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레모네이드를 컵에 따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문 밖에는
한 마흔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까무잡잡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경쾌해 보이는 코르도반 구두
에서 카우보이 모자까지 나무랄 데 없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그는 깔끔한 손으로 모자를 벗
으며, 손에 들고 있는 짐을 바로 잡았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매켄지 양이신가요?"
"네."
"마을에서 더프레인 씨가 이 집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더프레인이라뇨?"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시 더프레인 말입니다."
그가 정확하게 이름을 댔다.
들어 본 이름이었다.
제시 더프레인? 제시 더프레인?
더프레인, 묘하게도 기차(train : '트레인')라는 단어와 각운脚韻이 같았다. 철도와는 천생
연분인 모양이었다. 그의 범죄 행위가 세상에 밝혀져 실형을 언도받으면 신문에 기사가 재미
있게 나갈 것이다.
제시 더프레인이
타고 있던 기차(트레인)에서…….
제시 더프레인이
타고 있던 기차(트레인)에서……
"애비게일 양, 그 사람 안에 있습니까?"
멍하니 생각에 젖어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오, 미안해요, 미스터?"
"허드슨이오. '로키마운틴 철도 회사'에 있는 제임스 허드슨이오, 짐작하셨겠지만, 우리는
제시 더프레인과 법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이 바로 그녀가 고대하던 때였다. 복수의 순간. 그러나 복수심
은 이미 사그라들어 버렸다.
"허드슨 씨, 들어오세요."
현관문을 열며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당신이 찾는 사람이 제 집에 있는 것 같군요. 그 사람은 당신을 만나는 걸 거부할 수도……
."
그때 침실에서 제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사 선생님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 소리를 들은 허드슨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그녀
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을 가리켰다.
"그는 저 방에 있어요."
제임스 허드슨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대여섯 걸음만에 거실을 가로질렀다.
"제시, 이놈아!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가 들뜬 음성으로 말하며 그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 짐! 반갑다!"
애비는 조용히 문가에 서 있었다. 면도를 하고 있던 제시의 얼굴에서 공포감 따위는 전혀 찾
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곰처럼 서로를 부등켜 안자 그녀의
얼굴은 놀람으로 가득 찼다.
"젠장, 걱정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군!"
더프레인이 소리를 치며 허드슨을 얼싸안았다.
"하,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그나저나 네가 총을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냐? 총알이 빗나가 네 수염을 날려 버리기라도 한 거니? 다시 기르는 중인 것 같구나."
더프레인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것뿐이면 다행이겠다."
"뭐? 다른 데도 다친 거야?"
"오른쪽 다리. 하지만 여기 있는 애비게일 양 덕분에 거의 다 나았어. 기차에서 여기로 옮겨
져서 치료를 받고 있었어."
"매켄지 양, 어떻게 이 고마움을 표시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감사의 말과 함께 제임스 허드슨은 그녀에게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에 싸여져 있었으
나 병 같았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제 마음의 표시입니다."
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런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선물을 받았다. 언뜻 선물의
의미를 알아들은 그녀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더프레인 쪽으로 등을 돌린 후였다.
"제시, 자세히 말 좀 해봐라.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나타나지 않아서 사람들
을 보냈더니 기차에서 임자 잃은 네 사진 장비들만 가지고 오더라. 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
지고 말이야! 그런데 어떤 사람이 스튜어트 역에서 정신을 잃은 강도를 내렸다는 말을 하더
군. 검은 수염에 멀대같이 키가 큰 사람이라는데, 꼭 너 같더라구. 그래도 난 네가 아니라는
데 15달러짜리 내 카우보이 모자를 걸었지."
제시는 온통 거품투성이인 얼굴을 씰룩거리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나 때문에 그 아까운 카우보이 모자를 잃게 생겼구나."
제시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애비게일에게 보냈다.
"어느 정도 다리를 쓸 수 있게 되어서 나 혼자 면도를 하고 있었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날 하루 종일 궁금하게 만들 작정이야?"
