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정오 무렵, 맥스는 역 사무실을 청소하며 손님용 의자 위에 누워 있는 어니를 밖으로 내몰았
다. 캐묻기를 좋아하는 스튜어트 정크션의 마을 주민들은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역 사무실에서 철도 회사와 관련된 공식적인 회합이 벌어질 예정이었던 것이다. 멜처
라는 친구가 마을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는 소식은 벌써 온 마을에 퍼져 있었다.
멜처는 노란색 계열의 양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보도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애비게일의 집
에서 오늘 아침까지도 머물며 치료를 받던 건장한 청년도 도시 풍으로 정장을 차리고 있었다
. 오늘 아침에 그가 직접 홈즈의 상점에서 청동색 양복을 구입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절룩이며 거리를 지나는 그의 말쑥한 모습이 나도는 추측을 더욱 무성하게 했다.
"여보게, 저 사람이 열차 강도가 아니라면, 대체 뭐하는 사람일 것 같은가? 강도도 아닌데
왜 역으로 가고 있지?"
마침내 역 사무실에 정장 차림을 한 네 명의 남자가 모였다. 그들의 컬러풀한 차림이 무지개
빛 송어를 연상시켰다. 포도주색 비지니스 정장 차림의 제임스 허드슨이 먼저 맥스에게 악수
를 청했다. 그리고 청동색 정장을 입은 제시 더프레인에게 맥스웰 스미스를 소개했다.
"스미스 씨는 우리 회사 직원으로, 이 스튜어트역의 역장이네."
더프레인은 손을 내밀며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넸다.
"스미스 씨라면 도허티 의사의 허락 없이 제가 이 마을을 떠나는 걸 반대했던 사람 아닌가요
? 그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기는요."
맥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드슨이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맥스는 노란색 정장 차림의 사내가 멜처
의 변호인인 피터 크롤리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허드슨이 먼저 제의했다.
"신사 여러분, 자리에 앉읍시다."
긴장하고 있던 맥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애에서 도회지의 신사들을 이렇듯 한
무더기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의자에 앉은 제임스가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자, 크롤리 씨, 소송 건을 처리하기 전에 우선 그날 열차에서 있었던 총기 사고에 대해 정
확하게 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멜처 씨와 더프레인 씨 모두 무고하게 사고를 당한 피해자
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멜처 씨는 보상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크롤리의 대답에 멜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프레인은 동상처럼 앉아 미동도 없이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둘 다가 아니라 이쪽만 책임이 있다는 겁니까? 더프레인 씨는 멜처 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드슨이 말했다.
"그는 더프레인 씨가 총에 맞도록 기차 안을 난투극 속으로 몰고 갔습니다."
"멜처 씨가 난투극을 일으킨 게 아닙니다. 그는 단지 그 속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 사고로 더프레인 씨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습니다."
"당신 고객은 완전히 다 나은 것 같군요. 이 마을에 있는 클리블랜드 의사의 말에 의하면 더
프레인 씨는 전처럼 아무 이상없이 다리를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 고객
인 멜처 씨는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요구하는 건가요?"
허드슨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멜처 씨는 RMR 열차 안에서 총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철도 회사측에 책임이 없다는 말입
니까?"
허드슨은 같은 질문을 이번엔 더 날카롭게 물었다.
"크롤리 씨, 얼마를 요구하냐고 물었습니다."
"불구가 되었으니 안정되게 정착하고 살 비용이 필요합니다. 그 비용으로 만 달러가 합당하
다고 생각합니다."
협상은 즉시 깨졌다. 더프레인이 발로 큰소리를 울리며 소리쳤다.
"만 달러라고? 식충이 같으니라고!"
"식충이라고!"
멜처의 대담한 외침이 주위를 울렸다. 허드슨과 크롤리가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으나 소
용이 없었다.
"여기에 식충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오!"
"내가 왜 식충이요? 당신이야말로 봉을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힘껏 두 손을 벌려 철
도측에 구걸하는 거 아니오? 왜 우유도 달라고 하지 그래요?"
"그 정도는 합당한 금액이라고……."
"아니, 이 조그만……."
"제시, 진정해!"
