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20화 (20/24)

20

그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애비게일과 데이비드가 함께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사항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결정하느라 두

사람은 매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독립기념일 축제에 다녀온 다음날, 실버파인 벌목장

에 나란히 나타난 애비게일과 데이비드는 가게에 쓰일 목재를 고르는 동안 줄곧 머리를 맞대

고 다정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그녀의 명민한 사업 수완으로 데이비드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싼 가격에 목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애비게일은 옹이가 많이 박혀서 비교적 값이 헐한 소

나무 목재를 사자고 고집했다. 건물 뒤편에 지을 보관 창고에 쓰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을 것

이라는 현명한 판단에서 나온 제의였다.

오하이오에서 기차편으로 배달될 예정이었던 통유리는 그들의 가게 인테리어 소품 중에서 제

일 비용이 많이 드는 물건이었다. 데이비드는 가능한 한 큰 유리를 구입하고 싶어했다. 그러

나 애비게일은 운반시에 깨질 위험이 적은 소형 판유리를 여러 개 주문하자고 그를 설득했다

. 결국 다른 상점들과 다름없이 단조롭고 평범할 뻔했던 가게의 쇼윈도는 온화하면서도 유혹

적인 느낌을 주도록 입체적으로 각지게 디자인되었다. 정면에서 구경하는 것보다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진열된 구두를 바라보면 여자들이 더 현혹되기 쉽다는 게 애비게일의 생각이었

다. 여자들의 충동 구매 욕구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건물의 첫 번째 기둥이 세워지기 시작하던 날, 그녀는 사료가게로 달려가 본스 빈레이에게

거절할 수 없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쇼윈도 뒤쪽에 세워 둘 나무 기둥 스물 여덟 개를 만들

어준다면 1주일 동안 본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매일 맛있는 점심도시락을 싸 주겠다는 내용이

었다. 꽉 막힌 벽 대신에 나무 기둥으로 쇼윈도 뒷배경을 마무리하면 가게 안쪽에서도 진열

된 상품을 구경할 수 있을 뿐더러 밖에서도 친근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주일 예배 시간에 마침 교회의 의자를 새로 주문했다는 목사님의 발표가 있었다. 애비게일은

즉각 데이비드에게 새 의자를 사지 말고 교회에서 쓰던 의자를 구입하는 게 어떻겠는지 물

었고, 당연히 일은 성사되었다. 의자 문제가 해결되자 그녀는 애벌리 홈즈의 가게 창고로 쳐

들어가 몇 년 동안이나 케케묵은 두루마리 원단을 하나 찾아냈다. 색깔이 너무 튀는 주홍색

이라는 이유로 손도 대지 않은 채 처박혀 있던 옷감이었다. 아늑한 가게 분위기를 만들려는

그녀의 요구에 딱 맞는 밝은 주홍색이었다. 흥정을 하려고 먼저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불

렀는데, 애벌리는 골칫덩어리를 처분하게 되어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선뜻 응해 주었다. 그

녀는 예상 외로 싸게 산 주홍색 원단을 들고 취미 삼아 모여서 바느질을 하는 마을 여인들에

게 찾아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가구 씌우개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애비의

제의에 여자들은 기꺼이 훌륭한 의자 덮개를 만들어 주었고, 자신들의 바느질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오히려 애비게일에게 고마워했다.

옷감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의자 덮개를 모두 만들고 난 뒤에도 원단은 넉넉하게 남아돌았

다. 애비는 남은 옷감으로 쇼윈도에 두를 단순한 디자인의 커튼을 만들었다. 양옆을 층지게

묶으면, 밖에서 바라보는 가게의 진열창이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그래도 남은

원단을, 그녀는 짬이 날 때마다 가늘게 찢었다. 시간이 나면 천을 꼬아서 문 앞과 난로 앞에

놓을 작은 깔개를 만들 생각이었다.

8월이 가까워 오자 건물은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애비와 데이비드는 가게 진열장을 채

울 물건들에 대해 상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점 시일에 맞추어 미리 필라델피아의 공장에

주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의 열기는 대단했고, 건조한 대기는 언제나 뽀얀 먼지를

머금고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두 사람은 애비의 집 뒤뜰에 있는 참피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곳이 그

나마 집에서 가장 서늘한 곳이었다. 둘은 장부며 각종 목록, 카탈로그 등을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겨울이 올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구요. 좀더 현실적이 되세요, 데이비드. 최신 유

행하는 구두만 주문하게 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라구요."

"난 언제나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구두를 팔아 왔소. 장화같은 건 잡화점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잖소. 지금처럼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 두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이 가장 즐겨 신는 장화를 양보하려는 거죠?"

"그런 자질구레한 물건에까지 손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내가 취급해 왔던 고

상한 스타일의 신발만 팔아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소."

