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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린 건 그녀가 두 잔째 커피를 앞에 놓고 창 밖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점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을 요구하는 목장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존이 했던 말들, 그리고 그의 입술과 손이 불러일으킨 감각적인 경험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미셀의 눈은 부석부석했고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명성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씁쓰름한 사실을 인정했다. 레이디 킬러!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치명적이었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한 사람이 존이라면? 그가 당장 이쪽으로 달려오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중도에 포기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셀, 달링뀉·.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수화기를 꽉 움겨쥐었다. 마치 놓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지난밤에 그에 대한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영원히 과거의 인물로 가둬두려고 애썼지만,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늘 끔찍한 고립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하는 그녀였다.
로저뀉..
미셀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전남편을 제외하고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어투로 그녀를 달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미셀, 당신이 필요해. 제발 돌아와 줘. 다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 공주마마처럼 모실게.
안돼요.
미셀은 떨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의자에 기대며 간신히 대답했다. 차가운 공포가 밀려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감히 나더러 돌아오라는 말을 하는 거지?
제발 안 된다고 하지 마.
그는 더욱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미셀,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이 필요해. 부모님도 갑자기 돌아가셨고뀉지난주 부모님 장례식 때 난 당신이 올 줄 알았어. 하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당신이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맹세할게,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난뀉·.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
미셀은 긴장으로 뻑뻑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자르고 끼여들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다시 결혼하면 되지. 제발,달링뀉..
싫어요.
그와 다시 결혼하다는 생각만으로도 혐오감이 치솟아 제대로 예의를 갖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신 부모님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도 못 들었거든요.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되신 거죠?
비행기 사고가 있었어.
그는 고통스런 어조로 설명했다.
호수 위를 지나가던 중에 폭풍에 휘말리는 바람에 그만 비행기가 폭발했지.
정말 안됐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례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로저의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중에 신경질적으로 뒷목덜미를 주무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미셀, 당신을 사랑해. 내 삶은 당신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어. 정말 맹세할게. 예전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다시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어.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만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게 된 거야. 이젠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니까뀉..
하지만 그럴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미셀은 죄책감이 엄습하는 것과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들자 그만 눈을 감았다. 육체적인 관계야 없었지만, 지난 10년 동안 존 래퍼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라도 있었던가 말이다! 미셀은 이미 그 하트 브레이커에게 심장을 빼앗겨 로저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남자도 그녀의 마음을 차지할 수가 없었다.
로저, 안 돼요.
미셀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린 이미 끝났어요. 난 절대로 안 돌아가요. 내가 원하는 삶은 이 목장에 있으니까요. 난 여기서 열심히 일하며 살 거예요.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 거지 같은 목장에서 당신이 일을 하다니, 말도 안 돼! 당신에겐 화려하고 멋진 곳이 어울려. 난 당신이 원하는 걸 모두 줄 수가 있다구.
아뇨.
미셀은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요. 이만 끊을게요. 잘 있어요. 그리고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요.
미셀은 살며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을 전화기 옆에 서 있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자꾸만 끔찍한 기억이 떠올라 도저히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로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니뀉·.그를 막아줄 유일한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미셀과 그의 부모는 거래를 했다. 그들이 로저가 그녀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대신, 그녀는 언론에 사진과 의료 기록을 넘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면 필라델피아의 유수한 명문가인 백맨 가의 후계자가 배우자를 구타하는 비열한 남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테니까!
그들은 그 증거로 미치광이 같은 로저의 위협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지켜주었지만, 이제 아버지는 영원히 로저가 손댈 수 없는 곳으로 가신 후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안전을 위해 지옥 같은 삶을 견뎌야 했었다. 로저는 그 협박을 능히 실천에 옮길 만큼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로저의 부모님 역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증거를 은폐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던 탓이다.
결혼 초만 해도 시부모를 사랑해 마지않던 그녀였지만, 로저의 구타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를 보호하기에만 급급했던 시부모의 행동을 목격한 후로는 그들에 대한 애정 따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거라고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에게도 로저의 구타 사실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차마 진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애지중지 키운 딸이 사소한 말다툼을 과장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곧 모든 게 좋아질 거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사랑스러운 딸일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이기에 딸의 인생이 비참하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그녀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한 아버지로서 실패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약점을 잘 알기에 그녀는 두 사람 몫만큼 강해져야 했다. 아버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자신도 보호해야 했으니까.