허드슨이 일어서려는 제시의 팔을 잡고 의자에 앉혔다.
"여러분, 이성을 찾읍시다. 멜처 씨, 우리는 손해 배상을 받으러 온 겁니다."
크롤리도 멜처를 진정시켰다.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들은 당연히 요구하는 만큼 줘야 할 겁니다. 신체적인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피해까지 입었으니까요. 게다가 저 사람 때문에 애비게일 양도 상
처를 입었습니다."
멜처의 비난에 더프레인의 입가가 굳게 다물어졌다. 멜처는 자신이 떠나던 날을 생각하며 내
던진 말이었으나, 그 말은 제시의 가슴에 날카로운 송곳으로 와 박혔다. 가뜩이나 어두웠던
그의 마음에 그녀에 대한 죄책감이 불어 갔다.
"애비게일 양은 거론하지 마시오!"
더프레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 찔리시나? 당신은 그녀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이오. 아마 그녀는 당신 생각만 해도 구
역질을 참을 수가 없을 거요."
제임스 허드슨이 혼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애비게일 양? 제시, 애비게일 매켄지 양을 말하는 건가? 대체 영문을 모르겠군. 그녀가 왜
널 참을 수 없다는 말이지?"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크롤리가 맞장구쳤다.
"멜처 씨, 제발 진정……."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당신이 그녀에게 가했던 모욕은 보상하지 못할 거요."
가시 돋힌 멜처의 말이었다.
"애비게일 양은 이미 충분한 보수를 받았습니다."
허드슨이 대신 대답했다.
"더프레인 씨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지요."
"오, 그래요? 그가 자신의 저질스런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얼마나 주었는지 궁금하군요. 그
는 강제로 그녀를……."
더프레인이 다시 발을 구르며 일어섰다.
"애비 얘기는 여기서 빼라고 했잖아! 이 멍청한……."
"젠장, 제시, 앉아!"
허드슨이 드디어 인내심을 잃고 화를 냈다. 맥스도 호기심이 당기는 눈치였다. 주위가 조용
해졌다.
"제가 보기엔, 당신들 두 사람은 이 협상과 전혀 관련 없는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지
금부터 당신들의 대변자로서 나와 크롤리 씨가 협상을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제 말에 동의하
시겠습니까, 아니면 서로 멱살을 쥐고 뒹굴겠습니까?"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계속 해나갔다.
"크롤리 씨, 멜처 씨가 제시하는 정착 비용에 대해 더프레인씨가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십니
까?"
"이상하군요. 이건 더프레인 씨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철도측 대표로 나오신 당
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요?"
허드슨이 초조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제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
다.
"제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더프레인에게로 쏠렸다.
"안 돼."
두 대변인의 협상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제시의 검은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젯밤 일에 대한 죄책감과 그에게서 한푼이라도 더 뜯어 내려는 멜처에 대한 증오가 그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 돈을 가지고 정착해서 구두를 팔아 보겠다는 생각인가? 어쩌면 애비게일에게 돌아갈지도
모르지. 그녀도 그 멍청한 빨간 구두를 신고 있지 않았던가. 그는 어젯밤에 자신을 올려다보
던 애비게일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이비드 멜처는 떠났어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제시, 당신이 마지막 기회예요.
멜처 같은 사람에게는 그녀가 아까웠다.
"재판을 받아 형이 선고될 사람에게 왜 자꾸 의견을 묻는 건가요? 당신은 지금 당신네 철도
를 강탈하려 했던 강도를 감싸고 있어요."
크롤리의 일방적인 비난에 드디어 허드슨이 분노를 터뜨렸다.
"크롤리 씨! 정확히 알아나 보고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더프레인 씨를 자꾸 열차 강도로 몰
아세우시는데 더 이상 참고 들을 수가 없군요. 자기 물건을 훔치는 사람도 있습니까?"
"짐!"
더프레인이 소리를 쳤지만, 그의 친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잘 들어 둬요. 더프레인 씨는 RMR의 주식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
로 하자면, 이 철도의 주인이지요. 이래도 계속 그를 강도라고 모욕하시겠습니까?"