"동부같이 번화한 도시에선 그럴 수도 있겠죠. 특히 예전처럼 순회 판매를 하던 때는 말이에

요. 한 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그 신발은 살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처럼 한 장소

에 정착하려면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서 골고루 상품을 갖추어놓아야 해요. 작업용 부츠는

제일 잘 팔리는 제품이 될 거라구요."

"그렇지만 당신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 예쁜 쇼윈도와 투박한 장화가 어떻게 어울리겠소

?"

"전혀 안 어울리겠죠."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오?"

애비게일은 금새 묘안이 떠올랐다. 그녀는 언제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음, 부츠는 가게 뒤쪽으로 그럴듯한 자리를 만들어서 진열해 두면 될 거예요. 남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도록 디스플레이를 하는 거죠.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우리, 남성

전용 코너를 만들어요! 남자들은 끼리끼리 모이는 걸 즐기잖아요. 미치 씨네 사료상 앞에 있

는 것 같은 팔걸이 의자를 몇 개 구해가지고 난로 주변에 둥글게 놓아 두는 거예요. 그리고

음……."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기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입술을 두들겼다.

"아늑하면서도 남성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살리는 거예요. 둥그렇게 놓은 의자 가운데에는 빨

간색 깔개를 깔아 두고, 한 쪽 구석에 아주 투박하게 부츠를 진열해 놓으면 돼요. 맞아요,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도 끌면서 부츠의 단조로움도 없애 줄 거예요."

"난 잘 모르겠소."

데이비드는 아직도 의심쩍은 듯 머뭇거렸다.

애비게일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미적미적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바람

에 무릎에 올려져 있던 장부와 쪽지들이 흩어져 떨어졌다.

"오, 데이비드, 감각을 좀 살려 보세요!"

"지금까지도 난 스스로를 꽤나 감각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있소. 이 마을엔 이미 작업용

장화와 평범한 일상 구두를 파는 가게가 있고, 내 전문은 아름답고 화려한 패션 구두를 파는

거요. 즉, 내가 주력할 고객은 마을의 숙녀분들이란 뜻이오. 숙녀들이 우리 가게의 쇼윈도

를 들여다보고 곧장 집으로 달려가 남편에게 사 달라곤 졸라대는 그런 환상적인 구두를 팔고

싶소."

애비게일은 도전적인 태도로 손을 양허리에 짚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여자들이 남편에게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아, 물론 그들의 허영심을 불러일으킨, 고급스러운 신발들로 가득 찬 쇼윈도의 진열대를 설

명하겠지. 평생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부신 구두에 대해서 말이오."

현명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기어코 물어 보고야 말았다.

"빨간 구두 같은 것 말인가요?"

"뭐요?"

그는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빨간 구두라고 했어요. 그 부인들이 빨간 구두에 대해서도 설명하게 될까요?"

"아, 아, 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애비게일이 그와 저녁 식사를 함에 했던 그날 밤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그 구두를 신

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그 구두가 마음에 들지 않소, 애비게일?"

그녀는 풀이 죽은 음성으로 묻는 데이비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곁에 앉으며 그의

소매에 팔을 얹었다.

"이해해 주세요, 데이비드. 당신이 준 선물이기 때문에 전 그 구두가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

그녀가 머뭇거리자 그가 재촉했다.

"계속해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일어서

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 구두에 대해서 더프레인 씨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더프레인의 이름이 거론되자 데이비드는 금방 신경을 곤두세웠다.

"더프레인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오?"

"당신도 알고 있듯이 그 선물이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아직 이곳에 있었어요."

애비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데이비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구두를, 평범한 여자들은 신지 않는 매춘부의 신발이라고 하더군요."

데이비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왜 그 사람 얘기를 꺼내는 거요? 게다가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전혀 상관하지 않소."

그녀의 목소리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전 당신의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요. 여기 스튜어트 정크션 사람들은 빨간 구두를 신지 않

는다구요. 작업용 장화같이 실용적인 신발들을 훨씬 더 많이 신는다는 사실을 당신이 깨달았

으면 좋겠어요. 성공하고 싶다면, 당신은 이곳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알아야 해요. 선

명하고 튀는 색깔이 다반사인 동부에서라면 얼마든지 그런 물건들을 팔고 또 아무렇지 않게

신을 수 있겠죠. 그렇지만 여긴 달라요. 당신은 세일즈맨의 시각에서 모든 걸 바라보죠. 이

곳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마음속으로는 한 번쯤 신고 싶어하는지 어

떨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신발을 사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구요. 더

프레인 씨의 말을 인용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에요. 마을 사람들의 시각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이니까요."

"애비게일."

데이비드의 입과 턱이 경직되었다. 그녀가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들은 전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붙들고 있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자가 당신을 매춘부라고 불렀다는 얘기요?"

아무런 생각 없이 불쑥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냥 질투를 해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데이비드가 벌떡 일어섰다.

"뭐요?"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얼버무렸다.

"얘기가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군요. 어떤 신발을 주문해야 좋을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

었는데."

"당신이나 말을 돌리지 말아요. 왜 더프레인이 질투를 느껴야 했는지 얘기하는 중 아니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는 말이잖소?"