다시 로저에게 돌아간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악몽의 기억을 떨치느라 지난 2년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그녀였다. 이제 겨우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는 데 다시 공포에 떨며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기억과 공포는 여전히 존재했다. 로저의 목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이니 말이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셀은 할 일을 찾아나섰다. 바쁘게 몸을 놀리다 보면 두려움 따윈 미처 느낄 틈도 없을 터였다. 그건 마침내 로저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여행을 강권한 탓에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끊임없이 해외를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인지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아침 내내 존은 화가 나 있었다.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그랬다. 마치 발정기에 든 사춘기 소년처럼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욕구불만 때문인지 온몸이 아팠다. 사춘기 시절은 이미 지난 지 오래건만, 빌어먹을 호르몬이 그를 괴롭히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밤새도록 미셀을 안았던 기억으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그녀의 입술, 실크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감촉에 대한 기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미셀 역시 그를 원하는 건 분명했다. 그런 사실을 간과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경험이 많은 그였다. 하지만 10년이나 가둬두었던 욕망이 한순간에 터져나와 그녀를 너무 거칠게 몰아붙인 바람에 미셀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이다.
채무를 몸으로 갚으라는 그의 요구에 미셀은 명백히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긴 어떤 여자가 그런 요구를 좋아하겠는가? 보통 섹스를 즐기는 여자들도 그럴 듯한 시작을 원하는 법이었다. 하물며 미셀은 그 누구보다도 도도한 여자가 아닌가! 하지만 전날 그가 본 미셀은 도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존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도도함을 가장하긴 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선 예전의 그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태어나면서부터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온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사교계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는 교육만 받은 그녀가 아닌가! 그런 그녀가 도와줄 일손 하나 없이 혼자서 목장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존은 거친 신음을 흘리며 말머리를 끌어당겨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네.
그는 네브에게 말하고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정말 별일이군.
네브는 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스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원인이 뭐든 저렇게 기분이 나쁜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그가 없는 게 훨씬 편할 정도였다.
존이 탄 말은 시원스럽게 평원을 달려갔다. 그 종마는 강인한 근육을 자랑하는 높이가 170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커다란 놈이었고, 고집불통이어서 주인과 꽤 오랫동안 서로의 의지를 시험했었다. 하지만 이제 말은 주인의 강철 같은 근육질의 다리와 강인하고 능숙한 손길에 의해 존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 종마는 달리기를 좋아해서 목초지를 따라 바람처럼 유연한 리듬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혀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존은 미셀이 혼자서 목장 일을 해낼 작정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미셀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노동의 흔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일해주기나 바라고 정직한 노동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더할 나위 없이 혐오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남자의 보호 본능은 미셀이 목장 일을 하느라 등골이 휘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빌어먹을뀉..왜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걸까? 아무리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거친 목장 일을 그녀가 해내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정도로 튼튼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한 번 안아본 것만으로도 그녀가 연약하고 섬세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값비싼 서러브레드 종마를 밭가는 용도로 쓰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소를 직접 돌볼 필요는 없었다. 다칠 수도 있었고, 사람들이 부상당한 그녀를 며칠이고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랭글리가 무슨 일이든 미셀의 응석을 받아주며 그녀의 버릇을 망친다는 생각에 늘 눈살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랭글리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런 자신이 혐오스러워 그는 혀를 찼고, 그 소리를 들은 말이 귀를 쫑긋 세우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어찌됐든 그는 미셀이 목장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목장 일은 남자의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미셀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녀를 위해 캐보트 목장을 돌봐주리라 작정했다. 미셀도 결국은 그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어쨌든 보호받는 것에 익숙한 그녀가 아닌가! 그리고 어제도 말했듯이 이제 그의 차례가 온 것이다.
그녀의 입술을 맛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 셈이었다. 그녀 역시 그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를 가지고 말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비록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그의 성질을 긁어대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애썼지만, 그녀가 그를 원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마 그녀의 눈에 불안한 기색이 스치는 걸 보지 못했다면 그는 화를 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불안한 기색은 그녀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잠깐 동안자신을 열받게 만들던 그녀의 오만함이 그립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오만했지만 예전 같지는 않았다. 특히 그에게 육체적인 반응을 보인 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그를 필요로 했다. 그녀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겠지만, 그는 그 점을 충분히 이용할 작정이었다.