구석에 앉아 있던 맥스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크롤리는 목 안에 걸린 무언가를 뱉어 내
려고 애쓰는 표정이었고, 멜처는 달걀을 통째로 삼킨 얼굴이었다. 더프레인은 돌처럼 앉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맑은 날씨에 하늘이 푸르렀다. 허드슨은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멜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당신이 애비게일 양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당신이 아무리 커다란 철도회사 사장이라 해도, 그건 당신이 그녀에게 했던 행동에 대한 핑
계가 되지 못하오. 열차 강도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에 관한한 당신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추악……."
"지불해!"
제시의 외침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그는 우선 멜처의 입을 막아야 했다. 이 마을의 역
장이 바로 옆에서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만, 제시……."
"짐, 원하는 대로 주겠어."
디프레인이 소리쳤다.
멜처는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해 배상을 받기는 틀렸
다고 생각했었다.
"제시, 잠깐만! 철도의 일부분은 내 거라고. 난 도저히 이런 사람에게……."
갑자기 더프레인이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테이블이 들썩거렸다.
"짐, 바깥에서 잠깐 얘기하고 싶어."
허드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나갔다.
"제스, 네가 주인이라는 걸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허드슨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말했다.
"괜찮아, 짐. 조만간 알게 될 일인데 뭐. 내가 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 애비가 그 사실을 알
지 못하길 바랐을 뿐이야."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군. 그나저나 정말 그대로 다 줄
생각이니?"
"응, 몇 가지 조건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멜처에게 주는 돈은 내 몫에서 주는 거야. 네 것
이 아니라."
잠시 후 그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은 허드슨이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
했다.
"크롤리 씨, 저희 철도 회사측에서는 멜처 씨에게 만 달러를 보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
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서명하면 돈을 지불하겠습니다. 우
선, 더프레인 씨가 총을 손질하려고 꺼냈는데 멜처 씨가 그의 행동을 오해해서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는 사건 전말을 사실대로 지역 신문에 발표하는 겁니다. 둘째는, 멜처 씨에게 지급
되는 돈의 3분의 2는 사업을 하건 가정을 꾸리건 이 마을, 스튜어트 정크션에 투자되어야 한
다는 겁니다. 앞으로 5년 안에 팔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세번째는, 절대로 RMR 철도를 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공증인으로 서명을 하고 그 아래 멜처 씨가 서명하면 협상은
완료된 셈이지요."
크롤리는 조용히 멜처를 바라보았다. 멜처는 충격으로 축 처진 몸을 의자 위에 묻고 있었다.
제시 더프레인은 열차 강도라는 누명을 벗었는데도 선뜻 만 달러를·주겠다고 동의했다! 만
달러를! 멜처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지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수락하겠소."
멜처가 평상시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소."
"무슨 조건인가요?"
허드슨이 물었다.
"더프레인 씨가 애비게일 양을 사적으로 방문해서 사과하는거요."
"멜처, 도가 지나치군!"
더프레인이 거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 협상에 매켄지 양과 나 사이의 일을 끼워 넣지 말아요. 그리고, 당신이 상관할 바도 아
니오!"
"당신이 상관하게 만들잖소. 당신이 옷을 입지 않은 채 너무나 자유로운 모습으로 그녀의 침
실에 있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오."
"그것으로 충분하오!"
더프레인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화난 음성에 맥스는 거의 혀를 깨물 뻔했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바로 나요. 당신의 조건 따위는 필요없소. 그 돈으로 충분히 새출발
을 할 수 있을 거요. 여생을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요. 내 제의를 수락하는 거요?"
애비게일은 그에게 사과를 받아야 했다. 그건 당연했다.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다. 데이비드
의 목젖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좋소. 당신 말대로 신문에 사건 전말을 게재하겠소. 하지만 더프레인, 다시는 스튜어트 정
크션에 돌아오지 마시오."
"멜처, 나보고 오라 가라 하지 마시오.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겠소."
더프레인과 멜처의 시선이 팽팽히 얽혔다.
허드슨이 끼어들었다.
