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을빛 유혹-5화 (5/12)

5

희미한 새벽 여명이 침실 안으로 스며들어올 무렵 미셀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깐 눈만 붙인 것에 불과했음에도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하지만 혼자 자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뭔가 낯선 느낌에 새벽 일찍 눈을 뜬 것이다. 배를 깔고 누워 한 팔은 베개 아래에, 다른 팔은 그녀의 맨살 위에 걸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존을 본 순간 미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쉽게 넘어갔다. 존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침대를 빠져나가는 미셀의 마음은 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존은 앞으로도 한참을 더 잘 것이다. 지난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침대에서 일어서니 다리가 후들거렸고 지난밤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듯 허벅지 사이 깊은 곳이 쓰라렸다. 네 번이었다. 그는 지난밤 네 번이나 그녀를 가졌고, 매번 그녀가 느끼는 쾌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지금도 자신이 그렇게 완전히 정신을 잃고 절정에 올라 그에게 반응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과 그녀를 강하게 통제하며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리듬 있게 지속시켰다. 이제 그에 대한 모든 소문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정력과 테크닉이 낮게 평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이 그의 가장 최근의 하룻밤 상대가 되고 말았다는 불쾌한 사실을 직면해야 했다. 더욱 괴로운 건 너무나 쉽게 유혹을 당했다는 것보다 그런 희열을 다시는 맛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다시 찾을지도 모르지만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녀에게 싫증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약탈자의 시선을 다른 여자들에게로 돌릴 것이다.

그럼에도 난 그를 계속 사랑하며 살아가겠지. 그녀는 서랍장에서 깨끗한 속옷과 목욕 가운을 조용히 꺼내들고 복도를 지나 손님용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로 갔다. 목욕하는 소리로 그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다시 보기 전에 평정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물이 근육의 통증을 어느 정도 이완시켜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증은 남아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난밤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샤워를 하고 난 뒤 미셀은 부엌으로 가서 새로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찬장에 기댄 채 뜨거운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녀의 귀에 문득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다가간 미셀은 존의 목장에서 온 두 대의 픽업 트럭이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발견했다. 헛간 앞에 멈춘 트럭에서 전날 왔던 남자들이 내렸다. 한 남자가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존의 차를 알아본 듯 동료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차를 가리켰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소리를 죽이며 웃는 남자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도 그들의 보스가 점수를 또 올렸다고 할 것이다. 24시간 내에 온 마음에 소문이 퍼지겠지.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존의 카우보이들도 보스의 뛰어난 정력을 부러워하면서 자랑스럽게 떠벌릴 것이다.

미셀은 멍하니 커피 메이커로 시선을 돌렸다. 커피가 다 걸려지자 그녀는 커다란 머그 잔에 커피를 따르고 차가운 손으로 컵을 감싸쥐었다. 손이 이렇게 차가운 건 아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일 것이다. 미셀은 다시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서 존이 아직도 자고 있는지 침실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는 깨어 있었다. 겨우 몇 초 전에 눈을 뜬 것 같아 보였지만. 한쪽 팔꿈치에 머리를 고인 채 다른 손으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쓸어넘기던 그는 문가에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미셀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조여들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강철 같은 근육질의 몸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업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고, 하룻밤 사이에 벌써 거뭇거뭇 턱수염이 돋은 얼굴이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를 악당처럼 보이게 했다.

그의 표정에서 뭘 보게 되기를 기대했는지 그녀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욕망일까? 아니면 애정? 하지만 그것이 뭐든 그녀가 원하는 표정은 거기에 없었다. 대신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미셀은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손이 떨리는지 머그 잔의 커피를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축하해요. 당신에 관한 모든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걸 말이에요. 정말 당신은 점수를 딸 자격이 충분하더군요. 당신을 거부할 생각은 아예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대로 당신의 침대 기둥에 지난밤의 전적을 기록하는 일만 남은 것 같네요.]

