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9화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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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게일은 같이 가자는 멜처의 제의를 승낙했지만, 헤이크 초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함

께 참여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처럼 명목상 독립기념일 축제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소란스레 술을 마시고 작은 소동도 일어나긴 하지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휴일이었다. 매

년 해왔던 대로 읍장의 지루한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아이들은 깃발을 흔들어 댔다. DAR(독

립전쟁 참가자의 자손들로 조직된 부인 애국 단체)에서 기증한 찐콩 요리만큼이나 맥주도 넘

쳐났다. DAR회원들의 악명 높은 콩요리의 엄청난 양에 대한 농담은 1776년까지 거슬러 올라

갔다. 이 요리를 영국군에게 먹였다면 7년이나 계속되었던 전쟁을 단번에 종식시켰을 것이라

는 등의 우스개소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헤이크 초원은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초원옆으로 럼크릭 샛강이 흐르고 있

었다. 산등성이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이 강에는 통나무 타기 경기를 위해 마련해 놓은 큰

통나무들이 등등 떠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10시 캠프 파이어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애

비게일은 유일하게 참가하는 행사인 바구니 경매에 손수 만든 음식 바구니를 제출했다. 그리

고 다른 사람들처럼 경매할 장소가 잘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벌써 11시

였다.

애비게일은 데이지꽃이 장식된 모자에 비둘기색 드레스를 입고, 드레스에 어울리는 간단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갈색 정장에 줄무늬 타이 차림의 데이비드 멜처가 무덥게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늘에 앉아 사르샤 음료를 홀짝였다.

"맥주는 마시지 않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 맛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하지만 이런 날에는 사람들 모두 맥주를 마셔요. 자기 주량에 넘치는 양을 마시는 남자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오늘은 아무리 마셔도 관대하게 넘어가는 독립기념일이잖아요. 저

기, 디긴스 씨를 보세요! 파란 셔츠를 입고 자기 몸의 두 배나 되는 벌목꾼에게 도전하는 사

람 말이에요. 술기운이 없었다면 저렇게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벌목꾼에게 감히 도전하

지 못했을 거예요."

그들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겠다고 벼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

내 그 두 사람이 일어서자 작은 디긴스 씨의 손이 몸집이 큰 벌목꾼의 허리에서 미끄러졌다.

주위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디긴즈 씨는 큰소리를 떵떵 쳤다.

"맥주와 내가 당신을 멋지게 이겨 보겠소."

벌목꾼이 외쳤다.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면, 한번 해보시지!"

하지만 디긴스 씨가 시도도 하기 전에 벌목꾼은 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신부를 안고 문지

방을 넘어가는 신랑처럼 과장된 폼으로 맥주 드럼통을 넘었다. 또다시 구경꾼들의 웃음이 터

져나왔다.

애비게일과 멜처도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7월 4일마다 마을 사람들로 이 초원이 가득 메워지죠."

애비게일이 재킷의 단추를 끄르며 말했다. 더운 여름의 열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스튜어트 정크션에 머물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어요. 그리고 이곳 사람들도 저를 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당신이 벌이려는 새 사업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될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성공할 수 있을까요?"

기뻐하는 표정이 꾸밈없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신발보다 필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세요? 봐요, 저 사람들 발을 보세요."

그녀는 사람들이 저마다 피크닉 바구니를 풀어 놓고 앉아 있는 풀밭을 둘러보았다. 큰 나무

아래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미식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끝이 말려 올라간 부

츠를 신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엄마가 그루터기에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소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엄마는 굽이 심하게 닳은 옥스퍼드신을 신고 있었다.

"신고 있는 신발들이 심하게 낡았잖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당신

가게로 몰려가서 새 신발을 살 거예요."

그는 그녀의 말대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때 몸집이 거대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좀전에 레슬링을 했던 벌목뿐 차림인, 검은 멜빵 바지와 빨간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멜빵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아, 멜처 씨, 당신을 찾고 있었소!"

