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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거울을 본 애비는 예상대로 형편없이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발견
하고, 데이비드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하루 종
일 가게에 나가지 않기로 했으므로 저녁 7시에 교회에서 있을 결혼 예행 연습 때에나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거울 속 그녀의 모습에선 생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
다.
거칠어진 피부에는 얇게 저민 신선한 레몬 조각으로 청량감을 주었다. 예상보다 효과가 좋아
새벽에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피부가 훨씬 생생해졌다.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나니 그제
서야 좀 사람다운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황폐함은 어느 정도 회복된 셈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조금도 치유되지 못했다.
제시에 관한 생각을 밀쳐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머리를 빗다 말고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어젯밤의 제시는 얼마나 달라 보
이던가.
그를 잊어야 해, 애비게일 매켄지!
그녀는 자꾸만 떠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데이비드와 가게
, 사진 촬영, 오늘 밤에 있을 예행 연습, 내일의 결혼식, 그리고 피로연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혼 여행이 남아 있다. 순간 그녀의 생각은 다시 제시에게로 치달았지만, 그녀
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물리쳤다.
피로연에 쓰일 물건들을 준비하려면,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레이스로 된 식탁보
를 깔고, 접시와 포크, 컵들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얼려 둔 케이크와 빵을 잘라서 손님에게
낼 준비도 해야 했고,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도 다려야 했다. 엄청나게 쌓인 눈 걱정도 해야
했다.
그녀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산에 눈이
많이 쌓이는 날이면 기차가 연착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했다. 지난밤처럼 심한 눈보라가 몰아
친 다음날이면, 아직 제설 장비가 변변치 않은 선로에는 역무원들이 내려서 일일이 눈을 치
워야 기차의 운행이 가능했다. 기차가 늦어지거나 아예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긴 사진 따위
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나 그녀는 기적 소리가 들리기를 고대하면서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
았다. 웬 눈이 이렇게 심하게 내렸담!
머리와 콧수염에 눈을 달고 들어오던 제시.
그를 잊어버리라니까! 데이비드를 생각해 봐. 자, 애비게일, 호텔에 가져 갈 옷이나 준비하
라구.
9시 50분에 기차의 도착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데이먼 스미스가 도착했
다는 것을 의미했다. 곧 그는 호텔에 도착해서 사진 장비를 준비하겠지.
제시도 저 기차를 타고 마을을 떠날까?
오, 그래요. 제시, 어서 떠나요!
혹시 데이비드가 마을에서 제시와 마주치지는 않았을까? 새벽 3시에 호텔로 돌아가는 제시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을까? 다 부질없는 생각이야. 넌 진주 화관과 웨딩드레스를 챙겨서 사
진 찍으러 갈 준비나 하라구. 거울로 보니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군. 제시 더프레인만
잊고 나면 모든 게 잘 될 거야.
사진사와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애비게일 매켄지는 우산꽂이 앞에 서서 현
관문의 아름다운 원형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내다보았다. 바람 한 점 없이 청명한 날씨였고
, 세상은 그녀의 웨딩드레스처럼 순백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산꽂이 위에는 웨딩드레스가
깔끔하게 올려져 있고, 맨 위에는 데이비드가 선물한 흰색 하이힐이 놓여 있었다.
야무진 눈빛의 거울 속 여인이 바보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애비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
녀는 거울을 응시하며 신혼 여행을 위해서 새로 장만한 초록색 코트에 팔을 끼웠다. 후드와
케이프가 달린 그 코트도 제시의 돈으로 구입한 것이라는 생각을 그녀는 애써 떨쳐 버렸다.
머프에 손을 넣었다. 머프도 제시가사 준 셈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애비게일 매켄지, 어서 웨딩드레스를 들고 마을로 가서 사진을 찍고, 데이비드 멜처의 아내
가 될 준비나 해라. 더 이상 변덕스런 소녀처럼 굴지 말고.
얼마나 얼굴의 주름살을 걱정하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
다. 그녀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어중간한 나이였다. 다행히 데이비드는 중년에 가까운 그녀
의 나이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이제는 자신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다. 또다시 인생이 그
녀를 비켜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필요없었다. 이제부터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데이비드
가 있을 것이다.
애비게일이 호텔에 도착해서 발에 붙은 눈을 털어 내며 로비로 들어서자, 프런트 데스크에
서 있던 에드윈 영이 반갑게 그녀를 맞아 주었다.
"이런, 무거우실 텐데 도와 드릴게요."
그는 로비를 가로질러 건너오며 말했다.
