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빌스펜서] 너 하나만을 위한 사랑-12화 (12/24)

12

다음날 아침, 본스 빈레이는 싱글거리며 애비게일의 집 앞에와 섰다. 그는 기둥에 걸린, 할

로윈 호박처럼 생긴 전등을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커다란 머리에 성긴 이, 툭 튀어나온 목젖

이 본스의 특징이었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양. 좋은, 좋은 아침이에요. 음, 어제 기차편으로 온 소포가 있어서

요. 배달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맥스가 아침에 저한테 부탁했어요."

"고맙습니다, 빈레이 씨."

그녀는 대답하며 소포가 들어갈 만큼만 현관문을 열었다. 담배 한 가치 태울 시간이라도 안

에 들어가 있으려 했던 빈레이는 실망했다. 안에 들어가서 열차 강도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스런 내색을 하지 않고 현관 창을 통해 웃음을 보냈다.

"빈레이 씨, 소포를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에게 깍듯이 존칭을 써서 빈레이 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당연한 일인데요, 뭐."

이젠 그만 가 달라고 현관문을 잠그는 시늉을 해야 할지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 그는 황송하

다는 듯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을 걸었다. 성가신 파리 같았다.

해마다 독립기념일 축제에서 본스는 애비게일의 크림 케이크와 닭튀김을 샀다. 그는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지붕을 고치러왔을 때도 그녀는 정중하게 케이크와 커피를 대접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들어오라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온 마을을 들끓게 만들었던 열차 강

도는 그녀의 집 안에 있는데 말이다.

"강도 친구는 얼마나 쾌유되었나요?"

낡은 모자를 들어 올리고 이마를 긁적이며 그가 물었다.

"빈레이 씨, 저는 의학 지식이 전혀 없어서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 소식을

듣고 싶다면 도허티 선생님께 여쭤 보세요."

그가 계속 진드기처럼 붙으려 하자 그녀가 경고했다.

"빈레이 씨, 용무가 끝나셨으면 제 현관에서 발을 떼어 주시면 좋겠군요!"

이런, 세상에!

본스는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걸까? 거만하다고 했던 마을 사람들 말

이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본스는 거리에 나와서야 입 안에 있는 침을 뱉었다. 자신을 박대했어도 그녀가 사는

주변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어느 남자도 애비게일 양에게 한 점이라도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열차강도든 아니든!

소포에는 덴버에서 찍은 소인과, 콜로라도주 스튜어트 정크션이라는 그녀의 주소와 이름 외

에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필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네모나게 각진 모양이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녀가 소포로 받은 것은 부모님 사진이 든 액자와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

지를 위해 주문한 환자용 변기뿐이었다. 이것이 세 번째 소포였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히

지 않아 더욱 궁금했다.

가만히 흔들어 보니 마른 빵조각 같은 소리가 났다. 그녀는 저 아래 거리로 내려가는 본스를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베란다로 나와 그네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조심스레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포장지를 벗겨 내니 종이로 만든 딱딱한 상자가 나

왔다. 오래 된 책에서 나는 듯한 시큼한 종이 냄새가 났다. 그녀는 무릎에다 상자를 놓고 손

으로 뚜껑을 쓰다듬었다. 그네를 흔들며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상자를 보았다. 조금이라도

이 두근거리는 순간을 오래 끌고 싶었다. 결국 뚜껑을 열어 본 그녀는 숨을 멈췄다.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다정하게 서로를 마주보는, 아름다운구두 한 켤레였다. 이렇게 예쁜 신

발은 처음이었다. 상자 안에 메모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구두에도 메모에도 손을 뻗

치지 않았다. 그 대신 입술에 손을 대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데이비드 멜처의

굳은 얼굴이 생각났다.

그녀는 결국 한 손에 메모를 다른 손에는 구두를 들었다.

오, 세상에! 빨간색이야! 빨간색! 빨간 구두를 신고 어떻게 외출하지?

가죽이 꽃잎처럼 부드러웠다. 너무나 나긋나긋해 사람의 무게를 도저히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주홍빛 구두는 세련되고 가느다란 굽이 달린 반부츠 모양으로, 발목 부근에 레이스

장식이 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감촉을 보니 최고급 사슴 가죽 같았다.

데이비드, 오, 데이비드, 고마워요.

구두를 들어 살며시 뺨에 댔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주홍빛 구두를 처음 보았

다. 이런 시골 마을에선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이런, 침실에서 몰래 볼걸.

