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4화 (14/24)

14

마을은 새로운 뉴스로 들끓고 있었다. 애비게일은, 보도블럭에 늘어선 가게들의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호기심 많은 시선들을 모르는 척 무

시하고 더욱 당당하게 정육점으로 들어섰다.

"아, 애비게일 양."

게이브 포터가 앞으로 달려나왔다.

"당신 집에서 묵고 있는 사람이 열차 강도가 아니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오늘 환자

들의 치료비를 지불하려고 온, 철도 회사 사람 얘기로 마을이 떠들썩하답니다. 아무래도 그

사람에 대해 잘못 생각했나 봐요. 철도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 같더군요. 애비게일 양도 그렇

게 생각하시죠?"

"글쎄요, 포터 씨. 그 사람이 누구든 뭘 하는 사람이든 그건 제 관심 밖의 일이에요. 그는

아직 환자예요. 이 마을을 떠나려면 아마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그 사람이 싫다고 해도 며칠 더 머무르게 할 건가요?"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고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포터 씨, 절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 사람이 악당이었을 때에도 저는 안전했는데, 그가 평범

한 사진사라는 걸 알게 된 지금 제가 걱정되신다는 말씀인가요?"

게이브 포터에게는 뜻밖의 얘기였다.

"애비게일 양,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단지 치료비도 받으셨으니 재산 관리를 잘 하시

라고요."

그는 고기를 제대로 썰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애비게일의 시선을 얼굴 가득 받고 있으니 불

편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포터 씨, 제 재산 걱정은 그만하시고 그 고기나 얇게 썰어주세요. 스테이크용이거든요."

그녀의 주문이 날아왔다.

"허약해진 사람에게 고기는 좋은 음식이에요. 불행한 사고로 피를 많이 흘린 사람에게는 더

좋겠지요?"

게이브는 애비게일이 그 사진사와 함께 산으로 마차를 타고갔다는 말을 젬 퍼킨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웃인 롭 넬슨도 그 사진사가 파자마 차림으로 정원을 걸어다니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덴버에서 애비게일에게 소포가 배달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애비게일

은 덴버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게이브에게 놀라운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났다. 애비게일이 집으로 돌아가던 중 은행에

들러 1,000달러를 입금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수표는 '로키마운틴 철도 회사'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집으로 향하던 애비게일은, 제시가 베란다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그네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

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누가 보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았다. 다행히 그

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거의 체면을 유지시킬 정도로 단추가 채워져 있을 뿐이었지만. 오르

막길을 오르자 그의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왔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결정한 거요?"

방금 전에 은행에서 그녀가 수표를 입금하자 놀란 듯 바라보던 블레어 시몬스의 끈적한 시선

이 기억났다.

"네, 넣고 왔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되물었다.

"무슨 말이오?"

"은행에다 입금하고 왔다구요. 고마워요."

그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내 말은 저녁 메뉴를 결정했냐는 말이었소."

그는 거금 1,000달러에 대해서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마땅한 보수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1,000달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을까.

"스테이크요."

"와, 정말 끝내주는군."

그가 배를 두드리며 기쁘게 소리쳤다. 셔츠가 구겨져 있었다.

갑자기 그의 거친 말투가 그녀의 신경에 거슬렸다.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당신이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그 천박한 말투나 행동이

저에게도 옮을까 걱정되는군요."

"내가 여기에 좀더 머무르게 된다면, 당신은 나를 철도 회사로 하루라도 빨리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날 거요. 애비게일 양, 난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소. 스테이크란 말은 지금 생각

해도 역시 끝내주는 걸."

"정말 못 말리겠군요, 캐머, 아니, 더프레인 씨."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그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농담을 주고받으니, 딱딱하고 어색했던 둘 사이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제 그녀는

밤이 되어도 자신이 절대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네의자에 검은 손을

짚으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가씨, 가서 스테이크나 구우시죠."