미셀의 목장에 도착한 그는 기세 좋게 현관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인상을 쓰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헛간에 넣어두었던 낡은 트럭이 자리에 없는 걸 보니 아마 마을에 내려간 모양이었다. 미셀 캐보트가 낡은 트럭을 몰고 마을에 나타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태이니 아무리 그녀라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차라리 그녀가 목장을 비운 게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목장 상태를 둘러보는 동안 열이 잔뜩 오른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구는 그녀의 모습을 참을 필요도 없고, 또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남쪽 목초지로 가서 그녀가 말했던 소떼를 찾아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는 미셀이 얼마만큼의 소를 키우고 있는지, 또 소들의 상태는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 혼자 키운 소들의 상태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할 것 같았지만. 그는 소들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1달러라도 더 받고 팔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직접 소들을 키워 그녀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육우 사업은 초보 목장주에게는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니까.
그는 다시 말을 타고 일단 동쪽 목초지로 향했다. 그곳은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울타리 수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연 꽤 많은 부분을 수리해야 할 것 같았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목재가 필요한지 가늠해 보는 게 우선이었다. 한동안 방치해 둬서 그런지 동쪽 목초지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남쪽 목초지는 지나친 방목으로 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물론 소떼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남쪽 목초지에 도착하기까지는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전망이 좋은 둔덕에 오른 그는 말고삐를 감아쥐었다.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모자를 약간 뒤로 젖힌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들은 그리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가 많았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목초지 여기저기에 건초 더미가 널려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미셀이 소들을 골고루 먹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건초 다발 하나가 자기 몸무게보다 더 많이 나갈 텐데. 그녀가 무거운 건초 다발을 들고 씨름을 했을 것을 생각하자 그는 점점 더 화가 치솟았다.
그리고 목초지 한구석에서 예상 밖으로 그녀를 발견한 순간 그의 분노가 갑자기 확 끓어올랐다. 나무 그늘 사이에 낡은 트럭을 세워놓은 덕에 그녀의 존재를 즉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미셀은 혼자서 울타리 수리를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울타리를 세우는 작업은 장정 두 사람 몫의 힘이 필요한 힘든 일이었다. 한 사람의 힘만으론 가시가 달린 철조망을 울타리에 단단하게 고정하는 것도 힘겨울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철사줄이 퉁겨 몸에 휘감길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만일 철사가 퉁겨져 나와 몸에 휘감기면 혼자서는 풀 수 없을 테고, 얼기설기 성긴 가시 철조망은 피부를 꿰뚫는 상처를 만들 것이다. 미셀이 철조망에 감겨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장면이 떠오르자, 그는 분노와 함께 소름이 끼쳤다.
완만한 경사가 진 능선을 따라 천천히 말을 몰아 미셀이 일하는 장소로 가면서 존은 성질을 가라앉힐 시간을 벌었다. 말발굽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멀리서도 그녀의 몸이 굳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내 울타리 기둥에 철사를 고정시키기 위해 꺾쇠 못을 박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경직된 움직임은 그의 등장이 그리 반갑지 않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존은 미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유연한 움직임으로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근처 나뭇가지에 고삐를 매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철사를 다음 기둥까지 잡아당겼다. 미셀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꺾쇠 못을 기둥에 박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셀 역시 짧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장갑은 일꾼들이 쓰다가 버리고 간 낡은 것인 데다 턱도 없이 컸고 꺾쇠 못을 집어들기가 불편한 듯 그나마도 왼손장갑은 벗은 채였다. 덕분에 꺽쇠 못은 쉽게 집어들 수는 있었지만 철사에 찔려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상처 중 몇 군데는 피가 배여 나왔을 정도였다. 그는 그녀를 마구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혼자사서 울타리를 세우는 작업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정도로 멍청한 거요?
그는 철사를 단단히 잡아당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망치질을 하며 대답했다.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하는 거예요.
더 이상은 아니오. 당신이 할 필요가 없소.
그의 확고한 어투에 미셀은 정색을 했다. 망치를 잡고 있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지금 당장 빚을 갚으라는 얘긴가요?
미셀은 담담하게 되물어보며 시선을 돌려 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광대뼈 주위의 피부가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꼭 그래야 한다면.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셀의 손에서 망치를 뺏고 바닥에 놓인 꺾쇠 못 주머니를 집어든 다음 트럭 쪽으로 갔다. 그리고 열린 창문을 통해 망치와 못 주머니를 트럭 안으로 던졌다.
이 정도면 일꾼들이 와서 마무리지을 때까지 견딜 수 있을 거요. 자, 이만 갑시다.