"웨딩드레스군요."
"맞아요."
"결혼식을 바로 앞두고 날씨가 이렇게 고약해지다니, 참"
"눈이 어때서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 하얗게 눈으로 덮인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전 너무나
기뻤는걸요. 저와 데이비드의 결혼식을 위해서 세상이 온통 옷을 갈아입었나 보다고 생각했
거든요."
데이비드 멜처가 마을에 온 이후 애비게일 양은 정말로 많이 변했어. 에드윈은 속으로 생각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누구든 마
음이 편해졌다. 에드윈은 내친김에 애비의 턱에 가볍게 손을 댔다.
"그렇게 계속해서 미소를 지어요, 애비게일 양. 그러면 사진이 아주 그림처럼 예쁘게 나을
겁니다."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언제나 마을 사람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
껴지던 그녀였다. 에드윈은 그녀 특유의 거만함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데이먼 스미스 씨는 예정대로 도착하셨겠죠?"
"네, 물론이죠, 애비게일 양. 콜로라도 주 전체 주민의 사진이라도 찍을 것처럼 엄청난 장비
를 들고 오더군요."
"눈 때문에 기차가 못 오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기적 소리를 듣고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몰라요."
"무사히 도착했으니 염려 놓으세요. 그의 방까지 모셔다 드리죠. 짐도 저를 주세요."
"정말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방 번호만 알려주시면 혼자서 찾아 올라갈게요."
"8호실입니다. 정말 도와 드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녀는 벌써 계단을 반쯤이나 올라가고 있었다.
건물을 가로지르는 길고 좁은 2층 복도 양쪽에는 각각 네 개의 방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8호실은 길다란 창문이 있는 복도의 왼쪽 끝방이었다. 눈에 반사되어 더욱더 눈부시게 비치
는 햇살이 빛바랜 카페트의 장미 무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옷더미를 간신히 한 팔에 걸쳐
놓고, 그녀는 8이라는 숫자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문을 두드렸다. 평생 한 번도 호텔 방
에 들어가 보지 않은 그녀로서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방문은 열어 두도록
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방안에서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데이먼 스미스는 어떻게 생겼을까. 데이비드는
그를 만난 적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놀랍게도 제시 더프레인이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빛을 만난 사람처럼 그녀는 눈을 찡그렸다. 눈을 몇 번이고 깜박여
보았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제시였고,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
었다.
"내가 방을 잘못 찾은 것 같군요."
애비는 못박힌 듯 서서 8이라는 숫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니, 제대로 찾아왔소."
"하지만, 여긴 데이먼 스미스 씨의 방이어야 하잖아요."
"맞소."
"그렇다면 그는 어디 있죠?"
"내 대신 바로 옆방에 있소."
그는 7호실 문을 가리켰다.
"나와 방을 바꾸자고 그를 설득한 거요."
"그를 설득해요?"
"그렇소. 동료 사진사들끼리의 호의라고나 할까."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그에게 무슨 짓을 했죠?"
그녀는 단호하게 옆방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내심 제시가 자신을 붙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
다. 하지만 그는 문틀에 기대서서 여유 있게 팔짱을 끼며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돈으로 그를 매수했소. 그는 당신 사진을 찍지 않을 거요. 대신 내가 찍어 주겠소."
벌써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애비는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언제나 제멋대로군요!"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흘렸다.
"빛을 갚는 것뿐이오. 공짜로 먹은 저녁 식사 대신 당신의 사진을 찍어 주기로 했잖소. 그게
바로 오늘이오."
"싫어요!"
애비게일은 "호실의 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그녀의 등뒤에서 제시가 말했다.
"그에게는 우리가 오랜 친구 사이고, 당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고 말해 두었소. 그
런데 우연의 일치로 내가 이렇게 마을에 머물고 있으니 사진으로라도 은혜를 갚게 해달라고
말이오."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들어 올리는 찰나, 문이 열리더니 졸린 눈으로 성급하게 조끼의
단추를 채우며 금발의 사내가 나타났다. 억지로 하품을 참고 있는 품으로 보아 자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기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인가, 제시? 이분이 매켄지 양이시겠지?"
"그래요, 제가 매켄지예요."
애비게일이 직접 대답했다.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당신이 데이먼 스미스 씨인가요?"
"네. 아, 이거 죄송합니다. 먼저 제 소개를 드렸어야……."
"제 사진을 찍어 주시기로 약속한 분이죠?"