그가 그녀의 얼굴을 붉게 만드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스테이크가 다 구워졌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였다. 베란다의 의자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시 더프레인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안 그랬어! 그래, 저애야. 쟤도 아니야!"

게임을 하다가 사소한 언쟁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엔 재미있게 하던 놀이를

계속했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쇠 소리가 철컥 하고 나더니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

리가 났다. 천천히 일어선 그는 절룩거리며 그녀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품 저장실에

서 쟁반 가득 접시와 컵을 들고 나오는 그녀가 보였다. 쟁반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타이트하

게 드러났다. 그는 잠시 찬사의 눈빛을 보내다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도와 줄까요?"

그가 물었다.

그는 마치 오늘 밤 그녀를 놀래 주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그녀에게

서 접시들을 받아 들고 부엌에 놓인 식탁으로 걸어갔다.

"아니에요. 식당으로 가져가요. 오늘 밤은 그곳에서 먹을 생각이에요. 마지막 저녁 식사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의 수염이 놀리듯 말려 올라갔다.

"그럼 작은 송별 파티라도 벌리는 건가?"

"그런 셈이죠."

"당신 마음대로."

그가 식당으로 걸어갔다.

"잠깐만요. 식탁보를 가지고 갈게요."

"오, 식탁보까지?"

깔끔하고 빳빳한 천을 들고 오며 그녀가 물었다.

"저 촛대 좀 가져다 주겠어요?"

"물론."

그녀가 식탁보를 까는 동안 그는 그릇들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가 한 번 펄럭이자 식탁보가

애드벌룬처럼 부풀면서 식탁을 정확히 뒤덮었다.

"와, 정말 끝내주는군!"

"네?"

그녀가 몸을 기울여 주름 없이 식탁보를 깔며 물었다.

"내가 깔았다면, 여러 번 시도해도 아마 성공하지 못했을 거요."

그녀가 주위를 돌며 구석구석 식탁보를 펴는 동안 그는 그릇을 들고 몸을 피해 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작정이에요. 밤새 그릇만 들고 있을 거예요?"

"한 번 더 보고 싶군."

"네?"

"식탁보를 확 던져서 정확히 중앙에 펼치는 묘기 말이오. 이번에는 그렇게 잘 되지 않을 거

요. 내기하지."

"제정신이 아니군요. 깨뜨리기 전에 접시나 내려놓아요."

"당신은 뭘 걸겠소?"

"지금 나랑 도박을 하자는 거예요?"

"자, 애비, 뭘 걸겠소? 딱 한 번에 펼치는 거요."

"제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가요?"

"집에서 만든 맛있는 요리와 내 사진, 어떻소?"

스튜어트역에 다시 오겠다는 그럴듯한 제의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식탁보를 걷어 내고 좀전처럼 펼쳐

보았다. 물론 이번엔 말끔히 펼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결국 두 사람

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란한 웃음소리였다!

접시들이 제시의 가슴에 부딪혀 덜그럭거렸다.

"거봐요. 이번에는 한 번에 되지 않을 거라고 했잖소. 내가 이겼소."

"저도 처음이었어요. 공기가 알맞게 부풀려야 되는, 드문 일이거든요. 어쨌든 바보처럼 저도

휩쓸리고 말았네요."

그가 의자에 앉았다.

"스테이크를 가지고 올게요."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그녀를 따라가자 그녀는 바닥이 편편한 잔을 건네 주었다.

"파티라면 샴페인을 마셔야 분위기가 살지 않겠소? 짐이 가져 온 샴페인을 마십시다."

"샴페인요?"

"당신이 나간 동안 봉투를 살펴봤는데, 그 멋진 친구 녀석이 샴페인을 가져 왔더군. 내 송별

파티니 샴페인을 조금 마시는 게 어떻소?"

"글쎄요,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에게도 알코올은……."

하지만 지금은 그 전과 상황이 달랐다. 그는 더 이상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요."

