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유혹
-린다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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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이 그 서류를 찾아내게 된 건 아버지가 사용하던 책상을 정리하면서였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따로 놓여 있던 달랑 한 페이지짜리 서류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지만, 한 문장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등이 뻣뻣하게 굳고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미셀은 다시 집중을 해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끔찍한 내용이 이해가 되면서 그녀의 눈은 점점 휘둥그래졌다.
그 남자만 아니라면뀉.오, 하느님, 제발 그 남자만 아니라고 해주세요!
하지만 미셀은 이제 존 래퍼티에게 1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물론 이자까지 붙여서. 몇 퍼센트의 이율일까? 그 내용을 확인해야 했지만 계속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 위에 그 문제의 종이를 떨어뜨리고 낡아서 삐걱거리는 아버지의 책상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충격으로 욕지기가 올라오자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희망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거의 무릎을 꿇은 상태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채무가 그녀를 완전히 쓰러뜨려 버렸다.
왜 하필이면 존 래퍼티인가 말이다! 그냥 아무 상관도 없는 냉정한 대출 은행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결과야 변함이 없을 테지만, 적어도 이런 굴욕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존 래퍼티와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미셀은 깊숙이 숨기고 있던 여린 마음 한구석이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그런 여린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래퍼티가 조금이라도 알아챈다면, 미셀에겐 승산이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거위와 똑 같은 운명이었다. 아니, 산 채로 생포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맛이 가버린 거위라 해도, 솥에서 끓고 있는 거위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미셀은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다시 서류를 집어들고 채무 협정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존 래퍼티는 그녀의 아버지 랭글리 캐보트에게 10만 달러의 개인 대출을 해주었다. 그것도 은행 이자보다 2퍼센트나 낮은 이율로·..그리고 대출금 만기일은 넉 달 전이었다.
미셀은 또다시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재정 상태를 어떻게든 회복해 보기 위해 이미 아버지의 장부를 샅샅이 뒤져보고 조사해 보았기 때문에 래퍼티에게 진 빚을 절대로 상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팔 수 있는 재산은 모두 가차없이 처분해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았고, 이제 남은 건 이 목장 - 현재 그녀에게 피난처가 되어주고 있는 - 뿐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플로리다가 너무 싫었던 미셀이었다. 코네티컷에서 모든 것이 만족스런 생활에 젖어 있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처분하고 이곳 플로리다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육우목장을 사들인 게 바로 10년 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물론 목장이 인생을 두고 이룩해야 할 꿈이 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저 이 목장만이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재산이 되었다고나 할까? 한때는 삶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해 보였지만, 생존 자체가 문제인 상황이 되고 보니 모든 것이 놀라우리만큼 단순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대로 항복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힘만으로 이 목장을 되살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건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봐야 했다. 이대로 목장을 포기해 버리고 나면 앞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목장을 팔거나 소를 처분하지 않고서는 존 래퍼티에게 10만 달러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왜 지금까지 래퍼티가 잠자코 있었는지 오히려 궁금할 정도였다. 어쨌든 소를 팔고 나면 목장은 소용이 없었다. 생계 유지를 위해 소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시점에서 수입원이 없어진다면 당연히 목장도 팔아야 했다.
목장을 내놓는다는 생각을 하자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미셀은 겨우 목장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상태였다. 사실 희망을 가지는 것도 두려워서 아예 기대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희미한 희망의 싹은 어려움 속에서도 조금씩 자라났다.
이것마저도 실패하면 자신의 인생에서 재대로 성공한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딸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목장주로서도 쓸모가 없는 인생.
래퍼티가 대출금의 상환 기일을 연기해 준다고 해도 - 물론 기대하지도 않지만 - 다시 지불 기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돈을 갚을 자신도 없었다. 명백한 사실은 한 가지, 자신이 아무런 기대나 희망도 없이 단지 현실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뒤로 미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래퍼티에게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지 않는가!