데이비드 멜처는 더프레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이상스러우리만치 자신만만해져서 거들먹

거렸다.

"아니에요!"

그녀가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이며 성급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직

하게 되풀이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는 혐오스럽고 무분별한 사람이에요. 틈만 있으면 욕설을

퍼부으며 나를 모욕했어요."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마 데이비드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자가 당신한테 보낸 내 선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거요? 게다가 그자가

한 말이라는 것도 좀 이상해요. 빨간 구두에 대한 당신이나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그렇다 쳐

도, 그 사람이라면 그런 구두를 좋아할 것 같은데. 내가 떠나던 날 아침에 당신 침대에서 그

런 말도 안 되는 장면을 연출한 사람 아니오?"

데이비드는 제시 더프레인이 떠난 뒤 줄곧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던, 그 남자의 알 수 없는

모순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면

그때마다 항상 당혹스러웠다.

"제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군요. 그리고 당신은 저를 나무랄 입장이 아

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당신과 저는……."

그녀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시선을 내리깔고 소매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 자신과 데이비드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지, 그녀는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가게를 열기 위

해서 함께 계획을 세우고 준비해 온 몇 주 동안 그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다. 유일한 변화

가 있다면, 성 대신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키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애비에게 구애를 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그는 독립기념일에 사람들 앞에서 술에 취해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입맞춤을 한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

같았다.

그는 또다시 묘한 자신감을 풍기며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사이에 다시는 그자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도록 해요, 애비게일."

애비게일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권리로 그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걸까?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도 아니었다.

갑자기 데이비드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바람이 불어 와 그의 갈색 머리칼을 날렸다. 사색

에 잠긴 그의 눈빛이 깊어 보였다. 그는 성한 다리 쪽에 체중을 싣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총상을 입은 다리에 체중을 실으면 무리가 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종종 그런 식으

로 서 있곤 했는데, 그릴 때면 느긋한 분위기와 함께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회중 시계를 넣

어 두는 조끼 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서 있을 때면 더욱더 그랬다.

"애비게일,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요? 당신과 나 사이가 어떻다는 말이오? 말을 끝내지 않

았잖소."

어떻게 말을 끝낸단 말인가? 그것은 실언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은 당연했다. 그녀는 데이비드와 함께 있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고, 그

와 함께하는 시간은 대부분 흡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가끔가다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순결

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 사실은 데이비드에게 희망을 심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자책으로 작

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점차 엷어졌다. 아직까지 그는 그녀를 향해 조금도 다가

서지 않았고, 앞으로 그럴 생각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잘 말하면, 기껏해야 플라토닉

한 관계라고나 할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적당한 대답을 둘러댔다.

"사업상 파트너 관계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당신 혼

자만의 사업이니까요."

그녀가 데이비드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반은 당신 사업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다, 당신은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했

어요."

얘기의 주제가 조금 사적인 부분으로 넘어가자 그는 곧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가게에 대해

서 얘기를 하는 동안에 그의 어조는 확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자신과 애비게일의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그는 다시 소심해졌다.

"친구라면 누구나 할 일을 한 것뿐인 걸요."

그녀는 데이비드가 부인해 주기를 바라면서 겸손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애비게일, 당신은 그 이상이었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처리했을지 지금도 자신이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판단력은 나보다 훨씬 나아요."

애비는 그가 좀더 마음을 털어놓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수줍어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사실 데이비드의 소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고백을 하는 데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길어져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데이비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우린 아직도 주문해야 할 상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어색한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판단을 따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잘 생각하셨어요. 가게 뒤편에 부츠를 진열할 공간이 있을 거예요. 제 생각대로만 된다면,

분명히 아주 많은 부츠를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지금 가게로 가서 둘러보

는 게 좋겠어요. 어디에 부츠를 진열하면 좋을지 제 생각을 설명해드릴게요."

"지금 말이오?"

"네. 안 되나요?"

"오늘은 일요일인데……."

"알아요. 그러니까 시끄러운 망치 소리와 곡괭이 소리도 없을 테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

기 속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잖아요."

비로소 데이비드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이 옳아요. 어서 갑시다."

그녀는 이제 날씨가 더우면 외출할 때도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가끔씩 마주치는 이웃들의 인사에 상냥하게 목례를 보내며 그들은 시내로 걸어들

어갔다. 데이비드와 애비게일의 이름을 나란히 부르는 이웃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벌써 그의 아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건물은 이제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벽과 지붕의 일부가 완성되었지만, 그래

도 아직은 내부의 기둥이 들여다보였다. 정면으로 튀어나온 사다리꼴 모양의 케이프 코드식

쇼윈도는 창틀까지 모두 완성되어 유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에는 아직 문이

달리지 않아 빈 공간 그대로였다. 인테리어용으로 벽에 붙일 주석 판자들이 널빤지와 함께

톱밥속에 파묻혀 있었다.