"샴페인 잔은 어디에 있소?"

"그 잔밖에 없어요."

"좋소. 별차이 없으니까."

그가 잔을 들고 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마당에 나가 나이프를 사용해서 샴페인 마개를 땄다. 마개 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마

을 사람들이 다 들었을 것 같았다.

"모두 준비된 거요?"

그가 들어오며 물었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고 커다란 아이보리색 접시에 야채와 스테이크를

담고 있었다. 식탁에는 초만 두 자루 있을 뿐이었다.

"램프도 가지고 와야겠어요."

그녀는 뒤에 서 있는 제시에게 어깨 너머로 말했다.

"좀 어둡군요."

그가 부엌 식탁에서 램프를 들고 돌아왔다. 그의 한 손엔 샴페인이 들려 있었고, 걸음걸이가

쾌활했다.

"성냥을……."

"내가 가지고 오리다."

그는 그녀의 집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거의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빙그레 웃음짓던 그녀

는 갑자기 고통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는 여기를 떠난다. 그는 마치 자신이 주

인인양 성냥을 가져 와 램프에 불을 붙였다.

"애비, 앉아요. 정말 영광이오. 이렇게 진수 성찬을 차려 줘서 말이오."

그녀는 성냥을 켜 초에 불을 붙이는 그의 긴 손가락을 매혹된 듯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칼과

얼굴 주위가 불빛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촛불을 켜자 식당 안이 은은한 장밋빛으로

살아났다. 식당에 있는 식탁은 부엌에 있는 것보다 두 배 정도 컸다.

"애비, 너그럽게 봐줘요. 분위기에 어울리게 제대로 차려 입지 못해서 미안하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셔츠의 단추가 다 잠겨 있는지 점검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더프레인 씨, 당신에게는 그 정도도 잘 차려 입은 거예요."

그가 가슴을 들먹거리며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는 접시 위에 스테이크와 노릇노릇하게 익힌 감자, 황금빛 당근을 담고 있는 애비게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 준비가 다 되자, 향기로운 음식 내음을 맡으며 그가 말했다.

"음, 정말 배가 고프군."

그리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잘 먹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놀

랍게도 그는 조용히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면서 예의 바른 모습으로 식사를 했다. 생각지

못했던 그의 깔끔한 식탁 매너에 그녀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는 편히 의자에 몸을 기대

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무뢰한 건달에서 재미있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바뀐 그

의 모습을 전과 비교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처음부터 저런 미소와 매너를 보이지 않

았던 걸까?

"이 맛있는 음식이 기억날 거요."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그가 정중하게 찬사를 보냈다.

"당신에게선 처음 듣는 칭찬이군요. 아마 제대로 차린 분위기 때문에 제 요리 솜씨가 나아

보이는 걸 거예요."

"아니오, 애비. 식사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휴전을 합시다. 정말 당신 요리를 즐기고 있소."

"당신은 내 요리보다 나와의 싸움을 더 즐길 줄 알았거든요."

"부분적으로는 당신 말이 맞소. 가벼운 싸움은 즐기고 있소. 자극적이고 상쾌해서 감성적인

면에 좋으니까. 가벼운 싸움은 감정을 말끔하게 정화시키는 작용을 해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지."

그는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간 요리처럼 말이오."

웃음이 갑자기 터져 나와 그녀는 얼른 냅킨으로 입을 감쌌다.

오, 그의 유머 감각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녀는 음식을 삼키며 미소를 보냈다.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미소였다.

"당신 감성은 그렇게 자주 정화가 필요한가요, 더프레인 씨?"

이번엔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간 요리에 대한 자신의 조롱에

위트 있게 맞받아 치는 그녀가 좋았다.

"당신의 심술궂은 위트가 점점 마음에 드는군. 우리가 종종했던 작은 다툼들에 톡톡한 양념

구실을 했었지."