벽시계는 아직 9시 30분이 채 안 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은 아니었다. 래퍼티의 전화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을 때 예의 그 이상 반응이 시작되었다. 래퍼티를 생각할 때마다 보이던 바로 그 반응이.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를 꽉 쥔 미셀의 손등이 하얗게 변했다. 심장박동이 빨라져 마치 달리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긴장으로 창자가 꼬였다. 젠장,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면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여섯 번째 벨이 울리고 나서야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도 미셀은 그동안 래퍼티와 얘기를 나누어야 하는 끔찍한 시련을 감당할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래퍼티 목장입니다.
래퍼티의 가정부가 대답을 할 때쯤, 미셀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흔들리는 기색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래퍼티 씨는 지금 외출 중이신데,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순간 집행 유예 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또다시 두려움이 솟구쳤다.
전 미셀 캐보트예요. 래퍼티 씨에게 캐보트 목장으로 전화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미셀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얼른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곧 돌아오실 것 같나요?
가정부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뇨, 오늘은 늦으실 것 같은데요. 많이 늦으시면 내일 아침 일찍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드리죠.
감사합니다.
미셀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래퍼티가 외출했으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래퍼티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이 지역에선 유명한 것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악명을 떨쳤다고나 할까? 해가 거듭되면서 소문은 다소 가라앉았지만, 때때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래퍼티의 왕성한 성욕은 여전한 듯 싶었다.
그의 냉혹한 검은 시선을 받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고, 사실 래퍼티는 꽤나 많은 여자들을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았지만, 미셀만은 한 번도 그 무리에 낀 적이 없었다.
10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혐오감을 폭발하듯 분출했었고, 그나마 좋은 관계였을 때에도 서로를 무시한 게 고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들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했지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지금은 최악의 경우가 당연히 예상됐다. 래퍼티는 뭐든 적당히 대출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오늘밤 안으로 채무에 대해서 취할 만한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버지의 나머지 서류를 정리하고 싶은 기분은 더더욱 아니어서 미셀은 그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욱신거리는 근육의 통증은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있으면 좀 나아질 것 같았지만, 최대한 빨리 샤워를 마쳐야 했다.전기 요금 - 집 안의 물은 우물에서 전기 펌프를 이용해 끌어와 쓰는 것이었다. - 을 절약하기 위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목욕을 즐기는 조그만 사치마저도 지금은 좀더 중요한 식료품 구입비에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한 상태인데도 미셀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래퍼티와 얼굴을 마주 대해야 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심장 박동이 다시금 빨라졌다. 미셀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래퍼티를 생각하면 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 대하면 그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래퍼티가 그렇게 키가 크지만 않았어도!
그는 190센티미터의 키에 100킬로그램 정도 나가는 날렵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쉽게 다른 사람들을 왜소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체구였다.래퍼티가 가까이 있을 때면 미셀은 어떤 본질적인 면에서 위협을 느꼈고, 그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래퍼티처럼 그녀를 화나게 하거나 경계하게 만들지 못했고, 또한 원초적인 흥분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10년 전래퍼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미셀은 래퍼티가 나무랐던 것처럼 사춘기 소녀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위엄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오만함의 화신과도 같았다.
래퍼티의 명성은 늘 그의 앞에 따라다니는 수식어였고, 미셀은 그의 뒤를 헐떡거리며 따라다니는 여성 팬클럽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결의로 단단히 무장해 있었다. 고명하신 래퍼티가 풋내 나는 사춘기 소녀한테 관심을 가질 리도 없었겠지만! 미셀은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정말 그때는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어리석고 버릇없는, 겁에 질린 아이뀉.
비록 완전히 무시하긴 했지만, 존 래퍼티는 시선만으로도 그녀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미셀 자신의 반응이 그녀를 겁먹게 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때 래퍼티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미셀이 친하게 지냈던 소년들과는 달리 등이 휠 정도로 열심히 노력해 플로리다 중부 지역에서 제일가는 육우 목장 제국을 건설한 남자였던 것이다. 처음 그녀의 아버지 옆에 탑처럼 우뚝 선채 목장과 소 사육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그를 보았을 때부터 미셀은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지고 명치에 주먹을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그때의 일을 그녀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래퍼티는 자신이 타고 온 말 옆에 서 있었다. 한 손은 안장에 걸치고 다른 한 손은 아무렇게나 허리근처에 얹은 채. 190센티미터의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과 단단한 근육질의 육체는 그의 별명처럼 거대한 종마 같았다.