그녀는 구두를 상자에 내려놓고 메모를 펼쳤다.

친애하는 애비게일 양,

덴버에 도착하자마자 제 마음대로-아니, 영광스럽게도-제가 일하는 가게에서 최신 유행하는

고급 구두를 골라 보냅니다. 당신의 높은 심미안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한련화로 장식된 우아

한 집에서 이 구두를 신은 당신의 모습을 그려 보니 흐뭇해지는군요. 그때의 제 경솔한 행동

을 아직도 후회합니다. 자상한 마음으로 저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감사를 보내며

데이비드 멜처

1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사랑을 해보았으나, 남자에게 버림받아 크게 상심했던

기억이었다. 지금까지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감정이다. 그런데 눈앞에 멜처의 모습이 포개지

며 그때의 가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리처드가 떠

난 뒤, 그녀가 오랫동안 찾아온 신사다운 사람이 바로 멜처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었다.

"돌아와요. 용서하겠어요. 여기서 다시 시작해요."

그러나 구두 상자만이 말없이 그녀의 애절한 속삭임을 듣고있었다. 구두 상자에는 가게 이름

이나 상표도 씌어 있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아는 것이

라곤 그가 필라델피아 이야기를 했다는 것과 덴버의 소인뿐이었다. 필라델피아와 덴버, 모두

큰 도시였다. 그렇게 큰 도시에는 구두 가게도 판매원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가 일정한

숙소라도 있으면 찾기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처를 자주 옮긴다고 했

다. 그러면서 엘리션 클럽에서 묵는다고 했다.

그래, 엘리션 클럽! 필라델피아!

그는 아직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맥박이 빨라졌다. 그와 연락할 방법이 생긴 것이다. 편지

를 보내면 그는 그녀를 보기 위해 다시 스튜어트 정크션을 방문할 것이다.

"애비? 바깥에서 뭘 하는 거요?"

방금 깬 듯 헝클어진 머리에 맨발, 맨가슴의 그가 문가에 나타났다.

활기 찬 음성으로 그녀가 대답했다.

"오, 캐머런 씨, 저한테 뭐가 왔는지 보세요."

그녀는 서둘러 구두를 챙겨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테이블에 상자를 올리고 조심스레

포장을 열었다.

절룩거리며 제시가 다가왔다.

"어디에다 주문한 거요?"

그가 놀란 표정으로 화려한 주홍색 구두를 보며 물었다. 도저히 그녀가 고른 것 같지 않았다

"제가 주문한 게 아니에요. 데이비드 멜처의 선물이에요."

갑자기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신발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멜처? 오, 이런, 그래서 갑자기 정중하게 캐머런씨라고 불렀소? 이 구두 때문에!

애비게일 매켄지 양, 참으로 기쁘시겠습니다."

"내가 참는 게 낫겠군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구두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떤 남자도 이런 선물을 고르지 못할 거예요."

제시는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빨간 구두의 가죽과 레이스장식, 밑바닥, 앞꿈치를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거의 신주 단지를 만지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돼지 방광이 필요할 때마다 그 신발을 신고 정육점에 가면되겠군."

그가 놀리며 말했다.

"아니면 총잡이 강도를 잡아가라고 전보를 치러 갈 때 신어도 되겠군."

너무나 행복에 겨운 그녀는 그가 비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 이 구두는 신고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아요. 구두가 너무…… 너무 좋고 우아해서 이처럼

작은 마을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빈정거리며 올라갔던 그의 두터운 검은 눈썹이 내려갔다. 그녀는 정말 저 빨간 구두가 마음

에 드는 것 같았다. 가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가공 솜씨가 얼마나 섬세한지 설명하는 그녀

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제시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다. 그녀의 파란

눈이 아침 햇살처럼 밝게 빛났고 웃음 짓는 입술은 생기를 띠었다. 그녀의 손에서 빨간 구

두를 빼앗고 싶었다.

아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상 꼼꼼히 올려져 있던 그녀의 머리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게다가 어두운 색깔의 낡은 셔츠를 입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그리고 허리에는

행주가 삼각형으로 묶여 있었다. 설거지를 하다만 식모 그대로였다. 그는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가 곤혹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행주의 매듭을 보았다.

"아참!"

명랑한 그녀의 외침이었다.

"당신이 일어나지 않아 깨울까 망설이던 참이었어요."

그녀는 상자 뚜껑을 털썩 닫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키가 훨씬 커 보

였다.

"아니, 목발 없이 걷는군요!"