그가 잔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위가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개암빛 눈동

자에 어른거리는 밝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작은 다툼이라구요? 종종?"

포크로 고기를 찌르며 그가 재미있다는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내 나쁜 성격이 어느 정도 당신에게도 옮아 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그가 포크로 그녀의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지. 이해하오, 아가씨."

그녀는 손으로 포크를 밀어 내며 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포크를 휘두르지 말아요, 제시."

자신이 한 말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는 빨갛게 달아

오른 그녀의 얼굴을 능글맞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뺨에서 이마까지 그녀

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그의 하얀 치아가 빛났다. 그녀는 냅킨

으로 입을 닦고 접시에 시선을 떨구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뭔가 말을 꺼내야 했다.

"제일 좋은 접시를 설거지하다가 깨뜨려 버렸어요. 그릇과 컵도."

그는 스테이크를 담은 그릇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녀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주기로 마음먹

은 것 같았다. 그는 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 천장을 응시했다.

"대체 왜 당신 말에 내 해묵은 기억들이 되살아나는지 모르겠군. 나도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예상치 못한 그의 천연덕스런 대답에 그녀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이 깨끗한 식탁보에 튀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얼른 냅킨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그녀의 입 안에서 튀어나온 고기 조각을 들고 웃음을 터뜨리며 엄하게 소리쳤다.

"이런, 애비게일 매켄지 양. 교양 없는 행동이군. 지금 당장 이걸 입 안에 도로 집어 넣어요

!"

그리고 그녀의 코앞에 고기 조각을 들이댔다. 너무 당황한 그녀는 얼떨결에 입을 벌렸다.

다시 요란스레 터진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그녀는 그가 자신을 놀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는 화가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접시에 남은 음식을 그에게 부어 버리

고 싶었다.

"당신은 그렇게 교양이 있어서 접시를 두 손으로 잡고 돼지처럼 허겁지겁 먹었나요?"

"이런, 새로운 동물의 출현이군. 내 사전에 돼지를 새로 기입해야겠군. 애비게일 양, 당신이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동물 이름을 내 호칭으로 즐겨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소?"

"제가요?"

놀란 그녀의 음성이었다.

"그렇소."

"그런 적 없어요!"

그녀의 부인에 그가 이름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다.

"염소, 비비, 돼지, 기생충이라고까지……."

그는 조금도 손색없는 식사 매너로 정확하게 포크와 나이프질을 하고 있었다.

"애비, 지금 내 모습이 염소 같소?"

"간 요리는 어때요?"

"오, 그날 밤! 그날 밤엔 당신과 평화롭게 지낼 작정이었는데, 당신이 치명적인 간 요리를

들고 왔었지. 애비, 내가 당신에게 잘 대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건 사실이오. 그런데 당신은

그 치명적인 음식으로 날 거의 미칠 지경으로까지 몰고 갔었지."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웃고 있는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애비, 알고 있소? 당신이 내겐 막강한 적이었다는 걸 말이오. 어떻게 지금은 우리가 서로를

잘 참아내고 있는지 모르겠소. 하긴 내 생각에도 우리의 잦은 다툼은 당연한 것 같소. 취향

이나 성격이 상극을 달리니……."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잔에 샴페인을 채웠다.

"건배합시다."

그는 그녀에게 잔을 건네며 그녀의 팬지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내 생명을 구해 준, 또 그와 맞먹게 내 생명을 위협했던 애비게일 매켄지 양을 위해."

잔이 부딪치면서 그의 검은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스쳤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

다.

"전 술을 못해요."

갑자기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아, 물론 그렇겠지. 당신은 총잡이 악한을 죽이려는 시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까."

그의 손은 잔을 든 채 아직도 허공에 멈춰져 있었다.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그에게

매몰차게 거절을 한 셈이었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식사하는 동안 내내 좋은 분위기

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지신이 망쳐 놓은 셈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잔을 그의 잔에

부딪힌 후 샴페인을 약간 마셨다. 그녀를 위협하는 사악한 액체였으나 생각보다는 아무렇지

않았다. 단지 재채기를 했을 뿐이었다.