그는 털이 무성한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마이클 모뉴가 내 이름이오. 당신이 목재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필요한

목재를 구해 줄 수 있을 거요. 맥주를 가지고 왔으니 툭 터놓고 얘기나 나눕시다."

멜처의 손에 맥주 한 잔이 들려졌다.

호감을 주는 인상의 싹싹한 벌목꾼이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실례가 안 되었으면 좋겠군요. 잠시 나눌 사업 얘기가 있어서요. 곧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

그는 커다란 팔을 멜처의 어깨에 두르고, 사람들의 무리로 사라졌다.

"저쪽으로 갑시다, 멜처 씨.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소."

애비게일은,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권하는 맥주를 마지못해 받아 마시는 멜처의 모습을 바

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맥주를 마시는 행위가 아니었다. 남자들 사이에선 동지애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그들은 금새 손에 들린 맥주잔도 잊고 사업얘기에만 열중했다. 이윽고

합의점에 도달한 듯 맥주잔이 다시 높이 들려지고, 사람들이 흡족한 표정으로 맥주를 꿀꺽

꿀꺽 마셔 댔다. 데이비드도 함께.

빨간 체크 무늬 남방과 하얀 비지니스 셔츠, 그리고 노란 유니폼들 사이에서 멜처의 갈색 정

장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속에 새로운 무리들이 맥주를 가

지고 다시 합세했다. 그의 시선이 풀밭으로 향하더니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녀를 홀로 두어서 미안하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신경쓰

지 말라는 뜻으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한가롭게 주변에서 일

어나는 소동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데이비드는 사업 얘기를 나누며 사람들과 우의를 다

지고 있었다. 그가 2주일 동안 마을을 돌며 구걸해도 저 정도의 친분 관계는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애비게일은 자루에 다리를 끼워 넣은 채 릴레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롭 넬슨

이 뛰어가다가 그녀를 보고 멈춰섰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안녕, 로버트, 자루 릴레이에 참가할 거니?"

"그럼요."

"행운을 빌게."

오늘은 애비게일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전혀 피클을 씹은 것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고마워요."

소년은 몸을 돌려 뛰어가려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곁눈질로 쳐다

보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니, 로버트?"

"저기, 열차 강도가 있을 때 제가 지푸라기를 가져다 드렸잖아요?"

그녀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젊고 예뻐 보였다.

"그래서?"

"잘 쓰셨나요?"

"그럼, 로버트. 그걸 구해다 줘서 정말 고마웠단다."

"어디에 쓰셨는데요?"

놀랍게도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비밀이라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의 귀에 속

삭였다.

"그 사람에게 수프를 먹였단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자, 빨리 가서 릴레이에 참가해야지."

그러나 로버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놀라움에 입이 벌어져 있었다.

"열차 강도한테 수프를 먹여 주었다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음성이었다.

"롭, 그 사람은 이제 열차 강도가 아니란다."

"아."

로버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하긴 그 사람이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는 걸 봤는데, 정말 강도처럼은 보이지 않았어요."

이번엔 애비게일이 놀라움으로 입을 벌렸다. 그녀는 로버트의 어깨를 돌려 작은 등을 밀며

재촉했다.

"로버트 넬슨, 그 얘기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가는 혼날 줄 알아! 자, 빨리 가거라."

자루 릴레이를 하는 곳으로 소년이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 아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자루가

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소년을 바라보는 애비게일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리고

는 그녀의 어깨가 즐거운 듯 들썩거렸다. 너무나 작은 파자마 바지 차림으로 절룩거리던 제

시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떠올랐다.

"애비게일 양, 뭐가 그리 재미있소?"

"오, 도허티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이들의 자루 릴레이를 보고 있었어요."

"참, 인사가 늦었군. 그 환자들은 당신 간호로 완쾌된 거나 다름없소. 궁지에 몰린 나를 도

와준 셈이지."

"도움이 되어서 기뻐요."

"그리고 그때 내가 그 사람한테 총을 줘서 당신을 애먹인 것 같던데, 미안하게 됐소."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인데요."