"협상이 끝난 것 같군요. 자, 두 분 모두 여기에 서명하세요. 그리고 멜처 씨, 당신 보상금
은 3일 안에 여기에 도착할 수 있도록 저희가 덴버에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시,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허드슨이 앞서 걷고 있는 제시의 팔을 잡았다.
"네가 여자 때문에 이렇게 호전적으로 행동하는 거 처음 봤어."
"여자라고? 젠장, 힘들게 벌어 놓은 돈을, 그것도 만 달러나 저런 보잘것없는 녀석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열통이 터져서 그러는 거라구."
"제시, 진정해. 주겠다고 한 사람은 바로 너라구. 그 사람 말을 자꾸 가로막던 데, 매켄지
양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시는 시선을 애비의 집 쪽으로 돌렸다. 말 보관소 너머로 눈에 익은 지붕이 보였다.
"짐, 왜 자꾸 캐내려고 하는 거야. 넌 사업에나 신경써. 나도 빨리 일터로 되돌아가야겠어.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멜처를 위해서 남겨 둬야겠어. 이봐 친구, 괜찮지
?"
"그래, 너 좋을 대로 해. 그런데 역장을 저대로 놔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매켄지 양의 명
예에 해가 되는 거 아니야? 다시 들어가서 뇌물이라도 먹일까? 네가 들어갈래?"
"젠장, 짐, 그만해. 멜처에게 비난받은 걸로도 충분하다구. 너까지 합세할 거야?"
뭔가가 제시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허드슨으로서는 그를 도와 줄 수도 없었다.
"통할 것 같은데, 한번 시도해 볼까?"
허드슨이 덧붙였다.
"네 마음대로 해."
열차가 떠나기 전에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허드슨은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
제시는 가까운 술집에 들어섰다. 술잔에 방아를 찧고 있던 어니 터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이 그를 쳐다보았다.
호텔 2층에서 멜처는 허드슨과 더프레인이 3시 20분 열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협상
할 때 더프레인에게 애비게일을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약속하길 꺼려했다. 그래서
그가 열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애비게일의 문가에 서 있는 멜처의 가슴은 엔진을 단 것처럼 마구 들썩거렸다. 만 달러를 거
머쥔 그는 갑자기 앞날이 장밋빛으로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느꼈다.
"오, 멜처 씨, 일찍 오셨군요."
그를 본 애비게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기다리던 5시간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더딘 시간이었다. 드디어 3시20분 기차가 떠났다. 그 기적 소리를 들으며 애비게일은 두 손
으로 가슴을 움켜 쥐었다.
좋아, 제시는 내 곁에서 영영 떠나고 말았어.
시계 소리가 적막을 깰 뿐 집 안은 무덤 속 같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절망감과
함께 외로움이 밀려왔다.
데이비드 멜처는 명랑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애써 제시 더프레인에 대한 생각들을 밀어 냈다
. 어린아이처럼 붉게 상기된 뺨에 반짝이는 눈동자, 거의 천진난만한 표정이라고 할 수 있었
다. 그녀는 즉시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차 있군요. 일이 잘 풀렸나 보죠?"
그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네, 저는 지금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어요. 왜 그런지 알아맞혀 보세요, 애비게일
양."
그녀는 그의 기쁨에 찬 얼굴에 같이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쎄요, 협상 결과가 당신 생각대로 되어서, 춤이라도 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자,
우선 앉으세요."
의자로 다가가던 멜처의 시선이 다른 신을 신고 있는 애비게일의 발로 향했다.
"오, 애비게일 양, 당신이 계속 그 구두를 신고 있기를 바랐는데……. 저,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서 저녁을 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기념한다고요? 외식을? 아니, 멜처 씨……."
감격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밖에서 저녁을 먹은 적이 없었다. 멜처는 자신이 뛸 듯
이 기뻐하는 애비게일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의 승리를 자축하는 거예요. 철도 회사측에서 만 달러를 저에게 보상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만, 만 달러라고요?"
그녀는 곁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네 정확하게 만 달러예요."
그는 꿈꾸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정말 어마어마한 액수군요."