"그건 아니야. 하지만 얘기가 좀 길어. 거품이라도 닦아 낸 다음에 얘기해 줄게. 괜찮지?"
"물론. 면도나 빨리 해."
"들어와요, 애비. 문가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짐, 썩고 있는 시체나 다름없던 내 몸을 3주
만에 이렇게까지 회생시켜 놓은 사람이야. 애비가 없었으면 난 까마귀밥이 될 뻔했어. 애비
게일 매켄지 양, 이 사람은 짐 허드슨이오."
"허드슨 씨와는 현관에서 인사를 나누었어요. 허드슨 씨, 편하게 자리에 앉으세요."
그녀가 흔들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그에게 권했다.
"그럼 두 분이서 얘기 나누세요."
"애비, 잠깐만."
제시가 양손에 거울과 면도칼을 든 채 말했다.
"면도를 마칠 때까지 이 빌어먹을 것 좀 들어 줘요."
그의 부드러운 부탁에 그녀는 스스럼없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제임스 허드슨은 문득 단란한 가정을 엿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가 알던 제시와는
너무 딴판이었다. 이곳에 몇 주 머무르는 동안 뭔가가 그를 바뀌게 한 것 같았다.
"제스, 수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싹 밀어 버렸던 것 같은데?"
그가 제시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거울 속에서 제시와 애비게일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수염이 사라지고 없더군.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가능한 한 빨리 수염을
기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이야. 애비도 콧수염을 기른 내 모습이 낫다고 하더군."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제임스 허드슨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제
시의 즐거워하는 눈동자와 다시 마주쳤다. 그는 평소와 달리 다른 사람 앞에서는 깎듯이 그
녀를 존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잘못을 덮어 주고 전부 자기잘못으로 돌렸다. 지금
도 그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애비게일은 고마움 반 의아함 반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앉아 면도를 하면서도 제시는 계속 제임스와 얘기를 나누었다.
"제스, 손은 왜 그런 거야?"
"그때 기차 안에서 지렛대에 다쳤어."
"이제 기다리는데 지쳤어. 어떻게 됐는지 빨리 얘기해 봐."
"얘기할 것도 별로 없어. 멍청한 실수였어. 너도 알고 있듯이, 락웰행 기차를 타고 있었는데
……."
제시가 기차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몸을 숙이고 침대 위에 널려 있는
면도 용품들을 챙겼다. 그녀가 일어서려 할 때 제시가 부축하듯 무심코 손을 그녀의 허리에
살짝 대었다가 놓았다. 제임스 허드슨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으
로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허드슨은 간신히 놀라움을 참아냈다. 매켄지 양은
전혀 제시의 타입이 아니었다. 현관에서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인정한 사실이었다. 허드슨
은 방을 나서는 그녀를 궁금한 눈초리로 관찰했다.
제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특별히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애비게일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댄 부분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남자가 그녀를
만진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이건 전에 제시 더프레인이 그녀에게 했던 접촉
과는 다른 것이었다. 놀릴 때도, 부드럽게 속삭일 때도, 화를 낼 때도 항상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접촉은 달랐다. 부모님이 이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스스럼없는 그의 손길로 인해 그녀의 맥박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
다.
부엌에서 레모네이드를 만드는 동안 내내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제시 더프레인이 내 등을 만졌어. 그것도 자신의 친구 앞에서.
방안에서 제임스 허드슨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제시, 우린 이 일을 빨리 수습하려고 헉헉대고 있었는데 널 보니 별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 같군."
고개를 흔들며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당연히 사람들도 네가 열차 강도라고는 믿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했을 뿐이야.
단순한 사고인데, 멜처라는 친구는 좀 고약하군. 불구로 살게 됐다고, 요구하는 대로 보상액
이 관철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고 하더군."
"얼마나 요구할 거 같아?"