그러나 그녀는 의사의 시선을 피해 자루 속에 들어가 뒤뚱거리며 뛰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

았다.

"그렇지, 당신이 적당한 보수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었소."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치료를 지켜본 의사만은 그 돈이 적당한 보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티가 돌아왔다면서요?"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네, 기름칠한 돼지 잡기에 참가했지요. 어제 멜처 씨를 데리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켰다는 말을 들었소. 이 마을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고요?"

"네, 이 마을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오?"

괴상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사는 주머

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조용히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빚지고 있는 사람은 제시 같은데. 사람들은 거의 비열하다 싶을 정도로

그의 기차가 이 마을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구걸했었소. 그런데 그가 다쳐 정신을 잃고 있는

데도 누구 하나 돌보려 하지 않았지. 게다가 따지고 보면 스튜어트 정크션의 거의 모든 경제

활동들이 열차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니오? 우리가 얼마든지 사람을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였지요."

의사는, 애비게일은 보지도 않고 주머니칼을 접더니 불룩한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

고 자루 릴레이를 하는 아이들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언젠가 한 번 그를 찾아가 놀라게 해줄 생각이오."

그는 비틀거리며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녀는 의사가 제시와 마음이 잘 맞았다는 사실을 쉽

게 기억해 냈다.

머릿속에 의사의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든지 사람을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였지요.

"애비게일 양,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갑자기 데이비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기겁을 하며 놀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소."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괜찮아요."

"갑시다. 바구니 경매를 시작했어요. 저런, 너무 햇빛에 오래 앉아 있었나 봐요. 당신 얼굴

이 빨갛게 되었소."

얼굴이 붉어진 게 제시 탓이라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데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에스코트하는 그에게서 희미한 맥주 냄새가

났다. 그는 이따금 몸을 약간 기우뚱했으나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애비게일이 출품한

바구니가 경매에 붙여지고 있었다. 그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75센트!"

누군가가 멜처의 등을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애비게일 양의 바구니에 멜처 씨가 가격을 불렀어요!"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한바탕 지나갔다. 그녀의 뺨이 빨갛게 변했다.

"1달러!"

누군가가 가격을 높여 불렀다.

"1달러 10센트!"

데이비드가 다시 소리쳤다.

"이봐, 생명을 구해 준 아가씨한테 그 정도밖에 못하나? 1달러 20!"

데이비드가 비틀거렸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는 "1달러 25센트!"라고 외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딸꾹질이 끼었다.

"1달러 25헉센트!"

한바탕 웃음소리가 지나갔다.

"누구 이 바구니에 1달러 25헉 센트보다 더 많이 부를 사람 없으십니까?"

경매인이 외쳤다. 다시 웃음소리가 퍼졌고, 애비게일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네, 팔렸습니다!"

주위에서 발을 구르는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일었다. 데이비드는 빙그레 웃고 있기만 했다.

"데이비드, 나가서 받아요!"

사람들은 데이비드가 앞으로 나가서 바구니를 받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애비게

일은 소심한 그가 바구니를 받으러 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

게 손을 내밀고 자랑스럽게 앞장섰다. 그녀의 뺨은 딸기처럼 빨개져 있었다. 그는 사람들 사

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가 애비게일의 바구니를 받아 들고 가격을 지불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다른 바구니 경매로 넘어가 있었다.

그녀는 나무 그늘에 앉아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냈다. 멜처는 옆에 앉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문지르고 있었다.

"애비게일 양, 요, 용서를 구해야겠군요."

그가 딸꾹질을 했다.

"저는 술꾼이 아니에요. 그런데 저 치, 친구들이 자꾸 권해서요. 저 친구들과 사, 사귀면 사

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당황스러웠으나, 술취한 그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제시와 함께

샴페인을 마셨던 밤이 문득 생각났다. 갑자기 멜처에게 화가 치밀었다.

허벅지를 문지르며 그는 가끔 딸꾹질을 해댔다. 그녀는 조용히 음식을 늘어놓았다.

"정말 미안하오. 당신을 그렇게 호, 혼자 남겨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요, 뭔가 먹으면 딸꾹질이 멎을 거예요."