"이번엔 당신이 건배를 할 차례요."

그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심한 듯 말했다.

그녀의 눈이 부드러운 불빛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뿜어 내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와의 마지막 만찬만은 즐겁게 보내고 싶다는 그의 의도를 그녀도 알아차린 걸까. 오늘따

라 그녀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애비게일은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샴페인 잔을 바라보고 있었

다.

"좋아요."

그녀는 투명한 금빛 액체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결심했다는 듯이 흔쾌히 말했다. 그리고 잔

을 그의 얼굴 가까이 들어 올린 후 조용한 톤으로 말했다.

"존경받고 있는 내 도덕 관념들을 모조리 훼손시키려고 시도했던 제시 더프레인을 위하여."

잔들이 부딪쳤지만, 이번에는 제시가 마시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약간 찡그려져 있었다.

"무슨 말이오?"

"말했잖아요, 존경받고 있는……."

"애비, 당신이 뭐라고 말했는지는 알고 있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싶다는 얘기요."

제시, 알고 싶다고요? 당신은 늘 그 헤아릴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옭아 맸었죠

. 그러고는 항상 당신이 먼저 그만두었잖아요. 그 이유를 내가 말해야 하나요?

애비게일은 깊은 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를 애비게일 양이라고 부르며 존중해 주는 건 다른 사람이 있을 때뿐이라는 걸 알

고 있어요. 하지만 그리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아니,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당신이 그런 말을 했냐는 거요."

잠시 생각을 하며 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금 홀짝였다. 그는 콧수염 끝을 이로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위험한 신호였다.

"자만심에 찬 뻔뻔한 소리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지닌 채 떠

나는 걸 바라지 않아요."

"당신은 자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나요?"

"아니오. 당신의 도덕 관념에 대해 아까 하려던 말이나 계속해 봐요."

그에게 거짓으로 둘러댈 용기를 갖기 위해 샴페인을 마저 비웠다.

"좋아요."

잔이 벌써 비워져 있는 걸 본 애비게일은 깜짝 놀랐다. 그가 다시 잔을 채워 주었다.

"당신이 저를, 전혀 매력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평범한 간호원으로 여기게 하려고 일부러 애쓴 면도 없지 않아요. 좀 빗나간 얘기군요. 이런

말은 전혀 무익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은 당신의 가치관대로 나를 바꾸려고 했어요.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은 제대로 교육받은 숙녀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래서 그런지 당신은 저와 함께 지내는 동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내내 실수를 범했구요. 당신은 바라는 여인상에 내가 맞지 않으면 왜 그렇게 하지 않냐며 심

하게 화를 냈지요. 더프레인 씨, 당신은 한 번도 저라는 사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요. 제

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부정하고 무너뜨리고 싶어했죠. 그러나 당신은 실패했어요. 저

와 함께 지내면서 오히려 당신의 도덕 관념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죠."

그는 한 쪽 어깨를 기울이고 느긋한 태도로 앉아 있었지만,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팔꿈치를 의자손잡이에 올려놓고 집게손가락으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는 샴페인을 마시고 잔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왜 여학생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거요?"

제시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하며 수염을 쓰다듬던 갈색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살짝 건드

렸다. 몸이 굳어진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순간적인 접촉이었으나 따스하고 자극적인

손길이었다.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매끄럽고 섬세한 턱선을 따라 움직였다. 외면하던 그녀

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만해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선 전혀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순 주위의 것들이 아득하게 보였다.

그의 눈이 그녀의 열린 입술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빨라졌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빨려들어갈 것처럼 푸르렀다.

"좋아요."

그가 부드럽게 말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이유를 묻지 않겠소."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오히려 이상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기우뚱거렸다. 몸

속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정신이 또렷하지가 않았다.

