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음날 아침, 잠이 깬 애비는 잠시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제시에게 해줄 아침 식사메뉴를 생각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몸을 벌
떡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1층 자신의 침실에 돌아와 있었고, 혼자였다.
그녀는 아침 내내 침실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말끔히 닦아내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시트를 새하얗게 빨았고, 그의 손자욱이 남아 있는 침대 머리맡의 청동 장
식은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았다. 창가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쿠션도 보푸라기가 일 정도로
박박 세탁을 했다. 먼지 한 톨도 남김없이 소독을 한 것처럼 침실을 청소했으나, 그 방에 남
아 있는 그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었다. 이제 흔적이나 손때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가 만
졌던 물건을 볼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의 모습이 살아났다.
청소를 다 끝냈는데도 아직 데이비드가 도착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때 현관 앞
에 뭔가가 툭하고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급사가 스튜어트 정크션 마을 신문을 놓
고가는 소리였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제시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
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무심코 우산꽂이 위의 거울을 보며 습관처럼 뺨을 잡아당겼다. 반라의 모습
으로 문가에 서서 놀리듯 "탄탄하오?" 하고 묻던 제시가 생각났다. 그녀는 거울에서 몸을 홱
돌리며 신문을 요란스럽게 펼쳤다.
센트럴 시티에 있는 유명한 텔러 오페라하우스에 로타 크랩트리가 나타났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 기사는 그녀가 위대한 매제스키를 따라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어떤 남작이 유명한 콜로라도 온천지에 맨션을 짓기로 했다는 기사도 보였다. 그 온천은 미
네랄이 풍부해서 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그리고 고소된 열차 강도가…….
애비게일의 두 눈이 커지고, 입가에 침이 말랐다.
고소된 열차 강도가 철도 회사 사장으로 판명나다.
화요일 오후 스튜어트역 사무실에서 지난번 열차 강도 사건 보상 문제로 회합이 열렸다. 중
개인들은 협상을…….
제시 더프레인에 관한 기사였다. 그녀는 빅토리아풍의 거실한가운데에서 손으로 목을 만지며
서 있었다. 제시가 철도 회사사장이라니! 그렇다면 난 철도 주인에게 열차 강도라고 비난한
거야! 자신이 했던 심한 행동들이 떠오르자 그녀는 공포와 함께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 그것도 철도 주인에게!
잠시 후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부드러운 뺨이 위로 밀려 올라갈 정도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적막한 집 안을 꿰뚫는 괴성이었다. 그 웃음소리 속에 서글픈 기운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괴상한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흐릿해진 눈으로 신문을 응시했다. 제임
스 허드슨이 왔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아니, 그녀는 진실을 인정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신문을 제대로 들고 뚫어져라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 기사는 서두에 회합에 나온 네 명의 옷차림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제임스 허드슨은 RM
R 철도 회사의 대표로, 제시 더프레인은 사진사로 위장하고 사업을 감독하는 그의 숨겨진 파
트너로 적혀 있었다.
회합 도중에 더프레인과 멜처 사이에 불꽃이 튈 정도로 충돌이 있었는데, 그것은 애비게일
매켄지에 관련된 부분에서였다. 애비게일은 스튜어트 정크션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으로,
더프레인과 멜처를 간호해 준 사람이다.
기사를 다 읽은 그녀는 씩씩거리며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하고 있었다. 이렇듯 화를 내는 그
녀를 보면 가장 좋아할 사람이 제시 더프레인일 것이다.
하필이면 그 중요한 시기에 데이비드 멜처가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향해 내팽개치듯 신문을 던졌다.
"애, 애비게일 양,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가 말을 더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분노를 억제하고 있음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거나 읽고 난 후에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죠! 난 사람들에게 정숙한 숙녀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어요. 당신과 더프레인 씨가 떠난 후에도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할 사람이라구요. 내 얘
기가 수다스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들이 떠난 후에도 난
이 신문 때문에 가장 흥미로운 가십거리의 대상이 될 거라구요!"