그는 그녀가 건네 준 튀긴 닭고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

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먹으세요. 저 화 안 났어요."

그녀는 그의 술기운을 깨우려고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당신도 알잖소. 난 맥주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가 닭고기를 입에 물고 우물거렸다.

"네, 당신이 그렇게 말했어요. 저도 7월 4일에는 사람들이 기분에 휩쓸린다고 말했잖아요."

"많이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좋은 점도 있었잖아요. 당신은 오늘 통과 의식을 치른 거예요. 봐요, 사람들이 당

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여기에 앉아서 한 말 기억 안 나요? 저 친구들이 맥주를 권했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했소?"

"네, 그들의 일원처럼 말했어요."

"그래, 그럴 거야. 나도 그런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도록 만들었어요. 멋지게 통

과한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

그는 멍청이처럼 계속 반문해 오기만 했다.

"맥주를 사이에 두고 사업적인 기초 발판을 다진 거예요. 술잔을 치켜들 때 그들이 둘도 없

는 친구처럼 느껴지지 않았나요?"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그는 그녀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당신은 정말 이해심이 깊군요, 애비게일 양. 그런데 왜 경매를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당황

스러워 했죠?"

"그 비밀을 알고 싶으세요?"

그녀가 물었다.

"비밀?"

"음, 다른 해에 제 바구니를 샀던 빈레이 씨와 비교되었기 때문이에요."

"본스 빈레이?"

그가 놀라 입을 벌렸다. 입 속의 닭고기 조각이 보였다.

"그가 당신 바구니를 샀소? 비료 상점에서 일하는 담배에 절은 것 같이 누런 이를 가진 사람

말이오?"

정말 우스웠다. 전에는 재미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허리를 꺾고 웃었다.

"정말 재미있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걸 가지고 놀려 댄 사람이 없었어요. 하지만

정말 끔찍했어요. 그와 같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데……. 그는 숭배하듯 나를 내려다보곤

했었죠."

"당신 닭고기 요리도 그랬을 거요."

그는 기름 묻은 손으로 닭고기를 들어 입 안에 넣었다. 그 옆을 프랭크 애드니가 걸어가고

있었다.

"애비게일 양,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드니 씨."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프랭크는 웃고 있는 애비게일이 전과 달리 무척 아름다워

보여서 깜짝 놀랐다. 그는 팔꿈치로 부인을 치며 눈짓을 해 보였다. 그의 부인의 눈빛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놀라움이 담겼다.

애비게일은 애드니 가족이 걸어가는 것을 보며, 불현듯 자신이 이 마을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갖지 못했던 행복한 느낌이었다. 데이비드는 너무나 흡족하고 고마운 마음

에 그녀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단 이틀 만에 그는 스튜어트 정크션의 주민들

과 부드럽게 융화되고 있었다. 모두 그녀의 도움 때문이었다.

"애비게일 양?"

"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닭고기가 맛있군요. 이 겨자 뿌린 계란도요."

그녀를 사랑한다는 그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애비게일은 그 말에 담긴 뜻까지는 알

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재킷을 어디다 벗어 놓았나 보군요."

멜처는 문득 자신이 셔츠와 타이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어디엔가 벗어 놓은 것 같군요. 찾을 수 있겠죠. 당신도 더운데 재킷을 벗지 그래요?"

오랫동안 몸에 익혀 온 보수적인 교육으로, 자신이 재킷을 벗지 못하리란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더웠고, 제시도 그녀에게 경직된 사고 방식이나

언행은 벗어 버리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제시가 얼마나 좋아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무척 덥군요."

그리고 재킷을 벗었다.

"당신 말대로 훨씬 낫군요."

그녀는 식사가 끝나자 음식물들을 치우기 시작했고, 그는 풀위에 누워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 그녀의 무릎을 베고 싶었다.

"내일 벌목을 하는 캠프로 가 봐야 해요. 모뉴에게 목재를 주문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그

벌목 캠프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서……."

"저 너머 산마루 중간쯤에 있어요."