애비게일은 못 더미와 나무 판자, 그리고 본스와 그의 동료들이 벌써부터 완성한 조각 기둥

들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서 가게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보이시죠?"

건물의 뒤쪽에서 그녀는 굴뚝에 연결하기 위해 구멍을 내놓은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에 난로가 놓이게 될 거예요. 커다란 참나무 둥치를 몇 개 잘라다가 여기에 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혀 다듬지 않고 그냥 숲에서 가져 온 것처럼 거친 느낌 그대로를 살리는

거죠. 난로 근처에 세워 두고 그 위에 작업용 부츠를 올려놓는 거예요. 아주 남성적인 분위

기가 나겠죠. 그런 다음에 여기에는 땅콩을 바구니에 담아서 올려놓고, 난로 옆으로 의자를

둥그렇게 놓는 거죠. 아니면 쉽게 앉을 수 있도록 벽에 기대어 놓는 것도 좋겠어요. 아주 근

사할 거예요! 남자 분들은 난롯가를 좋아하잖아요. 여자들은 언제나 부엌에 있는 난롯가에서

씨름을 하니까 여성용 구두는 난로에서 멀리 떨어져 시원한 앞쪽에 진열을 하는 거예요. 조

각 기둥으로 된 난간을 배경으로 한 쇼윈도 안에 말이죠. 그리고 이 근방에 사는 여자들은

빨간색 신발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진열장의 배경색으로는 빨간색이 아주 그만이죠. 시각

적으로 즐거움을 주니까요. 크리스마스 때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에서 커피 주전자가 끓

고 있는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벽에 못을 쳐서 사람들의 머그잔을 걸어 두게 할 수도

있어요. 집에서처럼 자신의 커피잔으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거죠. 우린 부츠를 아주 많이

팔 수 있을 거예요. 여자분들도 물론 당신의 환상적인 구두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남편과 멀

리 떨어져 수다를 떨게 되겠죠."

가게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애비게일은 자신도 모르게, 빨간 구두가 도착

하던 날 제시가 매료되었던 바로 그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데이비드와 자

신을 한데 엮어서 '우리'라고 말한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반짝이는 눈빛과 환한 미소가 눈부셨다. 얼마 전에 제시 더프레인이 반했던 것처럼 데이비드

멜처 역시 애비게일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애비게일이 이곳 저곳으로 움직일

때마다 치맛자락이 톱밥 먼지를 일으켰고, 반쯤 가려진 지붕과 굴뚝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에 뽀얀 아지랑이가 일었다. 데이비드는 한여름의 열기도 잊은 채, 구두를 고르는 여자

손님들에게 열의를 다해서 조언하고 있는 애비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은 남편들에게 장화

를 보여 주면서 곁에 서 있는 부인들에게 말하리라.

"제 아내가 앞쪽에서 부인들을 돌봐 드릴 겁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데이비드는 난로와 통나무가 놓일 자리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면서 설명을 하는 애비

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속으로 잦아들었다. 여름에 내리

는 눈송이처럼 톱밥이 사방으로 휘날려 그들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나무향이 가득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아주 은밀한 공간에 마주 서 있었다. 데이비드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

했다.

"애비게일."

그가 마른 침을 삼켰다.

"네, 데이비드?"

"저, 저, 키스해도 될까요?"

이미 무례한 행동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는 먼저 그녀에게 물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차라리 묻지 않았기를 바랐다. 제시라면 절대로 물어 보고 키스를 하지는 않

았을 텐데. 데이비드가 못마땅해하는 자신의 생각을 눈치챌까 두려워 그녀는 눈길을 내리깔

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행동을 완곡한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

"미, 미안합니다."

그녀는 다시 눈길을 들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가 예의를 차렸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지만, 지나치면 모

자란 것보다 못한 법이다.

"저는, 그저……."

애비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

에 그는 더더욱 말을 더듬었다.

"키스해도 좋아요, 데이비드."

그러나 자연스러운 입맞춤의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린 뒤였다. 그는 다시 애비의 두 손을 잡

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작은 판자 더미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판

자를 넘어서 그녀를 안는 대신 엉거주춤 몸을 기울일 뿐이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다가

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애비게일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그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육감적인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듯 훌륭한 입술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는 안타까웠다.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애비게일은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신발들을 어떻게

진열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던 순간이 오히려 그의 입맞춤보다 더 흥분되

었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고 침묵을 지켰다. 무미건조한 키스만큼이나 싱거운 침묵이었

다. 그녀는 발 밑에 깔린 톱밥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판자 더미를 내려다보며, 짧은 입

맞춤을 나누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도 보이지 않게 그만한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입술만의 키스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들고 과

감하게 데이비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하지만 두 번째 입맞춤도 여전히 짧게 끝났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데이비드가 말했다.

"이제 돌아갈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뇨, 나무 더미를 치우고 다시 한 번 해봐요. 이번엔 혀도 약간 사용해 보자구요."