"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침 제시가 그 일을 대신하고 싶다고 하고, 또 두 분이 그렇게 친
한 친구 사이라는데 제가 양보해드리는 게 당연하죠. 여기까지 온 저의 수고에 대해서는 그
가 충분히 보상을 해주었기 때문에 전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매켄
지 양."
"전 사과를 받으려고 당신의 방문을 두드린 게 아닙니다, 스미스 씨. 전 계약대로 사진을 찍
으려고 당신을 깨운 거라구요!"
스미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제시, 대체 무슨 일이야?"
"그냥 사랑 싸움이네. 자넨 그냥 인사나 하고 들어가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녀는 나
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그자와 결혼을 하려는 거라구."
제시는 문가에 기대고 서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스미스가 알아들을 수 없게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제시와 스미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애비는 귀머거리에게 얘기하듯 고함을 질렀다.
"거짓말이에요! 난 내 사진을 찍을 사람으로 당신을 고용했어요. 저 사람이 아니라구요.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이보세요, 난 카메라도 준비해 두지 않았다구요. 그리고 당신들 사이가 어떻든 간에 난 끼
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난 빠지겠어요. 제시는 당신이 제시한 금액의 두 배를 벌써 내게 주
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귀찮게 장비를 다시 준비하느라 법석을 떨겠습니까? 사진을 찍고
싶으시면 제시에게 하라고 하십시오. 어쨌든 그는 벌써 카메라 준비를 끝냈으니 까요."
스미스는 어쩌다 이런 일에 말려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녀의 눈앞에서 소
리나게 문을 닫았다.
애비는 제시를 향해 돌아서며 고함을 쳤다.
"어떻게 감히 이런……."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제시는 의뭉한 미소를 지으며 복도를 살핀 뒤 열려진 8호실 안
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쉿! 고집쟁이 여편네처럼 행동하려거든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라구. 안 그러면 온 마을 사
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올테니."
그러나 애비게일은 팔을 뿌리치며 완강하게 버텼다.
그는 완력을 쓰는 대신 정중하게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방으로 어서 들어와요."
"굼벵이에게 날아 보라고 하시지 그래요!"
"내가 졌소!"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사진을 찍는 것뿐이오. 그리고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소
."
"사진을 찍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그럴까?"
"안 될 것 없죠."
"새벽 3시에 낯선 남자가 당신 집에서 몰래 빠져 나갔다는 사실을 멜처에게 숨기고 싶지 않
은 모양이로군. 게다가 아래층에 있는 호텔 주인은 당신이 지금 데이먼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줄 알고 있소. 사진도 없이, 여기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서 데이비드에게 뭐라고 해명할
생각이오?"
애비게일은 이미 자신이 거미줄에 걸려든 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려진 문틈으로 삼각
대에 올려진 카메라와 다른 장비들이 들여다보였지만, 그것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제시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런 건 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생각했어야죠. 이젠 당신이 마을에 숨어 들었다는 걸
모두 알게 될 거예요. 아래층에 있은 에드윈도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알잖아요. 어떻게든 데
이비드는 당신이 마을에 왔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구요."
"난 일이 있어서 이 마을에 온 거요. 에드윈도 내가 관여하고 있은 일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테니 문제될 건 없소. 게다가 어젯밤에 당신과 내가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소.
오늘도 스미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지. 그리고 그 친구는 내가 잘 해결했으니 염려할
필요 없어요."
제시는 그녀를 완전히 실망시켰다. 어젯밤의 그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 하룻밤 새에 이렇게
음흉한 모습으로 바뀔 수가 있는 걸까.
"지긋지긋해요! 당신과 당신의 기차와 당신의 돈, 전부 다요! 당신은 뭐든 돈으로 살 수 있
다고 생각하는군요. 당신은 돈으로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이용할 사람이에요."
"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내 돈을 쓰는 것뿐이오."
그는 다시 열려진 문을 가리켰다.
그녀는 독 안에 든 쥐였고, 피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쭈뼛쭈뼛 방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 놓아 주세요."
방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겠나,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딱딱하게 말
했다.
"원한다면 기꺼이."
그는 선선히 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열어 놓은 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행히도 완전히
닫혀 지지는 않았지만, 빼꼼히 열린 틈으로 복도의 벽이 약간 보일 뿐이었다. 제시는 그녀가
들고 있는 옷가지를 건네받으려고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
신의 옷을 움켜 쥐고 놓지 않았다.
아이보리색 실크를 꼭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그가 엄하게 꾸짖었다.
"사진도 찍기 전에 옷을 다 구겨 버리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데이비드가 뭐라겠소?"
그는 옷을 받아서 침대 위에 걸쳐놓았다.