기뻐하는 외침이었다.

어머나, 키가 무척 크네!

이런, 그는 바지만 입은 채였다. 그는 셔츠도 없이 맨발로 서있었다.

"하지만 도허티 선생님께서 얼마 동안은 목발을 사용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를 나무라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러나 그건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라 털에

덮인 그의 맨가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구두에만 신경을 쓰던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자, 언짢았던 그의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배고파 죽겠군. 몇 시나 되었소?"

슬쩍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단단하고 편편한 배를 문질렀다.

"정오가 다 되었어요. 너무 늦잠을 잤어요."

그는 그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보고 싶소?"

그는 못마땅한 듯 구두 상자가 있는 거실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

에 매달린 행주가 의기 양양하게 펄럭거렸다.

"시간이 없어요. 이걸 다 빨아야 해요."

"오, 그래서 식모처럼 차려 입었나 보군. 그 놀라운 변화가 흥미롭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차림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접었던 소매를 내리며 드러난 팔뚝을 가렸

다.

내가 데이비드 멜처였다면 소매를 내렸을까?

그 생각이 더욱 그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허드렛일은 마술처럼 간단히 끝나지 않는 법이죠."

그녀는 다시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리고 허리에 묶었던 행주를 풀어서 주위에 튄 물을 닦아

냈다. 세탁 일은 끝난 것 같았다. 서둘러 점심 준비를 하는 그녀를 보니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는 하얀 리넨 천과 침대보, 행주, 블라우스, 스커트 등이 말끔이 빨아져 널려 있었다.

겉옷뿐이었다. 속옷은 어디에 널었을까 궁금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널려 있는 빨래들을 자세

히 살펴보니 눈에 띄지 않게 커다란 빨래 안쪽에 속옷들이 걸려있었다. 그는 소화가 안 될

정도로 꽉 죄는 코르셋을 입은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코르셋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일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봐요, 선생님, 벗고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요!"

신랄하게 톡 쏘는 그녀의 말이 던져졌다. 이상하게도 벌새 같은 그녀의 기질이 되돌아와 있

었다.

"벗었다고!"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옷을 입었잖소!"

"셔츠는 어디 있어요!"

"젠장, 방에 있소!"

"캐머런 씨, 당신의 저속한 습관을 하룻밤 사이에 없앨 수는 없겠지만, 같이 사는 사람 생각

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좋소, 좋아. 그런데 왜 갑자기 날 물어뜯지 못해서 안달이오?"

"그런 적 없어요. 난 단지……."

그녀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몇 분 전만 해도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멜처가 보낸 구두를 부여잡고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눈꼬리를 올리지 않았어요!"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주먹이 허리에 놓여 있었다.

"흠!"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듯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두려 댔다.

"그 늙은 멜처가 저런…… 저런 겉만 번지르르한 물건을 보내 당신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

군!"

구두 상자를 손으로 가리키는 그의 얼굴에 경멸이 보였다.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제는 경계심을 버리고 감정대로 행동하라고 했잖아요. 당신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렇게 하

는데 왜 비방만 하는 거예요?"

그들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하지만 빨간색이잖소."

"뭐라구요?"

날카로운 그녀의 반문이었다.

"빨간색이라고 말했소. 빌어먹을 빨간 구두잖소!"

그가 으르렁거렸다.

"그래요. 그게 어때서요?"

"그러니까…… 빨간 구두란 말이오. 그뿐이오."

제시는 공연히 식품저장실 문을 기웃거리며 자신이 들어도 말도 되지 않는 대답을 했다. 멍

청이 같았다.

"대체 어떤 여자가 빨간 구두를 신는단 말이오?"

그가 투덜거렸다.

"내가 이 구두를 신겠다고 말했나요?"

"말할 필요도 없소. 이미 당신 얼굴에 다 씌어 있으니까."

그녀가 문을 가리켰다.

"제가 격식에 맞는 차림을 하는 동안, 당신은 야만인처럼 벗은 몸으로 바깥에 나가 산책 좀

하시지요? 내가 빨간 구두를 신을 거라고 용감하게 외쳐댄 당신 대담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요!"

"애비게일 양,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소. 셔츠와 신발도 없이 날 바깥으로 내모는 당

신은 이상할 게 없지만, 그 꼴같지도 않은 구두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치켜 올릴 때는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더군!"

"당신도 그렇게 노발대발하는 건, 구두가 빨갛기 때문이 아니라, 데이비드 멜처 때문 아닌가

요!"