그러나 그는 이미 그녀의 옆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문도 달리지 않

은 현관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와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그를 당황하게 만든 모양

이었다. 그는 당혹감을 숨기려는 듯 집으로 가는 동안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댔다. 그녀의 생

각이 전적으로 옳으며, 10월에 있을 가게 오픈에 맞출 수 있도록 즉시 부츠를 주문할 것이고

, 그때쯤에는 벌써 눈이 내리게 될지도 모르므로 뒤뜰에 장작을 쌓아 놓아야겠다는 둥, 마을

주민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가게의 개점을 알리는 안내문을 신문에 실어야

한다는 등, 얘기는 끝이 없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애비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마다하고 일찌감치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

즈음에는 두 사람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었다. 하지만 그는 어서 제품

주문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며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내빼다시피 달아났다.

애비게일은 오늘 있었던 자신의 대담한 행동을 돌이켜 보며 데이비드 멜처에 대한 자신의 감

정을 분석해 보았다. 지금까지 몸의 상태로 보아서 임신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없어진 셈이었다. 무겁게 마음을 누르던 죄책감도 더 이상은 그녀를 괴롭

히지 않았다.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데이비드 멜처가 그녀에게 행복을 주려고 한다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를 기만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아니, 데이비드와 그녀의 문제는 도덕적인 측면이 아니라 성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애

비게일은 그에게서 조금도 성적인 자극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시의 생각을 지우려고

무진 애를 깼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데이비드의 싱거운 키스를 생각하면, 능숙하고

정열적이면서 유혹하는 듯한 제시와의 입맞춤이 생각났다. 선명한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

어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제시의 온몸 구석구석을 자신의 몸처럼 잘 알고 있

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이제는 수치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느낀 남자의 몸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그녀는 데이비드와 결혼하고 나면 성적인 매력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

이 바뀌어질 수 있을지 의아스러웠다. 데이비드는 아직도 그녀에게 구혼하지 않았지만, 언젠

가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애비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좀더 걸리겠지만, 그는 반드시 청혼을

해올 것이다. 그가 청혼을 하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싫어요, 당신은 제시처럼 나의 피를 달

아오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어요,라고 할까, 아니면, 모든 면에서 우린 서로

잘 어울리니까 승낙하겠어요,라고 해야 할까.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비는 데이

비드의 열정을 좀더 부추기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적어도 그와 제시 더프레인을 동등

한 입장에서 비교할 수는 있을 테니까.

데이비드는 다음날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애비게일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근래 들어 자주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부엌에 놓인 식탁에서 스스럼없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식

사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마시면서 데이비드는 언제나처럼 음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

다.

"당신이 만든 음식은 항상 맛이 있지만, 오늘은 정말 환상적인 저녁이었어요. 단순하게 배를

불리는 음식이라고 하기엔 아까울 정도입니다."

두 남자를 비교하기로 작정한 이상, 그녀는 데이비드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

다. 장난기 어린 제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렇게도 거슬리게 느껴졌던 태도가 이

제와서 생각해 보니 이상스레 마음이 끌렸다.

이번에는 무슨 독약을 먹일 생각이오, 애비?

추억에 잠겨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웃음 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데이비드가 물었다.

"내가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했나요?"

"네?"

애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현실로 되돌아왔다.

"방금 웃고 있었잖아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죠?"

"웃고 있지 않았어요."

"웃고 있는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였잖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저녁을 맛있게 드셨다니까 기분이 좋아서요."

그녀의 대답에 그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데이비드는 의자를 뒤로 밀치고 느긋하게 앉았다

"저녁 식사도 끝났으니 소네트를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은 정말

로 완벽할 거예요."

갑자기 소네트라는 말이 그의 입맞춤처럼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신은 항상 훌륭한 생각을 해내는군요."

자꾸만 비틀어지려는 자신의 생각을 물리치느라 애비는 목청을 돋구었다. 그에게 좀더 공평

하게 대해야 해! 변한 건 그가 아니라 바로 나니까.

데이비드는 푹신한 소파에 앉고, 애비는 옆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둘은 소네

트를 읽었다. 등불이 조용하게 비추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시를 낭독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애비가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침내 시

집을 치우고 나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어딘지 모르

게 변해버렸다는 느낌을 가끔씩 받았고, 지금 이 순간도 애비는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그녀의 평온함, 그것을 깨뜨리는 조급함이 눈에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작별 키스를 했다. 데이비드는 고결한 입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애비는

싱거운 입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그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9월이라 그런지 이른 저녁인데도 제법 서늘

했다.

"당신, 뭔가 마음에 거리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아니오?"

"마음에 거리끼다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러나 애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녀는 깔개를 만드느라 천을 길게 찢어서 꼬고 있었다

. 그녀의 손이 신경질적으로 쉬지 않고 움직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내가 당신 기분을 언짢게 한 것 같소. 그런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

어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데이비드. 언짢게 하기는요, 그 반대인 걸요."