래퍼티에 대한 소문은 그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남자들은 경외감이 섞인 어투로 그를 종마라고 불렀으며, 여자들도 똑 같은 별명으로 그를 칭했지만 그 음성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어려 있었다. 래퍼티와 한 번이라도 함께 외출 한 것이 눈에 띤 여자에게는 즉시 의심의 눈초리가 향했고, 두 번째 외출이 눈에 띄었다면 그때는 그와 잠자리를 같이한 게 틀림없다고 모두가 인정했을 정도였다.
당시 미셀은 그에 대한 소문이 약간은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다.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래퍼티는 단지 겉모습만으로도 여자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떠도는 그 강렬한 소문을 믿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실제 그의 모습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에너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겁고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존 래퍼티 역시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검게 타오르는 강렬한 눈빛과 당당한 육체로 주위를 제압하고 냉정할 정도로 무자비한 개성으로 사람들을 지배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본 미셀은 숨이 저절로 삼켜지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햇살을 몽땅 흡수해 버릴 것 같은 새까만 머리와 숱많은 검은 눈썹 아래로 나른한 듯 가늘게 뜨고 있는 검은 눈동자는 가히 치명적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윗입술 위로 기른 검은 콧수염 역시 야성적인 느낌을 더해주는 효과를 발휘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실외에서 지내는 사람답게 그의 피부는 검게 그을러 있었다.
다음 순간 래퍼티의 관자놀이에서 브론즈빛 광대뼈와 뺨을 지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각진 턱으로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셔츠 아래로 땀에 젖은 겨드랑이와 가슴, 그리고 등 주위가 내비쳤다. 하지만 땀으로 젖은 육체조차도 강력하게 집약되어 풍기는 동물적인 남성의 분위기를 흐리진 못했다. 아니, 더욱 더해주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래퍼티의 허리 근처에 놓은 손을 멍하니 쳐다보던 미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긴 다리와 단단한 엉덩이를 피부처럼 감싸고 있는 낡은 청바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심장도 잠시 뛰는 것을 멈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거세게 고동치며 그녀의 전신을 충격으로 떨리게 만들었다.
막 사춘기를 지난 소녀에 불과했던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던 데다 자신의 익숙지 않은 반응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 때문에 소개를 받기 위해 아버지 쪽으로 걸어가면서 최대한 오만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렇게 첫 발을 잘못 내디딘 이래로 그들은 앙숙지간이 되어버렸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래퍼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자가 있다면 바로 미셀 자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래퍼티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적어도 그녀를 상대로 그 대적할 수 없는 매력을 휘두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둘 사이의 악감정이 일종의 보호수단이 되어줄 수도 있을 듯싶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래퍼티의 매력에 무심할 수 없는 건 그녀나 이미 그의 발치에 엎드린 다른 여성군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의 강력한 남성미에 그녀가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래퍼티가 깨닫지 못한 덕분에 안전한 것뿐이었다. 미셀에게 미치는 자신의 힘을 깨닫는다면 래퍼티는 그녀가 몇 년을 두고 그에게 퍼부어 댔던 비수와도 같은 언어 공격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노골적으로 기뻐할 게 뻔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와 거리를 두었는데, 이젠 재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의 호의를 구걸하게 되었다니 인생은 정말 모순 그 자체였다.
미셀은 그동안 웃는 걸 거의 모르고 살아왔다. 고작해야 사교 모임에서 겉치레 유머를 듣고 억지 미소를 짓거나 타인의 동정을 피하기 위해 기분 좋은 척 미소를 가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어둠 속 은밀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미셀은 차가운 웃음이 자신의 입가에 번지는 걸 느꼈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고 해도 래퍼티의 호의에 의존할 바엔 차라리 목초지로 나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누워 몸 위로 흙을 덮는 게 나으리라!