"이젠 코트 벗는 걸 도와 주리다."
그는 애비가 단추를 끄르는 동안 참을성 있게 옆에 서서 기다렸다가 그녀의 코트를 벗겼다.
"아주 좋은 코트로군. 새로 산 거요?"
그의 표정엔 보나마나 의기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을 것이다. 에비는 시선을 들지 못했다
. 초록색 외투는 분명 그녀의 혼수품 중 하나였고, 누구의 돈으로 샀는지는 뻔한 사실이었다
제시는 그녀의 코트 역시 침대에 얌전하게 걸쳐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두 사
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애비는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건가?
"이젠 당신의 사진을 보여 주겠다고 할 차례군요?"
그녀가 비꼬듯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좋은 생각이오."
그는 신이 나서 손바닥을 한 번 마주치기까지 했다.
"바로 저기에 있어요."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보여 주고 싶다는 듯 열심히 커다란 검정색 케이스의 끈
을 풀렸다. 그 안에는 그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하던 사진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난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였어요."
"알아요. 어쨌든 이리 와서 한 번 봐요. 오랫동안 난 당신에게 이것들을 보여 주고 싶었소.
이걸 다 보고 나면 내 사진의 모델이 되는 기분도 조금 나아질 거요."
"인물 사진은 찍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렇소. 당신이니까 찍어 주겠다는 거요."
제시는 첫 번째 가방을 열고, 벨벳으로 안을 댄 여러 겹의 주머니 속에서 필름과 사진들을
꺼냈다.
"고집부리 지 말고 어서 와요, 애비. 기찻길을 만드는 과정이 어땠는지 보여 주겠소."
애비는 그가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정말로 궁금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전
에도 여러 번 이런 식으로 그의 수법에 말려든 적이 있었다.
"어서 와요."
그는 바닥에 사진들을 둥글게 펼쳐놓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
어 있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제시가 내민 손을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다
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길은 곧바로 사진으로 쏠렸다. 첫 번째 사진은 기차가 아니라
사각 돛대를 단 범선이었다.
"이 배는 기차랑 아무런 상관도 없잖아요."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그 사진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소매로 사진에 내려앉은 먼지를 문지
른 뒤 홀린 듯 들여다보았다.
"이 배는 1863년에 필라델피아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연안을 운항하던 거요. 수명이 120일밖
에 되지 못했지만. 우린 이 배에서 기관차에 쓰일 엔진 두 개를 구했지."
"기차 엔진을 배에서 구해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흥미가 일었다. 그는 애비에게 짧은 미소를 던졌다. 그러나 지금 그의
관심은 온통 사진에 쏠려 있었다.
"사실 기차에 쓰인 모든 물건이 배에서 나온 거요. 엔진, 레일, 이음쇠, 이음판, 철차鐵叉
등등, 침목과 이음목만 빼고 전부다 말이오."
이음판? 철차? 애비는 무얼 말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 말을 하
는 그의 표정과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다음에 그가 보여 준 사진은 새크리멘토 부두에 정박
해있는 우아한 증기선을 찍은 것이었다.
"철도는 강을 운항하는 증기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소. 기차가 실어다 준 물건들을 운송하
느라 철로가 끝나는 지점에 부두가 생겨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소? 그런데 증기선은 기차에
게 모든 걸 빼앗겨 버렸지."
그는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슬픈 눈빛에 애비는 마음이 찡했다. 제시는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자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사진의 먼지
를 털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애비게일에게 전혀 낯설었다.
그는 사진에서 눈길을 파지 않으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어렸을 때 난 몇 번인가 유람선을 타 보았소. 증기선이 없는 뉴올리언즈는 예전 같지가 않
아."
그의 목소리와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열정과 연민이 함께 담겨 있었고, 애비는 그의 그런 모
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다음 사진은 산등성이를 연결한 교각을 찍은 것이었다.
"가끔은 철로에서 튀긴 불똥이 산불을 내는 수도 있소."
그는 나쁜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제시는 각 사진마다 설명을 곁들이며 미소를 짓거나 인상을 쓰기도 했다. 매번 사진을 들여
다볼 때마다 그는 온통 그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애비는 그의 새로운 면모에 자꾸만 더 깊
이 이끌렸다.
"그 사람은 첸이오."
그가 주름살이 가득하고 땀에 번들거리는 중국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애비는 흉한 몰골로 쭈글거리는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나서 다시 제시를 쳐다보았다. 그
는 뭔가 흐뭇한 생각을 떠올리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듣던 대로 첸은 정말로 피부색이 노란가요?"