"내일 알게 될 거야. 바로 이 마을에서 내일 정오에 회합을 갖기로 했어. 될 수 있는 대로
내일 마무리를 지을 작정이야. 아마 멜처도 올 거야. 그리고 내가 회사 대표로 왔으니 넌 참
석하지 않아도 돼. 아마 멜처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올 거야. 가능한한 회사 이미지를 실추시
키지 않도록 처리할 생각이야, 괜찮지?"
"그래,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난 거위알을 품듯 꼼짝못하고 지금도 여기에 누워 있는데,
그 새우 같은 녀석은 이틀 만에 일어나 걸어 다녔어. 그런데 그자가 손가락질하며 회사를
욕하고 다닌다는 말이야?"
"중요한 건 너도 관련되어 있다는 거야. 법률적인 문제는 나한테 맡겨. 사람들은 멜처의 보
상금보다 널 더 걱정하고 있어. 단순한 사고라는 게 밝혀지면 그 사람도 생각을 바꾸겠지.
그건 그렇고, 넌 어때? 다리는 다 나은 거야?"
"응, 그런 거 같아. 도허티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사건이 있던 날, 수
술을 해주셨거든 그 후론 애비가 날 살렸어."
"너와 멜처를 돌봐 준 대가를 우리가 그녀에게 지불해 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니?"
"응, 알고 있어. 짐?"
목소리를 낮추며 그가 제임스를 불렀다. 애비게일은 그들의 목소리가 대화도중에 갑자기 작
아졌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넉넉하게 받을 수 있게 손 좀 써줘. 난 그리 얌전한 환자는 아니었거든. 거의 망나
니나 다름없었지."
부엌에 있던 애비게일은 한바탕 울리는 웃음소리를 들었으나, 그들의 대화에 귀기울이지는
않았다.
"저 숙녀가 네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거야?"
제임스 허드슨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짐, 어디 내 마음을 흔들어 놓지 않은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냐?"
"하지만 제스, 저 숙녀분은 네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얼굴에 익살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나한텐 색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이 끔찍했던
것만은 아니었어. 그녀는 날 열차 강도, 치뢰배, 거짓말쟁이, 불량배 따위로 취급하며 최대
한 순화시키려고 하더군. 꾹 참았어. 난 그녀가 만들어 준 요리를 좋아하거든. 멀건 수프,
얄팍한 계란, 그리고 치명적인 간 요리까지도 말이야."
그 기억들이 떠오르자 제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널 회피 대상 1호로 정한 것 같이 들리는군. 제시와 KS표 숙녀라. 아마 네가 그 동
안 갈망해 오던 여자인지도 모르지."
"제임스 스마트 보이 허드슨! 내가 갈망하는 것은 최대한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 열차로 돌아
가는 것뿐이야. 의사를 만나면 언제쯤 목발 없이 다녀도 되는지 물어 보려고 했었어, 네가
들어올 때 의사 선생님인 줄 알았다고. 내가 얼마나 목발을 익숙하게 사용하는지 보러 오실
거야. 하지만 난 벌써 목발 도사가 됐다구."
"제시, 너무 서두르지마. 나도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의사선생님을 한번 만나 뵈야겠어. 널
급하게 꿰매 준 의사한테도 사례를 하길 바라고 있겠지?"
"그래, 외상으로 달아 왔는데, 네가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대신 좀 갚아 줘라."
허드슨이 빙그레 웃었다.
"락웰에 있는 사람이 네 사진 장비들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던데?"
"짐, 모두 무사한 거야?"
"응, 하나도 빠짐 없이. 그곳 지부 창고에 보관해 왔어."
"뭐? 그 멍청이들이 그걸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구? 빨리 거기서 꺼내야 돼. 그쪽
으로 갈 일 없어?"
"응, 내일 모임 뒤에 다시 덴버로 돌아가야 돼. 광산타운이 있은 지역의 시장이란 시장들이
모두 광석을 운반할 철로를 건설하라고 심하게 재촉하는 거 너도 알잖아. 그들 요구대로 빨
리 설치할 수는 없지만, 서둘러야 할 거 같아."
