 비로소 집 안이 이상하게 조용한 것과 펌프 고장의 연관성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설마 하는 생각에 전등 스위치를 켜보았다.

역시나 전기가 끊긴 것이다.

그래서 집 안이 이렇게 조용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전기로 작동되는 시계도 멈춰서 있으니. 게다가 실링 팬도 작동이 안 되고 있기 마찬가지였다.

미셀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존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독촉장에 적혀 있던 날짜를 깜박 잊었던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사실 기억을 했다고 해도 전기세를 지불할 돈이 없었으니까.

지금 그녀가 생각해야 할 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였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어차피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전기 없이도 잘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렇게 살 수 있을 터였다.

일단 요리는 불가능했다. 오븐이며 전자레인지도 모두 전기로 작동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어차피 세상에서 제일가는 요리사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요리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냉장고도 우유를 비롯한 몇 가지 식료품을 제외하곤 텅 비어 있으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냉장고에 든 우유를 떠올린 순간 자신이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상기해 낸 그녀는 얼른 차가운 우유를 한잔 따르고는 우유팩을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창고에 비축된 가솔린 등과 양초를 이용하면 밤에도 캄캄한 곳에 홀로 남을 걱정은 없다.

문제는 물이었다. 동쪽 목초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이 있으니 일단 소들을 먹일 물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식수와 목욕물 같은 생활용수였다. 집에서 2백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긴 했지만 아예 수원이 말라버린 건지 아니면 그저 뚜껑만 덮어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사 여전히 물이 차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 물을 퍼올릴지도 문제였다. 헛간에 가보면 밧줄은 찾을 수 있겠지만 양동이 비슷한 물건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현재 미셀이 가지고 있는 현금은 17달러 정도였다. 만약 우물물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저 낡은 트럭이라도 끌고 읍내로 나가 양동이부터 구입해야 할 것 같았다.

부엌을 샅샅이 뒤진 끝에 그 중 우묵한 팬을 하나 골라든 그녀는 헛간에서 밧줄을 찾아들고 오래된 우물로 갔다. 우물 주위엔 잡초며 담쟁이 넝쿨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혹시나 뱀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우물가로 다가간 미셀은 두꺼운 나무 덮개를 살짝 옆으로 밀친 후 팬에 밧줄을 묶어 우물에 던진 다음 줄을 살살 풀어주었다.

다행히도 그다지 깊은 우물은 아닌 듯 금세 패이 물에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팬을 우물 밖으로 꺼내보니 깨끗한 물이 절반 넘게 담겨 있었다. 미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양동이만 구하면 된다.

석양이 질 무렵 미셀은 완전히 녹초가 된 채 거실 소파에 널브러졌다. 옛날 서부 개척자들은 분명 하나같이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들이었으리라. 대체 몇 번이나 양동이 가득 물을 길어 집으로 나른 건지 제대로 기억할 수조차 없었다. 어쨌든 삭신이 쑤셔 말 그대로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물을 나른 건 분명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도중에 전기가 끊긴 바람에 그 많은 세탁물을 일일이 손으로 헹궈 널어야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만도 엄청난 양의 물이 소비됐지만, 그 외에도 식수로 사용할 물이며 목욕물까지 실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다. 게다가 화장실 내릴 물도 준비해 두어야 했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전기가 없어지자 빌어먹게도 몹시 불편한 물건들이 되었다.

그나마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양초를 낭비하지 않게 된 게 다행이었다. 미셀은 밤에 일어나야 할 경우를 대비해 침대 옆 탁자 위에 양초와 성냥을 갖다놓고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곧장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미셀은 아침 식사로 땅콩버터 젤리를 바른 샌드위치를 먹고 냉장고 안을 완전히 비웠다. 상한 음식 냄새가 냉장고에 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전기가 나가버린 집 안은 이상할 정도로 침울하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결국 미셀은 방목장에서 소들이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냈다.