다음날 아침, 미셀은 집 안에서 빈둥거리며 래퍼티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더 이상 소들을 방치해 둘 수는 없었다. 결국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맥없이 헛간으로 향한 미셀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에 대한 생각 따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보다는 매일같이 밀려드는 문제들부터 한 가지씩 해결해 나가야 했다.
목초지의 풀을 베어 건초 더미로 만드는 일 역시 그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빚을 갚느라 트랙터와 건초 묶는 기계를 팔아버린 상태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유일한 방법은 건초의 일부를 나눠주는 조건으로 장비들을 임대한 것밖에 없었다. 미셀은 픽업 트럭을 헛간 앞에 몰아다 놓고 남아 있는 건초 더미의 수를 셌다. 곧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헛간이 텅 비어버릴 정도로 남아 있는 건초 더미의 수는 적었다.
혼자 힘으로 건초 더미를 드는 건 불가능했지만, 미셀은 다행히도 이미 혼자만의 방법을 개발한 터였다. 트럭을 헛간 문 아래에 세워놓은 다음 건초 더미 위로 올라가 건초를 문 쪽으로 밀어 떨어뜨리면 문이 열리고 자동으로 트럭의 짐칸까지 건초 더미가 미끄러져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커다란 건초 더미를 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건초의 중량은 최소한 60킬로그램은 되었고, 그동안 체중이 줄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의 몸무게보다 15킬로그램 이상을 상회하는 무게였다. 건초 더미의 중량은 각각 차이가 있지만, 어떤 것들은 정말 무거워서 한 번에 3센티미터도 움직이기 어려웠다.
어쨌든 건초 더미를 다 실은 미셀은 트럭을 몰고 소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곳으로 갔다. 익숙한 트럭 엔진 소리가 들리자 소들이 머리를 들고 순한 갈색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트럭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셀은 트럭을 세우고 짐칸으로 올라가 건초 더미를 묶은 끈을 잘라내고 건초들을 흩어놓은 다음 조금씩 던져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 역시 무거운 건초 더미를 한 번에 던질 수가 없어서 고심 끝에 고안해 낸 방법 중 하나였다.
그녀는 다시 트럭을 몰고 또 다른 소떼가 있는 곳으로 가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 일은 트럭의 짐칸이 완전히 빌 때까지 되풀이 되었고, 일이 끝났을 때는 어깨 근육이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나마 사육하는 소의 숫자가 절반 이상 줄지 않았다면, 그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소가 많았다면 일손을 구할 여유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일꾼들을 떠올리자 이 목장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손이 생각나 다시 한 번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미셀 혼자 힘으론 이곳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과 이론의 괴리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도와줄 일손을 구할 형편이 되지 않는 한, 혼자서 해낼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 그녀가 처한 현실이었다.
적어도 인생은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휴식을 필요로 할 때 등을 기대게 해줄 그런 사람이 없다면 자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외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꾸려간다는 역설적인 위안도 있었다. 최소한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그녀는 어떤 포장도 없이 현실을 그대로 접수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젠 자유롭다는 것이, 매일 아침 눈뜨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복잡한 현실은 잠시 묻어두고 한동안 허드렛일을 해치웠다. 일을 마친 후에는 근육통에 시달리고 여기저기 멍이 들겠지만, 지금은 아무리 근육이 괴롭다고 저항을 하고 멍이나 상처가 생겨도 일을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친구들은 미셀 캐보트가 그 섬세한 손으로 거친 노동을 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할 것이다. 때때로 미셀은 그들의 반응을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 다른 마인드컨트롤 방법 중의 하나였다.
얼마 전만 해도 그녀는 쇼핑이나 생 모리츠(겨울 휴양지로 유명한 스위스 남동부의 소도시) 여행 같은 걸 계획했을 때 항상 동행 1순위로 꼽혔다. 미셀 캐보트가 있는 곳에는 항상 웃음이 넘쳤고 모든 것이 빛이 났다. 그녀는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들고 귀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반짝이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그런 여자였다. 최고의 골든 걸, 파티의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가 바로 미셀이었다.