그녀는 우산꽂이 위에 1,000달러를 놓고 간 제임스 허드슨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이비드는 그녀에게 더프레인이 철도 회사의 사장임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망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저녁 초대에 응하겠다고 말해 줘요. 우리 승리를 자축해야죠. 이대로 그냥 지나갈 수는 없
어요."
"하지만 축하받을 사람은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애비게일 양, 저는 오늘 이 마을에 보상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사고로 불구가 되었으니 당
연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 동안당신이 더프레인이라는 그 비열한 사람에게 모욕을 당했던 걸
생각하면……. 보상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
어 드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드디어 그를 궁지에 몰아넣어서 그 모욕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아 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했던 모욕의 대가까지도 말입니다."
그녀는 의자 손잡이에 걸터앉아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기쁨을 그녀와 같이
나누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그는 그녀를 기사도 정신을 발
휘해 보호해야 할 흠없는 완벽한 숙녀로 알고 있었다. 제시 더프레인과 있었던 일을 되돌리
고 싶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멜처의 호의와 존경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 손으로 깃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
다.
"오, 멜처 씨, 죄송하지만 초대에는 응할 수가 없겠군요. 저는 여기에서 당신에게 축하를 보
내는 걸로 만족하겠습니다. 구두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요."
낙담한 표정이었다.
"저녁조차 사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들에겐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 그녀는 살며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 양 종이 더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데이비드 멜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제가 떠나던 그, 그 끔찍했던 아침에 다, 당신을 비난했던 일을 아직 요, 용서하지 않고 있
습니까?"
"오, 아니에요!"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간청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벌써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제 말을 믿어요, 데이비…… 멜처 씨."
그러나 그는 그녀의 입에서 살짝 새어 나온 자신의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그녀는 다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러면 증, 증명해 봐요."
그녀가 얼굴을 돌렸다.
"증명하라고요?"
"함께 저녁을 들면서 그, 그 일을 다 잊고 있는지 증명해 봐요."
그녀의 손이 다시 깃의 레이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오, 그녀는 첫 외식을 멜처처럼 훌륭한 신사와 함께 즐기고 싶었다. 화사한 모습으로 신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다시 일어났다. 어제 일 때문이었다. 어제 일만 없었어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제시, 지옥에나 가라! 그는 왜 멜처가 돌아온다고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멜처의 끈질긴 초대가 그녀를 주저하게 했
다. 그의 식사 초대에 응하면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걸까? 한 번뿐인데? 내일이면 다시 떠날
사람이었다. 하루, 저녁 식사를 같이 한다고 해서 크게 해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저녁 초대라는 말이 듣기 좋군요."
"그럼 허락하는 겁니까?"
다시 기쁨에 넘치는 표정이었다.
"네, 가겠어요."
"그럼, 빨간 구두를 신을 건가요?"
오, 빨간 구두! 하지만 그 구두는 색깔이 너무 화려해서 밖에 신고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저 신발을 신고 거리로 나가면, 당신 스스로 바보짓을 자초하는 거요!
제시의 경고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무시하기로 했다. 다만 마을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녀의 신발을 보지 않게 되길 빌었다. 잠시 후 그녀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장갑을 낀 채 멜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보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그들의 모습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도리어 다음날 아침, 스튜어트 정크션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정중한 멜처와 애비게일이 서로
잘 어울린다고 소곤거렸다. 그 커플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그들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루이스 컬페퍼는 그녀가 빨간 구두를 신었다는 데 더 열을 올렸다. 빨간 구두!
사람들은 멜처가 동부 어딘가에서 사 온 선물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정말 즐거운 저녁이었어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애비게일이 한 말이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냈나요?"
그는 그녀 옆에서 절룩이며 걷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팔꿈치를 살짝 잡고 있었다.
"다음에 내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청해도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동그란 눈이 그를 되돌아보았다.
"다음번이라고요? 곧 스튜어트 정크션을 떠날 거 아닌가요?"
"아니오. 철도측에서 이곳으로 돈을 보낸다고 했어요. 그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야 해요."
그는 보상금의 일부를 이 지방에 투자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말을 하
면 마치 자신이 더프레인의 꼭두각시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고 그녀가 생각하길 바랐다.
"며칠이나 걸릴 것 같나요?"