당황한 멜처는 조용히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신문에는 그가 편집자에게 말한 것보다 더 많
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멜처는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애비게일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설명할 길이 난감했다. 그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을 더듬거리며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기, 그건 뭔가 잘못된……. 저기, 나와 편집자, 그리고 더프레인은…… 당신에 관한 얘,
얘기를 누설하지 않기로 야, 약속했는데……."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뭐라구요?"
그녀가 추궁했다.
"손해 배상을 책정하기 위해 모인 회합에서 왜 내 얘기가 나온 거죠?"
그는 어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던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는 것
을 뒤늦게 깨달았다.
"난 그가 다, 당신에게 사과를 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다, 당신에게 한 무, 무례
한 행동에 대해……."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며 블라우스의 앞섶을 여몄다.
"그가 저에게 사과를 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이로운 게 뭐죠?"
"애비게일 양, 그를 두둔하고 있는 겁니까? 난 다,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서라구요? 신문에 두 남자가 적의를 뿜게 된 게 나때문이라고 실렸는데도요. 마을
사람들이 절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리고 왜 어제 저녁에 그가 철도 회사사장이라고 말하
지 않았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에 다소 침착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달라지나요?"
그녀는 그런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가 돈을 지불한 당사자라고 말했어야 했어요."
"그는 나에게 보상금을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소. 바로 그가 날 쏜 당사자란 말이오."
"하지만 그는 열차 강도가 아니잖아요. 그건 큰 차이가 있어요."
"당신은 그를 두둔하고 있소!"
데이비드 멜처가 비난을 퍼부었다.
"그렇지 않아요! 나 자신을 두들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언성을 점점 높이더니 급기야 생선 장사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시에게 하던 대로 멜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멜처가 제시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전율이 일었다. 자신은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제시가
쓸데없는 말로 자신의 신경을 긁어 대며 싸움을 걸던 때처럼.
그러나 데이비드는 제시 더프레인이 아니었다. 실제로 데이비드는 그녀가 숙녀답지 못하게
소리를 치는 모습에 너무 놀랐다. 그의 얼굴빛이 변해 갔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싸우고 있는 거요?"
그녀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모으고 조용히 의자
에 앉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그가 알고 있던 상냥한 애비게일 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재빠른 변신에 놀라
워하며 멜처는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
"나도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미안하지도 않았고, 왜 소리를 질렀는
지도 알고 있었다. 속이 뒤집힐 정도로 대판 싸움을 하고 나면 기분이 맑아지는 제시 더프레
인의 방식에 그녀는 어느새 길들어져 있었다.
데이비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렇게 싸울 가치도 없는 사람이오. 다시는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 맙시다."
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동안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낯선 타인처럼 앉아 있기만 했
다.
"당신에게 할말이 있어요. 사실은 저 문을 들어서자마자 할 생각이었는데, 저 신문 때문에
기회가 없었소."
"무슨 말인데요?"
그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소년처럼 웃었다.
"스튜어트 정크션에 머물 생각이에요. 철도 회사에서 돈을 보내 주면 바로 여기에 구두샵을
열 겁니다."
그녀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후회와 함께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도 그들은 공허한 관
계일 뿐이었다. 그건 그녀가 제시 더프레인에게 처녀딱지를 떼어 달라고 간청한 순간부터 이
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것도 멜처가 오기 바로 전날! 게다가 그는 이제 부자가 되어 바로 그
녀의 코앞에 상점을 열어 정착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제시 더프레인이 끝까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정말 굴욕적인 타이밍이었다. 그는 데이비
드에게 결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과 동시에 그녀에게선 그것을 앗아 갔다.
데이비드 멜처는 상처받은 표정의 애비게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의 얼굴엔 놀라
움이 스치더니 이내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곧 죄책감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러 번 감정의 변화를 보이더니 마침내 손을 입술
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오, 안 돼!"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낙담한 표정이 드리워졌다.
"애비게일 양, 당신이 기뻐할 줄 알았어요."
"아, 그럼요, 그럼요."
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정말 기뻐요. 당신은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걸요
."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는 항상 정착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정착할 만한 재산도 없었고, 마땅한 장
소도 찾지 못했었지요."