남아 있는 소의 일부라도 팔아야 했다. 사료로 살을 찌울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소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겠지만 당장 돈이 급했다.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끈 것 자체가 정말 미련한 짓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육우 판매 경로를 알아봐 주겠다는 존의 제안도 무시해 버렸지만, 이제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존이라면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어떻게 소를 수송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팔고 남은 나머지 소들을 봄까지 키울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미셀은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마 열흘 전이었다면 미셀은 존의 충고를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스스로를 완전히 고립시키고 있던 상태였는지라 어느 누구의 충고든 받아들이기는커녕 더욱 뒤로 물러나 버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존은 결코 그녀가 뒤로 물러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목장 일을 해결해 주었을 뿐더러,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녀를 완벽하게 유혹해 버렸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충고를 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렵긴 했지만, 어느새 존과의 사이에 조그마한 신뢰의 싹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후텁지근했다. 촛불과 가솔린 등이 켜진 집 안을 더더욱 그랬다. 우물에서 길어온 찬물로 목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끈적였다. 잠을 자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던 데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셀은 아예 현관 앞 베란다로 나갔다.

그녀는 베란다에 있는 푹신한 쿠션이 놓인 의자에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마침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개구리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오래지 않아 미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완전히 잠에 빠져든 건 아니었지만, 시간의 흐름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른한 상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동차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자갈 길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어서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전조등 불빛이 비쳤다. 그리고 곧 전조등이 꺼지고 엔진 소리도 조용해졌다. 선잠에서 깬 미셀의 눈에 키가 크고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트럭에서 내려 문을 닫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데는 달빛 따윈 전혀 필요 없었다. 온몸의 세포가 이미 그의 존재를 알아채고 전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츠를 신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현관 계단을 올라왔다.

[존]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의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음성이었지만, 그는 즉시 그녀가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화도 없이 언제 왔어요? 당신 전화를 기다렸는데]

그녀는 자존심 따윈 내팽개치고 원망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냥].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사실은 몇 번이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만약 전화를 걸었다면 그녀를 더욱 원하게 되었을 테고, 결국 지옥 같은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썩 그럴 듯한 핑계는 아니군요.]

[여긴]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 나와 있는 거요? 집 안이 어둡기에 일찍 잠자리에 든 줄 알았는데]

‘그랬다 해도 당신 덕분에 깼겠죠‘ 미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존은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미셀은 깜짝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대신 의자에 앉아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미묘한 남성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자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미셀은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길고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에 대한 욕구가 고스란히 드러난 진한 키스에 그녀의 입술은 상처를 입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에게 키스를 되돌렸다. 그녀 자신의 욕구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강렬했던 것이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미셀이 입고 있는 얇은 잠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잠옷 아래로 나긋나긋한 그녀의 맨몸이 만져지자 그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갑자기 그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밖에 나와 있었다니, 대체 제정신이오?]

[볼 사람도 없는걸요.]

미셀은 미친 듯이 격렬하게 맥박이 고동치는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거센 열기가 그들을 휘감았다. 그의 손길이 와닿은 순간부터 그녀에게는 오직 그와 사랑의 행위에 빠져들고픈 욕구만이 존재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미친 듯이 그의 가슴에 자신의 젖가슴을 밀어붙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을 통해 나직이 항의하는 듯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갑자기 그녀를 안아든 채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여기선 안 돼. 침대로 갑시다. 여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행위를 하기엔 적절한 곳이 아니오.]

그는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현관 입구에 부착된 전등 스위치를 켰다. 2층으로 통한 계단 불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전등이 나간 모양이군.]

불이 들어오지 않자 그는 현관 입구에 잠시 멈춰섰다.

그녀의 몸이 즉시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전등이 아니라 전기가 나갔어요.]

그는 허탈한 듯 웃으며 다시금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손전등은 어디 있소?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다 목이 부러지는 불상사는 없어야 하잖소.]

테이블 위에 가솔린 등이 있어요.