"그래, 네 판단을 믿어. 이렇게 빈둥거리는 것도 이제 정말 지겨워. 일을 하고 싶어. 의사가
다 완쾌되었다고 하자마자 회사로 달려갈게. 젠장, 그나저나 내 사진 장비들이 걱정되는군.
"스토커한테 보급 기차로 가지고 오라고 할까?"
"오, 안 돼, 스토커로부터 날 구해 줘!"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은 금속과 나무는 구분할 수 있겠지만, 산기슭을 지날 때마다 내 소중한 장비들이
엔진 위를 굴러다니게 할 거야. 우선은 그대로 놔두어야겠군. 그래, 좋은 생각이 있어. 지금
난 몸이 아픈 게 아니고 불편한 정도니까, 잘하면 내일 너랑 같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봐, 진정하라구. 넌 가만히 있어. 난 아직 의사 선생님도 만나지 못했다고. 게다가 이 역
에도 무슨 민원들이 들어와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 돼.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떠나기 전에 다
시 들르도록 할게."
허드슨이 돌아갈 차비를 차리고 있을 때 애비게일이 문가에 나타났다.
"허드슨 씨, 괜찮으시다면 떠나기 전에 레모네이드를 대접하고 싶은데요."
"아니, 괜찮습니다, 매켄지 양. 벌써 폐를 많이 끼 쳤는데요. 그나저나 두 사람을 간호한 보
수로 얼마를 드려야 될까요?"
몇 번이나 제시에게 간호 비용을 언급했지만, 갑자기 구체적인 액수를 말하라고 하니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제시는 제임스의 물음에 그녀가 당혹해 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간
호 행위를 돈으로 계산하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다른 면에서도 그랬지만, 숙녀와 얘기할 때
돈 문제를 직접 거론한다는 것은 민감한 일이었다.
"짐, 합당한 금액을 드려."
"더프레인, 복구된 네 피부가 얼마나 나갈 것 같아?"
그들 사이에 공모의 눈길이 오고 갔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애비의 레모네이드는 한잔에 족히 1,000달러 정도는 될
것 같군."
"그렇다면 떠나기 전에 기필코 그 레모네이드를 마셔 봐야겠군요."
허드슨이 미소를 지으며 애비게일을 바라보았다.
"그럼,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올게요."
그녀는 그들의 놀림에 불편한 듯 서둘러 말했다.
"허드슨 씨, 어디서 마시겠습니까?"
"베란다가 어떨까요? 같이 마시겠습니까?"
왜 자신은 대답하기 전에 먼저 제시를 바라보는 걸까? 마치 베란다에서 다른 남자와 레모네
이드를 마시는 것을 그에게 허락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그렇게 해요, 애비, 당신도 좀 쉬어요."
빨갛게 물든 그녀의 뺨을 보며 제시가 말했다.
"짐, 이 녀석아, 정말 와 줘서 고맙다."
허드슨이 침대로 다가가 제시와 악수를 하며 다시 얼싸안았다.
"빨리 네 뼈다귀를 추려서 베란다로 나가기나 해. 더 이상 숙녀분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
말이야. 이건 명령이야!"
"그래, 이 더위에 레모네이드가 다 증발해 버리겠다."
애비게일과 제임스가 방을 나섰다.
"짐, 너 현관에서 예의 바르게 처신했겠지? 애비게일 양은 최고의 숙녀라구."
해질녘의 베란다에는 서늘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허드슨은 짙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2인용 그네의자를 그녀에게 권한 후 끈적한 햇빛의 기운이 남아 있는 버드나무 의자에 앉았
다. 게다가 그녀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서서 기다려 주었다. 무척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제 눈엔, 제시가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너무 심한 상처를 입어서 살 가능성도 그다지 많지 않았어요. 지금은 많이 회복된 상
태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그렇게 제시를 경계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매켄지 양,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제시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알 겁니다. 당신은 충분한
보상을 받으실 거예요. 저 녀석 성격에 얌전히 집 안에 갇혀 있는 게 신통할 정돕니다. 직장
에서는 그가 제일 원기왕성한 사람이었거든요."