미리 그녀의 손에서 망치를 빼앗은 것이 다행이었다. 미셀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당신 일꾼들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어요! 여긴 내 땅이고, 난 당신이 도움을 주는 대가로 바라는 걸 지불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구요!
당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누가 말했소?
존은 미셀의 팔을 붙잡은 채 반항하는 그녀를 질질 끌고 낡은 트럭까지 가서 운전석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런 다음 트럭 문을 꽝 닫고 뒤로 물러섰다.
허니, 천천히 조심해서 가요. 난 당신 뒤를 따라갈 테니까.
미셀은 천천히 차를 몰았다. 트럭의 성능을 감안하면 목이 부러져라 차를 몰 수도 없었거니와 설사 트럭의 성능이 받쳐 준다 해도 길이 너무 험했기 때문이었다.
존이 트럭 뒤를 따라오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백미러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를 보는 건 물론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소를 팔아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사실 소를 판 돈으로 목장을 운영할 자금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돈으로 그에게 진 빚을 갚는다면 더 이상 목장을 지니고 있을 수 없게 될 게 뻔했다.
미셀은 그가 오늘 찾아오는 걸 원치 않았다. 아침에 로저와 통화를 한 후로는 홀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추악한 기억을 묻어두고 자제력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한데, 존은 그런 여유를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지금처럼 그에게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기다렸다는 듯 이용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낡은 트럭을 끌고 하염없이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존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흘끗 계기반을 쳐다본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도망을 치고 싶어도 그녀의 달리기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윽고 미셀은 헛간에 트럭을 세웠다. 운전석에서 내린 그녀는 곧 말을 탄 채 헛간으로 들어서는 존을 발견했다. 그는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기 위해 막 머리를 숙이는 중이었다.
난 이 녀석을 돌봐주고 갈 테니, 당신 먼저 들어가 있어요.
그녀는 마치 집행 유예를 선고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과연 볓 분간 여유가 생겼다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집 안으로 곧장 들어가는 대신 그녀는 차도 끝 우편함으로 가서 안에 든 우편물을 꺼냈다. 한때는 잡지나 카탈로그, 신문이나 편지, 업무 서류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던 우편함이었지만 요즘은 각종 고지서와 독촉장이 전부였다. 문득 이 우편함은 한 개인이 처한 곤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징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 사람과 교류를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익숙한 봉투가 눈에 띈 순간, 그녀의 눈이 금세 흐려졌다. 전기세 독촉장이었다. 벌써 두 번째 경고였다. 빨리 돈을 마련해서 세금을 내지 않으면 전기가 끊길 것이다. 그녀는 착잡한 심정으로 봉투를 개봉해 내용을 확인했다. 열흘 내에 전기세를 납입해야 했다. 우편물이 도착할 때까지 걸린 시간을 제외하면 이제 겨우 1주일이 남은 셈이었다.
문득 목장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판에 전기가 끊어지는 것 따위를 걱정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약간 어둡지만 시원한 실내로 들어서면서 미셀은 잠시 뜨거운 햇살에서 벗어난 기분을 만끽했다. 그녀는 일단 우편물을 현관 옆 장식 테이블 서랍에 넣어두었다. 잠시라도 걱정거리를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을 마시러 부엌에 들어간 미셀은 곧 현관문이 열리고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짐짓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재를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이내부엌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커질수록 미셀의 몸이 더욱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존은 카우보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그런 걸음걸이로 걸었다. 주먹깨나 쓸것 같은 불량배나 아니면 여자를 후리는 데는 선수인 남자에게 딱 어울리는 그런 걸음걸이 말이다. 물론 존 래퍼티는 그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남자였지만.
등을 돌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셀은 그가 부엌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가 가까이 온 것을 감지한 듯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집 안 공기 역시 더 이상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손부터 봅시다.
그가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돌려세우고 왼손을 잡아 위로 올렸다.
그냥 긁힌 것뿐이에요.
미셀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걸 확인한 후에도 그의 분노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생채기가 생기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감히 혼자서 울타리를 수리하려 들다니!