미셀이 그의 품안에서 버둥거리며 움직이자 그는 마지못해 천천히 그녀를 내려주었다. 잠시라도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어 일단 성냥부터 찾은 다음 가솔린 등의 유리 호롱을 벗겨내고 심지에 불을 당겼다. 곧 불이 붙자 그녀는 유리 호롱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존은 즉시 왼손에는 가솔린 등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미셀을 꼭 끌어안은 채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기 회사에 신고는 했소?]

그녀는 피식 웃어 보였다.

[회사에서도 알고 있어요.]

[언제쯤 전기가 들어올 거라고 했소?]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진실을 숨길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 털어놓으나 나중에 털어놓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는 말도 있고.

[정전이 된 게 아니라 전기세를 내지 못해서 끊긴 거예요.]

그는 계단 중간에 우뚝 멈춰서서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제기랄,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요?]

[어제 아침부터요.]

그는 악문 잇새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전기도, 물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있었다는 거요? 고집불통 같으니라구! 도대체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요? 아니, 굳이 말로 하지 않고 내게 고지서를 보여주기만 했어도 되는 일이잖소!]

마지막 말은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 등불에 비친 그의 검은 눈에서 노란 불꽃이 일었다.

[당신에게 공과금까지 대신 내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미셀 역시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서 몸을 뗐다.

[그래, 그거 유감이군!]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미셀을 질질 끌고 계단을 올라가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침대 옆 탁자에 가솔린 등을 내려놓더니 옷장 문을 열고 미셀의 여행용 가방을 꺼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미셀은 그에게서 가방을 뺏으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 짐을 싸려는 거요.]

그는 다른 가방을 꺼내며 짧게 대답했다,

[돕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고 얌전히 비켜서 있어요.]

[그만둬요.]

그녀는 옷장에 걸린 옷가지를 끄집어내는 그를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단번에 미셀의 저항을 제압하고 끄집어낸 옷가지를 침대 위로 던진 뒤 다른 옷들을 옷걸이에서 잡아채기 시작했다.

[내 집으로 가는 거요.]

강철 같은 목소리로 존이 말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잊었소? 전기세를 내는 즉시 전기가 다시 공급된다고 해도 최소한 이틀은 전기 없이 지내야 한단 말이요. 젠장, 내가 당신을 여기서 지내게 놔둘 것 같소? 맙소사, 여긴 물도 없잖소?]

미셀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항변했다.

[물은 있어요. 우물에서 길어다 먹으면 된다구요.]

그는 다시금 욕설을 내뱉으며 서랍장을 거칠게 잡아뺐다. 곧이어 그녀가 미처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속옷 더미가 침대 위에 쌓인 옷가지 위로 던져졌다.

[당신 집으로 갈 수는 없어요.]

미셀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걸 느끼며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한 이틀 정도만 견디면 전기도 들어올 테고, 난 그냥 여기서 지내고 싶어요.]

[빌어먹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오!]

그는 단번에 그녀를 윽박질렀다.

[어쨌든 당신은 지금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는 거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심해 두시오. 당신은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거요. 절대 한 이틀 정도 머무르는 게 아니란 말이오. 당신 혼자 여기서 지내는 걸 걱정하는 것도 이제 지겹소. 지금부터는 내가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할 거요. 당신은 꼭 필요한 도움도 청할 줄 모르니까. 지금껏 당신 자존심을 생각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더 이상은 아니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미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산불처럼 온 마음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살게 되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 뻔했다. 감정적으로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던 의도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 거리감을 두는 것 따윈 아예 불가능한 얘기가 될 테니 말이다. 그의 집에서 그와 한 침대를 쓰고 그가 마련해 준 음식을 먹으며 그런 식으로 완전히 그에게 의존해 지내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미셀은 무의식중에 그와 거리를 두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당신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왔어요.]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이렇게 사는 걸 당신은 그럭저럭 살아왔다고 하오?]