"허드슨 씨, 그가 어디서 일하고 있나요?"
"물론, 철도입니다."
"철도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말인가요?"
"네, 능력 있는 놈이지요."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았다.
결국 사실이었구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그녀는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허드슨 씨가 그런 말을 하시니 믿을 도리밖에 없군요. 당신은 믿을 만한 분인 것 같거든요.
그의 흠잡을 데 없는 매너와 품위, 그리고 제시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
다.
"남자들은 각자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내죠. 제시도 그렇구요. 제시 더프레인
은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입니다. RMR에선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죠."
"그럼 그도 그렇다는 건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를 믿고 존경……."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그가 보았을 것이다.
"매켄지 양, 꼭 반박하는 어투 같군요. 약간이나마 그의 장점을 파악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 의외군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제시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 건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
지 않군요. 매켄지 양 스스로 찾아야 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녀석이 찍은 사진을 한 번 보
면 쉽게 그를 알 수가 있을 텐데. 특히 암갈색 사진을 보면……. 그의 감정까지도 알게 될
겁니다."
우습게도 그녀는 그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알았습니다, 허드슨 씨, 그의 사진을 볼 기회가 생기면 유념할게요."
그는 진짜 사진사인 모양이다! 그녀의 관자놀이가 떨려 왔다.
"제시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는 손가락으로 빈 잔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이 레모네이드는 1,000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어요. 더군다나 오늘처럼 무더운 날엔 말이죠.
"맛이 괜찮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그가 여기에 있는 동안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세요."
"무척 자상하시네요."
"그래도 당신의 우아함과는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당신 옆에 있으니 제가 자꾸 초라해지는
기분이에요. 매켄지 양, 오늘 즐거웠습니다. 제 친구를 잘 부탁드립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제임스 허드슨은 갑
자기 그녀 앞에 나타나 제시가 '강도'가 아니라고 변호했다. 먼지가 이른 길을 걸어가는 그
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었다.
제시 캐머런, 제시 더프레인.
또다시 묘한 각운의 일치가 떠올랐다.
제시 더프레인이
타고 있던 기차(트레인)에서…….
무한정 현관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언제까지나 제시를 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하지? 불안과 걱정이 앞서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맥박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
려왔다. 수도 없이 그를 열차 강도라고 모욕하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했으나 한없이 비참해지는 자신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동안 그는 멍청한 자신을 보며 몇 번
이나 웃었을까?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우산꽂이 위에 있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로 가던 손
이 멈췄다. 거울 앞에 네모난 종이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주저하며 종이를 집어들었
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불자란에 '로키마운틴 철도, 덴버, 콜로라도'라고 씌어 있는 수표였다. 그녀 이름 앞으로
지불된 금액은 1,000달러나 되었다!
위가 바짝 조여들고 손이 덜덜 떨렸다. 제시가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더욱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워졌다.
1,000달러! 루이스 컬페퍼 씨 식당에서 2년 동안이나 벌어야 하는 액수였다. 철도 회사에서
제시 더프레인이 무사한 대가로 이렇게 많은 돈을 선뜻 지불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린 채 수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은
이 돈의 4분의 1도 안 되는 것이었다. 제시와 허드슨 씨가 나누던 농담이 기억났다.
애비의 레모네이드는 한 잔에 족히 1,000달러 정도는 될 것 같군.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목 안에 덩어리가 걸려 있는 기분이었다.
"애비, 짐은 갔소?"
그가 불렀다.
"네, 갔어요. 미스터……."
이젠 뭐라고 불러야 하나? 새 이름으로도, 예전 이름으로도 부를 수가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거울 속에,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수표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눈
동자에는 혼란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있은 더프레인 씨였다. 믿
음직한 친구와 동료들의 존경도 받고 있는. 게다가 철도 회사에서 그녀에게 이렇듯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보니, 직장 내에서 그가 꽤나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하지?