그녀는 무릎에 놓인 일거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천을 찢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꾸만 자극했다. 데이비드는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만이라도 그녀

가 일을 멈추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나 때문에 애써서 감추지 않아도 괜찮아요. 난 그저 당신을 괴롭히는 게 뭔지 알고 싶을 뿐

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그녀의 손이 더욱더 빨리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끈처럼 길게 찢은 천을 둥글게

감고 있었다. 자신의 입으로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전부 우리가 곧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

한다는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얼마든지 그에게 자신을 던져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는 날이 갈수록 소심해져가고 있었다. 자신도 속시원히 정리할 수 없는 내면의 혼

란스러움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놀라운 속도로 단단하게 끈 뭉치를 감고 있는 그녀의 손 위에 데이비드가 가만히 자신의 손

을 올려놓았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뭔가 아주 크고 힘든 문제인 것 같소. 어쩌

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커다란 문제일 수도 있겠죠. 당신은 지금 누구의 목이라도 조이

는 것처럼 끈 뭉치를 감고 있어요. 그게 나인가요?"

애비는 타래를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그녀의 무릎 위에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널려 있는 빨간색 끈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내가 당신에게 키, 키스를 해도 되겠냐고 물어 본 날부터…… 당신은 어딘가 달라졌소. 나,

나와 함께 있는 걸 몹시도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소, 애비게일? 내가 당신에게 키,

키스를 했기 때문에 나, 나에게 화가 난 거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말

에 대꾸를 해야 하는 건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열정이 결여된 두 번의 입맞춤에 대해서 그

녀가 뭐라고 얘기를 한단 말인가.

"오, 데이비드……."

애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눈길을 돌려 마당을 내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거요? 말해 줘요."

그의 목소리는 애 원조였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애비게일,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사이에는 뭐랄까,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소. 난

당신도 그걸 느꼈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오. 그런데

, 다시 돌아와 보니 당신은 달라졌어요."

이제는 진실을 인정해야 할 때였다. 그녀는 지친 듯이 말했다.

"맞아요."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그는 용기를 내서 물어 보았다.

돌연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이제는 소네트가 싫어졌어요."

깔개를 만들겠다던 끈 뭉치가 바닥으로 또르르 굴러갔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팔짱을 끼고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갔다.

데이비드는 반듯한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며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다. 어느새 애비게일은

현관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 방충망을 소리나게 닫았다. 한동안 그는 그네에 혼자 앉아서

그녀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일어

서서 다리를 절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조용히 문을 연 그는 기괴한 모양의 우산꽂이 앞에 서

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애비를 발견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등으로 턱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애비는 대답 없이 그저 계속해서 턱을 어루만졌다. 이윽고 아주 지쳐 버렸다는 듯이 그녀는

손을 떨구고 나서 슬픈 표정으로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뒤늦은 대답

을 건넸다.

"당신이 다시 내게 키스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놀라움으로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투명한 얼굴에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요

전날 가게에서 그녀에게 한 입맞춤이 너무 성급했다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지만, 애비가 먼저 키스를 요구했다는 사실에 그는 어느 정도 충격을 받고 움츠러들

고 말았다. 망설이던 그는 드디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표정에서 그녀가 읽어 낸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나무 판자도 없었는데, 그는 여전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전과 다름없는 메마른 키스였다. 방해물이 없는데도, 그녀를

품에 꼭 안을 수 있는데도, 적극적이지 못한 그의 행동 탓에 기분은 전보다 더 엉망이었다.

갑자기 애비는 데이비드 멜처라는 사람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녀는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열정적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

에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켰다. 그러나 애비의 초대에 응하는 대신, 그는 숨을 들이키며 몸을

뒤로 뺐다. 신체적인 접촉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이.

데이비드는 애비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애비게일, 난 이런 모습에 대해서 오랫동안 상상해 왔소. 당신과 이 집과 가게와 그밖의 모

든 것에 대해서 말이오. 그리고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

"어떤 생각인데요?"

그는 완전히 애비에게서 몸을 떼고 뒤로 물러서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난 당신과 결혼해서 이 집에서 살며 함께 가게에서 일하고 싶소."

그가 세 가지 모두를 균등하게 바라고 있다는 느낌에 그녀는 맥이 빠졌다. 사실은 자신도 그

런 관계를 원했다는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당신을 사랑하오."

빠뜨린 물건을 주워 담듯 그가 덧붙였다.

"이 얘기를 먼저 했어야 하는데 그랬소."

이 순간에 자신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네, 좋아요,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당

신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내 몸을 이곳저곳 애무해 주세요,라고 해야 하나?