그녀가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산보다는 그녀의 머리칼과 이마를 보고

있었다.

"저와 같이 동행을 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그러마고 대답하고 싶었다.

"내일은 다림질을 해야 해요."

"하지만 하루 종일 걸릴 일이 아니라면, 오후로 미루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녀는 맥주가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는 맥주를 마신 탓인지 말을 더듬지 않고 있었다.

"안 돼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피크닉 바구니를 챙기면서 퉁명스레 응답했다.

명백하게 거절을 당하자 그는 놀란 듯 즉시 일어나 앉았다. 갑자기 퉁명스럽게 구는 그녀의

태도에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전에 제가 당신을 제외하고는 제 사업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었죠. 그래서 그런지

처음처럼 당신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말았군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과조의 말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는 부질없는 그의 희망을 없애야 했다. 그에게서 도

망을 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녀는 속으로 제시를 비난하고 있었다.

멜처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겠다는 듯, 부드럽게 그녀의 의향을 물었다.

"아이스크림을 좀 드시겠어요?"

"네? 아, 네, 먹겠어요."

그는 일어서서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멜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변덕스

런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오는 멜

처의 눈에 그녀가 냉담한 숙녀처럼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시던 퍼니 헤스팅 부인이 신선한 복숭아로 만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애비는 평화를 제의하듯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왜 화가 났는지 살

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멜처에게 미안했다. 그녀가 화를 내고 있는 상대는 제시지 그

가 아니었다.

"멜처 씨, 생각을 해보니 내일 당신과 함께 벌목장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의 얼굴이 즉시 천사처럼 밝아졌다.

"저쪽으로 가서 경기를 구경해요."

그녀의 제안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충실한 애완견처럼 그녀를 따라 나섰다.

애비게일의 아낌없는 후원을 받게 된 멜처는 기분이 좋아져서 사람들이 권하는 맥주를 넙죽

넙죽 받아 마셨다. 애비게일도 미소를 지으며 다른 때와 달리 진심으로 독립기념일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옆구리를 찌르고 눈을 찡긋거리며 변화된 그녀의 모습을

홀깃거리기에 바빴다.

데이비드는 모든 경기에 다 참가했다. 창 던지기, 장대 올라가기, 인디언 레슬링, 심지어 담

배 연기 내뿜기 경기에도. 그는 열심히 경기에 임했지만, 매번 경기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 그러나 그는 짧은 하루 동안에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었다. 절룩거리는 다리 때문에 같

은 팀 참가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데도 사람들은 서로 그를 끼워 주려고 했다.

마지막 경기인 통나무 굴리기는 데이비드에게 무리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 경기에만은

출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 위에 떠 있는 통나무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재빨리 발을

놀려야 하는 경기였다. 선수들이 나무를 굴리다가 중심을 못 잡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

며 물 속에 빠지면, 주위는 온통 웃음 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뒤엎고 통나무 굴

리기 경기에도 참가했다. 그는 절룩거리며 통나무에 올라서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통나무를 붙잡았다. 그러나 곧 기우뚱하더니 통나무를 제대로 굴려 보지도 못하고 강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와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애비게일은 마을 여자들과 함께 파이 그릇과 포크, 잔들을 수거하고 피크닉 바구니를 주인에

게 돌려주었다.

그녀 앞으로 한 무더기의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속에서 빨간 체크 셔츠를 입은 마이

클 모뉴가 외쳤다.

"애비게일 양! 발가락에 빌어먹을 총상을 입었지만, 이 사람 정말 최고요!"

여자들은 감히 애비게일 앞에서 '빌어먹을'이라는 상소리를 내뱉은 남자를 휘둥그레진 눈으

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된 호통이 내려치리라는 예상과 달리, 애비게일은 남자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데이비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온통 젖은 옷에 머리는 헝클어지

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해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떠들어대거나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이보게 짐, 새로 온 저 친구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짐이라는 사람이 말을 건넨 남자와 목소리 키우기 내기라도 하듯 천둥 같은 소리로 답변했다

"그럼, 끝내주지. 우리 모두 이 친구를 데리고 온 애비게일 양에게 감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

한바탕 왁자지껄한 소리가 이어지고, 한 술취한 남자가 애비게일에게 말했다.

