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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 유혹-2화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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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머릿속이 몽롱했다. 마치 짝이 맞지 않는 퍼즐 조각처럼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내려다보고 서 있는 그의 큰 키와 근육질의 육체가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하며 그녀를 지배하는 듯했다. 언제나처럼 미셀은 자신의 존재가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래퍼티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체취가 그녀의 감각을 마비시켰고, 미셀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그는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가 내뱉은 단어들이 점차 자리를 되찾으며 그가 한 말이 이해가 되자 미셀은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공포와 격노가 충격을 대신해 찾아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미셀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실수였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그를 모욕할 때가 아니었다. 목장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그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건만, 자존심 때문에 무심코 그에게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녀는 애써 턱을 꼿꼿하게 쳐들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위장이 꼬이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대책 없이 저지른 그녀의 도전에 래퍼티가 어떻게 반응할지 미셀은 긴장이 되었다. 래퍼티에게 대드는 것만 해도 위험한데, 더구나 그의 약점을 건드린 셈이 되었으니.

래퍼티의 단단히 굳은 얼굴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미셀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래퍼티가 강철 같은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게 뚜렷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 농담이나 하는 걸로 보이나 보지?

래퍼티가 부드럽지만 위협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늘 멍청이 같은 녀석들이 당신을 먹여 살렸지 않소? 나만은 안 되는 이유가 뭐지? 물론 다른 남자들처럼 당신 맘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진 못하겠지만, 지금은 까다롭게 굴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까다로운 것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게 뭐죠?

미셀은 더욱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몇 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항변했다. 그의 존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에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있었는지,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 여자들도 그의 뜨거운 에너지와 성적 매력 앞에 이렇게 압도당했을까?

미셀은 그에 대한 반응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겁을 집어먹고 그의 매력에 반기를 든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가 마치 종마가 암말을 대하듯 그렇게 자신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는 걸 도저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에겐 너무나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 그에겐 전혀 대수로운 게 아니라니.

내게서 도망가려 하지 마시오.

부드럽고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몸을 마치 벨벳으로 문지르는 듯 느껴졌다.

연인과 함께 있을 때도 이런 목소리를 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가 강인한 육체로 여인의 몸을 짓누르며 귓가에 사랑의 속삭임을 중얼거리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결코 점잖은 연인은 아닐 터였다. 그보다는 강렬하고 원초적인, 여자의 감각을 온통 뒤흔드는 그런 사랑을 할 것이다. 그녀는 서둘러 그 이미지를 지워버리기 위해 그를 외면했다.

미셀이 얼굴을 돌리는 모습을 본 래퍼티의 눈에 분노가 불꽃처럼 일었다. 그와 잠자리를 같이할 생각은 추후도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몸짓이었다. 세 걸음 만에 성큼성큼 책상을 돌아간 래퍼티는 미셀의 팔뚝을 거세가 움켜쥐고 확 끌어당겼다.

격노 속에서도 래퍼티는 자신이 미셀의 그 부드럽고 연약한 육체를 만진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고 싶어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내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시오.

래퍼티가 거칠게 명령했다.

미셀, 당신의 이 작은 왕국이 이미 지옥처럼 황폐하게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 하오!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던 그 잘나빠진 녀석들도 이제는 아예 당신을 찾지도 않잖소. 물론 도와준다고 하는 녀석도 없을 거요!

미셀은 그의 가슴을 떠밀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 적 없어요!

미셀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물론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도 않구요!

난 안 되는 이유가 뭐지?

미셀을 마구 흔들어대는 래퍼티의 눈에는 격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내게 당신을 돌볼 여유가 있다는 건 당신도 알잖소!

난 파는 물건이 아니에요!

미셀은 몸을 뒤로 빼내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강철 같은 힘에 비하면 그녀의 반항은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나도 당신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소.

래퍼티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잠시 대여하는 데는 흥미가 있지.