제시는 가볍게 웃으며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 대답했다.
"아니오. 오히려 대지의 색깔과 가깝다고 해야겠지. 절대로 불평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미소
를 짓는 사람이었소."
또다시 그는 소맷자락으로 사진을 닦았다.
"지금 첸 아저씨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죽겠소."
깜깜한 동굴처럼 뻗어 있는 터널의 사진도 있었다. 언젠가 그가 얘기했던 천막이 태양 아래
진흙 속에서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온통 진흙투성이인 남자들이 춤을 추는
사진도 있었다. 제시는 철로가 완성되던 날의 흥분된 추억을 떠올리는지 또다시 미소를 지었
다.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손을 들고 환호하는 것을 배경으로 노인의 앙상한 두 손이 금빛
이음쇠를 잡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분은 월 펜튼이오. 아주 좋은 노인이었지."
그러나 제시는 그 사진의 먼지를 털어 내지 않았다. 애비는 그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스런 표
정을 바라보며 목구멍이 답답해져 옴을 느껴졌다. 그의 눈에 어린 슬픔을 위로하고 싶어서
그녀는 그의 팔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면을 당신은 얼마나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건가요? 그녀는 제시의 긴 손가락과 윌 펜튼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애비는, 미국의 양쪽 해안을 연결하는 거대한 철로의 건설이라는 화려한 대의명분 뒤에 얼마
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가 깃들어져 있는지 선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누군가 자금
을 대고 누군가는 이익을 보았겠지만, 실제로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은 높이
평가해 주어야 했다.
"자, 이제 난 시험에 합격한 거요?"
그녀의 상념을 깨뜨리며 제시가 물었다.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던 자신의 행동이 계면쩍어져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이 사진들을 치우는 동안 당신은 어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고 준비를 해요."
제시는 곧 사진을 모으는 일에만 열중했다. 애비는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웨딩드레스를 바라
보고 나서 방구석에 놓인 가리개를 응시했다. 옷가지를 집어 들며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올
바른 것이기를 바랐다.
그녀는 제시의 사진에 감동을 받은 것이지 그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웨딩드레스를 입는 동안, 그녀는 사진을 볼 때마다 제시의 얼굴에 순간순간 떠오르던 절실한
표정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 작가로서의 그를 존경하게 되었든 아니든 간에, 그를 조심
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그녀는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누가 뭐래도 그는 여전히 위험
한 제시 더프레인이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사진을 정리하느라 분주하게 방안을 돌아다녔다. 휘파람 소리가 그녀
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뭔가 가구를 옮기는 소리도 들려왔다. 가리개 뒤에서 그
녀가 나왔을 때, 제시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나무 바닥
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는 카메라 앞에 놓아 둔 흔들의자
밑에다 그 물건을 끼워 넣었다. 흔들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제시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 그는 여전히 휘파람을 멈추지 않았고, 사뭇 일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을 좀 봐야겠어요."
진짜로 작업을 시작한 사람처럼 셔츠 소매를 등등 걷어올린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좋소."
제시는 일어서서 그녀가 옷장으로 가도록 길을 내주었다. 그는 애비가 머리를 빗어서 단단하
게 조여 올린 뒤에 머리핀으로 고정시키는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거울 속으로 촬영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제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침대 머리맡탁자를 흔들의자 옆으로 옮겨
놓고, 그 위에 작은 화분을 올려놓고 있었다. 배경 소품인 모양이었다. 설마 흔들의자에 앉
혀놓고 사진을 찍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머리 장식과 베일은 어떻게 하고?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애비는 그에게 묻지 않고 동그란 진주 화관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머
리에 화관을 막 쓰려는 순간 그가 외쳤다.
"안 돼, 그걸 쓰지 말아요."
"그렇지만 이건 내 신부 베일이라구요. 사진에 꼭 나와야 해요."
"나올 거요. 이리로 가져 와요."
그는 흔들의자를 가리키며 명령하듯 말했다.
"정말로 흔들의자에 앉은 신부의 모습을 찍으려는 건 아니겠죠? 난 그 정도로 파파할머니는
아니에요, 제시."
그는 듣기 좋은 목울림으로 웃었다. 애비처럼 유머 감각이 뛰어난 여자는 어디서도 만난 적
이 없었다. 그는 느긋한 마음으로 허리에 양손을 대고 서서,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눈
부신 애비의 모습을 감상했다.
"당신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 나라는 게 기쁘군. 하지만 당신은 흔들의자에 앉아
야 해요."