하지만 그 최고의 골든 걸은 이제 소에게 풀을 먹이거나 건초를 자르고 울타리를 수리하는 일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소떼를 강가로 몰고 가서 물을 먹여야 했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낙인도 찍고, 거세도 하고, 교배도 시켜야 하는데·..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녀는 이내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가능한 일들을 해치우는 것뿐이었다. 살아남는 게 최우선 명제인 생존의 법칙을 미셀은 매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었다.
그날 밤 10시가 넘은 시간까지도 래퍼티가 전화를 하지 않자 미셀은 용기를 그러모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정부가 전화를 받았다. 도대체 집에서 잠을 자기는 하는 걸까? 단 하룻밤이라도? 미셀은 절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억눌렀다.
어제 전화했던 미셀 캐보트예요. 래퍼티 씨와 얘기를 하고 싶은데 집에 계시나요?
네. 하지만 지금은 헛간에 내려가 있어요. 전화를 그쪽으로 돌려드리죠.
헛간에도 전화가 연결되어 있다니뀉미셀은 잠시 그 풍족한 환경을 부러워하면서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데 생각이 팔린 덕분에 마구 요동을 치던 맥박과 호흡이 조금이나마 잦아드는 듯했다.
래퍼티요.
갑자기 묵직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조금은 짜증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셀은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수화기를 꽉 움켜쥐었다.
미셀 캐보트예요.
잠시 후 그녀는 가능한 한 차분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잠시 시간을 내주신다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지금 당장은 빌어먹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소. 막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 어미 말을 돌봐야 하니, 빨리 요점만 말하시오.
그렇다면·..제가 내일 아침 그쪽으로 방문을 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래퍼티는 냉소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솜사탕 아가씨, 미안하지만 여기는 목장이지 사교장이 아니라오. 어쨌든내일 아침엔 당신을 만나줄 시간이 없소. 그럼 이만 끊겠소. 더 이상 당신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으니까.
그럼 언제쯤 찾아뵈면 될까요?
그는 잠시 신경질이 섞인 욕설을 중얼거렸다.
정 그렇다면 내일 오후 마을로 가는 길에 잠시 당신 목장에 들르겠소. 아마 6시쯤 될 거요.
그 말과 함께 그는 전화를 끊었다. 미셀이 뭐라 대꾸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그저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뭐라고 불평할 처지도 아니므로.
이제 래퍼티를 만날 때까지는 스무 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 셈이다. 내일은 목장 일을 빨리 끝내고 그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 화장도 좀 하고 향수도 뿌리리라. 옷은 흰색 마 바지에 흰색 실크 셔츠로 갈아입고, 그런 모습이라면 그가 평소 생각하는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쓸모 없는 여자의 이미지에 딱 어울릴 테니까.
늦은 오후였다. 살갗을 태울 것처럼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은 수은주를 40도 가까이 올려놓았고, 소들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래퍼티는 온통 땀에 젖은 데다 먼지로 목욕을 한 것 같은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기분이 나빴다. 물론 일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들에게 낙인을 찍고 예방 접종을 하는 일보다는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가는 녀석들을 잡아들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데다 하늘을 부술 것처럼 요란한 천둥소리까지 들렸으니.
본격적으로 폭풍이 시작되기 전에 일을 끝내기 위해 그와 일꾼들은 더욱 서둘러야 했다. 낙인을 찍는 일이 제 궤도에 오르자 가죽 타는 냄새는 더욱 강해졌고, 겁을 집어먹은 소들의 울음소리와 요동치는 먼지도 더 심해졌다. 하지만 래퍼티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른 일꾼들과 똑같이 일에 매달렸다.
이곳은 그의 목장이고, 그의 모든 것이었다. 목장일이라는게 험하기 짝이 없고 결코 깨끗한 일도 아니었지만, 남들이 모두 망해갈 때도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오직 땀과 강철 같은 의지만이 그를 승자로 만들어 준 요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렸지만, 그때의 목장은 지금보다 규모도 작았고 지금 그가 건설한 것 같은 제국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목장은 어머니가 바랐던 부유한 생활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가끔은 어머니가 그렇게 쉽게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떠난 걸 지금은 후회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음울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는 그였지만 어머니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런 수고조차도 아까웠다. 그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친구라고 불렀던 부유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모르는 소용없는 무리들에게 신경 쓸 시간 따윈 전혀 없었다.