그는 미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찔러넣어 그녀의 저항을 봉쇄한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셀은 굶주림으로 타오르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발견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와닿자 그녀는 사로잡힌 동물처럼 무력하게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을 상상하면서 자신에게 와닿은 그의 입술이 부드러울지 단단할지, 콧수염의 감촉은 어떨지 그런 것들을 궁금해했었다. 이제 그녀는 따뜻하고 몽롱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단단한 입술과 스치듯 부드럽게 와닿는 콧수염의 감촉을, 그리고 마치 당연한 듯 그녀의 입술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혀의 감촉을 알았다. 어느새 그녀는 그의 어깨에 팔을 감은 채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에 손톱을 박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활처럼 휜 그녀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해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탐했다. 그녀 역시 땀으로 젖은 셔츠의 물기가 자신의 옷에 스며드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오직 그의 단단한 육체와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에야 겨우 희미한 의식 속으로 어서 그를 멈추게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될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산산이 부서진 채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손길을 느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느낌일 줄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그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풍기는 남성적인 매력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가 떠나고 나면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의 입술을 피하는 데만도 온힘을 다 쏟아야만 했지만, 그녀는 겨우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를 움직일 힘이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그녀로서는 이렇게 그와 몇 센티미터나마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건적으로 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한 채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묵이 무겁게 방 안에 내려앉았다. 미셀은 그의 집요한 시선을 받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녀는 지금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피하려 애썼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하는 걸 피하기 위해 지난 10년 동안 일부러 호전적인 태도를 가장하느라 그토록 안간힘을 썼는데 말이다.

자신이 그를 보기만 해도 녹아내릴 정도로 반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많은 여자들이 그의 관심을 받으며 환하게 피어나다가 그 관심이 다른 여자에게 옮겨지는 것과 동시에 고통과 안타까움, 그리고 절망감에 시들어 버리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예의 그 관심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늘 피하고 싶어했던 상황이었다. 미셀은 그가 자신을 여자로 보는 걸 원치 않았다. 그가 잠시 이용하고 떠나버린 여자들의 무리에 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마음의 상처까지 입는다면 더욱 견디기 힘들 터였다. 게다가 존 래퍼티에게 실연을 당한 다른 여자들처럼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재정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더 이상의 문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검은 불길 같은 그의 시선은 크기를 가늠해 보는 듯 그녀의 젖가슴에 꽂혀 있다가 이어서 쾌락의 순간에 그를 감싸안을 다리로 천천히 옮겨가며 그녀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시선에 그녀는 뼛속 갚은 곳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불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이미 그녀의 육체 안에 자리잡고 그녀를 맛보고 느끼며 그녀에게 쾌락을 주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에는 어떤 여자든 만족시킬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리고 그녀를 가질 작정이었다.

그녀는 절대로 그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온실 같은 환경에서 처음에는 아버지의 우상숭배와도 같은 애정에, 그리고 나중에는 로저 백맨의 편집증적인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다. 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셀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고, 실패하든 성공하든 모든 걸 스스로 이룩해야 하는 책임감을 지닌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다시금 누군가에게 의지해 기생충 같은 삶을 산다면 결코 자신을 존중하거나 좋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책상 앞으로 가서 자리에 앉으며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금발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당장은 그녀의 자존심과 평소의 습관만이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지금 당장은 갚은 돈이 없어요. 이미 대출 기일이 지났다는 건 알지만뀉뀉.결국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는 당신 손에 달려 있는 것 같네요.

미셀의 목소리를 차분하고 냉정했다.

해결책이라면 이미 제안을 한 걸로 아는데.

그녀의 냉정한 말투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자신 역시 책상 위에 한쪽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 바람에 근육질의 허벅지가 팔에 스치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강인해 보이는 근육덩어리를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결국 미셀은 의자에 기대며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그냥 내 말대로 하면 그만이오. 괜히 내가 당신을 만지는 걸 싫어하는 척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소.

미셀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즉시 갚으라고 한다면 소를 팔아 돈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은 피하고 싶어요. 목장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테니까요. 또 다른 방법은 목장 대지를 일부 매각하는 것이데, 그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매수할 사람이 얼마나 빨리 나서는지에 달려 있긴 하지만 적어도 6개월은 걸릴 것 같네요.

미셀은 숨을 죽이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땅을 파는 건 그녀가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물론 그의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깐만뀉.목장을 유지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이 목장은 이미 끝났다구.

아뇨, 그렇지 않아요.

미셀의 말투에서는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아직 소가 남아 있어요.

어디에?

그의 불신은 너무나 확연했다.

남쪽 목초지에 있어요. 동쪽 울타리는 수리가 필요하지만뀉.

미셀은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자 도중에 말을 멈췄다. 왜 그런 사실들이 그에게 중요한 걸까? 그의 목장하고는 북쪽으로 경계가 닿아 있으니 그의 소가 이쪽으로 넘어 들어올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봐요.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 소들을 몰고 다닐 사람이라도 있다는 거요?