지금까지 열차 강도 취급을 하며 캐머런 씨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려니 당혹스러
웠다. 그를 아예 범죄자로 단정지으며 비난까지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는 어제 자신이 범
죄자임을 이용해 그녀가 묻어 두었던 사적인 얘기까지 하게 만들었다. 리처드에 대해서도.
그는 그녀를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땅 속으로 푹 꺼지고 싶었다. 그와 권총을 가지고 실랑이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를
자극하며 괴롭히던 키스도. 그의 말이 맞는 걸까? 자신은 그가 외설스러운 열차 강도라는 생
각때문에 경계심을 푼 걸까?
그런데 그는 열차 강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가 있는 방으로 다가가는 애비게일의 심장 고동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꽃무늬
쿠션이 놓여 있는 창문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파스텔들의 노랑과 초록색으로 장식된 방안
분위기가 데님 바지를 입은 거무스름한 그의 모습을 더욱 남성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제임스 허드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
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옆모습을 보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가 맨 가슴을 긁으며 커튼을 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슴 위에
놓여 있는 그의 긴 손가락으로 향했다. 결국 그녀는 인기척을 내기로 했다 헛기침을 했다.
그는 깜짝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여기에 앉아서는 안 되겠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에요. 많이 회복되었잖아요.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시원할 테니 그냥 앉아 있으세요.
그가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들어와요. 이젠 내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그러나 말과 달리 그의 음성에는 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그가 강도라고 믿고 있을 때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다시 찾아와주길 바랐다.
그러면 그에게서 느끼는 이 마력 같은 매력이 감해질 것 같았다.
"아직도 마찬가지예요."
그녀가 장난스레 시인했으나 그는 웃지 않았다.
"왜 절 불렀나요,라고 말하려고 했어요. 지금 보니 좀 바보같은 말인 것 같군요."
둘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진지한 분위기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애비, 나도 레모네이드를 한 잔 마시고 싶소. 한 잔 부탁해도 되겠소?"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보수까지 이미 받은 마당에 말예요."
그녀를 훑고 있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레모네이드를 따르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리
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마음속으로 외쳐 보았다. 제임스 허드슨이 다녀간 이후부터 그녀는 제대
로 그를 탐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레모네이드를 받아 마셨다. 그리고
팔꿈치를 무릎 위에 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말없이 서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우선."
그녀가 초조하게 말을 꺼냈다.
"먼저 명백하게 해두고 싶은 게 있어요. 전에 부엌에서는 일부러 당신을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금 이 말은, 당신이 철도 회사에서 일하든 말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내가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어주니 기쁘군. 물론 당신을 믿소. 애비, 당신
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잖소?"
그의 시선이 깊숙이 와 닿았다.
"당신은 어떤데요?"
"앉아요, 애비. 젠장, 내가 말 좀 할 수 있게 저기 흔들의자에라도 좀 앉아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편안한 모습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미 내가 사실대로 말했잖소. 당신에게 거짓말한 적은 없었소."
"제임스 허드슨 씨가 당신이 말한 친구인가요? 스무 살 때 당신을 따라 뉴올리언즈를 떠났다
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내다보았다.
"좋은 사람 같더군요."
그녀는 레모네이드 잔을 내려다보며 조용한 어조로 덧붙였다.
"무척 부자이기도 하구요."
그가 개암빛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00달러를 그대로 받을 수는 없어요. 너무 많아요."
"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드슨 씨 혼자서 결정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럴까?"
발뺌을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거론할 문제가 아니라는 듯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녀는, 입 안 가득 레모네이드를 마신 후 손가락으로 검은 콧수염을 닦아 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군가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간호를 받고 있는 제시 더프레인입니다."
그는 잔을 들어올리며 놀리듯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뭘 묻고 있는지 알잖아요."