"데이비드 멜처라고!"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소리 쳤다. 그의 외침에 저장실로 걸어가던 애비게일의 귀가 멍

멍할 지경이었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시오!"

그는 경찰견처럼 코를 들썩이며 그녀의 뒤를 바싹 따라가서 말했다.

"만약 내가 지금 질투심 때문에……."

그녀가 갑자기 몸을 돌려 그의 맨발을 밟아 버렸다.

"윽!"

그의 비명 소리에도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제대로 옷과 신발을 신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달그락거리며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젠장, 일부러 내 발을 밟은 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고소하다는 그녀의 음성이었다.

그는 아픈 듯 발가락을 정강이에 비볐다.

"흠! 이번엔 모두 벗고 알몸으로 나갈 거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가 홱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겠다고요? 정말 용감하시군요.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알몸으로 내

마당을 걸어다니며 내 속옷들을 입을 벌리고 멍하니 바라볼 작정인가요!"

천천히 그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콧수염 한 쪽이 들려 올려지고 뒤이어 쿡쿡거리는 그

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웃음은 점점 더 커지며 그가 의자에 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봐요. 당장…… 그만 해요. 입 다물어요! 마을 사람 모두 듣겠어요."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바로 애비게일 양의 방식대로 우아하게 그의 앞에 있는 의자

에 앉았다. 그녀는 계속 낄낄거리는 그를 피곤한 듯 바라보며, 숟가락으로 으깬 감자를 자신

의 접시에 덜었다. 그리고 으깬 감자 요리를 그에게 밀며 퉁명스레 말했다.

"드세요!"

그는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접시에 음식을 덜었다. 그녀는 식탁 아래로 그의 아픈 다리를 걷

어차고 싶었다. 드디어 그가 웃음을 그치고,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거의 눕다시피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며 요란한 소리로 속삭였다.

"이렇게 속삭이는 게 더 낫소? 하긴 이러면 이웃이 듣지 못할거요."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그의 콧수염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하하, 애비, 내가 코르셋을 찾는 줄 어떻게 알았소? 얼마나 꽉 죌 수 있는지 보고 싶군."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으나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스커트

를 잡았다.

"놔 줘요!"

그녀가 스커트를 내리쳤지만 그는 더욱 단단히 쥐고 그녀를 자신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끌

어당겼다.

"애비, 몇 겹이나 입은 거요?"

그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려고 잡아당기며 장난스레 물었다.

애비게일은 기겁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으나, 그는 단단한 밧줄처럼 그녀의 몸에

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여유롭게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

다.

"비켜요!"

그녀가 매섭게 소리 치며 한 손으론 그의 어깨를 밀치고 한손으론 스커트를 잡았다. 그러나

그의 심술궂은 웃음소리와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 왔다.

"애비, 페티코트를 안 입은 거요? 자자, 한번 봅시다."

그는 몸부림을 치며 달아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생포하듯 그녀를 들었다. 그는

발버둥치며 그를 때리는 그녀의 공격을 능숙하게 피했다.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당신 미쳤군요!"

그녀는 허리를 잡은 그의 손을 할퀴며 소리 쳤다.

"자, 애비, 앙탈은 그만 해요."

그가 다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아까보다 더욱 단단히.

"놔요! 날 놔 줘요!"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게 만들었다.

그가 두 다리 사이로 그녀를 더욱 끌어당기니 그녀의 한 쪽 어깨가 단단한 그의 가슴에 닿았

다. 한 번 그녀가 그를 뿌리치며 달아날 뻔했으나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젠장, 싸우는 게 꼭 벌새 같군."

그는 위험했다는 듯 깊이 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녀를 놓쳤을 것이다. 그의

강인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무릎으로는 그녀를 잡아당겼다.

"윽!"

애비게일이 몸을 버티다가 그의 다친 다리를 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잘됐군요!"

그녀가 말을 내뱉었다.

"더 다치기 전에 손을 치워요! 이 단추 좀 가만히 놔 둬요!"

그는 등뒤에서 그녀를 꽉 안고 있었다. 한 손은 허리에 감고 한 손은 그녀의 목에 있는 단추

를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버둥을 막으며 간신히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풀었다. 하나만 더

열면 숨겨진 그녀의 가슴이 살짝 보일 것이다.

"이리 와요, 애비, 다치게 하지 않겠소."

블라우스를 두고 그녀와 다시 한바탕 접전을 일으켰다.

"난 최대한 당신을 다치게 할 거예요!"