그가 조심스럽게 애비게일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손에 넣었어요. 오후를 저와 함께 보내주시겠습니까? 상점을 차릴 만
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중이거든요. 될 수 있는 대로 큰 도로변이었으면 좋겠는데……. 당신
은 이곳 토박이니까 함께 다녀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마을 사람들도
호의를 가지고 절 대할 테구요."
그의 음성이 간청조로 바뀌었다.
"저와 같이 가요. 우리가 그들 눈앞에 당당하게 나서면 사람들도 뒤에서 신문에 실린 가십거
리들을 수군대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시선을 떨구었다.
"당신은 이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어요. 신문 기사가 이미 알려졌는데, 우리가
같이 당신 사업일을 보러 다니면 오히려 더 많은 가십거리를 낳게 될 거예요."
"그런 생각은 미처 못했어요. 당신이 옳겠지요."
그와 함께 설계할 수 있는 미래는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그가 희망을 갖고 다가서지 못하도
록 애초에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그
녀에게서 거절의 말을 들은 그는 너무나 침울해 보였다. 사실 그녀가 도와준다면 사업을 준
비하는 데 여간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그는 외지인이었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면……."
그녀가 미적거리며 말을 늘리고 있었다.
"우리가 단순히 사업상 파트너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면 가십거리가 생길 여지가 없을지도 모
르겠군요."
갑자기 그는 희망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젊고 매력적
이었다.
"그럼 같이 가는 겁니까? 오늘 저를 도와 주시는 건가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하지만 단순한 안내인으로서예요."
"오, 물론이지요. 당연합니다."
그가 벙글거리며 동의했다.
데이비드 멜처는 하루 종일 활기찬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멜처를 만나면서, 그가 가
끔 말을 더듬거리는 동부에서 온 구두 행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능수능란하게 말을
하는 애비게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어디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소심한 그에게서 배짱이 두둑한 진취적인 면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그와는 사업상 파트너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 그녀가 이렇게 활발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
은 그녀를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속의 사람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녀가 항상 빈틈을 보이지
않고 깎듯이 사람들에게 예의를 차렸기 때문에,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즐거움을 도모하는 평
범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신문에 실린 두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
른다.
그녀와 데이비드는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7월 4일 독립기념일 축제에 오라는 제의를 수도
없이 받았다. 사실 어디를 가도 임대 계약이나 목재 가격보다는 내일 있을 축제 얘기가 주
를 이루고 있었다.
애비게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 사람을 평범한 관계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 어
디를 가도 예사롭지 않은 시선들이 그들을 좇았다. 애비게일과 데이비드가 가격을 흥정하려
말을 꺼내도, 그들은 "내일 헤이크 초원으로 오실 거죠? 두 분이 꼭 같이 오세요"라고 대답
하기 일쑤였다.
무뚝뚝한 사람들은, "내일은 바구니 경매와 기름칠한 돼지잡기, 통나무 굴리기, 자루 릴레이
등 많은 행사가 펼쳐진답니다. 멜처 씨, 당신은 이 마을 주민이 되시려고 하니 꼭 참석해서
같이 어울리면 주민들과도 훨씬 가까워질 겁니다."라고 돌려서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명령하듯 말하기도 했다.
"애비게일 양과 같이 와요. 애벌리의 상점 앞에서 10시 15분경에 마차가 출발합니다."
뇌물로 유혹하기도 했다.
"이처럼 더운 여름에 스튜어트 정크션에서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죠.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그들은 진심으로 애비게일이 이 멋쟁이 신사와 함께 축제에 참석하길 바라고 있었다. 물론
멜처가 많은 돈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애비게일
은 거의 빈털털이였다. 두 사람을 간호한 대가로 1,000달러를 받기는 했지만, 그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은 그녀가 멜처와 결혼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멜처를 대하는
애비게일의 형식적인 태도도 내일이 되면 달라질 거라고 조심스럽게 속닥거리기도 했다. 사
람들은 자신들이 연애를 하는 것처럼 가슴을 두근거리며 내일이 빨리 오기를 고대했다.