"알고 있소."
그는 고개를 숙여 레모네이드 잔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줬으면 좋겠소. 내가 갑자기 무고한 사람이 되
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는 거요?"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은 무고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야 하겠죠."
그는 계속 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을 흔드니 잔 속에서 액체가 소용돌이쳤다.
"난 굳이 그러고 싶지 않소. 그러니 이대로 날 내버려 둬요."
그가 도전하듯 눈을 들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제임스 허드슨 씨 밑에서 일하고 있나요?"
그는 오랫동안 유리잔 테두리를 바라보다가 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마셨다.
"그렇소."
"그런데 왜 철도 회사측에서 당신을 위해 비용을 대는 거죠?"
"내 사진을 좋아하나 보지."
"그런 것 같군요. 당신이 허락하면 저도 한 번 보고 싶어요. 당신 사진은 분명히 특이할 거
예요."
"전혀. 있는 그대로 찍을 뿐이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실적으로 철도 인생을 담는다는 거
겠지."
"전에 한 말과 다르군요."
그는 미소를 짓더니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음, 그건, 내가 좀 거짓말을 보탠 거요. 사진을 보게 되면 당신 스스로 판단해 봐요."
"볼 수 있는 거예요?"
"대답하기가 곤란하군. 짐과 같이 내일 몇 가지 해결할 일이 있소."
그는 팔짱 긴 팔을 창문틀에 올려놓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 일을 마치면 이 마을을 떠날 거요."
안 돼, 아직은 안 돼!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그러나 그녀는 금새 자신이 그 동안 얼마나 그가 떠나길 바랐는지를
기억해 냈다.
"나중에 이곳에 들를 일이 있으면 사진을 보여 주겠소. 약속하겠소."
슬프게도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할 정도로 완쾌됐다고 생각하세요?"
그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길 바라는 줄 알았는데……."
"네, 바라고 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요."
그녀의 표정을 훑어보며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애비,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이젠 거동도 하잖소?"
"하지만 너무 많은 돈을 받은 걸요."
그녀가 우겨댔다. 제시는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정하게 흔들의자에 앉아 두 손
으로 잔을 든 채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계속 강도로 오인했다면 떠나
는데 훨씬 수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돈을 지불한 건 철도 회사측이오. 짐도 아니고, 나도 아니오."
그녀에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도 알아요. 단지 너무 많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내 목숨이 어느 정도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는 그녀가 대답을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방안을 한 번 훑어보다가 다시 그가 들고 있는 잔을 바라보았다.
"레모네이드보다는 더 가치가 있겠지요. 오,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했다. 그녀는 무릎을 내려다보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
고 있었다.
"내 생명을 구하려고 한 일들을 가치로 따진다면 얼마일 것 같소? 난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해요. 처음에는 인사 불성이었으니, 당신이 말해 준 몇 가지밖에
……."
그의 시선이 침대로 향했다가 다시 창 밖으로 옮겨졌다.
빌어먹을, 그녀는 체면도 집어던지고 그를 간호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는 창문을 통해 늦은 여름날의 오후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바깥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
았다. 갑자기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젠장, 애비, 그 동안 미안했소."
애비게일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꿀
꺽 숨을 들이마셨다. 금새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도, 미안해요, 더, 더프레인 씨."
드디어 그의 진짜 이름을 말했다.
제시는 창틀에 팔을 올려놓은 채 그대로 얼굴만 돌아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그의 어깨에 가
려졌다. 이윽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시, 내 이름은 제시요."
그는 한 번이라도 그녀가 제시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었다. 그가 열차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
을 알게 된 그녀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듣고 싶었다.