역시 그랬다. 그는 그녀를 전혀 믿지 않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목동이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증거는 충분했다.

내가 할 거예요.

미셀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래퍼티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미셀은 그가 무슨 의미로 자신을 훑어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주색 매니큐어를 칠한 발톱과 흰색 수제 샌들, 그리고 빳빳하게 날을 세운 흰색 마 바지와 같은 색의 싶크 셔츠 - 비록 그와의 접촉으로 젖어 있긴 했지만 - 차림의 그녀는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 그 자체였다. 미셀은 그제서야 자신의 셔츠 앞섶이 온통젖어 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빌어먹을 남자 같으니,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라지.

멋지군.

래퍼티는 능글맞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 손을 좀 보여주시오.

미셀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움켜쥔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그는 먹이를 공격하는 독사처럼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주먹 쥔 손을 자신의 앞으로 이끌었다. 미셀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그는 손아귀 힘만을 이용해 그녀의 손을 억지로 편 뒤 손바닥을 불빛에 드러나게 만들었다. 꽤 오랫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어서 반대쪽 손을 붙잡아 주먹을 폈다. 잠시 후 그는 온통 물집이 잡히고 생채기가 난 손바닥을 손끝으로 살짝 문질렀다.

미셀은 이를 악물고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부끄럽지 않았다. 육체 노동은 사람의 피부에 필연적으로 자국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녀는 힘든 육체 노동을 통해 오히려 뭔가 치유가 되는 느낌을 받았으므로. 하지만 그 자국이 얼마나 명예롭게 얻어졌든 간에 마치 벌거벗고 그의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특히 그의 동정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물론 다른 누구의 동정도 받고 싶지 않았지만.

밤하늘을 닮은 그의 시선이 그녀의 표정을 샅샅이 훑어보자 미셀의 모든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너무 늦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이미 늦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기대감을 그녀는 그저 평소의 호전적인 태도로 오판했던 것이다.

래퍼티는 원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셀은 그를 10년이나 멀리했다. 물론 유일하게 그에게서 안전했던 기간이라고는 짧은 결혼 생활 동안뿐이었지만. 게다가 그때는 필라델피아와 중부 플로리다 사이의 거리가 그들 사이에 존재하기도 했다. 또한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차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미셀은 그가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고, 파산 상태인 데다가 홀몸이며 더욱이 그에게 10만 달러의 채무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당신 혼자서 그 일을 할 필요는 없소.

그의 목소리가 더욱 깊어지고 낮게 깔렸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거친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녀는 그제서야 그에게 억지로 손이 잡혀 있긴 하지만 고통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그녀가 더 이상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그의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방어 수단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용했던 방법 - 조소 띤 표정으로 그를 약올리는 - 뿐이었다. 미셀은 아무 의미도 없는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뇨, 난 혼자 목장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매력적인 어투로 지적했듯이 날 구해주러 달려온 친구들로 목장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친구라는 단어에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하며 무위도식하는 무리들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잖소?

다시금 그녀는 그가 싫어하는 종류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10만 달러를 갚자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네요. 당신도 내가 지루한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 거예요. 어쨌든 다른 창녀들과 마찬가지로 한 번에뀉·.백달러쯤 받는 셈치고 당신과 하루에 세 번씩 그걸 한다고 해도 족히 1년은 걸리는·..

그의 눈에 순간 분노의 불길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하루에 세 번이라뀉.

그는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를 다시금 훑어보며 언뜻 듣기에는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군. 그건 그렇고, 이자는 어떻게 할 거요? 미리 말해두겠지만 내 돈은 이자율이 꽤 높은 편이오.

미셀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잡혀 있는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이 남자는 그녀가 그를 약올리려 한 말을 이용해 반격한 것이다. 물론 하루에 세 번 정도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 단순히 그를 보기만 해도 엄청난 성적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궁지에 몰린 미셀은 모든 자제력을 끌어모아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삽으로 사료를 퍼내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이쯤에서 그의 성질이 폭발한다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을 텐데뀉·.모욕으로 그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낼 수만 있다면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성질을 참는 듯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허니, 날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 말아요.

그는 조용히 충고했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보여주게 만드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당신 혼자 이 목장을 어떻게 지킬 작정이었는지 얘기해 주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잠시 그녀의 눈빛이 속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깊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본 것이 절망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미셀의 조각 같은 광대뼈 주위의 피부가 팽팽히 당겨졌다. 그리고 다시금 조소를 머금은 오만한 표정이 나타났고, 그녀의 눈빛 역시 흐릿하게 바뀌었다. 그는 입술 끝을 치켜올린 채 비웃는 듯한 표정을 머금은 그녀를 세게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목장은 내 문제예요.