네브 루더는 마지막 송아지에 낙인을 찍고 난후 허리를 펴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에 문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폭풍을 몰고 오는 먹구름이 검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끝났군.
그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저 지독한 폭풍이 몰아닥치기 전에 빨리 정리를 마쳐야 할 텐데.
네브는 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참, 오후에 캐보트 목장 집 딸내미를 만나기로 되어 있지 않수?
네브는 래퍼티가 헛간에서 미셀과 통화할 때 같이 있었던 것이다.
래퍼티는 손목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곤 욕설을 지껄였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약속을 상기시켜 준 네브가 전혀 고맙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 족속들 중에서 미셀 캐보트어럼 거슬리는 여자는 거의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래퍼티는 마지못해 결정을 내렸다. 그 여자가 원하는 게 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대부금에 대해 계속 침묵을 지키는 대신 전화를 한 게 차라리 놀라웠으니까. 돈을 갚을 수 없다고 엄살을 부릴 게 뻔했다. 유산으로 받은 돈으로는 모자란다는 둥 핑계를 대면서.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녀를 세게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는 가죽 혁대로 그 여자의 등을 후려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 바로 미셀 캐보트 같은 여자였다. 버릇없고, 이기적이고, 기생충처럼 누군가에게 빌붙어 사는 것밖에 모르는 부잣집 딸! 미셀의 아버지는 바로 딸의 유흥비를 마련해 주느라 파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랭글리 캐보트는 무남독녀에 관한 일이라면 늘 바보처럼 굴었다. 어여쁘고 사랑스런 미셀을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는 식으로 과소비를 일삼았고, 그런데 그 사랑스런 미셀이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탓에 버릇없는 응석받이가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빌어먹을, 그 여자는 그를 짜증나게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다.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과 그녀의 아버지가 얘기를 나누는 데로 걸어와서는 허공에 한껏 코를 치켜세우고 마치 혐오스런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행동하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어쩌면 정말 그런 냄새를 맡았을 수도 있다. 그는 땀투성이였고, 육체 노동을 하고 난 뒤의 땀 냄새 같은 것은 그녀에겐 낯선 것이었을 테니까. 어쨌든 그녀는 마치 벌레를 보듯 그를 흘끗 쳐다보곤 이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린 듯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대신 골든 걸의 매력을 이용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렸던 것이다!
아, 보스, 만일 그 예쁘장한 여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기꺼이 내가 대신 만나러 갈 수도 있소만.
네브가 씩 웃으며 농담을 지껄였다.
끌리는 제안이군.
래퍼티는 인상을 쓰며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집에 가서 씻고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늦어질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캐보트 목장까지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집까지 운전을 해서 간 뒤 샤워를 하고 다시 캐보트 목장까지 운전을 해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여자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지금 상태 그대로 먼지투성이에 땀에 절은 그의 모습을 견디든 말든 그건 그녀가 걱정할 문제였다. 결국 그의 호의를 청해야 하는 건 그녀니까. 그의 기분 상태로선 당장 빚을 갚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절대로 빚을 갚을 처지가 못 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미셀이 어떤 방법으로 빚을 갚겠다고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어떤 면에선 즐거웠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비록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긴 했지만, 그동안 그녀의 행동거지를 생각하면 마땅한 벌이었다. 신주단지 같은 고귀한 몸을 그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괴롭겠는가. 뭐라 해도 그는 먹고살기 위해 육체 노동을 해야 하는 남자니까.