그녀의 손은 마치 더 이상 날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연약한 작은 새처럼 그의 크고 딱딱한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의 짐작이 정확히 맞아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겨울 정도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는 그녀의 몸을 뒤에서 감싼 채 개수대에 대고 상처 입은 왼손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에 들려 있던 물컵을 황급히 내려놓고 고래를 떨구었다. 그의 몸과 닿아 있는 등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그에게 완전히 둘러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등뒤에 서서 마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을 씻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 편안하고 듬직한 어깨에 기대지 않도록 억지로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비누 거품이 다 씻겨나간 후에도 그는 여전히 수돗물 아래로 그녀의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손길이 주는 관능적인 느낌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는 뜨거운 손으로 마치 연인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예민한 손바닥에 부드럽게 원을 그리자 그녀는 온몸이 욱죄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맥박이 거칠게 뛰고 몸이 뜨거워졌다.
그러지 말아요.
그녀는 푹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항변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수도꼭지를 잠근 다음 그녀의 복부에 대고 손가락을 넓게 편 채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손에 묻은 물기가 셔츠를 통해 스며드는 것과 동시에 등으로 데일 것처럼 뜨거운 그의 열기가 느껴졌다. 남성적인 체취와 말 냄새가 뒤섞인 묘한 향취가 유혹적으로 풍겼다. 아니, 그녀에게는 이 남자의 모든 것이 유혹적이었다.
내게 키스해 봐.
그가 나직이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도발했다.
미셀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간신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유혹에 저항하는 건 그녀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고 대신 그녀를 욕실로 데려가 좌변기 뚜껑 위에 앉히고 상처 부위를 꼼꼼히 소독 해 주었다. 소독약이 닿은 부분이 따끔거려도 미셀은 전혀 움찔거리지 않았다. 목장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된 판에 상처 부위가 쓰라린 게 무슨 큰 일이겠는가?
그녀에게 있어서 이곳은 단순한 목장이 아니었다. 필라델피아의 펜트하우스에서 거의 죄수처럼 갇혀 살다시피 지냈던 이후로 그녀는 늘 이곳처럼 탁 트인 광활한 공간을 필요로 했다. 다시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도심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헛간에 있는 낡은 트럭으로 장거리를 왕복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존은 문득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고서는 그가 손을 치료하도록 얌전히 있을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 혼자서도 치료할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왜 혼자 힘으로 목장을 운영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걸까? 지금 그녀는 이제껏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목장 일을 직접 하겠다니, 평소의 그녀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언제쯤 돈을 돌려받기를 원하죠?
갑자기 그녀가 맥빠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오.
그녀의 눈에서 녹색 불꽃이 일었다.
당신의 창녀 노릇은 안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좋아라 당신과의 잠자리에 뛰어들 줄 알았다면 오산이에요! 아무리 당신이 종마로 명성이 높다고 해도 싫다구요! 혹시 그 명성 때문에 자만심이 지나친 것 아닌가요?
미셀의 말투에서는 혐오감이 뚝뚝 묻어났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말에 그는 갑자기 눈앞에서 빨간 불이 일어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그의 검은 눈 속에서 황금색 불꽃이 이글거렸다.
허니, 우리가 함께 침대에 들어가는 즉시 내 명성을 확인할 수 있을 거요.
당신과 한 침대에 드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미셀은 이를 악물고 항변했다.
빌어먹을, 우리는 곧 한 침대에 들게 될 거요! 물론 그 이유는 돈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일 테고!
그는 몸을 펴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일단 돈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그러고 나면 당신도 매번 그 문제를 들이대지 않을 테니까.
먼저 그런 조건을 제시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잖아요.
미셀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날카롭게 추궁했다.
부엌으로 간 그는 일단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는 물컵에 얼음을 몇 개 띄워서 손에 들고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그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셀은 문득 전율 비슷한 떨림이 온몸에 스치는 걸 감지하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를 보기만 해도 흥분하는 자신의 나약한 육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내 실수였소.
존은 퉁명스럽게 시인하며 물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지. 마치 발정기에 접어든 고양이처럼 말이오. 이제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때가 된 것 같군. 그리고 채무문제는 이렇게 합시다. 당신 목장의 일부를 내 명의로 돌리는 거요. 어떻소? 그렇게 해서 채무를 해결하고 나면 우리 관계도 공평해질 거요.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을 내리다니 그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셀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채무 문제만 해결되면 그녀가 자발적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할 것이라 생각하는 그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은 한편, 그 끔찍한 채무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당장 현찰로 갚으라고 했으면 그녀의 목장은 끝장이 났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로서도 그리 손해보는 거래는 아니지만. 그녀가 넘기는 땅은 비옥한 1급 목초지니까.
그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자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물론 조건이 있소.