그녀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는 좀더 가늘어진 눈으로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 아래를 가리고 있던 시트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머그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가 마시던 곳에 입을 대고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머그 잔을 돌려주었다.

[이리 앉아봐.]

미셀은 약간 허스키하면서도 거친 그의 음성에 몸을 움찔했다. 그 작은 움직임에 머그 잔 속의 커피가 출렁거리자, 그는 즉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동작으로 그녀를 끌어당겨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 끝으로 가느다란 뼈대와 파랗게 내비치는 섬세한 정맥 줄기를 어루만졌다.

[난 그런 짓은 하지 않소. 혹시 그 이유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거요?]

미셀은 존의 시선을 피한 채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미셀이 다시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존은 심각하게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고 애썼다. 지난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대체 누가 그녀에게 그런 두려움을 갖게 만든 건지 궁금했다. 갑자기 어떤 개자식이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상처를 입히는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자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사랑을 나눌 때의 여자는 누구나 연약하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미셀은 더욱 그랬다.

지금 당장 그녀의 입을 열게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다시금 마음의 벽을 높이 쌓을 테니까.

[아주 오랜만에 한 거지?]

미셀은 또다시 어깨를 조금 으쓱해 보였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그는 마치 추궁하듯 물었다.

[전에는 섹스를 즐기지 않았던 거요?]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한 확고한 어조였다.

마침내 그녀는 경계심 어린 눈을 들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죠? 신문에 광고라도 할까요? 당신도 내가뀉그걸 즐긴 게 처음이란 걸 알잖아요.]

그녀는 매섭게 그를 비난했다.

[전에는 왜 좋아하지 않았던 거요?]

[아마 종마랑 침대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 모양이죠.]

미셀이 냉소적인 어투로 비꼬았다.

[빌어먹을,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는 화가 나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체 누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거지? 당신에게 섹스를 두렵게 만든 놈이 누구냐니까?]

[난 섹스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미셀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로저가 자신을 성적인 면으로도 왜곡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냥.그저..너무 오랜만이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지나치게...큰...]

그녀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고래를 떨궜다.

존은 빨갛게 물든 미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 그녀를 보고 알아낸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채무의 대가로 그의 정부가 되라는 제안을 했을 때 한 대 얻어맞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마이크 웹스터의 결혼 생활을 망쳤다는 소문도 아마 사실이 아니리라.

순수한 소유욕에 불과한 생각이겠지만, 그는 미셀이 다른 남자와는 전혀 쾌락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건 미셀을 그의 곁에 붙잡아 놓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이미 지난밤에 그 어떤 무기를 사용해서든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였다.

그녀는 분명 오만한 응석받이에 고집도 셌다. 그리고 남자라면 으레 자기를 떠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빌어먹을, 문제는 자신조차 그녀를 떠받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의 주위에 벽을 높이 쌓아올린 채 무슨 공주라도 되는 듯 그를 하찮은 백성처럼 취급해도 그는 그녀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너무나 원하는 나머지 그 어떤 것도 그녀에게서 그를 멀어지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사랑을 나눌 때만큼은 그녀도 더 이상 공주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저 한 남자의 여자로서 황홀한 절정에 신음하는 평범한 여자일 뿐. 그 순간만큼은 그도 그녀와 동등한,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우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난밤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왜냐하면 그는 절대로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니까.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는 자신의 목장을 플로리다에서 가장 큰 육우 목장으로 키운 의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남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존이 손을 놔주자마자 미셀은 얼른 그에게서 떨어져 창가로 갔다. 그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에 도착한 당신의 일꾼들이 이곳에 주차되어 있는 당신 차를 발견하고 아주 즐거워하더군요. 난 그들이 오늘 온다는 것도 몰랐는데 말이에요. 어제 울타리 작업을 다 마치지 않았나요?]