"3일 정도."
3일, 3일 정도는 그와 동행하는 기쁨을 누려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
도 그건 그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일 뿐, 그는 또 떠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여기 머무르는 동안에는 식사 제의를 거절하지 않겠어요."
멜처가 팔꿈치를 당기자 그녀의 손이 그의 옆구리에 닿았다.
"그 큰돈으로 뭘 하실 생각인가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군요. 큰돈
이 생긴다니, 흥분되는 한편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도 듭니다."
그녀의 집에 다 와 가고 있었다.
"네, 이해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당신과 더프레인 씨를 간호한 보수로 1,000달러를 받았
다는 얘기를 제가 했었나요?"
더프레인의 이름을 듣자 그의 몸이 굳어졌다.
"그때 저도 그랬어요. 앞으로 몇 년은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편안해지더군요."
예상 외로 많은 금액이었지만, 그는 특별히 놀라거나 질투가나지도 않았다. 사실 그가 막대
한 보상금을 받게 된 것도 다 애비게일 덕이었다.
그는 초조함을 누르며 평범한 어투로 물었다.
"어떻게 받았나요?"
"허드슨 씨가 여기에 오셔서 놓고 가셨어요. 행동하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직위가 높은 사람
인 것 같던데, 그가 사장인가요?"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부러 지금까지 더프레인이 철도 회사의 사장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 같소. 아마 당신이 받은 돈은 전부 그가 지불했을거요."
집 현관에 다다르자 그녀가 선뜻 제의했다.
"잠깐 앉았다. 가시겠어요? 다리가 피곤하겠어요."
"아니오. 아니, 다리는 괜찮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시 앉았으면 좋겠군요."
함께 베란다의 그네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앉았기 때문에 그녀의
몸에는 코트 소매도 닿지 않았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놓았다. 멀리서
살롱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걱정이 있나요?"
그가 물었다.
"걱정요? 아니요, 모두 다 너무 좋아요."
사실 그래야 했다. 그는 흡족한 보상금을 받았고, 그녀도 넉넉한 보수를 받았다. 그와 함께
외식을 했고, 그녀는 제시 더프레인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부족했다.
그가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가끔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속마음이 겉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더 주의를 해야 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변화가 생겨서 그럴 거예요. 저녁 초대를 받은 것도 매일 있는 일은 아니
잖아요? 아직도 기분이 좋아서 취해 있어요."
"저도 그래요. 여기를 떠난 뒤에도 다시 돌아와 다, 당신과 저녁을 함께 먹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제시처럼 어깨를 감싸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시가 아니었다. 그
는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녀를 대했다.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그에게
앉았다 가라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는 그녀 옆에 딱딱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갑자기 순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다소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앉아서 당신이 보내 준 소포를 뜯었어요."
"여기, 그네에서 말입니까?"
"네, 빈레이 씨가 전해 주었어요. 그를 보내고 나서 여기에 앉아 혼자 풀러 보았죠."
"선물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놀라웠죠. 이 마을에서 빨간 구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 저뿐일 거예요."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많이 가지고 있으니, 머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될 거예요. 빨간색이 유행하고 있
거든요."
그녀는 그에게 빨간 구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
고 있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구두에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동부 도시에
서나 어울리는 신발이었다. 이곳 서부에서는 여자든 남자든 튼튼한 갈색이나 검은색 구두를
선호하고 있었다.
"다른 색깔을 좋아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난 빨간색을 좋아해요!"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유창하게 거짓말을 하게 된 거지?
"흠, 흠, 애비게일 양, 오늘 제가 여기 왔을 때 당신과 더프레인 씨가 그 구두에 대해 언쟁
을 하고 있는 걸 들었습니다."
"그랬죠."
그녀는 정직하게 시인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거죠?"
멜처는 만용에 가까운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그의 제품이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그 구두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잘 됐군!"
뿌듯한 만족감에 싸여 그가 소리를 쳤다.
아마 그 말이 오늘 밤에 그가 했던 말 중 가장 로맨틱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혹시 다른 말은 듣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말은 듣지 못했나요?"