"제시."
"이런 일에는 내가 당신보다 더 경험이 많으니, 잔말 말고 어서 이리 와요."
그래도 애비가 움직이지 않자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를 믿어요."
지난번에 내가 당신을 믿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세요,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
만 그녀는 제시의 명령대로 의자에 다가갔다. 흔들의자는 뒤로 많이 젖혀져 나무 토막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그가 연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신부의 사진이라구요. 바람난 여자의 사진이 아니라."
"의심도 많군. 애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염려는 붙들어매라구. 사진이 나오고 나면 분
명 데이비드도 좋아할 거요."
그의 말은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난 서서 사진을 찍고 싶어요."
"물론 난 서서 찍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
"장난하지 말아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난 내 식으로 사진을 찍어요. 그리고 또 데이비드가 사진 찍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의심이라도 하면 어쩔 거요?"
그는 손을 내밀고 애비가 의자에 앉기를 기다렸다. 할말을 잃은 그녀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
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불편한 심정으로 그의 손을 잡고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의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그의 손을 꼭 잡고 뒤로 젖혀진 의자에 균형을 잡으며 앉는 동안, 그의
따스한 손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 의지는 그녀의 작은 흔들의자보다 훨씬 크고 고급스러웠다. 높다란 팔걸이와 등받이에는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설치해 놓은 의자의 각도가 너무 눕혀져 있어서 한 번
앉으면 혼자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애비는 바닥에서 높이 떨어져 허공에 매달
린 것처럼 대롱거리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등받이에서 머리를 높이 들
어 올렸다.
제시는 그녀의 손에서 베일을 가져다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뒤로 돌아와서 그
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 천천히 눌렀다. 그녀의 목덜미가
참나무 조각 등받이에 닿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기대요."
그의 손길을 느끼자, 타이트하게 조여진 드레스의 깃 아래에서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애비는 올린 머리를 기대고 앉아 제시의 얼굴을 거꾸로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벨벳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으며 천천히 의자 앞쪽으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우리가 찍으려는 건 결혼식을 올리기 전의 딱딱한 신부의 사진이 아니오. 모든 신
랑들이 평생 동안 기억하고 싶어하는, 식후에 조금 나른해진 신부의 모습이지. 알아차리지
못한 새에 신부의 머리는 약간 헝클어져 있소."
그는 느린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작은 빗을 꺼내 들었다.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을 향한
채 그는 빗으로 그녀의 관자놀이 옆에 있는 머리칼 한 오라기를 빗어내렸다. 그녀는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검은 눈과 부드럽
고 낮은 목소리에 홀린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남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신부의 모습은 따로 있는 거요. 완벽하다기보다는 약간은 헝클어
진 모습이랄까. 하루 종일 축하의 포옹을 받고, 남몰래 흠모하던 사내들과 춤을 추느라 어느
정도 기진맥진하고 흐트러진 신부의 모습 말이오."
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그리고 신랑은 신부의 촉촉한 피부에 여기저기 늘어붙은 머리칼을 좋아하지."
안 돼요, 제시, 안 돼.
그러나 생각뿐 애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혀로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광경
을 마술에 걸린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는 젖은 손가락으로 옆으로 흘러내리게 한 그녀의 머
리카락을 꼬았다. 그녀는 그의 긴 손가락과 자신의 뺨에 와 닿는 차가운 타액의 감촉을 그저
관객처럼 보고 느낄 뿐이었다. 그의 감미로운 혀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털어 버리려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그녀는 무진 애를 썼다. 그는 뒤로 물러서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훨씬 낫군, 애비. 데이비드가 아주 좋아할 거요."
애비는 팔걸이를 꼭 움켜 쥐고 제시를 올려다보았다. 파닥거리는 맥박이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곳은 물론이고 전신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긴장해 있소. 어느 신부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인 양 그렇게 의자 팔
걸이를 부서져라 움켜 쥐고 있겠소."
제시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힘을 빼요. 당신 방에서 처음으로 웃던 날 밤처럼 말이오. 기억하오?"
그는 레이스 소매로 덮인 손목을 힘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흔들었다. 그리고 손바닥이 위로
가도록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좋소."
그는 다시 한 번 애비의 손을 들어 올려 긴장이 풀렸는지를 확인했다. 전율이 그녀의 복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일어서서 곧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애비는 그저 눈을 크게 뜨
고 그의 검은 얼굴이 다시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는, 곧 버려질 순결의 상징인 베일 차례요."