트럭 운전석에 올라탄 후에도 그는 문득 마음속에 떠오른 장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몸 아래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셀 캐보트가 베개에 금발머리를 펼친 채 누워 있고, 자신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 유혹적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타구니가 묵직해지고 성이 나자, 그는 다시금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구! 게다가 자신은 정말 멍청한 녀석이었다. 몇 년 동안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를 원하는 마음과 또 어떻게 해서든 버릇없고 이기적인 여자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와 똑같이 그녀를 평가하지는 않았다. 미셀이 주변 사람들을 매혹시키느라 열심이었던 탓이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지만. 아마도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매력을 발휘한 다음 그 효과를 지켜보면서 즐겼던 것 같다는 게 그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어쨌든 근처에 사는 목장주와 농부들은 거의 매주말마다 바비큐 파티나 댄스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곤 했고, 그때마다 미셀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넣고 흔들었다. 그런 그녀에게선 그를 상대로 드러냈던 그 못된 성미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항상 웃음을 터뜨리며 파티에 참석한 모든 남자와 춤을 추었다. 물론 그를 제외하고.
문제는 그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맞추어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날씬한 몸매와 밝은 미소에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반응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원하고 싶지 않은데도 단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굶주린 사람처럼 그녀를 갈구하게 되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비록 미셀이 마을의 사교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도 그녀를 그리 맘에 들어하진 않았지만, 마이크 웹스터의 일은 그로 하여금 결코 그녀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녀는 애교 넘치는 태도와 거품이 일 것 같은 청량한 웃음소리로 마이크를 완전히 맛이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이크는 도저히 미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순식간에 미셀에게 지독하게 빠져들었고, 그 결과 웹스터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회복 불능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미셀은 새로운 먹이감을 찾아 날아가 버렸고, 그 젊은 목장주는 그동안 일해왔던 삶의 터전을 이혼 위자료를 지불하기 위해 팔아야 했다.
결국 미셀은 아버지를 망친 걸로도 모자라 또 다른 남자의 인생까지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랭글리도 심각한 재정 위기에도 불구하고 미셀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퍼부었다. 점점 침몰해 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딸을 위해 실크 드레스와 보석을 사주었고 생 모리츠로 스키 여행을 보내주기도 했으니 말이다. 미셀 캐보트를 수중에 넣는 남자는 강인한 동시에 부유해야 할 것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어쨌든 그런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녀에게 특정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아무리 화가 나고 혐오감이 느껴져도 그녀를 향한 육체적인 반응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엇인가가 그로 하여금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선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런 냄새가 났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보이는 만큼 맛이 있는 지 맛보고 싶었다. 정말 보이는 것처럼 실크 같은 피부인지 만져보고 싶었다. 태양처럼 비차는 금발에 손을 묻고 키스를 갈구하는 듯한 도톰한 입술을 맛보면서 내장을 뒤흔드는 그 달콤한 피부의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한껏 맛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미셀이 돈이 많이 드는 여자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이크 웹스터나 한때 그녀와 결혼했던 녀석은 물론이고, 특히나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너무 비싼 여자였다는 게 확실히 증명됐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퍼티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 값비싼 여자를 맛보고 싶은 충동을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발정기의 암컷을 맞이한 수컷들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본능과도 같았다. 미셀이 남자들을 애태우는 그런 여자라는 건 분명했고, 그녀가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도 확실해서 그 신호를 포착한 남자라면 누구든 마치 달콤한 꿀을 찾아 날아드는 벌처럼 그녀를 향해 달리게 만들었다.
지금 현재로선 미셀의 옆에 보호자가 없는 셈이지만, 머지않아 또 다른 남자가 줄을 서리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남자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더 이상 그녀가 그 높은 콧대를 치켜세우는 걸 지켜보기만 하는 데 진력이 나버렸다.
비록 다른 남자들처럼 손가락 끝으로 그를 부려먹을 수는 없겠지만, 미셀 역시 자신의 값비싼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희생이야 기꺼이 치를 각오가 되어 있을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자 래퍼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주시하면서 앞으로 미셀이 모든 걸 자신에게 의존하게 되는 데서 느낄 만족감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원초적인 만족감이었다. 그는 육체적인 굶주림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겠지만, 절대 이성과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로 그녀를 가까이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떤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했던 적은 없었고 누군가의 돈줄이 되어준 적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는 미셀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대가는 기꺼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셀을 원하는 것만큼 누군가를 원했던 적은 없었다. 그 정도 이유면 그 정도 대가를 치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본격적인 폭풍이 시작되자 아무리 와이퍼를 움직여도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거센 바람이 트럭을 스치며 휘몰아치는 바람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운전대를 붙잡고 도로를 달려야 했다. 시야가 너무 불투명해서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익숙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캐보트 목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칠 뻔했다.