내 살결과 머리칼과 가슴에 당신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세요, 내 피를 끓어오르게 해서 당신

보다 먼저 지나간 남자만큼 당신도 근사한 남자라는 것을 어서 보여 주세요,라고 말해 버릴

까? 하지만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그는 제시가 그

녀에게 알게 해준 정열적인 입맞춤도, 격정적인 포옹도, 유혹적인 애무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에 그는 대단한 의지력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지키며 사랑스러운 어깨를 한 번 꽉 조였을 뿐

이었다. 애비는 그의 알량한 자제심이 역겨웠다. 데이비드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녀는 그에게로 몸을 돌리고 입술을 약간 벌린 채 그에게 키스했다. 그러나 그의 부드러

운 입술은 신중하게 닫혀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신중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열심히 억누르고 있는 관능으로 자신을

절정에 이르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손에 잡혀 서 있으면서

그녀가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는 제시가 아니었다. 그리고 절대로 제시가 될 수도

없었다.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에 있는 사람은 제시가 아닌 데이비드였고, 그는 그녀에게

안정된 미래를 제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만큼 키스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청혼을 거절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공손함에 모욕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감격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제시는 어느새 그녀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은 모양이었다.

"당신이 결정을 내릴 시간은 충분해요. 오늘 밤에 당장 답을 해줄 필요는 없소. 당신에겐 너

무 뜻밖의 일일 거라는 거 나도 알아요."

그녀는 큰소리를 내며 웃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를 안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두 사람은 포옹다운 포옹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예의를 갖춘 입맞춤과 청혼

이 뜻밖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3주 만에 제시 더프레인의 몸을 샅샅이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자청해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까지 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당신은 진심으로 나와 결혼하고 싶은 건가요?"

데이비드에게 묻는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바로 그날 아침부터 난 당신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소. 당신이 나를……."

더프레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가 싫은지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그 이름이 언제나 그

녀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추호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날 내가 당신에게 심한 말을 했던 거 용서해 주겠소? 그날 아침 난 아주 어리석은 질투심

에 불타고 있었어요. 지금은 당신이 그런 여자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만. 당신은 순결하

고 아름답고 선량한 사람이오. 그래서 난 당신을 사랑해요."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그의 말을 부정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데이비드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데이비드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깨를 꼭 쥐며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이 없다면 내 가게는 어떻게 되겠소?"

무심코 내뱉은 그 말 한마디에 애비는 다시 한 번 의구심을 느꼈다. 자신을 아내로서 원하기

보다는 살 집과 쓸만한 일꾼이 생긴다는 이점 때문에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데이비드, 당신이 청혼을 해주어서 난 마음이 아주 뿌듯해요. 그렇지만 하룻밤만이라도 생

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는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이마에 작별 키스를 했다. 그리고

우산꽂이 옆에 그녀를 세워 둔 채 돌아갔다. 오랫동안 그녀는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눈

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이를 상기했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뻣뻣해 오는 등을 문질렀다

. 현관밖 베란다에 떨어져 있는 끈 뭉치를 주워 기계적으로 감으며 그녀는 허청허청 침실로

걸어갔다. 계속해서 끈을 감으며, 그녀는 제임스 허드슨이 떠나던 날 제시가 앉아 있던 창가

로 다가갔다. 바느질 바구니에 끈 뭉치를 던져 넣으며, 그녀는 돼지 오줌보를 장난스레 실로

칭칭 동여매던 제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의 기다란 손가락과

거무스름한 피부, 부드러운 손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서 청혼하기 하루 전날에야 메마르기

짝이 없는 입맞춤을 하면서 엉거주춤 몸을 빼던 데이비드를 생각했다.

그녀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손

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도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릴 수가 있었다. 데이비드 멜처는 점잖고 정직

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점잖고 정직하게 그녀를 대할 사람이라는 것을 애비게일은 인

정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그녀도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면 그뿐이었다.

데이비드의 순진성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그녀가 처녀인지 아닌지 알아내지도 못할 것이라

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라도 그가 알아차린다면, 오래 전 약혼자였던 리처드였다고 말하리라

. 데이비드에게 죄책감이 일었지만, 그를 위해서도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그가 더 이상 마음

의 상처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이므로.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은 한 번뿐이었다고 위로

하면서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애비가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데이비드는 부드럽게, 아니 메마르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 그의 가벼운 포옹을 받으며 그녀는 자신의 결심에 안도감을 느꼈다. 예상밖으로 데이비드

는 자신의 가슴에 애비를 가만히 품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그녀의 집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애비게일, 우린 여기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 거요."

그는 애비의 관자놀이 근처에 속삭였다.

"당신은 드디어 뿌리를 내리게 되겠군요."

"그래요, 당신에게 감사하오."

제시 더프레인에게도 고마워 하세요,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말은 다르게 나왔다.

"여기 스튜어트 정크션 주민들에게도요."

"사람들은 우리가 결혼하리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거요."

"특히 독립기념일 이후로 그렇게 믿게 되었죠."

그는 포옹을 풀면서 어린애처럼 미소를 지었다.

"언제 발표를 하는 게 좋겠소?"

그녀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목요신문에 내는 게 어떨까요? 당신과 내 이름을 연결하기시작한 사람이 바로 라일리 씨잖

아요. 그 사람에게 끝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기회도 주는 게 좋겠죠?"