미셀은 도와주겠다는 존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도움의 대가로 그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상관할 수 있는 문제는, 이 목장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빚을 갚을지 하는 것뿐이에요.

래퍼티는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고 다시 책상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채 부츠 신은 발을 서로 교차시켰다.

10만 달러는 꽤 많은 금액이오. 그 정도의 현찰을 준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 정도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존은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부동산을 지닌 재산가였지만, 현찰은 보통 땅이나 주식에 묶여 있기 마련이었고, 이익이 생겨도 끊임없이 목장에 재투자를 해야 했다. 하찮은 일에 낭비할 현찰 따위는 아마도 거의 없을 터였다.

미셀의 턱이 악물려졌다.

당신 돈을 언제까지 갚아야 하죠?

미셀이 날카롭게 다그쳤다.

지금이에요? 아니면 나중인가요?

그의 검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나한테 대들기보다는 애교를 떠는 게 훨씬 효과가 있지 않겠소? 대체 왜 목장을 매각하지 않으려는 거지? 당신 혼자 목장을 운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목장을 팔게 되면 달리 의식주를 책임질 남자를 발견할 때까지 그 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목장을 운영할 수 있어요.

미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야 했다. 목장은 그녀가 가진 전부니까.

허니, 절대 불가능하오.

날 허니라고 부르지 말아요!

격렬하게 터져나온 분노에 찬 어조에 미셀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는 모든 여자를 허니라고 불렀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벼운 애칭에 불과한, 너무나도 많은 여자들이 들었던 소리가 바로 허니라는 단어였다. 그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하며 지금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허니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존은 노동으로 거칠어진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올린 뒤 엄지손가락으로 이랫입술을 살짝 어루만졌다.

허니, 난 언제든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당신을 부를 거요. 그러니 차라리 당신이 입을 다무는 게 어떨까? 지금 현재 나한테 지불 불가능한 채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그 채무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을 해보겠소. 어떻게 해결할지 말이오. 결정을 내릴 때까지 당신도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그녀는 머리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가 이미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상태인지라 그의 따뜻한 입술이 덮쳐오는 걸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몸 속 깊은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쾌락을 무시하고자 미셀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부드러운 키스로 그녀의 감각을 고조시키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저항을 봉쇄한 채 그는 다리를 벌리고 근육질의 허벅지 사이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미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에 놓인 손을 통해 강하게 고동치는 그이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제 그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마침내 저항을 멈추고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혀가 입안으로 밀려들어와 그녀를 온통 그의 체취로 채웠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 곧이어 열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아찔한 머릿속으로 이 기막힌 테크닉이 수백 명의 여자를 상대로 연마한 것일 거라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손길과 체취, 그리고 맛을 만끽하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를 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를 원했다. 항상 그를 원했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원하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고, 그 마음은 마치 강박 관념처럼 그녀를 지배했다. 지난 10년간 그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고자 그토록 애썼건만, 결국은 이렇게 그의 자비에 매달리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있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존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욕망으로 가득한 검은 눈으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를 뜯어보는 그의 시선에 점차 만족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축 늘어져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그에 대한 욕망으로 몽롱한 시선을 들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윽고 그녀를 천천히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 그녀가 혼자 힘으로 설수 있을 때까지 부축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천천히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거대한 탑처럼 버티고 서자 미셀은 언제나 그랬듯이 거의 자동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방금 전 자신이 보인 반응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로도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그 말을 믿어줄지도 의심스러웠다. 결국 어떠한 말로도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자신이 취할수 있는 행동은 이쯤에서 멈추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셀은 양손을 단단하게 맞잡은 채 창백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아무리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해도 당신과 한 침대에 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단지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 혹시 내가 당신의 창녀가 되기를 선택했다면 날 곧장 침대로 데려갈 작정이었나요?

존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긴 했소. 그리고 당신이 만약 그 방법을 선택한다면 난 기꺼이 당신 선택에 따를 거요.

하지만 난 그런 방법을 선택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 어쩌죠?

그의 모욕적인 제안에 미셀은 화를 참느라 거친 호흡을 골랐다. 어떻게든 참아야 했다. 지금 그의 분노를 산다면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잘됐군. 나도 마음을 바꿨거든.