그는 또다시 소리를 지르며 서랍에 있는 옷가지들을 꺼내 침대 위로 내팽개쳤다.

[여태껏 부상을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일 정도로 위험한 일이나 해대면서 말이오? 게다가 돈도 없고, 안전하게 몰고 다닐 만한 차도 없고, 아마 먹을 것도 거의 떨어졌겠지. 그리고 이제는 전기마저 끊겼잖소!]

[나도 나한테 없는 것들이 뭔지 알아요!]

[그렇다면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게 뭔지 똑똑히 보여주겠소. 당신에겐 선택할 권리 따윈 없어. 이대로 나랑 가는 거요, 알겠소? 그러니 어서 옷이나 갈아입으시오.]

하지만 미셀은 여전히 방 한쪽 벽에 붙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존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본 순간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너무나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마치 복부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방을 가로질러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잠시라도 그녀를 만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당신이 나와 거리를 두게 내버려두지 않겠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소.]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에게 우리 관계가 알려지는 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오? 내가 당신이 알고 지내던 제트족이 아니라서 창피하오?]

미셀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가늘게 떨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물론 아니에요. 나도 제트족의 일원이 아닌걸요.]

도대체 어떤 여자가 그를 창피해하겠는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 위를 비비며 따뜻한 흔적을 남겼다.

[그럼 대체 문제가 뭐요?]

미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스러운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내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여름 당신은 날 기생충이라고 불렀죠.]

그 말 때문에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가! 그때의 상처가 다시금 생생히 되살아났다. 과거의 메아리를 들으며 그녀는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당신 말이 옳았어요.]

[아니오.]

그는 다정하게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미셀의 백금 같은 머리카락을 감았다.

[기생충은 오직 빼앗기만 하지 절대로 되돌려주지 않소. 그때는 당신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아니 당신의 모든 걸 가지지 못해 화가 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걸 거요. 하지만 이제 난 모든 걸 가졌고, 절대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오. 베이비, 당신을 10년이나 기다렸단 말이오. 이제 더 이상 적당히 포기하고 지내는 건 사양하겠소.]

존은 미셀의 머리를 뒤로 젖히고 뜨거운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굶주린 듯이 탐하며 그녀의 항의를 입 안으로 삼켰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발꿈치를 들고 그에게 몸을 밀어붙였다. 후회 따위는 나중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이것이 천국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면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꼭 부여잡으리라. 존은 그녀가 편하게 살고 싶어서 항복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사랑으로 머리가 핑 돌 정도라는 걸 알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

미셀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청바지와 실크 셔츠로 갈아입고 그가 침대 위에 던져놓은 난장판이 된 옷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도 여행을 많이 다닌 덕분에 그녀는 지극히 효율적으로 짐을 챙길 수 있었다. 미셀이 여행 가방에 옷을 챙겨 넣으면 존은 그것을 날라 트럭에 실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엔 화장품과 욕실 용품만 남았다.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내일 다시 들르면 되오.]

그는 가솔린 등을 들고 그녀를 아래층으로 인도했다. 미셀이 집 밖으로 나가자 존은 등을 끄고 현관 옆 장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음 현관문을 잠그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당신 집 가정부가 날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그녀는 트럭에 올라타다 말고 갑자기 물었다.

막상 집을 떠나자니 무척 가슴이 아팠다. 목장 일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일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유일한 곳을 떠나자니 가슴이 아팠다.

[아마 언제쯤 집에 도착할 건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날 나무라느라 당신을 보고 뭐라고 할 틈도 없을 거요.]

그는 문득 안도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여기로 왔거든. 아직 여행 가방도 트럭 뒤에 실려 있소.]

미셀의 옷이 그의 옷장에 함께 걸려 있고 욕실에도 그녀의 물건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장면이 떠오르자 그는 마음이 바빠졌다. 앞으로는 매일 그녀와 한 침대를 사용할 수 있으리라. 여자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미셀과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걸 갖지 않고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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