그는 시트를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끝마치지 못했소. 오늘 나머지 작업을 다 마칠 거요. 그리고 내일은 동쪽 목초지로 소떼를 이동시킬 생각이요.]

존은 미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솔직하게 물었다.

[일꾼들이 우리 사이를 아는 게 마음에 걸리요?]

[그럼 내 사생활이 심심풀이 안주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데 좋겠어요? 당신 이미지야 올라가겠지만, 난 당신의 수많은 하룻밤 상대 중 가장 최근의 여자가 되는 거라구요.]

[당신이 내 집에서 살게 되면 모두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존은 욕실로 걸어 들어가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대충 짐을 싸도록 해요.]

미셀은 화들짝 놀라 홱 돌아섰지만, 이미 그는 욕실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곧이어 그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거라니! 그의 뻔뻔함에는 한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침대 끝이 걸터앉아 점점 더 가파른 경사 아래로 미끄러지는 듯한 불안한 기분과 싸우며 욕실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기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존이 너무 위압적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와 관련된 일에는 한없이 약해지는 자신이 더 문제였다.

지금도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그에게 모든 걸 다 맡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지친 탓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걸 맡기고 난 후, 그가 내게 싫증이 난다면? 그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부서진 마음까지 덤으로 얹어서 말이다.

물소리가 그치자 강한 근육질의 벌거벗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마 그는 그녀의 타월로 몸을 닦을 것이다. 그는 여성적으로 꾸며져 있는 욕실 인테리어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의 향수 비누로 목욕을 하는 것도 전혀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주위 환경이 그의 남성적인 매력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발휘했을 터였다.

미셀은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다시금 몸을 떨었다.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점령되고 소유되는 것을 그렇게까지 즐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녀였다. 육체적으로 한 남자에게 소유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건만, 지난밤에 바로 그런 경험을 한 것이다.

마침내 존이 허리에 타월 한 장만 두른 채 어슬렁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색과 하얀 타월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물기로 반짝였다. 물기로 반짝이는 건 곱실거리는 체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셀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체모는 마치 생명의 나무(성경의 창세기 편에서 인용)와도 같은 형태로 팔과 가슴을 가로질러 나뭇가지처럼 펼쳐졌다가 다시 좁아져 복부를 지나 아랫도리쯤에서 넓게 퍼져 있었다. 마치 철인 3종 경기 선수와도 같은 근육질의 육체였다. 미셀은 그의 몸 구석구석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은 욕망에 온몸이 움찔거릴 지경이었다.

[빠져나갈 생각은 그만두고 빨리 짐을 챙겨요.]

존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난 가지 않을 거예요.]

미셀은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선언했다. 원했던 것만큼 큰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떨리는 음성을 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목욕 가운만 입은 채 내 집까지 실려가는 건 당신도 원치 않을 것 같은데.]

그가 조용히 경고했다.

[존]

미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답답하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난 당신과 그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요.]

[지금 그런 얘기를 하기엔 너무 때가 늦은 것 같지 않소?]

존이 지적했다.

[알아요.]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지난밤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빌어먹을, 이 여자야! 그건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났어야 했던 일이라고!]

존은 짜증을 부리며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속옷을 집어들었다.

[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오. 그럼 내 집으로 옮겨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게 될 거요. 난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일을 하오. 밤을 새는 경우도 다반사고, 일이 일찍 끝난다 해도 저녁시간에는 서류 정리도 해야 한단 말이오. 빌어먹을, 당신도 목장 경영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잖소! 기껏해야 1주일에 한 번 정도 당신을 보러 오는 게 고작일 거요. 제기랄, 난 그렇게 가끔 서둘러 하는 섹스는 질색이오.]

[그럼 내 목장은 어떻게 하죠? 내가 당신 편의를 위해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침대에 누울 태세를 하고 있는 동안, 내 목장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존은 껄껄 웃었다.

[베이비, 내가 충동을 느낄 때마다 눕는다면 당신은 족히 1년간은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할 거요. 난 당신을 보기만 해도 단단해지니까 말이오.]