그가 나른한 어조로 응수했다.

저런, 정말 관대하시군요!

미셀은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당신은 결국 나와 한 침대에 들게 될 거요. 하지만 그건 내게 진 빚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만큼 당신도 나를 원하기 때문이어야 하오. 그때가 되면 당신이 자발적으로 다리를 벌리고 날 맞이하게 될 거라고 믿소.

미셀은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가 내뱉은 말이 불러 일으킨 이미지가 마치 번개처럼 그녀의 뇌를 강타했다.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이용하고 내던져 버릴 작정인 것이다. 절대로 그를 가까이 접근시켜선 안 되었다.

미안하지만 난 사양하겠어요. 비록 그룹 섹스는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당신과의 섹스는 아무래도 그런 기분이 들 것 같으니까요.

미셀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그녀의 손등을 문질렀다.

걱정하지 마시오. 침대에는 우리 둘만 들어갈 것을 보증하리다. 자, 이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제안을 받아들이시오. 내일 목장을 살펴보러 오겠소. 내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뀉·.

아뇨.

미셀은 그에게 잡힌 손을 잡아빼며 격렬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목장은 내 거예요. 당신이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서 얼마든지 꾸려갈 수 있다구요!

허니, 당신은 이제껏 자기 손으로 수표에 서명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잖소? 걱정 말아요. 내가 모든 걸 돌봐주겠소.

그는 재미있다는 듯 그녀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미셀은 이를 악물었다. 문제는 그의 말이 맞다는 사실이었다.

난 당신이 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요!

당신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존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일 다시 오겠소.

그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미셀은 잠시 후에야 겨우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그를 쫓아나갔지만, 그는 이미 폭우를 뚫고 트럭에 올라탄 후였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했다. 하긴 그가 못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미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이제껏 그녀를 진지하게 대해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기나 했던가!

그녀는 현관문에 기대선 채 그가 차를 돌려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하필 지금이지? 오랫동안 미셀은 주의 깊게 호전적인 태도를 가장하여 그와 거리를 두어왔다. 그런데 그 보호 장벽이 무너지자마자 그는 그런 그녀의 약점을 눈치채고 약탈자처럼 먹이를 채가려 달려든 것이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섰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조용한 침묵이 엄습하며 그녀가 처해 있는 황량한 삶의 정적을 상기시켜 주었다.

미셀은 이를 갈면서 턱을 악물었다. 하지만 눈물조차 다 마른 듯했다. 아니, 지금은 눈물이나 흘리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목장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존 래퍼티에게 진 채무를 갚고 그를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존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그녀 자신과 싸우는 게 더 힘들 것이다. 솔직히 그녀는 그를 막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팔에 감싸인 채 그 힘을 한껏 만끽하고 싶었다. 그에 대한 허기를 마음껏 채우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를 만지면서 그 남자에게 몰두하고 싶기도 했다. 죄책감이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와 미셀은 잠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존을 원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결혼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미칠 것처럼 원하면서도뀉·..

아마 전남편 로저 역시 희미하게나마 그 점을 감지했기에 그들의 결혼 생활을 지옥의 악몽으로 만들었으리라.

그녀는 괴로운 추억을 지우고자 재빨리 부엌으로 가서 혼자만의 저녁을 준비했다. 그래봤자 우유와 시리얼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준비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시리얼을 반쯤 먹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스푼을 떨어뜨리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공주 같은 대접을 받고 자랐다. 부모님이 거의 마흔이 다 되어 얻은 유일한 자식이었던 탓이다. 미셀의 어머니는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결혼을 한 뒤에는 남편의 보호하에서 살림만 했던 얌전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보호해 주는 남편을 위해 편안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걸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어머니 세대에서 그런 생각은 드문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도 그런 어머니의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랭글리 캐보트 역시 아내와 딸에게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하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셀은 아버지가 헌신에 가까운 애정을 쏟는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랭글리는 미셀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았다.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딸의 행복뿐이었고,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면 아버지로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미셀 역시 그런 아버지의 이정 공세를 당연히 여기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코네티컷의 집을 팔고 걸프 해안의 플로리다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육우 목장을 운영하게 되면서부터 그녀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는 미셀의 애원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육우 목장을 운영하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자, 도회지에서 양복을 입고 사업을 하는 동안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비밀스런 소망이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목장을 원했던 아버지는 그저 곧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도 자기처럼 목장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미셀을 달랬다.