"그가 그 구두에 대해 비난하는 말밖에 듣지 못했어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멜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제 그는 떠났으니 그에 관한 건 모두 잊기로 합시다."
"그래요."
그러나 그녀는 멜처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자신은 절대로 제시 더프레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밝은 음성으로 물었다.
"재미있는 얘기 해요. 동부 얘기 좀 해줘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나요?"
"어렸을 때 두 번 덴버까지 가 봤을 뿐이에요."
"동부, 동부에선 무엇이든지 살 수가 있어요.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이
죠. 새로운 혁신과 커다란 발명품들로 가득 찬 곳이에요. 메사추세스에 사는 리만 블레이크
라는 사람이 구두창을 붙이는 기계를 발명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아니요. 하지만 그런 훌륭한 발명을 하다니 고마움을 표해야겠군요."
애비게일은 화제가 지루해졌다.
"지금 동부에선 현대화의 물결이 일고 있어요. 한 쪽에선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달라는 주장
까지 하고 있어요.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게다가 여자들이 실외에서 테니스라는 경기를 하고
있는데……. 동부라고 해서 모두 좋은 건 아니에요."
"저도 스탠튼 여사의 참정권 운동 모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테니스는 어떤
건가요?"
"애비게일 양, 신경쓸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응, 전혀 숙녀답지 못한 놀이예요! 프
랑스에서 시작된 경기인데, 여자들이 챙이 좁은 모자를 쓰고 짧은 소매 옷을 입은 채 야만스
럽게 뛰어다니며 힘줄로 만든 라켓으로 공을 치는 놀이죠. 정말 수치스런 일이에요! 예의범
절이나 조신한 품행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죠.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술까지 먹어요. 그런
면에선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서부 여자들이 훨씬 나아요."
그는 거의 말을 더듬지도 않고 오랫동안 통렬한 비난을 해댔다. 그녀는 그가 그런 문제에 대
해 병적으로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네를 조용히 흔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멜처와
제시를 비교하고 있었다. 멜처와 달리 제시는 그녀의 새침떠는 행동을 비난했었다. 독수리
언덕에 마차를 몰고 갔을 때 젖은 소매의 단추도 풀지 않는다며 조롱했었다. 그리고 그의 검
은 손이 따라 주던 샴페인……. 샴페인은 그녀를 편안하고 나른하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그
는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 입는 낡은 셔츠 차림의 그녀가 좋다고 말했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애비게일 양?"
데이비드가 서부 여자를 찬양하는 동안, 그녀는 얼이 빠진 듯 제시와 그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네, 그래요."
그녀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언제까지 제시 때문에 갈팡질팡해야 하
는 거지?
그들은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현관 층계를 다 내려간 그는
그녀의 손을 더듬어 잡더니 재빨리 손에 키스를 했다.
"잘 자요, 애비게일 양."
"저녁 고마웠어요, 멜처 씨."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끙끙거리며 목을 가다듬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
았다. 손을 더듬어 찾을 때라도, 아니면 키스할 때만이라도! 그녀는 그가 손이 아니라 입술
에 키스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손에 키스를 했을 때 그녀는 제
시 더프레인의 키스가 훨씬 좋았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다.
집 안은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 정도로 적막했다.
램프도 켜지 않고 서 있던 애비게일은 멜처가 키스를 했던 손등에 입술을 눌러 보았다. 그러
나 아무런 느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밤에 멜처가 보여 준 틀에 박힌 듯한 행동과 제시
의 종잡을 수 없었던 행동들이, 또다시 그녀의 머릿속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둘을 비
교하다 보면 항상 제시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멜처는 현재 그녀 옆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멜처에게 충실하고 싶었고 그에게서 완벽한 충일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제시가
그녀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는 항상 위압적인 존재였다.
그는 떠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분명 그녀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침대 위에서 잠을 청
하던 그녀는 여기저기에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 고함 소리, 그리고 그
가 뒤척일 때마다 나곤 하던 침대 스프링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그에게
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침실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뒤척거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베개를 두 손으로 마구 치기 시작했다. 마치
베개가 제시라도 되는 것처럼.
"제시 더프레인, 내 집에서 당장 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