미셀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존의 아랫도리 쪽으로 향했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얀 속옷 앞이 불쑥 솟아오른 것을 발견한 그녀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난 내 목장을 돌봐야 해요.]

그녀는 마치 그를 멀리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집스럽게 되풀이해 말했다.

존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바지를 집어들었다.

[내가 당신 목장까지 돌봐주겠소. 미셀, 현실을 인정해요.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해. 목장 일은 당신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일단 노력해 볼 필요는 있잖아요, 안 그래요? 아직도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나요?]

미셀의 목소리엔 절실함이 묻어났다.

[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고, 내 손으로 돈을 벌어본적도 없어요. 당신은 지금 내 아버지처럼 모든 걸 도맡아 주려고 하지만, 나중에 당신이 다른 여자를 사귀게 되면 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여전히 혼자 살아갈 방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에요!]

존은 바지 지퍼를 올리다 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정말로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 재미있었어. 하지만 이제 슬슬 당신이 지겨워지는군. 그럼 안녕! 이라고 말하며 자기를 내쫓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자립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다음에야 쫓아내도 쫓아낼 거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 걸까? 게다가 그때쯤이면 미셀의 목장도 이익을 내고 있으리라.

문제는 그녀를 원하지 않게 될 때가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향한 욕망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온통 뜨겁게 달구는 불길과도 같았다. 잠시 수그러들 때는 있지만 결코 소진되지는 않는 불길 말이다. 그는 미셀이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내내 그녀를 원했다. 지금도 과연 그녀를 원하지 않을 때가 올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원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난 당신을 영원히 돌볼 거요.]

존은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히고 선언했다.

[아, 당연히 그러시겠죠.]

미셀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경험상 누군가를 영원히 돌봐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자신의 이익이 먼저였다. 로저의 부모는 가문의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로저를 보호했다. 미셀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상 그녀를 사랑해 주긴 했지만, 자신의 딸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도움 요청을 무시했다. 그녀가 법정에 제출한 증거 서류도 백맨 가의 금력과 권력에 의해 사라지고 고소는 취하되어 버렸다. 로저의 가정부 역시 돈 잘 벌리는 직장에서 잘리고 싶지 않아 미셀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는 게, 또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운 것으로 만족했을 뿐.

존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바닥에서 셔츠를 집어들었다.

[내가 문서라도 작성하길 바라는 거요?]

미셀은 지친 표정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그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익숙지 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그의 명령에 굴복한다면, 그가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 - 돈만 주면 그녀의 몸을 살 수 있다는 - 을 확인시켜 주는 게 될 뿐이었다. 또한 그녀는 완전히 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마침내 마음을 정한 미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뇨.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그녀가 원하는 건 바로 그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을 그와 함께 보내는 것. 그녀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달을 따다주길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난 나 혼자서도 목장을 경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그의 얼굴에서 거친 표정이 사라졌다.

[그건 불가능하오.]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지만 노력은 할 수 있잖아요.]

빌어먹을, 그는 미셀의 의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칠고 고된 목장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체력을 지닌 여자가 아니었고, 재정적인 뒷받침도 없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에 매달려 있다가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돌봐줄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될 게 뻔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를 기다리며 그녀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그때쯤이면 미셀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품에서 안주하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그에게 거리를 두고 지난밤의 일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것이었고, 그는 떠나기 전에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이미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선명하게 새겨진 것처럼 그녀의 육체에도 그 감각이 새겨져야 했다. 그래, 지금 당장 교훈을 준다면 그녀도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지도 모른다.

존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한 채 손에 들고 있던 셔츠를 떨어뜨리고 바지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그는 그녀의 육체에 자신의 손길을 아로새기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체취를 남길 작정이었다. 그녀 홀로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를 떠올릴 수 있도록.