"또 날 바보 취급하시는 거죠, 더프레인 씨? 아니면 이번에는 정말 순수한 의미의 건배라는

말인가요?"

그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에게 술을 먹일 생각은 없었소. 하지만 이 정도의 샴페인에 취할 벌새도 아니

잖소."

그는 램프 불빛을 응시하며 병을 기울여 보았다. 병에는 반정도 샴페인이 남아 있었다.

"이 벌, 벌새는 취한 것 같아요."

그녀는 식탁 위로 몸을 기울이며 머리를 푹 떨구었다.

숙여진 애비게일의 머리를 보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 행동을 생각하면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사실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사소한 말다툼도 없이 지나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현

상이었다. 게다가 애비게일이 술에 취하다니 그는 상상만 해도 재미있었다.

"머리를 바로 세워요.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어요. 자, 높이 올려요. 당신처럼 처음 술을 마

시는 사람들은 특히 몸을 똑바로 세우는 게 취기가 덜 올라오는 방법이오."

그녀를 부축해 뒷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가 말했다.

"자, 애비, 신선한 공기를 마셔요."

그녀가 비틀거렸다.

"애비, 조심해요. 계단이오."

그는 느슨하게 풀려 있는 그녀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그녀도 순순히 그와 허리를 붙

잡았다.

"자, 애비, 걷겠소? 아니면, 이대로 흐느적거리며 침대로 가서 좀 눕고 싶소?"

"흐느적, 흐느적거린다고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그의 부축에서 벗어나 혼자 서려고 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아."

그녀는 몸을 가누려고 애쓰면서 계속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을 불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쉬이!"

그녀를 잡아 끌며 그가 속삭였다.

"하지만 난, 허밍버드, 벌새잖아요, 맞죠?"

그녀는 킥킥거리며 제시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제시, 나 벌새 맞죠? 응? 응?"

그녀는 짓궂게 이마를 그의 뺨에 들이댔다.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는 그녀의

몸을 추스려 올렸다.

"그래요, 맞아. 그만 입다물고 걸으면서 공기나 힘껏 들이마셔요. 알겠소?"

그녀는 주의깊게 걸음을 내밀었지만 여전히 몸은 기우뚱거렸고, 마당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

다. 걷고 걸어서 그들은 정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 동안 그녀는 연신 낄낄거리며 휘청

거려서 그가 단단히 허리를 잡고 지탱해 주어야 했다.

"계속 걸어요."

그가 다시 명령했다.

"젠장, 애비, 고의는 아니었소. 이렇게 적은 양의 샴페인을 마시고 취하는 사람은 처음 봤소

. 날 믿는 거요?"

"내가 당신을 믿든 말든 누가 상관한데요? 당신은 날 믿어요?"

"계속 걸어요."

"날 믿냐고 물었어요!"

그녀의 다그치는 음성이 높게 울렸다.

"오늘 내가 당신과 나에 대해서 말한 걸 믿냐구요!"

그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가 대들 듯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그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

록 힘주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애비, 목소리가 너무 커요. 이웃 사람들이 아직 자지 않고 있을 거요."

"하!"

하늘에다 대고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이 내 이웃들을 걱정해 주다니!"

그녀는 비틀비틀 그의 셔츠를 움켜 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으려고 했다.

"쉬! 당신은 취했소."

"난 지금 말짱해요. 왜 내 물음에 대답을 못하는 거죠?"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히며 전혀 숙녀답지 않은 큰 음성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제시 더프레인은 애비 매켄지를 사랑……."