"애비게일 양, 당신에게 이 사람을 돌려주려고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다 놓을까요?"

"나 혼자 걸을 수 있네!"

데이비드가 한 남자의 어깨를 밀치며 외쳤다. 그러나 걸음을 떼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주저앉

아 버렸다. 주위의 남자들이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자, 저기 애비게일 양 옆에다 이 친구를 내려놓자구."

그러나 멜처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애비게일 앞에 다가섰으나 갑자기 젤리처럼 한 쪽 다리가

꺾이더니 기우뚱하고 몸이 기울어졌다. 순간, 그는 낙지처럼 손을 허우적거리더니 옆에 있던

애비게일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함께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이었다. 애비게일은 가장 숙녀답지 못한 자세로 팔다리를 벌린 채 멜처 위에 쓰러져 있었다.

"오!"

사람들의 놀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데이비드만은 즐겁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눈을 뜨

니 눈앞에 애비게일의 얼굴이 보였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왜 자신의 몸 위에 쓰러져 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두 팔로 그녀를 두르더니 그녀에게 키스했다. 열렬한 키스였다.

애비게일은 그의 팔이 단단히 조여 오고 야릇한 미소를 멀 때까지만 해도, 그가 키스를 하리

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에게서는 담배와 주스, 맥주, 그리고 땀 냄새와 체리파이 냄새

가 뒤범벅이 되어 풍겨 왔다.

갑자기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 소리가 들렸다. 여자들까지도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휘파람을 불고, 아이들은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얼굴을 들

이밀었다.

"여, 데이비드, 축하하네! "

애비게일은 얼른 그를 밀치고 몸을 옆으로 굴렸다.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몸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건 멜처의 키스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

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어진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그녀는 주위의 남자들을 바라보

았다.

"거기에 계속 서서 하루 종일 박수만 치고 있을 작정인가요? 일어날 수 있게 저를 좀 부축해

주세요."

한바탕 다시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웃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야 그들은 그녀와 멜처를

일으켜 주었다. 여자들은 황급히 애비게일의 옷에서 흙을 털어 주며 멍청한 남편들을 나무

랐다. 그러나 그들도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애비게일의 완벽한 짝이었다.

주민들 모두 잘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부터 데이비드

멜처와 애비게일 매켄지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커플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드디어 독신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애비게일도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아침과는 확연한 차이였다. 그녀는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이 마을에서 소외되어 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오늘 그녀는 부인들

의 바느질 모임에 들어오라는 권유도 받았던 것이다.

그녀는 불빛을 쬐며 데이비드 옆에 앉아 있었다. 맑은 여름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캠프 파

이어와 간간히 터지는 불꽃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다, 당신에게 키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짱하게 정신이 되돌아왔는지 그는 다시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가 불빛에 화사해진 얼굴

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내가 왜, 왜 그랬는지 모, 모르겠소. 너무 많이 수, 술을 마신 것 같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랬잖아요."

"화, 화나지 않았소?"

"네."

그가 그녀의 손에 닿을 때까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옆에선 불꽃이 넘실거렸고, 그녀는 미

소를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비드의 손가락은 따스했다. 그는 그녀를 숭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오늘은 정말

즐겁고 흡족한 날이었다.

마차를 타고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초 더미 옆에 앉아 있었다.

애비게일의 손 위에 놓인 데이비드의 손은 그녀의 치마폭에 가려져 있었다. 땀이 촉촉하게

배어 나왔기 때문에 그는 잠시 손을 떼어 허벅지에 문지르고는 다시 치마 밑에 놓여 있는 그

녀의 손을 잡았다. 소심한 그의 행동에 그녀는 거침없었던 제시가 생각났다. 그를 옆에 두고

제시를 생각하다니……. 데이비드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나란히 그녀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

렸다. 데이비드가 다시 키스를 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

라도 한 듯 멈춰 서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

데이비드가 힘들게 말을 꺼냈지만, 항상 그렇듯이 이어지지 않았다. 애비게일은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에게 느긋하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는 제시가 아니었다.