캐보트의 집으로 가는 동안 그의 얼굴은 격해진 성질처럼 어둡게 굳어져 갔고 혐오감은 더욱 심해졌다. 언뜻 지나가면서 봐도 목장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앞마당은 잡초가 잔뜩 우거져 있었고, 헛간과 마구간 역시 오래도록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최상급 브라만종 육우가 풀을 뜯던 목초지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사교계 여왕의 작은 왕국은 그녀 주위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트럭을 최대한 집 가까이 갖다댔지만 비가 너무 거세게 내려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잠깐 동안에도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모자를 벗은 다음 다리에 대고 물기를 털어냈지만 도저히 다시 머리에 쓸 수는 없었다.
미처 노크를 하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미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문가에 서 있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를 집 안으로 들여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곧 문을 활짝 열고 그를 안으로 맞이했다. 10만 달러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친절하게 굴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지 래퍼티는 잠시 상상해 보았다.
래퍼티는 그녀를 스치듯 안으로 들어가던 도중 미셀이 그의 몸이 닿지 않게 얼른 비켜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금만 기다리시지, 그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조만간 그는 그녀와 몸을 스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할 작정이었다. 물론 미셀이 그 행위를 좋아하게 만들 자신도 있었다. 지금은 한껏 콧대를 세우고 있지만 벌거벗은 채 그의 몸 아래에 깔려 절정에 몸부림치는 상황이 되면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사실 그는 단순히 미셀의 육체만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미셀도 강박 관념에 시달릴 정도로 그를 지독하게 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건 미셀이 그동안 이용했던 남자들을 대신한 복수도 될 것이다.
그는 그녀가 어서 뭔가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을 꺼내기를 바랐다. 그럼 화가 나서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무슨 써서라도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그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육체를 직접 두 손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의 손길에 반응을 일으키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미셀은 평소처럼 날카롭게 그를 몰아세우는 대신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서재로 갈까요?
그녀는 은은한 향수 냄새로 그를 희롱하며 앞장서서 서재로 향했다. 흰색 마 바지와 같은 색의 실크 셔츠에 감싸인 미셀의 육감적인 육체는 접근금지라는 푯말 그 자체였고, 햇살 같은 황금빛 머리카락은 말끔히 뒤로 묶인 해 핀으로 고정되어 있어 위엄을 더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지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일 그녀의 몸에 손을 대서 저 완벽한 흰색 실크 셔츠에 얼룩이 진다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온몸이 먼지와 땀투성이에 가축냄새가 잔뜩 배여 있었고, 게다가 비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다. 미셀이 지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쪽에 앉으시죠.
미셀은 서재의 가죽 의자 중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제가 전화를 드린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래퍼티의 표정이 더욱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생각하오.
지난 밤 아버지의 책상을 정리하다가 대출 서류를 발견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군요. 어쨌든 제가 빚을 갚지 않으려고 한다는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뀉·.
나야말로 괜한 시간 낭비 말라고 충고하고 싶소.
래퍼티가 갑자기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끼여들었다.
미셀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래퍼티는 그녀가 권한 의자에 앉는 대신 마치 거대한 기둥처럼 그녀 바로 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 그의 검은 눈을 마주하자 절로 몸이 떨려왔다.
뭐라구요?
당신 연기력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알 것 같다는 말이오. 당신이 지금 당장 돈을 갚는 대신 내게 뭘 제공할지는 나도 대출 짐작하고 있었소. 물론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오. 오랫동안 당신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터이니뀉다만 겨우 몇 번 몸을 섞는 것으로 모든 채무가 변제될 거라고는 생각지 마시오. 난 내 돈의 가치만큼은 받아내야 한다고 믿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