그의 의도를 눈치챈 듯 미셀의 에메랄드빛 눈이 휘둥그레지고 광대뼈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침대와 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심장이 갈비뼈를 거세게 때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미셀의 탄력 있는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단단해진 유두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그는 바지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가는 허리를 와락 끌어당겼다. 미셀은 그의 몸이 와닿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무기력하게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그는 즉시 무방비 상태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를 공략했다.

그의 입술이 하얀 목덜미를 훑어가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그의 유혹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의 애무가 얼마나 강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는 육체는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그가 가르쳐 준 절정을 찾아 꿈틀거렸다. 그의 유혹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했고, 그녀는 이미 그 맛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존이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뜨거운 육체로 덮쳤을 때도 그녀는 거부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열렬하게 그를 맞이했을 뿐이었다.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소?]

[아뇨]

[젠장, 그럼 다음 생리는 언제요?]

[걱정 말아요. 임신이 됐을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잖소. 피임약을 처방받는 게 좋겠소.]

[피임약은 안 돼요. 이미 복용해 봤지만, 하루 종일 토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마치 임신한 것처럼.]

[그럼 다른 조치를 취합시다. 당신이 하겠소, 아니면 내가 할까?]

그와 나눈 대화가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그들의 관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그녀로선 그가 떠나고 난 후에야 그와 나눈 대화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인식할 수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녀는 존에게 자신과 언제든 마음껏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권리를 그 대화 중에 인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눈이 만족감으로 빛났던 건 단순히 육체적으로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서류 정리에 정신을 집중하려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이 계속해서 떠올라 일에 몰두하기가 힘들었다. 체납된 세금 청구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소를 팔기 전에 중량을 좀더 늘릴 필요가 있었지만, 추가되는 사료 구입비를 어떻게 마련하지가 문제였다. 그녀는 사료 대금과 나중에 늘어난 중량만큼 소값으로 더 받을 수 있는 돈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계산해 보려 했다. 하지만 경험 많은 목장주와 달리 그녀는 아버지가 기록한 장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장부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목장주로서의 삶을 즐기긴 했지만, 실제 목장 경영에 있어선 전적으로 목장 감독의 충고에 따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존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것을 그녀 혼자 목장을 경영할 수 없다는 증거로 간주할 게 뻔했다.

전화벨이 울리자 고민에 빠져 있던 미셀은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

[미셀, 달링]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는 날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벌써 2년이나 지났다. 병적인 집착을 극복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의 부모가 어떻게든 치료를 받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송곳으로 귀를 찔러대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였다. 미셀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선 채 그가 먼저 포기할지, 아니면 자신의 신경이 먼저 손을 들어버릴지 마음을 졸이며 전화벨이 울리는 횟수를 헤아렸다. 계속 전화를 해대면 어떡하지? 아마 집을 나가든 아니면 미쳐버리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열여덟 번째 벨이 울리자 미셀은 할 수 없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달링, 제발 끊지 마.]

로저가 속삭였다.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연인에게 할 법한 사랑의 밀어였지만, 미셀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로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마나 자주 그 소리를 들었던가! 그는 거의 매일같이 미친듯이 분노를 폭발시켰고, 그 후에는 늘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되뇌곤 했다.

입술이 마비된 것 같아 미셀은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발 날 내버려둬요. 더 이상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당신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잖아. 아무도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진 못할 거야.

[미안해요.]

미셀은 간신히 말했다.

[당신이 왜 미안하지?]

[로저, 더 이상 당신과 얘기를 나눌 수 없어요. 이만 전화를 끊어야겠어요.]

[왜 나랑 얘기를 나눌 수 없다는 거지? 혹시 누가 옆에 있는 거야?]

손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아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미셀은 숨도 쉬지 않고 로저의 발작적인 분노가 폭발하기를 기다렸다.

[미셀! 누구랑 함께 있는 거야?]

[아뇨]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음성이었다.

[나 혼자 있어요.]