그러나 느긋한 태도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허탈한 심정으로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똑 같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말해볼까요?
허니, 잘못 짚었소. 내가 말하려는 조건은 내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거요. 이제부터 힘든 일은 모두 우리 목장의 일꾼들이 맡아할 거요. 그러니 더 이상 울타리 수리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마시오. 만일 한 번만 더 그런 일을 하는 게 내 눈에 띄면, 아예 한 달 내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소.
그의 입술이 씁쓸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당신 일꾼들이 와서 일을 해준다면 일당을 빚지는게 되지 않겠어요?
빚이라고 생각할 것 없소. 그냥 이웃된 도리로 도와주는 거니까.
내가 보기엔 날 당신 맘대로 하려는 수작 같은데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어쨌든 난 그 조건으로 계약을 할 테니까. 당신은 연약한 여자요. 거친 목장 일을 감당할 만한 힘도 없고, 그렇다고 일꾼을 고용할 돈도 없소. 애초에 당신이 자초한 일이지만. 그러니 그만 고집 부리고 내 말대로 하시오. 알겠소?
미셀은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죠?
존은 새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당신 아버지가 내게 돈을 빌렸던 이유 중 하나가 작년에 당신이 친구들과 생 모리츠로 스키 여행을 다녀오는 데 쓸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는 뜻이오. 설마 당신 아버지가 간신히 물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있는 형편이라는 걸 몰랐다고는 하지 못하겠지?
미셀은 꼭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치 뺨이라도 한 대 맞은 듯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그녀의 눈에 떠오른 절망을 읽은 그는 재빨리 식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단단한 껍질 속으로 숨은 후였다.
원치도 않았던 여행 때문에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이란 말인가!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악몽 같았던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친구들과 어울려 쇼핑이나 여행을 다니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녀는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내키지 않는 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가고 싶지도 않았던 여행이었는데뀉..
미셀은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로저와 결혼을 한 이후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곤 울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모진 시련을 통해 울어봤자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참담한 심정이라 해도 눈물을 흘리리라고는 미처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래퍼티 앞에서는!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로저의 전화로 충격을 받은 데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으로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 그녀는 마지막 일격을 받고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뀉..
그는 어쩔 줄 모르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셔츠를 통해 비수처럼 그의 심장을 찔렀다. 10여 년을 알고 지냈음에도 그녀가 우는 걸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가 아는 미셀 캐보트의 모습은 미소를 짓거나, 아니면 날카로운 혀로 톡 쏘아붙이는 것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냅다 쏘아붙이는 그녀를 보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잠시 미셀은 그의 강한 힘에 의지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품안은 너무나도 안락했다. 모든 걸 잊고 이대로 그의 품에 안겨 있고 싶을 정도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황급히 눈을 깜박여 남아 있는 눈물을 떨어냈다.
난 당신도 알고 있는 줄 알았소.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미셀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철없는 응석받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창녀와 비슷한 수준으로 치부한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머리가 빈 여자 취급까지 하다니!
아뇨, 몰랐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죠. 당신에게 빚을 진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내일 당장 변호사를 찾아가 양도 계약서를 쓰고 이 지긋지긋한 채무 관계를 해소합시다. 내일 아침 9시 정각에 올 테니 준비하고 있어요. 일꾼들은 아침 일찍 보내겠소.
그는 목장 일을 해줄 일꾼들을 보내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걸 분명히 했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 힘으로 목장 일을 해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그녀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일단 남아 있는 소를 제대로 키워 내다판 후에는 파트타임으로라도 일꾼들을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요. 소를 내다팔 때까지는 당신 도움을 받겠어요. 하지만 소를 파는 대로 일꾼들의 임금은 꼭 갚겠어요. 그러니 임금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 주세요.
그녀는 턱을 치켜든 채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이제 소들을 돌보는 문제는 해결된 셈이었다. 전기세를 비롯해 지불해야 할 고지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건 그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허니, 무슨 말을 하든 그건 당신 맘이오.
그는 천천히 응수하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곧바로 미처 필할 겨를도 없이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처럼 뜨겁고 단단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미셀은 그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고자 그에게 몸을 밀착시킨 채 거의 본능적으로 키스를 되돌렸다. 결국 그녀 역시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자발적으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키스를 멈추고 그녀를 품에서 떼어냈다.
돌아가서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내일 아침에 봅시다. 준비하고 기다리시오.
마치 비밀스런 환희를 약속하는 듯한 어투였다.
알았어요.
미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