마치 모기가 코뿔소를 위협하는 것과 같았다.

"경고했어요!"

격렬한 그녀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몸부림을 치는 그녀의 팔다리를 최대한 잡아 움직이지 못

하게 하고 팔로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죄었다.

"음, 이 낡은 셔츠를 입은 당신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 주고 싶군."

다시 간신히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당신은 지저분한 기생충이에요. 법원에서 당신을…… 교수형에 처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교수형을 당한다면……."

그가 웅얼거리며 그녀의 등에 입을 대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달콤한 추억이라도…… 갖게 해줘요."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애비, 내가 당신을 안을 수 있게 몸을 돌려요."

콧수염이 그녀의 입술을 급습하려고 급강하했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전에 그녀가 그의 관자

놀이 옆 머리카락을 한움큼 잡아당겼다.

"아야!"

그러나 그녀가 비명 소리를 무시하고 더욱 세게 잡아당기자 그가 그녀를 놓아 주었다. 갑자

기 그가 손을 늦추자 그녀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 바로 앞에

는 그의 배꼽이 닿을 듯 있었다.

"음……."

그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팔꿈치가 그의 은밀한 부분에 있는 상처를 건드린 것이었

다. 마치 그녀가 의자에 앉혀 놓고 고문이라도 한 듯이, 갑자기 그가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며

몸을 굳혔다. 두 팔은 양 옆으로 펼쳐졌다.

애비게일은 그의 허벅지를 잡고 몸을 일으키며 단추를 잠갔다. 그 동안 그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벌어진 입으로 혀가 들여다보였다. 그는 힘겹게 숨을 쉬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진 맥진해서 관자놀이 부분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는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그를 보았다.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킬지도 몰랐다. 그가 손을

내리고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방 안엔 침묵이 깔렸고 그는 팔을 식탁에다 올려놓고 음식

이 아직 남은 접시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도 조용히 의자에 앉아 포크를 들고 말없이 접시를

보고만 있었다. 먹는 시늉까지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

다.

그는 왜 자기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았다. 그녀가 그렇게 밝게 웃는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그래서 멜처와 빨간 구두에 질투심과 함께 심술까지 일었던 것이다.

"애비, 내 생각으로는……."

"네?"

그녀가 접시를 반쯤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가 문을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더 심한 상처를 받기 전에 여기를 나가는 편이 좋겠소."

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접시 위에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상처를 건드린 것이

미안했다.

"네, 저도 그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그녀가 순순히 동의했다.

"미안하지만 침실에서 목발 좀 가져다 주겠소?"

정중하게 그가 부탁했다.

"네, 물론요."

그녀도 같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목발을 가지고 왔다. 애비게일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그가

먼저 해야 했다. 그녀는 아무말 없이 그에게 목발을 건네 주었다.

"고맙소."

그는 목발을 짚고 침실로 들어갔다. 한숨 소리 같은 침대 스프링 소리가 들렸다.

애비게일은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딱히 문을 보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

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꽃무늬 블라우스를 벗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침대에 앉았

다.

아,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두 남자가 뛰어든 뒤로 그녀의 인생은 뒤엉키기만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제시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더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자상하고 따스한 면도 있었다. 어제처럼.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얘기를 남에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를 믿고 가장 말하기 힘들었던 부

분을 털어놓았다. 왜 그는 데이비드같지 않을까? 데이비드가 훨씬 그녀와 비슷했다. 데이비

드는 그녀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신사였다. 그는 그녀와 계단에서 부드러운 키스를 나누었지

만 제시처럼 더 심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땅히 거부해야 할 감촉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는 걸 어떻게 할 수 없었

다. 왜 음침하고 불길한 느낌에 대항하지 못하고 점점 더 제시의 함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

까?

부모님이 함께 지내시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한 번도 부모님이 키스나 포옹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교양이 있는 부부는 항상 서로에게 예의 바른 태도를 취

하는 줄만 알았다.

뜨거운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머니는 모든 남자가 짐승이라고 말씀하셨다. 언젠가 리처

드가 마구간에서 껴안으려 했을때 따귀를 때렸던 기억이 났다. 조금 전에 의자에서 제시와

실랑이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지난밤에 침대에서 그가 혀로 자신의 가슴과 배를 핥았던 기

억도. 마치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날 밤도 오늘도 공포감을

느낀 건 사실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죄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상처를 건드려서 아프게 한 건 사과를 해야

했다. 레모네이드를 만들어야겠다.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동안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테

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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