[거짓말! 당신 애인이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그래서 나와 얘기할 수 없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점점 분노에 휩싸이는 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분노를 폭발시키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 했다.

[아뇨, 나 혼자예요. 맹세해도 좋아요.]

놀랍게도 그녀의 노력이 효과를 거둔 듯 수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숨을 빠르게 몰아쉬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 당신을 믿을게. 내게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린]

누군가 있는 게 분명해! 난 늘 알고 있었어. 비록 현장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야!

[아니에요, 아무도 없어요. 난 지금 아버지 서재에 혼자 있다구요.]

미셀은 서둘러 반박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혼자 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늘 마음 깊은 곳에 누군가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맹세할게요.]

미셀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정말 나 혼자 있어요. 맹세해요!]

[당신을 사랑해]

그 말과 함께 로저는 전화를 툭 끊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욕실로 뛰어가 속이 완전히 빌 때까지 먹은 걸 게워냈다. 다시 그 고통을 겪을 수는 없었다. 당장 전화 번호를 바꾸고 비공개 신청을 하리라. 그녀는 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문제는 전화 번호를 변경하고 비공개 신청을 할 돈이 없다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히스테릭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전화 번호 변경은커녕 전화세를 연체하는 바람에 통화 정지를 당할 지경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럼 로저도 전화를 하지 못할 테니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되는 셈이다. 거의 파산지경인 것도 때로는 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저가 직접 이곳에 나타나 그녀가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필라델피아로 데려가려 한다면 어떻게 하지? 만일 그녀가 속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 존이 있는 이곳뿐이었다. 스위스로 스키 여행을 가거나 파리로 쇼핑 여행을 떠나지는 못할 테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멋진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그녀에겐 그런 것들보다는 체납된 세금을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소들을 돌보는 게 더 중요한 것이다.

로저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능력과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어떤 면은 지극히 문명화되어 있어서 그가 그렇게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로저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면인 질투심으로 인한 강박 관념에 지배당하지 않을 때는 말이다.

로저가 이곳까지 찾아온다면 그녀는 그를 다시 보게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시금 그의 손길이 닿는다면? 그녀는 그 생각만으로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와의 마지막은 최악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마침 그때 유럽에 있었다. 로저와 그녀는 부부 동반으로 디너  파티에 참석했었다. 파티에 참석한 내내 미셀은 로저의 눈에 남자들과 노닥거리는 걸로 비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저의 의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로저는 거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교리문답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의 요점은 아무개에게 유난히 미소를 자주 짓던데, 혹시 그 아무개와 이미 눈이 맞은 사이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사실을 부인하자 두 사람이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는 걸 똑똑히 목격했는데 감히 부정하려 든다면서 화를 냈다.

집에 도착할 무렵 미셀은 그의 구타가 시작되면 즉시 밖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너라 다행히도 로저는 혼자서 조용히 화를 삭히려는 듯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미셀은 거의 초죽음이 되어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침실 불이 켜지고 분노로 온통 일그러진 표정을 한 로저가 침대 옆에 서서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감자기 깨어난 탓에 미셀은 로저가 그녀를 침대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와 잠옷을 마구 찢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소리를 지르고 마구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잠옷을 완전히 찢어버리고 벨트를 잡아빼 그녀를 내려치기 시작했고, 금속 버클이 그녀의 여린 살 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그의 구타가 끝났을 무렵, 미셀의 몸은 버클에 맞아 패인 상처와 피멍 천지가 되어 있었다. 눈두덩은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고, 고통에 못 이겨 계속 비명을 지른 탓에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옆에 버티고 서서 아무 말 없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로저는 다음 순간 무릎을 꿇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