"고마웠어요."

그가 말을 마치고 손을 내려놓았다. 실망감이 밀려왔다. 넬슨의 가족이 도착해 집으로 들어

가고 있었다.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애비게일 양. 그 이상이지요. 당신 덕분에 난 스튜어트 정크션의 일원이 되었소.

조용한 밤이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처럼 만족감이 애비게일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당신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는걸요."

"네?"

그녀는 맞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여기에 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 마을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갖지 못했어요. 그런데

오늘 당신 덕분에 그걸 느끼게 되었어요."

그가 다시 덥석 손을 잡았다.

"나, 난 드디어 내, 내 집을 찾은 기분이오."

"네, 찾으신 거예요.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좋아해요."

"모두요?"

침을 꿀꺽 삼키며 그가 웃었다.

"네, 모두요."

그는 한참 동안 그녀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가 다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은 제시의 것보다 작았다. 그녀자신도 그 두 사람을 비교하는데 이제 지쳐 있었다.

키스를 해줘요. 키스를 해서 내게서 제시를 몰아내 줘요.

그러나 술기운이 없어진 지금, 그는 그런 용기를 긁어 모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얼룩이 묻은 지저분한 모습에 담배와 술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내일 벌목장까지 함께 가 주실 거죠?"

그가 물었다.

"그럼요. 빨리 시작할 수록 좋잖아요. 그러면 구두 가게 개업도 빨라질 거예요."

"그래요."

그가 손을 놓았다. 또다시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가 계속 손을 잡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제시였다면, 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제시, 제발 우리에게서 떨어져 줘요.

"굉장한 날이었어요."

그녀는 이 남자에게 키스를 받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저

도 그랬습니다."라고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오늘 밤도 제시

의 생각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 휘적휘적 그네로 걸어가 앉았다. 절룩거리는 불규칙한 멜처

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의 걸음 소리는 그네의 삐그덕거리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녀는 최면술에 걸린 듯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았다. 제시의 검은 콧수염이 보이는 듯했다.

데이비드. 제시. 데이비드. 제시.

데이비드, 왜 내게 키스를 하지 않는 거죠?

제시, 왜 내게 키스를 했나요?

데이비드, 내가 허락을 할 수 있게 해줘요.

제시, 왜 내가 당신에게 허락을 했을까요?

데이비드, 제시에 대한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시, 왜 그날 밤 다른 신사들처럼

날 내 방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나요? 왜 나는 숙녀답게 처신을 못한 걸까? 나에겐 고통밖에

없었는데.

데이비드, 내가 원하던 사람은 당신 같은 사람인데, 왜 자꾸 제시와 비교하게 되나요? 제시

를 기준으로 당신을 보면 왜 처음부터 끝까지 결점투성이인 것처럼 보일까요?

데이비드, 데이비드, 미안해요. 왜 돌아온다고 말해 주지 않았나요? 제시와의 일을 알게 되

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신의 우유부단함과 머뭇거림, 심지어 예의 바른 태도까지도 때론

못마땅하게 여겨져요.

그런데 제시는 독선적인 데다 눈을 씻고 봐도 신사다운 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만 모아 놓은 것처럼…….

오, 최소한, 최소한…….

그녀는 이미 망가진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그네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삐그덕거렸다. 잊고 싶은 기억들이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왔다. 셔

츠 단추를 다 풀어 헤친 모습으로 그녀에게 팔을 두르고 그네에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한

쪽 콧수염이 말려 올라가며 웃음짓던 그의 모습이, 그녀의 몸을 오르내리던 그의 손이, 그리

고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

의 가슴은 단단해졌다.

제시 더프레인, 내 인생에서 썩 꺼져 버려요!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내 그네에서, 내 침대에서 당장 떠나요! 제발 평화롭게 살도록 날 내버려 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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