그의 팔이 다가오자 애비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등받이의 한 쪽 기둥에 화관을 걸쳤을 뿐이었다. 그녀의 관자놀이 근처에 걸린 화관에
서 늘어진 레이스 베일이 폭포처럼 그녀의 무릎에 펼쳐졌다.
"손바닥을 위로 해요. 알겠소, 애비?"
피로에 지친 신부가 금방 벗어 놓은 화관처럼 망사가 그녀의 손바닥과 무릎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한 팔을 의자 팔걸이에 늘어뜨리고, 애비 앞에 한 쪽 무릎을 끊고 앉았다.
"결혼식 피로연이 끝났소. 꽉 끼는 신발과 웨딩드레스를 참아내기에는 너무 피곤한 하루였지
."
그가 또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애비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데이비드의 결혼 선물인 흰
색 하이힐을 벗기고 그녀의 발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다시 일어나 의자 뒤로 돌아가는 제시
를, 그녀의 두려움 가득한 눈길이 좇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약간 구부러진 그의 콧
수염과 반짝이는 검은 눈이 보였다. 그는 목 뒤쪽으로 달려 있는 애비의 드레스 단추를 끄르
고 있었지만, 그녀는 몸에 남아 있던 기운이 모두 증발해 버리기라도 한 듯 그를 저지할 수
가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첫 번째 단추를 풀렀다. 숨통을 조이는 것 같던 압박감에
서 해방되었다. 제시가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를 풀어내려 갔다. 가느다란 고리로 채워진 진
주 단추들이 촘촘하게 달려 있었으므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드디어 그녀의 목덜미가 우묵하
게 드러났다. 그는 드러난 애비의 목덜미를 등받이에 가만히 기대 놓았다. 의자를 더욱더 뒤
로 젖히며 그는 흐트러진 그녀의 눈빛을 내려다보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그의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매혹적인 신부의 모습을 마다할 신랑이 어디 있겠소?"
거꾸로 올려다보이는 그의 눈빛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애비의 뺨도 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
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의지력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최면술에 걸린 것 마냥 그의 목소
리와 눈빛에 복종할 따름이었다.
제시는 드레스의 벌어진 사이로 파닥거리며 뛰고 있는 그녀의 맥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의
자를 버팀목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받이를 짚으며 서서히 그녀의 옆으로 돌아 나
왔다. 그의 시선은 줄곧 애비의 얼굴에 못박혀 있었다.
"입술을 축여요, 애비. 사진을 찍을 때 촉촉하게 보여야 하니까."
그렇지만 그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쪽으로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서 입술을 축이라니까. 상상력을 발휘해 봐요. 데이비드가 방금 당신에게 키스를 하고,
이제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있소."
제시는 조금 벌어진 애비의 부드러운 입술을 응시하며 기다렸다. 애비가 혀로 입술을 핥았고
, 금새 그녀의 입술에는 윤기가 흘렀다. 열려진 입술 사이로 불규칙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그는 상체를 수그리고 의자 팔걸이에 양손을 짚었다. 제시의 얼굴이 맞닿을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의 목소리가 꿀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당신은 지금 눈을 너무 부릅뜨고 있소, 애비. 사랑의 고백을 들은 신부는 행복감에 젖어 눈
을 가늘게 떠야 하는 거요."
그녀는 제시의 잘생긴 얼굴이 그토록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숨이 가빠 왔다. 그의 말소
리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어 떨림을 자아냈다.
"다시 해봅시다."
여전히 애비의 몸 위에 구부리고 서서 그가 속삭였다.
"사랑하오, 애비."
그녀의 눈꺼풀에서 힘이 풀렸다.
"사랑하오, 애비."
이번엔 눈을 반쯤 감았다.
"사랑하오, 애비."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 앞에서 그녀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의자
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제시의 벌어진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길다란 손
가락이 애비의 어깨를 잡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조금 전 파닥거리며 맥박이 뛰고 있던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그의 뜨거운 혀가 애비의 입술에서 춤을 추었다. 그의 키스가 길어질수록 애
비는 온몸으로 그를 갈망했다.
갑작스런 공포감이 그녀의 심장을 조이며 머릿가죽을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숨이 막혀 왔다.
그녀는 그의 질긴 입맞춤에서 놓여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안 돼요. 난 내일 결혼할 사람이에요."
"물론이지, 바로 내일."
제시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애비는 눈을 감으며 터져 버린
감정의 봇물을 막아 보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의자에서 일어나게 해줘요."
그녀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는 애비의 턱밑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신부에게서 제대로 된 키스를 받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요. 당신은 아직 그의 아내가 아냐.