그때도 로저는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로저가 잠든 틈을 타서 미셀은 거의 기다시피 집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등과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에는 그때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언젠가 그 흉터는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날 밤 그 끔찍한 공포의 순간에 아로새겨진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낙인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그날 한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쳐 끔찍한 고통을 준 로저의 영상은 지금도 꿈속에 가끔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리라. 도망갈 곳도 없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가 그녀를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법적으로 그가 전화하는 걸 금지시킬 수도 있고, 또 법원에 접근 금지 신청을 해서 로저와 얼굴을 맞닥뜨릴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셀은 눈을 뜨고 다시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매맞는 아내의 전형적인 반응이지만, 그녀 역시 다른 매맞는 아내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이 자신을 폭행한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모욕적이고 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인 것처럼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동정을 받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특히나 존이 알게 되는 건 더더욱 싫었다.

갑자기 사방의 벽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혀왔다. 당장 집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울음을 터뜨리고 나면 멈출 수가 없을 테니까.

미셀은 낡은 트럭을 몰고 나가 목초지 주위를 돌아다니며 존의 일꾼들이 새로 세워놓은 울타리를 점검했다. 수리는 완벽하게 끝나 있었고, 일꾼들은 이미 그의 목장으로 돌아간 후였다. 내일은 다들 말을 타고 와서 소떼를 풀이 무성한 이곳 동쪽목초지로 데려올 예정이었다. 소들은 이제 많이 걷지 않고도 배를 채울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체중도 곧 늘어날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미셀은 마당에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찌나 무성한지 목초지 대신 이곳으로 소들을 몰고 와 풀을 뜯게 해도 될 것 같았다. 목장 일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미처 잔디를 깎을 시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존 덕분에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돌게 되지 않았는가!

미셀은 잔디 깎는 기계로 높이 자란 잔디를 베었다. 그녀가 지나간 뒤로 풀이 깎인 잔해가 마치 신작로처럼 드러났다. 잔디 깎기를 끝낸 후 미셀은 헛간에서 낫을 들고 나와 잡초를 쳐냈다. 고된 육체 노동은 마치 신경 안정제같이 그녀의 불안을 잠재웠다. 그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로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날 밤 미셀은 무의식중에 잠자리에 드는 걸 꺼려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악마가 자신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어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로저에게 그런 힘을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날 밤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그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리라. 미셀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랬다. 그녀는 그 일을 꼭 이루어 낼 작정이었다.

마침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침실 문 앞에 선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 아름답게 꾸며진 여성적인 침실을 본 순간 갑자기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방을 지배하고 있는 건 로저가 아니라 존이었다. 로저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존은 그녀의 침대에서 큰 대자로 잠을 잤고 그녀의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방 안은 온통 그의 존재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저 침대에서 그녀는 지난밤 그의 몸 아래 누워 쾌락으로 온몸을 비틀며 정신을 잃을 정도로 지독한 환희에 빠졌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야성적인 표정과 부드러운 그의 손길을 기억했다. 부드럽기 그지없었던 그의 손길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지난밤 그가 쾌락 이상의 것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남자를 두려워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존 덕분에 자신이 어떤 면에선 남자들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혼 후 2년 동안 미셀은 단 한 번도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나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으로만 만족했을 뿐. 그들과 함께 스키를 타고 수영을 하는 등 그룹의 일원으로 움직이는 한, 자신이 로저에 의해 왜곡된 남성관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하다고, 한 남자 때문에 다른 모든 남자를 탓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남자들의 힘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던 남자와 스치듯 접촉한일을 가지고도 곧장 벌벌 떨지 않았는가. 어떤 식으로든 남자들과 부딪히는 게 싫어서 늘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아마 존과의 경우도 오랫동안 그를 원해오지 않았다면 다른 남자들의 경우와 똑같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향한 애타는 갈증이 본능적인 망설임을 극복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존 역시 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데 전혀 아낌이 없었다. 지난밤 그들이 주고받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쌓은 신뢰는 결코 끊기지 않을 질긴 인연의 끈이 될 터였다.

그날 밤 미셀은 로저의 악몽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일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내내 존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기분에 젖은 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