깜짝 놀란 제시는 얼른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며 말을 막았다. 그리고 바닥에 앉으

려는 그녀를 잡아 올렸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가슴에 눌려 납작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부드

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자 그는 그 키스가 그녀의 말을 막으려고 취한 긴급 조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며 힘껏 매달렸다. 은은한 달빛 아래서 그들은 키스를 되풀이했다. 서로에 대한 적대 감

정이나 경계심은 잊어버린 채 달콤한 혀와 부드러운 수염의 감촉만 느낄 뿐이었다. 그녀의

입은 뜨겁고, 부드러웠고, 샴페인 내음이 났다. 그녀의 장밋빛 무늬 블라우스가 치켜 올라갔

고, 목 속에서는 깊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뜨거운 그녀의 숨결이 뺨에 와 닿았

다. 즉각 그의 몸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가라앉으려는 그녀의 몸을 바로 세우며 그가 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했다.

"애비, 침대로 가요. 내 말 듣고 있소?"

그녀가 꺾이는 다리를 일으켰다.

"혼자 걸을 수 있겠소?"

그의 따스한 손이 불안한 듯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있었다.

"술취하지 않았다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땅에 발을 딛었다.

"그럼 증명해 파요.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가 봐요."

"더프레인 씨, 난 말짱해요."

허풍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리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비척거리며 서늘한 밤공기를

꿀꺽 삼키고는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식탁 옆을 지나가다가 그녀는 목이 마른지 차가워진

커피를 허겁지겁 마셨다.

2층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마냥 뒤죽박죽이었다. 샴페인은 핑계거리

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그가 키스해 주길 바랐다. 아니 더 심하게는, 그에게

키스를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바란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자신이 한 행동이 점점 또렷이 다가왔다. 그녀

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찡그리며 미친 듯이 핑계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 사람과 키스를 했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며 머리 가죽이 아플 만큼 잡아당겼다. 두 눈을 감았다. 신

음 소리를 내며 두 팔로 배를 감싸 안고 몸을 구부렸다. 갑자기 어머니 말씀이 틀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녀는 서른세 살에 미혼 여자였다. 이런 느낌에 대해 어머니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었다. 짧은 접촉이지만, 키스는 달콤한 마술이었다. 리처드와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

만, 이런 좋은 느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데이비드와의 키스가 떠올랐다. 그

러나 그와의 키스도 지금처럼 폭발할 것처럼 그녀를 자극하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항상 어머

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먼저 주춤거리거나 회피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듣던 것과는 달리, 키

스는 몸 속 깊은 곳을 뒤흔들며 강한 파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제시의 몸을 그려 보았다. 모양이나 색깔, 근육 조직들까지도 정확히 기

억해 낼 수 있었다. 근육으로 싸인 강한 어깨선, 길고 강인한 팔, 그의 발과 다리……. 그의

눈은 황혼녘의 어둠을 닮아 있었다. 장난스레 말려 올라가는 그의 수염, 그리고 가슴에서

배까지 덮여 있는 털들. 배 아래로 내려갈수록 털은 점점 좁아져 갔다.

가슴이 아파와서 몸을 뒤척거렸다. 그녀는 부풀어오른 가슴을 감싸며 허벅지와 발목을 꼭 붙

였다. 자꾸만 떠오르는 제시의 나신을 떨쳐 내려고 애를 쓰며 더욱더 몸을 단단히 감쌌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키스를 갈구하듯 벌어졌다. 그녀는 채워

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며 몸을 계속 뒤척였다.

이 다음엔 어떻게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충족감과 공허함,

승낙과 부정, 뜨거움과 차가움, 전율과 달콤함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양

심의 가책이나 도덕 관념 같은 것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 의식보다 몸 속에서

울리는 호소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제시의 말이 옳고 어머니가 틀렸다. 어떻게 어머니는 이런 충동을 나쁘다고만 한 걸까? 그녀

는 어떻게 해야 자신의 커져 가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몸속에서 뭔가가 부족한 듯 콕콕 찔러 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어쩌면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이렇게 말하면 될지도 몰랐다.

"보여 줘요. 내가 완전히 느낄 수 있게 해줘요. 알고 싶어요."

그러나 그녀의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게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