그 점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 건 물론이고 더위에도 곧 익숙해졌고 목장에서의 생활도 즐기게 되었던 것이다. 오래된 목장 저택을 완전히 개조하는 등 사랑스런 딸이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은 아버지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녀 역시 목장 생활에 완전히 만족한다고 아버지를 안심시켜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일단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꿈을 이룰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자 그런 아버지의 뜻을 가로막으려 했던 게 부끄럽기도 했거니와 그토록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리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존 래퍼티를 만났다. 10년 동안 그를 피해 다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사춘기 소녀 특유의 결벽증 비슷한 강박 관념으로 그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동시에 사랑했지만, 한 가지만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래퍼티는 그녀가 다룰 수 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그 바람둥이를 길들일 유일한 여자가 되고 싶다는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와 상대하기에 너무 연약한 반면 그는 지나치게 강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와 잠시 어울렸다가 헤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강한 여자가 아니었다. 래퍼티가 그녀를 버릇없는 응석받이로 생각하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미셀은 자기 보호를 위해 그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도 몇 년 후 미셀은 동부 지역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여자 대학으로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곧장 2주간 필라델피아의 친구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유한 명문가의 자제인 로저 백맨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키가 크고 검은머리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가졌다는 점에서 언뜻 존 래퍼티를 연상시켰다. 물론 그 외에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로저가 존을 연상케 했기 때문에 그와 결혼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의식중에 그런 점이 작용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셀은 로저와 함께 있으면서 존데 대해 잊을 수 있었고, 또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무척 재미있는 남자였다.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눈 주위에 자잘한 주름이 져 있을 정도로 항상 웃는 편이었다. 게다가 여러가지 유쾌한 이벤트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2주간의 방문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녀는 로저의 청혼을 받았다. 그리고 존 래퍼티에 대한 사랑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로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순순히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건 존을 잊고 그를 영원히 과거의 인물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존 래퍼티와는 그녀 자신의 환상을 빼면 실제로 진행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았는가!

결국 그녀는 양가 부모님의 축복 속에 로저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린 치명적인 실수였다. 결혼 생활은 완벽했다. 로저의 질투가 모든 걸 망가뜨리기 전까지는.

어쩌면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했던 게 아닐까? 자신이 그녀의 마음 중 일부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건 아닐까?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로저의 질투심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저의 질투는 점점 도를 더해갔다. 나중에는 미셀이 다른 남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화를 낼 정도로. 그러던 어느 날 밤, 파티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후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그 날 처음으로 미셀은 로저에게 뺨을 맞았다. 그녀가 뷔페 테이블에서 같은 남자와 두 번이나 얘기를 나누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점점 일그러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미셀은 마침내 질투가 그를 지배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는 걸 깨달았다. 생전 처음으로 미셀은 로저가 두려워졌다.

그의 행동은 로저 자신에게도 충격을 준 듯했다. 그는 그녀의 무릎에 매달려 용서를 빌며 울었다. 다시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그녀를 아프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손을 잘라버리겠다는 말도 했다. 미셀은 결국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다른 여자들이 으레 그렇듯 그를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미셀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끝까지 숨기려 했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그를 폭행죄로 고소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는 바람에 그녀는 어떠한 법적인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그의 부모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유일한 후손을 보호할 것임을 확실히 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미셀은 그를 떠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채 하루도 안 돼 실패로 돌아갔다. 분노로 일그러진 남편의 얼굴을 본 순간 미셀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질투심은 이미 정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2주간이 지나도록 멍이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그녀의 팔을 거머쥔 채 그녀를 위협했고, 결국 그녀는 그 후로도 2년을 더 그에게 붙잡혀 있어야 했다. 심지어 로저는 다시 자기를 떠나려 한다면 미셀의 아버지를 살해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의 협박을 무시하고 다시 도망치기에는 아버지의 목숨이 너무 소중했다. 게다가 설사 아버지를 해친다 해도 그는 백맨가의 연줄을 이용해 무사히 풀려날 게 뻔했다. 결국 그녀는 그의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매번 그의 격한 분노가 터질 때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감히 떠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마침내 그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로저는 미친 듯이 그녀에게 벨트를 휘둘렀다. 그녀는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간신히 병원으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진단서를 발부받았다. 그리고 그 진단서를 이용해 겨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 그의 부모가 유럽으로 여행을 간 상태여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지만 이미 그녀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상처를 받은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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