그의 말에 그녀는 또 장난을 걸어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농담기를 찾을 수
가 없었다. 침묵 속에서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둘 사이에 제시라는 이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 그녀는 제시라 답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긴장감으로 인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팔 주위를 떠돌다 입술이 있음직한 자리에 머물렀다. 팔 너머로 검은 수염이 힐
끗 보였다. 허드슨은 금방 그 수염이 깎인 줄 알아차렸었다. 그는 그 수염이 보기와 달리 부
드럽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몇 분이 흘렀을까. 그녀는 다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계속 관찰하고 있었다. 친구를
따라 나가고 싶은 건지, 빨리 예전의 거친 철도 인생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그는 허드
슨이 사라진 거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묵이 점점 길어지고 무거워졌다. 드디어 그가 창문에서 팔을 내려놓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애비, 이 방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소. 정말 예쁜 숙녀 방이오. 당신도 침실을 다시
찾게 되어서 기쁘겠소."
"위층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공허하게 그녀의 음성이 울렸다.
"여기보다는 밤에 더웠을 거요. 그 동안본의 아니게 당신을 이 방에서 쫓아낸 셈이 되었소.
미안하오."
그의 시선이 벽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작은 액자로 쏠렸다. 그는 액자 하나를 들어 올리며 물
었다.
"부모님들이오?"
"네."
검은 그의 손가락이 액자 테두리를 문지르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했다.
"당신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군."
"사람들이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는데 행동하는 건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방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목을 가다듬듯 헛기침을 하며 액자를 한두 번 던졌다 받았다
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자 그의 발 밑에서 바닥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듣는, 감정이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애비, 내가 했던 당신 어머니에 대한 말은 잊어 줘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러니까, 난 당신 어머니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 거요."
애비게일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친숙한 손이 그걸 들고 있었다. 덩어리가 목에 걸린 듯 목
이 메어 왔다.
"네, 알지 못하지요.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당신이 더 어머니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아요."
그는 천천히 무릎에서 팔꿈치를 들어 올리며 놀란 눈을 들었다. 그녀에게 다가올 것처럼 그
의 근육이 조여졌다. 그녀의 숨이 멈춰졌다. 그러나 그는 갈등을 겪다가 다시 우유부단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전부 보고 있었다. 그는 종종 그녀를 놀려대
며 친숙하게 애비라고 부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감정이 섞인 거친 음성이었다.
"애비?"
목에 걸린 딱딱한 덩어리가 울컥 솟아올라올 것 같았다. 애비게일 양이라고 정정해 줘야 했
다. 그에게 애비게일 양이라고 꼬박꼬박 정정해 주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 대화
를 나누었던 때가 마치 몇 년 전처럼 느껴졌다. 그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
르며, 대답하지 않는 그녀에게 곤혹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상처 입
은 표정을 보이지 말라고 그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애비?"
그가 다시 전보다 부드럽게 불렀다. 그 음성이 그녀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전율이 일었다.
"더프레인 씨, 적어도 두 끼는 더 제 집에서 대접해야겠군요. 그런데 집 안에는 고기 비슷한
것도 없어요. 정육점이 문 닫기 전에 서둘러 다녀와야겠어요. 뭘 사 올까요?"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가에 장난기가 서리고 있었다. 옛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자상하게 내 취향을 묻기 시작한 거요?"
"버터밀크 때부터요."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는 가볍게 웃고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빳빳한 하이
칼라와 단단히 틀어올린 머리를 찬찬히 뜯어보며, 그녀가 예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도
그의 핸섬한 얼굴과 드러난 맨 가슴을 즐기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 버터밀크."
그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람 다 그 버터밀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어요?"
그녀의 매혹적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그가 웃었다. 시선이 잠시 그녀의 가슴으로 내
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당신 선택에 맡기겠소."
의외의 대답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좋아요."
그녀가 대꾸했다. 그리고 예의 고상한 숙녀의 전형적인 몸짓으로 일어서는데, 이상하게 오랫
동안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무릎이 꺾였다. 그녀는 자로 잰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
러나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제시의 눈가에 떠오르는 미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우산꽂이 앞에 서서 거울을 보며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었다. 흰 장갑에 묻어 있던
개울가의 흔적들은 이미 깨끗이 세탁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