내일이면 난 여기에 없을 테고, 지금이 신부에게 키스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그냥 하루
일찍 축하의 입맞춤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반박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요, 애비? 데이비드에게 선물할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당신을 금방 키스를 마
친 연인처럼 보이게 하자는 것뿐이오. 결혼식날 밤의 신부는 그래야 하니까."
강인한 그의 손이 애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또다시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애비는 온힘을 다
해서 저항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팔을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붙들어 자신의 목에 둘렀다.
그녀의 저항이 완전히 수그러들 때까지 그는 애비의 팔을 놓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팔은 너무나 오랫동안 지금의 순간을 갈망해 왔다. 그녀의 두 팔은 어느새 그의
목을 휘감았고, 자진해서 입술을 열었다.
굶주린 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제시는 갑자기 얼굴을 들고 흔들의자 밑에 고정시켰던 버팀
목을 무릎으로 밀쳐 냈다. 의자가 앞으로 쏟아졌고, 그녀의 몸이 그를 향해 튕기듯 다가왔다
. 두 사람의 입술이 절박하게 다시 만났다. 그는 애비를 자신의 무릎 위로 들어 올렸다. 한
팔로 애비의 허리를 안고서 그는 단단한 자신의 몸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매끄러운 웨딩드레
스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되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은 입술과 혀로
서로에게 무언의 속삭임과 갈망을 전하면서 달콤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다. 제시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속삭였다.
"당신은 그와 결혼해선 안 돼, 애비. 그러지 않겠다고 어서 말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성마른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를 덮쳤다. 따뜻하고 촉촉한 혀
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제시는 입술을 그녀의 턱으로 미끄러뜨리고 나서 조금씩 아
래로 내려가 벌어진 웨딩드레스 자락으로 감싸인 목덜미 아래에 키스했다.
"어서 말하라니까."
그러나 그녀는 목덜미에 느껴지는 감미로운 감촉에 정신을 잃을 만큼 황홀해져서 아무 생각
도 할 수가 없었다. 애비는 얼굴을 그의 머리칼에 기대며 그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
녀의 손은 어느새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는 애비의 손가락에 키스하며 벌어진
웨딩드레스의 여밈새를 활짝 잡아당겼다. 단추들이 우박처럼 바닥에 쏟아졌다. 그는 자신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얼굴을 댔다.
애비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제스, 내 웨딩드레스가……."
그녀의 가슴 사이에서 그가 대답했다.
"새것으로 사 주겠소."
그는 얼굴을 들고 찢어진 옷 밑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부드러운 유두를 장난치듯 만지작거
리자 금새 단단해졌다.
"그렇지만 이건 우리 어머니 거예요."
"괜찮아."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벌어져 있는 옷자락을 세게 잡아내렸다. 옷이 팔꿈치까지 벗겨져
레이스로 만든 포승처럼 그녀의 팔을 옥죄었다. 하얗게 드러난 젖무덤에 그의 손과 혀와 이
가 번갈아 지나갔다. 그녀는 활처럼 목을 뒤로 젖혔다. 그녀의 한 쪽 가슴을 입에 문 그가
열에 들뜬 신음 소리를 흘렸다. 성난 것처럼 부풀은 유두를 수염으로 애무하며 그가 말했다.
"아, 애비, 당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소."
"제발, 제스, 우린 이러면 안 돼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른 족 가슴으로 입술을 옮겨 갔다.
"당신도 내 생각을 했소?"
쉰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서 밀어 내려고 했지만, 그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옷으로 결박당한 팔로는 그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오, 제스, 정말로 애를 썼어요."
"나도 그랬소."
"그만, 제스……."
"당신이 나를 제스라고 부르는 게 너무나 좋아. 멜처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때는 그를 뭐
라고 부르지?"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꼼짝못하도록 잡은 뒤 그는 성난 야
수처럼 거칠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제 그는 짓궂게 그녀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가슴과 배를 지나 치마 밑으로 손을 넣어 이미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다리 사이
에 손을 댔다.
"멜처도 이렇게 당신을 뜨겁게 달굴 줄 아나? 나처럼 그도 당신의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
당신의 몸을 촉촉하게 만들 수 있느냐구?"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그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만족스런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얼굴을 손가락으로 애
무하면서 그의 턱에 입을 맞추었다.
"아뇨, 전혀 아니에요, 제스. 절대로 당신처럼 할 수는 없어요."
데이비드와 천년을 같이 산다고 해도 자신의 대답이 똑같으리라는 것을 애비는 잘 알고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