목요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이랬다.

애비게일 매켄지 양과 데이비드 멜처 씨는 1879년 10월 20일 스튜어트 정크션에 있는 교회에

서 화촉을 밝히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이 마을 토박이인 매켄지 양은 작고한 앤드루 매켄지

와 마사 매켄지의 외동딸이다.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출신인 멜처 씨는 하이스타일 제화

상사의 순회세일즈맨으로 지난 몇 년간 이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고 한다. 매켄지 양

과 멜처 씨는 결혼과 함께 멜처 구두샵을 열 예정이다. 가게는 중심가의 남쪽 끝으로, 퍼킨

스 말 보관소 근처에 짓고 있는 중이다. 가게는 신혼 부부가 콜로라도 온천에서 2주간의 신

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로 개업할 예정이다.

첫서리가 내렸다. 언덕을 뒤덮고 있는 사시나무와 포플러가 노란빛으로 물이 들었다. 아침이

면 흰 서리로 덮여진 마차 바퀴자국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저녁 노을의 빛깔도 주황색에서

점점 보라빛이 늘어났다. 머지 않아 겨울의 찬 숨결이 닥치게 될 것이라는 예고였다. 철새들

은 떠나가고 텃새들만 남았다. 날씨가 점점 더 차가워지면서 산속의 나뭇잎들이 먼저 떨어져

내려 대지를 덮었다.

애비게일의 집과 데이비드의 가게에는 그들의 약혼을 축하하려는 이웃들로 북새통을 이루었

다.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애비게일은 데이비드의 구혼을 받아들이기를 잘했다고 생

각했다.

이제 데이비드와 함께 있는 것은 아주 스스럼없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상과 기호와 목표가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참

으로 성실한 구혼자였고, 무슨 일에든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그녀를 존중해 주었다. 그

의 입맞춤도 조금은 대담해져서 그녀를 기쁘게 했지만, 그녀를 존중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정

도를 넘어서는 행동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그의 말 더듬는 버릇

도 점차로 고쳐졌다. 애비는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을 편하게 느낀다는 점이 좋았다.

데이비드와 애비게일은 거의 매일을 가게에서 함께 보냈다. 겨울에 땔 장작을 쌓고, 선반을

짜고, 창문에 커튼을 매달고, 참나무 등치를 들여오고, 주문한 상품이 도착하면 포장을 풀었

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일했고,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마을에서 열리는 모임에는 부부의 자

격으로 나란히 참석했다. 마을 사람들은 가게 앞을 지나칠 때면 늘 일부러 들러 인사를 건네

거나 일손이 필요한지 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 사람처럼 잘 어울리는 커플은 보지 못했

다고 입을 모았다. 천상배필이라는 것이었다.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애비게일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여전히 가게의 개업 준비를 위해

데이비드를 도우면서도, 모든 결혼 준비를 혼자서 척척 해치웠다. 할 일은 태산같이 많았다

. 그녀는 아이보리색 실크로 만들어진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기로 했지만, 워낙 오래된

물건이라 손볼 곳이 적지 않았다. 레이스 베일은 보존 상태가 완벽했다. 하지만 머리 장식에

매달린 진주는 수선을 위해 덴버의 보석상으로 보내야 했다. 애비를 위해 데이비드는 특별

히 하얀색 새틴으로 만들어진 하이힐을 주문했다. 그녀는 진주 화관과 새 구두가 도착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사진을 찍어서 데이

비드에게 결혼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덴버에 사는, 데이먼 스미스라는 사진 작가에

게 사진 촬영을 의뢰했다. 결혼 피로연은 집에서 열 예정이었으므로 미리 쿠키와 소형 케이

크를 구워 얼려 놓기도 했다. 가게에는 작은 무쇠 난로가 놓여졌고, 그녀의 계획대로 언제나

커피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애비게일은 시간을 쪼개서 결혼과 가게 개점을 함께 준비하느

라 눈코 뜰 새 없는 자신을 행복하게 여겼다.

가게는 예상대로 아름답게 살아나고 있었다. 그곳이야말로 애비게일과 데이비드가 진실로 가

까워졌다는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가게 안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면 데이비드가 느닷없이

그녀의 입술을 훔치기도 했다. 애비게일은 다가오는 결혼식과 신혼 여행을 조바심 치며 기다

렸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자제심도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

람들이 수시로 가게에 드나들었으므로 두 사람은 자꾸만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

다 그는 단단한 자신의 껍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주홍색 커튼과 엮어 짠 깔개, 푹신한 쿠션이 대어진 의자가 놓인 가게 분위기는 그녀가 상상

한 대로 밝고 따뜻했다. 난롯가에 둥글게 놓여진 의자는 손님들에게 쉬었다. 가라는 손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향긋한 나무 냄새가 커피 냄새, 가죽 냄새, 신선한 왁스 냄새와 어우러

져 아늑한 느낌에 몫을 더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가게를 아주 좋아했고, 난로 주변에는 언제

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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