애비게일의 집 앞에 멈춰 선 멜처는 매우 흡족했다. 가격을 잘 정하면 닐스 놀드키스트가 소
유하고 있는 마구간과 가죽 상점을 임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에 있는 것은 창고로 쓰고
도로변에 있는 건물은 가게로 꾸미면 적당할 것 같았다. 애비게일덕분에 우려했던 일이 쉽게
풀리자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그를 그네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단순히 고맙다는 말 갖고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군요."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당신이 옳았어요. 당신 혼자서 마을을 돌아다녔으면 힘드셨을 거예
요."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마을 사람들이 당신 말이라면 모두 굽히는 것 같았어요."
그녀의 인생에 제시가 나타나지 않았었다면 도저히 이런 대답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가 카우보이 기질이 있어서 사람들이 저를 두려워하고 있나봐요."
점잖치 못한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해 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
렇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놓고 나니 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가당찮은 말씀입니다. 당신 같은 숙녀분께서요? 당신은, 적극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성격은 숙녀다움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숙녀들은 부끄러워하며 소극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제시는 그녀에게 헛된 자기 망상에서 벗
어나라고 가르쳤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저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인 걸요. 하지만 오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리어 득이 되었으니, 불평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 준 건 그녀의
빳빳한 기질 때문이었지만, 데이비드를 환영한 건 그에 대한 순수한 호감 때문이었다.
"아직도 결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구두 목록을 살펴보고, 큰길가
를 구두로 뒤덮을 정도로 많은 구두를 주문해야겠어요. 장식장과 차양, 창문 유리도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목재들도 알아보고……. 아참, 겨울을 대비해서 동부에서 스토브도 주문
해야겠군요. 그리고……."
그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어린아이마냥 정신없이 떠들어 댄 게 창피했다.
그러나 그녀는 청사진을 세우는 데 열중한 그의 모습을 즐기며 웃고 있었다.
"계획대로 차근차근 해나갈 겁니다."
그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네, 그러실 거예요. 앞으로 더 큰일들이 생길 텐데, 그 많은 일을 혼자서 처리하시려면 열
정 없이는 불가능하죠, 하지만 잘해 내실 거예요."
그러나 그는 갑자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당신을 제외하고 사업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염
치없는 부탁인 건 알지만, 오늘처럼 계속 저를 도와 주세요."
그들은 구두샵을 여는 문제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시종일관 활기차고
흥분된 모습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제시와 그를 비교하고 있었다. 만약 제시였다면 고함을 치면서 그녀에게 도와
달라고 강요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함께 추, 축제에 참가할 걸로 미, 믿고 있던데요.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그가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박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애써 떨쳐 냈다. 그러나 그
날 오후 내내 그는 제시와 비교되는 행동만 하고 있었다.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기회지요. 괜찮아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항상
독립기념일 축제에는 참석했는걸요. 이 마을 주민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예요."
"그럼, 에헴, 우린 같이 갈 수 있겠군요. 다,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제시가 데이비드를 밀크토스트라고 불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얼른 머리를 흔들어 데
이비드에게 불리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오, 물론요. 같이 가겠어요."
그가 일어서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녀는 그가 돌아가는 것을 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
다.
"헤이크 초원이 어디 있죠?"
"개울이 흐르고 있는 마을 북쪽에 있어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애벌리 홈즈 씨 상점에서 출
발하니까 그곳으로 가면 마차를 탈 수 있을 거예요."
"10시 15분에요?"
"네."
"그럼, 제가 여, 여기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준비하고 있을게요."
더듬거리는 그의 말투가 짜증스러웠다.
"이젠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저기, 제가……."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키스하고 싶지만, 감히 실행에 옮
기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등을 돌려 걷기 시작
했다. 떠나가는 데이비드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또 제시와 그를 비교하고 있었다. 왜 다
가와서 날 잡고 키스하지 못하는 걸까? 갑자기 충격이 몰려왔다. 그녀는 흠없이 말끔한 데이
비드의 매너보다도 무례할 정도로 버릇이 없는 제시에게 더 마음을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